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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41화

희태비와 연도현 사이에 정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그러나 지금, 연도현의 출생 비밀이 만천하에 드러난 이상 태황태후에게는 이미 살해 동기가 성립된 셈이었다.이제 무슨 말을 한들, 조정의 대신들이 믿어 주겠는가?태황태후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연기준을 노려보았다.“내가 너를 과소평가했구나! 그토록 공들여 길러냈더니 내 손으로 적을 키운 셈이었단 말이냐. 좋다, 좋다. 희태비가 참으로 훌륭한 아들을 두었구나!”연기준은 냉정한 눈으로 그녀를 마주했다.“그렇다면 이제 인정하십니까? 성조 선제의 유조를 바꾸고 제 모친과 열셋 째 황숙을 죽인 사실을.”태황태후는 돌연 격앙되어 목소리가 한층 높아졌다.“그는 네 열셋 째 황숙이 아니다! 그자는 그 천한 계집과 죽은 사내 사이에서 난 자식이다. 그 계집은 나를 속였고 성조 선제를 속였으며 감히 진국 황실의 혈통을 어지럽히려 했다. 나는 그 여인의 아들을 죽였을 뿐이다. 그게 어찌 잘못이란 말이냐? 오히려 너무도 관대한 처분이었다! 나는 그 여인의 뼈를 파내어 채찍질하고 재로 만들어 흩어 버리고 싶었다!”서인경은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연기준이 왜 굳이 연도현의 출생을 이 자리에서 폭로했는지 아직 완전히 이해되지 않았다.모친의 원수를 갚고자 하는 마음은 알겠다. 그러나 연도현의 신분을 드러내는 것이 지금 그가 원하는 바에 어떤 도움이 되는가?그녀는 묻지 않았다. 연기준이 경계를 넘지 않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태황태후는 연도현이 황실의 혈통을 어지럽힌 존재라 여겼다. 그렇기에 자신이 내린 처분은 당연하다고 확신했다. 그러니 오늘 연기준은 반드시 무너지리라.그러나 순간, 흐름이 다시 뒤집혔다. 맑던 하늘이 또다시 먹구름으로 덮이는 듯 했다.갑자기 연기준이 또 하나의 비밀을 꺼내 들었기 때문이다.“성조 선제께서는 어리석은 분이 아니셨습니다. 그 과부의 뱃속 아이가 누구의 핏줄인지 이미 조사하셨거든요. 그리고 태황태후께서 황적자를 잉태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모두 알고 계셨습니다.”태황태후의 눈이 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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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42화

맹국공의 낭랑한 음성이 멎자 대전은 오래도록 숨조차 쉬지 못한 듯 고요에 잠겼다.기이할 만큼 무거운 정적 속에서 태황태후는 마치 벼락을 맞은 사람처럼 굳어 있었다. 발밑이 흔들리듯 비틀거리며 서지도 못하자 곁의 유모가 황급히 부축했다.“태황태후 마마!”태황태후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연기준을 노려보았다.“이 서신은 어디서 난 것이냐? 성조 선제의 친필을 위조하다니, 그건 사형감이다!”맹국공은 조용히 서신을 펼쳐 태황태후에게 내밀었다.“제가 확인했습니다. 분명 성조 선제의 필적입니다. 태황태후, 열셋 째 왕야는 성조 선제의 혈맥이 맞으니 정통으로 대통을 이을 자격이 있습니다.”태황태후는 서신을 낚아채듯 받아들고 한 줄 훑어보았다.손끝이 떨렸다.“어찌 이런 일이… 모두가 나를 속였단 말이냐? 성조 선제조차 끝내 나에게 한 수를 두고 갔단 말이냐!”성조 선제는 그녀에게 용두 지팡이와 인패를 하사하며 몸을 지키라 했다. 태황태후는 그것이 자신을 향한 유일무이한 사랑이라 믿어 왔다. 일생일대의 연인은 아니었으나 함께 전장을 누비고 생사를 건넌 부부였다. 서로를 믿고 예를 지킨 사이. 그것이 그녀가 평생 품어 온 자부심이었다.그런데 성조 선제는 또 다른 서신을 남겨 연도현을 지키려 했다.그는 언젠가 태황태후가 연도현의 신분을 문제 삼을 날을 예상했던 것이다. 가장 사랑했던 이에게 경계당했다는 사실은 배신보다도 더 깊게 가슴을 찔렀다. 평생 쌓아온 신뢰가 이 순간 산산이 부서졌다.태황태후는 이를 악물었다.“그래, 내가 어리석었다! 내가 순진했다! 연기준, 네 말이 맞다. 내가 네 어미 희태비와 열셋 째에게 사약을 내렸다! 헌데 넌 깨끗한 줄 아느냐? 그 둘의 관계는 분명 떳떳하지 않았다. 네 어미는 선제를 배신했다. 그러니 나는 명분에 따라 처형했을 뿐이다!”연기준의 표정은 흔들림이 없었다. 모친을 향한 모욕조차 그를 흔들지 못하는 듯했다.“사람은 이미 세상에 없습니다. 그러니 증거도 없지요. 태황태후께서 분노를 풀기 위해 멋대로 덧칠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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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43화

금수 대장공주는 오래전부터 연도현의 죽음이 수상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죽음이 자신을 낳아 준 친어머니의 짓일 거라고는 단 한 번도 상상하지 못했다.그토록 집요하게 매달려 왔던 진실에 대한 갈망은 이제 허망하게 꺼져 버렸다.다른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진국의 조정이 어지러워질수록 오히려 그녀에게는 기회였으니.금수 대장공주의 가슴에 남은 것은 오직 팽팽히 부풀어 오른 야심뿐이었다.그녀는 곁의 시녀에게 낮게 일렀다.“우리 사람들을 준비시키도록 하거라.”시녀는 고개를 숙이고 돌아서서 금란전을 빠져나갔다.대전 안.황제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연도현이 연 씨 황실의 혈통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하며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황위가 더욱 굳어졌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 기쁨은 채 가시기도 전에 뒤집혔다. 가슴 깊은 곳에서 알 수 없는 불안이 피어올랐다.연기준이 괜히 이 판을 벌였을 리 없다. 그가 다음에 무엇을 꺼낼지 황제는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죽었다 살아 돌아온 뒤 그가 내딛는 모든 수는 황제의 계산을 벗어나고 있었다. 그 통제 불능이 황제로 하여금 더욱 그를 경계하게 만들었다.오늘 일을 여기서 끝내야 했다.“열셋 째 황숙은 이미 오래전에 세상을 떠났다. 그가 성조 선제의 혈맥임이 밝혀졌다면 이 일은 더 이상 거론하지 않겠다. 황조모께서도 피로하시니 어서 모셔 가거라. 그리고 어림군을 제외한 모든 인원은 모두 물러나도록.”태황태후는 억울함을 삼키지 못했으나 이미 심신이 지쳐 유모의 부축을 받으며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그러나 몇 걸음 떼기도 전에 서인경이 앞을 가로막았다.“아직 끝난 일이 아닙니다. 폐하께서 사람들을 이 자리에 모으셨다가 이제 와 서둘러 흩어지게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혹시 일이 예상 밖으로 흘러가 이후 전개가 폐하께 불리할까 염려되시는 겁니까?”황제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는 노골적으로 서인경을 노려보았다.“방자하다! 상왕비, 그대와 상왕이 천자를 속이고 죽음을 위장한 죄를 내가 묵인한 것만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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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44화

연기준은 허리에서 뽑아 든 단도를 서인경의 손에 쥐여 주었다.“본왕이 있다. 하고 싶은 말은 모두 하거라.”그 한마디가 주는 절대적인 신뢰. 그것이야말로 서인경이 지금 이 자리에 서 있을 수 있는 힘이었다.그녀는 단도를 움켜쥐고 금란전 용좌에 앉은 이를 곧게 바라보았다.“폐하께서는 상왕께 친히 성지를 내리셨습니다. 저를 누구도 함부로 부르지 못하게 하겠다고. 그 성지가 있었기에 상왕은 안심하고 경성을 떠날 수 있었습니다. 헌데 상왕께서 떠나자마자 폐하께서는 약속을 번복하셨지요. 온갖 이유를 붙여 저를 빈번히 궁으로 불러들이셨고 후궁의 비빈들에게 진맥을 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단은설의 맥을 짚던 그날, 저를 그녀의 침궁 지하 밀실에 가두셨지요. 또한 상왕부에 불을 지른 것도 폐하의 사람입니다. 저를 궁에 묶어 두기 위해, 바깥으로는 제가 불길 속에 죽었다고 공표하셨지요. 폐하께서 저를 후궁에 가둔 채 오랫동안 무엇을 하셨는지, 이 모든 일을 왜 벌이셨는지, 감히 이 자리에서 하나하나 밝히실 수 있습니까?”대전이 술렁였다.대신들의 얼굴에는 경악과 혼란이 동시에 스쳤다. 황제가 정말 상왕비를 그렇게 대했다는 말인가? 도대체 무슨 이유로?황제의 숨이 거칠어졌다. 가슴이 불길에 던져진 듯 들끓었다.억지로 냉정을 붙들려 했으나 핏속에서 무엇인가 들끓는 듯 진정이 되지 않았다. 점점 통제할 수 없이 격해졌다.“상왕비! 상왕이 뒤에 있다고 감히 이곳에서 허언을 늘어놓느냐? 네가 말한 일들, 짐은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증거는 있느냐? 감히 짐을 모함하는 증거를 내놓아라!”그는 확신하고 있었다. 서인경에게는 증거가 없다고.모든 과정을 지켜본 단은설은 그녀를 증오하고 있었다. 그러니 결코 서인경 편에 서지 않을 것이다.서인경은 황제의 얼굴을 응시했다. 핏기가 치솟은 낯빛과 불안정한 눈동자를 보고 있노라니 문득 양심전에서 풍 내관이 황제에게 올리던 그 약이 떠올랐다.그는 연기준의 사람인데 그 손을 거친 약이 과연 원래의 약이었을까?서인경은 옆을 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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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45화

단은설은 입을 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몸에 남은 칼자국 하나하나는 황제가 피를 마셔 병을 다스렸다는 살아 있는 증거였다.황제는 단은설이 이 자리에 나타나는 것을 결코 허락할 수 없었다.자신의 병세, 피를 마셔 연명해 온 사실, 그리고 장생불사 약을 만들고 있다는 비밀, 그 어느 하나도 세상에 드러나서는 안 됐다.그 생각이 미치자 황제의 눈빛은 서늘하게 식어 갔다. 단은설도, 자신의 병을 아는 자들도, 장생불사 약을 제조하던 태의들까지 모두 없애야 할 존재로 보이기 시작했다.서인경은 이미 그 속내를 읽고 있었다. 그래서 가장 먼저 단은설의 이름을 꺼낸 것이다.단은설은 황제를 등에 업었다고 믿고 있었다. 그 힘으로 자신을 벼랑 끝에 세웠다고 생각했겠지.그렇다면 이제 그 힘이 돌아서는 기분을 직접 맛보게 해 주면 된다.서인경은 더는 밀어붙이지 않았다. 오히려 한 발 물러선 듯 고개를 끄덕였다.“좋습니다. 첫 번째 증거를 폐하께서 막으셨으니 그럼 두 번째 증거를 말씀드리죠.”그녀는 소매 속에서 노란 빛의 패를 꺼냈다.“상왕부에 불이 났던 그날 밤, 방화를 시도하다 붙잡힌 자에게서 떨어진 물건입니다. 황실 전용의 패더군요. 오직 폐하의 명을 받는 호위만이 지닐 수 있는 물건이기도 합니다. 감히 묻겠습니다, 왜 상왕부에 불을 지르셨습니까? 그리고 왜 유가영을 내세워 새 상왕부를 짓게 하셨습니까? 그 새 상왕부를 통해 진국 무장들의 마음을 거두려 한 일, 성과는 좀 있으셨습니까?”황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말도 안 된다! 그날 짐이 보낸 것은 환관 둘뿐이다! 그런 패는 없었다! 어디서 훔쳐 온 물건으로 짐을 모함하려 드느냐!”서인경이 고개를 갸웃했다. 손에 든 패를 천천히 굴리며 중얼거리듯 말했다.“아… 환관 둘이었군요. 그럼 여쭙겠습니다. 한밤중에 환관 둘을 상왕부에 보내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들이 도착하자마자 불이 났고 이상하게도 상왕부 사람들만 타 죽었습니다. 폐하께서 보낸 태의와 상왕부를 포위한 호위들은 멀쩡했고요.”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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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46화

서인경이 피식 웃었다.“폐하께서는 제가 줄곧 후궁에 갇힌 채 짓눌려 있다고 생각하셨겠지만 폐하 또한 제 계산 안에 있었습니다. 누가 누구를 가지고 논 건지는… 아직 모르겠네요.”황제는 말문이 막혔고 대신들 역시 숨을 삼켰다. 맹국공과 서왕조차 표정을 굳혔다.이렇게까지 황제를 자극하다니, 이 상왕비는 정말 목숨이 아깝지 않은 것인가?예상대로 황제의 분노는 폭발했다. 감히 자신에게 저런 말투로 말하다니.그는 용의자리를 세게 내리쳤다.“어림군은 어디 있느냐!”어림군 수장이 앞으로 나섰다.“신, 여기 있습니다!”“상왕비가 군주를 거스르고 대역무도한 말을 했다! 끌어내어 즉시 참수하거라!”연기준은 즉시 서인경을 뒤로 끌어당겼다.“폐하께서 이토록 서둘러 제 왕비를 죽이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무엇을 감추려 하시는 겁니까?”황제의 눈이 핏빛으로 물들었다.“상왕이 감히 막는다면 함께 죽여라!”어림군 수장이 머뭇거렸다. 지금 이 대전 안에는 대신들이 모두 지켜보고 있다. 그리고 상왕은 함부로 건드릴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군사들이 움직이지 않자 황제의 분노는 더욱 거칠어졌다. 눈이 튀어나올 듯 충혈되었다.“뭘 망설이느냐! 당장 죽여라!”어림군은 서로 눈치를 보았다. 황명은 거역할 수 없지만 상왕을 베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막 칼을 들려는 순간, 대전 안에 서왕의 목소리가 울렸다.“아뢰옵니다, 폐하. 상왕비의 말이 거칠기는 하나 사형에 이를 죄는 아닙니다. 상왕부 화재는 수십 명의 목숨이 얽힌 일입니다. 상왕비께서 할 말이 있다면 마땅히 끝까지 듣고 사실을 밝히는 것이 옳습니다.”황제가 멈칫했다.“서왕, 그대도 이 일이 짐의 소행이라 여기는 겁니까?”서왕은 고개를 숙인 채 차분히 답했다.“신은 폐하께서 무고한 자를 함부로 죽일 분이 아니라고 믿습니다. 그렇기에 오히려 상왕비의 말을 끝까지 듣고 백관 앞에서 폐하의 청명을 밝히는 것이 옳다 생각합니다.”황제의 목에 가시가 걸린 듯 말이 막혔다.이때 맹국공도 나섰다.“서왕의 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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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47화

장생불사약?대전 안의 대신들이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정말로 이 세상에 그런 약이 존재한단 말인가?서인경은 천천히 시선을 돌려 백관을 훑어보았다.“폐하께서는 상왕을 진국에서 떠나게 하고 야랑국과 손을 잡아 상왕을 진국 밖에서 죽게 만들려 했습니다. 열국이 진국을 짓밟도록 방관했고 상왕부 수십 명을 불태워 죽였으며 저를 후궁에 가두었습니다. 그 모든 일의 이유는 단 하나, 자신의 장생불사를 위해서였습니다. 헌데 세상에 무슨 장생불사가 있겠습니까? 제가 정말 그런 비방을 알고 있었다면 진작 제 조부와 고모께 드렸을 겁니다. 어찌 오늘날 친정에 저를 지켜줄 사람 하나 남지 않는 처지로 전락했겠습니까?”마지막 말에 그녀는 억지로 눈물을 몇 방울 짜냈다.대신들의 표정이 흔들렸다. 서 씨 가문의 몰락. 자손이 끊기고 이제는 시집간 딸 하나만 남은 집안. 그런 가문에 장생불사약이 있다는 말은 확실히 설득력이 없었다.그런데 황제가 실체도 없는 약을 위해 진국의 강산과 백성을 희생했다는 것인가?연기준이라는 상왕이 사라진 뒤 진국이 열국에게 얼마나 많은 굴욕을 당했는지 모두가 알고 있었다.특히 야랑국은 이 일을 빌미로 얼마나 기세를 올렸던가? 그들의 팔황자 예정임은 진국 경성에서 제집 드나들 듯 거들먹거렸고 심지어 대황자의 측비까지 넘보았다. 이런 수모는 진국 역사상 드문 일이었다. 그런데 그 모든 혼란이 황제의 장생불사 욕망에서 비롯되었다면?대신들의 속이 서서히 식어갔다.태황태후조차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장생불사에 대해 남들이 모르는 사정이 있다. 과거 연씨 황실의 조상 연강호가 두 차례나 설산에 오른 것도 그 술법을 얻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황제마저 그 길을 좇았단 말인가?쏟아지는 시선 속에서 황제는 이를 악물고 평정을 유지하려 애썼다.“상왕비가 아무 증거도 없이 짐을 모함하고 있다. 증거는 어디 있느냐?”서인경은 차분히 답했다.“단은설이 증거입니다. 폐하께서 후궁에 숨겨둔 태의들 역시 증거지요. 단은설은 폐하께 피를 바쳐 연명하게 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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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48화

황제는 서인경의 웃음에 괜히 마음이 흔들렸다.스스로는 이미 승부가 기울었다고 믿고 있었건만 오늘 서인경과 연기준은 번번이 예상을 벗어났다. 그 점이 황제를 불안하게 만들었다.서인경은 가까스로 가라앉았던 황제의 안색이 다시 눈에 띄게 굳어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지금이 틈이다. 생각할 시간을 주어서는 안 된다.그녀가 손뼉을 가볍게 쳤다.“들어오거라.”대전 안의 시선이 일제히 문 쪽으로 쏠렸다. 문턱을 넘어 들어온 이는 뼈만 앙상하게 남은 여인이었다. 그 뒤로는 온몸이 흠뻑 젖은 사내 둘이 따라 들어왔다.세 사람 모두 몰골이 처참했다. 마치 한 번 죽었다가 기적처럼 되살아난 자들 같았다.황제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대신들 역시 이내 그들을 알아보고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저건… 설귀인 아닌가?”“뒤의 두 사람은 태의원에서 사라졌던 태의들이네. 폐하께서 비밀리에 불러들였다고 들었는데...”“아니, 조금 전엔 세 사람 모두 죽었다 하지 않았는가?”웅성임이 번졌다. 대신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이내 용좌 위의 사내를 조심스레 올려다보았다.그들은 아직 죽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안에 분명 다른 속내가 있다는 뜻이었다.재미있는 일이 벌어지겠군.서인경은 단은설 곁으로 다가섰다.“잘 생각해. 한 번은 살려줬지만 두 번은 못해. 서지 말아야 할 편에 서면 오늘이 네 마지막이 될 수도 있어.”단은설이 고개를 들어 서인경을 바라보았다. 눈동자 깊은 곳에 서린 것은 미련과 원망이었다.그리고 그녀의 뒤에 선 연기준을 보았다. 산처럼 굳건히 서서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서인경을 지키고 있는 사내.그 순간, 단은설의 억울함과 분노는 끝내 서글픔으로 변했다.도대체 무엇이 모자랐던 걸까? 왜 연기준의 눈에는 단 한 번도 자신이 비친 적이 없었던 걸까?그러나 억울해한들 무엇하랴. 방금 전, 죽음이 코앞까지 다가왔을 때 그녀는 깨달았다. 서인경이 죽는 것보다 자신이 살아남는 것이 더 간절하다는 사실을.단은설은 털썩 무릎을 꿇었다. 고개를 깊이 숙인 채 낮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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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49화

그는 성조 선제께 약속했었다. 자신이 살아 있는 한, 반드시 진국의 강산을 지키겠노라고. 비록 그가 성조 선제의 친손자라 할지라도 맹세를 저버릴 수는 없었다.서왕은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서인경의 뒤에 서서 단은설을 똑바로 바라보았다.“설귀인 마마, 알고 있는 것을 모두 말하십시오. 한 마디라도 숨기거나 거짓을 보탠다면, 비록 제가 늙었다 하나, 그대가 이 문을 살아 나가지 못하게 할 힘은 아직 남아 있습니다.”서왕이 이런 어조를 쓰는 일은 드물었다. 한 번 입에 담았다는 건 이미 분노가 깊이 끓어올랐다는 뜻이었다.단은설은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음을 알았다. 그녀는 차라리 끝을 향해 걸어가기로 했다.“제가 한 말은 모두 사실입니다. 제 피는 폐하를 잠시 멀쩡해 보이게 할 뿐, 진정으로 목숨을 살릴 수는 없습니다. 폐하를 살릴 수 있는 건 오직 장생불사약뿐입니다. 저는 폐하께서 후궁 안 어딘가에 비밀스럽게 장생불사약을 제조하는 곳을 숨겨두셨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헌데 약을 제조하는 것은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죠. 저는… 상왕비께 복수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폐하께 상왕비에게 장생불사의 술법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폐하께서 상왕부를 무너뜨리고 상왕비를 궁으로 끌어들여 고문하도록 계략을 세우게 만든 것도 그 때문입니다. 상왕비에게 장생불사의 술법이 있는지는, 사실 저도 확신하지 못합니다. 모든 건 제 죄입니다. 헌데 장생불사약을 얻기 위해 상왕부에 한 일들은 모두 폐하 자신의 뜻이었습니다. 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그녀는 끝내 서인경이 화사독을 치료할 수 있다는 사실은 입에 올리지 않았다. 아직 완전히 파국으로 치닫겠다는 각오까지는 하지 못한 모양이었다.단은설은 능숙하게 책임을 털어냈다. 마치 자신의 허물은 단지 질투심 하나뿐이었던 것처럼.황제는 분노로 이성을 잃었다.“이 천한 것! 네가 허튼소리로 짐을 현혹하지 않았다면 짐이 어찌 상왕부에 손을 댔겠느냐!”단은설이 고개를 들고 맞받아쳤다.“폐하께서는 이미 상왕부를 치실 생각을 품고 계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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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50화

황제가 숨겨온 비밀은 이 순간 완전히 들춰졌다. 연기준과 서인경의 몰아붙임에 그는 한 걸음 또 한 걸음 뒤로 밀려났다.일국의 군주가 고작 두 명의 간신과 역적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몰리고 있었다.황제의 가슴은 분노와 억울함으로 들끓었다. 설령 죽는다 해도 누구 하나는 함께 끌어내리리라.“짐은 잘못이 없다. 상왕비가 화사독을 고칠 수 있... 아…!”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황제가 비명을 질렀다.연기준의 손에 힘이 실리더니 우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황제의 견갑이 그대로 부러졌다.황제의 안색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그러나 다시 입을 열 틈도 없었다. 연기준이 재빠르게 그의 입안에 약환 하나를 밀어 넣었기 때문이다.알약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자 황제는 목이 얼어붙는 듯한 한기를 느꼈다. 뼛속까지 스며드는 냉기, 그리고 곧이어 찌르는 듯한 통증. 입을 벌려도 더는 어떤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황제는 목을 움켜쥔 채 공포에 질린 눈으로 연기준을 올려다보았다.“아… 아…!”대전 안에 쉰 숨 같은 괴이한 소리만 울려 퍼졌다.연기준의 동작이 너무도 빨라 대부분은 그가 무슨 짓을 했는지 제대로 보지 못했다. 황제가 끝내 뱉지 못한 말 또한 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맨 앞에 서 있던 서왕과 맹국공은 잠시 눈을 마주쳤다. 이 순간,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때, 전각 밖에서 또 다른 소란이 일었다.대신들이 돌아보자 연풍이 두 팔에 각각 아이 하나씩을 안고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가장 앞까지 걸어 나와 조심스레 아이들을 내려놓았다.아이들은 고작 다섯, 여섯 살 남짓. 마른 몸은 뼈가 도드라졌고 옷은 해어져 있었다. 몸 곳곳에는 핏자국이 말라붙어 있어 제대로 서 있지도 못했다.서인경은 곧장 아이들을 부축해 앉히고 맥을 짚었다.연풍이 무릎을 꿇었다.“왕야의 명을 받아 후궁을 수색하던 중, 동북쪽 외진 전각에서 이 두 아이를 발견했습니다. 아이들 말에 따르면, 반년 전 궁 밖에서 납치되어 들어왔고 이미 석 달 동안 폐하께 피를 바쳤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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