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재상의 금비녀: Chapter 1 - Chapter 10

100 Chapters

제1화

고즈넉한 달빛 아래, 사월(四月)이는 고개를 숙인 채 다리 위를 걷고 있었다. 사월이의 손에 들려있는 옥비녀는 달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이는 고용형(顧容珩)이 사월이에게 하사한 것이었다. 그녀는 그의 발밑에 바짝 엎드린 채 비굴하고도 감사한 마음으로 그가 하사한 옥비녀를 받았다.사월이는 고용형의 잠자리 시중이나 드는 계집일 뿐이었다. 첩에도 끼지 못하는 그녀는 그의 장난감에 불과했다. 고용형이 그저 기분이 좋아서 하사한 물건을 사월이는 보물 대하듯 애지중지했다. 이런 평범한 옥비녀는 사월이같은 사람이 평생 갖지 못하는 거였다.그때, 맞은편에 있던 계집 아도(阿桃)가 사월이를 보고 그녀를 불렀다."사월아."그 목소리에 사월이는 얼른 비녀를 소매에 감추며 아도를 바라봤다."이리 늦었는데 어딜 가는 거야?"아도가 주방에서 따뜻한 물을 들고 나오며 물었다."도련님께서 서책을 대부인(大夫人) 처소에 두고 오셔서 제게 가져다 달라고 하셨습니다."달빛 아래, 하얗고 말끔한 얼굴을 한 사월이가 대답했다.그 대답을 들은 아도는 사월이의 손에 있던 책을 보며 웃었다."그럼 어서 가봐. 나도 가봐야겠다, 대부인께서 기다리고 계신다."아도의 말을 들은 사월이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손에 든 서책을 꼭 잡았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숙이고 묵묵히 걸어가기 시작했다.하지만 사월이의 발걸음은 무척 느렸다. 달빛 아래의 다락방을 보니 그녀는 덜컥 겁이 났다. 그렇게 길목에서 발걸음을 멈춘 사월이는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고용형은 한 달 동안 사월이를 찾지 않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서책을 가져다 달라고 한 거였다. 곧 일어날 일을 생각하니 사월이의 안색이 창백해졌다.그때, 이화헌(梨花軒)의 문을 지키고 있던 계집이 등롱(燈籠)을 들고 사월이에게 다가왔다. 따뜻한 불빛이 사월이의 얼굴을 비췄고 계집이 사월이를 놀렸다."사월아, 여기 한참 서 있던데 길이 안 보여서 그래?""밤이 너무 깊어서요."사월이가 멍한 얼굴로 대답했다.그녀는 오늘 이
Read more

제2화

달빛 아래, 늘 단정한 모습을 하고 있던 고용형은 머리를 늘어뜨린 채 조금 다급한 얼굴로 뜨거운 숨을 내쉬었다. 이는 사월이가 본 적 없던 모습이었다.어둠 속에 반쯤 가려진 고요한 눈동자 때문에 사월이는 그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허리에 닿는 뜨거운 손에 몸이 저도 모르게 떨려왔다.사월이는 심장이 떨렸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서린 듯했다. 문득 아래에 있는 아취가 생각난 사월이가 애처롭게 고용형에게 구걸했다."일단 들어가면 안 되겠습니까?"그 말을 들은 고용형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하지만 곧 사월이를 안아 든 그가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침상 위에 눕혀진 사월이는 잔뜩 긴장한 채 눈을 깜빡였다. 눈물을 머금은 눈동자에 당황함이 역력했다."사월아, 오늘은 날 화나게 하지 말거라."고용형이 웃으며 조금 흐트러진 사월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어두침침한 불빛 아래, 사내의 준수한 얼굴이 특히 돋보였다. 깊은 눈동자에는 언짢음이 서려 있었다.오늘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다던 아취의 말이 생각난 사월이는 입술을 깨물더니 처음으로 주동적으로 사내의 목을 안았다.고용형은 사월이의 행동이 무척 마음에 드는 듯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깊은 밤이 되어서야 사월이는 자신의 몸을 누르고 있던 사내의 손을 밀쳐냈다. 아픈 몸으로 바닥에 떨어진 옷을 주워 입은 그녀가 소리 없이 처소를 나섰다.문 앞에 흐트러진 서책과 비녀는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두 동강 난 비녀를 보니 사월이는 조금 가슴 아팠다. 조심스럽게 비녀를 품에 넣은 그녀는 뒤늦게 바닥 위의 서책을 탁자 위에 올려뒀다.문을 닫고 나가려던 사월이는 고개를 들자마자 언제 일어난 건지 침상 위에 앉아 있는 고용형을 보게 됐다.그는 냉랭한 얼굴로 허리띠를 매며 사월이에게 다가왔다.창백한 얼굴을 한 사월이의 눈에 불안함이 서려 있었다. 달빛 아래의 그녀는 더 아름다웠다.곧 사월이의 턱이 올려지더니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다음에는 내가 준 물건을 망가뜨리지 말거라."고용형의 말
Read more

제3화

"사월아, 일어나."누군가 팔을 잡고 흔드는 느낌에 사월이가 눈을 떴다. 그리고 눈앞에 선 사희(四喜)를 보자마자 얼른 몸을 일으켰다."내일 큰아씨께서 돌아오시니 대부인께서 마당을 깨끗이 청소하라고 하셨어. 특히 전에 큰아씨께서 지내던 곳은 더 신경 써서 청소해. 이번에 아씨께서 꽤 있다가 가실 거라고 했어."대충 머리를 빗던 사월이는 그 말을 듣자마자 멈칫했다."대부인께서 나를 보내 큰아씨를 돌보게 할까?"사월이는 전에 큰아씨 시중을 들던 이였다. 큰아씨께서 시집갈 때, 사월이도 따라가기로 했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대부인께서 갑자기 사월이를 불쌍히 여겨 그곳에 남겨뒀다.큰아씨는 사월이에게 무척 잘해줬기에 사월이는 그 소식을 듣고 오랫동안 울적해 했다. 그리고 투정을 부리며 큰아씨께서 시집갈 때, 가마 뒤를 따라가며 돌아가지 않으려 했다. 결국, 집사가 사람을 보내 사월이를 다시 데려왔다.대부인은 큰아씨를 따르는 사월이의 마음을 갸륵히 여겨 그녀를 벌하진 않았다. 하지만 큰아씨가 떠난 뒤로 사월이는 대부인 곁에서 지내며 많이 단정해졌다."너는 지금 대부인 처소에서 있으니 큰아씨 시중을 들러 갈지 말지는 대부인의 뜻을 봐야지. 헌데 임 어멈이 오늘은 대부인 처소에 안 가도 된다고 했어. 일단 큰아씨 처소부터 청소하래."사희가 하고 있던 일을 마치곤 사월이의 손을 잡아끌었다.그 말을 들은 사월이는 사희를 따라 큰아씨 처소로 향했다.그러던 중, 마침 서 장군 집의 둘째 여식과 만났다. 등 뒤에 서너 명의 계집종을 둔 그녀는 단아했다. 행동거지 하나하나에서 양반집 규수 티가 났다.두 사람이 길옆에 서서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네자 아씨가 다정하게 인사를 받아줬다. 그리곤 등 뒤에 있던 계집더러 두 사람에게 동전 하나를 주라고 했다. 동전을 받아 든 사월이와 사희는 아씨가 참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아씨가 두 사람에게서 멀어지자 사희가 사월이에게 귓속말을 했다."요즘 대부인께서 서 장군님 여식을 자주 부르는 걸 보니 도련님과의 혼사가 점점 더
Read more

제4화

사월이가 추억에 잠긴 사이, 한 어멈이 소리쳤다."대부인께서 큰아씨가 오늘 밤에 도착한다고 하셨으니 서두르거라. 진왕비를 불편하게 하지 말고."어멈의 말에 바깥에 있던 계집들이 얼른 대답했다."그리고 큰아씨께서 경성(京城)의 계화꽃떡을 먹고 싶다고 하셨다. 누가 가서 사 오겠느냐?"이어지는 어멈의 말을 들은 사월이가 얼른 밖으로 나가 말했다."제가 가겠습니다."어멈은 사월이를 보더니 그녀가 전에 큰아씨를 돌봤던 계집이라는 것을 알아보고 웃었다. 그리곤 사월이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에 은전을 쥐여줬다."네가 적합하겠구나. 큰아씨 입맛을 잘 알고 있으니."사월이는 은전을 꼭 쥔 채 고개를 숙여 어멈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감사합니다, 아주머니."날씨는 어두침침했다. 어느새 늦가을이 되어 바람이 불어오니 서늘했다.사월이는 채춘원(采春園)으로 가서 계화꽃떡을 사들곤 느릿하게 저잣거리 위를 걸었다. 그러던 중, 장신구 점포를 발견하곤 안으로 들어섰다."이런 것도 받나요?"사월이가 품속에서 끊어진 옥비녀를 꺼내서 주인장에게 보여줬다.그러자 주인장이 옥비녀를 받아 들곤 한참을 자세하게 살펴봤다."옥은 좋은 옥인데 끊어져 버렸으니 내가 받아도 쓸데가 없습니다.""주인장이 받아만 준다면 은전은 얼마든지 다 됩니다."주인장이 비녀를 돌려주자 사월이가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그 말을 들은 주인장이 미간을 찌푸리더니 한숨을 쉬었다."낭자가 돈이 필요한 것 같으니 오늘 내 좋은 일 하는 셈 치고 오십 냥에 받겠습니다. 어떻습니까?"잠시 망설이던 사월이는 돈을 받고 나서야 한시름 놓았다.사월이가 점포를 나섰을 때, 문 앞의 길 위에 갑자기 마차 한 대가 서더니 도령 하나가 내렸다. 긴 머리를 올려묶은 도령의 허리춤에 찬 검은색 패도(佩刀)가 유난히 눈에 띄었다. 하늘색의 두루마기는 햇빛을 받아 빛나고 있었다.그때, 사월이를 발견한 도령의 준수한 얼굴에 놀라움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곧 미소를 띄운 그가 사월이에게 다가갔다."사월아, 네가 어찌
Read more

제5화

고회옥이 사월이를 데리고 돌아왔을 때, 날은 조금 어둑해졌다.고회옥 뒤에 있던 머슴은 선물함을 가득 들고 있었다. 고회옥은 자그마한 함을 든 채 길목에 서 있었다. 그리고 허리를 숙이며 사월이에게 신비스럽게 말했다."이건 내 특별히 널 위해 가져온 것이다. 네가 회서(淮西)에서 왔다고 들었는데 이번에 마침 그곳을 지나쳐서 그곳에서 산 것이다. 돌아가서 열어보거라. 마음에 들면 내 다음에 또 그곳에 들러서 사다 주마."그 말을 들은 사월이는 감동해서 눈시울을 붉히며 비단함을 받아 들었다. 그녀는 결국 참지 못하고 소매로 눈가를 훔치며 목멘 목소리로 말했다."감사합니다, 도련님."사월이의 말을 들은 고회옥이 웃었다. 그는 고개를 숙인 사월이에게 몇 마디 더 걸어보려고 했지만 그때, 옆에서 갑자기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두 사람은 갑작스럽게 들려온 목소리에 놀랐다. 사월이는 안색이 창백해졌다. 눈물이 맺힌 두 눈을 내린 그녀는 옆에 선 이를 감히 바라볼 수 없었다.고용형은 뒷짐을 진 채 고회옥의 옆에 서서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어찌 언질도 없이 온 것이냐? 내 사람을 보내 널 데리러 갔을 텐데."당대 재상인 형님 고용형의 앞에서는 아무리 버릇없이 구는 고회옥도 얌전하게 굴어야 했다."형님도 제가 놀기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지 않습니까. 돌아오는 길을 확신할 수 없어 알리지 않았습니다."고회옥의 대답을 들은 고용형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어서 돌아가서 옷을 바꾸고 어머니께 문안 인사를 올리거라. 할머니께도 인사드리고. 마침 오늘 밤에 여의도 오기로 했으니 다 같이 만날 수 있겠구나."고용형의 말을 들은 고회옥이 사월이를 자기 옆으로 끌고 오며 웃었다."오늘 돌아오는 길에 마침 사월이를 만났습니다. 사월이가 큰누이가 돌아온다고 하길래 누이에게 줄 선물도 챙겨왔으니 걱정 마십시오."사월이는 그 말을 듣자마자 안색이 더욱 창백해졌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입술을 깨문 그녀는 느껴질 듯 말 듯한 고용형의 시선을 마주할 수 없었다.다행히 고용형
Read more

제6화

사월이는 방으로 돌아가서 비단함을 놓은 뒤, 떡을 어멈에게 가져다줬다. 그리고 다시 큰아씨 처소로 향했다.다른 계집들이 아직 바삐 움직이는 걸 본 사월이는 한시름 놓으며 추운이(秋雲)에게 다가가 그녀를 도왔다."왜 이제 온 거야?"추운이가 사월이에게 물었다."오는 길에 셋째 도련님을 만났어요. 도련님께서 대부인 선물을 들어달라고 하셨어요."사월이가 탁자를 닦으며 말했다.그 말을 들은 추운이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셋째 도련님께서 정말 돌아오셨다고? 전에 도련님께서 널 자주 찾아오셨잖아. 사월이 네 미모면 도련님께서 좋아할 수 있는 거 아니야?"추운이가 사월이를 놀리며 말했다.하지만 사월이의 안색은 굳어졌다. 주위에 자신들을 신경 쓰는 사람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한시름 놓은 그녀가 진지하게 추운이를 바라봤다."언니, 왜 그런 농을 하는 겁니까? 저와 셋째 도련님은 이젠 어릴 때와는 다릅니다. 지금의 도련님은 서 장군님의 가르침을 받아 백호(百戶) 자리를 맡았고 도련님의 형님은 당대 재상입니다. 헌데 저는 그저 고부의 계집종일 뿐입니다. 그런 농을 했다가 다른 이가 듣는다면 저는 이곳에서 쫓겨날 겁니다."사월이의 말을 들은 추운이는 그제서야 자신이 말을 잘못했다는 걸 깨닫고 얼른 사월이를 잡고 말했다."사월아, 내 너무 생각 없이 말했다. 마음에 담아두지 말거라.""언니 탓 안 합니다."사월이가 눈을 내린 채 대답했다.두 사람은 다시 다른 얘기를 나누며 일을 하기 시작했다.사월이는 유독 자세하게 청소했다. 새로 바꾼 이불에 먼지가 앉자 또 얼른 새 이불로 바꿨다.그 모습을 본 추운이가 말했다."오랫동안 비워뒀으니 먼지 하나 없게 하려면 내일까지 청소해야 할 거야."하지만 사월이는 여전히 묵묵히 청소했다."잠자리가 바뀌지 않았습니까. 아씨께서는 피부가 예민해서 새 이불로 바꿔드리지 않으면 잠을 잘 못 잘 겁니다."그 말을 들은 추운이는 아무 말 없이 다시 일을 시작했다.한 시진 정도 지나자 하늘은 완전히 어두워졌고 머
Read more

제7화

사월이는 주방에서 쪽걸상에 앉아 채소를 다듬고 있었다. 사월이가 채소를 다듬자마자 주방 어멈이 서둘러 채소를 가져가서 씻었다. 주방 안은 오랜만에 사람들로 북적였다. 오늘 큰아씨가 돌아온다는 걸 듣고 경성에 있는 친척들이 모두 재상부로 모였다. 문 앞에 일고여덟 대의 마차가 세워져 있었고 사람들의 말소리가 구석진 주방에서도 들릴 지경이었다.잠시 후, 집사가 주방에 들렀다."음식은 다 준비됐는가?"그러자 주방장이 땀이 흘리며 소리쳤다."다 됐습니다. 언제 음식을 올릴까요?""다들 자리에 앉으셨으니 이제 올리면 된다!"주방에서 잠시 나갔던 집사가 다시 돌아와 주방 안을 향해 말했다.집사의 말이 끝나자마자 주방 안은 다시 분주해졌다. 사월이는 어멈의 말에 따라 음식을 올리러 갔다. 여러 계집들과 함께 선 그녀의 손에는 맛깔난 수육이 들려있었다. 먹음직한 음식을 보고 있으니 배에서 꼬르륵하는 소리가 들려왔다.사월이는 오늘 밥도 제대로 챙겨 먹지 않아 지금 배가 무척 고팠다.추운이도 음식을 올리게 됐다. 그녀는 사월이의 옆으로 가서 침을 삼키더니 말했다."냄새 너무 좋다."그 말을 들은 사월이가 추운이가 들고 있던 오리구이를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식사는 편원(偏院)에서 이어졌다. 그곳은 연꽃못과 가까이 이어져 있어 주위에 나무들이 많았다. 밤바람이 불어오면 남다른 풍취를 자아내는 곳이었다.사월이는 멀리서부터 세 개의 밥상에 둘러앉은 사람들을 보게 됐다. 큰아씨는 중간 밥상에 앉아 있었다. 화려한 옷차림에 단정한 모습으로 앉아 있는 그녀는 전보다 더 부티 나고 아름다웠다.큰아씨 뒤로 서너 명의 계집이 음식을 집어줬고 옆에는 많은 친척들이 그녀를 둘러싸고 있었다.큰아씨와 점점 더 가까워질수록 사월이는 고개를 숙였다. 큰아씨가 자신을 발견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그녀는 가장 끝에 자리한 밥상으로 향했다.사월이가 수육을 내려놓고 가려던 그때, 고회옥이 갑자기 그녀의 손을 잡고 큰아씨 앞으로 다가갔다."누이, 사월이를 기억합니까?"고여의(
Read more

제8화

사월이가 주방으로 돌아가자 추운이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월이를 구석으로 끌고 간 추운이는 수육 한 접시를 내밀었다."어디서 난 겁니까?"수육을 본 사월이가 놀라서 물었다. 주방에 있는 다른 이가 보고 집사에게 알린다면 곤장을 맞아야 할 것이다.추운이는 무서워하는 사월이를 보곤 웃음을 터뜨렸다."뭘 그리 놀라는 거야? 어르신께서 주신 거야. 주방에서 일을 도운 이는 다 있어."사월이는 그제야 마음 놓고 수육을 한 점 먹었다."음식을 아직 다 안 올렸는데 가서 도와야 하는 거 아니에요?""그래야지. 일단 너랑 한 점 맛보고 싶어서 데려온 거야."추운이가 접시를 한쪽으로 치우며 말했다.그 말을 들은 사월이가 웃었고 두 사람은 다시 일을 하기 시작했다.식사가 끝났을 때는 이미 술시가 다 되어갔다. 모든 정리를 마치고 나니 늦은 밤이 되었다.계집들이 지내는 방 안, 사월이는 세수를 마치곤 아직 바삐 움직이는 이들을 보곤 구석에 있던 상자에서 두루마기 하나를 꺼내 깁기 시작했다."누구 두루마기야?"세수간에서 돌아온 추운이가 사월이에게 물었다."임 어멈 두루마기예요. 큰아씨께서 돌아오셔서 바쁠까 봐 생각난 김에 하려고요."사월이가 묵묵히 두루마기를 기우며 대답하자 추운이가 입을 삐죽였다."저번에는 깔창을 기워달라더니 이번에는 옷이야? 사월이 네가 임 어멈 계집도 아니고. 대부인 곁에 오래 있더니 자기가 뭐라도 되는 줄 아나 봐."임 어멈은 오랫동안 대부인의 시중을 들었다. 해서 아래 계집들에게 각박하게 굴면서 마음대로 부려 먹기 일쑤였다. 덕분에 많은 계집들이 불만이 많았다.그때, 자리에 누웠던 한 계집이 추운이의 말을 듣더니 몸을 일으켰다."그러니까. 저번에 그 늙다리가 대부인이 남긴 과일을 집어 먹은 걸 내가 봤는데 오히려 나한테 눈을 함부로 돌린다면서 욕을 했다니까. 에잇, 퉤! 그러니까 아들이 부인도 못 찾지."그 말을 들은 다른 계집들이 웃었다. 하지만 오늘 다들 피곤했던 탓에 힘이 없어 평소보다 말이 없었다.사월이는
Read more

제9화

"다른 곳으로 가면 안 되겠습니까? 다른 이가 볼까 봐 무섭습니다."계집들이 잠든 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나무 아래, 사월이는 두 손으로 고용형의 가슴을 짚은 채 곧 눈물을 떨굴듯한 얼굴로 말했다.그 애달픈 모습이 고용형은 마음에 든다는 듯 그녀의 허리를 안았다. 뜨거운 숨결이 사월이의 귀밑을 스쳐 지나갔고 고용형이 그녀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내가 보고 싶었느냐?"사월이는 난감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그녀는 빨개진 눈을 한 채 얌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오늘의 고용형은 기분이 꽤 좋아 보였다. 그는 한 손으로 사월이의 얼굴 반쪽을 감싼 채 녹색 가락지를 한 엄지로 그녀의 매끄러운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의 눈길은 눈물을 매단 그녀의 눈으로 향했다."이리 예쁜 얼굴을 가졌는데 한낱 계집을 하는 건 낭비가 아니겠느냐?"고용형이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웃을 듯 말 듯한 얼굴로 말했다."고회옥이 네 얼굴을 꽤 좋아하는 것 같던데."고용형이 알 수 없는 얼굴로 사월이를 보며 낮게 말했다."아니냐?"그 말을 들은 사월이는 손을 흠칫 떨었다. 그리곤 들고 있던 상자를 티 나지 않게 등 뒤로 감췄지만 힘 있는 손이 그녀의 손을 잡고 앞으로 가져왔다.고용형은 무덤덤한 얼굴로 사월이의 손에서 상자를 가져오더니 열어봤다. 그 속에 든 한쌍의 인형을 본 그가 웃음을 터뜨리며 사월이를 바라봤다."마음에 드냐?"사월이는 입술을 깨물었다. 어떻게 해야 눈앞의 이를 기분 좋게 만들어 줄 수 있을지 몰랐다. 덕분에 새빨간 입술에 잇자국이 생겼다.고용형의 눈빛에 짜증이 서리자 사월이는 긴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가 입을 떼려던 순간, 손가락 하나가 사월이의 입술을 눌렀다."자꾸 물면 나도 물 것이다."고용형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월이는 그가 농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사월이의 입술을 누르고 있는 손가락은 길쭉했다. 차가운 손가락에서 먹물 향이 느껴졌다. 사월이는 쿵쾅대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그녀는 조금 무서워졌다.그런 자신
Read more

제10화

고용형의 눈빛이 깊어지더니 사월이의 머리를 자신의 가슴 위로 꾹 눌렀다."몸은 아직 아프냐?"귓가에 사내의 힘 있는 심장박동이 들려오자 사월이는 얼굴을 붉혔다. 그녀는 입을 뗐지만 결국 난감한 얼굴로 고개만 끄덕였다.토끼처럼 작은 몸을 안고 있자니 고용형은 무척 만족스러웠다. 섬섬옥수로 사월이의 등을 쓰다듬던 그가 그녀의 귓가에 대고 낮게 속삭였다."그럼 오늘은 봐주마. 내일 밤에 이화헌에 와서 날 찾거라."품 안에 있던 사월이가 자신의 말을 듣고 흠칫 떨자 고용형의 웃음이 짙어졌다. 그리곤 그녀를 위로하듯 사월이의 부드러운 머리를 쓰다듬더니 이마에 입을 맞췄다."들어가 보거라."하지만 사월이는 그 자리에 서서 고용형이 들고 있던 상자를 바라봤다. 다시 고용형에게 눈길을 돌린 그녀의 눈빛에 구걸의 뜻이 담겨 있었다.그 모습을 본 고용형은 상자를 든 채 사월이를 내려다보며 담담하게 말했다."내가 준 비녀를 망가뜨렸으니 이 인형을 내게 주면 되겠구나."사월이는 고용형이 이렇게 당당하게 자신의 물건을 가져갈 줄은 몰랐다. 그녀는 처음으로 용기를 내어 말했다."그건 셋째 도련님께서 주신 겁니다. 비녀는 배상해 드리겠습니다."사월이의 말을 들은 고용형은 화가 나서 헛웃음이 나왔다. 그가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며 차갑게 물었다."배상? 그 비녀는 옥취당(玉翠堂) 것이다. 하나에 수백 냥씩이나 하는 걸 너 같은 계집종이 어찌 배상하겠다는 게냐?"사월이는 고용형에게 밀려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녀는 그 비녀가 이렇게 비쌀 줄 몰랐다. 그런 비녀를 오십 냥에 팔았다니, 뒤늦게 아쉬움이 몰려왔다.수백 냥이나 하는 비녀를 사월이는 감히 바라지 못했고 배상할 능력도 없었다.사월이가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고용형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곤 상자를 들고 그곳을 떠났다.멀지 않은 곳에서 순찰하던 머슴이 등롱을 들고 다가왔지만 고용형의 뒷모습은 이미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사월이는 아무리 억울해도 참을 수밖에 없었다. 허공에 손을 내밀었던 그
Read more
PREV
123456
...
10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