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이제 와서 빌어? 나 임신했어!: Chapter 821 - Chapter 830

861 Chapters

제821화

하도연은 휴대폰을 쥔 채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전화기 너머, 하용건은 그녀가 대답이 없자 목소리를 한층 더 낮췄다.“도연아,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느냐?”“네, 알아들었어요.”하도연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할아버지께서 지금은 적절한 시기가 아니라고 생각하신다면 조금 더 기다릴게요.”하용건은 그녀가 이렇게 순순히 대답할 줄 몰랐는지 오히려 잠시 침묵했다. 그녀의 말이 진심인지 아닌지 가늠하는 듯했다.잠시 후 하용건이 느릿하게 말했다.“네가 이해했다니 다행이구나. 내가 네 이혼을 막겠다는 게 아니다. 지금 이혼하면 너한테도, 하씨 가문에도 좋을 게 없다는 거지. 여론이 완전히 잠잠해지고 나면 네가 뭘 하든 할아버지가 막지 않으마.”“네.”하도연은 더 말하지 않고 깔끔하게 통화를 끝냈다.휴대폰을 책상 위에 내려놓으려던 순간, 통화 기록에 부재중 전화 한 통이 더 찍혀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하지훈에게서 온 전화였다.미처 다시 전화를 걸기도 전에 두 번째 전화가 걸려 왔다.“누나, 나 방금 비행기에서 내렸어. 지금 북영시야.”수화기 너머로 공항 안내 방송이 섞인 하지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걱정하지 마. 늦어도 내일까지는 구정훈이 이번 일에 연관됐다는 증거, 반드시 찾아낼게.”하도연은 다급하게 몰아붙이는 그의 말투를 들으며 무심코 미간을 문질렀다.“이제 조사 안 해도 돼. 돌아와.”“뭐?”하지훈이 확연히 당황했다. “이 일을 그냥 넘어가겠다고?”“이미 증거를 손에 넣었어.”“벌써?”하지훈의 목소리가 잠시 끊겼다.“무슨 증거?”“민호가 방금 구정훈이랑 허예리가 통화한 녹음 파일을 보내줬어.”하도연은 그간의 일을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전화기 너머로 2, 3초쯤 조용해졌다.“그 녀석, 움직임 하나는 빠르네.”하지훈의 목소리에는 의외라는 기색이 묻어났다.잠시 망설이던 그가 물었다.“그럼 누나는 어떻게 할 생각이야? 증거까지 생겼으니 할아버지도 더는 이혼을 막을 수 없잖아.”“방금 할아버지한테도 보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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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22화

다음 날 오전, 모처럼 하늘이 맑게 개었다.하지훈은 약속한 시간에 정확히 그린 빌라에 나타났다. 그는 원래 강미진의 다리를 주물러 주고 있었는데, 하도연이 내려오는 것을 보자 자리에서 일어났다.“누나, 가자. 유준한테는 미리 얘기해 뒀어.”“그래.”하도연은 머리를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뒤로 올려 묶어, 차갑고 침착한 분위기를 자아냈다.“잘 다녀오렴.”강미진도 두 사람이 중요한 일을 하러 가는 걸 알고 있었다.“우리 막둥이한테 몸 잘 챙기라고 꼭 말해 줘. 진통 시작하면 반드시 나한테 전화하라고 하고.”“걱정하지 마세요. 엄마가 말씀 안 하셔도 누나랑 제가 채아한테 꼭 얘기할게요.”하지훈은 웃으며 하도연과 앞뒤로 집을 나섰다.차 옆까지 걸어간 후 하도연이 하지훈을 힐끗 보았다.“유준이한테 뭐라고 했어?”“누나가 볼일이 있어서 찾는다고만 했지.”하지훈은 차 앞을 돌아 조수석 문을 열어 주었다.“걱정하지 마. 무슨 일인지는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았어. 그래도 그 녀석 워낙 눈치가 빨라서 대충은 다 짐작했을걸.”하도연은 더 묻지 않고 허리를 숙여 차에 올라탔다.차는 곧장 월강 레지던스를 향해 달렸다.도착했을 때 온채아는 앞마당에서 코코의 털을 빗겨 주고 있었다. 익숙한 SUV가 들어오는 걸 보자 조금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그러더니 금세 환하게 웃으며 다가왔다.“도연 언니, 지훈 오빠. 두 분이 어떻게 같이 오셨어요?”곧이어 온채아는 무언가를 깨달은 듯 덧붙였다.“유준 오빠 찾으러 오신 거죠?”하도연은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한 그녀의 표정에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어떻게 알았어?”“오늘 집에 별일도 없는데 오전 내내 회사에 안 가더라고요. 그래서 누구 기다리고 있겠다고 짐작했죠.”온채아는 두 사람을 엘리베이터 앞까지 데려다주었다.“올라가세요. 오빠는 서재에 있어요. 얘기 끝나면 내려와서 점심 드시고요. 제가 주방에 말해서 좋아하실 만한 거로 몇 가지 더 준비해 달라고 할게요.”말투는 자연스럽고 세심했다. 일부러 거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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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23화

성유준도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그럼 내일 임지연 시켜서 자료 보내게 할게.”“응.”하도연은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마치 아주 평범한 거래 하나를 성사한 사람처럼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옆에 앉아 있던 하지훈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누나와 유준이가 일 얘기하는 게 내가 메뉴 하나 고르는 것보다 훨씬 빠르네.”“네가 메뉴 하나 고르면서 너무 따지는 거지.”성유준이 심드렁하게 받아쳤다.하지훈은 말문이 막혔다가 바로 반격하려 했지만, 그 순간 서재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문 너머에서 온채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오빠, 얘기 거의 끝났어요? 할머니가 10분만 있으면 밥 먹을 수 있대요.”그 말에 성유준이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걸어갔다.“마침 끝났어.”문을 열자 온채아가 예쁘게 잘라 놓은 과일 한 접시를 들고 서 있었다.그녀는 서재 안을 빼꼼히 들여다보다가 하도연과 하지훈도 이미 일어나 있는 걸 보고 환하게 웃었다.“잘됐네요. 내려가서 같이 식사해요.”“뭐 준비했어?”하지훈이 다가가 과일 접시를 들여다봤다.“망고?”“네. 맞아요. 디저트도 마침 망고 크레이프 케이크를 준비했거든요.”온채아가 고개를 끄덕였다.하지훈이 무심코 말했다.“너 망고 맛 안 좋아하잖아?”온채아가 의외라는 듯 그를 바라봤다.“제 취향도 알고 있었어요?”정말 뜻밖이라 조금 얼떨떨할 정도였다.그도 그럴 것이, 하지훈은 예전부터 온채아를 별로 탐탁지 않아 했으니까.하지훈은 어색하게 코끝을 문지르며 얼버무렸다.“언제 유준한테 들었던 걸까? 잘 모르겠어. 그냥 이것만은 기억하고 있었어.”자기 막내동생의 취향을 줄곧 기억하고 있었다고 솔직히 말할 수는 없었다.옆에서 지켜보던 하도연은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그들이 함께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마침 이미숙도 거실 쪽에서 걸어왔다. 그녀는 두 사람을 보자 반갑게 손짓했다.“도연아, 지훈아, 얼른 와서 앉아. 채아가 너희 좋아하는 음식으로 주방에 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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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24화

식사는 화기애애하고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이어졌다.식사가 끝난 뒤 온채아가 과일과 다과를 챙기려 하자 이미숙이 막아섰다.“됐어. 넌 그냥 앉아 있어. 경애가 알아서 할 거야.”“전 그냥 말만 전하려 했을 뿐이에요.”온채아가 난감하게 웃었다.“말하는 것도 신경 쓰이는 일이야.”이미숙은 타박하듯 그녀를 한 번 바라보고는 하도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도연아, 지훈아, 너희는 좀 더 앉아 있어. 난 뒷마당 화분 좀 보고 오마.”젊은 사람들끼리 편하게 이야기와 자리를 만들어 주려는 배려였다.하지훈과 하도연이 모두 대답했다.이미숙이 멀리 가기도 전에 하지훈이 거리낌 없이 입을 열었다.“그러고 보니 누나, 구정훈이 그 입장문 내고 나서 끊겼던 협력 관계들 다시 이어지고 있지?”하도연은 그가 무엇을 묻는지 알고 있었다.“응. 몇몇 업체는 일시 중단했었는데, 어제 오후부터 다시 연락해 왔어.”이익을 좇는 건 사업가의 본성이니 굳이 탓할 일은 아니었다.“그럼 지금 꽤 우쭐해 있겠네.”하지훈은 말하다가 고개를 돌려 성유준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그래도 며칠 못 가겠지만.”같은 시각, 구씨 집안 본가의 식당도 환하게 불이 켜져 있었다.구정훈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옆에 있던 술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할아버지, 그룹 쪽 많은 프로젝트들이 다시 진행되고 있습니다.”상석에 앉은 구진택의 탁한 눈에 만족스러운 빛이 어렸다. 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이번 일은 잘 처리했어. 무슨 일이든 우리 구씨 집안을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걸 명심해라.”구정훈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네, 알고 있습니다.”맞은편에 앉은 구민호는 아예 젓가락에 손도 대지 않은 채 그저 찻잔 가장자리를 만지작거리며 천천히 돌리고 있었다. 그러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는 갑자기 입꼬리를 씩 올렸다.“민호야, 왜 안 먹어?”금재은은 아들의 기분이 좋지 않은 걸 알아차리고 농어찜 한 점을 집어 그릇에 올려 주었다.“요즘 너무 바쁜 거 아니니? 얼굴이 많이 수척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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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25화

구민호가 마침내 고개를 들고 구정훈을 바라봤다. 그의 눈빛에는 숨길 생각조차 없는 비웃음이 담겨 있었다.“내가 비꼬는 거야, 아니면 형이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는 거야?”구정훈은 그 말에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 입가에 걸려 있던 웃음도 거의 무너질 뻔했고, 목소리 역시 한층 가라앉았다.“일의 전후 사정이 어떻든 결국 우리는 친형제야. 외부인 하나 때문에 나랑 등을 지는 게 너도 좀...”“누나는 외부인이 아니야.”구민호가 그의 말을 잘랐다.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뱉은 말은 또렷하게 울렸다.식당 안은 완전히 조용해졌다.금재은이 입을 열려 했지만 구강우가 눈빛으로 제지했다.구진택은 찻잔을 든 손을 허공에 멈춘 채 구민호의 얼굴에서 구정훈의 얼굴로, 다시 구민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무언가를 저울질하는 듯했다.한참 뒤에야 구진택은 찻잔을 내려놓고 담담하게 말했다.“그만해. 다 한 식구인데 이깟 일로 이렇게까지 할 게 뭐야? 민호야, 네 형 말도 틀린 건 아니다. 도연이는 어쨌든 네 형수였어. 피해야 할 건 피하고, 괜히 그 애를 난처하게 만들지 마.”겉으로만 들으면 양쪽을 다 나무라는 말이었지만, 어느 편을 들고 있는지는 너무도 분명했다.구진택은 구민호에게 하도연과 선을 그으라는 경고를 하고 있었다. 구정훈을 더 힘들게 만들지 말라는 뜻이었다.구민호는 반박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느긋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맑고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다 먹었어요. 먼저 올라갈게요.”말을 마친 그는 누구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돌아서서 나갔다.구진택도 그를 붙잡지 않았다. 그저 손을 한 번 내저은 뒤 다시 찻잔을 들며 평소의 위엄 있는 말투로 말했다.“됐다. 정훈아, 너는 우선 회사 일에 더 신경 써야 한다.”평범한 말처럼 들렸지만 사실상 자신의 입장을 밝힌 것이나 다름없었다.구정훈이 하씨 가문과의 관계를 안정시키고 구씨 집안의 이익만 지켜 낸다면, 구씨 집안은 후계자를 바꿀 생각이 없다는 뜻이었다.“네.”구정훈이 짧게 대답했다.구민호가 자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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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26화

저녁 식사를 마친 뒤에야 하도연과 하지훈이 자리에서 일어나 작별 인사를 건넸다.온채아는 복도에 서서 자동차의 후미등이 모퉁이 너머로 사라지는 걸 바라보다가 성유준의 팔을 끌어안았다.“나 따뜻한 물에 푹 목욕하고 싶어.”“가자.”성유준은 차갑게 식은 그녀의 손가락을 살짝 주무른 뒤 함께 위층으로 올라갔다.온채아가 목욕을 마치고 나오자 성유준은 이미 소파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옆에는 드라이어도 놓여 있었다.그녀가 나오자 그가 손짓했다.“이리 와.”온채아는 익숙하게 다가가 그 앞에 놓인 푹신한 방석 위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등을 돌렸다.남자의 길쭉한 손가락이 젖은 머리칼 사이로 파고들었다. 따뜻한 바람이 두피를 타고 전해져 온몸의 긴장이 풀렸다.그의 손길은 이미 꽤 능숙해져 있었다. 가끔 손끝이 그녀의 귓바퀴를 스칠 때마다 살짝 간지러웠다.몇 분 뒤 성유준은 드라이어를 끄고 손끝으로 머리카락 끝이 다 말랐는지 확인한 뒤에야 옆에 내려놓았다.“다 됐어.”하지만 온채아는 일어나지 않았다.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 고개를 숙인 채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했다.성유준이 바로 알아챘다.“무슨 생각 해?”온채아는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도연 언니 말이야. 또 무슨 일이 생긴 거야?”오늘 하도연은 오후 내내 그녀와 함께 있었고 티를 내지도 않았다. 그래도 온채아는 직감적으로 하도연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 걸 느꼈다.인터넷에 떠도는 골치 아픈 소문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일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성유준에게 묻지 않고서는 자꾸 마음에 걸렸다.“그렇다고 볼 수 있지.”성유준은 고개를 숙여 그녀를 바라보며 잠옷 깃을 단정하게 여며 주었다.“구정훈이 낸 입장문은 겉으로는 누나를 도와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누나를 꼼짝 못 하게 묶어 둔 거야. 이혼 얘기를 한낱 사소한 부부싸움으로 치부해 버렸잖아. 이런 상황에서 누나가 계속 이혼을 요구하면 오히려 누나가 너무한 사람처럼 보이게 돼.”온채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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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27화

‘뭐? 내 말이 맞는 걸로 하자니.’온채아는 입술을 달싹이며 더 묻고 싶었지만 성유준은 짧게 한 마디를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잘 시간이야. 침대 가서 기다려.”온채아는 그의 뒷모습이 욕실 문 너머로 사라지는 걸 바라보다가 여전히 조금 못마땅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배를 쓰다듬으며 배 속의 아이에게 조용히 물었다.“아가야, 아빠가 원래 마음이 엄청 약하거든. 그렇지?”그는 예나 지금이나 늘 마음이 약한 사람이었다.조금의 진심만 건네도 그는 배로 다정하게 보답해 주곤 했다.마치 예전에 그녀가 건넨 레몬 사탕 두 알에 마음을 열고 몇 년 동안 지켜주었던 것처럼, 또 지금 이렇게 그녀를 위해 탄탄대로를 닦아놓은 것처럼 말이다....그린 빌라로 돌아가는 길, 하도연이 운전대를 잡았다.하지훈은 저녁 식사 때 술을 조금 마신 탓에 조수석에 앉아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혀를 찼다.“왜?”하도연이 고개를 돌려 힐끗 봤다.하지훈은 휴대폰 화면을 그녀 쪽으로 기울였다.“유준이 진짜 빠르네. 누나, 맞혀 봐. 점심에 얘기 끝난 뒤부터 지금까지 구씨 집안이 프로젝트 몇 개나 날렸게?”하도연은 운전 중이라 화면을 자세히 보지도 않았고, 맞혀 볼 생각도 없었다.“몇 개인데?”“크고 작은 거 다 합치면 대여섯 개.”하지훈은 휴대폰을 거두며 구경하는 재미가 꽤 쏠쏠하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그중 두 개는 구온 그룹이 앞으로 2년 동안 밀던 핵심 프로젝트야. 구정훈 지금 엄청 속이 타들어 갈 텐데.”하도연은 대꾸하지 않고 앞만 보고 달리며 핸들을 톡톡 두드릴 뿐이었다.하지훈이 그녀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이 속도, 진짜 유준이답다. 움직이지 않을 때는 가만히 있다가 한번 움직이면 아예 숨통을 끊어 버리잖아.”성유준은 한번 손을 쓰면 상대에게 반격할 시간도, 기회도 남겨 두지 않는 사람이었다.하도연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차는 부드럽게 코너를 돌아 그린 빌라 안으로 들어갔다.정문에 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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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28화

다음 날 아침, 온채아는 한의원에 출근하지 않는 날인데도 몸에 밴 습관 때문에 일찍 눈을 떴다. 결국 그녀는 씻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아침을 먹었다.온채아가 고개를 숙이고 죽을 먹고 있자 이미숙이 옆에 앉아 새우만두 하나를 그릇에 올려 주며 잔소리를 늘어놓았다.“좀 더 먹어. 요즘 금방 배고프잖아. 유경애가 백숙도 끓이고 있으니까 이따 배고프면 바로 먹으면 된다.”“네.”온채아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 지금 먹는 아침도 아직 다 못 먹었는데 할머니는 벌써 다음 끼니까지 준비해 두고 있었다.성유준은 맞은편에 앉아 태블릿으로 이메일을 느긋하게 확인하고 있었다. 그는 가끔 고개를 들어 온채아가 제대로 밥을 먹고 있는지도 확인했다.막 시선을 거둔 순간, 그의 휴대폰이 진동했다.성유준은 발신자를 확인하고 굳이 자리를 피하지 않은 채 바로 스피커폰을 켰다.“임 비서.”“성 대표님, 구온 그룹 구정훈 대표님이 회사에 오셨습니다. 대표님을 뵙고 싶다고 합니다.”임지연의 또렷하고 간결한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왔다.성유준이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나를?”“네.”임지연도 속으로는 구정훈이 참 답답하다고 생각했다.성유준이 이렇게 정확하고 거침없이 손을 썼다는 건 협상할 생각이 전혀 없다는 뜻이었다.구정훈은 여기까지 찾아와 문전박대를 당할 시간에 자신이 대체 누구를 건드렸는지부터 알아보는 편이 나을 텐데 말이다.물론 임지연이 성유준 앞에서 그런 말을 할 리는 없었다. 그저 전달할 내용만 전했다.“접견실에서 기다리겠다고 합니다. 대표님께서 언제 시간이 나시든 5분만 내주시면 된다고 했습니다.”온채아는 음식을 씹다 말고 멍하니 성유준을 쳐다보았다.성유준은 씩 웃으며 말했다.“요즘 아내 출산 준비 때문에 집에 있어야 해서 회사 갈 시간이 없다고 해. 괜히 기다리지 말라고 하고.”“네, 알겠습니다.”임지연은 짧게 대답했다.전화가 끊기자 온채아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구 대표님이 오빠를 찾아갔어?”“응.”성유준은 휴대폰을 옆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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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29화

구정훈은 임지연에게서 더는 알아낼 수 있는 게 없다는 걸 깨달았다.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정장 자락을 정리한 뒤 임지연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임 비서님께서 성 대표님께 전해 주십시오. 다음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조심히 들어가십시오, 구 대표님.”임지연은 그를 엘리베이터 앞까지 배웅하고 아래층 버튼을 눌렀다.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순간, 얼굴에 걸려 있던 손님맞이 전용 미소가 마침내 사라졌다.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이 지경이 됐는데도 다음에 또 찾아올 생각을 하다니.임지연은 자리로 돌아가는 길에 성유준에게 메시지를 하나 보냈다.[성 대표님, 돌아갔습니다.]성유준은 답하지 않았다.임지연도 애초에 답장을 기대한 건 아니었다. 그녀는 휴대폰을 옆에 두고 다시 업무를 처리하기 시작했다.구정훈이 차에 올라탔을 때는 얼굴은 먹물을 뒤집어 쓴 것처럼 어둡게 가라앉았다.강준태는 조수석에서 룸미러로 그의 눈치를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대표님, 지사로 돌아갈까요?”“그래.”차가 막 한빛 그룹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와 큰길로 들어서자 구정훈의 휴대폰이 울렸다.발신자 이름을 본 순간 그의 관자놀이가 두어 번 세게 뛰었다.“할아버지.”“어디냐?”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구진택의 목소리는 전날 식탁에서보다 훨씬 무거웠고, 그 안에는 억누를 수 없는 분노가 서려 있었다.“방금 한빛 그룹에서 나왔습니다.”구정훈은 사실대로 답했다. 굳이 숨길 생각도 없었다.이미 여기까지 온 이상 숨긴다고 숨겨질 일도 아니었다.“한빛 그룹에 갔다고?”구진택은 잠깐 놀란 듯했지만 곧 목소리를 다시 낮췄다.“성유준은 만났어?”“못 만났습니다.”“그럼 거기까지 가서 뭘 한 거냐? 망신당하러 갔어?”구진택은 사정없이 몰아붙였다.“말해 봐. 대체 우리 구씨 집안이 성씨 가문에 뭘 잘못했길래 하룻밤 사이에 프로젝트를 대여섯 개씩 빼앗긴 거야? 오늘 하루 동안 내게 대놓고든 돌려서든 이 일 캐묻는 사람이 몇이나 됐는지 알아?”구정훈은 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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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30화

서진한테 연락해서 시간 잡으라니.서진이 누구인가.하도연의 곁에서 가장 날카로운 칼날 역할을 하는 사람이자, 지난 몇 년간 온갖 불필요한 사람들을 그녀 대신 쳐 내 온 냉정한 비서였다.그에게 서진을 통해 약속을 잡으라는 건, 결국 하도연이 그를 직접 상대할 가치조차 없다고 생각한다는 뜻이었다.구정훈은 휴대폰을 꽉 움켜쥐었고 얼굴이 서서히 어두워졌다.거 하도연과의 관계가 지금처럼 틀어지기 전에는, 그녀를 만나고 싶을 때면 언제든 그린 빌라로 찾아가거나 그녀의 개인 번호로 바로 전화를 걸곤 했다.하도연은 아무리 바빠도 그를 위한 시간을 내주곤 했다.하지만 이제는 그를 비서에게 넘겼다.마치 그가 그녀의 일정표에 시간만 배정하면 되는 평범한 사람 중 하나가 된 것처럼 말이다.구정훈은 모든 감정을 눌러 삼키고 조수석의 강준태를 바라봤다. 머릿속은 여전히 냉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우리 장모님 다리 치료해 준 개인 주치의 있지? 최근에 성유준과도 연락하고 있는지 알아봐.”...한편 그린 빌라에서는 하도연이 막 전화를 끊은 참이었다. 책상 앞에 서 있던 서진이 무언가를 눈치채고 고개를 들었다. “아가씨?”“구정훈이 연락하면 약속 잡아 줘. 내일 오후에 시간 좀 빼고.”서진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직접 만나시려고요?”“그래.”하도연은 손에 들고 있던 펜을 펜꽂이에 내려놓으며 느긋하게 말했다.“지금 구정훈은 구씨 집안에 난 불을 끄려고 마음이 급해. 나를 만나는 게 가장 빠른 방법이지. 내가 아예 만나 주지 않으면 지훈이나 희민이, 심지어 채아한테까지 돌아서 접근할 거야.”서진은 무슨 뜻인지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장소는 어디로 잡을까요?”“시청 접견실로 잡아.”하도연이 말했다.“어떤 자리에서 무슨 얘기를 하는지 분명히 해야지. 공과 사는 나눠야 하니까.”서진은 바로 이해했다.“네, 그렇게 하겠습니다.”그녀가 돌아서 나가려는 순간 하도연이 한마디를 더 덧붙였다.“그리고 내일 회의록은 네가 직접 작성해.”서진의 발걸음이 잠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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