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잃은 날, 남편은 다른 여자 촛불 앞에의 모든 챕터: 챕터 291 - 챕터 300

390 챕터

제291화

“미안해.”주영도의 손아귀에 힘이 더 들어갔다.강루인의 코끝으로 옅은 냄새가 스며든 순간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구아정에게서 맡았던 냄새였다.‘참 고생이 많네. 두 곳을 오가느라.’그녀는 그의 품에 안긴 채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주영도는 그녀가 깼다는 걸 알아차리고는 몸을 돌려 그를 향하게 했다.“눈 떠.”강루인이 계속 움직이지 않는 걸 본 주영도는 허리를 살짝 꼬집었다.“깬 거 다 알아.”자는 척조차 할 수 없게 되자 결국 마지못해 눈을 떴다.주영도가 계속 말을 이었다.“아정이가 손목을 그어서 피를 많이 흘렸어. 내가 가서 처리하지 않으면 아정이 죽을 수도 있었어. 어쨌거나 사람 목숨이잖아. 이해해주면 안 될까?”강루인이 고개를 끄덕였다.“이해해.”그녀의 순응적인 태도에 주영도는 오히려 말문이 막혀버렸다.“정말?”강루인이 차분하게 말했다.“이해 못 한다고 하면 내가 속이 좁고 매정한 사람이라고 하고 이해한다고 하니까 또 거짓말이라네? 대체 뭐라 대답해야 만족할 건데?”“너의 진짜 속마음을 듣고 싶어.”“진짜 속마음은 영도 씨를 이해한다는 거야. 구아정 씨가 죽으면 둘이 죽는 거나 마찬가지잖아. 그래서 아정 씨를 구하러 간 걸 이해해.”분명 주영도가 원했던 대답인데 이상하게 기분이 언짢았다.주영도가 말했다.“이번에 못 해준 건 다음에 꼭 보상할게.”강루인이 단칼에 거절했다.“괜찮아.”더는 미련도, 아쉬움도 없었다.주영도가 물었다.“화났어?”“아니. 대회에 나갈 준비를 해야 해서 바빠.”“그럼 대회 끝나고 다시 가자.”“그때 가서 봐.”강루인의 시선이 허리를 감싼 주영도의 팔로 향했다.“일어나고 싶은데 좀 놔줄래?”들어오기 전 주영도는 강루인이 소리를 지르거나 크게 화를 낼 거라 생각했다. 지금처럼 차분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사실 그가 바라던 결과였지만 막상 이렇게 되니 뭔가 빠진 것처럼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주영도가 그녀의 허리를 놓아주며 말했다.“나 좀 잘게.”강루인이 침대에서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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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2화

밖에서 며칠 동안 돌아다녔기에 주영도는 회사에 나가봐야 했다.집을 나서기 전 강루인에게 넥타이를 매달라고 했다. 다 맨 다음에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볼을 톡톡 두드렸다.그게 무슨 뜻인지 단번에 알아챈 강루인은 고개를 들어 그의 볼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주영도가 말했다.“앞으로 나갈 때마다 이렇게 해.”“알았어.”그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이만 출근할게.”강루인은 남편을 끔찍이도 걱정하는 현모양처처럼 현관까지 배웅했다.“잘 다녀와.”노윤환이 주영도를 데리러 왔다. 그는 겉으로는 화목하고 서로를 사랑하는 척하는 두 사람을 보면서 강루인이 그보다 훨씬 너그러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이런 부부 관계가 아주 잘 유지되고 있었다. 주영도가 이 상황을 즐기고 만족해야 마땅했지만 웬일인지 자꾸만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저녁에 퇴근 후 주영도는 집으로 가지 않고 양동운 일행과 클럽에서 만났다.양동운이 담배를 피우며 물었다.“표정이 어두운데? 사업에 문제 생겼어?”주영도가 술을 한 모금 마셨다.“아니.”“그런데 얼굴이 왜 그래?”사업 말고 다른 일로 이렇게 고민하는 모습을 처음 봤다.주영도가 며칠간 느꼈던 복잡한 감정들을 털어놓았다.강루인 때문인 줄 몰랐던 양동운이 꽤 놀란 듯했다.“눈치 있게 굴면 더 좋지 않아? 뭐가 고민인 건데?”“눈치가 너무 있어서 문제야.”주영도는 그녀의 순응이 되레 가짜처럼 느껴졌다.양동운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그건 강루인이 자기 분수를 깨닫고 그것에 맞는 태도를 취하고 있는 거야.”‘처음부터 그랬어야지.’주영도의 미간이 살짝 일그러졌다. 옆에서 줄곧 말이 없던 최지호가 한마디 했다.“혹은 강루인이 더 이상 널 좋아하지 않아서일 수도 있어.”그 말이 끝나지 무섭게 방 안이 잠깐 정적에 휩싸였다.양동운이 우스갯소리라도 들은 듯 헛웃음을 지었다.“걔가 누굴 좋아하는 마음이 뭐 그렇게 귀한 거야?”주영도가 입을 열었다.“날 좋아할 필요 없어. 그저 내 말만 잘 들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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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3화

두 사람의 거리가 숨결이 닿을 듯 가까웠다. 술 냄새가 섞인 주영도의 숨결이 강루인의 얼굴에 쏟아지자 그녀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막 벗어나려던 찰나 주영도는 그녀의 얼굴을 다시 붙잡고 집요하게 캐물었다.“대답해.”강루인은 집착 가득한 그의 눈빛을 보며 어이가 없었지만 그래도 차분하게 말했다.“영도 씨가 원하지 않는 걸 내가 왜 줘야 하는데?”그 말에 주영도는 순간 말문이 막혀버렸다. 아무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그녀의 냉정한 모습을 보고는 미간을 찌푸렸다.“누가 원하지 않는다고 했어? 네 마음 받아줄 의향은 있어.”강루인은 그의 뻔뻔하기 그지없는 태도에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주영도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왜 웃어?”그녀는 그가 전에 그녀에게 했던 평가를 그대로 돌려주었다.“영도 씨가 너무 순진해서.”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주영도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다.“이미 지나간 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말 들어봤어?”강루인이 귀띔했다.“영도 씨가 그랬잖아. 내가 영도 씨를 좋아하는 마음 따위 필요 없고 말만 잘 들으면 된다고. 그래서 지금 요구대로 시키는 일 다 하고 있는데 뭐가 또 문제야? 내가 뭘 잘못했는데?”주영도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의 말이 맞긴 했지만 지금 이런 상황이 싫었다. 어쩔 수 없이 변명거리를 찾았다.“나는 내 아이가 사랑 없는 가정에서 태어나는 걸 원치 않아.”강루인은 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이거 실망하게 해서 어쩌나? 우리 사이에 사랑이 없는 건 사실이잖아. 정말 사랑이 넘치는 가정을 원한다면 영도 씨가 사랑하는 여자랑 아이를 낳아.”주영도가 어둡고 불쾌한 목소리로 말했다.“강루인!”그녀는 그의 분노를 가만히 받아들일 뿐 주눅 들지도, 대들지도 않았다.주영도의 질책은 그녀에게 아무런 타격도 주지 못하는 것 같았다.“이런 아내가 어디 있어? 자기 남편을 다른 여자한테 밀어내다니.”“내가 밀지 않아도 영도 씨의 마음은 이미 다른 곳에 가 있어.”“결혼한 후에 난 널 배신한 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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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4화

그 과정에 주영도가 쾌감을 느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강루인은 전혀 즐기지 못했고 그냥 아프기만 했다.일을 마치고 나면 기분이 나아지면서 양심의 가책도 조금이나마 싹트는 듯했다. 처음으로 그녀를 안고 욕실로 들어가 씻겼다.강루인의 피부가 연약해서 조금만 꼬집어도 금세 자국이 생겼다.주영도는 훨씬 부드러워진 손길로 그녀를 씻겨주면서 차분하게 말했다.“우린 부부지, 경쟁자가 아니야. 서로 맞춰가면서 살자.”그녀는 했던 약속이 떠오른 듯 반박하지 않고 고분고분 대답했다.“알았어.”그 대답에 주영도는 어떻게 이 대화를 이어가야 할지도 몰랐다.씻은 후 두 사람은 침대에 누웠다. 주영도는 얘기를 더 하고 싶었으나 강루인은 이미 눈을 감아버렸다. 시간도 늦었던 터라 더 이상 그녀를 방해하지 않았다.어차피 그들에게 남은 시간이 많기에 앞으로 얼마든지 관계를 조율할 시간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관계를 예전처럼 되돌릴 자신도 있었다.다음 날.그녀는 또다시 피임약을 삼켰다. 그러다가 쓴맛이 입안에 퍼질 때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주영도가 아이를 원했기에 콘돔을 쓸 리가 없었고 계속 약을 먹는 것도 몸에 좋지 않았다.이대로 계속 몸을 망가뜨릴 수 없어 강루인은 영구적인 해결책, 즉 피임 기구 삽입을 생각했다.그녀는 곧바로 계획을 세우고 오늘에 병원에 가기로 했다.강루인이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던 그때 주영도가 앞으로 다가왔다.“비타민을 그렇게 고통스럽게 먹을 거면 그냥 먹지 마.”그의 목소리에 강루인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주영도가 넥타이를 그녀의 손에 쥐여줬다.“꼭 약으로만 비타민 D를 보충해야 하는 것도 아니잖아.”그녀는 순순히 넥타이를 매주었다. 피임 기구를 삽입하면 피임약을 더는 먹지 않아도 되었다.“알았어. 안 먹을게.”주영도를 배웅하고 난 후 강루인은 곧바로 병원으로 향했다.주선 그룹.주영도가 비서실을 지나가던 그때 노윤환이 약을 먹는 모습을 보았다. 원래는 그냥 지나치려 했는데 익숙한 약병을 보고는 무의식적으로 발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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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5화

병원.강루인은 접수하고 몇 가지 검사를 마친 후 수술하기를 기다렸다.복도에 부모의 손을 잡은 아이, 품에 안긴 아이들이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 하나같이 행복감이 가득했다.과거 강루인도 저런 순간을 꿈꿨었다. 아마 저게 바로 주영도가 원했던 그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에겐 행복한 순간이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다.어느새 그녀의 차례가 되었다. 수술 시간이 길지 않았고 수술대에서 내려왔을 때 아랫배가 조금 아팠다.의사의 지시에 따라 한 시간 동안 경과를 지켜보고 별다른 이상이 없음을 확인한 후에야 퇴원했다.병원을 나서자마자 마침 나오던 차성열과 마주쳤다.“괜찮아?”“괜찮아요?”강루인과 차성열이 거의 동시에 입을 열었다.한 명은 얼굴이 창백했고 다른 한 명은 깁스한 채 목발을 짚고 있었다.차성열이 물었다.“어디 아파?”그녀는 대충 둘러댔다.“감기 기운이 좀 있어서요. 선배는요? 어쩌다가 깁스까지 했어요?”차성열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별거 아니야. 현장 점검하다가 실수로 넘어졌어.”강루인이 주변을 쓱 둘러보며 물었다.“혼자 왔어요? 어떻게 돌아가려고요?”“택시 타면 돼.”“내가 데려다줄게요.”그들은 원수처럼 다시는 안 볼 사이도 아니었고 차성열에게 그렇게까지 차갑고 무정하게 굴 필요도 없었다.말을 마친 강루인은 길가에 서서 택시를 잡은 다음 차성열을 부축해 택시에 태웠다. 강루인이 조수석에 타려던 찰나 뒤에서 누군가 그녀를 확 잡아당겼다.깜짝 놀라 돌아보니 칠흑처럼 어두운 표정의 주영도였다. 그는 그녀를 붙잡고 다른 방향으로 끌고 갔다.강루인은 그를 뿌리치려 애썼다.“뭐 하는 거야? 이거 놔.”그의 힘이 너무 세서 그녀는 팔이 부러질 것 같았다. 발걸음도 빨라 따라가기 버거웠고 발이 꼬인 바람에 비틀거리기까지 했다. 그녀의 느린 걸음에 짜증이 났는지 주영도는 그녀를 거칠게 차 쪽으로 끌어가 차 문을 열고 안으로 밀어 넣었다.강루인의 안색이 병원에서 나왔을 때보다 더 창백했다. 부딪친 이마를 잡고 차에 시동을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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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6화

소리를 듣고 달려 나온 진경자가 말리려던 그때 주영도의 살벌한 눈빛에 겁을 먹고 결국 물러섰다.주영도는 비틀거리며 걷는 강루인을 침실까지 끌고 간 다음 침대 위에 내동댕이쳤다.침대에 엎드린 채 거친 숨을 몰아쉬는 강루인을 본 주영도가 어두운 목소리로 물었다.“그 자식이 그렇게 걱정돼?”그 자식이 누구인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강루인은 그를 노려보며 거친 숨을 몰아쉬다가 그냥 무시하고 문 쪽으로 걸어갔다.그 모습에 주영도는 그녀의 팔을 잡고 확 끌어당겼다.“내가 묻고 있잖아!”화가 치밀어 오른 강루인이 따귀라도 때리려고 손을 휘둘렀으나 주영도가 손목을 잡고 벽으로 밀어붙인 바람에 꼼짝도 하지 못했다.몸부림쳐도 빠져나갈 수 없어 분노를 터뜨렸다.“미쳤으면 병원이나 가. 나한테 미친 짓 하지 말고.”주영도의 눈빛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고 목소리도 얼음장처럼 차가웠다.“그 자식이 대신 원효정을 정리해줬다고 냉큼 달려가려고?”그 말에 강루인의 표정이 굳어졌다. 차성열이 말하지 않아 정말 모르고 있었다.‘그것 때문에 이렇게 미쳐 날뛰었던 거야?’강루인의 두 눈에 조롱이 가득했다.“남도 날 위해 나서는데 정작 남편이라는 사람은 뒤로 물러나 있었으면서 무슨 낯짝으로 화를 내? 창피하지도 않아?”주영도가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강루인, 그동안 내가 너무 잘해줬지? 점점 기어오르네?”그녀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 웃음 속에 조롱이 가득했다.‘잘해줬다고? 언제? 항상 날 짓밟기만 했으면서.’주영도가 비타민 D라고 적힌 약병을 꺼냈다.“이게 뭐야?”약병을 본 강루인은 잠깐 멈칫했다. 그러다가 그의 표정을 보고는 어떤 생각이 스쳤다.‘설마...’그가 약병을 바닥에 던져버렸다.“이게 뭐냐고 묻고 있잖아.”주영도가 다 알아버렸다는 걸 강루인은 그제야 확신했다.차성열 때문에 화가 났던 게 아니라 피임약이야말로 진짜 도화선이었던 것이었다.강루인은 이 상황을 덤덤하게 받아들였다.“이미 다 알았으면서 뭘 또 묻고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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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7화

주영도의 얼굴에 드리워졌던 분노가 당황함으로 바뀌었다.“너... 임신했어?”고통이 강루인의 의식을 점점 집어삼키는 와중에도 이렇게 외쳤다.“내 몸에 손대지 마...”주영도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듯했다. 당황한 기색이 더욱 짙어지더니 재빨리 강루인을 안고 병원으로 달려갔다.아래층에서 계속 위층의 상황을 살피던 진경자는 싸우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올 때마다 가슴이 철렁했다.그러다가 주영도가 하혈하는 강루인을 안고 내려오는 걸 본 순간 그녀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피가 바닥에 뚝뚝 떨어졌다.“대체 무슨 일이에요?”사실 진경자도 주영도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유산인가?’주영도가 다급하게 말했다.“아주머니, 같이 병원 가요.”그 말에 진경자는 재빨리 차에 올라탔다.차가 병원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갔다.강루인은 고통에 의식이 점점 흐릿해졌고 계속 하혈한 바람에 체온도 떨어졌다. 기절하기 직전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나 이대로 죽는 거야? 아직 죽고 싶지 않다고.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내가 주영도 때문에 죽어야 하는 건데?’병원에 도착하자마자 강루인은 곧장 수술실로 실려 들어갔다.주영도는 옷에 피가 잔뜩 묻은 채로 복도 벽에 기대 서 있었다. 두 손을 파르르 떨고 있다는 걸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옆에 서 있던 진경자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만 뻐금거리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한참 뒤 간호사가 수술실 문을 열고 나와 책임동의서에 서명하라고 했다.주영도가 손을 떨면서 물었다.“제 아내는 어떤가요?”“수술 중입니다. 빨리 서명해주세요.”그는 한시라도 지체할세라 재빨리 서명했다.동의서를 받은 간호사가 가면서 한마디 했다.“정말 별난 사람이 다 있어. 피임 기구를 삽입하자마자 바로 관계를 가지다니. 죽는 게 두렵지도 않나 봐.”그 말이 주영도의 귀에 박힌 순간 그는 간호사의 팔을 붙잡고 섬뜩한 눈빛으로 말했다.“방금 뭐라고 했어요? 다시 한번 말해봐요.”화들짝 놀란 간호사가 팔을 뿌리쳤다.“지금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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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8화

강루인의 표정은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눈을 뜨자마자 주영도를 보는 것보다 차라리 그가 없었으면 싶었다.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가능하다면 영원히 다시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그런데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었다. 주영도의 얘기를 꺼내기 무섭게 그녀 앞에 나타났다.주영도는 무표정한 얼굴로 병실 문 앞에 서서 침대 위의 강루인을 쳐다봤다.그를 본 진경자가 황급히 일어나 자리를 비켜주었다. 나가기 전 주영도에게 낮게 속삭였다.“대표님, 사모님 지금 몸이 많이 약하세요. 화내지 마시고 말로 하세요. 아셨죠?”주영도는 그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진경자가 나간 후 병실 안이 순식간에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에어컨에서 나오는 냉기보다 두 사람의 분위기가 더욱 차가웠다.강루인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고 주영도는 침대 옆 의자에 앉아 그녀의 옆모습을 바라봤다.조금 전까지 타오르던 분노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칠흑같이 어두운 눈동자로 그녀를 쳐다보다가 먼저 침묵을 깼다.“네가 계속 아이를 가지지 못하면 이혼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거야?”강루인이 이렇게 생각했던 건 사실이었다.주영도가 주씨 가문의 장손이라 무조건 아이를 낳아야 했다. 당분간 아이가 생기지 않으면 주세웅도 뭐라 하지 않겠지만 시간이 길어지면 결국 문제가 될 게 분명했다.그때쯤 불임이라는 딱지가 붙더라도 이혼만 할 수 있다면 감당할 수 있었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며느리를 주씨 가문에서 계속 데리고 있을 리 없었다.그리고 주영도가 그녀를 위해 아이를 포기할 만큼 정이 깊고 의리 있는 남자도 아니었다.그가 온기라곤 전혀 없는 어두운 눈빛으로 또박또박 말했다.“주씨 가문 사모님 소리를 듣고 싶지 않으면 떠나도 돼.”그 말에 강루인이 고개를 돌리더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무슨 뜻이지? 이혼해주겠다는 말인가?’“이혼해줄 거야?”강루인의 질문에 주영도의 입꼬리에 미소가 걸렸다. 그런데 그 미소는 보는 이의 등골을 서늘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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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9화

주영도는 말한 대로 움직였다. 병실 문 앞에 경호원을 세워놓고 그녀가 도망칠 틈조차 주지 않았다.의사의 퇴원 허락을 받은 후 강루인을 선샤인 빌리지로 데려갔다.그는 모든 통신 기기를 싹 거둬갔다. 강루인은 날개가 꺾인 새처럼 선샤인 빌리지라는 화려한 새장 안에 갇혔다.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그녀는 미친 듯이 집 안의 물건을 때려 부쉈다. 하지만 그녀가 부수는 속도보다 주영도가 물건을 채워 넣는 속도가 더 빨랐다.지금 이 상황은 강루인이 아무리 발버둥 쳐도 현실을 바꿀 능력이 없다는 걸 보여줬다.마지막으로 난장판을 만들어버린 뒤 다시 원래대로 돌아온 방 안을 둘러보던 강루인은 맥없이 바닥에 누웠다.분노에서 절망으로, 절망에서 결국 무감각한 상태가 돼버렸다. 그녀는 생기 없는 시체처럼 천장을 올려다봤다.그때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졌다. 주영도가 다가와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계속 부술 거야?”겉으로는 관대해 보이는 말투였지만 사실은 매정하고 잔인하기 그지없었다.강루인의 창백한 얼굴에 원한이 가득했다.“내가 영도 씨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알아?”그 말에 주영도가 우스갯소리라도 들은 듯 피식 웃더니 바지를 살짝 들고 그녀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내가 신경 쓸 것 같아?”그러고는 손을 내밀어 그녀의 볼에 붙은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내려 했다.강루인이 고개를 홱 돌려 피하자 억지로 그녀의 턱을 잡아 다시 정면으로 돌린 다음 아주 세심하게 머리카락을 정리해주었다.“그동안 내가 너무 너그러웠나 봐. 그래서 다 받아줄 줄 알았던 거고. 주씨 가문 사모님이라는 신분을 잃는 순간 넌 나한테 존엄은 물론이고 기본적인 인권조차 없을 거야.”강루인이 조롱 섞인 말투로 말했다.“존엄? 나한테 준 적이 있어?”원래도 없던 것이라 잃을 것도 없었다.주영도가 덤덤하게 대꾸했다.“아직도 날 잘 모르는구나.”말을 마치고는 서류 두 개를 꺼냈다. 하나는 이혼 합의서였고 다른 하나는 노예 계약서였다.“이혼 합의서에 사인하는 순간 넌 더 이상 내 아내가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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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0화

진경자는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알겠어요.”문이 다시 닫혔다. 방 안에 음식을 씹는 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강루인은 진경자가 차려준 밥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다 비웠다. 그제야 기운이 조금씩 돌아오는 듯했다.밥을 다 먹은 후에는 또다시 침대에 누웠다.밤이 깊어졌을 무렵 눈을 뜬 강루인은 몸을 일으켜 침대 시트를 끌어냈다. 그러고는 시트를 묶어 밧줄처럼 만든 다음 한쪽 끝은 방 안에 단단히 묶고 다른 한쪽 끝은 베란다 밖으로 던져버렸다.손으로 세게 당겨보면서 아무 문제 없음을 확인하고서야 시트를 꽉 잡고 밑으로 천천히 내려갔다.발이 땅에 닿은 순간 강루인은 주저 없이 선샤인 빌리지의 정문을 향해 달렸다.귀에 바람 소리와 그녀의 심장 소리가 크게 들렸다. 강루인은 1초도 멈추지 않고 길가로 달려 나왔다.길옆의 어느 한 가게에 도착한 후 주인에게 전화 한 통만 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깊은 밤, 함지율이 차를 몰고 급히 달려왔다. 맨발로 서 있는 강루인을 보자마자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녀가 무슨 일인지 묻기도 전에 강루인이 먼저 말했다.“나 병원에 좀 데려다줘, 지율아.”함지율이 운전하면서 물었다.“대체 무슨 일이야?”강루인이 간단하게 설명했다. 그녀의 말을 들은 함지율이 크게 분노를 터뜨렸다. 이젠 무슨 말로 주영도를 욕해야 할지 모를 지경이었다.짐승이라 욕하는 것도 그에게는 너무나 약한 욕이었다.인간으로서 어찌 아내에게 잠자리 파트너가 돼달라고 할 수 있단 말인가? 이는 옛날에 정실부인에게 첩이 되라고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아니, 그래도 다른 점이 있었다. 첩은 명분이라도 있지만 주영도는 명분도 주지 않겠다는 뜻이었다.‘정말 인간말종이네.’함지율은 강루인을 병원에 데려다줬다.지금 당장 안북시를 떠나고 싶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주영도의 애인은 절대 하지 않을 것이다.강루인이 병원으로 온 이유는 이수희를 데려가기 위해서였다. 함지율이 그녀의 주민등록증을 가지러 갔다.한밤중에 깨어난 이수희는 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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