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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을 쓴 남편의 모든 챕터: 챕터 411 - 챕터 420

580 챕터

제411화

오지훈은 여전히 정신이 멍한 상태로 물었다.“그럼 술에 취했다거나, 뭐 그런 상황이면 어떡해?”유경태가 피식 웃으며 되물었다.“너 정훈이 취한 모습 본 적 있냐?”“별로 없긴 하지. 그 녀석은 아무리 마셔도 이성은 꼭 붙들고 있으니까.”유경태는 오지훈을 안심시키듯 덧붙였다.“정훈이가 제일 힘들고 누구라도 대신할 사람이 필요했을 때조차 양나정이랑은 친구 이상으로 선을 넘은 적이 없어. 그런데 지금 와서 무슨 딴짓을 하겠냐?”유경태의 확언에 오지훈은 그제야 마음이 한결 놓였다.사실 그도 하정훈을 믿었지만 최보라가 툭 던진 몇 마디에 괜한 의심이 싹텄던 것이다.어쩌면 하정훈을 의심한 자신이 바보였을지도 모른다. 지난 몇 년간 하정훈이 한 사람에게 쏟은 정성은 그들의 작은 사교계 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으니까.새벽 두 시, 서경에는 갑작스레 겨울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겨울에 비는 곧 한파였다.비가 그치면 날은 더더욱 매서워질 터였다.타닥타닥 빗방울이 바닥을 때리는 소리가 이 밤의 불안과 짜증을 더했다.새벽 두 시 반, 드디어 송남지가 눈을 떴다.입술은 핏기 하나 없이 하얗게 질려 있었고 평소 총기 넘치던 눈빛은 온데간데없이 흐릿하게 풀려 있었다.곁을 지키던 최보라는 피로에 찌든 얼굴이었으나 침대의 인기척을 느끼자마자 벌떡 일어나 송남지의 손을 꽉 잡았다.“남지야, 정신이 들어? 어디 불편한 데는 없어?”송남지는 메마른 입술을 달싹였지만 목소리가 나오기도 전에 머릿속에 수만 가지 잔상이 밀려들었다.악마 같은 표정의 손윤영, 그녀가 쥐고 있던 서슬 퍼런 칼날...기억이 플래시백처럼 터지자 송남지는 겁에 질려 숨을 헐떡였고 배의 통증이 현실을 자각하게 했다.순식간에 호흡이 곤란해진 그녀는 패닉에 빠진 눈으로 최보라를 바라보며 웅얼거릴 뿐 제대로 된 말을 잇지 못했다.최보라는 안타까운 마음에 송남지의 손을 꽉 잡으며 위로했다.“괜찮아 남지야, 이제 다 괜찮아. 그 미친 노친네는 유치장에 처넣었으니까 이제 아무도 널 해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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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12화

십수 초간 탐색 끝에 송남지는 알 수 있었다.하정훈은 안 왔다.아니, 왔다 가지도 않았다.하정훈과 지내면서 익숙해진 그의 체취, 그 묵직한 우드 향이 이 방엔 전혀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송남지는 시선을 떨구며 말했다.“언니, 내 휴대폰 어딨어? 전화 좀 하고 싶어.”최미경은 옆방에 있고 송남지에게 딱히 마음 터놓을 친구도 없으니 이 전화가 누구를 향할지 최보라는 짐작하고도 남았다.최보라의 눈에 망설임이 스쳤지만 몇 초 뒤 그녀를 말렸다.“남지야, 의사 선생님이 너 다쳐서 말 많이 하면 안 된대. 일단 푹 쉬고 용건은 내일 아침에 얘기하자.”최보라는 속으로 생각했다.‘하정훈이 인간이라면 내일 아침엔 오겠지, 설마 남지가 죽다 살아났는데 모른 척하진 않겠지.’창밖의 빗소리는 점점 더 거세지고 요란해져만 갔다.창밖에는 비가 마치 작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었고 송남지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불길한 예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그럼 내 휴대폰 좀 집어줄래? 문자 하나만 보내게.”그녀는 병실 벽에 걸린 시계를 쳐다보았다. 이미 새벽이 깊은 시간이었다. 아무리 하정훈이 바쁘다 해도 오늘의 업무는 일단락되었을 터였다.최보라는 여전히 핑계를 대며 피하고 싶었으나 너무 막으면 오히려 의심을 살 것 같았다. 그녀는 느릿느릿 몸을 일으켜 휴대폰을 집어 들었지만 건네주는 손길에는 마지못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송남지가 미간을 찌푸리며 예리하게 물었다.“내 폰에 뭐 안 좋은 소식이라도 있어? 왜 그렇게 보여주기 싫어해?”타고나길 거짓말을 못 하는 최보라였다. 정곡을 찔리자 단번에 얼굴색이 변하고 눈동자가 흔들렸고 변명하는 말투조차 다급했다.“무슨 소리야, 안 좋은 소식은 무슨. 난 그냥 네가 푹 못 쉴까 봐 그러지.”송남지는 손을 뻗어 휴대폰을 받는 그 짧은 순간에도 복부가 찢어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그녀는 미간을 깊게 찌푸렸고 가늘게 떨리는 눈썹은 그녀가 겪고 있는 고통을 여실히 보여주었다.하지만 그녀는 그런 고통을 신경 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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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13화

결국 최보라와 그녀는 사촌 자매였으니 최보라가 그녀를 잘 알듯, 그녀도 최보라를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송남지는 복부를 찌르는 듯한 통증을 참아내며 무겁게 숨을 들이켰다.“언니, 뭐든 숨기지 말고 말해줘. 어차피 알게 될 일이잖아.”최보라는 미간을 좁힌 채 내적 갈등을 겪는 듯했다.송남지가 다시금 그녀를 설득했다.“내가 직접 알아내게 하지 말고 지금 말해줘. 나 멘탈 센 거 언니도 알잖아.”최보라는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과거 윤씨 가문이 저지른 끔찍한 짓도 묵묵히 받아들이고 홀로 지옥 같은 곳을 빠져나온 아이가 바로 송남지였다. 그러니 하정훈이 양나정과 함께 있다는 사실, 그리고 두 사람이 몇 시간째 연락 두절이라는 사실 정도를 못 받아들일 리 없다고 판단했다.최보라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정색하고 송남지를 바라보았다.송남지는 그 눈빛을 보자마자 본능적으로 경고음이 울리는 것을 느꼈다. 최보라의 입에서 나올 말이 자신이 감당하기 힘든 내용일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그 순간, 심장 깊은 곳에서부터 고통이 배어 나오는 듯했다.송남지는 끊임없이 호흡을 가다듬으며 간신히 마음을 진정시켜야 했다. 몇 초의 정적 후, 최보라가 무겁고 진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남지야, 민지현 씨가 널 병원으로 이송하면서 하정훈에게 전화를 걸었어. 그런데 돌아온 대답은 그가 양나정과 단둘이 북두로 출장을 간다는 거였어.”송남지의 얼굴은 생각보다 훨씬 차분해 보였지만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그녀의 마음속에는 거친 파도가 일고 있었다.“그래서?”최보라가 말을 이었다.“그 이후로 하정훈은 연락이 끊겼어. 함께 떠난 양나정도 마찬가지고.”송남지는 천천히 두 눈을 감았다.머릿속에서 상상으로 빚어낸 장면들이 끊임없이 떠올랐다.그 장면들은 뇌리에 스치듯 지나갔지만 사라지는 찰나마다 마음속에 지울 수 없는 흉터를 남겼다.최보라는 겉으로는 평온해 보이지만 침묵을 지키는 송남지를 바라보았다.최보라가 아는 송남지는 결코 감정을 얼굴에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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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14화

이른 아침, 비바람이 휩쓸고 간 도시는 엉망이 되어 있었다.작업복을 입은 환경미화원들이 도시 곳곳의 진흙탕을 치우고 있었다.하정훈은 깨질 듯한 두통을 느끼며 북두의 어느 병실에서 눈을 떴다.창문이 살짝 열려 있어 신선한 공기가 들어오고 있었지만, 비 갠 뒤 풍겨오는 흙내음에 그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서경에서는 맡을 수 없는 냄새였기 때문이다.눈을 떠보니 병원 시설은 평범하기 그지없었다. 하정훈은 자신이 서경에 있지 않다는 것을 확신했다.간호사가 문을 열고 들어오며 수줍은 표정을 지었다. 북두 같은 작은 도시에서 이렇게 귀티나고 잘생긴 남자를 보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게다가 남자의 차림새만 봐도 재력가임이 분명해 보였다.“환자분, 좀 괜찮으세요? 몸에 난 발진은 좀 가라앉았나요?”‘발진?’하정훈의 찌푸려진 눈썹은 펴질 줄을 몰랐다. 그는 알레르기 반응이 있을 때만 몸에 발진이 돋곤 했기 때문이다.“제가 알레르기 반응을 보였나요?”간호사는 눈을 반짝이며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실려 오셨을 때 온몸에 붉은 발진이 돋아서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그래서 정밀 검사까지 했는데 알레르기 유발 요인이 꽤 많으시더라고요. 같이 오신 여성분도 너무 놀라서 말도 제대로 못 하셨고요...”하정훈은 지끈거리는 미간을 문지르며 물었다.“절 데려온 여자분요? 그게 누군데요?”그의 마지막 기억은 FunAI 관계자들과 미팅을 하며 차를 한 잔 마신 것뿐이었고 그 이후의 일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간호사는 병실을 두리번거리며 명품을 걸치고 있던 아름다운 여성을 찾았으나 보이지 않았다.“어라? 계속 병실 지키고 계셨는데 어디 가셨지? 아마 아침 식사 사러 가셨나 봐요.”하정훈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풀지 않았다. 그는 옆 테이블에 놓인 꺼진 휴대폰을 곁눈질하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간호사가 재빨리 다가왔다.“필요하신 거 있으면 제가 도와 드릴게요!”하정훈은 자신의 직원이 아닌 사람, 특히 여성에게 심부름시키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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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15화

양나정의 말투는 지극히 평범했다. 마치 하정훈이 이곳에 있는 것이, 그리고 자신이 그를 간호하는 것이 아주 당연한 일상인 것처럼 말이다.그 뻔뻔한 태연함에 하정훈은 기분이 확 나빠졌다.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혐오감이 그의 눈동자에 가득 찼다.하지만 양나정은 그의 시선을 못 본 척하며 침대 옆에 앉아 포장 봉투를 풀었다.“북두에서 유명한 소고기 만두야. 한번 먹어봐.”간호사가 거들었다.“여사님께서 애 많이 쓰셨네요. 우리 북두의 소고기 만두는 진짜 유명하고 맛있거든요. 근데 환자분은 조심하셔야 해요. 어떤 만두엔 미나리가 들어가는데 선생님은 미나리에도...”간호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양나정이 말을 잘랐다.“미나리 안 들었어요. 이 사람 알레르기 있는 건 다 뺐다고요.”양나정은 짜증 섞인 얼굴로 간호사를 쏘아봤다.“이제 가서 일 보세요.”명백한 축객령이었다. 간호사가 여기에 있는 게 거슬린다는 뜻이었다.간호사는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했지만 이 여자가 자기를 싫어한다는 것쯤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찜찜한 기분으로 차트를 안고 나가려던 찰나, 하정훈이 그녀를 불러세웠다.“간호사님? 환자 상태 보는 게 일 아니에요? 나가지 말고 여기 계세요.”하정훈은 툭 던지듯 말하고는 눈을 가늘게 뜨고 양나정을 봤다.“양 팀장이야말로 왜 일하러 안 가?”양나정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만두를 들고 멍하니 있었다. 아무도 그녀의 정성 어린 아침 식사를 반기지 않았기 때문이다.그녀는 무안하게 만두를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송남지보다 못한 건 그렇다 쳐도, 생판 남인 간호사한테까지 밀릴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분통이 터질 것 같았지만 화를 낼 수도 없는 노릇이라, 그녀는 억지로 굳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어젯밤 일에 대해 변명하기 시작했다.“정훈 오빠가 회의 끝나고 쓰러지시는 바람에 다들 어쩔 줄 몰라 하길래 내가 데리고 온 거야. 그렇다고 나 혼자 가버릴 순 없잖아. 그랬다간 사람들이 내가 오빠를 숨겨둔 줄 알 테니까.”하정훈은 눈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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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16화

양나정의 얼굴에 순간 정곡을 찔린 당혹감이 스쳤다.하지만 산전수전 다 겪은 그녀에게 이 정도 상황은 어린아이 장난에 불과했다.그녀는 찰나의 흔들림을 지워내고 다시 옅은 미소를 띠었다. 마치 세상만사에 초연하여 무언가를 꾸밀 줄 모르는 사람처럼 억울하리만큼 순진무구한 표정이었다.그런 얼굴로 앉아 있으니 도리어 그녀가 가련한 피해자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하 대표, 말이 너무 심하잖아. 내가 그저 놀고먹으며 살고 싶었다면 애초에 아멜국에서 돌아오지도 않았을 거야.”오지훈과의 통화가 연결되자 하정훈은 더 이상 양나정과 입씨름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오지훈에게 집중하며 물었다.“부재중 전화 엄청 와 있던데,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었어?”오지훈이 안도의 한숨을 푹 쉬더니 다짜고짜 따지기 시작했다.“야, 하정훈! 다 큰 어른이 밤새 실종되는 게 말이 돼?”하정훈의 성격을 아는 이라면 누구나 고개를 내저을 일이었다. 지금은 물론이고 10년 전이나 더 어린 꼬꼬마 시절에도 그는 밤새 연락을 끊고 잠수를 탈 위인이 결코 아니었기 때문이다.더군다나 지금 하씨 저택에는 안주인이 버티고 있는데 말이다.오지훈이 다짜고짜 쏘아붙이자 하정훈은 더더욱 어리둥절했다.“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 프로젝트에 문제라도 생겼어?”하정훈은 미간을 좁히며 다그쳤다.곁에 있던 양나정은 아침 식사에 집중하는 척했으나 실상 온 신경은 하정훈의 통화 내용에 쏠려 있었다.오지훈이 한숨을 푹푹 쉬더니 넋 나간 사람처럼 툭 내뱉었다.“정훈아, 어젯밤 남지가 재스민을 나서서 너 만나러 가려다가... 손윤영한테 칼로 복부를 찔렸어.”그 말 한마디가 핵폭탄처럼 터지면서 하정훈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그는 이를 꽉 깨물었고 표정은 살벌하게 굳어졌다.“오지훈, 남지 가지고 장난치지 마라. 경고다.”오지훈도 환장하겠다는 듯 받아쳤다.“내가 지금 사람 목숨 가지고 장난칠 놈으로 보이냐?”그 말을 듣자마자 하정훈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겉으로는 멀쩡한 척 버티고 있었지만 속은 이미 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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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17화

그의 목소리는 소름 끼칠 정도로 차가웠다.“어젯밤 일, 네가 꾸민 짓이야?”양나정은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오빠, 어젯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는데 왜 무턱대고 나랑 엮어?”하정훈의 기세는 맹수처럼 사나웠고 눈빛은 당장이라도 사람을 집어삼킬 듯했다.그가 간호사 쪽으로 휴대폰을 내밀자 간호사는 폭력이라도 휘두를까 봐 잔뜩 겁을 먹고 문 쪽으로 몸을 움츠렸다.하정훈은 그런 간호사의 반응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바라보다 말했다.“휴대폰 꺼내 봐요.”간호사는 영문을 몰랐지만 압도적인 기세에 눌려 시키는 대로 했다.하정훈은 휴대폰을 힐끗 보더니 카톡을 열고 결제 코드를 띄워 자신의 폰으로 빠르게 스캔했다.결제를 마친 그는 손에 들고 있던 보조배터리를 간호사에게 돌려주었다.“고마워요. 번거롭겠지만 반납 좀 부탁해요.”양나정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하정훈은 바람처럼 병실에서 사라져버렸다.간호사가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휴대폰에 20만이 입금되었다는 알림이 뜬 뒤였다.간호사가 보조배터리 대여료치곤 너무 큰 액수라며 뒤를 쫓으려 하자 양나정이 앞을 가로막았다.그녀는 경멸 어린 시선으로 간호사를 훑어보며 말했다.“그쪽처럼 외모도, 집안도, 직업도 평범한 사람이 하 대표랑 어떻게 해보려고 애쓸 필요 없어요. 시간 낭비니까.”간호사는 어이가 없어 멍하니 물었다.“잠깐만요, 지금 무슨 말씀이세요?”양나정은 눈을 흘겼다.이른 아침임에도 그녀의 화장은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완벽했다.그녀의 눈빛엔 간호사를 향한 무시가 가득했고 콧방귀를 뀌며 비웃었다.“흥, 같은 여자끼리 내숭 떨지 맙시다. 척 보면 딱이지. 이 세상에 신데렐라 같은 건 없다고요.”간호사는 눈을 부릅뜨고 양나정의 코앞에 삿대질을 했다.“그쪽 머릿속에 든 생각이라고 남들도 다 똑같을 거라 착각하지 마세요! 그 더러운 잣대로 남 판단하지 말라고요. 신데렐라? 웃기고 있네. 전 주제 파악하고 살 거든요? 그쪽이나 주제 파악 좀 하시죠?”양나정은 이런 시골 병원 간호사가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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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18화

간호사는 눈앞의 광경에 공포를 느꼈다.양나정의 완벽한 화장 아래 감춰진 표정은 금방이라도 간호사의 목을 조를 듯 살기가 등등했다.간호사는 입을 꾹 다문 채, 공포에 질린 눈으로 광기에 사로잡힌 여자를 바라볼 뿐이었다.간호사가 침묵하자 양나정의 표정은 몇 초 뒤 서서히 제자리를 찾았다.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듯 양나정은 재빨리 손을 떼고 거리를 벌리더니 간호사를 노려보며 병실을 빠져나갔다.양나정의 뒷모습이 사라지자 간호사는 참았던 기침을 거칠게 토해내며 나직하게 욕설을 내뱉었다.“또라이 같은 년!”하정훈이 서경으로 돌아올 무렵, 하늘에서는 다시금 추적추적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공기 중에는 뼈를 찌르는 듯한 살벌한 한기가 감돌았다.빗줄기가 너무 굵어 와이퍼가 쉴 새 없이 움직였지만 시야는 여전히 흐릿하기만 했다.서경의 교통 체증은 악명 높기로 유명했는데 지금도 예외는 아니어서 하정훈의 차는 고가도로 위에 갇혀 꼼짝달싹할 수 없었다.한편, 병원 병실 밖에서 오지훈은 걱정스런 눈빛으로 문을 바라보다가 최보라에게 도시락 두 개를 건넸다.“집안 도우미 아주머니가 끓인 죽이야. 3인분이니까 너도 좀 챙겨 먹어.”밤새 송남지의 곁을 지킨 최보라의 눈 밑에는 짙은 다크서클이 내려앉아 있었고 표정은 더없이 초췌해 보였다.최보라는 오지훈이 건넨 도시락을 받아 들며 코웃음을 쳤다.“너조차도 먹을 걸 챙겨 올 줄 아는데 말이야.”이 비아냥이 누구를 향한 것인지 오지훈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는 하정훈을 대신해 변명했다.“정훈이도 연락 닿았어. 지금 오는 중이래.”최보라는 입을 삐죽이며 비소했다.“어머, 그래? 볼일 다 보고 이제야 오신대? 아주 시간 관리의 달인 나셨네.”오지훈은 하정훈을 변호하고 싶었지만 지금의 최보라를 건드렸다간 무슨 험한 꼴을 당할지 몰라 입을 다물었다.그녀의 화를 돋우었다간 정말 못 하는 말이 없을 테니까.오지훈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며 제안했다.“아니면 내가 아주머니께 죽 가져다드릴 테니까, 너는 남지한테 가 봐.”최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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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19화

오지훈은 입술을 깨물며 대답했다.“아주머니, 사실 정훈이가 어젯밤에 출장을 가는 바람에 좀 늦어진 거예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오지훈의 설명을 듣고서야 최미경은 조금 안심하는 듯했다.그제야 그녀는 죽을 몇 술 뜨기 시작했다.오지훈은 더 있다가는 말실수라도 할까 봐, 최미경이 죽을 어느 정도 비우자마자 서둘러 자리를 떴다.최미경의 병실을 나오자마자 엘리베이터에서 허둥지둥 내리는 하정훈이 보였다.오지훈은 인상을 팍 쓰며 하정훈 쪽으로 갔고 만나자마자 바로 방향 틀어서 하정훈 뒤에 딱 붙어 속삭였다.“오는 길은 알고 있었나 봐?”목소리에 짜증이 가득했다.그도 그럴 것이 오지훈은 여기서 하정훈을 변호하느라 진을 다 뺐기 때문이다.하정훈은 길게 설명할 겨를이 없었다. 송남지의 병실을 향해 빠르게 걸음을 옮기며 인상을 쓴 채 말했다.“어젯밤에 좀 문제가 있었어. 알레르기 반응이 심하게 와서...”오지훈은 지난 몇 년간 하정훈이 알레르기 때문에 얼마나 고생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그에게는 전담 주치의가 있었고 병원 전체가 그를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보통 알레르기 반응이 나타나면 즉시 조치를 취했기에 심각한 후유증을 남기는 일은 드물었다.그러니 어젯밤처럼 알레르기 때문에 밤새 연락이 두절되었다는 건 아무래도 석연치 않았다.하정훈이 병실 문을 두드리기 위해 손을 들어 올렸을 때, 손목에 아직 가라앉지 않은 붉은 발진을 보고서야 오지훈은 깨달았다.그가 어젯밤 정말로 심각한 알레르기 증상에 시달렸다는 것을 말이다.그렇지 않고서야 지금까지 발진이 남아 있을 리 없었다.알레르기란 게 가볍게 볼 수도 있지만, 이 정도로 심하다면 자칫 목숨까지 잃을 수 있는 위험한 일이었다.오지훈이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다.“정훈아, 너 정말 괜찮은 거야?”하정훈은 오지훈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계속해서 문을 두드리며 짧게 답했다.“괜찮아.”그는 문 안쪽에서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었다.그 시각, 최보라는 송남지에게 죽을 좀 먹어보라고 달래는 중이었다.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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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20화

문이 닫히고 적막한 세상엔 다시 하정훈과 송남지 단둘만이 남겨졌다.한 사람은 눈시울이 붉어졌고 한 사람은 눈을 감고 있었다.하정훈의 시선 끝에 닿은 송남지는 핏기 하나 없는 입술로 가냘프게 숨을 내쉬며 위태롭게 침대에 누워 있었다.그는 한 걸음 한 걸음, 가슴이 찢어지는 통증을 느끼며 병상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귓가에 울리는 발자국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송남지는 눈을 더 꽉 감았다.그녀의 표정에는 거부감이 얇은 실타래처럼 얽혀 있었다.그녀는 하정훈이 다가오는 것을 거부하고 있었다.예민한 하정훈이 그것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그의 발걸음이 잠시 멈칫했다가, 몇 초 후 다시 움직여 침대 곁의 의자 앞까지 다다랐다.의자가 조용히 밀려나고 하정훈이 자리에 앉았다.그가 문을 열고 들어와 병상 옆에 다가와 앉기까지 송남지는 단 한 번도 눈을 뜨지 않았다.창밖엔 또 비가 추적추적 내렸고 찬 바람이 쌩쌩 불었다.오늘 서경의 기온은 한 자릿수로 뚝 떨어져 있었다. 하지만 밖과 달리 병실 안은 난방이 잘 되어 훈훈했다.하정훈은 손을 들어 입김을 호호 불어 온기를 만든 뒤, 이불 밖으로 나와 있는 송남지의 손을 조심스럽게 감싸 쥐었다.하얀 손등에는 핏기가 거의 없었다.송남지의 눈꺼풀은 미세하게 떨렸지만 여전히 눈을 뜨지는 않았다.하정훈이 얇은 입술을 열어 나직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남지야... 미안해. 내가 너무 늦었지.”송남지는 그제야 천천히 눈을 떠 고개를 돌렸고 하정훈과 시선이 마주쳤다.그녀는 입을 열었지만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했다.‘무슨 말을 해야 할까? 어젯밤 왜 사라졌느냐고 따져 물어야 할까? 아니면 이렇게 큰일이 벌어졌는데 왜 이제야 왔느냐고 원망해야 할까?’송남지는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한 질문들에 대한 대답은 아마도 이미 마음속에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리라.하정훈의 눈빛은 애처로움으로 가득했지만 정작 송남지의 눈동자에서 그가 읽어낸 것은 짙은 실망감뿐이었다.그 실망감은 그를 한없이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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