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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11화

연기준의 눈빛에 어림군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태황태후가 다시 부르기도 전에 시위들은 소리 없이 뒤로 물러났다.위험이 사라졌음을 확인한 연기준은 마지막으로 침전의 정문을 한번 바라보고 어둠 속으로 바람처럼 사라졌다.침전 안.서왕비는 아이의 손을 잡고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는 아무 일 없다는 듯 고요히 예를 올렸다.“태황태후 마마께 문안드립니다.”작은 아이도 뒤따라 깨끗한 목소리로 인사했다.“태황태후 마마, 평안하시고 길하십시오!”서왕의 체면이 있으니 태황태후도 더 날을 세울 수 없었다.“일어나거라. 이 시간에 어쩐 일이냐? 애가가 너를 부른 기억은 없는데?”서왕비는 아이의 손을 이끌고 자리잡으며 말했다.“지난번 태황태후께서 주문하신 경문을 모두 필사해 두었습니다. 급히 필요하실까 싶어 곧장 가져왔지요.”그 말과 함께 뒤쪽에서 궁녀가 정갈히 다듬은 경문을 내밀었다.서왕비의 시선이 전각을 훑었다. 바닥에 쓰러져 널브러진 태감과 궁녀, 그리고 시위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은 물 한 방울 흔들리지 않는 호수처럼 고요했다.“아, 상왕비도 계셨군요? 참 오랜만입니다. 상왕께서 출정 중이라 혼자 아이를 기르시려니 얼마나 심심하겠습니까? 저희 궁에도 자주 오세요. 세자를 한참이나 못 봤더니 너무 보고 싶더군요.”서인경은 품을 낮춰 예를 갖췄다.“서왕비 마마께 문안 올립니다. 염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머지않아 반드시 찾아뵙겠습니다.”작은 아이는 눈망울을 반짝이며 호기심 가득 꼬막이를 바라봤다.“할머니, 상왕비 마마, 동생을 가까이서 봐도 되겠습니까?”서인경은 아이를 조금 더 아래로 내리며 보여주었다.“그럼, 그리해도 괜찮지.”작은 아이는 서왕비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그녀는 자연스레 태황태후를 향해 말했다.“상왕비께서 아이 둘을 데리고 어화원에 산책이라도 다녀오게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저도 오랜만에 태황태후께 여쭙고 싶은 바가 있습니다. 경문 중에 이해가 어려운 내용이 있어 조언을 얻고자 합니다.”태황태후의 표정이 듣기 싫다는 듯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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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12화

그런데 그녀를 더욱 분하고 울분 터지게 하는 건 저렇게 제 손에 딱 맞는 인재가 왜 하필 서인경을 부인으로 택했느냐는 것이다. 그때 그녀가 하루만 더 일찍 경성으로 돌아왔더라면 이 모든 일을 막을 수 있었을 텐데.태황태후는 분노와 후회, 질투와 자책이 한꺼번에 뒤섞여 당장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서왕비가 먼저 나섰다.“정화야, 상왕비를 모시고 어화원에 가서 바람이라도 쐬고 오렴. 네가 그렇게나 조르던 귀뚜라미도 좀 잡아다가 할아버지께 드리고.”정화라 불린 작은 아이는 환하게 눈을 빛내며 서인경의 손을 잡았다.“왕야께서 저번에 저한테 귀뚜라미 세 마리나 잡아주셨어요! 왕비 마마께서는 왕야한테 지면 안됩니다.”서인경은 곧바로 서왕비를 바라봤다. 그녀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태황태후에게 단 한 번의 시선도 주지 않은 채 정화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문턱을 넘어서는 순간, 쨍그랑 거리는 소리와 함께 안에서 무언가 박살 나는 소리가 터졌다.가슴을 내리누르는 그 소리에 꼬막이가 서인경의 품 안에서 움찔했다. 서인경은 뒤를 돌아보며 걱정스러운 눈길을 보냈다. 그때 정화가 그녀의 손을 꼬옥 당겼다.“왕비 마마, 걱정 마세요. 할머니께서 그러셨거든요. 뭘 보든, 뭘 듣든 저만 따라오면 된다고요. 태황태후 마마께서는 할머니한테 나쁜 짓 못 할 겁니다.”분명 서왕비는 서인경을 구해주러 온 것이었다. 모든 상황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이 순간, 서인경은 그 은혜를 마음속 깊이 새겼다.침전 안.쓰러진 궁인들을 정리시키고 나니 넓은 전각엔 태황태후와 서왕비 단 둘만 남았다.태황태후의 얼굴은 분노로 일그러졌고 지금 당장 멱살이라도 잡아 찢어버리고 싶었다.“말해라. 왜 저 계집을 감싼 것이냐? 상왕비가 너에게 무슨 이득을 주더냐!”서왕비는 고요히 옷자락을 걷고 단정히 무릎을 꿇었다.“신첩이 태황태후께 불경하였으니 죄를 달게 받겠습니다. 상왕비는 신첩에게 아무것도 준 것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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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13화

정화는 서인경의 손을 꼭 잡은 채, 태황태후의 침전에서 당당히 걸어 나왔다. 문 앞을 지키던 시위들조차 감히 막지 못했다.대문을 나서는 순간, 멀리서 열다섯 째 황자와 맹은영이 이쪽을 향해 초조하게 목을 길게 빼고 있었다. 두 사람은 서인경의 모습을 확인하자 마치 묶여있던 숨을 터뜨리는 듯 한달음에 뛰어왔다.“이모! 이모와 유청은 괜찮습니까? 태황태후께서 혹여 괴롭히지는 않았습니까?”“봅시다. 마마와 꼬막이는 다친 데 없는 겁니까?”그들은 문 앞에서 한참이나 서성였지만 시위들이 완강히 막는 바람에 더는 발을 들이지 못했던 것이다. 여러 명의 어위를 거느린 금군이 두 차례나 안으로 들어가는 걸 보며 속이 새까맣게 타 들어갈 지경이었다.서인경은 고개를 젓고는 곁에 있는 정화에게로 시선을 내렸다.“모두 정화 공주의 덕분이다. 일단 이야기할 곳으로 옮기자꾸나. 어화원으로 가자.”그리하여 모두 태황태후의 영역을 벗어나 어화원으로 향했다.그곳에서 막 방금 전의 일을 전해 들은 맹은영은 더는 참지 못하고 씩씩거리며 가는 길 내내 욕설을 쏟아냈다.“아니 태황태후께서 이렇게까지 뻔뻔하게 나오다니요. 체면도 양심도 다 버리셨나 봅니다?”열다섯 째 황자는 다급히 그녀의 소매를 잡아당겼다.“은영 누님, 여긴 후궁입니다. 말 조심하셔야지요.”맹은영은 그제야 입을 꾹 다물었지만 분통이 목 언저리에 그대로 매달린 듯 여전히 이를 갈았다.“저희 아버지께서 이미 폐하께 사람을 보냈다고 했습니다. 원래 폐하께서 당장 구해주러 오실 상황이었는데 그 뻔뻔한 단은설이 도대체 무슨 요사스러운 수를 부렸는지 감히 누구도 통전하러 들어가지 못하게 했답니다.”열다섯 째 황자의 이마에도 깊은 주름이 파였다.“원래는 신비 마마께 알려 이모를 도우려 했습니다. 한데 어찌 된 일인지 이모께서 입궁하시기 직전 열여덟 째 공주가 갑자기 고열을 앓기 시작했고 신비 마마께서는 한순간도 자리를 뜨지 않고 지키고 계셨습니다. 심지어 낯선 금군들이 그 문을 지키고 있어 저조차 가까이 갈 수가 없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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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14화

그제야 황제는 서인경이 아직도 태황태후의 궁 안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금 그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지 전혀 알 수 없다는 현실이 늦게서야 뼈아프게 스쳤다.서인경이 털끝 하나라도 다친다면 그는 무슨 낯으로 연기준 앞에 선단 말인가?황제의 마음속에서 들끓는 모든 불안과 짜증은 하나같이 단은설 탓으로 번졌다.단은설 또한 눈치채고 있었다. 연기준의 갑작스런 등장 탓에 황제의 시선이 더 차갑게 멀어졌다는 것을. 방금 전까지 침상 위에 허락된 애정이라 믿었던 것들이 이제는 수치와 굴욕으로 변해갔다.황제의 싸늘한 태도는 그녀를 완전히 무너뜨렸다.어서재를 나서던 길에 단은설은 연기준을 마주쳤다.그는 여전히 좁은 소매와 단단한 몸짓에 매서운 눈매를 가진 사내였다. 눈길 한 번이면 누구든 숨이 막혀 돌아보게 되는 존재. 하지만 그는 단은설의 곁을 지나치면서도 한 번도 그녀를 보지 않았다. 그녀는 걸음을 멈춘 채 연기준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그저 멍하니 서 있었다. 예전엔 그도 그녀에게 웃어주고 부드러운 말도 건넸다. 물론 그 온기도 오직 봉한설을 구해준 뒤부터만 가능했던 것이었다. 언제부터였을까? 그 목적이 깔린 조각마저 깨끗하게 사라져 버린 게.기억을 더듬고 또 더듬어 마침내 하나의 결론에 도달했다.서인경이 그녀를 싱왕부에서 쫓아냈을 때부터. 그때부터 모든 게 달라졌다.서인경은 그녀가 사랑하는 사내의 아이를 품고 새 생명을 낳았다. 하지만 단은설에게 주어진 것은 늙은 사내의 몸 아래에서 피를 바쳐 얻는 가식적인 총애뿐이었다.쓰디쓴 모욕감이 가슴팍을 파고들었다. 증오가 들불처럼 번져 궁으로 향하는 단은설의 발걸음은 더욱 차갑게 변해갔다. 뒤따르던 궁녀들은 휘청거리며 그녀를 진정시키려 했다.“마마… 제발 노여움 푸십시오. 폐하께서는 국사로 심란하셨을 뿐입니다. 밤이 되면 분명 다시 마마를 처소로 불러들일 겁니다.”하지만 방금 연기준을 본 단은설에게 황제는 그저 역겨운 현실에 지나지 않았다. 좋은 맛이 감도는 고기 대신 썩은 고기를 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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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15화

신비의 침전.서늘한 적막과 절망이 방 안에 내려앉아 있었다. 태의가 바닥에 엎드린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마마… 저는 정말이지 힘이 다했습니다.”순식간에 방 안 가득한 궁녀와 환관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신비의 머릿속이 텅 비어 울리고 눈앞이 빙글 도는 가운데 몸이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궁녀가 급히 달려와 그녀를 부축했다.“마마, 정신을 부여잡으셔야 합니다. 제발요...”열일곱 째 황자는 침상 가장자리에 앉아 겁에 질려 엉엉 울고 있었다.“아가야, 아가야 일어나! 제발 일어나서 나랑 놀자! 이제 장난감 절대 뺏지 않을게. 제발…”신비의 눈동자가 피처럼 붉게 물들었다. 그녀는 태의의 옷깃을 움켜쥐고 그를 세차게 끌어올렸다.“어제까지 아무렇지 않았다면서! 그저 감기였다고 하지 않았느냐! 한데 어찌 하루 만에 죽을 수가 있는 것이냐!”태의는 겁과 무력함에 입술이 부르르 떨렸다.“저도 알 수 없습니다. 어찌하여 병세가 이리도 급격히 악화되었는지 말입니다. 그저 제가 무능할 뿐입니다.”신비는 흐느끼며 휘청거리다 열여덟 째 공주의 조그만 몸을 품에 안았다.그녀의 손이 떨렸고 뜨거운 뺨에 닿는 순간 눈물이 주체 없이 쏟아졌다.“아닐 거야, 그럴 리 없어…! 우리 아이는 그저 잠이 든 것뿐이야. 열만 내리면 분명 괜찮아질 거야. 아가야, 제발 눈 한 번만 떠보거라. 어미가 여기 있으니 어서…”그 순간, 서인경이 문으로 들어서며 신비의 절규를 온몸으로 들이받았다.열다섯 째 황자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재빨리 뛰어 들어왔다.열여덟 째 공주의 작은 얼굴은 이상할 만큼 붉고 뜨거웠다. 그 모습에 가슴이 찢길 듯 아려 그는 서인경을 향해 살려 달라는 듯 고개를 들었다.“이모…”서인경은 잽싸게 꼬막이를 봉한설에게 맡기고 침상 앞으로 곧장 걸음을 옮겼다.“아이를 봐도 되겠습니까?”맥을 짚고 눈꺼풀을 들어 올려 확인해 보았다. 발열처럼 보였지만 맥에는 분명 음흉한 다른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서인경의 목소리가 낮게, 그러나 확실하게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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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16화

“왕비 마마, 부디 열여덟 째 공주께서 더는 고통받지 않게 해주십시오. 계속 손을 대면 공주께서 더 괴로워지실 뿐입니다.”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서인경이 날카롭게 고개를 홱 돌렸다.“네가 못 살린다고 해서 나도 못 살린다는 법은 없지. 나가거라!”호통에 놀란 태의는 어설프게 엎드리다시피 인사하곤 씩씩대며 문밖으로 물러났다. ‘설마 상왕비가 전설처럼 사람을 죽음에서 되살리는 기적을 해낼 수 있겠는가? 좋다, 두고 보지. 감히 하늘을 모르고 날뛰는 이 왕비가 어떻게 망신을 당하는지.’잠시 뒤, 침전 안에는 서인경과 열여덟 째 공주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서인경은 이미 확신하고 있었다. 열여덟 째 공주의 열병은 단순한 풍한이 아니라 독이라는 것을.그녀는 재빠르게 약왕곡에서 가져온 온천수를 탕에 붓고 공주의 옷을 벗겨 아이의 몸을 조심스레 물속에 담갔다. 그리고 공주의 열 손가락 끝에서 한 그릇을 가득 채울 만큼의 피를 뽑아냈다. 피는 새까맣게 변해 있었고 기묘할 정도로 달콤하고 진한 향이 피어올랐다.이 독은 천층기(千层机). 사람의 면역을 무너뜨리는 작용이 있었다.중독 초기에는 그저 열이 오르는 평범한 병처럼 보이지만 어떤 해열약도 듣지 않는다. 제때 독을 빼내지 못한다면 열은 계속 치솟고 결국엔 뇌가 타들어가듯 손상을 입게 될 것이다. 가벼우면 평생을 멍청이로 살고 심하면 바로 죽음에도 이를 수 있는 치명적인 독이었다.열여덟 째 공주는 아직 세 살도 되지 않은 아이였다. 그런 아이에게 사용된 이 독의 양을 따져보면 명백히 살인이 목적이었다.그저 신비가 나서서 아이를 구하지 못하도록 막기 위해 이런 짓을 한 것이다. 그 악랄함에 서인경의 속은 이미 피가 끓듯 뒤집혔다.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할 만큼 잔혹한 방식으로 응징하고 싶을 정도였다.한편, 그 시각 어서재.황제는 잔뜩 굳은 얼굴로 마땅히 이미 길을 떠났어야 할 연기준을 바라보고 있었다.“상왕, 이게 무슨 뜻이냐? 설마 공개적으로 어명을 거스르겠다는 것이냐?”연기준은 피하지 않고 곧장 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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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17화

신비는 처음에 간절한 마음으로 조용히 소식을 기다렸다. 그러다 가끔씩 벌떡 일어나 문 쪽을 바라보며 혹시나 하는 기대를 거듭했다. 하지만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녀의 마음은 조급해지고 참을성은 금세 바닥났다. 몇 번이나 문을 부수고 들어가려 했지만 그때마다 맹은영이 급히 붙잡아 말렸다.“신비 마마, 제발 마음을 가라앉히세요. 들려오는 소식이 없다는 건 아직 희망이 있다는 뜻입니다. 왕비 마마께서는 분명 열여덟 째 공주님을 살려내실 겁니다. 지금 마마께서 하실 수 있는 일도, 딱히 다른 길도 없지 않습니까? 이번만큼은 왕비 마마를 믿어주세요.”같이 쫓겨난 곽 태의는 그 모습을 보며 혀를 차고 비웃어댔다.“제가 손을 써도 살릴 수 없던 아이를 그깟 상왕비가 무슨 능력으로 살린다는 건지… 참으로 뻔뻔하기 짝이 없군요. 상왕비라 해서 다 허락되는 줄 아십니까? 전 반드시 폐하께 상주하여 마마께서 사람 목숨을 가지고 장난한 죄를 물을 것입니다!”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맹은영의 성깔이 폭발했다. 그녀는 그대로 곽 태의를 걷어차 바닥에 나동그라뜨렸다.“헛소리하지 마세요. 이 썩은 물에 빠진 개 다리만도 못한 양반 같으니라고! 열도 못 잡는 주제에 어디서 잘난 척입니까! 당신의 무능 때문에 열여덟 째 공주님께서 죽을 뻔했는데도 지금 와서 남 탓인 겁니까? 이 일이 마무리되면 저희 아버지와 오라버니한테 말하여 상주를 올릴 테니 각오하십시오! 당신 같은 돌팔이는 목을 베어 성문 위에 걸어둬야 마땅합니다!”수십 년을 태의원에서 존대만 받고 살아온 곽 태의는 한낱 애송이에게 발로 차이고 모욕까지 당하자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너무 설치지 마십시오! 어쩌면 열여덟 째 공주님은 벌써 숨이 끊겼을지도 모릅니다. 왕비 마마께서 시간만 질질 끌며 속임수를 부리는 건, 죽은 이를 모독하는 짓입니다! 이렇게 가면 공주님께서는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할 겁니다.”그 순간, 신비의 눈이 벌겋게 충혈되더니 따귀가 번개처럼 날아갔다.“누가 죽었다고? 지금 누가 죽었다고 했느냐? 그 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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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18화

단은설은 말을 끝내자마자 당연한 듯 주좌에 몸을 기댔다.“들거라! 안으로 들어가 상왕비를 모셔 나오거라. 여긴 후궁이다. 그녀가 제멋대로 날뛰는 곳이 아니란 말이다. 그리고 폐하께도 즉시 전하거라. 열여덟 째 공주께서 방금 승하하셨다고.”명령과 동시에 한 무리의 태감들이 침전으로 걸음을 옮겼고 또 다른 태감은 바깥으로 뛰쳐나가 황제에게 보고하려 했다.“멈춰라!”신비의 목소리가 칼날처럼 울렸다.“열여덟 째 공주는 아직 멀쩡하다! 누가 감히 허튼소리를 하는 것이냐? 본궁이 그 자리에서 목을 베겠다!”그 말에, 침전 앞을 지키던 태감들은 단은설 측의 태감들에게 가로막았다.맹은영도 팔을 쫙 벌려 침전 문을 막아섰다.“왕비 마마께서 나오기 전까지 누구도 못 들어갑니다! 치료를 방해해 열여덟 째 공주께서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그 죄를 누가 감당하겠다는 겁니까!”곽 태의는 목을 뻣뻣이 세우며 되받아쳤다.“시간이 이리도 많이 지났으니 공주께서는 이미 오래전에 숨이 끊어진 겁니다! 왕비 마마께서 공주를 희생해 자신의 무모함을 과시하는 건 죽은 자를 모욕하는 짓입니다!”맹은영의 눈빛이 활활 타올랐다.“보아하니, 아까 맞은 게 부족했나 보네요?”곽 태의는 소스라치게 몸을 떨며 단은설에게 눈짓으로 살려달라 호소했다.그녀의 시선은 굳게 닫힌 침전의 문 위에 머물러 있었다.안에서 서인경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절대로 그녀가 공주를 살려내게 둘 수는 없었다.신비가 딸의 죽음을 온전히 느껴야만 그 감정의 공백 속에서 단은설은 그녀를 자기 편으로 돌릴 수 있을 테니까. 그녀의 의도는 분명했다.“본궁도 신비 마마께서 애틋한 모정에 괴로워하심은 이해하지만 공주님의 목숨이 달린 중대한 일입니다. 본궁으로서는 더는 상왕비의 방자함을 묵과할 수 없습니다.”단은설이 손을 들어 올렸다.“여봐라. 신비 마마와 맹 아가씨를 치우고 문을 부수거라.”그녀가 준비해온 순간이었다.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바깥에서 철갑에 몸을 감싼 어림군이 우르르 들이닥쳤다. 그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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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19화

“멈춰라!”날카로운 외침과 함께, 열다섯 째 황자가 갑자기 달려들어 문 앞을 가로막았다.통령은 이미 다리를 들어 올린 뒤였고 발길은 황자의 작은 몸을 향해 곧장 내리꽂힐 듯했다. 그 순간, 옆에서 번개처럼 뛰어든 한 사람이 황자를 끌어안아 몸을 감쌌다.쾅!발길은 그대로 그 사람의 등에 깊숙이 박혔다. 열다섯 째 황자는 순간 얼어붙었다.익숙한 냄새. 낮고 억눌린 신음 소리.자신 앞에서 몸을 떨며 아이를 지킨 사람에 단은설의 얼굴이 단숨에 화로 변했다.“감히! 어디서 굴러먹던 천한 것들이 본궁 앞에서 설치느냐!”위급한 순간, 열다섯 째 황자를 몸으로 막아선 이는 수수한 유모 차림을 한 궁노였다. 그녀는 황자가 다치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는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저는 신비 마마의 종입니다. 방금은 주인을 지키려다 황귀비 마마를 범하였습니다. 열다섯 째 황자는 어디까지나 폐하의 친혈육이지요. 만약 조금이라도 상처가 났다면 저희들의 실책이오니 노여움 거두어 주옵소서.”말은 자신을 낮추는 듯했지만, 그 속엔 황자를 다치게 할 수는 없다는 명확한 경고가 담겨 있었다.단은설의 얼굴은 순식간에 굳어졌다. 자길 거역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치가 떨렸다.“여봐라. 이 버르장머리 없는 천 것을 당장 끌어내거라!”“잠깐!”“잠깐!”열다섯 째 황자와 신비가 동시에 외쳤다.신비는 황자를 향해 눈빛으로 말하지 말라고 신호를 보냈다. 황자는 유모를 한 번 바라보고는 삼켜낸 말을 목울대를 따라 흘려보냈다.신비가 단은설을 향해 곧장 돌아섰다.“제 궁의 사람은 제가 알아서 다스립니다. 방금 그녀는 열다섯 째 황자를 살린 공을 세웠습니다. 황자를 향한 발길질이 오늘 그대로 꽂혔다면 이 어림군 통령은 몇 개의 목숨으로 그 죄를 감당했겠습니까?”통령은 그 말을 듣기 무섭게 식은땀을 흘리며 거꾸러지듯 무릎을 꿇었다.“고의가 아니옵니다. 신비 마마, 용서해 주십시오!”단은설은 황귀비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지금 이 상황에서 한낱 유모 하나 마음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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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20화

서인경은 깜짝 놀라 신비를 부축해 일으켰다.“이러시면 안 됩니다!”은혜를 갚겠다는 예를 올려서는 안되었다. 오늘의 화는 애초에 자신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으니까. 만약 열여덟 째 공주를 살려내지 못했다면 죽어 마땅한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그리고 이 사달을 만든 진짜 원흉.서인경은 고개를 들어 좌상단에서 분노로 일그러진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단은설을 바라보았다.“황귀비 마마의 소식력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열여덟 째 공주께서 병이 났다는 사실을 폐하보다 먼저 아셨으니 말입니다.”신비의 시선도 단숨에 단은설에게로 향했다.“열여덟 째 공주가 병이 난 일이 설마 마마와 관련이 있다는 말입니까?”단은설은 얼굴이 확 붉어지며 즉시 부인했다.“신비, 함부로 모함하지 마십시오! 본궁은 이전에 단 한 번도 마마의 궁에 든 적 없습니다. 마마의 딸이 아픈 건 마마께서 돌보지 못한 탓이지 왜 본궁에게 덮어씌우려 합니까!”“그건 장담하지 못하지요.”서인경의 입꼬리가 천천히 비스듬히 올라갔다. 그 미세한 웃음만으로도 단은설은 등골이 서늘해졌다.“열여덟 째 공주는 아픈 게 아니라 중독된 겁니다.”신비는 겨우 가라앉혔던 숨이 다시 거칠게 치솟았다.“뭐라고요? 중독이라니요? 어떤 독이길래…?”서인경은 단은설의 얼굴을 살피며 설명을 이어갔다.“천층기라는 독입니다. 중독되면 고열이 떨어지지 않지요. 처음엔 그저 감기처럼 보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뇌를 태워버립니다. 가벼우면 사람을 멍청하게 만들고 심하면 바로 죽게 되지요. 열여덟 째 공주에게 쓰인 양으로 보아 명백히 죽이려는 의도가 있었던 게 분명합니다. 애초에 살릴 생각이 전혀 없었던 것이지요.”신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품에 있는 아이가 멀쩡히 숨 쉬고 있는 것이 기적처럼 느껴졌다. 죽음 바로 앞까지 갔다 돌아온 사실을 뒤늦게 실감하자 온몸이 서늘해졌다.신비는 떨리는 시선으로 단은설을 바라보았다.“마마께서 그런 겁니까?”단은설의 얼굴이 순간 백지처럼 질렸다.“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본궁이 열여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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