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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가면을 쓴 남편: Chapter 781 - Chapter 7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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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81화

잠시 멍하니 있던 찰나, 송남지가 웃으며 다가와 박재용의 휠체어 곁에 서서 인사를 건넸다.“임승아 씨, 참 우연이네요.”임승아는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그러게요, 정말 우연이네요. 송남지 씨는 라인국에서 근무 중이신가요, 아니면 여행 오신 건가요?”송남지의 얼굴에는 예의 바르면서도 적당한 거리감이 서려 있었다.이제 그녀는 전남편의 새 연인을 마주하고도 평온을 유지할 만큼 의연해져 있었다.“아니요, 여기서 일하는 건 아니고 출장차 잠시 왔어요.”임승아는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갈 의지가 없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들고 있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점원에게 돌려주며 툭 내뱉었다.“미안해요, 카페인이 든 건 못 마셔서요. 찬 것도 의사 선생님이 웬만하면 피하라고 하셨거든요.”커피를 받아 든 점원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아유, 제가 눈치가 없었네요! 하 대표님과 함께 왔을 때 알아봤어야 했는데. 혹시 임신 소식이라도 있는 건가요?”‘임신이라니?’박재용과 송남지의 미간이 동시에 좁혀졌다.이 소식은 마치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았다. 분명 ‘일기예보'는 비를 예고했건만, 눈부시게 푸른 청명한 하늘 아래서 맞닥뜨린 벼락은 도저히 익숙해질 수 없는 공포였다.임승아는 잠시 멈칫하더니 수줍게 미소 지었다.“네, 요즘 사실 아이를 가질 준비를 하고 있어서요...”그 순간 박재용은 더는 참을 수 없었다.송남지가 겪어야 할 이 황당한 상황과 상대의 가식적인 태도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던 것이다.“와, 하정훈 씨가 데려다줬나요? 그 사람은 어디 있죠? 단단히 단속하셔야겠어요. 결혼 생활 중에 바람피워 그쪽을 만난 사람이니, 그쪽이 임신했다고 해서 딴눈 안 판다는 보장이 없잖아요. 원래 세컨드가 제일 겁내는 건 서드라잖아요?”매장 직원들은 휠체어에 앉은 이가 박재용임을 알아보고는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질까 봐 다들 멀찌감치 물러나 눈치만 살폈다.“자기 앞마당이라고 아주 날뛰는군. 박재용 씨는 역시 듣던 대로 들개 같아.”그때 매장 입구에 하정훈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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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82화

박재용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쳐 지나갔다.자신의 치부를 들킨 듯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송남지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말을 이었다.“하씨 가문의 예절 교육이 서경에서도 유명한데, 그 집안 자제분께서 별명의 차이를 모르시나 보죠? 친구 사이엔 친근함의 표시지만, 타인이 부르면 비아냥이고 시비라는 걸요.”송남지는 친구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온몸의 가시를 세운 고슴도치처럼 날 선 눈빛으로 하정훈을 쏘아보았다.임승아는 하정훈이 밀리는 형국이 불만스러웠는지 대화에 끼어들었다.“송남지 씨, 왜 이렇게 공격적으로 말씀하세요? 하정훈 씨와 박재용 씨도 구면인데, 친구라고 볼 수 있지 않나요?”송남지는 서늘한 냉소를 띠며 단호하게 맞받아쳤다.“얼굴 좀 안다고 다 친구인가요? 임승아 씨는 참 순진하시네요.”임승아는 말문이 막혔다. 하정훈이 나서주지 않으면 상황을 되돌릴 수 없음을 깨달은 그녀는 하정훈에게 도움의 눈길을 보냈다.하지만 하정훈은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았다.그의 시선은 줄곧 송남지에게 머물러 있었고 몇 초가 흐른 뒤에야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그래, 네 말이 맞아. 나와 박재용 씨는 친구가 아니니 내가 별명을 부르는 건 결례였어.”말을 마친 하정훈은 짧게 숨을 들이켜고는 그제야 임승아를 돌아보며 차갑게 내뱉었다.“갑시다.”임승아는 멍하니 서 있었다.그녀가 알던 하정훈은 그 누구 앞에서도 결코 고개를 숙이는 법이 없는 남자였기에, 지금의 모습은 너무나 낯설었다.하정훈은 그 정도 지위라면 설령 자기가 틀렸더라도 남 앞에서 기세가 꺾일 사람이 아니었다.그런데 유독 송남지 앞에서는 달랐다.임승아가 멍하니 서 있자 하정훈은 미간을 찌푸리며 낮게 물었다.“아직 멀었어요?”하정훈의 비위를 거스를 수 없었던 임승아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떨구며 대답했다.“다 끝났어요.”하정훈은 어두운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단나무 지팡이를 짚고 서둘러 매장을 나섰다.송남지는 모든 기운을 쏟아부은 듯 박재용의 휠체어에 살짝 몸을 기대었다.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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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83화

“남지 씨는 정말 다른 여자들과는 다르시네요.”박재용은 어머니와 쇼핑하던 때를 떠올렸다. 위아래 층을 훑고 안팎을 살피며 대여섯 시간을 족히 걸었던 기억들을 말이다.그는 여전히 감탄을 금치 못한 채 자신의 카드를 내밀었다.“남지 씨는 참 손이 안 가는 스타일이네요. 나중에 내 심장이 다 나으면 그냥 나랑 사귈래요?”송남지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싫어요. 라인국에서 재용 씨 별명이 좀 별로네요.”박재용의 안색이 금세 나빠졌다.“하정훈도 날 가만 안 두더니, 남지 씨까지 이러기예요?”송남지가 웃음을 터뜨렸다.“우린 친구니까 별명 정도는 언급할 수 있죠.”결제를 마친 박재용은 신사답게 쇼핑백을 건네받았다. 그러고는 자신의 별명에 대해 못내 아쉬운 듯 설명을 덧붙였다.“어릴 때부터 심장병 때문에 제대로 놀지도, 공부에 집중하지도 못했어요. 그래서 성인이 되자마자 라인국에서 내로라하는 망나니 재벌 2세들과 어울려 다녔죠. 술 마시고 싸우며 사회에 도움 안 되는 짓만 골라 했거든요. 그래서 그때 얻은 별명이 들개였어요.”송남지는 박재용의 휠체어를 밀며 쇼핑몰 밖으로 향했다.“이해해요.”송남지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박재용은 씁쓸하게 미소 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정말 이해하세요? 아니, 이해 못 하셔도 괜찮아요. 남지 씨는 평생 말 잘 듣고 성적도 좋은 ‘엄친딸’이었다면서요. 그런 분이 나 같은 사람을 정말 이해할 수 있겠어요?”송남지가 참지 못하고 웃음을 지었다.“꼭 같은 처지여야만 타인을 이해할 수 있나요? 내가 공감 능력이 좀 좋은 편이거든요. 재용 씨가 심장병과 죽음의 공포에 얼마나 시달렸을지 생각하면, 어떤 행동을 했든 그건 불안감에 휩싸여 저지른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요.”박재용은 송남지의 깊은 속내에 가슴이 뭉클해졌다.동시에 하정훈이 정말 나쁜 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제정신인 사람이라면 누굴 선택할지 답이 딱 나오는데, 그 인간은 새 여자가 좋다고 조강지처를 버렸으니 말이다.한편, 하정훈은 주차장으로 직행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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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84화

임승아는 애써 침착한 척 고개를 돌려 눈가에 미소를 띠며 하정훈을 바라보았다.“하정훈 씨,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가요?”뒷좌석에 앉은 하정훈의 얼굴은 고귀하면서도 엄숙했다.임승아는 그를 한 번 힐끗 보고는 바로 시선을 거두었다.하정훈의 그런 눈빛은 언제나 사람을 위축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고요한 차 안에서 하정훈의 낮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고 그 말투에는 불쾌함이 서려 있었다.“왜 임신한 척을 한 거죠?”임승아는 잠시 멍해졌다가 몇 초 뒤 다급하게 해명했다.“저는 그런 뜻이 아니었어요. 그저 당시 브랜드 매장 직원이 그렇게 말하길래 상황에 맞췄던 것뿐이에요. 마침 송남지 씨가 있길래 그렇게 하면 남지 씨가 더 빨리 마음을 정리하지 않을까 생각했어요.”하정훈의 얇은 입술이 말려 올라가며 모든 걸 꿰뚫어 보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그 미소에 임승아는 등골이 오싹해졌다.마치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지저분한 생각들이 순식간에 발각된 것만 같았다.“난 남지가 마음을 접길 바랐고 실제로도 그렇게 됐어요. 그런데 승아 씨가 이러는 건 남지를 괴롭히는 것밖에 안 돼요.”마지막 문장을 내뱉는 하정훈의 눈동자에는 날카로운 서슬이 퍼랬다.임승아는 자신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했다.“전... 전 아니에요. 정말 아니에요. 하정훈 씨, 제가 송남지 씨에게 상처를 주려 했다고 생각하신다면 오해예요. 전 언제나 남지 씨를 존중해 왔는걸요...”하정훈은 임승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잘랐다.“승아 씨의 존경이라는 게 김 비서에게 마음대로 말을 흘리게 하고 성루이야 병원에 나타난 이유가 내가 그쪽의 불임 치료를 돕기 위해서라고 꾸미는 겁니까?”임승아는 갑자기 할 말을 잃었다.어떻게든 설명해야 했지만, 어떤 핑계를 대더라도 하정훈에게는 전부 간파당할 것 같았다.하지만 임승아는 포기하지 않고 감정을 추스른 뒤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하정훈 씨, 송남지 씨가 당신의 병명을 알게 될까 봐 걱정돼서 그랬던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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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85화

임승아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송남지에게 다시 가서 이 일을 해명하라니, 그건 제 손으로 제 뺨을 때리는 꼴이 아닌가.그녀가 입을 떼지 못하자 하정훈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물었다.“왜요? 못하겠어요?”임승아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그런 건 아닌데... 어차피 소문도 다 났는데 그냥 이대로 두는 게 낫지 않을까 해서요. 혹시라도 송남지 씨가 하정훈 씨에게 미련이라도 남았으면 어떡해요? 오해하게 두는 게 차라리 마음 정리엔...”하정훈은 가차 없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벌써 4개월이 지났어요. 그동안 그 사람은 나나 우리 가족에게 단 한 번도 연락한 적이 없는데 그게 미련이 남은 사람의 행동이라고 생각하세요?”처음 그가 사라졌던 건 갑작스러운 발병 때문이었고 결국 그녀의 곁을 떠나기로 한 건 뇌종양 때문이었다.자신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송남지가 감당하지 못할까 봐, 그는 이별이라는 모진 수단으로 그녀의 사랑과 걱정을 강제로 비워내려 했다. 하지만 이제 보니 송남지는 이미 그 지독한 감정의 굴레에서 완전히 벗어난 듯했다.그렇다면 더 이상 누군가에게 감정을 소모하며 불쾌해할 이유도 없었다.적어도 하정훈의 눈에, 아까 매장에서 임승아가 보인 태도는 송남지를 역겹게 만들기에 충분했으니까.임승아는 더 이상 반박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 기회를 봐서 송남지 씨에게 다 설명할게요.”하정훈은 차창을 내리며 나직이 명령했다.“서윤아, 출발해.”밖에서 오래 서 있느라 다리가 저려오던 김서윤은 다리를 주무르며 서둘러 운전석에 올랐다.“대표님, 호텔로 모실까요?”김서윤이 묻자 하정훈은 대답 대신 시트의 기댄 채 조용히 눈을 감았다.김서윤은 뒷좌석에서 한참 동안 대답이 없자 걱정스러운 듯 뒤를 돌아보았다.“대표님, 머리가 또 많이 어지러우신가요?”하정훈은 손을 들어 가볍게 내저으며 괜찮다는 표시를 했다.지난 4개월 동안 그는 온몸을 잠식하는 듯한 이 현기증에 이미 익숙해진 터였다.몇 분이 지나서야 그의 얼굴에 겨우 핏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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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86화

MJ 쇼핑몰 입구. 박씨 가문의 차가 보란 듯이 서 있다가 박재용과 송남지를 태우고 나서야 유유히 사라졌다.그 모습에 구경꾼들의 눈길이 멈추지 않았다.이런 최고급 쇼핑몰 앞에 대담하게 차를 세울 수 있는 이는 흔치 않았기 때문이다.박재용은 전시 교류회까지 동행하겠다고 고집을 피웠지만 송남지는 단호하게 거절했다.“교류회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혹시라도 재용 씨 신변에 문제라도 생기면, 전 평생 라인국에 남아서 죗값을 치러야 할지도 몰라요.”박재용은 입술을 삐죽이며 대꾸했다. “뭘 그렇게 겁을 주세요? 우리 집안도 나름 상식적이라니까요. 기껏해야 내 장례식이나 지키게...”죽음을 암시하는 말에 송남지의 가슴속에 서늘한 공포가 밀려들었다.그녀는 박재용을 매섭게 노려보며 말했다.“그런 불길한 소리 좀 하지 마세요!”박재용은 장난스레 웃었다.“와, 나를 그렇게나 신경 써주시는 거예요?”송남지는 말없이 고개를 떨구고 생각에 잠겼다.한참 뒤 그녀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재용 씨, 난 사실 살면서 누군가를 영영 떠나보내는 일을 겪어본 적이 거의 없어요. 윤씨 가문 일 말고는요.”그녀의 슬픈 눈동자를 마주하자 박재용도 더는 농담을 이어갈 수 없었다.그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송남지를 바라봤다.“걱정 마세요.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잖아요. 어떻게든 끝까지 살아남을게요.”차가 박씨 저택에 도착했을 때 송남지의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일 때문인가 싶어 확인해 보니 최미경이었다.경호원들이 박재용의 하차를 돕는 사이 송남지는 한적한 수영장 쪽으로 달려갔다.“전화 좀 받고 올게요.”주변이 고요해진 것을 확인하고서야 그녀는 조심스럽게 최미경의 전화를 받았다.“남지야, 요즘 많이 바쁘니?”최미경의 목소리에는 평소보다 깊은 피로와 걱정이 서려 있었다.송남지는 햇살을 받아 뜨겁게 달아오른 수영장을 바라보았다. 물결이 눈부시게 일렁거려 눈을 제대로 뜨기조차 힘들었다.“일은 괜찮아요. 요즘 출장이 잦아서 지금은 라인국에 와 있어요! 여기 제비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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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87화

최미경이 덧붙였다.“정훈이 시간도 꼭 확인해 봐. 성은 그룹을 이끄는 사람이니 워낙 일이 많잖니. 상의해서 날 잡고 꼭 같이 오렴.”“네.”송남지가 나직하게 대답했다.일상적인 안부를 주고받은 후에야 통화가 끝났다.박재용은 유리창 너머로 수영장 가에 서 있는 송남지를 지켜보고 있었다. 라인국의 강렬한 태양 빛을 받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금색 아우라를 두른 듯 눈부셨다.그는 곁에 있던 도우미에게 무심결에 한마디를 던졌다.“참 예쁘죠?”도우미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한참 뒤에야 수영장 구석에 서 있는 송남지를 발견하고는 웃으며 대답했다.“송남지 씨는 정말 미인이시네요. 도련님이 좋아하실 만합니다.”박재용은 눈을 가늘게 뜨며 미소 지었다.“수정 이모, 나를 너무 속물로 보시는 거 아니에요? 내가 얼굴만 보는 남자로 보여요?”도우미 이수정은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도련님, 맞으시잖아요. 예전에 라인국에서 염문설이 났던 아가씨들도 하나같이 절세미인이었죠. 하지만 다들 화려하기만 했는데 송남지 씨는 참 단아하고 성격도 좋아 보이시네요. 도련님은 언제쯤 송남지 씨의 마음을 얻으실 건가요? 박씨 가문의 큰 경사가 될 텐데 말이에요.”박재용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글쎄요, 난 아마 안 될 거예요. 저 사람 마음속엔 이미 다른 사람이 있거든요.”겉으론 하정훈을 쓰레기라고 몰아세우는 박재용이었지만, 사랑에 빠진 여자의 눈빛이 어떤 말을 하는지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늘 차갑고 도도한 송남지였음에도 하정훈과 마주하는 찰나의 흔들림까지는 미처 숨기지 못했다.아무리 억누르고 감추려 애써도 어떤 감정들은 결국 제 자취를 드러내기 마련이었다.거실로 걸어 나온 송남지가 말을 건넸다.“샤워하고 옷 좀 갈아입고 올게요.”화동에서 라인국까지 비행시간이 아주 길지는 않았지만 엄연히 몇 시간이나 걸리는 국외 노선인 데다 라인국 특유의 가혹한 무더위까지 더해지니 온몸이 진득하게 끈적거렸다.도우미는 그녀를 욕실로 안내하며 새 수건을 준비해주고 새로 산 옷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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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88화

라인국, 국제무역센터 고층.통창 너머로 찬란한 햇살이 부서져 내렸다.라인국의 태양은 언제나 눈 시리게 찬란한 듯했다.전시장 내부는 사람들로 북적이면서도 기묘할 만큼 정숙했다.전 세계 각지에서 온 업계 관계자들이 모여 있었으나, 다들 약속이나 한 듯 목소리를 낮춰 속삭이며 조용히 대화를 나눴다.송남지는 방명록에 자신의 이름과 소속 전시관을 적어 넣었다.명단에는 우리글 이름이 드물게 섞여 있었고 대부분은 영문이었다.그래서 나란히 적힌 두 개의 이름이 더욱 그녀의 눈에 밟혔다.‘하정훈도 여길 왔다고?’고개를 들어 넓은 홀을 바라보니, 화려한 옷차림과 잔을 부딪치는 사람들 사이로 유독 인파가 몰려 있는 곳이 눈에 띄었다.하정훈은 뭇사람들의 칭송을 받는 별처럼 중심에 둘러싸여 있었다.깍듯하지만 다가갈 수 없는 하정훈 특유의 미소가 보였는데 표정 하나하나를 읽을 순 없었지만 뿜어져 나오는 기품은 여전했다.그리고 그의 곁에는 임승아가 서 있었다.주변 사람들은 모두 하정훈과 적당한 안전거리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오직 임승아만이 그에게 바짝 밀착해 있었다.송남지가 시선을 거두려 할 때, 등 뒤에서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송남지 씨?”송남지가 고개를 돌려보니 낯이 익은 얼굴이었다. 어디선가 본 듯했지만 정확히 기억나진 않았다.상대는 그녀의 속마음을 간파한 듯 웃으며 먼저 인사를 건넸다.“재능 있는 분들은 기억력이 안 좋다더니 정말 그런가 보네요. 우리 오늘 오전에 만났잖아요.”그제야 송남지는 뒤늦게 깨달았다.오늘 오전 박씨 저택에서 박명규가 소개했던 라인국의 청년 엘리트 중 한 명이었다.하지만 더 곤란한 건, 박명규가 너무 많은 사람을 소개한 탓에 그녀가 단 한 명의 얼굴도, 이름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그녀는 멋쩍은 미소로 난감함을 얼버무리려 했다.상대는 훤히 보이는 그녀의 당혹감을 눈치채고 다시 한번 자신을 소개했다.“송남지 씨, 제 이름은 김신예라고 합니다. AI 관련 사업을 하고 있고요. 아침에 아저씨께서 부르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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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89화

김서윤이 이렇게 말하자 다른 사람들도 더는 방해하기가 어려워, 아첨의 말들은 다음 기회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사람들이 모두 눈치껏 자리를 뜨자, 하정훈은 다과가 마련된 곳에 있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시야를 가리는 것이 없으니 그의 눈빛은 한층 더 깊어졌다.김서윤이 곁에서 상기시켰다.“대표님, 전시회 측에서 특별히 귀빈 휴게실을 마련해 두었습니다. 지금 바로 가실 수 있습니다.”하정훈은 말이 없었다.임승아는 하정훈의 시선을 따라가며 입을 열었다.“송남지 씨에게 가서 오해를 풀어드릴 생각이었는데, 지금 보니 좀 바빠 보이네요. 젊은 인재와의 좋은 시간을 제가 방해할까 염려됩니다.”그제야 김서윤도 두 사람의 시선을 따라 그곳을 보았다.다과 코너에서 어떤 젊은 남자가 송남지와 즐겁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고 두 사람은 어느새 전시회 담론에서 벗어나 어떤 디저트가 더 맛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눈치 없는 김서윤이 임승아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송남지 씨가 인기가 정말 많네요.”임승아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김 비서님이 먼저 대표님을 휴게실로 모시는 건 어떨까요? 저는 여기서 좀 기다리다가 두 분 대화가 끝날 때쯤 가겠습니다.”그제야 하정훈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그럴 필요 없어요. 아직 피곤하지 않으니, 나와 같이 갑시다.”임승아는 순간 멈칫했다. 하정훈이 자신이 송남지에게 직접 해명하는 것을 꼭 들어야만 하겠다는 사실을 미처 몰랐던 것이다.자단목 지팡이가 바닥에 부딪히는 맑은소리가 울렸다.이 소리가 들렸을 때 송남지는 김신예와 전시회 다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역시 국제 교류회답네요. 디저트마저 다른 곳보다 훨씬 맛있어요.”김신예는 엄지를 치켜세우며 송남지를 칭찬했다.“보통 여자분들은 몸매 관리다 뭐다 해서 이런 디저트는 건강에 해롭다며 입도 안 대시던데, 송남지 씨는 전혀 개의치 않으시네요.”“송남지 씨는 원래부터 남다른 분이시죠.”이 목소리의 주인은 임승아였다.김신예는 호기심에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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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90화

하정훈은 송남지의 말을 듣고 순식간에 얼굴이 굳어졌지만 임승아는 송남지의 말뜻을 파악하는 데 몇 초가 더 걸렸다.그녀가 머뭇거리며 대답했다.“마음에 드는 게 아니라, 그냥 그렇게 훌륭한 분이 송남지 씨한테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서요.”송남지는 임승아의 눈빛에 담긴 가식적인 칭찬을 한눈에 간파했다. 그녀는 여전히 표정 없는 미소를 지으며 임승아를 똑바로 응시했다.“저한테 중매라도 서주러 오신 거라면, 굳이 여기서 오지랖 부릴 필요는 없을 것 같네요. 더 할 말씀이 없으시다면 이쯤에서 대화는 끝내도 될 것 같은데요.”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고 김신예 쪽을 바라봤다.“김신예 씨 같은 분이 저에게 어울린다고 생각하시는 거 아니었어요? 그렇다면 눈치껏 행동하세요. 저랑 김신예 씨의 만남을 방해하지 말고요.”말을 마친 송남지가 막 몸을 돌리려 했다.하지만 발을 떼는 순간, 누군가 손목을 낚아챘다.전시장의 냉기보다 더 싸늘하게 차가운 촉감이었다. 송남지는 뒤를 돌아봤다. 당연히 임승아가 자신을 붙잡았을 거라 예상했지만, 그녀의 손목을 붙잡은 이는 뜻밖에도 하정훈이었다.하정훈의 손끝에서 전해지는 차가운 감촉에 송남지의 미간이 더욱 굳어졌다.하정훈도 이내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황급히 손을 거두었다.송남지의 물음에는 차가운 기운이 서려 있었다.“하정훈 씨, 무슨 일 있으세요?”“아니, 아무것도 아니야.”하정훈의 심박수는 평소보다 높게 뛰고 있었다.임승아가 하정훈이 이렇게 말을 더듬는 것을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그녀는 송남지의 옆으로 다가서며 말했다.“송남지 씨, 제가 할 얘기가 있는데, 저의 임신에 대한 거예요.”송남지는 기가 막혔다.‘대체 이 무슨 황당한 상황이지? 전남편의 현 여자친구가 임신했다고 내 앞에 와서 자랑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혹시나 나에게 아이를 갖지 못한다고 비웃기라도 하면서 이 기형적인 세상을 완벽하게 마무리 지으려고?’송남지의 미간은 잔뜩 찡그려져 더욱 깊은 주름을 만들었다.“그쪽의 임신 소식을 저한테 왜 말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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