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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1 Chapters

제401화

대황자 연강헌은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단여월은 그의 태도를 가늠하지 못해 속이 조급했으나 이 기회를 그냥 흘려보낼 수 없다는 생각에 조심스럽게 그의 옷자락을 살며시 잡아당겼다. “대황자, 신첩은 정말 한 마음으로 대황자만을 위합니다. 지난번 그 약은 신첩이 놓은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 모함하여 누명을 씌운 것이니 부디 신첩을 믿어 주십시오.”연강헌은 고개를 숙여 그녀의 가느다란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며칠 보지 못한 사이, 살이 한결 빠진 듯했다.“진정 잘못을 깨달은 것이냐?”단여월의 눈에 한줄기 희망이 스쳤다. 그녀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간절히 매달렸다.“대황자는 신첩의 하늘이십니다. 신첩이 어찌 감히 해를 끼치겠습니까? 이후로는 더욱 정성을 다하여 대황자를 도울 것입니다.”연강헌의 입가에 요사스러운 웃음이 스쳤다.“좋다. 내게 충실히 한다면 본황자는 결코 너를 홀대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 다시 한번이라도 잘못을 저지르면 내 손으로 직접 그 목을 베어버리지”단여월은 눈물겹도록 고개를 저으며 다급히 맹세했다.“다시는 없을 것입니다. 신첩은 오직 성심으로만 대황자를 모실 것입니다.”연강헌은 흡족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손가락을 들어 그녀의 옅은 옷깃을 헤집어 눈부시게 흰 살결을 드러냈다.“벗거라. 내 앞에서 춤 한 곡 춰 보거라.”단여월은 그가 머물러 주기만 한다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었다. 그녀는 주저하지 않고 그가 시키는 대로 따랐다.그날 밤, 방 안에는 끝내 숨길 수 없는 울음 섞인 신음이 번졌다. 고통인 듯, 또 쾌락인 듯 모호한 소리는 한밤이 지나도록 이어졌다.이튿날 새벽, 연강헌은 명을 내려 단여월의 명분과 대우를 원래대로 회복시켰다.그 소식을 들은 진가이의 안색은 단박에 굳어졌다. 그녀는 단여월처럼 오직 연강헌 하나에만 의지하는 것이 아니었기에 굳이 총애를 차지하기 위해 목숨 걸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그러나 단여월 같은 어리석은 여인이 다시 득세를 한다면 언젠가 자신을 곤란하게 만들 것이 분명했다.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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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2화

그 둘은 얼굴이 거의 닿을 정도로 바싹 붙어있었다.그러자 연기준의 안색이 순식간에 굳어지며 낮게 꾸짖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너희들,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느냐?”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서인경은 반사적으로 충천포를 품안에 감추었다. 간신히 눈앞에 나타난 고향의 물건인데 더 이상 연기준에게 빼앗길 수는 없었다.진방옥은 태연하게 웃으며 서재 앞으로 다가왔다.“에이, 별일도 아닌데 뭘 그렇게 심각하게 구십니까? 이건 보기 드문 물건이라 전해주려고 한 것입니다. 상왕비께서 심심타 하시기에 눈요기 삼아 가져왔을 뿐이지요.”둘이 떨어져 있다면 진방옥이 무엇을 가져오든 상관이 없었다.그는 본디 진방옥이 장난을 좋아하는 성격임을 잘 알고 있었고 서인경의 무료함을 달래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잠시 뒤, 두 사람은 서재 안에서 정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고 서인경은 마루에 앉아 조용히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연풍이 들어서자 서인경은 이때다 싶어 황급히 달려 나가 맞이했다.“오늘은 소식이 있느냐?”연풍의 얼굴에는 알 수 없는 기묘한 빛이 떠돌았다. 기쁜 건지 근심인 건지 분간하기 어려웠다.“예, 소식은 있사옵니다. 다만…”서인경의 얼굴빛이 순식간에 어두워지고 심장이 조여드는 듯했다. 연풍은 그녀가 걱정과 분노로 상심할까 두려워 급히 덧붙였다.“저희 사람들이 설산에서 서 노장군의 흔적을 발견했사옵니다. 발자취로 보아 이미 설산을 벗어나신 듯하옵니다.”서인경은 오래 붙들고 있던 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그러면 지금은 어디 계신 것이냐?”연풍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저었다.“설산에서는 부상당한 남궁열만 발견되었을 뿐이옵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누군가 서 노장군과 장졸들을 구출해 갔다고 하옵니다. 하나 그 외에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사옵니다. 원래라면 그를 붙잡아 심문하려 하였으나 남궁열은 간교하여 우리 손을 피해 달아났사옵니다.”“남궁열…”서인경의 눈빛이 서늘히 가라앉았다.“분명 그와 관련이 있다. 그게 아니라면 도망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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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3화

연기준은 잠시 눈을 감고 깊이 생각하다가 낮은 목소리로 명했다.“서 노장군은 지금 자신의 처지를 누구보다도 잘 안다. 이 상황에서 대로를 당당히 걸을 리 없어. 모든 인원을 풀 거라. 길가의 산림과 깊은 계곡, 그 어느 곳도 빠뜨리지 말고 수색하도록.”연풍이 고개 숙여 답했다.“예.”그때 서인경이 덧붙였다.“서가군에서 사람을 더 뽑아 몰래 내보내세요. 그들은 할아버지를 긴 시간 동안 모셨고 전장에서 호흡을 맞춘 지 오래니 이런 상황에서 서로를 더 쉽게 찾아낼 수 있을 겁니다.”연기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고 연풍은 곧장 몸을 돌려 명을 수행하러 나갔다.서인경은 서회윤이 아직 살아있다는 기쁨에 잠시 넋을 잃은 채 있다가 뒤늦게에야 봉한설이 따라오지 않은 걸 알아차렸다.그 아이는 왕부에 들어온 지 오래되지 않았음에도 사람들에게 금세 호감을 샀고 누구에게나 사랑받고 있었다. 그래서 서인경은 그다지 염려하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더 급한 일이 있었으니까.방으로 돌아오자마자 그녀는 곧장 평이에게 가위를 가져오라고 했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순순히 따랐다.“왕비 마마, 무엇을 하시려는 것이옵니까? 노비가 도와드리겠사옵니다.”서인경은 품속에서 작은 충천포를 꺼내어 평이의 손에서 가위를 받아들었다.“아니, 괜찮다. 내가 직접 하마.”호기심을 감추지 못한 평이는 곁에 앉아 지켜보았다.서인경은 조심스레 충천포의 윗부분을 잘라내고 그 안의 잿빛 가루를 종이에 모았다. 코끝을 스치는 기묘하고도 익숙한 냄새가 번졌다.“왕비 마마, 이게 대체 무엇이옵니까?”서인경은 순간 멈칫했다. 그 냄새는 그녀의 어린 시절, 매년 정초부터 정월 대보름까지 늘 풍기던 익숙한 향기였다. 서인경은 작은 종잇장 위에 재를 모아들고 툇마루 계단으로 가져갔다. 불씨통을 열고 불꽃을 가루 가까이 가져다 대는 순간, 칙하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눈앞에서 번쩍 불빛이 터졌다.평이는 놀라 비명을 지르며 서인경을 끌어안았다.“왕비 마마, 조심하세요!”번쩍이는 불꽃이 종이를 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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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4화

연기준은 편지를 봉투째 거두어 들더니 눈빛으로 책상 위의 불씨통을 가리켰다.봉한설은 그 뜻을 단번에 알아차리고 체념한 듯 다가가 불을 붙여 봉투를 온전히 태워버렸다. 불빛이 치솟아 오르며 그녀 눈 속의 쓸쓸함과 억울한 원망을 드러냈다.“저는 그저 원통할 뿐입니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어머니와 아버지를 반대하고 억지로 떠나게 하지 않았다면, 어머니가 어찌 화사독에 걸려 죽었겠습니까?”연기준은 그녀를 바라보며 낮게 말했다.“화사독의 일은 본왕의 탓이다. 내가 한 군의 주장이면서 장졸들을 지켜내지 못했으니, 마땅히 첫째로 책임을 져야 한다. 원망이든 분노든 모두 본왕에게 쏟거라.”봉한설은 입술을 삐죽이며 고개를 들었다.“왕야께서도 아시잖습니까. 제가 어찌 왕야한테 화낼 수 있겠습니까?”연기준은 웃음을 흘렸다.“어째서? 혹 이 수년간의 양육의 은혜를 갚지 못할까 두려운 것이냐?”봉한설은 고집스러운 얼굴로 반박했다.“아니요. 그저 왕야는 왕비 마마의 남편이자 마마 아이의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연기준은 화내기는커녕 웃음을 더했다.“그 말대로라면, 본왕은 결국 그녀의 은덕을 입은 셈이로구나.”“바로 그거지요.”봉한설은 이 말만 던지고 떠나버렸다. 연기준은 비록 직접적인 대답은 하지 않았으나 그녀는 이미 모든 답을 알게 되었다.예전 어머니가 살아계셨을 적, 그녀의 친족은 이 세상에 없으니 상왕과 훗날의 왕비를 따르라 하시며 왕야와 왕비가 있는 곳이 곧 그녀의 집이라 말씀하셨다. 그래서 그녀 또한 줄곧 그렇게 믿어 왔다.그런데 일불락이 다시 나타났다.바로 서인경의 조부를 구해냈다는 그들 말이다.봉한설은 어린 나이임에도 마음속이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된다면 과연 어떤 얼굴로 그들을 마주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진방옥이 상왕부를 나서자 대문 앞에 마차 한 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곧이어 낯익은 마부의 얼굴이 보였다.“진 공자, 우리 주인어른께서 저택으로 모셔 대화를 나누자 하시옵니다. 부디 마차에 오르시지요.”진방옥은 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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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5화

욕망을 억누르고도 밤새 울릴 만큼이라니... 이 대황자란 자, 참으로 방탕하고도 음란하구나!진가이는 더는 대황자의 사사로운 추문을 말하고 싶지 않아 슬며시 화제를 돌렸다.“저번에 네가 나에게 구해 달라 했던 것, 혹시 화약을 만드는 데 쓰려던 것이냐?”진방옥의 두 눈이 번쩍 커지며 놀라움이 얼굴 가득 번졌다.“그저 장난삼아 두어 개 장난감을 만들었을 뿐입니다. 아이들 가지고 놀게 하려고 말입니다. 제가 어찌 화약을 만들 줄 알겠습니까? 둘째 누님, 그런 말은 어디서 들은 것입니까?”화약은 나라가 독점하여 장악하는 귀하고도 위험한 물건이라 사사로이 손댔다간 곧바로 사형이었다. 진방옥은 감히 스스로 죽을 길을 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긴장하지 말거라. 그냥 한번 물어본 것뿐이다.”진가이는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눈빛에는 쓸쓸함이 깃들어 있었다. 꼭 어린 시절 천주 저택에서 매번 괴롭힘을 당하던 모습 그대로였다.“단여월은 적녀이고 나는 그저 서출일 뿐이다. 그녀는 단 가의 든든한 뒷배가 있지만 나는 혼자야. 집안, 신분, 견식 어느 것 하나 그녀를 따라갈 수 없다. 나는 그녀와 총애를 다투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나 자신을 지키고 싶을 뿐이다. 다시는 어린 시절처럼 늘 굶주리고 입을 옷도 없어 사람 눈치 보며 살아가고 싶지 않아.”그 말에 진방옥의 머릿속에 어린 시절의 기억이 파도처럼 스쳐갔다. 그때의 둘째 누이는 참으로 가련했다. 그녀가 더 나은 삶을 바란다 한들, 어찌 그녀를 탓할 수 있으랴.“둘째 누님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누님은 이제 대황자의 측비이니 단여월이 감히 지나치게 행동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진 가는... 흠, 됐습니다. 저만 믿으세요. 제가 조정에서 입지를 세우면 곧 누님의 든든한 배후가 되어 드리겠습니다.”진가이는 상심을 웃음으로 덮어 보였다.“알고 있다. 네 마음속엔 늘 둘째 누이가 있다는걸. 한데...”그녀는 입가의 웃음을 서서히 거두었다.“황자를 가까이 모시는 건 호랑이와 함께 사는 것과 같다. 황실 규율은 엄격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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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6화

하지만 숙귀비도 폐비를 헛되이 죽게 두진 않았다.사람을 시켜 연줄을 뚫고 유배된 폐비의 동생을 찾아낸 후 한차례의 우연한 사고를 꾸며내어 그가 죽은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그것은 그 집안에 마지막으로 대를 남겨준 셈이었다.숙귀비가 병사를 이끌고 첫 훈련에 나선 날, 군영에는 서인경만 온 것이 아니었다. 연기준 또한 전신에 갑옷을 두르고 나타났다. 겉으로는 감시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든든한 의지처였으며 조정에서 아직도 서가군을 탐하는 무리들을 향한 강한 위협이었다.서인경은 막사 문가에 서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멀리서 그 은혜를 눈에 새기고 마음 깊이 기억했다.봉한설 역시 그것을 보고는 주저 없이 입을 열었다.“왕비 마마, 왕야는 참 훌륭하십니다. 왕비께서 택한 이 사내는 절대 틀리지 않으셨어요.”서인경은 뒤돌아 그녀를 보며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네가 겨우 몇 살인데 그런 걸 안단 말이냐?”봉한설은 깔보인 듯한 말투에 불복하며 고개를 꼿꼿이 들었다.“저는 이미 다 컸습니다. 그러니 무엇이든 다 알지요. 왕야는 정말 좋은 분입니다. 왕비께서는 제 말을 믿으셔도 됩니다.”서인경은 웃음을 띠며 말했다.“그분이 널 키워줬기 때문에 이렇게 편을 드는 것이냐?”봉한설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그분께서 제게 베푸신 은혜는 제가 이미 마음속에 새겨두었습니다. 그것을 왕비 마마께 드린 진심과 억지로 한데 묶어 생각하진 않아요.”서인경은 순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 어린 계집아이가 생각보다 훨씬 분별력이 있었다. 그렇게 한참 서 있던 중, 장졸 하나가 다가왔다.“왕비 마마, 왕야께서 명하시길, 왕비 마마를 모셔가 쉬게 하라 하셨사옵니다.”서인경이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높은 연단 위에 서 있던 연기준이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봉한설은 이마를 탁 치며 소리쳤다.“아이고, 깜빡했네요. 왕야께서는 왕비 마마가 한 각 넘게 서 있으면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꼭 쉬어야 한다고 당부했었는데...”서인경은 말문이 막혔다.“내가 그렇게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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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7화

옛 사람을 떠올리자 연기준의 표정이 굳어졌다.“그해, 본왕은 서 장군과 서 씨 부인을 제대로 지켜내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본왕의 잘못이지요. 본왕이 그들의 기대를 저버린 것입니다.”숙귀비는 미소로 그를 위로했다.“상왕께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전장에 나가 죽는 것은 병사에게 가장 영예로운 귀결입니다. 그들은 이미 오래전 각오를 하고 있던 분들이지요. 더구나 왕야께서 경이를 이토록 잘 돌보고 계시니 그것이야말로 그들에게 드리는 가장 좋은 보답일 것입니다. 왕야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우리 온 집안은 모두가 화를 입어도 괜찮지만 오직 경이만은 안 됩니다.”연기준의 목구멍이 막힌 듯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그런 말은 하지 마십시오. 서 노장군께서는 무사하실 것이고 숙귀비 또한 마찬가지 일 겁니다. 본왕이 암위의 한 부대를 따로 보내어 오직 숙귀비의 안전을 지키게 하겠습니다.”숙귀비는 고개를 저으며 단호히 거절했다.“왕야께서는 그 사람들을 모두 경이에게 붙여주십시오. 경이의 목숨은 제 것보다 더 귀중합니다.”멀리 만 리 밖, 깊은 산림 속.수십 년간의 행군과 전투 속에서 온갖 위험한 처지와 수많은 피비린내 나는 광경을 다 겪어왔던 서회윤이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그는 여전히 극도로 신중했고 한 치의 방심도 하지 않았다.그 까닭은 적이 강대해서가 아니었다. 눈 덮인 산에서 자취를 감춘 그날 이후 지금까지도 그는 여전히 알지 못했다. 상대가 누구인지, 그리고 목적이 무엇인지를.일불락, 지하흑시, 남궁열, 그리고 홀연히 나타났다 홀연히 사라진 그 노부인…그들은 도대체 어떤 입장에 있으며 누구를 섬기는 것인가?일불락의 후예는 이미 오래전 자취를 감추었다. 앞으로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 믿었고 그것이야말로 태평성세의 한 징표라 여겼었다.그러나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은 끝내 일어나고야 말았다.이번에 불쑥 모습을 드러낸 이들은 과연 옛날의 가훈을 잊지 않았을까?이 권세 다툼의 세상에서 결코 어느 한쪽의 도구가 되지 말라는 그 조훈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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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8화

가면을 쓴 자가 몇 차례 비웃듯 콧소리를 흘렸다.“곧 죽을 자가 굳이 그리 많이 알 필요는 없다. 치거라!”한 마디 호령에 검은 가면의 무리들이 일제히 움직였다. 순간 산림 사이에는 칼빛이 번뜩이고 살기가 가득 차올랐다. 놀란 날짐승들이 허공으로 솟구치고 길짐승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다.육승과 안포가 두 패의 병력을 이끌고 천리를 달려왔으나 현장에 도착했을 때 눈앞에 펼쳐진 것은 오직 수십 구의 시체뿐이었다. 사방에 흩뿌려진 핏자국, 튀어 오른 선혈.핏내가 가득한 공기 속에 살아 있는 자는 한 명도 없었다.시위가 주위를 살펴보고 돌아와 아뢰었다.“셋은 서가군의 장졸, 열하나는 검은 가면의 자들입니다.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습니다. 싸움 흔적을 보아하니 서 노장군께서 오히려 한 수 위이셨던 것 같습니다.”서가군의 호 부장은 이 모든 것을 눈에 새기며 걱정스러운 빛을 드러냈다.“설사 이겼다 한들 아슬아슬한 승부였을 것이다. 노장군의 형세가 결코 낙관할 수 없으니 우리가 속히 그들을 찾아야 한다.”말을 마친 호 부장의 시선은 문득 땅 위의 어떤 흔적에 닿았다. 그러자 곧 그의 안색이 환히 밝아졌다.“노장군께서 남기신 신호다.” 사람들이 황급히 다가가 살펴보니 호 부장이 가리킨 곳에 과연 은밀하게 새겨진 교차 표식이 있었다.육승이 의아해하며 물었다.“정말로 노장군께서 남기신 것이 맞습니까?”호 부장은 굳게 장담했다.“내가 노장군을 따라온 세월이 수십 년, 결코 틀릴 리 없다.”그는 말을 마치고는 숲 깊숙한 곳을 가리켰다.“노장군 일행은 저쪽으로 향했다.”그 방향으로 좇아가 보던 안포의 얼굴빛이 황급히 굳어졌다.“큰일입니다. 저쪽은 절벽입니다!”육승이 곧바로 외쳤다.“추격하거라!”숙귀비가 군사를 거느리고 출정했다는 소식은 대부대가 떠난 뒤 이튿날에야 서인경에게 전해졌다.연기준은 더는 감출 수 없음을 알았다. 차라리 남이 전하는 것보다 자기 입으로 말하는 편이 낫다고 여겼다. 그래서 서인경이 소식을 들었을 때 방 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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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9화

서인경의 가슴은 아릿하게 저려왔고 그 아픔은 더는 억누를 수 없어 눈가가 붉어졌다.“연기준, 당신은 당대의 상왕입니다. 훗날 당신 곁에는 많은 여인이 있을 것이고 많은 자식들이 따를 것이지요...”그러나 그 말은 끝내 이어지지 못했다. 그녀의 눈에 비친 것은 이미 노기 띤 연기준의 얼굴이었기 때문이다.“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서인경은 깊은숨을 들이켰으나 더는 입을 떼지 못했다.연기준의 얼굴은 점점 분노로 굳어갔다.“너는 본왕이 다른 이와 아이를 낳기를 바라는 것이냐? 애초에 이 아이를 단 한 번도 원해본 적이 없었던 게 아니더냐?”꾹 눌러왔던 숨이 터져 나가듯 서인경도 더는 참지 못했다.“그렇습니다.”그녀는 솔직히 인정했다.“알지 않습니까? 이 아이는 결코 제가 바라던 아이가 아니었다는 것을요. 갑작스레 찾아온 이 존재로 인해 저의 모든 계획은 산산이 부서졌습니다. 고모와 열다섯 째 황자가 억지로 갈라서야 했고 고모는 어쩔 수 없이 다시 갑옷을 입고 전장에 나섰지요. 만약 고모께서 무슨 변을 당한다면 저는 열다섯 째 황자의 얼굴을 마주할 자신이 없습니다. 그리고 제 뱃속의 아이도 마찬가지고요.”연기준은 믿기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서인경을 바라보았다.“그러니 너는 우리의 아이가 태어나서는 안 된다고 여기는 것이냐?”서인경은 즉답하지 못했다. 아이는 무고하다. 그러나 분명 이 아이는 그녀가 원했던 것이 아니었다. 모두가 이 아이의 탄생을 고대했으나 단 한 번도 묻지 않았다.그녀 자신은 원하느냐고.그토록 철저히 경계해왔건만 정작 자신이 가장 신뢰하던 이에게서 허를 찔린 것이었다. 서인경이 대답하지 않자 연기준의 분노는 더욱 치솟았다.그는 끝내 고개를 홱 돌려버리고 나가버렸다. 이곳에 더 머물렀다가는 자신이 무너질까 두려웠다.“여봐라, 이곳을 지키거라. 왕비가 반 걸음이라도 나간다면 목을 베어 본왕 앞에 가져오거라.”서인경이 문 앞까지 쫓아갔으나 수십의 암위가 하늘에서 떨어지듯 길을 가로막았다.“연기준, 날 내보내 줘! 나는 고모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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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10화

서인경은 원래 혼자서 몰래 해치울 작정이었다.총을 만들고 화약을 제조하는 일은 21세기에서도 국가가 엄격히 금지한 일인데 제왕의 권위가 하늘과 같은 고대라면 더더욱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 상황에서는 연기준에게 맡기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었다.그는 봉한설이 전해온 물건을 받아 흘깃 두어 번 훑어보았을 뿐인데 곧 눈빛이 번쩍이며 굳어졌다.그는 이해했다!연기준의 가슴에는 놀라움과 믿기지 않는 충격이 한꺼번에 몰려왔다.서인경, 그녀가 어찌 이런 것들을 알 수 있단 말인가?연기준이 선뜻 행동을 보이지 않자 봉한설은 안절부절못해 발을 동동 굴렀다.“어서 준비하세요! 말씀드리지만 왕비 마마께서 크게 노하셨습니다. 이번이야말로 유일하게 만회할 기회예요.”연기준은 느긋하게 물건을 수습하며 대꾸했다.“네가 나설 필요 없다.”봉한설은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입만 살아서는.”연기준은 개의치 않고 그녀에게 일렀다.“왕비는 결코 쉽게 물러설 사람이 아니다. 잘 지켜보거라. 그리고 아무도 함부로 그녀 앞에서 혀를 놀리지 못하게 하거라.”봉한설은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 한데 서 가의 일은 언제쯤 매듭지을 수 있는 것입니까? 지금 왕비 마마께서는 몸에 아이까지 있으신데 날마다 이렇게 심기를 상하게 두어 선 안 됩니다.”연기준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짜증 섞인 목소리를 냈다.“알았다.”봉한설은 더는 어찌할 도리가 없어 분통이 가라앉지 않은 듯 다시 한번 발을 구르더니 휙 몸을 돌려 나가버렸다.역참.예정임은 차를 홀짝이며 무희들의 춤을 구경하고 있었다. 틈틈이 무희들과 농담을 주고받으며 은근히 희롱하기도 했다.단진혁이 들어서자 드러난 살결로 치장한 무희가 예정임의 품에 기대앉아 있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그의 얼굴은 짙게 굳어졌다.“모두 물러가거라!”그의 호통소리에 무희들은 놀라 황급히 몸을 움츠리고 달아났다.예정임은 금세 흥이 깨진 듯 시들한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였다.“무슨 일로 외숙부의 기분이 상했습니까?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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