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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21화

이튿날, 해가 동쪽 하늘에서 떠올랐다.아침 햇살이 양심전 앞뜰을 비출 무렵, 밤새 대기하던 대신들은 모두 기진맥진해 있었다.그중 몇은 버티지 못하고 계단에 기대 잠들어 있을 정도였다.황제는 새벽녘에 눈을 떴다.침상 곁에는 첫째 황자와 열셋 째 황자가 나란히 지키고 서 있었다.황제가 눈을 뜨는 순간, 두 사람은 서로 먼저 다가가려는 듯 앞다투어 몸을 내밀었다.“부황, 깨어나셨습니까?”“부황, 몸은 좀 어떠십니까? 아들이 밤새 곁을 지키고 있었으니 이제야 마음이 놓입니다.”“저도 한숨도 못 잤습니다. 한순간도 자리를 뜨지 않았습니다.”“저도 마찬가지입니다.”말들이 겹쳐 쏟아졌다.그때 태황태후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두 황자가 서로 효심을 겨루듯 공을 내세우는 소리가 귀에 꽂혔다. 황족이라기에는 지나치게 속 좁고 초라한 모습이었다.태황태후의 눈에 이 둘은 언제나 못마땅한 존재였다. 그러나 황제의 곁에는 이제 이 둘밖에 쓸 만한 사람이 없었다. 병세가 깊은 황제를 대신해 국정을 맡겨야 할 자들도 결국 이들이었다. 그러니 마음에 들지 않아도 분노를 억누를 수밖에.“그만하거라. 황제가 이제 막 눈을 떴는데 너희는 누가 더 효심이 깊은지부터 가려야겠느냐?”두 황자는 화들짝 놀라 무릎을 꿇었다.“감히 그러지 못하옵니다.”“저도 감히 그런 뜻이 아니옵니다.”태황태후는 노기가 가득한 얼굴로 두 사람 곁을 지나 뒤따라온 태의를 불렀다.“어서 황제의 상태를 살펴라.”태의는 용상 앞에 정중히 엎드린 뒤 맥을 짚었다. 그러고는 잠시 후 손을 거두며 고개를 들었다.“태황태후 마마, 폐하께서는 이미 위중한 고비를 넘기셨습니다. 다만 기력이 극히 쇠하셨으니 정사를 돌보지 마시고 조용히 요양하셔야 합니다.”태황태후가 입을 열려는 순간, 황제가 스스로 몸을 일으키려 했다.“요양할 필요 없다. 당장 조회를 열어 대신들을 불러라.”태황태후가 급히 다가섰다.“지금은 몸을 돌보는 것이 우선이다. 국정은 첫째 황자와 열셋 째 황자에게 맡기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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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22화

그는 이런 결말만큼은 결코 보고 싶지 않았다.그가 과거 야랑국에서 연기준의 목숨을 구해준 것도 그저 오래전 일에 대한 죄책감을 조금이나마 씻어내기 위함이었을 뿐이었다. 그해, 서왕비가 조금만 더 눈치가 있었더라면 그때의 희귀비 역시 헛되이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는 연기준이 점점 성장하여 진국에서 전공을 세우는 상왕이 되고 이 나라를 지키는 방패가 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연기준이 강해질수록 그의 마음은 오히려 더 무거워졌다.언젠가 그때의 일이 드러나게 된다면 연기준과 황실이 서로 칼을 겨누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그를 옥죄어 왔다. 그렇다면 이들은 결국 조정이 뒤집히는 결말을 맞이할 수밖에 없으리라.그런데 일이 밝혀지기도 전에 황제가 스스로 무너질 줄은 그도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제 손으로 제 진영을 무너뜨리며 지금 같은 꼴이 되어버릴 줄이야.두 황자는 겉으로는 서로 다투고 있었지만 실상은 둘 다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그 누구도 구중궁궐의 정점에 앉을 자격이 있어 보이지 않았다. 이 둘 중 누구에게 황위를 맡긴다 해도 그는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궁 안과 조정을 두루 살펴보아도 늙은 태황태후 하나를 제외하면 진정으로 국정을 책임질 수 있는 인물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서왕은 머릿속에서 연 씨 성을 가진 인물들을 하나하나 떠올려 보았다. 그리고 끝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보기에 진정 제왕의 그릇을 지닌 사람은 오직 연기준 뿐이었다.서왕의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아 있는 사이 맹국공은 한결 담담했다. 그는 다른 대신들과 함께 황제를 따라 금란전으로 향했다. 대전 안에는 조정 대신들뿐 아니라 갑옷을 입은 어림군이 빽빽하게 늘어서 있었다.금란전은 본래 무기를 들이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 곳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쇠로 된 갑옷과 칼날이 전각 안에서 냉혹한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게다가 성조 선황과 선황의 신위까지도 용좌 좌우에 나란히 모셔져 있었다.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기에 이렇게 많은 사람과 조상을 불러 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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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23화

풍 내관이 고개를 숙였다.“명 받들겠습니다.”태황태후는 황제가 가득 찬 문무백관을 아예 안중에도 두지 않은 채, 환관 하나와 소곤거리며 귓속말을 나누는 모습을 보고 노기가 더 짙어졌다.“조회를 시작해야 하지 않겠느냐?”그제야 황제는 자세를 바로 고쳐 앉았다. 방금 피를 마신 덕분인지 황제의 안색은 놀랄 만큼 빠르게 좋아져 있었다. 그 모습을 본 태황태후조차 의아해졌다. 방금 풍 내관이 올린 것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태황태후는 낮은 목소리로 유모에게 몇 마디를 속삭였다. 그러자 유모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풍 내관이 사라진 방향을 따라갔다.마침내 조정 회의가 시작되었다. 황제는 편안히 쉬다 나온 얼굴이었지만 대신들은 달랐다. 그들은 양심전 바깥에서 꼬박 하룻밤을 지새웠다. 눈은 퀭했고 기력은 바닥나 있었으며 국사를 논할 정신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그때 서왕이 무거운 발걸음으로 앞으로 나섰다.“신에게 아룁니다. 야랑국의 팔황자가 우리 진국에서 죽은 일로 야랑국 군대가 국경에 집결해 소요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백성들을 지키기 위해 속히 군을 파견하시길 청합니다.”황제는 열셋 째 황자를 힐끗 바라보았다.“너는 원래 야랑국과 화친 혼인을 논하던 몸이니 이 일은 네가 처리하는 것이 가장 알맞다. 장수 두 명을 골라 즉시 국경으로 가거라. 그들이 어떤 조건을 내놓더라도 가급적 받아들여 반드시 야랑국과 화평을 이루어야 한다.”불과 어제 황제는 열셋 째 황자에게 병권을 쥐여주었다. 그런데 기쁨을 누릴 틈도 없이 그는 곧장 수도를 떠나라는 명을 받은 셈이다. 게다가 황제의 몸이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말이다.열셋 째 황자는 잠시 망설였다.“부황, 신은 아직 젊고 경험이 얕습니다. 이런 중대한 외교를 그르쳤다가 두 나라가 전쟁에 빠지면 백성들만 고통받고 신은 역사에 죄인으로 남게 됩니다. 부디 더 경험 많은 대신을 보내주십시오.”황제는 그의 말을 곰곰이 되새겼다.“그렇다면 누가 적임자라고 보느냐?”열셋 째 황자가 천천히 눈을 들어 맏형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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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24화

금란전 안에서, 열셋 째 황자의 얼굴에는 아직도 승리의 기색이 남아 있었다.연기준이 그에게 건네준 계책은 단순히 대황자로 하여금 예정임의 시신을 들고 야랑국으로 가서 사죄하게 하는 데서 끝나지 않았다. 그 뒤에는 하선준이 이끄는 하 씨 가문의 금고를 열어 장병들에게 쓸 군량과 군수품으로 은 백만 냥을 대게 하는 수까지 포함되어 있었다.국경의 전운은 이미 불씨를 삼킨 채 타오르고 있었다. 대황자는 그저 선봉일 뿐이었다. 만약 선봉이 협상에 실패한다면 전쟁은 피할 수 없게 된다. 지금의 진국은 국고가 텅 빈 상태라 전쟁을 대비하려면 결국 돈 많은 세가들이 대신 지불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황제는 열셋 째 황자의 말이 매우 이치에 맞는다고 여겼다.그 순간, 대황자가 격분해 앞으로 나섰다.“열셋 째 아우, 함부로 입을 놀리지 말거라. 내 외삼촌은 지금 벼슬도 낮고 녹봉이라 해봐야 겨우 가족을 먹여 살릴 정도다. 헌데 백만 냥을 낼 여력 따위가 어디 있겠느냐?”열셋 째 황자가 눈썹을 들어 올리며 되물었다.“헌데 소문에 따르면 하 대인은 벼슬이 깎였어도 사치스러운 생활에는 조금도 영향이 없다고 하던데요. 며칠 전만 해도 하 씨 댁 젊은 도련님께서 십만 냥을 들여 기생 한 명을 기방에서 풀어 와 열여덟 째 첩으로 들였다고 들었습니다. 술과 여인에게 쓸 돈은 있으면서 부황을 위해 쓸 돈은 없단 말입니까?”대황자의 안색이 순식간에 변했다.사촌동생이 첩을 들인 일은 극도로 은밀하게 처리한 일이었다. 그런데 열셋 째 황자는 어찌하여 그것을 알고 있는가?그 기생은 사촌동생의 아이를 품고 있었다. 하선준은 하 씨 집안의 혈맥이 밖으로 흩어지는 것을 원치 않아 결국 여인을 집 안으로 들일 수밖에 없었다. 하 씨 가문은 이 일이 지금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았기에 이 사실을 아는 사람들을 모두 매수해 버렸다. 기방의 명기가 몸값을 받고 풀려났다는 소문만 돌았을 뿐, 어느 집으로 들어갔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그런데 그 비밀이 이렇게 조정 한가운데에서 열셋 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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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25화

그날따라, 황제는 어찌 된 일인지 하 씨 사람들만 보면 속이 뒤집히듯 불쾌해졌다. 그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변명처럼 들렸고 당장이라도 목을 비틀어 꺾어버리고 싶은 충동이 치밀어 올랐다.“입 다물라. 짐은 병든 것이지 어리석은 것이 아니다. 너희 하 씨는 백만 냥이 아니라 천만 냥이다. 오늘 안으로 반드시 병부에 보내라. 그렇지 않으면 하 씨 일가 전부를 전장으로 보내 적을 베게 할 것이다.”하선준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가슴이 덜컥 내려앉은 그는 급히 대황자를 바라보았다.“대황자 전하, 하 씨 가문의 살림이 어떤지 전하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정말로 만 냥만 내놓아도 집안을 다 팔아치워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하 씨는 그 자리에서 끝입니다.”하 씨가 무너지면 대황자는 가장 큰 버팀목 하나를 잃게 된다. 훗날 황위에 오른다 해도 더는 그를 뒷받침해 줄 든든한 세력이 남지 않는다. 대황자는 그 사실을 또렷이 이해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하 씨의 돈은 곧 자신의 돈이었다. 앞으로 마음껏 쓰기 위해서라도 그것을 지켜야 했다. 그러나 지금 이 자리에서 내주고 나면 훗날 쓸 돈은 누구에게서 받아야 한단 말인가?대황자는 다급히 입을 열었다.“부황…”그러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태황태후가 단호하게 가로막았다.“너는 대황자다. 황제께서 가장 큰 기대를 거는 아들이기도 하지. 국사와 백성의 안위를 먼저 생각해야 할 위치에 있는 자다. 사사로운 정으로 집안을 감싸려 든다면 황제가 어찌 너에게 나라를 맡길 수 있겠느냐?”그 한마디로 대황자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하 씨 가문이 아무리 중요해도 황제와 태황태후의 미움을 사면서까지 지킬 수는 없었다. 결국 황위에 오르지 못한다면 하 씨의 존망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하선준은 그 속내를 읽어내고 마음이 차갑게 식어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씁쓸한 냉소를 흘리며 황제 앞에 깊이 머리를 조아렸다.“알겠습니다. 신이 곧 준비하겠습니다. 천만 냥, 단 한 냥도 모자라지 않게 바치겠습니다.”하선준이 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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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26화

열셋 째 황자는 대황자가 궁지에 몰려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속이 시원하게 뚫리는 듯한 쾌감을 느꼈다. 황릉에서 빛 한 줄기 없이 지내던 나날 동안, 그는 하루도 증오를 내려놓은 적이 없었다. 어머니가 죽기 전 겪어야 했던 참혹한 모습을 떠올릴 때마다 그는 황후와 대황자를 제 손으로 찢어 죽이고 싶었다.황후는 대황자의 앞길을 닦아 주려 했던 사람이었다. 그러니 그는 대황자부터 꺾고 하 씨 가문까지 함께 쓸어버려 황후가 의지할 수 있는 모든 희망을 하나하나 지워버릴 생각이었다. 이 몇 년 동안 그는 황릉에 갇혀 있었지만 경성에서 벌어지는 일은 손바닥 보듯 꿰고 있었다. 수없이 저울질한 끝에 그는 연기준을 자신의 칼로 택했다.지금에 와서 보니 그 선택은 더할 나위 없이 정확했다. 복수가 눈앞에 다가왔다는 사실에 열셋 째 황자는 마음속으로 조용히 승리를 자축했다. 황위를 손에 넣는 날, 그는 황후에게 어머니가 겪은 고통의 몇 배, 몇십 배를 돌려줄 작정이었다.아침 조회가 끝나기도 전에 대황자와 하 씨 가문은 모두 금란전에서 쫓겨났다. 황제는 그들에게 즉시 돌아가 준비를 마치고 곧장 출발하라고 명했다.대황자가 야랑국으로 가는 것은 협상이 아니라 사실상 사형 선고에 가까웠다. 그 소식이 전해지자 황후는 충격에 침상에서 굴러떨어졌다.“뭐라고 했느냐? 황제가 내 아들을 야랑국으로 보내겠다고? 그건 곧 죽으라는 말이 아니냐?”궁녀가 황후를 부축하며 창백한 얼굴로 말했다.“마마, 어서 대책을 세우셔야 합니다. 폐하께서는 대황자께 단지 천 명의 인원만 붙여 주셨습니다. 그 인원으로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야랑국은 이미 대황자를 원수로 여기고 있습니다. 이번 길은 생사를 장담할 수 없습니다.”천 명이라니.황후는 그제야 황제가 정말로 자신의 아들을 제물로 삼아 야랑국의 분노를 잠재우려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어째서… 어째서 황제가 갑자기 이런 결정을…”그러자 궁녀가 이를 갈며 고했다.“열셋 째 황자 때문입니다. 그가 대황자를 야랑국에 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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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27화

하선준이 조상 법도를 들고나온 순간, 황후는 그가 자신과 완전히 등을 돌렸음을 느꼈다. 그녀는 자리에 멍하니 앉아 있다가 분노에 가슴이 쿵쾅거리며 찻잔을 거칠게 쳐서 엎어버렸다.“참으로 내 훌륭한 오라버니로구나. 하 씨 가문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누가 길을 닦아 주었는지 벌써 잊었단 말이냐? 내가 황후가 되지 않았다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하 씨는 이미 경성을 떠나 변방의 빈곤한 고을로 쫓겨났을 것이다. 그 뒤 수십 년의 영화와 권세가 어찌 가능했겠느냐?”궁녀가 급히 바닥에 엎드렸다.“마마, 부디 노여움을 거두시고 우선 대황자 전하부터 살릴 방법을 생각하셔야 합니다.”황후는 깊게 두 번 숨을 내쉬었다. 문득 얼마 전 대황자와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라 급히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종이를 펼쳐 붓을 들어 빠르게 글을 써 내려간 후 편지를 봉해 궁녀에게 건넸다.“믿을 만한 사람을 골라 야랑국으로 보내거라. 반드시 대장군 단진혁에게 직접 전하게 해야 한다.”아들을 둔 어미의 마음은 서로 통하는 법이다. 야랑국의 황후가 자기 아들의 유일한 혈손이 진국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대황자를 쉽게 해치지 못할 것이다. 대황자를 죽일 것인가, 아니면 손자를 되찾을 것인가? 그녀는 틀림없이 올바른 선택을 하게 될 터였다.대황자의 위기를 하나 넘기자 황후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연기훈, 본궁이 가장 후회하는 일은 그때 네 목숨을 살려 준 것이다. 네가 감히 내 아들을 해치고 황위를 빼앗으려 했으니 곧 너와 네 어미를 함께 저승으로 보내 주겠다.”금란전.열셋 째 황자는 대황자와 하 씨 가문이 함께 곤경에 빠진 모습을 보며 속이 시원해 입가의 웃음을 숨기지도 못했다.태황태후는 이 모든 과정을 차갑게 지켜보며 열셋 째 황자에 대한 의혹을 더욱 깊이 품었다. 이토록 정확하게 이간질하고 황제의 심리를 쥐고 흔들다니.그가 과연 저만큼 영민한 걸까? 아니면 그 뒤에서 누가 이 아이를 조종하고 있는 것일까? 열셋 째 황자의 조정 내 세력은 대황자에 비할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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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28화

진방옥은 지금 대황자 저택 깊숙한 곳에 자리한 음침한 지하 감옥에 갇혀 있었다. 그는 경성을 막 벗어나자마자 진가이의 사람들에게 들켜 길이 막혀 버렸다. 모든 것이 이 몸의 원래 주인이 인생을 너무 허비한 탓이었다. 좋은 시절을 전부 술과 여자에 쏟아붓느라 몸을 지킬 무공도, 달아날 기술도 하나 배우지 않았다. 진방옥은 그렇게 저항 한 번 못하고 포박당해 그대로 경성으로 끌려왔다.그런데 돌아오는 길에 진가이 처지가 완전히 뒤집혀 버렸다. 야랑국의 팔황자와 간통하다 발각되었다는 소문이 퍼졌고 예정임은 그 자리에서 처형 당했으며 회임 중이던 진가이는 목숨만 겨우 건진 채 갇히게 된 것이다.진방옥은 처음에 자신이 풀려날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현실은 그 반대였다. 눈 깜짝할 사이, 그는 다시 대황자의 손아귀로 떨어졌다.빛조차 들지 않는 축축한 감옥을 바라보며 진방옥은 속이 타들어 갔다. 연기준의 병권을 상징하는 조병 영패가 아직 그의 손에 있었다. 두 사람은 약속했고 이틀 뒤가 바로 연기준이 움직이는 날이었다. 그는 반드시 군을 이끌고 성 밖에서 대기하다가 필요하면 즉시 들이쳐야 했다. 만약 지원군을 불러오지 못한다면 연기준과 서인경은 궁 안에서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진방옥은 자신이 탈출하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이 사실을 바깥에 알릴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래야 연기준 쪽에서 대비할 수 있을 테니까.그때였다. 지하 감옥의 문이 덜컥 열렸다. 눈부신 빛이 쏟아져 들어와 진방옥은 반사적으로 눈을 가렸다. 사람이 앞에 다가왔을 때 그는 비로소 상대를 알아보았다. 대황자, 연강헌이었다.“이거 웬일입니까 우리 둘째 매부이신 대황자 전하께서 직접 오셨네요? 제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이런 곳에 가둬 두고 고생을 시키십니까?”연강헌은 높은 곳에서 진방옥을 내려다보며 비웃듯 말했다.“빈말은 필요 없다. 본황자는 시간 낭비 하는 것을 가장 싫어하니까. 들으니 네게는 좀 특별한 재주가 있다더구나. 내 곁에 남아 나를 위해 일한다면 나중에 네게 높은 벼슬과 작위를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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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29화

진방옥은 난처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이정말 사람을 잘못 보셨습니다. 제가 그런 대단한 기술을 가졌다면 진 씨 가문이 지금까지 이런 변두리에서 기를 펴지 못하고 살았겠습니까? 정말 그랬다면 태황태후께서 벌써 진 씨를 경성으로 불러 벼슬과 작위를 내렸을 겁니다. 그분이 우리 집안을 도와주지 못한 이유는 우리 집안이 아버지 때부터 죄다 쓸모없는 인간들뿐이었기 때문입니다.”진방옥은 스스로를 깎아내리면서까지 대황자의 손아귀로 들어가는 것을 거부했다.연강헌의 음침한 얼굴에는 서서히 냉소가 떠올랐다.“제 분수를 모르니 더는 봐줄 수 없겠군. 상왕의 조병 영패를 내놓아라.”진방옥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어째서 연강헌이 그가 연기준의 병권을 쥔 패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단 말인가?연강헌은 이미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있다는 듯 비웃었다.“본황자가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하겠지? 너와 연기준은 이미 죽은 몸인데 지금 둘 다 경성에 있다. 연기준은 궁 안에 숨어 언제든 황위를 뒤엎을 기세고 너는 갑자기 성 밖으로 나갔다. 그것도 백 리 밖에 주둔한 군대가 있는 방향으로 말이지. 이 정도면 바보가 아닌 이상 다 짐작할 수 있다.”진방옥은 속으로 혀를 찼다.경성의 사람들은 정말 한 명 한 명이 다 노련한 사람들뿐이군.그가 침묵하자 연강헌의 인내심은 바닥났다.“내게 붙으면 너를 모든 사람 위에서 군림할 수 있게 만들어 주겠다. 그런데도 네가 고집을 부린다면 필요한 것을 빼앗고 널 여기서 끝내 버릴 수밖에 없지. 본황자는 네가 다른 누구에게 충성을 바칠 기회조차 주지 않을 것이다.”진방옥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자신의 이 능력이 드러난 순간부터, 그는 모두가 탐내는 먹잇감이 되었고 누구나 그를 손에 넣고 싶어 했다. 그는 도덕적으로 고결한 인물은 아니었지만 이 시대의 권력 싸움에는 누구 편도 들 수 없었다. 그가 끝까지 지키려는 단 하나의 원칙은, 자신이 이 시대에 떨어졌다고 해서 역사의 흐름을 바꾸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가면 그를 노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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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30화

“신에게 아룁니다.”그 목소리는 전각 밖에서 들려왔다. 대신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리자 한 젊은이가 명황색 긴 함 하나를 두 손으로 받쳐 들고 금란전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그의 얼굴은 낯설었다.그때 예부상서가 급히 앞으로 나섰다.“채빈, 너는 예부의 보잘것없는 오품 관리일 뿐이다. 감히 금란전에 발을 들일 자격이 없다. 당장 나가라.”채빈은 채 씨 가문의 막내아들이었다. 예전 경성에서는 이름난 한량이었고 단평안과 어울려 다니던 난봉꾼 무리 중 하나였다. 하지만 올해 봄, 과거에 급제해 예부에 들어왔고, 벼슬은 오품에 불과했다. 학문도 실력도 변변치 않은 공자가 관직에 오른 것은 누구나 그의 정승급 아버지와 재력 덕분임을 알고 있었다.채빈의 가장 큰 특징은 생각이 얕고 공을 서두른다는 점이었다. 그런 사람일수록 누군가의 손에 놀아나기 쉽다.서인경은 그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 젊은이가 지금 이 순간 전각으로 들어온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님을 곧바로 알아차렸다.그녀는 무심코 연기준을 바라보았다. 연기준이 가볍게 눈썹을 들어 올리자 그녀는 속으로 깨달았다.이 또한 그의 수였다.진국에서는 삼품 이상 관리만이 금란전에 들어와 조정 논의에 참여할 수 있는데 느닷없이 채빈이 나타났으니 모두가 놀랄 수밖에. 더구나 그는 하 씨 가문의 문생이었고 채 씨와 하 씨는 혼인으로 얽힌 집안이었다. 그러기에 대황자 쪽 사람이 하나라도 움직이면 열셋 째 황자는 극도로 예민해질 수밖에 없었다.대황자는 곧 야랑국으로 떠나야 했다. 그에게 있어 이 결정은 살아 돌아올 수 없는 길이나 다름없었다. 열셋 째 황자는 이 시점에서 어떤 변수도 원치 않았다.채빈은 앞으로 나와 옷자락을 걷어 올리고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신, 예부 채빈입니다. 금란전에 무단으로 들어온 것은 중대한 사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부디 폐하께서 죄를 물어 주시옵소서.”황제가 흥미를 느낀 듯 물었다.“무슨 일로 이리 소란을 피우느냐?”채빈은 고개를 숙인 채, 두 손으로 조서를 높이 들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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