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정훈이 정신을 차렸을 때 하도연은 이미 성큼성큼 앞서가고 있었다.구정훈은 이를 악물고 빠르게 따라붙으며 목소리를 낮췄다.“도연아, 할아버지가 안에서 기다리고 계셔. 적어도 밥상 앞에서 내 체면까지 깎지는 마.”“체면?”하도연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옆모습은 놀라울 정도로 평온했고 아무런 파문도 일지 않았다.“구정훈 씨, 채아의 안전을 협상 카드로 쓸 때는 체면이라는 걸 왜 생각하지 않았어?”그 말은 바늘처럼 구정훈의 얼굴에 박혀 안색을 변하게 했다.순간 구정훈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그래. 이런 짓까지 벌였으니, 하도연 같은 사람에게 더 경멸받는 것도 당연하지.’구정훈이 다시 입을 열려던 순간 거실문이 안쪽에서 열렸다.금재은이 환하게 웃으며 마중 나왔다.“왔구나. 어서 들어와. 밖은 추워.”하도연은 얼굴에 서린 냉기를 자연스럽게 거두고 금재은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금 여사님.”아직 이혼도 하지 않았지만 호칭은 이미 달라져 있었다.금재은의 얼굴에 드리워진 미소가 잠시 굳었지만, 경험이 많은 그녀는 재빨리 표정을 수습하고 두 사람을 안으로 안내했다.“아버님께서 오전 내내 너희를 기다리셨어.”구진택은 거실의 상석에 앉아 있었다. 손에는 자단나무 지팡이를 짚고 있었고, 표정은 너무 담담하여 속내를 알 수 없었다.두 사람이 앞뒤로 들어오는 걸 보자 구진택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하도연을 보며 마침내 반가운 미소를 지었다.“도연이 왔구나. 어서 와서 앉아라.”“할아버지.”하도연은 구진택의 오른편 자리에 앉았다. 그녀의 자세는 여유로웠고, 자리에 앉은 뒤 가정부가 건넨 차를 들어 천천히 한 모금 마셨다.하도연은 처음부터 끝까지 구정훈 쪽에는 시선을 한 번도 주지도 않았다.구정훈은 하도연의 옆자리에 앉았으나 속으로는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구진택은 하도연을 바라보며 안부를 묻듯 편하게 말했다.“요즘 바쁘지? 한동안 얼굴을 못 봤구나.”“괜찮아요. 요즘 일이 좀 많아서요.”하도연은 찻잔을 내려놓고 담담하게 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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