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지훈은 여전히 정신이 멍한 상태로 물었다.“그럼 술에 취했다거나, 뭐 그런 상황이면 어떡해?”유경태가 피식 웃으며 되물었다.“너 정훈이 취한 모습 본 적 있냐?”“별로 없긴 하지. 그 녀석은 아무리 마셔도 이성은 꼭 붙들고 있으니까.”유경태는 오지훈을 안심시키듯 덧붙였다.“정훈이가 제일 힘들고 누구라도 대신할 사람이 필요했을 때조차 양나정이랑은 친구 이상으로 선을 넘은 적이 없어. 그런데 지금 와서 무슨 딴짓을 하겠냐?”유경태의 확언에 오지훈은 그제야 마음이 한결 놓였다.사실 그도 하정훈을 믿었지만 최보라가 툭 던진 몇 마디에 괜한 의심이 싹텄던 것이다.어쩌면 하정훈을 의심한 자신이 바보였을지도 모른다. 지난 몇 년간 하정훈이 한 사람에게 쏟은 정성은 그들의 작은 사교계 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으니까.새벽 두 시, 서경에는 갑작스레 겨울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겨울에 비는 곧 한파였다.비가 그치면 날은 더더욱 매서워질 터였다.타닥타닥 빗방울이 바닥을 때리는 소리가 이 밤의 불안과 짜증을 더했다.새벽 두 시 반, 드디어 송남지가 눈을 떴다.입술은 핏기 하나 없이 하얗게 질려 있었고 평소 총기 넘치던 눈빛은 온데간데없이 흐릿하게 풀려 있었다.곁을 지키던 최보라는 피로에 찌든 얼굴이었으나 침대의 인기척을 느끼자마자 벌떡 일어나 송남지의 손을 꽉 잡았다.“남지야, 정신이 들어? 어디 불편한 데는 없어?”송남지는 메마른 입술을 달싹였지만 목소리가 나오기도 전에 머릿속에 수만 가지 잔상이 밀려들었다.악마 같은 표정의 손윤영, 그녀가 쥐고 있던 서슬 퍼런 칼날...기억이 플래시백처럼 터지자 송남지는 겁에 질려 숨을 헐떡였고 배의 통증이 현실을 자각하게 했다.순식간에 호흡이 곤란해진 그녀는 패닉에 빠진 눈으로 최보라를 바라보며 웅얼거릴 뿐 제대로 된 말을 잇지 못했다.최보라는 안타까운 마음에 송남지의 손을 꽉 잡으며 위로했다.“괜찮아 남지야, 이제 다 괜찮아. 그 미친 노친네는 유치장에 처넣었으니까 이제 아무도 널 해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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