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mua Bab 사랑한다고 말해줘: Bab 211 - Bab 220

365 Bab

제211화

민하윤은 마치 무언가에 정통으로 맞은 듯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어... 모르고 있었어요?”진호영은 말실수를 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송지훈을 억지로 끌고 밖으로 향했다.“아, 갑자기 급한 일이 생각났네요. 우린 이만 가볼게요.”“아니, 잠깐만...”상황 파악이 안 된 송지훈은 덜미를 잡힌 채 질질 끌려나갔다. “도진이 물 좀 챙겨줘요.”“네가 말 안 해도 다 해.”진호영은 목소리를 낮춰 쏘아붙이며 그의 이마를 툭 쳤다.거대한 별장에는 다시 정적이 찾아왔고 하도진은 미간을 찌푸린 채 붉게 상기된 얼굴로 곤히 잠들어 있었다.뺨 근처가 서늘하고 간지러운 느낌에 손등으로 훑어내자 젖어 있는 물기가 만져졌다. 눈물이었다.‘당신, 정말 나 때문에 수어까지 배운 거예요?’민하윤의 머릿속에 기억들이 하나둘 선명해졌다. 어쩐지, 소리 없는 외침 끝에 매번 하도진이 그녀의 감정을 누구보다 빠르게 알아차린다 싶었다.그는 전부 알고 있었던 것이다.민하윤은 그에게 이불을 여며주고 머리맡에 물 한 잔을 놓아둔 뒤, 무거운 발걸음으로 방을 나섰다.하도진같이 자존심 강한 사람이 오직 자신을 위해 수어를 배웠다니.민하윤은 자신이 지금까지 하도진을 제대로 본 적도, 그에 대해 진정으로 아는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다음 날 아침, 하도진은 찢어질 듯한 두통과 갈증에 시달리며 겨우 몸을 일으켰다. 머리맡의 물컵을 단숨에 비워내자 입술 끝으로 흘러내린 물방울이 이불을 적셨다. 관자놀이를 누르며 어젯밤 일을 떠올리려 애썼지만, 마지막 기억은 룸 안에서 구준오와 송지훈이 자신을 찾아왔던 장면에서 멈춰 있었다.가볍게 세수를 하고 샤워를 마친 하도진은 거울을 보며 거뭇한 수염을 깔끔하게 밀어냈다. 시원한 민트향이 코끝을 스치자 정신이 또렷해졌다.거실로 내려왔지만 집 안엔 적막만 감돌 뿐, 민하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차갑게 굳은 표정으로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익숙한 번호를 눌렀지만 수화기 너머론 건조한 연결음만 들려올 뿐이었다. 결국 직접 찾아 나서려 현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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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2화

단순한 인사 정도는 동작이 그리 복잡하지 않아 하도진은 기초적인 인사말은 금방 마스터했다.[언제부터 수어를 할 줄 알았던 거예요?]민하윤이 수저를 내려놓고 마침내 마음속 깊이 품었던 의문을 꺼냈다.하도진이 미간을 찌푸렸다.“무슨 소리야?”[지금 내 수어 다 이해하고 있잖아요, 그렇죠?]민하윤은 돌려 말하지 않고 아예 대놓고 물어보았다.하도진은 허공을 유려하게 가로지르는 그녀의 손가락을 보며 눈을 낮게 깔았다.“조금 배웠었는데, 금방 끈기가 떨어져서 그만뒀어.”민하윤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수어를 단순히 맛만 본 정도로는 일상적인 대화를 막힘없이 나누는 것이 절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게다가 하도진은 그녀의 모든 수어 동작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었다.수어를 배우는 것 자체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지 몰라도 장기간의 꾸준한 노력이 필요한 법이다.임형섭 선배만 하더라도 1년 반 동안이나 남모르게 수어를 익히고 농아 학교에서 정기적으로 봉사 활동까지 하고 나서야 비로소 소통에 무리가 없는 수준에 도달했었다.하도진은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민하윤은 굳이 그의 거짓말을 들추지 않은 채 다시 요리에 집중했다. 백자 그릇에 담긴 걸쭉하고 노란 달걀 물 위로 하얀 거품이 일자, 그녀는 숟가락으로 조심스럽게 거품을 걷어낸 뒤 찜통에 넣었다.하도진은 그녀의 분주한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문득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슬며시 다가가더니 조리대에 몸을 기대며 짐짓 가벼운 말투로 말을 걸었다.“그때 수어 수업을 몇 번 안 들어서 아직 못 배운 게 많아. 네가 좀 가르쳐주는 건 어때?”민하윤이 의아한 듯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쳐다보자 그의 표정이 진지해졌다.“왜, 수강료라도 내야 하나? 사실 회사에서 이번에 예능 프로그램을 하나 기획 중인데, 기획팀에서 추천한 출연자 중에 청각장애인 남성 게스트가 있거든. SNS에서도 꽤 유명하고 고학력에 생물학 박사라던데, 인물도 제법 괜찮고...”[청각장애인이 TV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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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3화

하도진은 짐짓 태연한 척 계속해서 그릇에 담긴 방울토마토를 집어 먹으며 말을 이었다.“세상 모든 사람은 각자의 사랑을 얻을 자격이 있어. 원래 사랑이란 차별이 없는 법이니까. 설령 연애 예능에 대본이 있다 해도, 그 사람의 등장은 사람들에게 증명해 줄 거야.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사람도 평범한 사람들처럼 살아갈 수 있고 사랑을 쟁취할 수 있다는 걸.”민하윤은 하던 일을 멈추었다. 하도진의 이 말이 단순히 출연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을 향한 위로임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사랑한다는 마음을 전하고 싶을 땐 수어로 어떻게 표현해?”하도진은 갑자기 질문을 던지더니, 스스로를 정당화하려는 듯 어설픈 변명을 덧붙였다.“수어 선생님은 이런 건 안 가르쳐주더라고. 투자자로서 프로그램을 꼼꼼히 챙겨야 하니까 말이야. 이 동작을 선공개 영상에 쓰면 화제성도 생기고 여론의 관심도 끌 수 있을 것 같아. 미리 배워두고 싶으니 좀 가르쳐줘.”민하윤은 손을 깨끗이 씻고 돌아서서 그를 마주 보았다.[사랑은...]민하윤의 하얗고 고운 두 손이 허공에서 유연하게 움직였다. 그녀는 엄지를 세우고 다른 쪽 손의 다섯 손가락을 펴서 그 위를 쓸어내렸다.[이게 사랑이에요.]하도진은 그녀의 손길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마디가 선명한 그녀의 손은 참으로 아름다웠지만, 그것을 따라 하는 그의 손짓은 재활 훈련이라도 하는 것처럼 뻣뻣하기 짝이 없었다.민하윤은 결국 웃음보가 터졌고 예쁜 미소를 지으며 달콤하게 웃었다.그녀는 다시 한번 엄지를 세우고 다른 손으로 그 위를 부드럽게 훑었다.하도진은 쑥스러운 듯 숨을 크게 들이켜고는 그녀의 손길을 따라 서툴게 수어를 그려보았다.하도진은 수어 선생님을 모시고 최신판 수어 교본을 탐독했지만, 그 목적은 오직 민하윤의 입 밖으로 내지 않는 말들을 이해하고 싶어서일 뿐, 직접 손을 움직여 수어를 배우지는 않았다.그저 단어와 동작을 머릿속에 넣어 그 이면의 뜻을 겨우 짐작할 뿐이었다.[정은...]민하윤이 두 손을 펴고 다섯 손가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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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4화

그렇게 보낸 지난 10년 동안 그녀에게는 수어, 타이핑, 필담이라는 세 가지 소통 방식이 생겼다.‘사랑해’, 즉 아이 러브 유(I love you)는 두 인칭과 하나의 감정을 결합한, 세상에서 가장 간결한 수어 동작이었다.하지만 목소리를 잃고 침묵 속에 갇힌 지난 10년의 세월 동안, 이 세 글자는 그녀의 삶에 어떤 형태로도 나타난 적이 없었다.손글씨로 적어본 적도, 자판으로 쳐본 적도, 하물며 자신만의 언어인 수어로 누군가에게 건네본 적도 없었다.하도진은 기대를 가득 담은, 그러면서도 그녀가 차마 다 읽어낼 수 없는 묘한 감정이 섞인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했다.민하윤의 심박수가 가파르게 치솟았고 반대로 호흡은 잦아들었다. 고요만 남은 세계 속에서 그녀는 오직 예민해진 감각만으로 제 가슴을 울리는 강렬한 고동 소리를 듣고 있었다.[사... 사랑해요]민하윤은 오른손 검지로 자신의 심장 부근을 가볍게 찌르고 엄지를 세운 뒤, 다른 쪽 손가락으로 그 위를 부드럽게 쓸어내리고는 마지막으로 검지를 뻗어 하도진을 가리켰다.그녀는 동작을 되풀이했다. 이번에는 일부러 속도를 늦춘 완만한 움직임이었다. 하도진은 그녀의 눈가에 맺힌 옅은 물안개까지도 남김없이 눈 속에 담아냈다.하도진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더니 천천히 손을 들어 그녀가 했던 대로 오른손 검지로 자신의 심장을 톡 건드리고 엄지를 펴서 다른 손으로 훑어 내린 뒤 마지막에 검지로 민하윤을 가리켰다.[밥 먹어요... 음식이 다 식겠어요.]민하윤은 황급히 그를 밀쳐내고 뒤돌아 전자레인지에서 우유를 꺼내며 허둥거렸다.그녀는 차마 하도진을 마주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억누를 수 없이 쏟아지는 눈물을 들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민하윤, 정신 차려. 이 사람은 그저 신기해서, 아니면 공부 삼아 한번 따라 해본 것뿐이야. 설마 수어를 핑계로 고백이라도 받았다고 착각하는 거야? 더는 허황된 꿈을 좇으며 네 것이 될 수 없는 행복을 갈구하지 마.’하도진은 식탁 앞에 묵묵히 앉아 분주히 움직이는 그녀의 뒷모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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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5화

요양원 입구에 차가 멈춰 서자 하도진은 먼저 내려 트렁크로 향하더니 미리 준비해둔 영양제와 과일 상자들을 한가득 꺼냈다.생각지도 못한 선물 꾸러미에 민하윤은 당황한 기색으로 그를 바라봤다.하도진은 한 손에 선물 꾸러미를 든 채 한숨을 내쉬며 몸을 숙여 그녀의 안전벨트를 풀어주었다. 그러고는 턱을 가볍게 치켜세우며 말했다.“안 갈 거야?”하도진의 뒤를 조용히 쫓던 민하윤은 엘리베이터 앞에서 머뭇거리며 그의 소매를 붙잡았다. 하도진이 의아해하며 돌아보자, 옷을 움켜쥔 그녀의 가느다란 손등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민하윤은 그의 눈을 피하며 손을 내리고 수어로 말을 건넸다.[나 혼자 가도 돼요. 억지로 같이 안 가도 괜찮아요.]하도진은 그녀를 빤히 보더니 비어 있는 손으로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내가 억지로 내키지 않는 짓을 할 사람으로 보여?”‘그건 그렇지...’민하윤은 속으로 조용히 대꾸했다.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문이 열리자 하도진은 그녀를 이끌고 성큼성큼 앞서 나가더니 마치 와본 적이 있는 듯 익숙하게 한 병실 앞에 멈춰 서서 문을 두드렸다.이윽고 서정아가 문을 열었고 두 사람을 확인한 그녀의 얼굴에서 미소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서정아의 시선이 두 사람 사이를 다급히 오갔다.널찍하고 환한 1인실 병실 안, 한 중년 남성이 침대에 앉아 미리 깎아놓은 과일을 먹으며 TV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민하윤은 서둘러 다가가 행여 다친 곳은 없는지 그의 몸 상태를 꼼꼼히 살폈고 상처 하나 없음을 확인하고서야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이틀 전 송 여사가 왔었지만 간호사 선에서 정리됐어요. 보안팀이 퇴거 조치했고요.”서정아는 하도진이 들고 있던 선물을 자연스럽게 건네받으며 따뜻한 차를 대접했다.민하윤은 시선을 내리깔며 더 이상 그 화제를 이어가고 싶지 않다는 기색을 내비쳤다. 그녀에게 민성현과 송해정은 가장 익숙하면서도 낯선 타인일 뿐이었다. 아니, 타인보다 못한 존재였다.적어도 타인은 아무 이유 없이 그녀에게 악의를 품지는 않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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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6화

“자, 만화 봅시다! 여기 페파피그 나오네!”서정아는 할 수 없이 되돌아와 TV 소리를 한껏 키웠고 그제야 남자의 정신은 다시 TV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서정아는 민하윤에게 눈짓을 보낸 뒤 시험관을 챙겨 몰래 병실을 빠져나갔다.하도진은 소파에 나른하게 기대앉아 있었지만, 시선만은 민하윤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녀는 침대 곁을 한시도 떠나지 않고 지키고 서 있었으나 정작 그 남자는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마치 낯선 타인인 양 차갑게만 대하고 있었다.“먹어, 먹어... 너도 먹을래? 헤헤헤헤...”남자는 손으로 잘라놓은 용과를 집어 들고 연신 민하윤의 입가에 내밀었다.민하윤은 눈물을 머금은 채 고개를 저었지만, 가슴은 마치 칼로 난도질당하는 듯 아려왔다. 기억 속 언제나 낙천적이고 강인했던 양아버지는 이미 그날의 교통사고로 ‘죽어’ 버렸고 이제 그녀를 위해 비바람을 막아주며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줄 사람은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사고로 인한 하반신 마비와 두개골 충격에 따른 뇌출혈, 그리고 신경계 손상으로 그의 지능은 대여섯 살 아이 수준으로 퇴행해 버렸고 때로는 의식이 불분명해져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먹어, 먹어!”남자가 갑자기 아이처럼 떼를 쓰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의 손가락은 온통 붉은 용과 즙으로 물들어 있었고 그 얼룩은 침대 시트와 간이 테이블, 민하윤의 소매까지 여지없이 번졌다.민하윤은 어떻게든 그를 다독여보려 했지만, 남자는 그녀가 다가오자마자 기겁하며 고함을 질렀고 급기야 그녀에게 손찌검까지 했다.하도진은 본능적으로 그녀를 뒤로 확 잡아끌었다.하도진이 침대 앞에 위압적으로 서서 살기 어린 눈빛을 보내자, 남자는 그 서늘한 기운에 압도되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겁주지 마세요...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민하윤은 하도진의 손바닥을 꼭 쥐며 간절한 눈빛으로 애원했다.“때... 때리지 마...”남자는 갑자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고 벌벌 떨며 용서를 빌었다.[제발요, 일부러 그런 거 아니에요.]“당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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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7화

“하윤 씨, 이건 아무것도 아니에요.”서정아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따뜻한 물을 받고 성인용 기저귀와 패드를 챙겼다.민하윤은 마치 큰 잘못을 저지른 아이처럼 제자리에 서서 옷자락만 하염없이 부여잡고 있었다.하도진은 그녀를 달래고 싶었으나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 그는 저 막무가내인 남자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었을뿐더러, 악취가 진동하는 이 병실에 단 1초라도 더 머무는 것 자체가 고역이었기 때문이다.“다들 먼저 돌아가 보세요. 저 혼자서도 괜찮아요. 슬슬 낮잠을 자야 할 시간이고요.”서정아는 민하윤의 눈물을 닦아주며 어머니 같은 다정한 목소리로 그녀를 보듬었다.“하윤 씨 아빠는 그저 아픈 것뿐이에요. 감정을 조절할 수 없고 기억을 잃어버린 건 그분의 본심이 아니잖아요. 하지만 하윤 씨, 어쩌면 기억을 잃은 게 아버님에겐 다행일지도 몰라요. 그 모든 기억을 홀로 안고 이 세상에 남겨지는 건 너무나 큰 고통이자 고문일 테니까요.”결국 민하윤은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며 서정아의 품에 안겨 오열했다. 가느다란 어깨가 나비의 날개처럼 파르르 떨렸다. “울지 마... 울지 마...”남자는 고통스러워하는 민하윤을 보며 혀 꼬인 소리로 중얼거렸다.그녀는 결국 하도진의 손에 이끌려 병실을 나섰다. 죄지은 아이처럼 고개를 숙인 그녀의 발걸음마다 끊어진 구슬 같은 눈물이 툭툭 떨어졌다.하도진은 운전대를 잡은 채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 뒷좌석으로 휙 던졌다. 창문을 반쯤 내리자 살을 에는 찬 바람이 들이닥쳤지만 그는 그 매서운 바람으로 몸에 은근히 남아있는 악취를 모조리 날려버리려 애썼다.민하윤은 꼭 실이 끊어진 꼭두각시처럼 차창에 머리를 기댄 채 초점 없는 눈으로 앞만 응시할 뿐이었다.“그 사람은... 그냥 잠시 당신을 잊은 것뿐이야. 어쩌면 기억을 간직하는 게 그분에겐 더 큰 고통일지도 몰라. 사고 현장에서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가는 걸 목격한 기억이 남았다면, 평생 지독한 고문에 시달렸을 테니까.”하도진은 한 손으로 핸들을 돌리며 차창을 천천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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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8화

서정아도, 하도진도. 모두가 그녀를 단지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해 힘들어하거나 양아버지의 건강을 염려하는 효녀로만 보고 있었다.참으로 아이러니했다. 고작 그 하찮은 자존심 때문에 괴로워하는 추악한 본심을 눈물로 포장해 유별난 효심으로 둔갑시키다니.“그분과 깊은 유대감이 있다는 거 알아. 오랫동안 가족으로 지내며 사랑도 많이 받았을 테니까. 하지만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이제는 받아들여야 해.”하도진은 그녀의 코트 깃을 여며주며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이제 그런 일은 잊어버리고 기운 좀 내.”지금도 하도진은 지독한 불쾌감을 꾹 참으며 오히려 그녀를 위로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누가 알까. 그녀가 느끼는 이 슬픔과 분노가 실은 자신의 지독한 이기심에서 비롯된 비애라는 것을.[난 괜찮아요.]민하윤은 하도진의 커다란 소매 속에 파묻힌 손을 어렵사리 움직여 수어를 했다. 눈가에는 눈물이 맺혔고 수척해진 얼굴은 애처로웠다.[만약 내가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좋은 사람이 아니라면요? 아까 그 일 때문에 그저 수치심을 느꼈을 뿐이라고 하면요? 난 정말 형편없는 사람이에요.]하도진은 말없이 그녀를 응시하다가 무언가를 깨달은 듯했다.그는 그녀의 손을 꼭 쥐었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감촉에 자신도 모르게 소름이 돋았다.“민하윤, 사실 사람은 누구나 완벽하지 않아. 누구나 자기만의 속셈이 있고 앞날을 위해 계산하고 스스로를 포장하기도 해. 그건 아주 정상적인 거야. 이 거친 세상에 백지처럼 순수한 사람이 어디 있겠어?”민하윤은 고개를 숙인 채 그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빼내려 했다.역시 하도진도 자기가 영악하다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하지만 말이야...”하도진은 힘을 주어 그녀의 손을 자기 손바닥 안에 가두었다.“네 본질이 선하다면 그걸로 충분해. 방금 그 일이 수치스럽게 느껴진 건 네가 그분을 소중하게 생각하기 때문이야. 길 가던 모르는 사람에게 그런 일이 생겼다고 해서 네가 수치심을 느꼈겠어?”하도진은 조곤조곤 그녀를 타일렀다. 그는 몸을 낮춰 그녀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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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9화

밤이 시작되자마자 하씨 가문의 본가는 화려한 조명으로 대낮처럼 밝아졌다. 정원에는 온실처럼 꾸며진 난각이 있었는데, 어르신이 공들여 키운 꽃들이 밖에서도 보일 만큼 형형색색의 생기를 뽐내고 있었다.하도진과 민하윤은 나란히 발을 맞추어 걸었고 코끝에는 차가운 공기를 타고 매화의 그윽한 향기가 아스라이 감돌았다.민하윤의 마음을 짓누르던 그림자도 순식간에 흩어졌다. 그녀는 가로등 불빛 아래 비친 두 사람의 그림자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키 차이가 나는 두 그림자가 같은 보폭으로 나아가고 있었다.그녀는 슬쩍 몸을 왼쪽으로 기울여 그림자 속 두 형상이 다정하게 밀착되도록 만들었다. 그걸 본 민하윤의 눈매가 휘어지며 입가에 옅고 싱그러운 미소가 피어올랐다.“무슨 기분 좋은 일 있어?”하도진이 고개를 숙여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1월의 매서운 추위 속에 겨울바람이 정원수를 흔들며 지나갔고 말을 내뱉는 하도진의 입가에선 하얀 김이 피어났다.민하윤은 제 속을 들킬까 봐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그때 등 뒤에서 눈 부신 헤드라이트 불빛이 비쳤다. 하도진이 미간을 찌푸리며 뒤를 돌아보자 검은색 아우디 한 대가 비상등을 켜며 서서히 멈춰 섰다.비서가 내려 뒷문을 열자, 검은 재킷에 화이트 스탠드 칼라 셔츠를 입은 중년 남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엄격한 기운이 느껴지는 그는 희끗한 머리칼 사이로 두 사람을 예리하게 쳐다봤다.“아버지.”하도진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웃음기가 사라지며 표정이 굳었고 민하윤 역시 허리를 숙여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왜 안 들어가고 밖에서 시시덕거리고 있어? 체통 없게 문 앞에서 무슨 망신스러운 짓이야?”하준혁은 한결같이 엄격한 사람이었다. 젊은 시절 군인으로 지냈던 습관이 몸에 배어 매사 빈틈이 없었다.하도진은 내심 언짢았으나 감히 내색하지 못한 채, 시든 배추처럼 기가 죽어 비서의 서류 가방을 받아 들며 고개를 저었다.“아무것도 아닙니다...”세 사람이 함께 안으로 들어섰고 민하윤은 조심스럽게 몸을 굽혀 신발을 갈아신었다.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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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0화

“맛이 없을 수가 있겠어요? 옛날 같으면 진상품으로나 올라갔을 귀한 것들일 텐데 할아버지께 변변치 않은 걸 선물할 사람이 어디 있겠냐고요.”하도진이 투덜거리며 민하윤의 손에서 가장 화려하게 포장된 과자 하나를 잽싸게 가로챘다. 그러고는 포장을 뜯어 입안에 쏙 집어넣었다.입안에 넣자마자 사르르 녹아내리는 코코넛 과자는 고소한 향이 일품이었고 씹을수록 진하고 달콤한 풍미가 입안 가득 퍼졌다.그 말에 하준혁은 찻잔을 든 손을 움찔했고 하마터면 뜨거운 찻물을 쏟을 뻔했다. 결국 참지 못하고 눈을 부라리며 꾸짖었다. “헛소리 좀 작작 해. 나잇값 좀 못 하겠어?”그때 하진석이 바둑판을 챙겨 들고 웃으며 계단을 내려왔다. 희끗한 머리에 마른 체구였지만 자세만큼은 군인처럼 꼿꼿했다. 검은색 차이나 칼라 정장을 입은 그는 부드러우면서도 범접할 수 없는 기운을 풍기며 하도진을 불렀다.“도진아, 와서 할애비 좀 부축해라.”하도진은 잽싸게 달려가 노인의 바둑판을 건네받으며 능청을 떨었다.“할아버지, 저 방금 왔는데 벌써 한 판 붙으시게요?”하진석은 허허 웃더니 하도진의 등짝을 손바닥으로 찰싹 내리쳤다. 묵직한 소리 너머로 위엄이 서렸다.“가당치도 않은 소리!”영문을 모른 채 한 대 맞은 하도진은 억울하다는 듯 말끝을 늘어뜨렸다.“할아버지, 가만히 있는 사람을 왜 때리세요? 제가 뭘 어쨌다고요?”“이 맹추 같은 놈아, 내가 늙었다고 귀까지 먹은 줄 알아? 진상품은 무슨 얼어 죽을 진상품! 요즘 세상에 상에나 올릴 귀한 물건이 어디 있다고? 내가 그까짓 것들에 욕심낼 사람으로 보여? 안 받겠다는데도 두고 도망간 녀석들 때문에 골치가 아파 죽겠는데, 너까지 그런 망언을 해서 내 평판을 깎아 먹냐?”하진석의 호통은 여든이 넘은 나이가 무색하게 우렁찼다. 하도진은 입을 삐죽이며 시선을 내렸다가 소파에 앉은 민하윤이 입을 가리고 웃는 모습을 포착했다. 대놓고 비웃는 기색이 역력했다.그는 하진석에게 다가가 어깨동무를 하며 은밀하게 목소리를 낮췄다.“할아버지,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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