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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81화

예정연은 어려서부터 애지중지 사랑만 받고 자라 이런 모욕을 받아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야랑국에서는 수많은 미혼 남자들은 그녀를 흠모하여 무릎을 꿇고 청혼했었다.그녀는 먼 길을 달려 진국까지 왔는데 이 상왕부에서 이렇게 연거푸 모욕을 당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연기준의 냉담함과 서인경의 몰지각함이 그녀를 극도로 분노하게 만들었다.“말을 그렇게 추하게 하지 마세요. 도대체 누가 유혹했단 말입니까? 왕야께서 극진히 맞아들였는지 아닌지는 누구도 모를 일이지요. 문 닫아놓고 일어난 일은 왕야와 저만 압니다. 오늘 저는 왕야에게 답을 받으러 왔습니다. 왕야께서는 진국의 폐하께 조만간 청을 올려 이번 야랑국 행에서 저를 상왕부의 새 안주인으로 맞이하겠다고 하셨습니다. 당신 같은 퇴물 상왕비는 서둘러 짐이나 싸고 자리를 비우세요.”문밖 구경꾼들이 술렁이며 정말 상왕부 안주인이 바뀌는 장면을 보는 듯했다.이런 말을 서인경은 믿지 않았다.아니, 설령 연기준이 그런 말을 했다고 해도 진국의 황제가 허락할 리 없었다.연기준은 그 정도로 어리석지 않으니까!당대 최대 병권을 쥔 상왕이 이웃 나라에서 가장 총애 받는 공주를 부인으로 맞이한다?그건 자신의 최후의 패를 외국에 넘기는 꼴이었다.전쟁이 안 나면 다행인 거고 전쟁이라도 난다면 황제의 의심은 곧 칼날이 될 것이다.만약 화친이라도 한다면 황제는 기꺼이 이 공주를 후궁으로 삼을 터.예정연의 말이 이렇게 퍼진 이상 황제는 반드시 먼저 칼을 빼들 것이다.이 생각에 서인경은 비웃었다.“공주께서 그렇게 확신하는 걸 보니 정말인가 보네요? 이러지 말고 여기 앉아 잠시 기다리세요. 왕야께서 일을 보러 나가셨으니 돌아오시면 제가 여쭤보겠습니다. 공주 말씀이 사실이라면 저는 한 마디 불평도 없이 당장 공주께 자리를 비워드리죠.”예정연은 서인경이 이렇게 시원하게 받는 태도에 순간 의심스러워져 주춤거렸다.서인경은 그녀 눈빛을 무시하고 평이를 바라보며 명했다.“가서 공주에게 탁자와 의자를 가져다드리고 차와 과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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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82화

서인경은 말을 이어가며 얼굴빛이 서서히 달라졌다.“한데 만약 누군가 뒤에서 작당하고 하찮은 수작으로 난리를 피운 거라면 그게 누구든 상관없습니다. 축의금 대신 사람 목숨을 앗아갈 독을 드릴 수도 있어요.”서인경의 표정을 보고 예정연은 그녀가 심장에 관한 일을 이미 알아버렸음을 직감했다. 그녀는 오히려 더 뻔뻔스러워졌다.“맞습니다. 제가 뒤에서 조종했으면 어쩔 건데요? 지금 제 몸 안에서 뛰고 있는 건 왕야가 가장 원하는 것입니다. 가져가 보세요! 능력 있다면요.”서인경은 어렴풋이 말발굽 소리를 들으며 입꼬리를 올렸다.“제가 가져가서 뭐 하겠습니까? 제가 원하는 건 연기준의 마음이지 그의 어머니가 되는 게 아니거든요. 그딴 걸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는 건, 공주님 당신뿐입니다.”예정연의 표정이 산산조각 났다.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이 아는 세상에서는 장기 이식은 그야말로 하늘이 내린 인연이었다. 이제 연기준은 어머니를 만나고 싶으면 자신을 보러 올 것이고 그걸로 조건도 걸고 혼인도 요구할 수 있다고 믿었다.그런데 왜 이 여자는 이걸 별것 아닌 일처럼 여기는 걸까?자신은 연기준과의 혼약 증표를 쥐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어머니의 심장이 몸 안에서 뛰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 여자는 왜 울지도 않고 난리도 치지 않는 걸까?서인경이 정말로 난리를 치지 않은 이유는 마침 궁에서 온 금위군과 내시들이 상왕부 문 앞에 도착했기 때문이었다.내시가 말에서 내려 정중하게 서인경 앞으로 다가왔다.“상왕비께 문안드립니다. 폐하께서 야랑국 공주께서 이곳에 계신다는 말을 듣고 저를 보내어 공주님을 궁으로 모셔오라 하셨습니다.”예정연은 왜 자신이 궁으로 불려가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지금은 연기준을 기다려야 할 때였기에 곧바로 거절했다.“난 안 가! 너희 폐하께서 할 말 있으면 태자 오라버니를 찾으면 되지 않느냐? 왜 나를 찾는 것이냐?”내시는 아직 인내심이 남아 있었다.“폐하께서 명을 내리셨습니다. 무슨 일인지는 궁에 가시면 자연 알게 되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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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83화

서인경은 고집스러운 표정에 심지어 약간의 뿌듯함까지 비쳤다.“이건 제 탓이 아니지요. 먼저 벽을 허문 건 그쪽이지 않습니까?”예정훈은 어디인지 모르게 웃음을 지었다.“전 참 궁금합니다. 상왕비는 연기준을 위해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를 말입니다. 만약 정말 어떤 여자가 모든 걸 걸고 연기준을 빼앗으려 한다면 그대는 그녀와 목숨 걸고 싸울 것입니까?”서인경은 잠깐 멍해졌다. 한 번도 스스로에게 묻지 않았던 질문이었다. 하지만 확실한 건 오늘의 행동은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전부 연기준을 위해서만은 아니에요. 그는 제 남편이고 적어도 지금 우리는 하나입니다. 영광을 함께하고 손실도 함께하는 사이지요. 태자께서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예정임을 증오할지라도 그가 지금 진국의 감옥에 있기에 태자께서는 그를 무사히 야랑국으로 데려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야랑국 황제의 눈에는 태자가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 되고 심지어 사람들은 사사로이 원한을 갚기 위해 진국을 빌려 정적을 제거했다고 생각하겠지요.”예정훈은 사람이 없는걸 확인하고 숨을 내쉬었다. 속내를 간파당했음에도 들킬 걱정은 없었다.그는 서인경을 적이라 생각한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일은 없을 테니까.예정연이 이미 궁으로 갔으니 예정훈도 따라가볼 수밖에 없었다.이번에 진국에 와서 야랑국은 이미 팔황자를 잃었다. 거기에 황제가 가장 사랑하는 공주까지 여기서 잃게 된다면 예정훈은 돌아가도 절대 무사할 수 없을 것이다.그가 떠나자 서인경은 대문을 닫으라고 지시했다.바깥의 온갖 소문 따윈 원하는 대로 퍼지게 두었다. 아니, 오히려 그녀는 돈을 써서 더 독하게 퍼뜨리게 했다.연기준이 막 입성하자마자 온 경성에 떠도는 소문이 귀에 들어왔다.상왕비가 상왕에게 첩을 들여준단다.정작 당사자인 그는 어안이 벙벙해졌다.열셋 째 황자가 뒤에서 따라오며 연기준의 표정을 살폈다.“황숙, 이건 무슨 오해일 것 같습니다. 신은 황숙모께서 그런 분이 아니라고 믿습니다.”그녀는 연기준에게 다른 여자를 허락할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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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84화

“몇 살인데 그럽니까? 꼬막이도 아니고 굳이 제가 도와줘야 합니까?”꼬막이는 자기 이름이 불리는 소리를 듣자 체면 챙기듯 소리 질렀다.연기준은 으스대듯 두 팔을 쭉 벌렸다.“다른 부인들은 다 남편 옷을 갈아입혀 준다. 너는 한 번도 본왕을 모신 적이 없지 않으냐? 오늘 너에게 기회를 주겠다.”서인경은 그 말에 막 집어 올렸던 보라색 조복을 휙 내려놓았다.“마치 우리 여자들에게 무슨 큰 은혜라도 베푸는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다른 사람에게 시키십시오. 딱 좋습니다. 오늘 제가 당신의 시중을 들고 싶어 하는 그 여자 하나를 쫓아냈거든. 필요하다면 다시 모셔오죠, 뭐.”연기준은 그녀의 또렷한 눈동자를 보며 알 수 없는 기쁨이 차올랐다. 이런 삐진 말투를 듣는데도 오히려 기분은 좋았다.그는 서인경을 품 안으로 끌어당기며 입을 열었다.“네가 입혀 주면 밤에는 내가 벗겨 주지.”불시에 터진 농담 반, 유혹 반에 서인경은 어이없어 웃어버렸다.“오늘 밖에 나가서 배우고 온 게 고작 이런 능청입니까?”연기준은 태연하게 남은 한 손으로 조복 소매를 끼우며 말했다.“어머니를 참배하고 왔다. 어머니께서 나를 한바탕 혼내시며 말씀하시더구나. 너는 어머니께서 가장 마음에 들어 하는 며느리라서 누구도 대신할 수 없으니 바보 같은 짓은 하지 말라고. 그리고 절대 너를 잃지 말라고 하시더구나.”그냥 건넨 말이었지만 묘하게 서인경의 소녀 감성을 저릿하게 찔렀다.희태비는 연기준의 약점이자 그녀 어린 시절 가장 아름다운 기억이기도 했다.“그래서 말해 보세요. 어떻게 달래 줄 겁니까?”연기준은 서인경의 손을 잡아 허리띠를 매게 하며 말했다.“밤에 제대로 달래 주겠다.”서인경은 또 장난치는 걸 알아채고 손을 탁 놓으며 그를 밀쳐냈다.“스스로 하세요!”그녀는 돌아서서 꼬막이를 안았다. 꼬막이는 엄마의 뺨에 얼굴을 비비적거렸고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꼬집으며 장난쳤다. 모자 사이의 다정한 모습은 유난히 사랑스러웠다.그 모습을 보던 연기준은 불현듯 질투가 일었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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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85화

서인경은 급히 다시 한번 원래 몸 주인의 전생 기억을 탐색했다.희태비는 분명 선제가 붕어한 뒤 태황태후에게 강요당해 순장되었다.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서인경은 그 기억이 틀릴 리 없다고 확신했다.왜냐하면 같은 날 부고가 전해진 사람은 전대의 상왕, 연도현이었으니까.그는 늘 건강했고 그전에도 막 전장에서 돌아온 참이었다. 그런 사람이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 일은 당시 조정을 들썩이게 한 큰 사건이었다.연도현은 평생 부인을 두지 않았고 당시에는 온갖 소문이 돌았다. 그가 늘 선대 귀비인 희태비를 연모하여 혼인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심심찮게 들려왔었다. 그런데 두 사람이 같은 날에 죽자 연도현이 순정했다는 말까지 나왔었다.하지만 이러한 소문은 태황태후에 의해 철저히 짓눌렸다. 그 때문에 수십 명의 궁녀와 내시가 참수되었다. 그 피비린내 나는 광경을 본 자들은 그 뒤로 다시는 혀를 함부로 굴리지 못했다.연기준이 스스로 황릉에 다녀와 시신이 희태비임을 확인했다면 야랑국의 덕비가 파낸 그 심장은 도대체 누구의 것이란 말인가? 혹여 덕비가 심장을 잘못 가져간 거라면 예정연의 몸 안에서 뛰는 그 심장은 대체 어떻게 그녀를 살려놓은 걸까?서인경은 온통 의문으로 가득 찼다.수년이 지난 지금도 시신의 피부가 생전처럼 고운 채 썩지 않았다는 사실 또한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미간에 깊은 주름을 잡은 채 내내 생각에 잠겨 있다가 어서재 앞에 이르렀을 때에야 연기준의 부름에 정신을 차렸다.“본왕은 절대로 예정연을 부인으로 삼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따가 말을 아끼거라. 본왕은 곧 진국을 떠날 것이다. 지금 이 상황에서 폐하를 노하게 만든다면 너에게 불리할 것이다.”그 말에 서인경은 고개를 끄덕였다.처음으로 순수한 제국 군주의 위압감 아래에 서니 서인경도 약간 긴장되었다.홀몸이면 몰라도 지금은 꼬막이가 있었다. 그건 갑옷이 되기도, 연약한 약점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지금은 살아남는 게 가장 중요했다.두 사람은 함께 어서재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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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86화

이제 와서 보니 연기준도 꼭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어쩌면 그녀가 한 번만 먼저 다가갔더라면 진작에 상왕비가 되었을지도 몰랐다.서인경은 자신이 짊어진 원한이 이미 대부분 소멸되었다는 걸 아직 알지 못했다.그때, 예정연의 말이 들리자 서인경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예정연이 옷을 벗은 건 알고 있었지만 연기준이 그녀를 속여 옥패를 빼앗은 일은 정말 몰랐다. 그가 말해준 적이 없었으니까.“본왕은 공주에게 손가락 하나 댄 적 없습니다. 당신 야랑국에는 남자가 그리도 없는 것입니까? 공주를 우리 진국까지 보내 없는 사실을 지어내며 유부녀 남편을 뺏으려 들다니요.”연기준은 진심으로 화가 나 있었다. 그리고 틀린 말도 아니었다. 그날 밤 옷을 벗은 것도, 몸을 들이댄 것도 모두 예정연이 먼저였으니까. 그녀는 자신의 몸 안에 희태비의 심장이 있다는 걸 보여주며 연기준의 시선을 끌기 위해 한 짓이었다.예정연의 얼굴은 울분으로 붉게 달아올랐다. 말 한마디조차 제대로 못하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된 꼴이었다. 어찌 되었든 이런 일은 항상 여자가 손해를 보기 마련. 하물며 연기준처럼 딱 잘라 부정하는 남자에게는 더욱 통하지 않는 수법이었다.그녀는 예정훈의 손목을 잡아당겼다.“태자 오라버니, 제가 이런 모욕을 당하고 있지 않습니까? 오라버니께서 저를 위해 나서 주셔야죠!”예정훈은 머리가 쑤셔왔다. 감옥에 있는 그놈은 죽지 않고, 눈앞의 이 아이는 죽이면 안 되고.이번에 진국에 온 건 예정임이라는 화근을 뿌리뽑기 위한 것이었는데 뜻밖에도 골칫덩이 두 개를 더 얻었다.그의 시선이 서인경에게로 향했다. 다른 여자였다면 진작에 진국 황제를 압박해 예정연을 시집보냈을 것이다.하지만 상대가 서인경이기에 그럴 수 없었다.그는 표정을 굳힌 채 예정연을 향해 말했다.“우리 야랑국은 국력도 막강하고 너는 부황께서 가장 아끼는 딸이다. 부황께서는 애초부터 네가 타국에 시집가는 걸 절대 허락하지 않으신다. 그러니 얼른 마음을 접거라.”“그리고 어젯밤 일에 대해서는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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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87화

황제는 스스로 야랑국 공주를 후궁으로 들일 생각이 없었다. 최근 자신의 기력이 예전 같지 않음을 뚜렷하게 느끼고 있었고 단은설 하나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버거웠다.그리고 이번 일을 계기로 대황자의 황위 계승 욕심을 완전히 꺾어버렸다. 대황자가 예정임을 방조해 진국에서 사병을 키우는 짓을 했으니 말이다.그는 머리가 빈 것일 까, 아니면 욕심이 지나치게 큰 것일까?만약 그 일이 성공했더라면 위협받는 것은 결국 진국의 연 씨 황실이었다.황제는 자신의 나라를 아들의 손에 망하게 내버려둘 수 없었다.슬하의 황자들을 두루 생각해 보면 그가 유일하게 기대를 걸 수 있는 이는 배경이 없는 열셋 째 황자, 연기훈 뿐.밤마다 상왕 연기준의 기개를 돌아보면 또다시 걱정이 깊어졌다. 그래서 더더욱 연기훈에게 확실한 후원자를 붙여야 했다.서인경은 머리를 한 바퀴 굴리고 곧바로 황제의 속셈을 읽어냈다.이 일에 가장 크게 반발한 건 예정연이었다. 그녀는 거의 도약하듯 뛰어올랐다.“저는 안 갑니다! 누가 제가 열셋 째 황자에게 시집간다고 했습니까? 제가 원하는 혼인은 당신들의 상왕입니다!”이 말은 연기준이 반대하기 전에 황제가 먼저 거절할 것이다.예정연은 이해하지 못했으나 예정훈은 곧바로 알아챘다. 그는 예정연을 눌러 앉히며 입을 열었다.“폐하 진노를 거두십시오. 예정연의 혼인 문제는 부황께서 이미 정해두신 바 있습니다. 혼인 관계는 추후에 다시 상의드리는 게 좋겠습니다. 부황께서는 공주가 한 명뿐인 것도 아니니까요.”황제는 그저 담담한 표정만 지을 뿐 집요하게 밀어붙이지 않았다.“그러면 좋다. 이번에 상왕이 야랑국에 가는 김에 열셋 재 황자에게 맞는 황자비를 골라오는 게 어떻겠느냐? 황자의 생모는 일찍 세상을 떠나 그의 혼사를 챙겨줄 이가 없고 황릉을 오래 지키느라 혼례가 너무 지연되었다. 마땅히 처리해야 할 일이었으니 상왕에게 맡기겠다. 짐은 상왕을 믿는다. 반드시 열셋 째 황자에게 합당한 황자비를 골라오거라.”연기준은 뜻밖에 결혼 중매쟁이가 되었다. 그는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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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88화

태황태후가 차갑게 비웃었다.“그 계집은 혼자 애지중지하며 우리 준이를 잡아두고 그저 자기 아이의 아비로만 삼고 싶었던 게지. 예로부터 어느 남자가 첩을 거느리지 않았던 적 있었느냐? 참으로 꿈도 야무지구나! 황제는 지금 준이와 야랑국 사이에 얽힌 바를 경계하고 있지만 우리 진국의 명문가 여인 중에서 한 명을 들인다면 자연스레 경계도 풀릴 것이다. 어쩌면 그 일이 성사될지도 모르지.”유모가 놀라서 외쳤다.“태황태후, 이건 곧 상왕에게 첩을 들이시려는 뜻이옵니까?”태황태후의 늙은 얼굴에 음험한 기색이 스쳤다.“세가 여인에게 어찌 첩 자리를 허락할 수 있겠느냐? 아무리 해도 측비쯤은 되어야지! 준이는 애가가 공들여 길러온 아이다. 절대로 준이가 그 서인경 같은 천한 계집에게 휘둘리게 둘 수는 없지.”그러자 유모가 조심스레 물었다.“태황태후께서는 적임자를 염두에 두고 계시옵니까?”태황태후가 눈을 가늘게 뜨고 기억 속 인물을 더듬었다.“가이와 보이가 이미 시집가 버린 것이 한스럽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애가의 친정이 진작 상왕과 혼인으로 연결되었을 것이고 오늘날처럼 경성에서 발붙이지 못해 다시 천주로 밀려나는 신세가 되진 않았을 텐데! 다른 이들 중에 보자... 애가가 기억하는 것이 하나 있다. 호부상서 유운상이 진 가의 문생이라 했지. 그의 집에 아직 시집가지 않은 딸이 하나 있다. 진선엽에게 유 가에 가서 몇 마디 점지하게 하고 애가가 기회를 만들어주겠다고 하거라. 그걸 잡아낼 수 있는지는 유 가의 복에 달린 일이지.”유모는 알아들었다는 듯 머리를 끄덕인 후 곧 사람을 보내 전갈을 전하라고 명했다.그리고 다시 돌아왔을 때, 그 뒤에서는 황후가 따라오고 있었다.“태황태후 마마, 황후 마마께서 뵙기를 청하옵니다!”태황태후는 막 휴식을 취하고 있던 참이었으나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것은 눈물 가득한 얼굴을 하고 무릎을 꿇고 있는 황후였다.“황조모, 제발 황자를 구해주셔야 하옵니다! 폐하께서 신첩이 황자를 보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시니 신첩은 날마다 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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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89화

바로 이때, 대황자부에서는 진가이 역시 궁에서 전해진 소식을 듣게 되었다. 대황자가 황위를 노릴 희망이 사라졌다는 것이다.그녀는 바로 지금 이 순간을 기다려왔다.대황자의 자만심을 갈아 없애고 구름 위에서 곤두박질치게 해야만 그가 기꺼이 야랑국의 팔황자에게 복종할 것이고 진국에서 그의 앞잡이가 되어줄 것이다!그리 생각한 진가이는 배를 쓸어 만지며 자리에서 일어섰다.“가자, 나와 함께 입궁하자꾸나.”시녀가 급히 그녀를 부축했다.“마마, 마침내 회임하신 일을 폐하께 알리시려는 것이옵니까? 폐하와 황후 마마께서 아시면 분명 기뻐하실 것이옵니다. 어쩌면 대황자께서도 곧 풀려날 수 있을지 모르지요!”진가이는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상왕께서 곧 야랑국으로 떠나셔야 하니 마침 사람을 내보낼 때가 되긴 했지.”그 시각 서인경과 연기준은 막 궁문에 다다른 참이었다. 그때, 정면에서 걸어오는 진가이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두 사람을 보자 공손히 예를 올렸다.“왕야와 왕비 마마를 뵙습니다.”그녀는 단여월처럼 오만하게 날뛰지 않고 겉으로는 언제나 공손하고 좋은 사람처럼 굴었다. 때때로 단여월에게 괴롭힘을 당할 때조차 늘 참고 굽히는 모습이었다.그러나 서인경은 이유 없이 저 어리석은 단여월보다 진가이가 훨씬 더 위험하다고 느꼈다.서인경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며 형식적인 인사 몇 마디만 건넸다. 이윽고 두 사람은 다른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고 서로의 거리는 점점 멀어져 갔다.연기준은 서인경의 경계심을 눈치채고 동의한다는 듯 그녀를 보았다.“저 여자는 위험하다. 본왕이 경성에 없는 동안 너는 절대 그녀와 가까이하지 말거라.”유아실종 사건은 분명 그녀와 관련이 있다. 다만 아직 그녀를 체포할 증거가 없어 연기준은 한 줄기 실마리를 놓지 않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서인경은 대꾸 한마디 없이 마차에 올랐다. 연기준은 그녀가 지금 불쾌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마차 안으로 들어오고 발이 내려지자 오직 둘만 남았다.서인경의 태도에 그의 가슴은 덜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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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90화

평이가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근처에 삼진 구조의 집이 하나 있는데 여기서 멀지 않고 제 사장님의 약방과 바로 이웃해 있사옵니다. 집도 깨끗하여 새집이나 다름없지요. 다만 대로를 바로 향하지 않고 작은 골목 안에 있어 조금 은밀하고 찾기 어렵사옵니다. 집주인이 고향으로 돌아가려 해서 급히 팔 생각이라고 하던데 제가 알아보니 그 집주인은 제 사장님 친구라 안전하고 믿을 만 하옵니다. 제 사장님께서 보증도 서주실 수 있다 하셨사옵니다.”제혁이 있는 이상 서인경의 마음은 한결 놓였다. 게다가 은밀한 곳이라면 눈에 잘 띄지 않으니 오히려 더 좋았다.서인경은 굳이 보러 갈 필요도 없었다. 그녀는 바로 평이에게 은자를 건네며 말했다.“당장 가서 사 오거라. 제 사장님께 확인을 부탁하고 문서 절차는 반드시 완벽히 마쳐야 한다. 그리고 집은 네 명의로 등기하거라.”평이는 그 말에 화들짝 놀라 손사래를 쳤다.“안 되옵니다. 왕비 마마, 이건 안 되옵니다. 마마께서 내신 돈으로 사는 집인데요!”서인경은 그녀를 붙잡고 낮게 말했다.“입 밖에 내지 말거라. 이 일은 너와 나 말고는 저택 안에 있는 누구도 알아서는 안 된다. 제 사장님께도 절대 말 새지 않게 주의시키고. 네 명의로 해야 들키기 어렵다. 내 명의로 하면 내일 당장이라도 들춰낼 것이다.”평이는 그제야 조심스레 돈을 받았다.“왕비 마마, 왜 왕야께는 숨기시는 것이옵니까?”서인경이 말했다.“후일을 대비하는 거다. 구체적인 건 묻지 말거라. 그리고 한설에게도 절대 알리지 말아야 한다. 알겠느냐?”평이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봉한설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다만 그 아이는 비록 그녀의 어족 사람이지만 마음은 온전히 연기준을 향하고 있다. 서인경은 혹여 그 아이가 모든 일을 떠벌릴까 불안했다.경성의 집은 어디까지나 비상용. 정말 최악의 상황에 이른다면 서인경의 퇴로는 결코 경성이 아닐 것이다.그녀가 상왕부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봉한설이 바람처럼 뛰어들어왔다.“큰일이에요, 큰일! 진가이가 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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