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전처분이 의학계를 휩쓸고 다니십니다: Chapter 1051 - Chapter 1060

1154 Chapters

제1051화

조명 아래 하종호의 얼굴이 창백하게 보였다. 지난 7년 동안, 심유빈이 그의 앞에서 고이한에게 집착하는 척하면서 뒤로는 자신에게 밀고 당기기를 반복했던 일들이 떠올랐다.그녀는 늘 그랬다. 하종호가 막 포기하려 할 때쯤, 딱 그만큼의 희망을 줬다.그리고 일부러 꾸민 것 같으면서도 아닌 척하며 툭하면 약한 모습을 드러내던 그 모든 언행까지 떠올랐다.생각하면 할수록 자신이 가지고 놀림당하고 속아온 것만 같은 무력감이 밀려왔고 하종호는 잔에 남은 술을 단숨에 목구멍으로 들이켰다. 그다음 순간 정체 모를 분노가 치밀어 올라 손에 들고 있던 술잔을 바닥에 세게 내던졌다.“나 완전히 멍청이였네.”하종호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자조와 고통이 뒤엉킨 목소리였다.심유빈이 고이한에게 이루지 못한 감정을 품고 있었다는 건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7년 전에 이미 윤하준에게도 접근했다는 건, 하종호에게 가장 아픈 신경을 건드리는 것이나 다름없었다.7년 동안 도대체 어떤 여자를 좋아해 온 건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기회만 생기면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려는 그런 여자였다.하종호는 머리를 감싸 쥐며 낮게 신음을 흘렸다. 그러다 소파에 등을 기대고 천장의 불빛을 올려다봤다. 처음엔 분노로 타오르던 눈빛이, 수치심으로 흔들리다가 점점 공허해지더니 결국 맑고 차분한 냉정함으로 돌아왔다.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하준아, 네가 나한테 몇 번 경고했었잖아. 나 진짜 많이 멍청했지?”윤하준이 고개를 저었다.“그냥 그 사람 예쁜 얼굴에 눈이 멀어서 본성을 못 본 거야. 내가 말했잖아, 심유빈은 남자 다루는 데 선수라고.”하종호가 쓴웃음을 지었다.“맞아. 네 말대로 7년 동안 내가 한 바보짓이 한두 가지가 아니야. 심유빈 때문에 이한이랑 진짜 등 돌릴 뻔했잖아. 이한이가 나쁜 놈인 줄 알았어. 걔를 붙잡고 결과도 안 내준다고. 근데 알고 보니 내가 제일 바보였던 거야.”진실을 마주하고 나면, 무너지는 건 감정 하나만이 아니었다. 하종호가 7년간 쌓아온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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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52화

전화벨이 서너 번 울리고 나서야 연결됐다. 전화 너머로 심유빈 특유의 나른하고 요염한 목소리가 흘러왔다.“여보세요, 종호 씨? 이 늦은 시간에 무슨 일이에요?”반 시간 전이었다면 이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하종호의 마음이 녹아내렸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역겨움만 밀려왔다.너무 역겨워서 갑자기 주먹을 꽉 쥐며 귀에서 휴대폰을 떼어내고는 세게 눌러 끊어버렸다.맞은편에 앉아 있던 윤하준은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봤다. 하종호의 성격을 알고 있었기에 그 반응이 놀랍지는 않았고 전화를 붙잡고 심유빈에게 감정을 쏟아낼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왜? 한마디 따지지도 않을 거야?”윤하준이 눈썹을 올리며 물었다.“역겨워. 지금 그 사람한테 역겨움밖에 안 느껴져.”하종호가 휴대폰을 내던지고 소파에 털썩 쓰러지듯 앉으며 잔을 들어 술을 세게 들이켰다.“역겨워서 한마디도 섞고 싶지 않아.”혐오가 극에 달하면 말 한마디조차 아깝고 상대의 목소리조차 귀를 더럽히는 것처럼 느껴지는 법이었다.하종호는 소파에 몸을 기댄 채 눈을 감았고 가슴은 격하게 오르내리고 있었다. 7년간 쌓여온 분노가 속에서 조용히 타오르고 있었지만 무언가를 따지고 싶다거나 터뜨리고 싶은 감정은 아니었다. 그저 문득 심유빈과 어떤 형태로든 대화를 나누는 것 자체가 자신의 지능을 모욕하는 일처럼 느껴졌을 뿐이었다.윤하준은 그의 행동을 이해했다. 진짜 내려놓음은 요란하지 않은 법이라 소리 없이 무관심해지는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고 지금 하종호의 반응이 바로 그 상태였다. 그는 마침내 제정신을 되찾아 심유빈을 자신의 세계에서 완전히 밀어냈다는 뜻이었다.한참이 지나서야 하종호가 눈을 떴다.그는 묘하게 홀가분한 표정으로 잔을 들어 윤하준에게 내밀었다.“한잔하자.”윤하준도 잔을 들어 가볍게 부딪혔다.“정신 차린 거 축하해.”“이한이도 저런 여자한테 10년을 시달렸으니 쉽지 않았겠다.”하종호가 불쑥 말했다.윤하준이 술을 한 모금 머금으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하종호는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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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53화

윤하준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이내 이해가 깃든 기색이 스쳤다.“이한은 우리보다 훨씬 더 버틸 줄 아는 사람이지. 그건 부정 못 해. 하지만...”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소예지한테 상처 준 건 사실이야.”하종호가 갑자기 고개를 번쩍 들었다. 무언가 떠오른 듯 주먹으로 테이블을 세게 내리쳤다.“상처 얘기하니까 생각났네. 나도 한몫했어.”하종호의 눈 속에 죄책감이 스쳤다. 그때 자신이 뭔가에 씌었던 게 분명했다. 심유빈의 말이라면 뭐든 곧이곧대로 믿고 소예지한테 하지 말았어야 할 말까지 내뱉었다.윤하준의 시선이 향해왔다.“이안이 생일 때 얘기하는 거야?”“원래 난 안 가려고 했어. 근데 심유빈이 선물 사놨다길래, 잠깐 주고 나오자고 해서 데려갔지. 지금 생각하면... 진짜 미쳤었어. 이한이랑 소예지 이혼한 것도 거의 유빈이 짓 같아.”윤하준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한동안 말이 없었다.“나야 소예지를 잘 모르지만 소예지가 이한이를 엄청 사랑했다는 건 알아. 쉽게 가정을 포기할 사람이 아니야. 그리고 하준아, 너 느끼지 않았어? 요즘 이한이가 소예지 보는 눈빛, 내 눈엔 전혀 놓아버린 것처럼 안 보이던데.”윤하준은 계속 말이 없었다. 조명 아래 깊은 눈매에 그림자가 드리웠다.하종호가 그제야 뭔가를 깨닫고는 얼른 입을 다물었다. 윤하준도 소예지를 좋아한다는 걸 깜빡했다.하종호가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며 미안하다는 듯 말했다.“일부러 꺼낸 말 아니야.”윤하준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담담하게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괜찮아. 하고 싶은 말 해.”하종호가 머리를 긁적였다.“할 말은 다 한 것 같고. 언제 기회 봐서 소예지한테 사과해야겠어.”윤하준이 갑자기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지금은 찾아가지 마. 바쁘거든. 그리고 이한이랑 소예지 사이 일에도 끼어들지 마. 이한이가 소예지한테 진 빚은 직접 갚아야 해.”하종호가 고개를 끄덕였다.“맞아. 그 둘 사이 일은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이한이가 직접 갚아야지.”잠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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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54화

윤하준은 소파에 등을 기댔다. 눈 속의 쓴맛이 한층 짙어졌다. 그때 경주에서, 임현욱이 소예지를 향해 품은 감정을 온몸으로 느꼈었다.뜨겁고 거침없고 아낌없는 감정이었다.자신처럼 이것저것 재고 앞으로 나서지 못하는 것과는 달랐다. 임현욱은 소예지가 고개만 끄덕이면 당장 그녀에게 가정을 만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하종호는 윤하준의 눈빛이 어두워지는 걸 보며 머리를 긁적였다.“그럼 너도 이한이도 아무 기회가 없는 거야?”윤하준이 미간을 주무르며 고개를 저었다.“꼭 그렇다고는 할 수 없어. 결국 예지 씨 선택에 달린 거야. 그 사람, 집안 같은 거 따지는 사람이 아니거든.”“임현욱 조건에 적극적으로 들이댄다면 소예지도 마음이 안 움직이기 어렵지 않겠어?”하종호는 생각이 달랐다.“나는 이미 기회 없어. 이한이는... 알아서 해봐야지.”말을 마치고 윤하준은 옆에 있던 술병을 집어 들더니 잔에 따르지도 않고 병째로 마시기 시작했다.“야야!”하종호가 얼른 술병을 빼앗으려 했다.“오늘 많이 마셨잖아. 그만해.”두 사람이 한동안 더 이야기를 나누다가 하종호가 시간을 보니 새벽 한 시였다. 윤하준을 부축하며 말했다.“가자. 늦었어.”윤하준은 취기가 올라 이마를 짚었다.“나 근처 호텔에서 자고 갈게.”윤하준은 자신의 비서가 데리러 오면서 자리를 떴다.하종호는 자신을 데리러 올 비서를 기다리며 술집 입구에 서 있었고 밤바람이 살짝 스치자 머릿속이 한결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가로등 아래에 선 그는 뒤엉켜 있던 생각들을 하나씩 정리해 나갔다. 7년 동안 이어온 집착이 하루아침에 산산조각 난 듯했지만 남은 것이 고통뿐만은 아니었고 묘하게 새로 태어나는 것 같은 홀가분함까지 함께 느껴졌다.그는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새벽 한 시를 훌쩍 넘긴 시간이었지만 결국 엄가온의 번호를 찾아 메시지를 입력하기 시작했다.[가온아, 자고 있어?]이 시간에 보내는 게 맞나 싶어 쓴웃음을 지으며 휴대폰을 다시 주머니에 넣으려던 순간 갑자기 진동이 울렸다.그는 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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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55화

[그럼 받아준 거야?]엄가온에게서 답장이 왔다.[뭘 받아줘요?][내 여자친구 하겠다는 거.]하종호가 숨을 깊이 들이켜고 전송을 눌렀다.1분, 2분, 3분이 지나도 답장이 없었다. 하종호는 바로 엄가온에게 전화를 걸었다.“여보세요.”전화 너머로 엄가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가온아.”하종호의 목소리가 흥분으로 살짝 잠겼다.“나... 나 너 좋아해. 나랑 사귈래?”잠시 정적이 흘렀다.그리고 이어진 엄가온의 목소리는 의외로 차분하고 냉정했다.“지금 새벽 두 시 다 됐어요. 술 마셨어요? 또 사람 잘못 본 거 아니에요?”그 말에 하종호의 머릿속이 순간 하얘졌다.지난번 그 밤, 자신이 그녀를 심유빈으로 착각했던 일이 떠올랐다.그는 다급하고도 진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아니야, 가온아. 잘못 건 전화 아니야. 직접 말하고 싶어서 그랬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너야, 진지하게 내 여자친구 해줬으면 좋겠어.”전화 너머에서 엄가온의 웃음소리가 났다.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새벽에 고백하는 사람은 처음 봤어요. 하실 말씀 있으면 내일 해요.”“가온아.”하종호가 이번엔 진짜 다급해졌다.전화 너머 엄가온은 끊지 않았다. 오히려 웃음을 머금은 채 말했다.“저는 좀 더 제대로 된 고백이 좋아요. 잘 자요.”“알겠어. 기다려. 제대로 준비해서 정식으로 고백할게. 잘 자.”전화 너머에서 가벼운 웃음소리와 함께 전화가 끊겼다.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전화는 이미 끊겼지만 그 말은 분명히 그녀에게 닿은 것처럼 느껴졌다.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그의 비서가 차를 몰고 도착했다.“대표님, 타세요.”하종호가 차 문을 열고 올라탔다. 밤 풍경을 바라보며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나 싶었다.이른 아침, 소예지가 딸을 학교에 데려다주고 막 연구소로 향하려던 순간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에 뜬 번호를 확인하니 김경환이었다.“여보세요, 김 비서님.”“소 박사님, 지금 집에 계세요? 대표님한테 전화를 드렸는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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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56화

소예지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김 비서가 연락이 안 된다고 걱정해서 잠깐 보러 온 거야.”고이한이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주무르며 문틀에 기댔다.“괜찮아. 좀 열이 나는 것뿐이야.”소예지가 보기에도 열이 나는 게 분명했다.“김 비서 불러서 병원에 가.”“안 괜찮아. 잠깐 자면 나아질 거야.”고이한은 고개를 저으며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문도 닫지 않은 채 거실 쪽으로 향했다.소예지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아플 때도 변함없이 무심한 태도였다.그래도 더 관여하고 싶지 않아 그녀는 그대로 돌아서려 했다.그 순간 안쪽에서 유리가 깨지는 날카로운 소리에 소예지의 발걸음이 멈췄다. 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다시 문 쪽으로 돌아와 조심스럽게 현관 안으로 들어섰다.거실 한가운데에는 고이한이 테이블을 짚은 채 서 있었으며 한 손으로 이마를 누르고 있었고 발치에는 산산이 부서진 유리 조각이 흩어져 있었다. 어지럼증에 컵을 떨어뜨린 듯 보였다.소예지가 급히 다가가자 그의 몸이 크게 흔들렸고 그녀는 거의 반사적으로 팔을 뻗어 그를 붙잡았다. 동시에 고이한의 긴 팔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으며 머리가 힘없이 그녀의 어깨 위로 기울었다.고이한의 온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웠다.“소파에 가서 누워.”소예지가 반쯤 부축하다시피 그를 소파까지 데려갔다. 고이한이 눕자, 이마에 잔땀이 맺혀 있었다. 어지러움을 버티는 듯 뜬 눈의 초점이 흔들렸다.소예지가 바닥의 유리 파편을 치우러 가려는 순간, 큰 손이 그녀의 손목을 잡아챘다.“가지 마.”쉰 목소리로 간청이 흘러나왔다.“놔.”소예지는 그의 품에서 손을 빼낸 뒤 곧바로 휴대폰을 꺼내 위층에 있는 양희순에게 전화를 걸었다.잠시 후 양희순이 급히 내려왔고 소파에 누워 있는 고이한을 보자 놀란 눈으로 물었다.“아이고, 사모님. 하슬이 아버님 왜 이러세요?”“열이 심해요. 바닥 좀 치워주시고 올라가셔서 죽 좀 끓여 주세요.”“네, 네.”양희순이 재빠르게 유리 파편을 쓸어 담고는 문을 당겨 닫으며 위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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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57화

결국 의사와 김경환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가는 수밖에 없었다.소예지는 통유리창 앞에 서서 마음을 가다듬으며 기다렸다. 창밖의 파란 하늘과 유유히 흘러가는 흰 구름이 눈에 들어왔다.고이한은 눈을 감고 있었지만 완전히 잠든 상태는 아니었고 고열로 인한 어지러움과 두통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와중에도 곁에 있는 소예지의 존재를 또렷하게 느끼고 있었다.그는 무겁게 내려앉는 눈꺼풀을 억지로 버티며 끝내 잠들지 않으려 애썼다.“콜록.”낮게 기침 소리가 났다.소예지가 돌아서자 어느새 그는 다시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그녀는 아무 말 없이 주방 쪽으로 가 미지근한 물을 한 컵 따라 건넸다.고이한의 얼굴은 창백했고 열 때문인지 눈꼬리는 붉게 물들어 있었으며 날카롭던 눈빛도 힘을 잃은 채 흐릿하게 가라앉아 있었다.그는 컵을 받아 들며 낮게 말했다.“고마워.”“의사 오고 있을 거야.”소예지의 대답은 담담했고 말을 마친 그녀는 다시 통유리 쪽으로 물러나 등을 돌린 채 섰다. 햇빛 아래에서 가늘게 드러난 윤곽이 조용히 흔들리고 있었다.고이한은 천천히 물을 마시며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봤고 공기 속에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고요한 긴장이 은은하게 감돌고 있었다.그때 초인종이 울렸고 소예지는 안도의 숨을 내쉰 뒤 빠르게 문 쪽으로 향했다.문을 열자 밖에는 이 박사와 김경환이 함께 서 있었다.“김 비서님, 잘 부탁드려요.”그러다 떠오른 게 있어 돌아보며 말했다.“위층 아주머니가 죽 끓이고 계세요. 갖다줄 거예요.”“네, 감사합니다.”김경환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고이한은 현관 쪽을 바라보다가 문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이내 눈을 감은 채 다시 소파에 몸을 눕혔다. 곧 이 선생의 진찰을 받으며 수액을 맞기 시작했다.수액이 천천히 혈관으로 스며들자 고열로 쌓인 피로에 약기운까지 겹쳐 결국 고이한은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어제 기어코 회의를 밀어붙이지 말았어야 했는데.’김경환은 그 모습을 보며 조심스럽게 담요를 덮어주었고 이 선생은 주의 사항을 하나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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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58화

연구실에서 나온 소예지는 몇 가지 데이터를 들고 스미스 박사를 찾으러 갔다. 막 사무실 앞에 도착했을 때, 안에서 통화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원본 서류 꼭 지참하세요. 이번에 심유빈 씨와 완전히 거래를 끝내려 하시니까, 차질 없게 해야죠.”소예지의 발걸음이 멈췄다. 사무실 쪽을 돌아보며 미간을 좁혔다.‘고이한이 심유빈과의 거래를 끝내려는 건가?’그때 스미스의 비서가 다가왔다.“소 박사님, 박사님 찾으세요?”통화 중이던 스미스도 통유리창으로 소예지를 발견하고는 전화 상대에게 한마디하고 통화를 마쳤다.“나 찾았어요?”스미스가 사무실에서 나오며 물었다.소예지가 고개를 끄덕였다.“논의하고 싶은 데이터가 몇 가지 있어서요. 시간 있으세요?”“들어와요.”스미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안으로 들어갔다.소예지가 사무실로 들어서며 먼저 물었다.“박사님, 아까 전화에서 고 대표가 심유빈과 기증 계약을 종료하려 한다고 했는데 맞아요?”스미스는 굳이 비밀로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해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 고 대표님이 아까 직접 전화해서 얘기했어요. 심유빈 씨와 거래를 서둘러 끝내고 싶어 하시더군요.”이유야 스미스도 짐작이 갔다.소예지가 의견을 꺼냈다.“박사님, 저는 아직 계약을 종료할 때가 아닌 것 같아요. 심유빈을 두 번째 공여자로 남겨두면 만일의 경우에 대비할 수 있잖아요. 가족들한테도 더 안전한 선택이에요.”“저도 그렇게 말했는데.”스미스가 턱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고 대표님이 워낙 뜻을 굽히지 않으시더라고요.”스미스가 소예지를 바라보며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고 대표님이 왜 이렇게 서두르시는지 알 것 같지 않아요?”소예지의 표정은 별다른 동요 없이 차분했다. 서류를 그의 앞에 내밀었다.“박사님, 이 두 데이터 봐주세요. 오늘 아침에 막 나온 건데 수치가 아직 좀 높은 것 같아요. 안정성을 좀 더 조정해야 할 것 같아서요.”스미스가 바로 데이터에 집중했다. 둘이 한참 논의를 마친 뒤, 소예지가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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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59화

소예지의 말은 처음부터 끝까지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시각에서 나온 것이었다. 개인적인 감정은 한 톨도 섞이지 않았다.고이한이 모를 리 없었다. 의학적 관점에서 보면 소예지의 말이 맞았다.“무슨 말인지 알아.”고이한이 쉰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곧 낮고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그래도 필요 없어.”못을 박는 듯한 말투였다.언제나 평온하던 소예지의 목소리에 짜증이 배어났다.“고이한, 지금 당신 혼자 공여자인 건 위험 부담이 너무 커. 그리고 채혈 몇 번 했다고 벌써 아픈 거잖아. 자기 몸 너무 과대평가하지 마.”고이한이 주무르고 있던 미간이 순간 펴졌다. 입꼬리에 아주 옅은 미소가 자신도 모르게 번졌다.심유빈을 남겨두자고 고집하던 이유가 어쩌면 자신의 몸을 걱정하면서도 그 마음을 숨기려는 데 있었던 건 아닐까 싶었다.“나 걱정하는 거야?”고이한의 목소리가 자신도 모르게 부드러워졌다. 목소리에 옅은 기색이 묻어났다.전화 너머 소예지의 목소리가 오히려 한층 차가워졌다.“공여자 몸 상태가 불안정하면 그 자체가 위험 요소야. 앞으로 하슬이한테도 당신이 필요할 수 있잖아.”고이한이 잠깐 말문이 막혔다가 이내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걱정 마. 내 몸은 내가 알아. 이번에 아픈 건 우연이고 앞으로 조심할게. 공여자 문제는...”고이한이 잠깐 멈추더니 다시 단호하게, 하지만 어딘가 설명하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당신이 전문적인 시각에서 우리 가족을 걱정해 주는 거 알아. 근데 어떤 선택은 이해득실만으로 따질 수 없어.”소예지가 전화 너머에서 차갑게 웃었다.“당신이 원래 이해득실 따지는 거 제일 좋아하지 않았어?”고이한은 휴대폰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간 채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소예지가 짓던 그 비웃는 표정이 눈앞에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만 같았다.“미안해. 그동안 잘못한 게 많았어. 당신을 많이 실망시켰지.”고이한의 목소리가 낮고 진심이 어렸다.“사과 들으려고 전화한 거 아니야. 과거 얘기하자고 한 것도 아니고.”“난 한 가지만 말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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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60화

고이한은 눈을 감은 채 말했다.“네가 처리해.”차갑고 감정 없는 목소리였다.김경환이 알아듣고 휴대폰을 들고 베란다 쪽으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심유빈 씨, 무슨 일이세요?”김경환이 정중하게 물었다.“김 비서, 이한 오빠는요? 전화를 계속 안 받으셔서요. 바쁘신 건가요?”심유빈의 목소리는 여느 때처럼 부드럽고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대표님 지금 회의 중이셔서 전화받기 어려우세요. 용건이 있으시면 저한테 말씀하셔도 됩니다.”“아, 별건 아니고요. 그냥 안부 좀 여쭤보려고요.”심유빈이 웃으며 말했다.“대표님 별일 없으세요.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그렇군요, 그럼 방해하지 않을게요.”심유빈이 전화를 끊었다.김경환이 휴대폰을 들고 다시 안으로 들어와 자리에 앉았다.예전엔 대표가 아무리 귀찮아도 겉으로는 기본적인 예의는 차렸었다. 최소한의 관계는 유지했다. 하지만 이제 심유빈이 받을 건 다 받은 상황이니 대표도 더 이상 그녀를 위해 연기할 필요가 없었다.서명이 필요한 서류는 전부 김경환이 먼저 검토했었고 대표가 심유빈에게 넘긴 성양 그룹 지분 계약서도 당연히 이미 확인한 상태였다. 그 지분은 3천억에 달하는 가치였으며 심유빈과의 마지막 거래이기도 했다.고이한의 비서가 된 뒤로 심유빈과 자주 부딪혔다. 해마다 그녀의 욕망이 점점 커져가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지켜봐 왔고 그 화려해 보이는 예술 경력 뒤에는 분명 노력도 있었지만 자금의 힘 역시 적지 않게 작용하고 있었다.5년 전 국제 피아노 콩쿠르 당시 대표가 직접 나서 심사 위원과 후원자, 관계자들까지 조율했고 결국 심유빈은 무게감 있는 상을 거머쥐며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라는 타이틀을 얻었다.그 이후 그녀는 SNS를 통해 한층 더 화려해진 삶을 거리낌 없이 과시하기 시작했다.보석도 마찬가지였다. 심유빈은 유독 다이아몬드를 좋아해 경매가 열릴 때마다 대표에게 동행을 요청했고 그가 처리한 것만 해도 수십억 대에 이르는 보석이 여러 점이었다. 대표 역시 물질적인 면에서는 그녀를 결코 박하게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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