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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시간을 거슬러: Chapter 691 - Chapter 700

718 Chapters

제691화

호청이 상자를 열자 그 안에는 흰빛으로 투명하게 빛나는, 탁구공만 한 크기의 구슬 하나가 들어 있었다. 겉보기엔 아무런 이상도 느껴지지 않는 물건이었다.이미 밖은 어둑해지기 시작했고 호청은 평이와 봉한설을 불렀다.“어서, 어서! 문 닫고 등불을 끄거라! 너희에게 구경할 만한 걸 보여주마!”평이와 봉한설은 그의 말대로 했고 곧이어 방 안은 어둑해졌다. 하지만 그다음 순간, 상자 속 구슬에서 환한 광채가 번쩍 퍼져 나왔다. 빛은 점점 강해져 어둠으로 잠긴 방을 단숨에 환하게 밝혀 주었다.호청은 더욱 흥분했다.“지금은 밖이 아직 완전히 어두워진 것도 아니지요. 완전히 밤이 되면 왕비 마마의 눈을 번쩍 뜨이게 할 겁니다. 등불 따위는 필요도 없을 정도로 눈부시거든요.”네 사람의 머리가 하나로 모였다. 모두 구슬을 바라보며 호기심이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너무 예뻐요! 이렇게 아름다운 구슬은 처음 봅니다! 분명 엄청 비쌀 거예요!”평이는 감탄을 참지 못하고 손을 뻗어 만져 보았다. 그녀는 매끄러운 표면에서 쉽게 손을 떼지 못했다.반면 봉한설은 아주 담담했다. 오히려 평이가 손으로 빛을 가린다고 성가셔하며 그녀를 밀쳤다.“뭐가 그리 신기합니까? 저는 이런 거 어릴 때부터 봤습니다.”호청은 눈을 부릅뜨며 얼른 고개를 돌렸다.“네가 말이냐? 네가 기억이 있던 시절부터는 줄곧 내가 돌봤는데 언제 이런 걸 봤단 말이냐? 왜 나는 모르는 것이냐?”“어머니께서 남긴 책에서 봤어요. 이건 일불락의 물건입니다. 책에 기록되어 있길, 이것을 야명주라고 부르지요. 빛을 낼 수 있고 부패를 방지하는 작용이 있습니다. 일불락에서 역대 수령이 죽으면 몸속에 한 알씩 넣어 시신이 썩지 않게 만들었대요. 몸이 썩지 않으면 만수들이 시신을 만났을 때 먹지 않고 오히려 구덩이를 파서 시신을 감추어 주니까요. 만수들은 아는 겁니다. 이 야명주로 시신을 지켜주는 자들은 일불락에서 가장 존귀한 사람이며 세대에 걸쳐 숭앙 받는 존재라는걸요.”그 말이 끝나자 모두 침묵했다. 그 누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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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92화

뜰을 벗어나자 호청은 두 사람에게 신중히 경고했다.“오늘 있었던 일은 반드시 배 속에 썩혀 넣거라. 만약 새어 나가기라도 한다면 상왕부는 멸문지화를 피하지 못할 것이다.”평소엔 천진난만하던 두 사람도 상황의 심각함을 깨닫고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연기준은 방금 방 안에서 벌어진 모든 대화를 들었다.자신의 친모의 정체가 갈수록 의문투성이로 변해간다는 사실에 연기준은 전례 없는 충격을 받았다. 한때 멸족된 것으로 알려진 그 민족이 최근 들어 어디선가에서 후손들이 속속 나타나고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인가?연기준의 마음에는 크나큰 의심과 불안이 물살처럼 밀려들었다. 서인경은 그를 위로하고 싶었다.“이 야명주는 분명 하관한 뒤에 누군가 몰래 넣은 거예요. 그 사람을 찾아야 어머님의 출신을 알 수 있습니다.”연기준은 고개를 끄덕였다.“본왕은 이미 이 모든 해에 황릉과 어머니의 관 가까이에 닿을 수 있었던 인물들을 조사하라 명했다.”서인경의 머릿속엔 의문이 가득했다.“만약 어머님의 몸이 온전하다면 그때 덕비가 가져갔다는 심장은 도대체 누구의 것입니까?”그 질문에 연기준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서인경은 이미 그가 답을 알아냈다는 것을 깨달았다.“덕비는 관을 잘못 찾았다. 심장이 도려진 건 선제의 또 다른 후궁이었다.”서인경의 머릿속이 쪼개질 듯 아파졌다.“아니... 분명 가까운 혈육의 심장만이 예정연을 살릴 수 있다면서요? 그건 결국 전부 거짓이란 말입니까? 그냥 아무거나 가져다 붙여도 된단 말입니까?”“그건 네게 묻고 싶은 말이다. 너는 의원이 아니더냐? 서 씨 부인이 남긴 의서가 그리도 많은데 심장병에 관한 내용이 적혀 있지는 않더냐?”서인경은 그 말에 순간 번개처럼 기억이 스쳤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 책장으로 달려가 책을 뒤적였다.“분명 본 적 있어요. 아직 다 못 봤을 뿐이지. 잠깐만요, 찾아볼게요.”연기준은 야명주를 들고 다가와 서인경의 시야를 밝혀주었다.숨소리조차 나지 않는 방안, 서인경은 정신없이 책을 뒤적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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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93화

연기준이 이성적이어서 서인경은 다행이라 생각했다.그는 덕비와 예정연과의 혈연을 고려하지 않고 천하의 안정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두고 있었다. 게다가 마치 애초에 그녀들과의 혈연 따위는 조금도 마음에 두지 않았던 듯했다.다만 갑작스레 드러난 희태비의 출신에 대해 서인경은 의혹과 호기심으로 가득했다.이 점은 반드시 풀어야 할 문제였다.그렇지 않으면 그녀와 연기준의 관계는…?서인경의 머리가 잠시 굳어버렸다. 혹시 그녀와 연기준이 근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번개처럼 스쳤다.설마 사촌 남매 사이인 건 아니겠지?물론 그런 관계는 고대에선 혼인도 가능하다. 하지만 현대에서 온 서인경으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녀는 생각만으로도 온몸이 근질근질하고 불편해졌다.서인경은 꼬막이를 번쩍 안아 바로 옷을 벗긴 후 손발을 이리저리 확인하기 시작했다.연기준은 촛불 하나를 밝혀 방 안이 더 환해지게 했다. 그는 의아해하며 곁으로 다가왔다.벌거벗겨진 꼬막이가 작은 침상 위에서 이리저리 굴려지고 있었기에 감기라도 들까 걱정되는 눈치였다.“무슨 일을 하는 것이냐?”서인경은 꼬막이의 팔과 다리를 들어보고 얼굴 앞에서 몇 번 소리도 질러보았다.하지만 꼬막이는 울음소리 외엔 어떤 반응도 내놓지 못했다.현대식 검사 장비도 없는 상황이라 서인경은 실망하며 다시 옷을 입혀주었다.“유전병이나 생리적 결함이 있는지 보려고요! 만약 우리 둘이 오복 안의 친족 관계면 가장 먼저 피해를 보는 건 꼬막이입니다.”연기준은 잠깐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그가 설명을 묻기도 전에 서인경은 꼬막이를 안고 침상 위에 털썩 앉았다.“말해두는데 정말 우리가 오복 안의 혈연이면 당장 헤어져야 합니다. 전 절대 혈연관계인 사람과는 같이 못 사니까요.”고대인인 연기준으로선 이해할 수 없었다.“무슨 헛소리인 것이냐? 사촌끼리 혼인하는 게 뭐 어때서?”서인경은 과학을 설명할 수 없으니 태도로 밀어붙였다.“그냥 싫다니까요. 안 됩니다.”연기준은 어이없다는 듯 그녀 옆에 앉았다.“호청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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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94화

만약 희태비가 저 세 방계 부족 중 하나의 후예라면 이야기는 흥미로워질 것이다.서인경은 문득 깨달았다.하늘이 자신을 이곳으로 보내온 이유가 혹시 일불락의 역사를 밝혀내기 위한 것일까?일불락에서 가져온 그 책은 연기준이 훨씬 빠르게 훑어보았다. 이런 기록들에 대해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나는 아직 어머니께서 어느 족인지 모르겠다. 한데 최근 일불락 후손이 빈번히 나타나는 건 좋은 징조가 아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 경계를 높여야 한다.”서인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이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 갑작스러운 변화는 반드시 큰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징조일 테니.야명주는 표적이 너무 컸다. 만약 그 물건이 일불락과 관련된 것임이 드러난다면 분명 재앙을 불러올 것이다. 서인경은 아예 그것을 약왕곡에 던져 넣었다.“어머님도 어쩌면 자신의 신분을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진국이 일불락을 경계하는 걸 생각해 보세요. 어머님께서 스스로 알고 계셨다면 기꺼이 선제 곁에 남아 있었을 리가 없습니다. 스스로도 자신의 신분을 모르는데 누가 알 수 있겠습니까? 한설은 일불락에서 가장 존귀한 자만이 죽은 뒤 야명주의 비호를 누릴 수 있다 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머님에게는 대체 어떤 존귀한 신분이 있었던 걸까요?”이 질문의 답은 연기준도 알 수 없었다.“알지 못하는 건 우선 생각하지 말자. 폐하께서 열셋 째 황자의 혼사를 재촉하고 계신다. 사흘 뒤 반드시 길을 떠나야 한다고 명하셨다. 본왕이 떠난 뒤 너는 부 안에 머물고 불필요하면 절대 바깥에 나서지 말거라.”연기준은 신중했지만 서인경은 훨씬 담담했다.“그건 소용없습니다. 폐하와 태황태후께서 저를 부르신다면 제가 어찌 안 갈 수 있겠습니까? 단은설이 후궁에서 착한 마음을 품고 있을 리 없습니다. 당신만 떠나면 어떻게든 저한테 시비 걸려고 벼르고 있을 거예요.”모두 연기준 때문에 들러붙는 저질 꽃들이라는 생각에 서인경은 그를 흘겨보았다.“이번에 혼자 나가면 얌전하게 구세요! 한둘도 감당이 안 되는데 또 생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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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95화

곧이어 들려온 연기준의 말은 마치 평지에 떨어진 한 번의 묵직한 울림 같았다.“그녀는 오늘 이미 경성을 떠났다. 이 시각이면 다음 역참에 도착했을 것이다.”서인경은 잠시 멍해졌다.“왜 갑자기 떠난 것입니까? 같이 가는 게 아니었습니까?”연기준은 고개를 저었다.“본왕은 네 할아버지와 고모를 뵈러 가야 하니 당연히 그들과 함께 출발하기는 불편하다. 그래서 예정훈에게 먼저 그녀를 데려가라 했다.”예정훈도 제법 협조적이었다.반면 서인경은 예정훈이 왜 연기준의 뜻을 따르는지 이해되지 않았다.“당신과 예정훈 사이에 무슨 수상한 거래라도 했습니까?”연기준은 그녀의 머리를 꾹 눌러 눈동자 깊숙이 반짝이는 그 호기심의 빛을 가렸다.“예정훈은 예정임을 없애고 싶어 안달이다. 본왕은 예정임이 살아서 진국을 떠나지 못하도록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그 눈빛은 무슨 뜻이냐? 마치 본왕이 다른 사내와 무슨 관계라도 있길 바라는 눈치인 것 같은데?”서인경은 눌린 채로 침상에 누워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는 꼬막이와 눈이 마주쳤다.한동안 세 식구는 한바탕 소란을 벌였다. 바깥에서 연풍이 무언가 보고할 일이 있다고 얘기하고 나서야 연기준은 비로소 두 사람을 풀어주었다.“이 며칠은 중요한 군무를 처리해야 해서 군영에서 지낼 것이다. 날 기다리지 말고 일찍 쉬거라.”서회윤이 경성에 없는 후로 군의 일은 모두 연기준의 어깨 위에 얹혔다. 이번에 오래 자리를 비운 만큼 당부할 일도 많았다.서인경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군영에서 주무실 때, 이불을 꼭 덮으세요. 감기에 걸리지 않도록 말입니다.”꼬막이는 옆에서 소리치며 엄마 말이 옳다고 거들었다.연풍은 바깥에서 두 사람의 달콤하기 그지없는 소리를 들으며 시간이 그냥 멈춰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오랫동안 연기준을 곁에서 보좌하며 지켜보았다. 고독했던 사람이 조금씩 변해 행복한 가족이 되어가는 모습을 말이다. 조정도, 군신도, 황권의 경계도 없다면 그들은 분명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가족일 것이다.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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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96화

연기준이 가까이 오자 황제는 서둘러 손짓했다.“아, 아홉 째 아우 왔는가? 어서 오너라. 이것은 어제 서왕이 두다 만 바둑이다. 아직 끝내지 못했으니 나와 함께 마저 두는 것이 어떻겠느냐?”연기준은 어쩔 수 없이 자리에 앉았다. 암류가 요동치고 살기가 감도는 자리. 두 사람은 바둑에 집중했고 곁에 서 있는 환관도 발소리를 내지 않으려 숨을 죽였다.한 판이 끝나자 황제는 두 알을 이겼다. 시원한 웃음소리가 정자 안을 가득 메웠다.황제는 알고 있었다. 조정 안에서 서왕을 제외하고 자신과 정면으로 승부를 벌이는 이는 연기준뿐임을. 이번 판은 그가 진짜로 이긴 것이다.기분이 좋아진 황제의 목소리는 더욱 들떠 있었다.“이번에 아홉 째 아우가 멀리 야랑국으로 가게 되었으니 부디 이 바둑판처럼 흉함을 길함으로 바꾸고 개가를 울리며 돌아오기를 바란다.”“신, 반드시 전력을 다하겠사옵니다.”황제의 표정이 수그러들더니 어딘가 부자연스러워졌다.“근래 군무 정리에 바쁘다 들었다. 원래는 이 길을 보내고 싶지 않았는데 말이지. 상왕비와 작은 세자와 함께 시간을 더 보내게 하고 싶었으나 황조모께서 너를 한 번 궁으로 부르라고 거듭 강조하시니 나로서도 어찌할 도리가 없더구나.”연기준은 이미 알고 있었다. 이 시각 그를 궁에 부르는 건, 결코 좋은 일이 아니라는 것을. 하지만 황제를 이렇게까지 곤란하게 만들었던 이유는 연기준도 상상하지 못한 것이었다.“폐하, 부디 말씀하십시오.”황제는 난처한 표정을 그대로 유지한 채 말을 이었다.“다 너의 후원 문제 때문이다. 들으니, 상왕비는 막북에서 작은 세자를 낳고 난 뒤로 몸이 손상되어 다시 회임하기 어려워졌다고 하더구나. 황조모께서는 너는 상왕이며 또한 우리 황실의 자손이니 무손으로 둘 수 없다 하셨다. 그래서 황조모께서 특별히 너를 위해 한 명의 규수를 골라두셨지.”연기준은 거의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바로 호부상서 유운상의 딸, 유가영이다. 그 여인은 짐이 직접 본 적 있다. 어려서부터 예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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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97화

연기준이 말했다.“상왕비의 몸이 손상되어 아이를 못 낳는 것이 아니라 신이 막북에서 다쳐 방사에 있어 마음만 있고 힘은 없사옵니다. 여인 하나의 문제가 아니라 신에게 열 명을 들여다 준들 둘째 아이는 태어나지 않을 것이옵니다. 게다가 신은 다친 뒤로 성격이 난폭해져 방사 때마다 스스로 힘을 조절하지 못하옵니다. 상왕비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신을 제압할 수 없지요. 다른 여인이 상왕부에 들어온다면 신은 힘을 조절할지 장담할 수 없사옵니다. 유 가에서 시신을 수습할 각오가 되어 있다면 신도 상관없사옵니다.”황제는 연기준의 말이 너무나도 충격적이어서 잠시 그 진위를 분간할 수 없었다. 무릇 남자가 이런 일을 가지고 농담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이쯤 말했으니 황제도 더 이상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옆의 환관에게 눈짓을 보내자 그는 곧 전답 하러 갔다.태황태후는 자신의 궁에서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환관의 보고를 듣자 그녀는 분노에 찬 채 찻잔을 바닥에 내던졌다.“이게 바로 애가가 길러낸 그 좋은 손자란 말이냐! 서 가의 여인과 혼인한 이후로 애가는 점점 더 업신여김을 받고 있다. 사내의 위엄을 손상시키는 이런 황당한 거짓말까지 지어내다니!”궁녀와 환관들은 모두 겁에 질려 무릎을 꿇었다. 그러자 유모가 급히 다가가 위로했다.“태황태후, 부디 진노를 거두소서! 아직 다른 방책도 있지 않사옵니까! 야랑국까지의 길은 아득히 멉니다. 유혹을 이겨낼 사내가 어디 있겠사옵니까!”태황태후의 눈에 어려 있던 분노가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렇지. 유혹을 견딜 수 있는 남자가 과연 몇이나 된단 말인가?연기준은 궁에서 나와 곧장 서왕부로 향했다.한편, 상왕부.연기준은 오랜만에 이렇게 몇 날 며칠을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하루만 더 지나면 야랑국으로 떠나야 하니 서인경은 내내 불안함을 감추지 못했다.그날 밤, 기다리다 지쳐 잠들었지만 끝내 기다리던 그 사람은 오지 않았다.잠을 청하던 도중에 깨어난 서인경은 곁이 여전히 텅 비어 있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곧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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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98화

서인경은 그가 무엇을 준비했는지 알지 못했다. 그저 이별이 가까워지니 둘 사이의 공기가 미묘하게 달라진 듯했다. 아쉬움, 걱정, 그리고 허전한 공백. 아직 헤어지지 않았는데도 이미 말로 하기 어려운 그리움이 스며올랐다.예전의 그녀라면 상상도 못할 감정이었다. 지금은 그 마음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도 모르겠다.꼬막이가 젖을 다 먹자 연기준은 아이를 들어 안아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데리고 나가거라. 본왕이 명하기 전까지 데리고 들어오지 말거라.”그 말이 끝날 때 즈음 문은 이미 닫혔고 잠금쇠까지 내려졌다.서인경이 말 꺼낼 틈도 없이 한 줄기 그림자가 다가와 빛을 가렸다. 덜 잠긴 옷깃이 다시금 젖혀졌다.서인경은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대낮에 무슨 짓입니까?”연기준은 손에 힘을 주며 낮게 말했다.“며칠이나 됐는데 보고 싶지 않았느냐?”대답이 필요 없었다. 연기준은 곧바로 행동으로 증명했다. 그는 원했고 매우 간절했다. 입술이 막혔고 하룻밤 동안 회복했던 기운이 단숨에 무너졌다.왕부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왕야는 내일 떠나니 오늘은 어떤 일도 방해될 수 없다는 것을.궁에서 온 사람들까지 연풍은 앞마당에서 막아 세웠다.“왕야와 왕비 마마께서는 성 밖에서 기복 중이십니다. 부재중이오니 태황태후께서 전달하실 말씀이 있다면 저에게 알려주십시오. 돌아오시면 분명히 전하겠습니다.”그는 태황태후 곁에서 잔뼈 굵은 환관이라 이런 말이 통할 리 없었다.“방금 세자를 보았다. 왕야와 왕비 마마께서 안 계시다면 세자라도 궁에 모셔가야지. 그분께서 손자를 아주 그리워하신다.”부모를 끌어내려는 속셈이었다. 그러나 왕부는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연풍이 즉시 앞을 막았다.“세자는 너무 어리시니 출부는 곤란합니다. 내관께서는 돌아가십시오.”다른 곳이었다면 환관은 이미 태황태후를 등에 업고 강제로 일을 꾸몄을 것이다.하지만 이곳은 상왕부. 그조차 함부로 하지 못하는 곳이었다.문전 박대를 당한 환관의 표정은 굳어버렸다.그도 왕야를 보아온 사람이라 예전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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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99화

서인경은 말할 힘도 없어 눈을 한 번 깜박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그러자 연기준은 가볍게 웃었다.“됐다. 더 피곤하게 하지 말고 눈 감고 좀 쉬거라.”서인경은 그의 말대로 눈을 감았다.연기준은 사흘 동안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었다. 서인경 곁에서 잠든 이 잠은 곧바로 낮 한참까지 이어졌다.창밖의 아침 햇살은 어느새 저물어 석양이 창을 물들였다.꼬막이는 배고파서 몇 번이나 울먹였지만 봉한설이 계속 붙잡아두었다.“아가, 착하지. 우선 유모 젖을 조금만 먹자꾸나. 너희 아버지랑 어머니는 지금 감정을 쌓는 중이시거든. 동생을 만들지도 모르는데 방해했다간 나중에 후회할 거다.”곁에서 듣던 평이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입 좀 다물 거라!”하지만 봉한설은 자신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면 그 말을 듣고 꼬막이가 금세 울음을 멈췄기 때문이다. 평소라면 절대 유모 젖은 안 먹으려 했을 텐데 오늘은 억지로라도 삼켰다.서인경은 하루 종일 먹지도 못한 상태에서 연기준에게 많은 체력을 빼앗겼다. 그러다 몸을 일으킬 때는 배고픔에 눈앞이 빙 돌고 다리가 풀릴 정도였다.저녁상이 차려지자 서인경은 허겁지겁 먹었다.품에 안겨 오던 꼬막이는 엄마의 먹는 모습만 봐도 다시 배가 고파져 머리를 들이밀며 품으로 파고들려 했다. 하지만 파고들기도 전에 연기준은 꼬막이를 번쩍 안아들었다.“배고프면 어머니한테만 매달리지 말고 유모를 찾거라. 아버지가 없는 동안 넌 남자다. 귀찮게 굴지 말고 어머니를 지켜야지.”서인경은 밥을 씹으며 눈을 흘겼다.“지금이라도 공중제비 하나 시켜보지 그러십니까?”꼬막이는 아직 친아버지가 자신에게 얼마나 큰 기대를 걸고 있는지 모르고 있었다. 오후가 되자 황제는 사람을 보냈다. 모든 준비가 끝났으니 연기준은 내일 첫새벽에 출발하라는 전갈이었다.이별 전 마지막 밤, 서인경은 꼬막이를 연기준 품에 꽉 안겨 두었다.“많이 안아두세요. 돌아오면 그땐 아버지라고 부를지도 모르잖아요.”연기준은 꼬막이를 한 손으로 가볍게 받쳤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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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00화

연기준이 조심해야 할 사람들을 하나하나 언급했다. 그 말투 속에 모두 걱정이 묻어 있자 서인경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참 한심한 인생입니다. 친구는 몇 명 사귀지도 못했는데 권세 있는 사람들은 왜 전부 적으로 돌렸는지 모르겠네요. 이렇게 말하니까 저도 반성하게 됩니다. 대체 뭘 하면서 살아온 건지.”연기준은 그녀의 손을 더 꼭 잡았다.서인경은 그의 걱정이 손끝으로 전해지자 살짝 웃으며 그를 안심시켰다.“걱정 마세요. 폐하께서는 저를 당신을 견제할 명분으로 남겨둔 거니까. 당신이 밖에서 독립할 움직임만 보이지 않는다면 저를 함부로 건들진 못 할 겁니다.”연기준은 낮게 웃었다.“본왕은 황권에 관심이 없다. 본왕에게 필요한 건 너희뿐이다.”서인경은 처음 이곳으로 오게 된 날을 떠올랐다. 전생의 일로 연기준을 원망하고 미워해 당장이라도 헤어지고 다시는 마주치지 않길 바랐던 때, 연기준 역시 냉정했고 그녀를 거칠게 대했었다. 서로 보기만 해도 불쾌해서 서인경은 수시로 그를 걷어차고 싶었다.그땐 상상도 못 했다. 이렇게 함께 누워 있는 평온한 밤이 올 줄은.그날 밤, 서인경은 편안히 잠들었다.환하게 날이 밝아올 무렵, 그녀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꼬막이는 어느새 깨어 침상 한가운데서 팔 다리를 쭉 뻗고 혼자 놀고 있었다. 하지만 반대편 자리는 비어 있었다. 그녀는 생각할 틈도 없이 맨발로 바닥을 딛고 허둥지둥 문을 열었다.문 앞에는 봉한설과 평이가 기다리고 있었다.서인경이 나오자 둘은 동시에 그녀를 보았다. 봉한설은 무엇을 묻고 싶은지 알고 있었기에 먼저 입을 열었다.“왕야께서는 아직 날이 밝기도 전에 떠나셨어요. 왕비 마마를 깨우지 말라 하셨고요.”서인경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녀는 어제 떠나는 시간을 묻는 걸 깜빡했던 것이다.애초에 연기준은 그녀가 배웅하는 걸 바라지 않았다. 어쩌면 떠나는 순간의 슬픔을 굳이 마주하지 않게 하려는 작은 배려였을지도 모른다.‘그래. 그냥 보내자. 배웅은 없어도 되지 않을까?’하지만 대문 밖을 바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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