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mua Bab 시간을 거슬러: Bab 581 - Bab 590

722 Bab

제581화

두 사람은 이제 막 왕부에 들어왔건만 황명이라니... 황제는 참으로 기다릴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서인경은 어쩔 수 없이 꼬막이를 봉한설과 유모들에게 맡기고 궁중 복장으로 갈아입은 뒤 연기준과 함께 궁으로 향했다.가는 길에 연기준은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내가 전에 말한 것을 기억하거라. 능지국과의 전쟁이 발발한 뒤, 너와 서 노장군은 설산에 갇혔고 잔여 세력을 막아내다 서 노장군은 불행히도 전사한 것이다. 시신은 설산의 눈 아래에 묻혀 찾지 못했고 너는 천신만고 끝에 살아남았다. 그리고 그 외의 일은 일절 말하지 말거라. 폐하께서 묻는다면 답은 내가 할 것이다.”서인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가 갑작스레 자신을 불러들인 것 때문에 그녀의 마음속은 잔잔한 긴장으로 일렁였다. 그녀는 머릿속으로 황제가 물을 만한 문제들을 정리했다.할아버지의 시신이 돌아오지 않았으니 진위 여부를 의심할 테고 자신이 설산에 한 달 넘게 갇혀 있었는데 멀쩡히 살아 돌아온 것도 그에게는 의문일 것이다. 또 대황자가 막북에서 그런 일을 저질렀는데도 처벌받지 않았다는 건 황제가 연기준의 권세를 견제하기 위해 일부러 묵인한 결과일 터. 그리고 연기준 역시, 그렇게 오랫동안 조정의 부름을 거절했으니 황제에게는 눈엣가시로 남았을 것이다.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서인경은 이번 입궁에서 얼마나 조심스러워야 하는지 절감했다. 오늘 조금이라도 방심한다면 살아서 궁문을 나가지 못할 수도 있었다.마차가 궁문 앞에 멈추었다. 서인경이 발을 젖히고 내려다보니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열다섯 째 황자였다.그는 예전보다 훨씬 말랐고 키도 많이 자라 있었다. 단정한 소색 궁복이 그의 체형을 더 길고 마른 듯 보이게 했다. 서인경은 그제야 깨달았다. 자신의 기억 속, 늘 보호해 주어야 할 어린아이는 이제 반쯤 자란 소년이 되었다는 것을. 아마 숙귀비의 죽음이 그를 단번에 어른으로 만든 것이리라.그는 그렇게 고요히 마차 앞에 서 있었다. 표정엔 기쁨도 슬픔도 없었으나 서인경을 본 순간 눈가가 붉게 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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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82화

아직까지도 변명이라니.서인경은 그 여인을 발로 걷어찼다.“네 목숨을 거두지 않는 게 널 봐준 것이다! 말하거라. 누가 열다섯 째 황자를 이렇게 괴롭히라고 시킨 것이냐?”유모는 비틀거리며 다시 무릎을 꿇었다.“아니옵니다, 아니옵니다! 아무도 저를 시킨 적이 없사옵니다! 왕비 마마, 저를 억울하게 몰아가지 마옵소서!”연기준은 연풍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멍하니 서서 뭐 하는 것이냐? 왕비가 한 말을 못 들었느냐?”연풍이 손짓하자 두 명의 암위가 즉시 앞으로 뛰쳐나오더니 유모를 붙잡았다.궁문 앞은 순식간에 끔찍한 비명소리가 연이어 터져 나왔다.서인경이 막 외투를 벗으려는 순간, 따뜻한 손이 그녀를 붙잡았다. 연기준은 서인경을 막고 자신의 외투를 벗어 열다섯 째 황자에게 내밀었다.그러자 황자는 고개를 들어 서인경을 한번 바라보았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의 뜻을 표하자 그제야 외투를 받아 들었다.“감사합니다, 황숙.”궁문 앞 대중들이 보는 가운데, 서인경은 열다섯 째 황자의 손을 잡고 그대로 유모의 형벌을 지켜보게 했다.“잘 봐두고 기억하거라. 넌 언제나 주인이다. 눈치를 보며 너를 괴롭히는 자는 이렇게 될 것이다! 네가 스스로를 지켜야 하늘에 계신 네 어머니께서도 걱정하지 않으실 것 아니냐.”숙귀비가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서인경은 아직 밝힐 수 없었다.열다섯 째 황자도 자신의 어머니가 죽었다고 믿어야만 다른 이들이 의심하지 않을 테니까.그 말에 황자는 금세 코끝이 시큰해지며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그는 궁 안에서 늘 수많은 시선에 둘러싸여 있었다. 동정하는 눈빛, 혐오하는 눈빛, 심지어는 비웃는 눈빛까지.그는 울고 싶어도 크게 울지 못했다. 그런데 서인경이 오자 그는 처음으로 기대어 설 곳이 생긴 듯한 느낌이 들었다.“이모, 걱정 마십시오. 잘 알겠습니다.”서인경은 그의 눈물을 닦아주며 다시 당부했다.“이따가 네가 직접 태황태후께 가서 두터운 옷 몇 벌을 달라고 하거라. 아무도 네 옷을 챙겨주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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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83화

이제 사람을 다루는 계책쯤은 손쉬운 일이지!궁문 앞에서 시간을 너무 많이 지체한 탓에 황제는 이미 어서재에서 오랫동안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세 사람이 예를 올리자 황제는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상왕, 상왕비, 어찌하여 이리 늦은 것이냐? 전갈을 보낸 태감은 이미 한 시진 전에 돌아왔거늘.”서인경은 열다섯 째 황자의 손을 이끌었다. 이제 그의 손은 한결 따뜻해져 있었다.‘역시 아까 입은 옷이 너무 얇았던 게로군.’“폐하, 조금 전 궁문 앞에서 악한 노비가 열다섯 째 황자를 괴롭히는 것을 보았사옵니다. 신첩은 금방 어미를 잃은 황자가 후궁에서 이처럼 학대받는 모습을 치켜볼 수 없어 직접 그 노비를 벌하느라 시간이 지체된 것이옵니다. 부디 용서해 주시옵소서.”황제의 눈빛에는 불신의 기색이 가득했다.서인경은 곁에서 태연한 모습을 하고 있는 황후의 눈빛 속에서 조금도 감춰지지 않는 악독함을 볼 수 있었다.그도 그럴 것이 연기준은 멀리 막북에서 대황자를 거의 죽일 뻔하지 않았던가?그때, 황제는 열다섯 째 황자를 향해 근심스러운 눈길을 보내며 물었다.“내 아들아, 누가 너를 괴롭혔느냐? 어찌 나에게 알리지 않은 것이냐?”황자는 몸에 걸친 외투를 벗어 가지런히 갠 후 두 손으로 연기준에게 돌려주었다. 그러고는 얇은 옷차림 그대로 옷자락을 걷어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아바마마께서는 밤낮으로 나라의 일을 살피시느라 바쁘시옵니다. 저는 이런 사소한 일로 아버님을 귀찮게 해드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모비께서 세상을 떠나신 뒤, 모비의 전각은 다른 마마께서 차지하셨고 예전의 옷들도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 수 없사옵니다. 저를 돌보는 유모가 새 옷을 마련해 주지 않았을뿐더러 저를 업신여겼기에 보다 못한 황숙모와 황숙께서 저 대신 나서서 주의를 주셨던 것이옵니다. 모두 제 탓이오니, 부디 아바마마께서는 황숙모와 황숙을 탓하지 마옵소서. 꾸짖으실 일이 있다면 저를 꾸짖으시면 됩니다.”황제는 그 말을 듣자마자 책상을 탁하고 내리쳤다.“어불성설이로다! 짐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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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84화

황제에게는 서회윤이 적국과 내통했다는 확실한 증거가 없었다. 그가 자신을 어진 임금으로 내세우려면 서인경의 청을 거절할 수는 없을 터. 하지만 그의 마음 한편에는 여전히 의심이 남아있었기에 쉽게 허락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서 노장군의 시신이 남아 있지 않은데 그 장례를 어찌 치르겠다는 것이냐?”서인경은 황제가 쉽게 믿지 않으리라는 것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그녀는 얼굴에 깊은 비통함을 띠며 말했다.“설산이 무너지기 전부터 할아버지께서는 이미 중상을 입으셨사옵니다. 이제 설산 아래에 묻힌 지도 수개월이 지났으니 살아 계실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판단되옵니다. 신첩에게 조금이라도 방도가 있다면 반드시 할아버지의 유골을 고향으로 모실 것이옵니다. 한데 지금은, 고향에 의관총(衣冠冢:죽은 사람의 의관을 묻는 무덤)을 세워 할아버지를 장대하게 모시고 제사를 지내어 혼이라도 달래드리고 싶사옵니다. 장례를 마치면 신첩은 장군부의 하인들을 모두 내보내고 저택을 조정에 반납하고자 하옵니다. 계속 눈에 밟히는 것이 더 마음 아플 테니까요. 그러니 부디 폐하께서 은혜로 허락해 주시옵소서.”서인경이 장군부마저 내놓겠다고 하자 황제는 그제야 조금 믿는 눈치였다.“상왕비의 말대로 하거라. 서 노장군은 일생을 충군(忠君:왕에게 충성을 다함)애국의 뜻으로 살며 우리 진국의 강산에 커다란 공훈을 세웠다. 짐은 상왕의 상주를 따라 서 노장군을 충용 호국 대장군으로 추봉하노라.”서인경은 머리를 조아렸다.“감사합니다, 폐하.”황제는 서인경에게 몸을 일으키라 명한 뒤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상왕비, 그대는 몸에 아이를 지닌 채 설산의 극한 추위 속에 있었다 하지 않았느냐? 그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짐이 특별히 태의를 불러두었으니 지금 곧 맥을 짚고 진찰을 받거라.”서인경은 깜짝 놀라 고개를 번쩍 들었다.“폐하의 염려에 감사드리옵니다. 신첩은 아이를 낳을 때 참으로 구사일생이었사옵니다. 그것은 대황자께서 변경의 대장군 관서윤과 결탁하여 신첩의 산파를 내쫓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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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85화

설 태의가 두 손을 모아 공손히 대답하고는 서인경 곁으로 다가가 그녀와 함께 조심스레 몸을 굽혔다.“왕비 마마, 미천한 신이 무례를 범하겠습니다.”서인경은 망설임 없이 손목을 내밀었다.“수고가 많네, 설 태의.”설 태의가 맥을 짚는 동안 대전 안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모두가 서인경의 병이 진짜인지 거짓인지 지켜보고 있었다. 황제 또한 기이하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만약 서인경이 병이 없다면 그는 그 자리에서 곧바로 그녀를 잡아들이려 했을 것이다.연기준이 능지국을 멸한 뒤로 진국은 설산에 한 걸음 더 가까워졌다. 요즘 황제는 밤마다 연 씨 황실의 선조가 남긴 밀서를 뒤적였다. 책 속에 적힌 내용을 보면 보면 볼수록 마음이 요동쳤고 그의 야심을 날로 커져만 갔다.그는 지금이라도 그 신비한 부족을 손에 넣고 그 땅의 주인이 되고 싶어 안달이었다. 그래서일까? 황제는 그 설역을 다녀온 자라면 누구든 의심의 눈초리로 살펴보았다.누가 먼저 그 비밀을 손에 넣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니까.맥을 다 짚은 설 태의는 자연스레 그녀의 손목을 놓아 주었다.그는 다시 두 손을 모아 공손히 아뢰었다.“폐하, 왕비 마마께서는 출산 당시 순산치 못하고 큰 외상을 입으신 듯 하옵니다. 이후 산후조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여 한기에 몸이 상하셨고 그 탓에 기혈도 허하시지요. 겉만 멀쩡해 보일 뿐 속은 허약하기 그지없사옵니다. 이것은 결코 가벼운 병이 아니옵니다. 왕비 마마의 몸은 이제 다시 병을 겪어내기 어렵습니다. 앞으로는 찬 음식과 찬 기운을 멀리하고 늘 따뜻하게 지내시며 무리하거나 찬바람에 노출되지 않도록 하셔야 하옵니다. 또한 가능하면 세자를 직접 기르지 마시옵소서. 그렇지 않으면 회복이 더욱 어려워지고 다시는 아이를 갖기 힘들어질 수 있사옵니다. 왕야, 왕비 마마, 두 분께서는 제가 드린 말씀을 부디 명심하시옵소서.”설 태의의 말이 길어질수록 연기준의 얼굴은 점점 싸늘하게 굳어갔다.출산이 순탄치 않았고 큰 외상을 입었다고?그런 일은 지금껏 아무도 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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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86화

결국 대황자가 저지른 일은 이렇게 흐지부지하게 끝났고 황제도 더는 추궁하지 않았다. 황후는 어서재에 온 목적을 달성하자 마음이 놓여 입가에 자못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다.황제는 서인경에게 할 질문이 모두 끝나자 얼른 그녀를 보내려 했다.“황자, 너도 상왕비를 오랜만에 보는 것이지 않느냐? 짐은 안다. 입 밖에 내지 않아도 넌 마음속으로는 항상 상왕비를 걱정하고 있었겠지. 짐은 너희 둘에게 시간을 주겠다. 상왕비와 함께 어화원에 다녀와도 좋다. 밖은 추우니 짐의 곤룡포를 걸치고 가거라. 고뿔이라도 들면 안 되니까.”그 말을 들은 태감은 곧바로 황제의 곤룡포를 들고나왔다. 열다섯 째 황자는 공손히 그것을 받아들며 말했다.“감사합니다, 아바마마.”황제는 말을 마치고 곁눈질로 황후를 바라보았다.“황후, 열다섯 째 황자는 후궁에서 구박을 받았다. 비록 황후의 전각에서 있었던 일은 아니나 여섯 궁을 거느린 주인으로서 책임이 없다고는 못하겠지. 내무부에 일러두어 앞으로 황자의 의식주를 반드시 제대로 챙기게 하거라. 또다시 짐의 친아들이 이런 수모를 당하게 된다면 그때는 황후 자리도 보전하기 어려울 것이다!”황후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의기양양했으나 느닷없이 불똥이 자신에게 튀자 급히 일어나 무릎을 꿇었다.“신첩의 불찰이옵니다. 신첩이 돌아가면 반드시 내무부를 바로잡고 다시는 열다섯 째 황자가 구박받는 일은 없도록 할 것이옵니다.”황제가 손을 내저으며 그녀를 물렸다.“그만 물러가거라.”황후는 고개를 숙여 물러나며 서인경을 향해 악의 어린 시선을 던졌다. 만약 그녀가 일을 크게 만들지 않았다면 황제는 이런 사소한 일을 알 리도 없을 것이고 자신이 사람들 앞에서 꾸중을 들을 일도 없었을 것이다.서인경은 그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아무것도 보지 못한 듯 그저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서인경은 열다섯 째 황자의 손을 잡고 감사의 예를 올린 뒤 어서재를 나섰다.황제가 연기준을 언급하지 않은 것을 보니 분명 따로 할 이야기가 남은 듯했다.어서재를 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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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87화

“외조부의 장례 때가 되면 내가 폐하께 아뢰어 너를 궁 밖으로 나가게 해주마. 그때면 아이를 볼 수 있을 것이다.”두 사람은 걸음을 옮기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오랜만에 가장 가까운 사람을 만난 데다 분위기도 한결 누그러져 있어 열다섯 째 황자는 모처럼 어린아이다운 모습을 되찾을 수 있었다.다만 황제의 곤룡포가 워낙 커서 옷자락을 끌며 걷는 그의 모습이 꽤 우스꽝스러웠다.“이모, 그 아이는 저를 외삼촌이라 불러야 하나요, 아니면 형이라 불러야 하나요?”그의 물음은 나름 현실적인 고민이었다. 열다섯 째 황자의 눈에 서인경과 연기준은 그와 연배가 다른 사람이었으니까.서인경은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네가 원하는 대로 하거라. 뭐라고 부르는 게 좋으냐?”열다섯 째 황자는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당연히 외삼촌이죠. 궁에는 이미 함께 자란 황자와 공주들이 많아서 저는 늘 형, 아니면 오라버니였습니다. 이번엔 외삼촌이란 기분을 좀 느껴보고 싶어요.”서인경은 그런 그가 사소한 일로 고민하는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그럼 외삼촌이라고 부르면 되지.”“그 아이 이름은 무엇입니까?”“꼬막이.”열다섯 째 황자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그러자 서인경은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다.“왜 아무 말도 없는 것이냐?”“저기… 그 이름은 이모께서 지은 것이지요?”“그래. 그게 뭐가 어때서 그러느냐?”“별로입니다.”서인경은 이제 이런 반응이 익숙하다는 듯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자기가 지은 이름이 그렇게나 이상한 것일까?“넌 몰라서 그렇다. 이름은 좀 유치하게 지어야 오래 사는 법이다.”열다섯 째 황자는 또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다가 얼굴을 찡그렸다.“뭐... 이모께서 좋으시다면야.”서인경은 그의 진지한 말투에 웃음을 터뜨렸다.“그건 그냥 별칭일 뿐이다. 본명은 연유청. 예쁘지 않느냐?”“그건 정말 좋은 이름이군요. 황숙께서 지어주신 겁니까?”이번엔 서인경이 말을 잇지 못했다.이렇게 금세 들키다니... 그렇게 티가 나는 것일까?“황숙과 이모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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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88화

유모는 웃는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어쩐지 느낌이 좋지 않았다.“제가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니지요! 열다섯 째 황자는 태황태후의 친손이십니다. 한데 왕비 마마께서 부족한 게 있으면 자신에게 말하라는 건 결국 태황태후 마마께서 손자를 구박한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그저 태황태후 마마의 억울함을 풀어드리고자 한 말입니다. 왕비 마마께서 죄를 묻는다 해도 상관없습니다. 또 계 유모처럼 오십 대의 장형이나 내리고 말겠지요! 어차피 왕비 마마의 손길은 늘 길게 뻗쳐 있지 않습니까? 저희 같은 노비만 해를 입는 게 아니라 황후 마마까지도 왕비 마마 때문에 폐하께 질책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니 마마의 눈에는 저희 같은 미천한 노비들이야 뭐 대수겠습니까?”그 말이 끝나자 서인경은 밖의 소식이 늦게 전해진 것이 아니라 그저 그때의 매질이 너무 약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맞아야 정신을 차리겠구나? 그럼, 본왕비가 네 소원을 들어주지!”서인경은 손바닥 안에서 은침을 집어 들었다. 그녀는 유모의 손목을 붙잡자마자 단번에 은침을 꽂아 넣었다.그녀는 비명을 지르더니 스스로 제 뺨을 세차게 후려치기 시작했다.“퍽! 왕비 마마, 대체 저에게 무슨 짓을 하신 겁니까? 왜 이렇게 된 거냐 말입니다! 몸이 제 뜻대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왕비 마마, 당신은 요녀(妖女)입니다! 대체 무슨 요술을 부리신 겁니까? 이 요녀!”“왕비 마마, 제발! 제발 자비를... 제가 잘못했습니다! 퍽, 퍽, 퍽!”유모는 땅에 무릎을 꿇고 계속 자신을 때리며 살려달라 애원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얼굴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퉁퉁 부어올랐다.“왕비 마마, 목숨만은 살려주십시오!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문밖의 소란이 점점 커지자 결국 안쪽에서도 사람들이 뛰쳐나왔다. 태황태후는 눈앞의 광경을 보자마자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상왕비, 지금 무얼 하고 있는 것이냐!”서인경이 고개를 숙여 예를 올렸다.“태황태후 마마, 유모가 열다섯 째 황자를 업신여기고 학대하기에 신첩이 조금 징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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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89화

“열다섯 째 황자, 네 전각에 부족한 것이 있다면 언제든 애가의 사람들에게 말하거라. 그게 아니라면 직접 애가에게 말해도 된다. 애가가 언제 너를 섭섭하게 한 적이 있었더냐? 앞으로는 상왕비 같은 외인에게 폐를 끼치지 말거라.”그 한마디 외인이라는 말로 태황태후는 서인경과 열다섯 째 황자 사이의 거리를 단숨에 그어버렸다. 그녀는 황자가 분명히 깨닫길 바랐다.하나는 서 씨 일가이고 다른 하나는 연 씨 가문이라는 것.그리고 열다섯 째 황자가 향해야 할 곳은 결국 연 씨의 혈통이라는 것을.열다섯 째 황자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그저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예, 태황태후 마마의 가르침을 명심하겠사옵니다.”“됐다. 시간이 늦었으니 이제 들어가 쉬거라. 상왕비는 애가가 따로 사람을 보내지 않겠다.”서인경은 끝내 태황태후 침전의 문턱조차 넘지 못한 채 발길을 돌려야 했다. 그녀도 애초에 그곳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태황태후가 열다섯 째 황자의 처지를 다시금 인식하게 만들었다는 것만으로 이미 충분했다.열다섯 째 황자가 안으로 들어간 뒤 태황태후는 서인경을 쳐다보지도 않고 곧장 침전 안으로 들어갔다.방금 전의 유모는 여전히 땅에 엎드려 스스로의 뺨을 때리고 있었다. 얼굴 한쪽은 이미 부풀어 만두처럼 변해 있었다. 징계는 이만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한 서인경은 유모의 손등에 꽂혀 있던 은침을 뽑았다. 그제야 유모는 손을 멈추며 기진맥진한 몸으로 바닥에 쓰러졌다.은침을 거두어 넣은 서인경은 왔던 길을 따라 걸음을 돌렸다. 그녀는 이제 어서재 앞에 다다랐으나 연기준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서인경은 문밖에서 한참 동안 그를 기다렸다. 처음엔 약간 졸렸는데 찬바람이 불어오니 금세 정신이 또렷해졌다.잠시 후, 어서재에서 나온 연기준은 옥계단 앞에 서 있는 자줏빛 옷차림의 여인을 보았다. 그녀는 등을 돌린 채 서 있었고 달빛은 그 가녀린 그림자를 길게 늘이고 있었다. 예전보다 훨씬 야윈 모습에 마음이 저릿해졌다. 그런 그녀가 직접 꼬막이를 돌보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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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90화

서인경은 그의 어깨에 몸을 기댔다. 찬바람 속에서도 그의 품은 이상하리만치 따뜻했다.“왕야, 왜 폐하께 연강호가 아직 살아 있다는 걸 말하지 않은 겁니까? 왜 저를 도운 것입니까? 일불락을 손에 넣는다면 그 공으로 폐하께 상을 청할 수도 있었잖습니까. 천하의 권세를 누리며 만인 위에 군림할 수도 있었을 텐데요.”‘마치 전생처럼 말입니다.’연기준은 그녀의 손을 쓸어내렸다.“본왕이 원하는 것은 이미 다 얻었다. 만인 위의 자리는 본왕이 추구하는 바가 아니다.”지위가 목적이 아니라면 전생의 연기준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 그런 선택을 했던 것일까?서인경은 처음으로 전생의 기억에 대한 의구심이 들었다.혹시 전생에 자신이 알지 못했던 무언가가 있었던 것일까? 전생에 보았던 것이 전부가 아니었던 것일까?서인경이 걸음을 멈추자 연기준은 그녀가 피곤한 줄 알고 몸을 굽혀 안아 올렸다.“피곤하거든 잠시 눈을 붙이거라. 본왕이 집까지 데려다주겠다.”서인경은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그의 품이 바람을 막아주자 더욱 따뜻했다. 그녀의 생각은 어느새 전생과 현생의 경계를 넘나들었다.그녀가 이 세상으로 다시 온 지도 벌써 일 년 남짓. 전생의 시간으로 따지면 황제의 수명은 얼마 남지 않았다.황제가 세상을 떠난 뒤 대황자가 즉위했고 권세를 등에 업은 하 씨 집안은 조정에서 날뛰었다. 충신들은 하나둘 제거되었고 서 가 또한 그 첫 번째 희생양이었다.대황자가 즉위한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군권을 손에 넣는 것이었다. 이번 생에서 서 가의 군권은 이미 황실에 반납했지만 서인경은 여전히 대황자의 즉위를 막고 싶었다. 황후와 대황자가 권세를 잡는 순간, 열다섯 째 황자의 후궁 생활은 더욱 비참해질 것이다. 게다가 대황자와 연기준은 이미 원수가 되었다. 그렇다면 상왕부 역시 평안할 날이 없다는 뜻일 터.상왕부가 가까워질 무렵, 그녀의 머릿속에 한 사람이 번쩍 떠올랐다.전생의 서왕.그는 겉으론 줄곧 중립을 지켰으나 마지막 순간에는 대황자를 지지하며 그로 하여금 순조롭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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