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전처분이 의학계를 휩쓸고 다니십니다: Chapter 1031 - Chapter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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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31화

문 앞에 이르렀을 때 고수경은 망설이다 끝내 한마디를 덧붙였다.“저랑 오빠, 우리 가족 모두 정말 언니한테 감사하게 생각해요.”소예지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아 화면에 새로 수집된 데이터를 조용히 들여다볼 뿐이었다.고수경은 살며시 문을 닫고 나왔다. 가슴속이 복잡하게 뒤엉켰다.자신도 이렇게 마음이 쓰린데 오빠가 소예지가 자신을 완전히 놓아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오빠의 마음은 얼마나 깊은 고통에 잠길지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이게 전부였고 그 이상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밤의 장막이 내려앉은 술집 안.심유빈은 구석 자리에 앉아 휴대폰을 들어 올렸다. 테이블 가득 늘어선 술병들을 사진으로 찍어 고이한에게 전송했다.[아직 날 신경 쓴다면 와. 그렇지 않으면 이거 전부 다 마셔버리는 거 지켜보든가.]메시지를 보내고 나서 심유빈은 고이한의 반응을 기다리며 휴대폰 화면에 시선을 못 박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예전엔 언제나 그랬다. 고이한의 전화는 반드시 제일 먼저 걸려 왔다. 말로 타이르든 단호하게 명령하든 직접 달려오든 어떤 방식이든 상관없었다.누군가가 자신을 걱정해 준다는 게 심유빈에게는 더없이 달콤했고 이번에도 고이한은 다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시간은 일분일초 흘러갔고 화면은 끝내 캄캄한 채였다.심유빈은 침을 꿀꺽 삼키며 애써 참고 기다리다가 결국 메시지를 하나 더 보냈다.[내가 못 할 것 같아?]이미 협박이나 다름없는 말투였다.그렇게 5분이 지나고 10분이 흐르고 거대한 허탈감과 무시당한 데서 오는 수치심이 덩굴처럼 그녀의 심장을 감아 조이기 시작했다.심유빈은 다시 한번 으름장을 놓았다.[좋아 안 오겠다는 거지. 그럼 마시는 거 두고 봐.]그녀는 테이블 위의 독한 술을 집어 들고 고개를 젖혀 들이붓기 시작했다. 옆에 있던 유미나가 깜짝 놀랐다. 심유빈의 심기가 오늘따라 유독 험하다는 건 눈치채고 있었지만 술집에 오는 것 자체를 막을 수는 없었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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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32화

심유빈은 귀에 익은 낮고 묵직한 목소리를 들으며 나직하게 웃음을 흘렸다. 그러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그래서? 나를 어쩌려고?”고이한의 목소리는 여전히 감정이라곤 없었다.“그만해.”심유빈의 웃음이 비웃음으로 바뀌었다.“나 필요 없다며? 그런데 뭔 상관이야?”“우리 사이의 거래는 아직 끝나지 않았어.”고이한의 목소리는 여전히 평온했다. 하지만 그 안에는 반박을 허용하지 않는 압박감이 서려 있었다.“선 넘지 마.”심유빈은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이번엔 제법 득의양양한 웃음이었다.“선이라고? 그러니까 아직 내가 필요하다는 거잖아. 아직 나를 신경 쓰고 있는 거고.”마치 다시 주도권을 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거기다 방금 마신 술기운까지 더해지자 심유빈은 전화 너머로 흘러오는 차갑지만 여전히 매혹적인 목소리에 취한 듯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빌어봐. 당신이 나한테 잘 살아달라고 빌면 계속 어머님 살려줄게. 안 그러면 믿든 말든 나 진짜 죽어버릴 거야. 손목을 한 번 더 긋는 거 아무렇지도 않아.”그 순간 전화가 뚝 끊겼다.심유빈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끊어진 화면을 바라봤다. 그러다 휴대폰을 옆 소파에 세게 던져버리고는 머리를 감싸 쥐며 고통스럽게 흐느끼기 시작했다.유미나는 말없이 휴대폰을 주워들었다. 그리고 이제야 고이한이 심유빈을 필요로 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피를 나눠주고 고이한의 어머니를 살리고 있었던 것이다.‘그러니까 그게 심유빈이 고 대표 곁에서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던 이유였던 거야?’유미나는 손을 뻗어 심유빈의 등을 살살 쓸어내리며 말했다.“유빈아, 정신 차려. 사모님 자리가 아니더라도 너는 이미 보통 사람들이 따라올 수 없는 데까지 와 있어.”심유빈은 휴지를 낚아채 눈물을 거칠게 닦아낸 뒤 충혈된 눈으로 유미나를 노려보며 쏘아붙였다.“언니가 뭘 알아. 나 그 사람한테 10년을 바쳤어. 내가 이것만 갖고 만족할 것 같아?”유미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심유빈이 가끔씩 드러내는 야망과 욕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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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33화

“언니, 여기는 이제 괜찮으니까 먼저 가!”심유빈이 휴대폰을 들며 말했다.“이러는데 내가 어떻게 가?”“올 사람 있어.”심유빈의 시선이 화면을 훑으며 연락처를 찾았다.“하 대표 말하는 거야?”유미나의 눈이 번쩍 빛났다. 그녀도 심유빈의 다음 수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하종호의 아내가 되는 것 역시 수많은 여자가 탐내는 자리였다.고이한은 붙잡을 수 없었지만 하종호는 달랐다. 그는 완전히 심유빈의 손바닥 안에 있었다. 심유빈을 향한 그의 흠모는 이제라도 고이한과 정면으로 맞서서라도 그녀를 데려오고 싶을 만큼 커져 있었다.심유빈은 하종호의 번호를 눌렀다.“여보세요! 유빈 씨 무슨 일이에요?”전화 너머로 하종호의 목소리가 환하게 흘러왔다.“저 술을 좀 마셨는데 머리가 좀 어지러워요. 와서 데려다줄 수 있어요?”“뭐요? 유빈 씨 술 마시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왜 마신 거예요?”“그냥 기분이 좀 안 좋아서 한잔했어요. 저 지금 술집에 있어요!”“혼자 술집에요?”전화 너머 하종호가 눈에 띄게 놀란 기색이었다.“혼자예요. 올 거예요?”심유빈이 요염하게 웃으며 물었다.저쪽에서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여자 혼자서 술집은 왜 가요. 어디예요?”심유빈의 빨간 입술이 살짝 올라갔다. 온 세상이 자신을 버려도 하종호만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심유빈이 술집 주소를 알려주자 하종호는 근처에 있다며 바로 오겠다고 했다.유미나는 하종호를 부르는 데 성공한 걸 확인하고는 눈치껏 말했다.“그럼 나 밖에 차에서 기다릴게.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해.”심유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미나가 나가자 거울을 꺼내 화장과 표정을 가다듬었다.10분 후 하종호의 SUV가 술집 앞에 섰다. 그는 차 키와 휴대폰만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이 술집은 친구가 운영하는 곳이라 하종호에게 익숙했다. 심유빈이 있다고 한 구석 자리를 향해 걸음을 옮기는데 앞에서 팔짱을 낀 여자 둘이 자리를 찾는 듯 걸어오며 그의 길을 막았다.비켜달라고 말하려는 순간 무리 중 한 사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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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34화

그때 그의 휴대폰이 밝아졌다. 심유빈에게서 온 전화였다.하마터면 잊을 뻔했다. 자신이 여기 온 건 심유빈을 집에 데려다주기 위해서였다. 그는 곧장 심유빈이 있는 자리로 걸음을 옮겼다.심유빈은 조명 아래 살짝 상기된 얼굴로 그를 맞이했다. 눈빛은 몽롱하고 술기운에 젖은 나른함과 여린 기색이 감돌았고 붉은 입술에 미소를 머금은 채였다.“종호 씨, 왔어요.”하종호가 자리에 앉는 순간 우연히 엄가온이 있는 방향으로 눈이 갔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종호의 몸이 순간 굳었다.엄가온은 그저 한 번 쳐다봤을 뿐인데 그 눈빛이 마치 바늘처럼 콕콕 박혀 하종호는 앉아 있는 내내 바늘방석에 앉은 것 같았다.“유빈 씨, 그만 마셔요. 제가 집에 데려다줄게요.”하종호는 서둘러 친구로서의 도리를 다하며 심유빈을 달랬다.심유빈이 웃었다.“같이 술 마시자고 부른 건데 오자마자 집에 가자고 해요?”“고이한이 술 마시지 말라고 했잖아요. 왜 마신 거예요?”하종호가 미간을 찌푸렸다.“종호 씨, 나랑 그 사람이 무슨 사이인 것 같아요? 친구? 아니면 연인?”심유빈이 고통스럽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둘 다 아니에요.”하종호가 멈칫했다. 심유빈이 고이한과의 관계를 이렇게 직접적으로 입에 올린 건 처음이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물었다.“그럼 어떤 사이예요?”“우리가 그냥 사업상 거래 관계라고 하면 믿겠어요?”심유빈은 턱을 괴고 요염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평범한 친구 사이도 아니에요. 우리.”하종호는 그 말을 들으며 멍하니 굳었다.“놀랐죠?”심유빈이 자조적으로 웃으며 잔을 들어 한 모금 머금었다. 몽롱한 눈빛으로 하종호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그 사람은 자기 엄마를 살리려고 내 피가 필요한 것뿐이에요.”하종호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저 멍하니 심유빈을 바라볼 뿐이었다. 심유빈은 타오르는 눈빛으로 그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그러니까 종호 씨, 이제 나를 고이한의 소유물처럼 보지 말아요. 나랑 그 사람 사이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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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35화

그의 마음은 애초에 다른 곳에 붙들려 있었다. 고개를 들어 중앙 자리 쪽을 바라보니 마침 엄가온이 옆에 앉은 남자와 무슨 말을 주고받으며 웃음 섞인 표정으로 그의 어깨를 툭툭 치고 있었다.하종호의 가슴이 뭔가에 찔린 듯 욱신했고 그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심유빈이 쥐고 있던 손을 슬그머니 빼냈다.심유빈의 마음이 순식간에 자신의 손처럼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하종호의 시선이 향한 곳을 따라 바라봤고 눈 속에 어두운 기색과 불쾌함이 스치고 지나갔다.‘저 엄가온이 여기는 왜 또 나타난 거야.’그러나 곧 그녀의 붉은 입술이 미세하게 올라갔다. 불쾌함은 순식간에 계산이 어린 빛으로 대체되었다.그때 엄가온이 가방을 챙기기 시작했다. 이곳을 떠나려는 게 분명했다.바로 그 순간 엄가온의 시선이 하종호 쪽으로 향하자 심유빈은 그 타이밍을 놓치지 않았다. 이마를 짚으며 몸을 하종호 쪽으로 바짝 기울이더니 나긋한 목소리로 속삭였다.“종호 씨, 머리가 너무 어지러워요. 우리 나가요. 저 여기 더 있기 싫어요.”하종호는 시선을 거두고 제 품으로 파고드는 심유빈을 내려다보며 어쩔 줄을 몰라 어색하게 굳었다. 마치 심유빈의 몸에 닿기만 해도 데일 것 같은 느낌이었다.고개를 들어 엄가온을 보니 가방을 들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얼른 심유빈을 부축해 똑바로 앉히고는 다시 급히 엄가온 쪽으로 시선을 돌렸지만 엄가온은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친구와 함께 출구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하종호는 초조해져서 침을 꿀꺽 삼켰다. 바로 그때 심유빈이 등 뒤에서 그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속삭였다.“종호 씨, 나 두고 가지 말아요.”마침 엄가온이 마지막으로 한 번 뒤를 돌아본 순간 그 장면이 그대로 눈에 들어왔다. 어두운 조명에 거리까지 멀어 하종호의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고 두 사람이 다정하게 안고 있는 모습만 또렷하게 눈에 담겼다.그녀의 발걸음이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더 빨라졌고 거의 도망치듯 그 자리를 벗어났다.그 모습을 본 하종호는 의식할 틈도 없이 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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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36화

“그런데... 내가 쓸데없이 끼어드는 것 같지 않아요?”엄가온이 되물었다.하종호는 몇 초간 멍했다. 화가 났을 거라 생각했는데 엄가온의 반응은 전혀 달랐다. 오히려 함께 심유빈을 바래다주겠다고 나서다니 완전히 예상 밖이었다.“가온아, 진짜로 나한테 화 안 난 거야?”혹시 아까 술집 안에서 본 장면 때문에 오해했을까 봐 한 번 더 확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엄가온은 표정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채 또렷한 눈빛으로 말했다.“제가 왜 화를 내요? 심유빈 씨랑은 친구잖아요. 술 취한 친구 챙겨주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요.”그러고는 한마디 더 덧붙였다.“근데 심유빈 씨, 고 대표님 여자친구 아니에요?”하종호가 잠깐 멈칫했다.“그걸 어떻게 알아?”곧바로 이상한 기대감이 스쳤다.‘혹시 나 때문에 찾아본 건가?’엄가온은 하종호의 뜨거운 시선에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얼굴이 살짝 달아올라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말했다.“같이 데려다줄 거예요 말 거에요?”“응, 차 옆에서 기다려. 내가 데리고 나올게.”하종호는 몇 걸음 걷다가도 다시 뒤를 돌아봤다. 혹시 그사이에 엄가온이 사라져 버릴까 봐 불안한 듯 자꾸만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엄가온은 하종호의 차 옆에 서서 한동안 움직이지 못한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사실 그녀는 오래전부터 하종호 때문에 심유빈의 SNS를 꽤 꼼꼼하게 들여다보고 있었고 게시물을 거의 빠짐없이 훑어본 끝에 심유빈이 상류층 세계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데 능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이한과 소예지가 결혼 생활을 이어가던 내내 그녀는 온갖 방식으로 선을 넘고 노골적인 추파를 던지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그러면서도 그녀는 하종호처럼 조건 좋은 남자를 결코 놓치지 않고 꽉 붙들어 쥔 채 마치 언제든 꺼내 쓸 수 있는 카드처럼 손안에 넣어두고 있었다.같은 여자로서 엄가온은 그런 태도가 몹시 못마땅했고 동시에 그 사실을 알지 못한 채 휘둘리고 있는 하종호가 안쓰럽게 느껴졌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자신의 처지를 제대로 바라봤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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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37화

“종호 씨!”그녀가 기쁜 듯 울먹이며 불렀다.“나 그냥 내버려두는 줄 알았어요!”하종호는 그 모습을 보며 손을 내밀었다.“가요, 차 밖에 있어요. 집에 데려다줄게요.”심유빈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역시 하종호는 자신을 버리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의 손을 잡고 가방을 집어 들더니 자리에서 일어나는 척하며 일부러 가슴을 하종호에게 살짝 부딪혔다.하종호가 당황하며 얼른 그녀의 어깨를 붙들었다.“걸을 수 있어요?”심유빈이 입술을 살짝 올리며 어린아이처럼 고개를 저었다.“못 걷겠어요. 부축해 줘요.”하종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고 술집 출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심유빈은 고개를 숙인 채 슬며시 미소를 숨겼다. 결국 하종호는 엄가온과 자신 사이에서 선택을 한 셈이었고 자신의 눈은 틀리지 않았다. 7년을 곁에 두고도 마음을 얻지 못해 안달해 온 남자가 그렇게 쉽게 포기할 리 없었다.하지만 술이 좀 취했어도 눈은 멀쩡했고 하종호의 차 옆에 조용히 서 있는 엄가온이 보였다.하종호는 엄가온을 버리고 자신에게 온 게 아니었다.‘그런데 왜 저 여자가 아직도 저기 있는 거야!’하종호는 심유빈의 얼굴빛이 달라진 걸 느끼고 고개를 내려다보며 말했다.“유빈 씨, 가온이랑 같이 데려다줄게요.”심유빈은 곧장 몸을 똑바로 세우며 하종호의 부축하는 손을 밀어낸 뒤, 긴 머리를 한 번 쓸어 넘기며 애써 태연한 척 말했다.“종호 씨, 됐어요. 엄가온 씨 데려다줘요. 저는 택시 탈게요.”말을 마치고는 일부러 고개를 돌렸다. 눈가에 맺힌 억울한 눈물 한 방울이 반짝 빛났다.하종호는 그런 심유빈의 반응을 보고도 그녀가 삐쳤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었고 예민한 성격과 버릇 또한 이미 오래전부터 훤히 꿰뚫고 있었다.하지만 술 취한 심유빈을 혼자 택시에 태워 보내는 건 친구로서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고집 부리지 말고 타요. 먼저 데려다줄게요.”하종호가 다소 난감하다는 듯 말했다.심유빈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조명 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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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38화

“맞아요, 심유빈 씨. 일단 집에 들어가서 쉬어요. 하실 말씀은 맑은 정신에 종호 오빠랑 하셔도 늦지 않아요.”심유빈은 엄가온을 바라보다가 하종호를 한 번 훑어보고는 웃음을 흘렸다.“종호 씨 복도 많네요. 엄가온 씨같이 속 깊은 친구가 다 있고.”듣기엔 칭찬 같았지만 사실은 엄가온의 그 속 깊음이 오히려 가식적으로 보인다는 뜻이 담긴 말이었다. 심유빈은 말을 다루는 데 능한 사람이었다.하종호가 그 가시를 알아채고 막 입을 열려는 찰나, 엄가온이 먼저 가볍게 웃으며 받아쳤다.“종호 오빠 친구면 제 친구랑 마찬가지죠. 챙기는 게 당연하죠.”심유빈은 가슴이 탁 막혔다. 더 이상 싸워봤자 자신만 속 좁아 보일 게 뻔했다.“그래요, 그럼 실례 좀 할게요.”억지로 끌어낸 웃음이었다.“차 타면 멀미가 좀 있어서요. 앞자리에 앉아도 될까요?”심유빈이 돌아보며 엄가온에게 물었다.엄가온은 웃으며 답했다.“물론이죠, 타세요.”하종호는 복잡한 눈빛으로 차에 오르기 전, 엄가온을 향해 고마움이 담긴 눈길을 한 번 보냈다.그 눈길을, 이미 차 안에 들어간 심유빈은 보지 못했다.차가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심유빈이 관자놀이를 주무르며 멀미가 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시선이 무심코 수납함 위에 놓인 하종호의 휴대폰에 닿았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집어 들며 말했다.“종호 씨, 음악 좀 틀어요.”살짝 애교가 담긴 말투였다. 손가락은 이미 익숙하게 화면을 밀어 비밀번호를 누르고 있었다.하종호는 핸들을 쥔 손에 순간 힘이 들어갔다. 이내 룸미러로 뒷자리 엄가온의 표정을 살폈다.다행히 엄가온은 고개를 숙인 채 휴대폰 화면에만 집중하고 있었고 앞에서 벌어지는 일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보였다.차 안에는 잔잔한 음악이 흘러나왔고 심유빈은 휴대폰을 내려놓은 채 편안하게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차 안에는 묘하게 어색한 공기가 감돌았고 엄가온은 창밖을 바라본 채 깊은 생각에 잠긴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하종호는 신경이 잔뜩 곤두선 상태로 운전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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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39화

엄가온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다행이네요. 이제 저, 집에 데려다줘요.”하종호는 마음이 한결 가볍고 환해지는 것 같았다. 앞으로 남은 길이 기분 좋게 느껴졌다.“음악 듣고 싶어요.”엄가온이 말했다.하종호는 곧장 휴대폰 잠금을 풀어 건네며 말했다.“듣고 싶은 거 직접 골라.”엄가온은 잠깐 멈칫한 채 웃음을 띤 하종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이내 휴대폰을 받아 들어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를 골랐다.곧 경쾌한 음악이 차 안을 가득 채웠고 그 순간만큼은 밤하늘마저 맑고 고요해진 듯 느껴졌다.엄가온의 집 앞에 도착하자 엄가온이 차에서 내리며 한마디했다.“천천히 가요.”“응.”하종호가 답했다. 하지만 차는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엄가온이 그를 바라보며 웃음 섞어 물었다.“왜 안 가요?”하종호는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리고 차를 출발시켰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룸미러로 엄가온의 모습을 쫓았고 엄가온이 모퉁이를 돌아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그는 오늘 심유빈이 털어놓은 말을 곱씹으며 고이한과 그녀 사이에 감춰져 있던 진실을 되짚어보았다.아직도 믿기지 않았다.‘고이한과 심유빈이 처음부터 끝까지 거래 관계였어. 연인이 아니었다니...’문득 지난번에 먼저 연락해서 고이한을 만났던 일이 떠올랐다. 그때 고이한은 분명히 심유빈과 그냥 친구 사이라고 했지만 그걸 믿지 못하고 나쁜 놈이라고 단정 지어버린 건 자신이었다.‘혹시 나 혼자 오해한 거야? 그때 고이한이 한 말이 사실이었던 걸까...’생각할수록 머릿속이 뒤엉켰다. 언젠가 기회를 봐서 고이한에게 직접 확인해 봐야 할 것 같았다.소예지가 집에 돌아온 건 밤 아홉 시 반쯤이었다.양희순한테서 딸이 고이한과 함께 아래층에서 자고 있다는 말을 전해 듣자마자, 소예지는 가방을 내려놓기 무섭게 다시 엘리베이터에 올랐다.그 모습을 본 젤리가 재빠르게 따라 나와 어느새 엘리베이터 안까지 들어왔고 27층 현관 앞에 도착할 때까지 줄곧 곁을 떠나지 않았다.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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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40화

다음 날 아침.딸을 학교에 데려다준 소예지는 병원에서 온 전화를 받았다. 건강검진 결과가 나왔으니 와서 수령하라는 안내였다.그녀는 자신의 몸 상태를 대략 알고 있었다. 그날 갑자기 쓰러졌던 건 병 때문이 아니라 한계를 넘도록 스스로를 몰아붙였기 때문이었다. 쌓이고 쌓인 피로가 결국 몸을 무너뜨린 것이었다.병원에 도착한 소예지를 본 간호사는 서류를 한참 뒤적이다가 고개를 갸웃했다.“이상하네요. 아침에 분명 결과지가 나왔다고 확인했는데...”그때 막 업무를 마치고 돌아온 다른 간호사가 소예지를 알아보고 말했다.“소 박사님 오셨어요? 결과지는 남편분이 가져가셨어요. 아, 아니... 전남편분이요. 지금 검사실에 계세요.”순간 소예지의 표정이 굳었다.‘고이한이... 결과지를 가져갔다고?’간호사에게 가볍게 인사를 건넨 뒤, 그녀는 곧장 의사실로 향했다. 문은 반쯤 열려 있었고 안에서는 낮고 단단한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이 수치들 확실합니까? 특히 이 항목들, 정상 범위를 벗어난 것 같은데요.”그의 목소리는 어딘가 팽팽하게 조여 있었다.정하늘이 웃으며 답했다.“보고서만 놓고 보면 큰 문제는 아닙니다. 다만 과로와 영양 불균형 때문에 일부 수치가 불안정한 겁니다. 심각한 병적 소견은 없어요. 물론 잠재적인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지만 현재로서는 정상 범주라고 보시면 됩니다.”“잠재적인 가능성이라니요?”고이한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죠.”“너무 걱정하지 마세요.”정하늘이 손을 내저었다.“가벼운 빈혈이 있습니다. 식단을 조절하고, 업무량을 줄이고, 스트레스 관리만 잘해도 충분히 회복됩니다. 바깥 활동도 좀 하시고요.”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고이한의 말이 이어졌다.“소 박사 아버지가 과로로 인한 심장마비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혹시...”문밖에 서 있던 소예지의 발걸음이 멈췄다.‘아버지.’그 단어 하나에 가슴 깊은 곳이 조용히 조여들었다. 오래전 묻어 두었다고 생각했던 통증이 다시 스며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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