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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31화

귓가에 연기준의 낮은 웃음이 스쳤다.“정말 그렇게 믿는 것이냐?”서인경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럼요. 그 황위, 지금 폐하보다 못할 게 뭐가 있어요? 어쩌면 훨씬 나을지도 모르죠.”연기준의 웃음이 한층 깊어졌다.“그리도 나를 믿는단 말이지?”“당연하죠. 당신이 황제가 되면 저는 황후잖아요.”그러다 눈을 가늘게 뜨며 덧붙였다.“대신 다른 빈비는 안 돼요. 하나라도 들이면 그때는 두 사람 다 먼저 베어버리고 저는 설산으로 돌아가서 잘생긴 사내 열 명쯤 데리고 놀 거예요.”그 말에 연기준의 웃음이 단숨에 사라졌다.“열 명이나?”그의 눈빛이 서늘해졌다.“본왕 하나로는 모자라다는 뜻이냐?”서인경은 턱을 치켜세웠다.“잘생긴 사람은 많을수록 좋잖아요.”연기준의 얼굴이 완전히 굳어 버렸다. 너무 오래 떨어져 있었던 탓일까? 이 여인이 괜히 엇나간 생각을 품은 듯했다.그는 당장이라도 바깥일을 정리하고 사람 없는 곳으로 데려가 이 여인이 한 사내도 감당 못 한다는 걸 똑똑히 알게 해 주고 싶었다. 다시는 밖의 남자 따위를 입에 올리지 못하도록.편전 안에는 묘한 질투의 기운이 은근히 감돌고 있었다.그 시각, 전각 밖에서는 밀랍으로 단단히 봉해진, 기다란 상자가 황제 앞으로 올려졌다.겉보기엔 제법 그럴싸했다. 심지어 채빈조차 안의 내용을 보지 못한 듯했다. 황제의 얼굴에는 이미 승리를 확신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봉랍을 뜯게 하니 과연 안에는 황색 비단으로 된 성지가 놓여 있었다.황제가 천천히 펼쳐 읽어 내려갔다.한 줄, 또 한 줄.잠시 후 그의 표정이 굳었다.“어찌 이런…”그의 변화를 본 태황태후가 이상함을 느끼고 급히 다가왔다. 한 번 훑어본 순간, 그녀의 안색도 급격히 변했다. 태황태후는 재빨리 성지를 말아 쥐고 채빈을 노려보았다.“이 물건, 어디서 얻은 것이냐?”채빈은 멍해졌다. 황제와 태황태후는 이미 내용이 가짜라는 걸 알고 있는 것 아니었나?누군가 그에게 말해 주었다. 이 유조를 들고 대전에 들어가면 황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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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32화

태황태후의 얼굴이 굳게 굳었다. 그녀의 핏기 어린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허튼소리다! 황제와 상왕은 형제간의 정이 깊다. 상왕이 살아 돌아온다면, 황제는 기뻐하면 기뻐했지 어찌 노하겠느냐? 감히 둘 사이를 이간질해 우리 진국의 조정을 어지럽히려 하다니, 그 죄는 마땅히 목을 베어야 한다!”그녀의 시선이 채빈을 향해 번뜩였다.“출처도 모를 물건을 들고 조정에 나타나 민심을 뒤흔들었으니, 그 또한 용서할 수 없다. 사람을 불러라. 당장 끌어내어 참형에 처하라!”채 씨 부자는 벼락을 맞은 듯 얼어붙었다.채빈은 머리가 하얘졌다. 자신이 대체 무엇을 그리 잘못했단 말인가? 그저 유조라 불린 성지를 올렸을 뿐인데, 어찌 죽음에 이른단 말인가?그러나 아버지 채문기는 한눈에 상황을 꿰뚫었다.끝났다. 이제 채씨 가문은 끝났다.이 집안의 배경은 황후와 대황자였다. 요즘 황위의 향방을 두고 소문이 들끓는 시점에 이런 일이 터졌으니, 누군가에게 철저히 이용당한 것이다.상자 안에 든 것은 아마 채빈이 말한 그 내용이 아니었을 터였다. 황제와 태황태후의 역린을 건드리는 무언가였음이 분명했다.채문기는 아들이 끌려 나가려는 순간, 땅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찧었다.둔탁한 소리가 대전에 울렸다.“폐하, 용서하소서! 태황태후 마마, 자비를 베푸소서! 소자의 무지함을 탓하시어 우리 채 가에 대를 잇게 해 주십시오. 돌아가면 엄히 단속하여 다시는 경성에 발붙이지 못하게 하겠습니다!”그의 말은 사실상 채빈의 앞날을 스스로 끊는 것이었다. 그러나 평소 자애롭던 태황태후는 이번만큼은 물러서지 않았다.이런 어리석은 자를 조정에 남겨 둔다면 훗날 또 어떤 자에게 이용될지 모를 일이었다.“끌어내라. 더는 보고 싶지 않다.”어림군이 달려들어 채빈을 붙들고 끌고 나갔다.채문기는 이마에서 피가 흐르도록 절을 올렸으나 끝내 아들이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태황태후는 손에 쥔 비단 상자를 더욱 세게 움켜쥐었다.“이 안에 든 것은 선황의 유조가 아니다. 선황께서 병중에 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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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33화

대전 안은 숨조차 삼킨 듯 고요했다.누구도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연기준과 서인경이 눈앞에 서 있다는 사실이 아직도 믿기지 않는 듯했다.서왕은 가슴 깊이 매달려 있던 불안이 마침내 현실이 되었음을 깨달았다. 연기준은 결국 돌아왔다.맹국공은 담담히 수염을 쓸어내렸다. 그는 성조 선제와의 맹세 같은 것은 없었다. 누가 더 능히 진국을 평안하게 이끌 수 있는가. 그가 설 자리는 오직 그 기준뿐이었다.황제는 두 사람을 노려보았다. 분노가 치밀어 오르자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기운이 치솟아 머리끝까지 번졌다.“가짜다! 진짜 연기준과 서인경은 이미 죽었다! 너희는 사칭이다! 어림군, 저들을 당장 붙잡아라!”“황제!”태황태후의 날카로운 호통이 황제를 멈춰 세웠다.그녀는 아직 이성을 잃지 않았다. 한때 침착하고 변고에도 흔들리지 않던 황제가 어찌 이토록 놀란 짐승처럼 변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요즘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의 음식과 약에 무슨 이상이 있는 것은 아닌지 반드시 조사해야 했다.그러나 지금은 눈앞의 일이 먼저였다.태황태후는 다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상왕, 상왕비. 황제는 요즘 몸이 좋지 않다. 상왕이 야랑국에서 전사하고 왕부가 참화를 겪은 뒤, 밤낮으로 마음을 놓지 못하고 있었거든. 스스로 지키지 못했다 자책하며 잠과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어. 지금 두 사람이 갑자기 나타나니 환영이라 여긴 것이다. 그러니 오해하지 말거라. 살아 돌아온 것을 황제도, 나도 진심으로 기쁘게 여긴다.”한 치의 틈도 없는 말이었다.그러나 서인경은 노골적으로 눈을 굴렸다.태황태후의 가슴이 막힌 듯 답답했으나 겉으로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연기준은 그녀의 말을 반박하지 않았다. 대신 태황태후가 쥔 비단 상자를 응시했다.“방금 들으니 선황께서는 본왕에게 황위를 전한다는 유조를 남겼다 하더군요. 자칫하면 본왕이 이를 꾸민 것으로 오해받을 수 있습니다. 역모의 죄명은 본왕이 감당할 바는 아니지요. 또한 황형께서 본왕을 의심하여 형제의 정이 상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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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34화

“상왕, 열셋 째 황자 연도현은 인품이 고귀하고 짐을 깊이 닮았으니 능히 대통을 이어받을 것이다. 짐의 뒤를 이어 즉위하여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하라!”대전 안의 공기가 한순간 얼어붙었다. 성조 선제께서 전위한 이는 선제가 아니라 열셋 째 왕야 연도현이었다는 뜻이었다.태황태후는 거의 미친 듯 계단을 뛰어 내려왔다. 몸을 던지듯 유조 위에 엎드려 글자를 가렸다.“가짜다… 전부 가짜다!”그녀가 이토록 이성을 잃은 모습은 누구도 본 적이 없었다.서왕과 맹국공은 눈빛을 주고받았다.두 사람 모두 성조 선제의 필체를 알고 있었다. 눈앞의 글씨는 분명 익숙했다.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 있었다.연도현은 태황태후의 친아들이 아닌가? 유조가 진짜라면 왜 태황태후는 친아들의 즉위를 숨기고 오히려 선제를 황위에 앉혔단 말인가?유모가 허둥지둥 달려와 태황태후를 부축했다.“상왕! 금란전에서 태황태후께 손을 대다니, 반역을 꾀하려는 것입니까!”연기준은 한 치의 물러섬도 없었다.“본왕은 진실을 드러냈을 뿐이다. 무슨 죄가 있단 말이냐?”태황태후는 번개처럼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눈빛에서 더는 예전의 자애로움은 찾아볼 수 없었고 차갑고 음울한 기운만이 서려 있었다.“네 짓이냐? 내가 피땀 흘려 너를 길렀거늘, 은혜는커녕 끝내 나와 맞서려 드느냐! 네게 양심은 없느냐!”연기준의 목소리는 또렷했다.“성조 선제께서는 황위를 열셋 째 황숙께 전하셨습니다. 허나 태황태후께서는 유조를 바꾸어 선제에게 넘겼지요. 다들 알다시피 태황태후 마마의 친자는 선제가 아닌 열셋 째 황숙입니다. 그러니 정과 이치, 어느 쪽으로도 납득할 수 없는 일이지요. 설명을 주시지 않는다면 성조 선제의 유명을 어긴 죄로 황천에 가서 연 씨 황실의 열조열종을 어찌 뵈려 하십니까?”“방자하다!”태황태후의 손이 떨리며 연기준을 가리켰다.“네 어미를 닮아 배은망덕하구나! 허튼소리로 조정을 어지럽히다니!”연기준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제 모후를 입에 올릴 자격은 없습니다.”“어찌 자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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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35화

“피로 몇 자 휘갈겨 썼다고 해서 그걸로 내가 희태비를 죽였다고 몰아가느냐? 상왕, 대체 누가 그대를 이렇게까지 어리석게 만들었느냐?”태황태후의 시선이 날카롭게 서인경을 훑었다. 노골적인 의심이었다. 모든 죄를 그녀에게 뒤집어씌우려는 의도였다.서인경의 가슴속에서 탁한 숨이 치밀어 올랐다. 자신에게 덮어씌우는 것이 분해서가 아니었다. 이미 세상을 떠난 희태비가 또 한 번 모욕당하는 것이 참을 수 없어서였다.그녀는 차갑게 웃었다.“태황태후께서는 어찌 그게 아무렇게나 쓴 것이라 단정하십니까?”대전 안이 고요해졌다.“그 상소문에 쓰인 종이는 스무 해 전 변방 남국에서 공물로 들여온 특수 선지입니다. 값도 비싸고 제작 방식도 독특해 진국에는 없지요. 당시 들어온 것은 고작 열 장뿐이었고 여덟 장은 황제께서 사용하셨습니다. 그리고 남은 두 장은 그림을 좋아하시던 희태비 마마께 내려졌어요. 그중 한 장은 선제의 초상을 그리는 데 쓰였고 그 그림은 선제와 함께 묻혔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한 장은 어디에 두었는지 희태비 마마, 본인만이 알고 있어요. 지금 스무 해가 지났고 희태비 마마의 침궁도 이미 불에 타 사라졌습니다. 묻겠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그 남국 선지를 구해 유서를 위조할 수 있겠습니까?”태황태후의 숨이 거칠어졌다. 서인경이 이십 년 전의 일까지 정확히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태황태후의 가슴이 요동치며 당장이라도 그녀를 죽이고 싶은 충동이 치밀었다.“궤변이다! 상왕부는 이미 불에 타 재가 되었는데 너만 멀쩡히 살아남았다. 이 모든 것이 네 계략이라 의심할 이유는 충분하다. 오늘 상왕을 부추겨 반역을 꾀하려는 것 아니냐! 나는 오래전부터 말했다. 서 씨는 남겨 두어선 안 된다고!”서인경의 입가가 서늘하게 휘어졌다.“말씀을 너무 일찍 하셨네요. 아직 더 큰 이야기가 남아 있거든요.”대신들의 귀가 일제히 곤두섰다. 오늘 대전은 파문이 끊이지 않았다.태황태후의 눈이 번뜩이는 가운데 서인경은 다시 한 번 폭탄을 던졌다.“태황태후께서는 희태비 마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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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36화

수습이 어려워지자 황제가 뒤늦게 나서며 겉으로만 중재하는 태도를 취했다.“상왕, 상왕비. 그대들이 내놓은 증거는 진위를 입증할 수 없다. 성조 선제의 유조와 희태비의 유서를 위조해 조정을 어지럽히고 신하들의 마음을 동요시켰으니 이는 군주를 기만한 대죄다. 참수에 해당하는 죄임을 알아야 한다. 한순간의 통쾌함에 휩쓸려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르지 말거라.”서인경은 몸을 돌려 용좌 위에 앉은 사내를 바라보았다. 모든 일의 발단은 그였건만 마치 자신은 아무 상관도 없는 듯 빠져나가려는 태도였다.그를 그렇게 쉽게 두고 볼 리 없었다.“유조에는 성조 선제의 옥새가 찍혀 있습니다. 그러니 부정할 수 없는 증거지요. 희태비 마마의 유서는 친필이며 남국 선지가 증거입니다. 폐하께서도 의심하신다면 장서각에서 희태비 마마의 친필 서한을 가져와 대조해 보십시오. 진위는 곧 드러날 것입니다.”그동안 침묵을 지키던 맹국공이 이때 앞으로 나섰다.“유조의 필체는 분명 성조 선제의 것입니다. 희태비 마마의 유서 역시 장서각에 보관된 친필과 대조하면 알 수 있을 터. 제가 직접 확인하겠습니다.”황제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늘 중립을 지키던 맹국공이 이 자리에서 입장을 밝히다니.서인경과 연기준은 잠시 눈을 마주쳤다. 맹국공이 과거 맹은영을 통해 지원 의사를 전한 적은 있었으나 국본을 뒤흔드는 사안까지 나선 것은 예상 밖이었다.황제는 이미 태황태후의 반응으로 진실을 짐작하고 있었다.맹국공까지 나서자 더는 부인하기 어려웠다.그는 결국 다른 길을 택했다.“설령 사실이라 한들, 열셋 째 황숙 연도현은 자식이 없다. 내가 양보하고 싶어도 계승할 후손이 없지 않으냐? 황위가 이미 짐의 손에 들어온 이상, 짐은 진국의 백성을 지킬 책임이 있다. 설마 열셋 째 황숙의 시신을 파내어 즉위시키란 말이냐?”분명히 이 일을 흐지부지 덮고 가려는 수였다.그러나 서인경과 연기준의 목적은 황제를 당장 끌어내리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그해의 진실이었다.태황태후는 기절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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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37화

“너, 너, 너…!”태황태후의 혈기가 치밀어 올랐다. 목구멍 끝까지 올라온 비린 단맛이 당장이라도 터져 나올 듯했다.그 순간, 서인경의 한마디가 그 기세를 단번에 눌러버렸다.“너는 무슨 너입니까? 또 피 토하고 기절한 척하시려는 건가요? 제게 은침이 있습니다. 몇 번을 쓰러지셔도 바로 깨워 드릴 수 있어요. 오늘은 피할 수 없습니다. 문무백관 앞에서 그해의 일을 똑똑히 밝히지 않으시면 지금까지 쌓아 온 자비로운 태황태후의 명성은 오늘부로 끝입니다. 편안한 노년을 보내고 싶으시다고요? 꿈도 꾸지 마십시오.”태황태후는 서인경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그 오만하고도 당당한 얼굴이 눈앞에서 서성이는 것이 못 견딜 듯했다.그녀는 가슴에 고인 피맛을 억지로 삼켰다.“나는 할 말 없다. 네가 무엇이기에 감히 나를 협박하는 것이냐? 나는 삼대 황제를 거쳐 이 궁에서 수십 년을 버텨왔다. 네 몇 마디 말에 겁먹을 사람으로 보이느냐? 명성을 더럽히고 싶으면 마음대로 해라. 나는 두렵지 않다.”말을 마친 태황태후는 몸을 돌렸다. 아무도 자신을 막지 못하리라 확신한 걸음이었다. 그러나 두 걸음도 채 떼기 전에 군중 속에서 두 노신이 앞으로 나섰다.서인경도 얼굴을 알아보았다. 백발이 성성한 두 노장군. 성조 선제와 함께 천하를 평정했던 인물들. 그 위세와 공적은 서인경의 조부, 서회윤보다도 앞섰다.두 사람은 과거 열셋 째 왕야 연도현의 스승이었고 벗이었다. 하지만 이미 벼슬을 내려놓고 은거한 지 오래. 수년째 조정에 모습을 드러낸 적도 없던 이들이, 오늘 금란전 한복판에 서 있었다.두 노장은 태황태후의 앞을 가로막았다.“노신은 열셋 째 왕야와 막역한 벗이었습니다. 그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것을 늘 한으로 여겨 왔지요. 태황태후께 간청드립니다. 열셋 째 왕야의 죽음에 대해 명백히 밝혀 주십시오.”“저 역시 얼마 남지 않은 몸입니다. 진실을 알고 싶습니다. 훗날 지하에서 그 아이를 만나면 부끄럽지 않게 설명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태황태후의 지팡이가 바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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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38화

대전은 숨조차 쉬지 않는 듯 고요했다. 문무백관은 까마귀 한 마리 울지 않는 적막 속에서 서로의 눈치만 살폈다.연기준은 고개를 조금 숙인 채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그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태황태후는 그런 그를 노려보았다. 눈빛에는 음험한 독기와 살기가 서려 있었다.“상왕, 이제 만족하느냐? 네 어미는 부덕을 저버린 여인이다. 정절을 지키지 못한 음탕한 여인이지. 선제께서는 그녀를 온 마음으로 아끼셨고 후궁 중 가장 큰 총애를 받게 하셨다. 다른 누구도 누리지 못한 영광을 안겨 주셨단 말이다. 심지어 선황후가 세상을 뜬 뒤에는 황후로 책봉할 생각까지 하셨다. 헌데 선제가 붕어하자마자 그녀는 선제의 친동생을 유혹했다. 한 몸으로 두 남자를 섬기려 한 것이다. 이런 여인을 내가 죽인 것이 잘못이냐? 나는 네 명성을 지키기 위해 그 일을 덮어 두었다. 헌데 네가 끝까지 물고 늘어지니 그 명성은 이제 필요 없다!”연기준이 고개를 들었다. 태황태후를 노려보는 눈은 붉게 물들어 있었고 주먹은 하얗게 질릴 만큼 움켜쥐어 있었다.서인경은 그가 충동적으로 나설까 두려워 얼른 그의 손을 잡았다.“흥분하지 마세요. 속지 마요. 어머님은 그런 분이 아니에요.”그녀의 손이 그의 손등을 덮었다. 귓가에 낮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닿자 연기준의 손이 서서히 힘이 풀렸다.서인경은 비로소 숨을 고르고 태황태후를 똑바로 바라보았다.“이제는 산 자가 증언할 수 없으니 마음대로 죽은 이를 더럽히시겠다는 겁니까? 그 말은 태황태후의 친아들 명예까지 함께 짓밟는 것입니다. 저는 어머님이 그런 분이라 믿지 않습니다. 열셋 째 황숙 역시 인륜을 저버릴 분이 아니지요. 어머님께서 열셋 째 황숙을 유혹했다 하셨지요. 증인이 있습니까?”태황태후 곁에 서 있던 유모가 앞으로 나섰다.“제가 증명하겠습니다. 그 일은 제가 두 눈으로 보았습니다.”서인경이 되물었다.“무엇을 보았느냐?”“희태비 마마와 열셋 째 왕야께서 어화원에서 밀회를 나누는 것을 보았습니다. 태황태후께서 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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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39화

선제는 정통 황실 혈통이었고 그의 즉위는 천명에 따른 것이었다.그렇다면 지금 황제가 앉아 있는 이 자리 역시, 더는 흔들릴 이유가 없었다. 황제가 속으로 안도하며 우쭐해하는 사이 태황태후의 얼굴은 순식간에 창백해졌다.두 손이 눈에 띄게 떨리고 있었다.그녀는 연기준이 들고 있는 노란 손수건을 알아보았다. 분명 아무도 찾을 수 없도록 숨겨 두었던 물건인데 어떻게 그가 그것을 손에 넣었단 말인가? 성조 선제의 유조 또한 그가 찾아낸 것일까? 그는 도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단 말인가?태황태후의 눈빛이 급격히 흔들렸다.“상왕, 네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나 있느냐? 네 손에 든 것은 어디서 난 것이냐? 이 자리에서 함부로 날조하여 사람들을 현혹하려 하지 말거라. 성조 선제에 대한 나의 정을 모욕한다면 그 죄는 목을 베어도 모자라다!”연기준의 음성은 한 치도 흔들리지 않았다.“본왕이 모함인지 아닌지, 이걸 보시면 자연히 알게 될 것입니다.”이 일에 내내 침묵하던 맹국공과 서왕조차 표정이 굳어졌다. 만약 한때 상왕이라 불리던 왕애 연도현이 성조 선제의 혈통이 아니었다면? 그렇다면 태황태후가 다른 남자의 아이를 낳았다는 말인가?의혹 어린 시선이 연달아 태황태후를 향했다. 그녀는 순간 다리에 힘이 풀리는 듯 비틀거렸다. 연기준을 향한 눈빛은 노골적인 증오로 타올랐다.오늘이 끝나면, 반드시 네놈을 산산이 찢어 버리겠다.연기준은 그 증오를 아랑곳하지 않고 노란 손수건을 들어 맹국공과 서왕에게 건넸다.“맹국공과 서왕 숙부께서는 조정의 기둥이십니다. 백관이 따르는 분들이니 먼저 살펴보시지요.”태황태후가 돌연 달려들어 그것을 빼앗으려 했다.“연기준이 위조한 것이다! 믿을 수 없다!”그러나 서인경이 몸을 옮겨 길을 막아섰다.“위조라면 맹국공과 서왕 숙부께서 식견으로 가려 주시겠지요. 오히려 태황태후께서는 조급해하실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그 사이 이미 서왕이 손수건을 받아 들었다. 맹국공이 곁으로 다가왔고 두 사람은 글자를 한 자 한 자 짚어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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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40화

노란 손수건은 그 과부가 남긴 유서였다.그 안에는 또렷하게 적혀 있었다. 자신이 어떻게 성조 선제와 ‘우연히’ 마주쳤는지, 어떻게 그가 자신에게 빠져들도록 만들었는지, 또 어떻게 사고를 가장해 끝내 살을 맞대게 했는지까지.겉으로는 성조 선제를 흠모하는 여인처럼 굴었지만 그 모든 것은 치밀하게 계산된 연극이었다.그때 그녀는 이미 죽은 남편의 아이를 뱃속에 품고 있었다.그 남편은, 한때 성조 선제와 함께 천하를 평정하던 수만 장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전장에서 전사했고 남겨진 것은 홀몸의 여인과 태어나지 않은 아이뿐이었다.그 시절, 그런 여인이 아이를 데리고 살아남기란 거의 불가능했다.과부는 생각했다. 성조 선제에게는 남편과 자신의 아이를 길러야 할 책임이 있다고.그러나 동시에, 자신의 아이가 남편처럼 평생 남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하인의 운명’으로 살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오랜 고심 끝에 남편의 유복자를 성조 선제의 핏줄로 뒤바꾸는 계략을 세웠다.그가 그토록 쉽게 속아 넘어갈 줄은 그녀도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더 뜻밖이었던 것은 관용과 인애로 이름 높던 황후가 후궁 삼천은 받아들이면서도 자신 같은 과부 하나는 용납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그녀는 태황태후에게 붙잡혀 여덟 달을 감금당했다. 태황태후의 의도를 알았을 때 그녀는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흥분했다. 처음에는 그저 자신의 아들이 이름 없는 황자로서 비단옷을 입고 평생 안온하게 사는 것만으로도 하늘의 은혜라 여겼다.그런데 아들이 황후의 적자가 될 운명이라니. 황위를 이을 가능성까지 얻게 되다니.여덟 달 동안 그녀는 철저히 감시 속에 살았다. 그러나 한 번도 절망하지 않았다. 잘 먹고, 잘 자고, 태연하게 시간을 보냈다.그 사이, 몰래 유서를 써 두었다. 그리고 외출이 허락된 틈을 타 그것을 친정 여동생에게 건넸다.언젠가 자신의 친아들이 황위에 오른다면 그 아이가 진실을 알게 되기를 바랐다. 누가 진짜 부모인지, 누가 그를 세상에 보냈는지 말이다.이제 그 진실이 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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