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mua Bab 가면을 쓴 남편: Bab 401 - Bab 410

580 Bab

제401화

차 안에서 하정훈은 사진을 소중하게 챙겨 넣었다.송남지는 휴대폰을 꺼내 예약해 둔 프라이빗 온천을 검색한 뒤, 하정훈이 길을 찾을 수 있도록 위치 정보를 전송했다. “나름대로 고심해서 고른 곳인데 괜찮을 거예요. 거기로 찍고 가요.”칠흑 같은 밤, 산길은 유독 복잡하고 시야 확보도 어려웠다.내비게이션 없이는 제아무리 아는 길이라도 헤매기 십상인 곳이다.하지만 하정훈은 내비게이션을 확인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설마 이 남자가 평소에 즐겨 찾는 곳을 우연히 고른 걸까?’의아해하던 찰나, 하정훈이 불쑥 화제를 돌렸다.“오지훈 녀석, 내가 무봉산 온천에 다니는 건 말했으면서 정작 왜 좋아하는지는 말 안 했나 보네?”송남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네, 구체적인 얘기는 안 했어요.”하정훈은 피식 웃으며 익숙한 듯 핸들을 꺾었다.차가 나아갈수록 시야는 점차 밝아졌고 주변 풍경도 시원하게 트이기 시작했다.하정훈이 설명했다.“한동안 불면증이 꽤 심했어.”송남지가 윤해진과 결혼한다는 소식을 접했던 바로 그 무렵이었다. 지독한 불면증은 그의 일상과 업무를 잠식했고 급기야 용하다는 심리 상담의들을 찾아다닐 정도로 상태가 악화되었던 시기였다.송남지는 미간을 좁히며 걱정스레 물었다.“지금도 그래요?”하정훈은 고개를 돌려 조수석에 앉은 송남지를 지그시 바라보았다.“지금이야 그럴 리가 없지.”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고 익숙한 향기가 감도니 그는 당장이라도 깊은 잠에 빠져들 수 있을 것만 같았다.“그땐 불면증이 너무 심해서 견디기 힘들 때면 혼자 차를 몰고 서경 외곽을 정처 없이 돌곤 했어. 그러다 어느 날 홀린 듯 무봉산까지 오게 됐고 이 길을 따라 무작정 달렸지.”송남지가 고개를 들자 눈앞에 탁 트인 광경이 펼쳐졌다.울창한 숲에 둘러싸인 채 풀벌레와 산짐승 소리가 들려왔다.하정훈은 부드럽게 차를 세웠다.송남지의 시야 가득 쏟아질 듯한 별 무리가 들어왔다.하늘 끝에 걸린, 그러나 손에 닿을 듯 가까운 별들이 찬란하게 빛났다.도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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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2화

애틋한 여운이 서린 그의 뜨거운 시선이 송남지의 뺨을 화끈거리게 했다.별들이 반짝이는 가운데 차 안의 온도는 급격히 달아올랐고 하정훈이 몸을 기울이자 두 사람은 순식간에 서로에게 엉겨 붙었다.촉촉한 입맞춤이 송남지의 목덜미에 점점이 내려앉자 황홀한 감각이 파도처럼 밀려왔고 짜릿한 전율이 서서히 차올라 송남지의 이성을 온통 지배했다.그녀가 하정훈의 허리를 감싸 안고 그의 귓가에 붉은 입술을 밀착시킨 채 숨결 섞인 뇌까림을 흘리자 마치 그의 혼을 쏙 빼놓는 것만 같았다.그녀를 내려다보던 남자는 순식간에 이성을 잃고 말았다. 고고한 신사에서 본능에 충실한 남자로 변하는 데에는 그녀의 손길이 그의 등줄기에 닿는 그 짧은 일초면 충분했다.바람이 불어오고 흔들리는 나무 그림자와 차체의 진동이 절묘한 리듬을 맞췄고 밝은 달 주위로 흩뿌려진 별들이 그 순간 기이할 정도로 찬란하게 반짝였다.차 안의 두 사람은 서로를 끌어안은 채 잠에 빠져들었고 밤하늘의 뭇별들도 두터운 구름 층 뒤로 숨어들었다. 마치 송남지를 안고 있는 하정훈이 그러하듯, 그는 구름이었고 그녀는 별이었다....무봉산에서 돌아온 뒤 송남지는 다시금 숨 가쁜 업무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수많은 신인 작가들 속에서 진주를 골라내는 일과 겨울 전시회 준비에 매진하느라 갤러리에서 숙식이라도 해결하고 싶은 심정이었다때마침 성은 그룹의 연례 프로젝트도 시동을 걸어, FunAI와 협력해 요즘 젊은 층이 열광하는 트렌디한 전기차를 제작하는 작업이 시작되었다.하정훈 역시 매일같이 회사 회의실에 갇혀 온갖 난해한 안건들을 처리하느라 분주했고 주말조차 회사에서 야근을 강행해야 했다.모처럼 민지현과 겨울 전시회의 테마를 확정 짓고 이른 퇴근을 준비하던 송남지에게 민지현이 농담을 건넸다.“관장님, 갤러리 일이 이렇게 고될 줄 알았다면 처음에 시작이나 하셨겠어요?”민지현은 갤러리 안팎으로 뛰어다니느니 차라리 하씨 가문의 정원에서 예쁜 장식품처럼 편하게 지내는 게 낫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최소한 이런 자질구레한 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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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3화

초겨울 바람이 제법 매섭게 불어왔다.송남지가 목에 두른 스카프를 단단히 여미는 순간, 등 뒤에서 부스럭거리는 인기척이 들렸다.민지현 일행인 줄 알고 인사를 하려 뒤를 돌았던 송남지는 그만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시야에 들어온 것은 창백하다 못해 섬뜩할 정도로 늙어버린 낯선 얼굴이었기 때문이다.그 얼굴은 온통 살기와 혐오로 뒤덮여 있었다.송남지는 본능적인 공포에 질려 뒷걸음질 치다 이내 눈앞의 인물이 누구인지 깨달았다.한때 서경을 호령하며 위세를 떨치던 손윤영이었다.하지만 지금의 그녀에게서 과거의 기세나 영광은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큰 수술을 겪은 탓인지 피로에 찌든 얼굴과 생기라곤 없는 느릿한 움직임은 마치 살아있는 시체 같은 느낌을 주었다.해가 완전히 지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지 캄캄한 밤이었다면 기절초풍했을 몰골이었다.“손윤영 씨? 당신 병원에서 요양 중인 거 아니었어요?”송남지는 당혹감을 누르며 조심스레 손윤영과의 거리를 벌렸다.당장 해를 끼칠 힘은 없어 보였지만, 워낙 독한 사람이니 좋은 의도로 이곳을 찾았을 리 만무했다. 손윤영은 흰자위가 흉하게 드러날 정도로 눈을 부릅뜨고 으드득 이를 갈며 시선만으로도 송남지를 난도질할 기세로 노려보고 있었다.“전부 너 때문이야, 이 몹쓸 년아! 네가 우리 윤씨 가문을 망쳤어! 너 같은 재앙 덩어리 때문에 집안이 이 꼴이 됐는데, 넌 남자 잘 물어서 보란 듯이 갤러리나 열고 희희낙락해? 얼굴 반반한 게 재앙이라더니 딱 너를 두고 하는 말이구나!”송남지는 인상을 찌푸렸다. 원래 기분 좋았던 하루가 갤러리를 나서자마자 꼬여버린 것이다. 정말 최악이었다.송남지는 반쯤 미쳐버린 손윤영을 싸늘하게 곁눈질하며 콧방귀를 뀌었다. 멸시와 조롱이 가득한 태도였다.“윤씨 가문이 몰락한 건 자업자득이에요. 그 집구석에 억울한 사람이 있다면 비행기 사고로 죽은 윤강현 씨뿐이겠죠. 당신이 윤해진이랑 손잡고 허튼수작만 안 부렸어도 허상미 씨가 죽거나 당신들이 이 지경까지 추락하진 않았을 거예요.”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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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4화

재스민 갤러리 앞 계단이 붉은 피로 흥건하게 물들었다.손윤영은 미친 사람처럼 웃어젖혔다.“네가 감히 윤씨 가문을 이 꼴로 만들고도 살기를 바랐어? 살아남는다 해도, 이번 생은 물론 다음 생까지 절대 아이를 못 갖게 만들어 줄 거야!”복부를 뚫고 들어온 격통에 송남지는 순식간에 축축하고 아득한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민지현은 갤러리 유리문 앞에 선 채 눈앞의 참상을 믿을 수가 없었다.송남지가 힘없이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완전히 이성을 잃고 광기에 휩싸인 손윤영의 모습에, 일행 중 누구도 선뜻 다가서지 못한 채 공포에 떨고 있었다.모두가 다칠까 봐 두려워 주저하던 찰나, 민지현은 어디서 그런 용기가 솟았는지 손윤영에게 달려들었다.그녀는 손윤영이 쥔 서슬 퍼런 칼을 낚아채듯 빼앗아 팀원들이 있는 쪽으로 멀리 던져버렸다.아주 멀리 말이다.챙그랑!칼이 바닥에 떨어지며 날카로운 파열음을 냈다.그제야 팀원들도 서둘러 달려와 칼을 수거하고 손윤영이 더는 난동을 부리지 못하게 제압했다.상황이 정리되어서야 민지현은 급히 몸을 숙여 송남지의 머리를 받쳐 안았다.“관장님, 괜찮으세요? 제 말 들리세요?”송남지는 아주 아득하고 깊은 꿈을 꾸는 듯했다.꿈속의 풍경은 흐릿하기만 했다.피가 흐르고 있는 것 같았고 그 붉은 핏빛이 저녁노을을 온통 물들이고 있었다. 주변에선 다급한 비명들이 들려왔다. 의식이 점차 멀어지는 와중에 누군가 웅성거리는 소리가 귓가를 스쳤다.“하 대표님은 아직 안 오셨대. 듣자 하니 FunAi의 홍보팀장이라나 뭐라나, 그 여자랑 같이 출장 가려던 참이었다던데...”송남지가 수술실로 실려 들어간 뒤, 민지현은 자신의 손에 흥건히 묻은 선혈을 내려다보았다.그녀는 이를 악물었지만 심장의 떨림은 멈추지 않았다.“그 미친 할망구, 겉보기엔 비실비실해 보이더니 어디서 그런 힘이 나와서 사람을 죽이려 들어...”패닉에 빠진 팀원들이 민지현의 팔을 붙잡고 발을 동동 굴렀다.“이걸 어떡해요? 관장님 잘못되시는 거 아니죠? 우리 겨울 전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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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5화

마침 구급차에 오를 때쯤 ‘엄마'라고 저장된 번호로 전화가 걸려 왔었는데, 그 벨 소리의 주인공은 현재 응급실 층이 떠나가라 통곡하고 있는 목소리와 매우 흡사했다.민지현은 서둘러 그녀에게 다가갔다.“안녕하세요. 저는 민지현이라고 하는데 재스민 갤러리의 아트디렉터이자 송 관장님의 부하 직원입니다...”민지현은 오늘 밤 벌어진 사건의 전말을 빠짐없이 털어놓았다.최미경을 부축하던 여자가 분한 듯 이를 갈며 내뱉었다.“손윤영, 그 할망구가 죽지도 않고 어떻게 그런 끔찍한 짓을 저지를 수가 있어?”최미경은 사색이 되어 눈물을 쏟아내며 떨리는 목소리로 자책하듯 말했다.“오늘 윤해진이 살인을 저질렀다는 뉴스를 봤을 때부터 불길한 예감이 들었어. 낮에 남지한테 전화를 걸었다가 혹시 방해될까 봐 급히 끊었는데, 밤이 될수록 너무 불안해서 다시 전화를 걸었더니...”최미경은 끝내 오열했다.“다 내 탓이야, 전부 내 잘못이야. 내가 좀 더 일찍 왔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민지현은 최미경을 다독였다.“아주머니, 이건 아주머니 탓이 아니에요. 작정하고 덤비는 사람을 어떻게 막아요. 관장님 곁을 하룻밤 지켜드릴 수는 있어도 매일 밤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요.”슬픔에 기력이 다한 최미경이 휘청거렸지만 최보라가 재빨리 부축한 덕분에 바닥에 쓰러지는 것은 면했다.“민지현 씨죠? 전 송남지의 사촌 언니 최보라입니다.”최보라는 민지현과 짧게 인사를 나누자마자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남지 상태는 지금 어때요? 의사는 뭐라고 합니까?”사실 민지현은 최미경이 더 충격을 받을까 봐 필사적으로 손을 등 뒤로 감추고 있었다. 그녀의 손은 피범벅이 되어 있었으니 최미경이 저 피를 본다면 기절초풍할지도 모를 일이었다.민지현은 애써 상황을 낙관적으로 포장하며 입을 열었다.“칼이 들어간 깊이가 깊지 않아요. 복부 쪽이라 최악의 상황은 피했고요. 구급차도 빨리 왔고 병원도 가까웠으니까 괜찮을 겁니다.”최보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리곤 곧바로 최미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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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6화

최보라의 얼굴에 어린 짙은 의구심과 불쾌함을 감지한 민지현은 양나정과 하정훈 사이에 분명 모종의 관계가 있음을 예리하게 눈치챘지만, 그게 과연 어떤 관계일지 감히 더 깊게 상상할 엄두는 나지 않았다.애초에 재벌 2세의 순애보를 믿는다는 것도 힘든 일이었지만 철석같이 믿고 있던 환상이 깨지는 건 차원이 다른 충격이었다.최보라가 덜덜 떨리는 입술로 중얼거렸다. “도대체 얼마나 중요한 업무길래? 남지가 이 지경이 됐는데 코빼기도 안 비쳐?”만약 하정훈이 원래부터 매정한 남자였다면 최보라가 이토록 화를 내지도 않았겠지만, 과거의 하정훈은 결코 그렇지 않았다.사람 마음이, 남자의 사랑이 이렇게 하루아침에 뒤집힐 수 있단 말인가?그게 아니라면 하정훈은 줄곧 송남지에게 마음 한 조각 없었으면서 남들 앞에서만 사랑꾼 행세를 해왔던 건가?참으로 대단한 연기력이 아닐 수 없었다.가뜩이나 송남지 걱정에 속이 타들어 가던 최보라는 하정훈이 송남지를 버려둔 채 양나정과 함께 출장을 갔다는 사실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송남지는 그녀가 업어 키우다시피 한 친동생 같은 존재로 워낙 착하고 뛰어나 어릴 적부터 어른들이 입을 모아 칭찬하던 ‘엄친딸'이었다.윤씨 가문 일로 이미 생지옥을 한 번 경험했던 아이가 이번엔 칼에 찔리는 사고까지 당했는데 사람들 앞에선 그렇게 지극정성인 척하던 남자는 하필 이 순간 스캔들의 주인공인 전 여자친구와 출장을 떠나버렸다니.최보라는 가슴이 꽉 막힌 채 ‘수술 중'이라 적힌 붉은 등만 쳐다보다가 결국 이 끓어오르는 분노를 하정훈의 친구인 오지훈에게 쏟아붓기로 했다.사실 오지훈 역시 FunAI의 올해 최대 역점 사업인 전기차 프로젝트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파도처럼 쏟아지는 회의에다 파트너사가 까다롭기로 악명 높은 성은 그룹인 탓에, 오지훈은 최근 살이 몇 킬로그램이나 빠질 지경이었다.게다가 오늘은 어머니의 생신이라 모처럼 본가에 들러 주방장이 차려준 밥으로 위장을 호강시킬 참이었는데 자리에 앉자마자 최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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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7화

최보라는 기가 막힌다는 듯 대꾸했다.“오지훈, 진짜 네 머리 뚜껑을 열어서 확인해보고 싶다. 뇌 구조가 도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거야!”그녀는 분을 삭이지 못하고 쏘아붙였다.“남지가 이렇게 심하게 다쳐서 수술실에서 생사를 오가는데, 걔를 버려두고 너네 그 여우 같은 홍보팀장이랑 출장을 간다는 게 말이 돼?”오지훈은 차라리 하정훈이 최보라를 건드렸다는 걸 믿을지언정, 하정훈이 부상당한 송남지를 방치하고 양나정과 출장을 갔다는 건 죽어도 믿고 싶지 않았다.‘잠깐!’오지훈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되물었다.“송남지가 다쳤다고? 수술실에 있고? 아직 생사 확인도 안 된 상태라고?”최보라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내가 한가하게 거짓말이나 할 사람으로 보여? 난 그냥 해명을 듣고 싶은 거야. 넌 하정훈 친구고 걔랑 출장 간 여자는 네 회사 직원이잖아. 묻겠는데, 두 사람 대체 무슨 사이야?”너무 갑작스럽게 쏟아진 충격적인 소식들에 오지훈의 머릿속은 여전히 뒤죽박죽이었다. 그는 애써 생각을 정리하려 노력했다.“최보라, 내가 장담하는데 하정훈이랑 양나정은 아무 사이도 아니야. 진짜 아무것도 없어. 걔네 둘은 사귄 적조차 없다고. 일단 진정해 봐, 나도 너한테 물어볼 게 있으니까.”“진정하라고?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수술실에 누워 죽니 사니 하는 애가 너한테는 생판 남일지 몰라도, 나한테는 여동생이고 내가 업어 키운 아이란 말이야!”오지훈은 오씨 가문의 식당을 빠져나와 본가의 은밀한 곳으로 자리를 옮긴 뒤에야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보라야, 너무 조급해하지 마. 하정훈이 정말 그런 놈이라면 내가 약속할게.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널 도울 거고 남지를 대신해서 따져 물어줄게. 일단 지금 중요한 건 남지 상태잖아. 어떻게 다친 건지, 어느 병원에 있는지부터 말해줘.”최보라는 깊게 심호흡을 하며 간신히 이성을 되찾고 오지훈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오지훈은 이마를 짚으며 깊은 한숨을 내쉰 뒤 무겁게 말했다.“보라야, 잠깐만 기다려. 내가 정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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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8화

오씨 본가를 나선 오지훈은 양나정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불통이었고 하정훈의 휴대전화는 이미 꺼져 있다는 안내음만 들려왔다.업무용 휴대전화로 걸어봐도 받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순간, 오지훈은 뭔가 크게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그는 자신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양 팀장 어디 갔어? 왜 연락이 안 돼?”“양 팀장님은 하 대표님이랑 북두에 출장 가셨잖아요.”북두는 서경 외곽에 있는 공장 단지로 차로 약 3시간 거리였다.오지훈은 성은 그룹과 Fun AI 양쪽에서 사람이 파견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게 하정훈과 양나정 단둘뿐일 줄은 몰랐다.병원으로 차를 모는 오지훈의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설마 이번에 단둘이 있게 된 걸 계기로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오지훈은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에이, 설마. 하정훈은 그런 놈이 아니야.’양나정과 뭐가 있으려 했으면 진작 있었지, 굳이 지금 이 타이밍일 리가 없었다.오지훈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 최보라는 마치 상갓집 개처럼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불과 30분 전 그에게 전화를 걸어대던 기세는 온데간데없었다.응급실 복도 의자에 넋을 놓고 멍하니 앉아 있는 최보라를 보자, 오지훈의 마음 한구석에 왠지 모를 안쓰러움과 슬픔이 밀려왔다.그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최보라의 옆자리에 앉았다.곁에 있던 민지현은 단번에 오지훈을 알아봤다. 서경의 유명 인사이자 최근 화제가 된 AI 회사의 대표였기 때문이다.민지현이 놀란 눈으로 인사를 건네려 하자, 오지훈은 손을 들어 제지했다.최보라를 방해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민지현은 눈치 빠르게 입을 다물었다.잠시 후, 오지훈이 나직하게 그녀를 불렀다.“최보라?”최보라는 초점 없는 텅 빈 눈동자로 고개를 돌려 오지훈을 바라봤다.오지훈을 마주하자 최보라의 날 선 기운은 눈 녹듯 사라졌다. 그녀는 마치 상처 입고 고립된 짐승이 드디어 의지할 곳을 찾은 듯,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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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9화

이 말을 들은 최보라의 마음은 더욱 착잡해졌다.송남지가 깨어나 하정훈을 찾을까 봐 두렵고 그렇다고 당장 깨어나지 못할까 봐 겁이 나는 이 모순된 상황은 변덕스러운 남자에 대한 증오심을 극도로 치솟게 만들었다.그리고 하정훈의 친구라는 죄밖에 없는 오지훈이 최보라의 유일한 감정 배출구가 되었다.최보라가 차갑게 식은 얼굴로 고개를 돌려 오지훈을 노려보자 오지훈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방금 전까지만 해도 품에 안겨 서럽게 울던, 건드리면 부서질 것 같던 여자가 책장 넘기듯 순식간에 표정을 바꿨기 때문이다.지금의 그녀는 마치 단단한 갑옷을 두른 장수처럼 서슬 퍼랬다.퍽!최보라가 주먹을 꽉 쥐고 오지훈의 가슴팍을 세게 내리쳤다.오지훈도, 옆에 있던 민지현도 갑작스러운 상황에 멍하니 굳어버렸다.최보라는 오지훈을 집어삼킬 듯이 이를 갈며 내뱉었다.“남지는 하정훈이랑 밥 한 끼 먹어보겠다고 나갔다가 그 빌어먹을 할망구한테 칼을 맞았는데, 정작 하정훈은 스캔들 났던 전 여친이랑 오붓하게 출장을 갔다고? 이게 말이 되니? 진짜 웃기지도 않네!”민지현은 이제야 상황을 완전히 파악했다. 그 양 팀장이라는 여자가 하 대표의 스캔들 속 전 여자친구였다니...일이 이 지경이 되었으니 나중에 송 관장님이 깨어난다면 또 한 번 날벼락을 맞는 셈이었다. 그동안 곁에서 지켜본 바에 따르면 송 관장님은 하 대표님을 진짜로 좋아했기 때문이다.오지훈은 억 소리를 내며 하정훈을 향한 원망을 곱씹었다.‘야, 이 새끼야. 나중에 두고 보자. 이유가 뭐든 간에 내가 너 대신 샌드백이 되어줬잖아. 심지어 여기서 널 위해 쉴드까지 쳐주고 있다고.’“보라야, 날 좀 믿어봐. 하정훈 걔 그런 놈 아니야.”하지만 최보라에게 오지훈의 말이 먹힐 리 없었다. 그녀는 오직 자신이 듣고 본 것만 믿을 뿐이었다.그녀가 들은 건 하정훈이 양나정과 단둘이 지방으로 출장을 갔다는 사실이었고 본 것은 사고 후 몇 시간이 지나도록 코빼기도 비치지 않는 하정훈의 부재였다.“넌 하정훈 친구잖아. 당연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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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10화

오지훈조차 긴장감을 감추지 못했고 최보라는 오지훈의 팔을 꽉 움켜쥐어야 겨우 서 있을 수 있었다.그녀가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다만... 뭐죠?”의사는 마스크를 벗으며 다시 한번 낮은 한숨을 쉬었다.“찔린 부위가 자궁과 너무 가까웠습니다. 최대한 복구해 보려고 노력했습니다만, 경과는 환자분의 회복력을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보호자분들께서는 향후 환자분의 임신 확률이 매우 낮을 수도 있다는 점을 미리 알고 계셔야 합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환자분께 전할 때는 충격을 받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스럽게 말씀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최보라는 거칠게 숨을 들이켰다. 안 그래도 임신이 어려운 남지에게 이건 설상가상이나 다름없는 잔인한 처사였다.오지훈 역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중심을 잡을 수 있는 사람은 자신뿐이었기에 결코 동요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그는 최보라의 손을 꽉 움켜쥐며 다독였다.“괜찮아, 요즘 의학 기술이 얼마나 발달했는데. 그런 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거야.”민지현 역시 큰 충격을 받았다.재벌가에서 후계와 혈통이 갖는 의미가 얼마나 절대적인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서경의 상류층을 겪으며 아무리 금슬 좋은 부부라도 후사 문제로 갈등을 빚다 결국 파탄에 이르는 경우를 수없이 봐왔기에, 민지현은 속으로 깊은 한숨만 삼킬 뿐이었다.의사 또한 보호자들의 분위기가 너무 가라앉지 않도록 오지훈의 말에 맞장구쳤다.“맞습니다. 요즘 기술이 워낙 좋으니까요. 환자분 목숨만 무사하면 방법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습니다.”위로를 건넨 의사는 이어서 덧붙였다.“마취는 30분 정도 뒤에 풀릴 겁니다. 환자는 일반 병실로 옮길 테니 잠시 후에 면회하시면 됩니다.”간호사의 주의사항을 들은 최보라는 곧장 병실로 발걸음을 옮겼다.홀로 남은 오지훈은 최보라의 뒷모습을 응시하다 고개를 숙여 자신의 통화 기록을 확인했다.하정훈에게 계속 전화를 걸고 있었지만, 상대방의 휴대폰은 야속하게도 여전히 꺼져 있었다.시간이 지체될수록 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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