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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시간을 거슬러: Chapter 301 - Chapter 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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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1화

“저를 왜 잡는 겁니까?”연기준의 시선은 그녀의 입술에 머물렀다. 탕후루의 설탕이 달라붙어 반짝이는 붉은 입술. 그것이 한 번 열리고 닫힐 때마다 그에게는 차라리 한 입 베어 물고 싶은 충동이 이는 듯했다. 한숨을 길게 토해내며 연기준은 가슴속 뛰어오르는 심장을 억눌렀다.“제가의 일에 네가 몰래 관여한 건 본왕이 추궁하지 않겠다. 그러나 어찌하여 굳이 드러내어 온 세상 사람들이 알게 하는 것이냐? 돈을 벌다 못해 미쳤단 말이냐!”서인경은 퉤하고 산사나무 씨앗 하나를 내뱉었다.“왕야께서 드러내놓고 단가를 감싸줄 수 있는데 저라고 어찌 명정하게 제가를 지켜주지 못하겠습니까? 잊지 마세요. 지난번 제 백부의 가르침이 없었다면 제가 어떻게 설련삼을 얻어 왕야의 목숨을 건질 수 있었겠습니까? 그는 분명 왕야의 목숨을 구한 은인이십니다!”연기준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네 말은 흑수암에 가라 일러준 것이 제혁이었다는 것이냐?”서인경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네. 아니었으면 제가 그런 은밀한 곳을 어찌 알았겠습니까?”연기준의 얼굴빛은 더욱 어두워졌다.“앞으로는 제가와 거리를 두거라. 네가 돈을 버는 것은 본왕이 막지 않겠다. 매달 연풍에게 분성을 받아오게 할 테니 그 외의 교류는 삼가거라.”서인경은 그의 손을 확 끊어내며 냉소했다.“어찌 간섭이 그리 많은 것입니까! 만약 왕야께서 정말 단가를 위해 울분을 토하고 싶다면 형부로 가서 그 독살범들을 모두 풀어주세요. 그러면 온 세상이 알겠죠. 상왕이란 자는 사사로이 단가를 감싸며 법도를 짓밟는 자라고!”연기준의 얼굴은 분노로 창백해졌다.“본왕은 너를 위해 한 말이다! 지나치게 드러내는 건 좋은 일이 아니야!”서인경은 그를 비웃듯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뒤돌아섰다.“왕야의 관심, 감사합니다. 하나 저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제 자유를 구속하려 한다면 그만두십시오.”모퉁이에 숨어 있던 평이는 두 사람의 말싸움을 듣고 잔뜩 떨고 있었다.서인경이 안으로 들어가자 그녀는 급히 따라붙었다.“왕비 마마, 노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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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2화

평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막 은전을 받으려는 순간, 서인경은 불현듯 손을 거두었다.“명심하거라. 이 일은 절대로 연풍에게 알려서는 아니 된다.”평이는 주인의 뜻을 다 알 수는 없었지만 마음 깊이 전적으로 서인경을 지지했다. 그녀는 고개를 몇 번이고 끄덕이며 얘기했다.“노비는 입이 무겁사옵니다.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겠사옵니다.”그 약속을 듣고서야 서인경은 안심하고 은전을 그녀 손에 쥐여주었다.“아끼려 들지 말거라. 뚫어야 할 길은 다 뚫어야 한다. 그리고 역참에서 절대로 눈을 떼지 말고. 돈이 모자라면 또 내게 청하거라.”그 말에 평이는 자신만만한 빛을 띠었다.“충분하옵니다! 노비는 같은 고향의 거지 우두머리까지 꾀어 두었사옵니다. 그들은 돈조차 바라지 않고 그저 먹을 것과 입을 것만 있으면 족하다 하옵니다. 놈들이 돌아가며 지켜보니 눈 하나 깜박이지 않을 것이옵니다.”서인경은 또다시 은표 한 장을 꺼내 그녀에게 건네며 당부했다.“그렇다면 더더욱 아껴 쓰지 말아야지. 밤에는 추우니 두꺼운 옷을 사 주거라. 앞으로 그 아이들의 도움이 필요한 곳이 많을 테니.”평이는 고개를 숙이며 은전을 끌어안고 나갔다.그날 밤, 경성의 불빛은 별처럼 찬란히 반짝였다. 야시장의 번화는 야랑국에서 보기 힘든 광경이었다.예정임은 어려서부터 사치와 향락 속에서 자란 자였다. 그에게 황량한 역참에서 하룻밤 묵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해가 저물 무렵, 그는 화류 골목으로 들어가더니 밤이 깊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역참에 머물지 않은 이는 또 있었다. 태자 예정훈이었다.그는 경성에서 가장 높은 주루 창가에 앉아 천가만호의 불빛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초봄의 바람은 아직 매서워 뼛속까지 스며드는 듯 차가웠다. 한 노신이 다가와 두툼한 비단 도포를 그의 어깨에 걸어 주었다.“태자 전하, 안으로 드시옵소서. 창가의 바람은 매섭사옵니다.”예정훈은 도포를 여미며 고개를 저어 보였다.“무방하다. 이 속세의 불빛은 예전 모비께서 가장 사랑하시던 것이었다. 이번에 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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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3화

“들여보내거라. 문밖은 단단히 지키고. 그 누구도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거라.”시위가 명을 받들고 물러났다.잠시 후, 검은 망토로 얼굴을 반쯤 가린 여인이 홀로 들어섰다.서인경은 방 안으로 다가가며 손수 모자를 젖혀 얼굴을 드러냈다. 낮에 성문 앞에서는 고의로 몸을 낮추고 고개조차 들지 않았다. 이렇게 두 번째로 마주한 자리에서야 비로소 그녀는 예정훈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눈이 서로 마주치자, 그가 연기준보다 훨씬 연장자임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연기준은 늘 결벽에 가까워 얼굴은 언제나 매끈히 다듬어져 있었다. 갑옷을 벗은 순간에는 오히려 흰 얼굴이 서생 같은 인상을 풍기곤 했다. 하지만 눈앞의 사내는 옅게 드리운 검은 수염이 있어 오히려 성숙한 사내의 거칠고도 묘한 매력을 더하고 있었다.그러나 같은 점도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상위자만이 지닌 위압감과 하늘 아래 모든 것을 내려다보는 듯한 강한 기운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인경은 알 수 없는 익숙함을 예정훈에게서 느낄 수 있었다. 어쩌면 어린 시절 조부와 부친을 따라 오랜 세월 군영에서 지낸 탓일 것이다. 그리고 결국 시집간 사내 역시 나라의 병권을 틀어쥔 상왕이 아니었던가. 들리는 말로는 이 야랑국 태자 또한 어려서부터 병사를 이끌고 전장을 누빈 걸출한 장수라 했다. 사나운 모래바람 속에서 전장의 혼을 짊어지고 돌아온 자들의 기질과 습성이 닮은 것도 이상할 일은 아니었다.예정훈은 뜻밖에도 여인이 방 안에 들어서자마자 똑바로 자신을 응시하는 것을 보았다. 비록 그녀보다 열다섯 살이나 위였으나 그 눈빛 앞에서는 잠시 당황을 금치 못했다. 그는 가볍게 기침을 하며 먼저 입을 열었다.“감히 묻겠습니다. 상왕비께서 이처럼 심야에 찾아온 까닭은 무엇입니까?”서인경은 순간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돌려 시선을 감추며 민망스러움을 덮었다.“아… 그게… 태자께서 뜻이 있으시다면 저와 손을 잡고 함께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그걸 여쭙고자 왔습니다.”예정훈은 뜻밖이라는 듯 눈을 가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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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4화

“그대는 제 모비의 지난 일들에 대해서 꽤나 잘 아시는군요.”예정훈의 어조가 돌연 싸늘해지자 서인경은 의문이 들었다.설마, 모자 사이가 원만치 않은 것인가? 그렇다면 자신이 잘못 짚은 걸까? 하지만 그녀가 들어 알고 있던 정보로는 분명 그렇지 않았는데.“상왕비께서 야랑국의 정세를 아신다면 예정임이 살아 있는 한 본태자는 결코 무사히 황좌에 오를 수 없다는 것도 알았을 터. 황위라 함은 설령 예정임이 포기하더라도 그 뒤에 있는 단 황후와 단가가 결코 허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상왕비께서 사정을 모른 채 허황된 말을 하는 것이라면 그건 그저... 어린아이 장난 같아 보이는군요.”그 말끝에는 짙은 불신과 조롱이 가득했다. 서인경은 조급해하지 않고 담담히 그를 응시했다.“태자께서 하시고 싶은 말은 제가 여인이라 머리카락은 길어도 견식은 짧다. 뭐 그런 말 아닙니까?”조금 전의 장난이라는 표현은 그가 순간 망설이다 갑자기 말을 바꾼 것이었다. 서인경의 돌직구 같은 반문은 오히려 예정훈을 당황하게 했다.“이미 제 뜻을 알아차렸다면 상왕비께서는 그만 돌아가시지요. 본태자는 상왕에게 그대가 왔었다는 말은 전하지 않겠습니다.”뜻밖에도 상왕을 두둔하는 말투에 서인경은 순간 멍해졌다.예정훈은 일부러 잠시 멈춘 뒤 말을 돌렸다.“하나, 감히 한밤중에 찾아올 용기를 낸 점을 감안해 사내로서 한 가지 충고를 하겠습니다. 국사를 어설프게 주무르려 하여 상왕의 환심을 사려는 짓은 삼가는 게 좋을 것입니다. 사내란 여인이 쓸데없이 간섭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으니 말입니다.”서인경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녀는 눈을 크게 뜨며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서인경은 자신을 가리키며 되물었다.“지금… 제가 이런 일을 하는 게, 상왕의 환심을 사려는 거라고 생각하십니까?”예정훈은 그게 아니면 무엇이냐라는 눈빛으로 응수했다.서인경이 벌떡 일어나자 의자가 삐걱이며 불쾌한 소리를 냈다. 예정훈도 무심코 몸을 뒤로 젖혔다. 그녀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한 치의 두려움도 없는 목소리로 쏘아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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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5화

서인경의 시선이 곁에 서 있는 노신을 스쳐 지나갔다.“홍복, 너는 문밖을 지키거라.”방금 두 사람의 기세라면 자칫하면 정말로 싸움이 붙을 수도 있을 것 같아 두려웠던 그는 잠시 머뭇거렸다.“하나…”예정훈은 짧게 잘라 말했다.“걱정 말고 나가 있거라.”홍복은 고개를 숙이고 물러나며 문을 닫았다. 그러자 예정훈의 시선이 다시 서인경에게 향했다.“이제 말해도 됩니다.”서인경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며칠 전, 제 사람들이 서가 군영 밖에서 야랑국 선황후의 화권을 주워왔습니다.”그 말에 예정훈의 얼굴빛이 순식간에 변하며 동공이 좁혀졌다.“어디에서요?”서인경은 그의 반응이 마음에 드는 듯 의도적으로 반복했다.“서가 군영 밖에서요.”예정훈은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그의 얼굴은 진위를 저울질하듯 복잡하게 움직였다.서인경은 이 자리에 오기 전, 이미 많은 생각을 거듭했었다. 그 화권이 황제가 가장 아끼는 물건이라면 반드시 궁궐을 자유롭게 드나드는 자만이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만약 지금의 황후나 팔황자의 사람들이라면 죽은 원수의 초상을 보존할 이유가 없었다. 그들은 손에 넣자마자 갈기갈기 찢어버렸을 것이다. 그런데 그 화권은 서가 군영 밖에서 온전한 상태로 발견되었다.그렇다면 가능성은 단 하나. 그 그림을 훔친 자는 화권 속의 인물과 깊은 정을 나눈 자라는 것. 그러나 지금 예정훈의 반응을 보아하니 그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눈치였다. 그렇다면 그 그림을 밖에 흘린 이는 아마 그가 아닐 것이다.예정훈은 오래도록 침묵했다. 비록 애써 침착한 척했지만 서인경의 예리한 눈은 그의 미세한 떨림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분명 그 화권 때문에 긴장하고 있었다.“이것이 상왕비께서 말한 협력의 성의란 말입니까?”애써 대수롭지 않은 듯 내뱉는 어조였다.서인경은 굳이 허점을 찌르지 않았다.“저는 그 화권으로 태자를 협박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 그림이 어찌하여 서가 군영에 나타났는지 밝혀낸다면 반드시 태자께 돌려드릴 것입니다. 다만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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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6화

서인경이 왕부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깊은 밤이었다. 그녀는 발소리를 죽이며 뜰로 들어섰다. 낭하에 매달린 두 개의 등불만이 희미하게 빛날 뿐 사방은 칠흑처럼 어두웠다.게다가 평이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예전 같으면 아무리 늦게 돌아와도 평이는 늘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여기는 상왕부이니 무슨 일이 생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서인경의 마음속에는 의아함이 피어올랐다.그녀는 방 문을 밀어 열고 들어섰다. 탁자 위에 놓인 화절자를 더듬어 찾아내고 성냥불을 켜 촛불을 밝혔다. 순간, 방 안은 환히 밝아졌다. 그제야 그녀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몸을 돌리자마자 어둠 속에서 한 그림자가 불쑥 다가왔다.숨이 멎는 듯한 놀라움에 그녀의 몸은 순간적으로 뒤로 젖혀졌다. 쓰러지기 직전 허리를 단단히 감아 붙잡는 팔이 그녀를 끌어안았다.“이 밤중에 어디 갔다 온 것이냐?”서인경은 뒤로 쓰러지지 않고 가까스로 버텼다. 그녀의 두 손은 본능적으로 연기준의의 옷자락을 꽉 움켜쥐었다.“왕야께서는 방 안에서 뭘 하고 있었기에 등불도 켜지 않은 것입니까?”연기준은 그녀를 풀어주고 다시 침상에 앉았다.“아직 본왕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이 깊은 밤중에 어디를 다녀온 것이냐?”서인경은 순간 눈을 굴리며 대답했다.“그저… 장군댁에 다녀왔을 뿐입니다.”그는 짧은 웃음을 흘렸다.“흥, 장군댁에 다녀오는 데 본왕의 눈을 피할 이유가 있느냐?”서인경은 태연히 혀를 차며 옷장을 열어 가벼운 홑옷을 꺼냈다. 그녀는 곧장 병풍 뒤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으며 입을 열었다.“제가 도망치려는 것도 아닌데 왜 지켜보는 겁니까? 게다가 지금은 제가 직접 서 가 군영에서 사람들을 데려다 곁에 붙여두었으니 앞으로 제 안위는 왕야께서 염려하실 필요 없습니다.”연기준은 태연히 찻잔을 들어 올려 한 모금 삼키고 미소만 머금었다. 두 사람은 저마다의 꿍꿍이를 안은 채 각자의 생각에 잠겨 있었다. 서인경은 그의 침묵을 무시해 버리며 자신이 얼버무린 답변이 잘 넘어갔다고 여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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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7화

침장 너머 아직 침상 위의 광경을 보기도 전에 평이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왕비 마마… 기침 드시렵니까?”서인경은 침상에 힘없이 누워 온몸이 녹아내린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 순간, 그녀는 비로소 당현종이 읊었던 구절 ‘춘소는 짧고 해는 높이 떠, 그 뒤로 황제는 더 이상 조정에 나아가지 않았다’는 심정을 뼈저리게 이해했다. 이 강도로 밀려든다면 누가 감당할 수 있겠는가!“지금이 몇 시냐?”평이는 손가락을 꼽아보며 대답했다.“미시이옵니다.”서인경의 머리는 아직 제대로 돌지 않았다.“그냥 말하거라. 지금이 밥 먹는 때냐?”평이는 재빨리 대답했다.“방금 점심 먹은 지 한 시진 정도 되었사옵니다.”서인경은 얼굴을 이불 속에 파묻었다.“왕비 마마, 아침에 누가 전갈을 가져왔사옵니다. 정오에 춘풍루 천자호에서 뵙고 싶다는 전갈이었사옵니다.”서인경은 애써 머리를 굴려 시각을 계산하느라 고생하다가 한참 만에야 정오가 이미 지나버렸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원망했다.“넌 어째서 날 깨우지 않았느냐?”평이는 다시 얼굴이 발그레해져 목소리를 낮췄다.“왕야께서 떠나실 때, 아무도 왕비 마마를 방해하지 말라 하셨사옵니다.”서인경은 그 말에 다시금 마음속으로 욕지거리를 퍼부었다.결국 일어나 단장을 마쳤을 때는 이미 또 반 시진이 흘러 있었다.서인경이 동경 앞에 앉아 머리를 빗는 동안 평이는 손에 연기준이 갈기갈기 찢어버린 잠옷을 들고 있었다.“왕비 마마, 이 옷… 다시 쓰시렵니까?”서인경은 그 조각을 힐끔 보며 마음이 복잡해졌다. 자신에게는 그저 평범한 옷일 뿐이었는데 연기준의 눈에는 어찌 그리 흥분제처럼 작용했는지.“필요 없다. 다시 도안을 그려주마. 그때 네가 새로 만들거라.”이번에는 반드시 온몸을 빈틈없이 가리는 잠옷과 잠옷 바지를 지어 입으리라 그녀는 단단히 마음먹었다. 평이는 그 말에 오히려 입술을 꾹 다물고 몰래 웃음을 흘렸다. 그러자 서인경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왜 웃는 것이냐?”평이는 붉은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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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8화

춘풍루 꼭대기, 천자호라 불리는 객실.예정훈은 이른 새벽부터 이곳에 와 아침을 들었다. 그러나 식사를 마치고도 말 한마디 하지 않은 채 창가에 앉아 성문 밖으로 번화한 경성의 거리를 묵묵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렇게만 두 주전자나 되는 차를 비워냈다.곁에서 모시는 홍복은 의아하기도 하고 또한 은근한 불안에 사로잡혔다. 그는 알았다. 어젯밤 상왕비를 만나고 돌아온 뒤로 자신의 태자가 어딘가 달라졌음을.그는 차를 새로 따르며 조심스레 몸을 기울였다.“태자 전하, 무슨 심사가 있으신 것이옵니까?”예정훈은 잠시 침묵하더니 묘한 빛이 서린 눈길을 홍복에게 던졌다.“홍복, 그대는 내 모비 곁에서부터 모셔온 사람이기도 하고 또 내가 가장 믿는 자이기도 하다. 만약 그대마저 내게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면 내가 무사히 돌아갈 수 있다는 보장은 없겠지.”그 말에 홍복은 기겁하여 즉시 무릎을 꿇었다.“태자! 노복은 하늘에 맹세코 태자와 선황후를 향한 충심에 털끝만큼도 숨기는 것이 없사옵니다! 노복 일가의 목숨은 선황후께서 친히 구해주신 바, 감히 배반할 리 있겠사옵니까? 만약 그런 짓을 한다면 벼락이 쳐서 온 집안이 멸절하기를 원하옵니다!”“그만, 과중한 말은 하지 말거라.”예정훈은 손을 뻗어 그를 부축하며 고개를 저었다.“그 말이면 충분하다. 미안하구나. 사방이 함정인 듯한 지금, 내가 경계심을 늦출 수가 없어서 그리한 것이다.”홍복은 고개를 저으며 떨리는 음성으로 답했다.“태자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 노복은 탓할 수 없사옵니다. 다만, 분명 무슨 일이 있으신 듯한데... 만약 태자께서 노복을 믿으신다면 함께 의논해 주시옵소서.”예정훈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마침내 시선을 홍복에게 고정했다.“그대는 모비를 오래 모셨지. 혹시 모비와 진국 서 씨 집안 사이에 어떤 인연이 있었는지 아는가?”홍복은 깊게 주름진 이마를 매만지며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다 불현듯 눈빛이 번쩍였다.“노복, 생각났사옵니다. 진국의 대장군 서회윤이 일찍이 우리 야랑국에 와서 삼 년 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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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9화

서인경은 그저 시도 삼아 와 본 것뿐이었는데 뜻밖에도 그가 아직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태연하게 자리에 앉아 깨끗한 잔을 집어 스스로 차를 따라 마셨다.“실로 송구합니다. 사정이 생겨 태자를 오래 기다리게 했습니다. 오늘 여기에서의 모든 비용은 제가 전부 치르지요.”예정훈의 시선이 무심히 흘러가다 서인경의 드러난 쇄골 언저리에 남은 붉은 흔적에 멈추었다. 그의 눈꺼풀은 저절로 한번 내려앉았다.“상왕비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본태자도 사양치 않겠습니다. 점소이!”우렁찬 부름에 곧장 방문이 열리며 대기하던 점소이가 활기차게 들어왔다.“객관, 무엇을 원하시옵니까?”예정훈이 태연히 명했다.“너희 집에서 가장 값비싼 차 한 주전자, 그리고 가장 값비싼 다과 열 접시를 내오거라. 다과는 한 접시만 여기 두고 나머지는 싸 들고 가게 하고. 또 저녁상도 준비하거라. 제일 값비싼 요리를 죄다 올리도록.”서인경은 순간 눈을 부릅떴다.“먹고 싸 가는 것까지 이렇게 대놓고 뜯어가다니! 지나치지 않습니까?”예정훈은 손을 휘저으며 점소이를 내보내고는 문이 닫히자마자 서인경을 향해 장난스레 비웃었다.“상왕과 상왕비의 밤일이 그리도 무성하다 들었습니다. 즐기느라 본태자를 소홀히 했으니 이쯤의 보상쯤은 당연하지 않겠습니까?”서인경은 말문이 막혔다. 그녀는 기침을 두어 차례 억지로 하며 태연한 척 옷깃을 여몄다.“그렇다면 태자 마음대로 하시지요.”예정훈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다가 도성의 풍문이 떠올랐다. 상왕비가 수년 동안 상왕을 뒤쫓아 애를 태우고 혼인 후에도 온갖 아양과 애정 공세를 퍼부었다는 소문. 그 장면을 떠올리자 지금 눈앞에서 의연한 체하는 태도의 가식성이 더욱 두드러져 보였다. 예정훈은 다시금 스스로에게 물었다.이런 여인과 손을 잡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서인경은 그의 속마음을 짐작하지 못한 채 곧장 화제를 돌렸다.“어제 말씀드린 일, 사람들에게 물어보셨습니까? 누구 손에 모비의 화권이 들어갔는지 단서라도 나왔느냐 말입니다.”예정훈은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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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0화

서인경은 그날 오후 내내 서회윤의 침실과 서재를 샅샅이 뒤졌다.그러나 결과는? 아무 소득 없음.이 집안에 이제 홀로 남은 노장이 평생을 바친 것은 오직 병법과 조정의 문서들뿐이었다. 침실은 소박하다 못해 쓸쓸했고 서재는 사람의 온기라곤 한 점도 없는 차디찬 공간이었다. 그녀는 구석구석을 다 헤집었으나 유용한 것은 단 한 가지도 찾지 못했다. 남은 것은 그저 외로운 노인의 삶이 드러내는 황량함뿐.뒤질수록 가슴은 점점 저려 왔고 결국 자신이 손녀로서 한없이 부족했다는 사실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만약 자신이 곁을 지켜드렸더라면 그의 늙은 날이 이토록 삭막하지는 않았을 텐데. 마땅히 안식해야 할 세월에조차 그는 나라의 근심을 어깨에 짊어지고 곁을 지켜줄 이 하나 없이 홀로 외로움 속에 살아가고 있었다.이번에 막북에서 돌아온다면 그녀는 다시는 그를 내보내지 않을 것이다. 조정에는 인재가 차고 넘치는데 어찌 칠십이 넘은 노인을 여전히 전장에 내몰 수 있단 말인가! 분노와 슬픔이 뒤섞인 채 허무함 속에서 오후를 마치고 서인경은 맥 빠진 걸음으로 왕부로 돌아왔다. 그런데 막 문 앞에 다다르자 사색이 된 얼굴의 한 호위가 급히 뛰쳐나왔다.“왕비 마마, 큰일 났사옵니다! 평이가 사라졌사옵니다!”서인경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무슨 일이냐!”호위가 숨을 몰아쉬며 보고했다.“풍 호위께서 평이의 안전을 지키라 명하셨기에 소인은 평이가 약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문 앞에서 지키고 있었사옵니다. 하나, 한참이 지나도록 나오지 않아 안을 살펴보니 이미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사옵니다.”서인경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어느 약방이냐?”“바로 옆 거리에 있는 회춘당이옵니다.”서인경은 더 듣지도 않고 그대로 치맛자락을 걷어 올리며 달렸다. 평이의 실종 소식은 삽시간에 왕부 안에 퍼졌다. 연기준과 연풍은 아직 궁궐에 있었지만 육승과 안포는 즉시 사람들을 이끌고 회춘당을 포위했다. 약방 주인은 갑작스레 몰려든 인파에 혼비백산하여 허둥지둥 계산대에서 나왔다.“이, 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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