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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을 쓴 남편의 모든 챕터: 챕터 421 - 챕터 430

580 챕터

제421화

의자에 앉아 있던 하정훈의 얼굴에 난생처음 보는 당혹감이 스쳤다.마치 큰 잘못을 저지른 아이처럼 어쩔 줄 몰라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서 있기도 애매하고 앉아 있기도 그렇고 아예 여기 있는 거 자체가 민폐인 것 같은 분위기였다.송남지는 얕은 숨을 들이켰다. 복부의 통증이 어젯밤 겪었던 끔찍한 악몽을 상기시켰다.그녀는 더없이 부드럽지만 동시에 더없이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정훈 씨, 나가주세요.”하정훈은 십여 초 동안 멍하니 굳어 있었다.그의 눈시울이 순식간에 붉게 충혈되었다.긴 침묵 끝에 그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일어나서 이불을 덮어줬다.“알았어.”짧은 한마디였지만 그의 목소리는 억눌린 슬픔으로 낮고 거칠게 잠겨 있었다.문밖에서 기다리던 오지훈은 하정훈이 금방 나오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다.그래서 최보라를 데리고 밥이라도 먹으러 갈까 고민하던 참이었다.어젯밤부터 지금까지 최보라도 끼니를 제대로 챙기지 못했으니까.하지만 막 말을 꺼내려던 순간, 하정훈이 병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최보라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남지가 뭐 다른 거 먹고 싶대요?”문밖에 서 있는 하정훈의 몰골은 전례 없이 초라해 보였다.그는 묵묵히 고개를 가로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오지훈은 의아해서 미간을 찌푸렸다.‘들어간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나온단 말인가?’최보라 역시 의아해했지만, 어젯밤의 출장 건 때문에 다분히 악의 섞인 추측을 내뱉었다.“하 대표님은 또 회사 일 보러 가시나 봐요? 괜찮아요, 바쁘신 거 다 아는데. 여긴 제가 있으면 되니까 가보세요.”오지훈은 최보라를 살짝 잡아당기며 눈치를 주었다. 상대가 하정훈이니 말조심하라는 뜻이었다.하지만 최보라는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어젯밤부터 참아왔던 화가 아직 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아까 오지훈이 말리지 않았더라면 하정훈을 순순히 송남지의 병실에 들여보내지도 않았을 것이다.하정훈은 얇은 입술을 달싹이다가 잠시 침묵한 뒤, 수척해진 얼굴로 나직하게 말했다.“회사 일 보러 가는 거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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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22화

오지훈이 한창 위로하고 있을 때, 하정훈이 불현듯 분노에 차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마치 격노한 야수처럼 그는 성큼성큼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했다.오지훈이 황급히 뒤따라가며 의아해 물었다.“야, 병원에 있겠다며? 어디 가는데?”하정훈이 뒤를 돌아봤을 때, 그의 눈엔 좀처럼 볼 수 없었던 살벌한 분노가 이글거리고 있었다.그 눈빛을 본 오지훈조차 등골이 오싹해질 정도였다.‘도대체 뭘 어쩌려는 거지?’하정훈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며 이를 갈 듯 내뱉었다.“손윤영 찾으러 가야겠다.”그 이름을 듣자마자 오지훈은 머릿속에 사이렌이 울렸다.그는 엘리베이터에 타려는 하정훈을 뜯어말렸다. 하루하루가 바람 잘 날 없어 정말이지 수명이 줄어드는 기분이었다.“야, 하정훈! 지금 가면 안 돼!”오지훈은 알고 있었다. 지금 상태로 그 할망구 찾아가면 100% 사고 칠 게 뻔했다.지금 전기차 프로젝트 계약이 코앞인데, 이게 FunAI한테만 중요한 게 아니라 성은 그룹의 실적이 걸린 대형 건이었다.수많은 경쟁 회사들이 이 먹음직스러운 고기를 노리고 있었다. 자금력으로는 성은 그룹을 당해낼 수 없으니 그들은 다른 약점을 파고들려 혈안이 되어 있었다.비록 언론 매체들이 성은 그룹이나 하정훈에 대한 소문을 함부로 다루지는 못한다고 해도 전례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만약 그들이 뒷돈이라도 받는다면?떡고물이라도 얻어먹으려는 하이에나들은 바로 이 중요한 시점에 하정훈에게 문제가 생기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하지만 오지훈이 아무리 말려도 하정훈을 막을 수는 없었다.하정훈은 이미 목표를 정한 맹수처럼 통제 불능 상태였다.결국 오지훈은 어쩔 수 없이 엘리베이터에 함께 몸을 실었다....병실 안, 최보라는 식음을 전폐한 송남지를 보며 깊은 근심에 빠져 있었다. 차라리 하정훈에게 곁을 지키게 하는 편이 나았을까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적어도 그라면 송남지에게 뭐라도 먹일 수 있었을 것 같았다.최보라는 옆에 앉아 끊임없이 한숨만 내쉬었다.그때, 송남지가 미간을 찌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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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23화

송남지는 짐짓 태연한 척 시선을 하슬기 옆에 서 있는 양나정에게로 옮겼다.양나정은 오피스 룩 느낌이 물씬 나는 샤넬 정장을 입고 있었다. 검은색 슈트에 흰색 샤넬 백을 매치한 모습은 누가 봐도 해를 끼칠 것 같지 않은, 곱게 자란 부잣집 딸 그 자체였다.그런 단아하고 귀티 나는 분위기는 확실히 양나정에게 득이 되는 요소였다.적어도 분위기만 놓고 보자면 하슬기보다 훨씬 호감을 사는 스타일이었다.양나정은 분홍색과 흰색이 섞인 꽃다발을 들고 두리번거리며 꽃병을 찾고 있었다.“어머, 병실에 꽃병 하나가 없네?”하슬기가 양나정을 툭 치며 말했다.“없으면 말아. 그냥 그렇게 둬도 예쁘니까.”양나정은 그제야 단념하고 꽃다발을 내려놓은 뒤, 생글생글 웃으며 송남지를 바라보았다.송남지는 지금 이 기분을 뭐라 형용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자신을 향해 환하게 웃고 있는 양나정의 미소. 그것은 마치 승자의 여유로운 미소처럼 느껴졌다.송남지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없자, 하슬기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그녀는 다소 민망한 듯 입을 열었다.“새언니, 사고 소식 듣고 나랑 나정이랑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요. 허락도 없이 병문안 와서 죄송해요. 너무 걱정돼서 그런 거니까 이해해 주세요.”송남지는 하슬기를 가만히 응시하기만 할 뿐 대답할 생각 따윈 없었다.하슬기의 말이 허공에 흩어지면서 분위기는 순식간에 어색해졌다.하지만 양나정은 아주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였다. “남지 씨, 다쳐서 말씀하기 힘든 거 알아요. 걱정 말아요, 오래 안 있을게요. 그냥 상태만 확인하고 바로 갈 거예요.”송남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상태 확인했으니 이제 가도 좋다는 뜻이었다.하슬기의 안색이 싹 변했다.‘기껏 직접 발걸음 했는데, 멀쩡히 깨어 있는 송남지가 한마디도 안 하다니. 이건 대놓고 무시하는 거 아닌가?’하슬기의 마음에 불만스러운 기색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그때, 양나정이 어젯밤 일에 대해 운을 떼기 시작했다. 그녀의 눈빛은 한없이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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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24화

안 그래도 지금 같은 상황에서 송남지는 양나정의 얼굴을 마주하는 것조차 껄끄러웠다.하물며 그녀의 가식적인 말들은 더더욱 듣고 싶지 않았다.이미 할 말 다 하고 들을 만큼 들었는데, 하슬기가 끼어드는 바람에 졸지에 양나정이 억울한 피해자 꼴이 되어버렸으니 송남지는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저 둘이 원래 저런 인간들이란 걸 몰랐으면 진짜 뒷목 잡고 쓰러졌을 것이다.그녀는 눈을 내리깔고 분에 차 씩씩거리는 하슬기를 바라보았다.“하슬기, 대체 뭘 원하는 거야? 내가 네 친구 양나정한테 사과라도 해야 나가 줄 거야?”하슬기는 멈칫하더니 겸연쩍은 듯 말했다.“뭐 꼭 사과를 받겠다는 건 아니고... 난 그냥 사람들이 나정이를 가정 파괴범으로 오해하는 게 싫어서...”하슬기가 구구절절 말을 이어가는 동안에도 양나정은 계속 하슬기를 잡아끌며 그만 가자고 말리고 있었다.귓가에 맴도는 시끄러운 소음에 송남지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그만해!”부상을 입은 뒤로 처음 내지르는 큰 목소리였다.복부가 찢어지는 듯한 통증이 선명하게 느껴졌지만, 송남지는 그따위 고통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그녀는 고개를 돌려 여전히 하슬기를 말리는 척하는 양나정을 쏘아보았다.“그렇게 쉽게 갈 거면, 애초에 하슬기를 꼬드겨서 여기까진 왜 데리고 온 건데?”양나정은 정곡을 찔린 듯 하슬기의 손을 잡은 채 멍하니 굳어버렸다. 오직 하슬기만이 민망한 기색을 감추려 애쓰며 어색하게 말을 이었다.“무, 무슨 소리예요. 나정이가 오자고 해서 온 거 아니에요. 새언니가 다쳤다는 데 서경에 있으면서 안 오는 게 말이 안 되잖아요.”송남지는 하슬기에게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듯 양나정을 뚫어지게 응시하며 대답을 기다렸다.양나정은 어색하게 팔짱을 끼며 시선을 피하다가 한참을 고민한 뒤에야 입을 열었다.“슬기 말이 맞아요. 남지 씨가 사고를 당했는데 정훈의 동생으로서 당연히 병문안 와야죠. 나를 너무 나쁘게만 생각하지 말아요.”송남지는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내가 당신을 나쁘게 생각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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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25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최보라는 주먹을 쥐며 달려들 태세를 취했다.기겁한 하슬기는 양나정을 붙잡고 허둥지둥 도망치듯 병실을 빠져나갔다.하지만 쫓겨나는 두 사람의 입에선 여전히 욕설이 끊이질 않았고 양나정은 하슬기의 귀에 대고 나직하게 속삭였다.“끼리끼리 논다더니, 딱 그 수준에 맞는 친척이네.”하슬기는 병실 문 앞에서 겨우 숨을 고르며 분노를 터뜨렸다.“감히 나를 건드려? 무식한 건지 아니면 간이 배 밖으로 나온 건지 모르겠네! 호의를 베풀어도 지랄이야, 진짜 열 받게!”그 순간, 쾅 하고 문이 벌컥 열렸다.하슬기는 즉시 입을 다물고 잡아먹을 듯한 기세로 튀어나온 최보라를 바라보았다. 최보라는 미간을 찌푸리며 으르렁거렸다.“한 번만 더 문 앞에서 떠들어 봐. 남지 쉬는 거 방해하면 네가 누구든 당장 푹 고아버릴 테니까, 알아들었어?”하슬기는 그 말을 곧이듣진 않았지만 최보라의 살기 등등한 기세에 완전히 압도당해 버렸다.그녀는 감히 대꾸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최보라가 욕설을 내뱉으며 문을 닫고 들어갈 때까지 하슬기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서 있었다.양나정은 눈을 가늘게 뜨고 하슬기의 팔을 잡아당기며 부드러운 척했으나 그 말속에는 싸움을 부추기는 독이 들어 있었다.“저 여자 겨우 전시회 기획하는 사람 아니었어? 도대체 뭘 믿고 저렇게 뻔뻔해? 슬기 널 아주 대놓고 무시하잖아.”분을 삭이지 못하던 하슬기는 양나정의 부채질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내 말이! 대체 뭘 믿고 저렇게 설치는 거야?”양나정이 기름을 부었다.“서정우 씨도 서경 정계에서 한 가닥 하는 사람인데 사모님인 네가 여기서 이런 꼴 당한 거 알려지면 얼마나 개망신이야?”하슬기는 씩씩거리며 엘리베이터로 향했고 차에 타서도 분이 풀리지 않아 씩씩거렸다.양나정은 겉으로는 하슬기를 위로하는 척했지만 속내는 딴판이었다.“슬기야, 그냥 잊어버려. 어쨌든 남지 친척이라잖아. 게다가 서경에서 제일 잘 나가는 전시 기획사 다닌대. 일도 꽤 잘해서 요즘 서경에서 열리는 굵직한 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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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26화

하슬기는 즉시 운전 기사에게 행선지를 변경하라고 지시했다. 차는 서정우가 시내 중심가에 매입한 펜트하우스로 향했다.지하 주차장에 차가 멈추자마자 하슬기의 휴대폰이 울렸다. 서정우였다.“어디야?”서정우의 질문은 빠르고 군더더기가 없었다.양나정이 옆에서 농담을 던졌다.“어머, 서정우 씨가 벌써 부인이 보고 싶으신가 보네.”하슬기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지하 주차장이에요. 금방 올라가요.”곧 도착한다는 말에 서정우는 의아해했다.“친구들이랑 쇼핑 간다지 않았어?”하슬기는 입을 삐죽거렸다.“일이 좀 생겼어요. 집에 가서 얘기해 줄게요.”“그래, 마침 잘됐네. 얼른 올라와, 나도 할 말이 있어.”차에서 내릴 때까지도 양나정은 장난스럽게 말을 건넸다.“슬기야, 서정우 씨는 쉴 때마다 너만 찾네. 아주 깨가 쏟아진다 쏟아져. 아, 부러워라.”하슬기는 양나정의 팔짱을 끼며 대꾸했다.“송남지가 염치없이 끼어들지만 않았어도 너랑 우리 오빠, 이렇게 되진 않았을 거 아냐. 그 여자만 없었어도 지금쯤 얼마나 행복했겠어.”양나정은 일부러 풀 죽은 척 입을 다물었다. 하슬기 앞이라도 내숭은 필수였으니까.“슬기야, 그런 말 이제 하지 마. 정훈 오빠나 남지 씨가 들으면 기분 나빠해.”말을 마친 그녀는 세상 억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친구의 그런 모습을 보자 하슬기는 속상하고 화가 났다.“참나! 말도 못 하냐? 내가 뭐 없는 말 했어? 송남지 걘 뭔데 그렇게 갑질이야? 말도 못 하게 하고, 진짜 빡치네!”분노하는 하슬기를 보며 양나정은 입가에 번지는 미소를 감추기 힘들었다.하지만 감춰야 했다. 자신이 하슬기 앞에서 약자 행세를 할수록 송남지를 향한 하슬기의 증오가 깊어질 테니까.“슬기야, 화 풀어. 어쨌든 남지 씨가 본처고 정훈 씨도 그 여자밖에 모르잖아. 난 이번에 진짜 무서웠어. 남지 씨가 나랑 정훈 오빠 병원에서 밤샌 거 가지고 시비 걸까 봐. 여자는 소문 잘못 나면 끝장인데, 남지 씨 말 한마디면 나 매장당하는 거 일도 아니잖아. 우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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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27화

엘리베이터 문이 부드럽게 열리자 한 층을 독채로 쓰는 구조답게 펜트하우스의 널찍한 안면 인식 현관문이 눈에 들어왔다.하슬기가 그 앞에 서자 문은 자동으로 잠금을 해제했다.양나정은 투덜거리는 하슬기의 뒤를 바짝 쫓았다.“이 일만 아니었으면 우린 지금쯤 서경 벨루스에서 신나게 쇼핑하고 있었을 텐데, 진짜 재수 없어.”하슬기가 불평을 늘어놓는 동안 가정부가 다가와 그녀의 신발을 갈아 신겨 주었다.현관에는 가정부가 한 명뿐이라 양나정은 스스로 신발을 갈아 신고 들어갔다.가정부는 어두운 낯빛으로 하슬기에게 조용히 속삭였다.“사모님, 오늘 댁에 손님 두 분이 와 계십니다. 선생님 안색이 영 좋지 않으세요.”하슬기는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그 사람 오늘 오후엔 일정 없다고 하지 않았어? 대체 어떤 사람들이길래 집까지 찾아와서 일 얘기를 해? 사람 사생활도 없나!”입으로는 불평했지만 하슬기는 현관 전신 거울 앞에서 자신의 옷차림과 화장을 꼼꼼히 점검했다. 완벽함을 확인한 후에야 그녀는 양나정의 손을 잡아끌었다.“가자, 나정아. 오늘 우리 집까지 쳐들어온 불청객이 누군지나 한번 보자.”서정우의 현재 서경 정계 내 위상이 상당했기에, 하슬기는 오늘 찾아온 손님들이 남편보다 지위가 높을 것이라곤 전혀 생각지 않았다.그래서 그런지 그녀의 말과 행동에는 자연스레 여유와 즐거움이 묻어났다.하지만 그녀는 가정부가 신발을 갈아 신겨 줄 때 왜 굳이 오늘 서정우의 안색이 좋지 않다고 언질을 주었는지 깊이 생각해보지 않은 듯했다.심지어 하슬기는 응접실로 들어서며 가볍게 콧노래까지 흥얼거렸다.병원에서 당한 그 모든 수모를 곧 남편이 말끔히 갚아줄 것이라는 달콤한 환상에 젖어 있었기 때문이다.‘그 미친년은 회사에서 쫓겨날 준비나 하라지!’그러나 응접실 문을 여는 순간, 모든 기대는 산산조각 났다.실내에는 숨 막힐 듯 엄숙한 공기만이 감돌았다.그리고 그들이 방금까지 화제로 삼았던 하정훈이 상석에 앉아 어두운 표정으로 그들을 맞이했다.서정우는 하정훈 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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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28화

그는 상석에 앉아 살짝 치켜올린 눈썹 아래로 서늘한 안광을 뿜어냈다.만약 눈빛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하슬기는 이미 만 번은 능지처참당했을 것이다.하슬기 옆에 서 있던 양나정조차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그녀 역시 하정훈의 저토록 살기 어린 눈빛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방안은 히터를 틀어서 훈훈한데 분위기는 시베리아 벌판이었다.하슬기는 입술을 달달 떨면서도 하정훈의 눈빛이 너무 무서워 감히 시선을 피하지조차 못했다.그녀의 머릿속에는 단 하나의 생각뿐이었다. ‘와, 아빠 화낼 때보다 열 배는 더 무섭네.’“병원에 갔었어?”하정훈이 눈썹을 까닥이며 얼음장 같은 목소리로 물었다.짧은 한마디뿐인데 하슬기는 얼음이 되어 대답조차 할 수 없었다. 하씨 가문 사당에서 벌을 서본 적이 없는 것도 아니고 산전수전 다 겪어봤다 자부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도저히 냉정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침묵을 깬 건 양나정이었다. 그녀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슬기는 남지 씨가 다쳤다는 소식 듣고 같이 병문안 다녀온 거야. 그런데 남지 씨 사촌 언니 성격이 너무 불같아서... 다짜고짜 우리를 쫓아내더니 슬기를 산 채로 고아버리겠다고... 그 모습에 진짜 식겁했어.”양나정의 시선은 마지막 순간, 서정우에게 머물렀다.그녀는 서정우가 하슬기의 남편으로서 이 순간 나서주기를, 적어도 하슬기의 편에 서서 그녀를 두둔해 주기를 간절히 바랐다.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서정우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하정훈의 날카로운 시선이 양나정을 향했다.양나정은 그 시선이 부담스러워 고개를 숙였지만 여전히 억울하다는 듯한 태도를 유지했다. 심지어 눈가에는 그렁그렁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모두가 하정훈이 입을 열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오지훈 역시 마찬가지였다.그는 이런 상황에서 하정훈이 무슨 말을 할지 꽤나 궁금했다.양나정의 저 가련한 모습을 보고 남자라면 누구라도 마음이 약해지지 않겠는가?오지훈이 하정훈이 이쯤에서 넘어가지 않을까 생각하던 찰나, 하정훈이 다시금 차갑게 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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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29화

설령 천하를 뒤흔들 대죄를 저질렀다 해도, 집안 어른들은 그저 남들 보기에 호통치는 시늉만 할 뿐 결국엔 든든한 뒷배가 되어주었다.하지만 지금, 모두가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은 유난히 엄격했다.그 엄격함에 하슬기는 숨이 막히는 듯했다.더욱 끔찍한 것은 자신이 대체 무엇을 잘못했는지조차 알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이 살벌한 분위기에 겁을 먹은 하슬기는 말없이 눈물을 흘리며 서정우와 하정훈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대체 내가 무슨 엄청난 잘못을 저지른 건데? 죽더라도, 왜 죽는지 알고 죽어야 할 거 아니야.”서정우는 깊은숨을 내쉬고 이마를 짚으며 하슬기를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았다.“네가 아직도 큰소리를 칠 정신이 남아 있어?”하슬기는 마치 쏟아지는 오물을 뒤집어쓴 듯 억울했지만, 누구에게 하소연할 수도 없었다. 모두가 저런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데 차라리 벽에 머리를 박고 싶었다.그녀는 망연자실한 채 눈물을 쏟으며 오빠를 바라보았다.“오빠, 내가 뭘 잘못했는데?”처음에는 혹시 자신이 서정우의 앞날에 흠집이라도 냈나 싶었지만 하정훈까지 나타난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그녀는 그저 눈물 젖은 눈으로 하정훈을 바라보며 제발 이 고통스러운 시간이 어서 빨리 지나가기를 간절히 바랐다.하지만 하정훈은 그녀와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은 듯했다.그는 가볍게 서정우를 쳐다보았고 서정우는 곧 그 뜻을 알아차리고는 하슬기를 노려보며 호통을 쳤다.“너랑 양나정, 둘이 병실 가서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거야? 너희가 휘젓고 간 뒤에 남지 상처가 다시 터졌어! 얌전히 치료받던 사람을, 너희가 다녀간 뒤로 사경을 헤매게 만들었다고! 너랑 양나정, 도대체 얼마나 더 악랄하게 굴어야 형님이 송남지와 결혼한 걸 받아들일래? 정신 차려, 양나정 그 여자는 형님한테 아무것도 아니야!”이 순간, 거실에 숨어 차를 내리고 있던 양나정은 응접실의 대화를 생생하게 들었고 차를 따르는 그녀의 손은 떨렸다.하슬기는 눈물마저 멈춘 채 눈을 크게 뜨고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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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30화

하슬기는 그 말에 화들짝 놀랐다. 그녀는 하정훈의 속뜻을 알았다.바로 그 속뜻을 알기에, 그녀는 이렇게까지 일이 커진 이유에 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하슬기는 분한 마음을 억누르지 못하고 떠나려는 하정훈의 소매를 붙잡고 코까지 실룩거리며 따졌다.“오빠, 고작 남지 그깟 일 때문에 나를 남성 하씨 가문으로 쫓아내겠다는 거야?”하정훈은 눈을 가늘게 뜨고 붙잡힌 소매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약간의 결벽증이 있었다.매일 입는 옷은 전날 밤 집안의 하인들이 정갈하게 다려놓은 것이었다.단정했던 소매가 구겨진 모습은 그의 잔뜩 찌푸려진 눈썹과 묘하게 닮아 있었다.“남지 그깟 일? 그게 작은 일이라고?”찡그린 미간과 싸늘한 눈빛에 하정훈은 더욱 살벌해졌다. 하슬기는 흥분해서 소리쳤다.“내 결혼보다 중요한 게 세상에 어디 있어! 오빠는 하씨 가문 사람이고 내 사촌 오빠잖아. 큰아버지랑 우리 아빠가 친형제인데, 어떻게 내 남편한테 나를 내버리고 집으로 돌려보내는 소릴 해? 어떻게 오빠가 나한테 이럴 수 있느냐고!”하슬기가 흥분하고 두려워하는 이유는 하정훈이 강경하게 나오면 정말로 남성으로 쫓겨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그녀는 떨리는 입술로 말했다.“오빠가 정우 씨 부추겨서 우리 정말 이혼이라도 하면 그게 하씨 가문에 얼마나 큰 오점이 될지 몰라서 이래? 나뿐만 아니라 가문 얼굴에 먹칠하는 거라고! 서씨랑 하씨, 두 집안 관계까지 틀어지면 오빠가 책임질 거야?”하슬기는 상황의 심각성을 이야기하며 하정훈을 위협하려 했다.하지만 하정훈은 이 호화 아파트 단지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부터 모든 이해관계를 이미 꿰뚫고 있었다.그는 하슬기를 내려다보는 듯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얇은 입술 끝에 싸늘하면서도 단호한 미소를 걸었다.“네가 좀 더 일찍 정신을 차렸더라면 양나정이랑 그런 험한 짓은 안 했을 텐데, 아쉽게도 넌 늘 너무 늦게 깨닫는구나.”하정훈은 잠시 멈칫하더니 말을 이었다.“하슬기, 이건 마지막 경고야. 삼촌, 숙모는 네 편이겠지만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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