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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가면을 쓴 남편: Chapter 721 - Chapter 730

772 Chapters

제721화

입을 뗐다 닫기를 반복하던 오지훈은 결국 체념한 듯 물었다.“그날 봤다는 그 여자, 뭐 특별한 점이라도 있었어?”송남지에게서 하정훈을 빼앗아 간 여자가 어떤 사람인지 한 번도 보지 못한 게 내심 아쉬웠던 것이다.최보라는 당연히 임승아에게 짙은 원망을 품고 있었고 그런 원망 속에서 임승아를 객관적으로 평가할 리 만무했다.“완전 여우상에, 행동 하나하나가 어찌나 가식적이고 여우 짓인지. 자기가 베리히에서 유학한다는 걸 남들이 모를까 봐 안달 난 사람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쉴 새 없이 떠들어대더라니까. 그게 뭐 그렇게 대단하다고. 의대생이면 다야? 우리 남지만큼 잘났어? 내가 보기엔 우리 남지 머리카락 한 올만도 못한 년이야!”최보라는 오지훈 앞에서 임승아를 깎아내리며 실컷 불평을 늘어놓았다.오지훈은 당연히 최보라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하정훈의 안목에 그런 여자가 눈에 들어올 리 없기 때문이다.하지만 굳이 최보라의 말을 바로잡지도 않았다.최보라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런 여자인 셈 치면 그만이었다.최보라는 한참을 쏟아내고 나서야 지친 듯 오지훈 옆에 앉았다. 표정이 어두워진 그녀는 그제야 진심을 털어놓았다.“임승아라고 하던데 엄청 어려 보이는데 묘하게 초연하고 담담하더라. 성격은 왠지 모르게 송남지랑 비슷한 구석이 있었어. 둘 다 어떤 상황에서도 쉽게 흔들리지 않는 그런 분위기 있잖아. 내가 펄펄 끓는 커피를 얼굴에 확 끼얹으려고 했는데도 꿈쩍도 안 하더라고. 그냥 꼿꼿하게 앉아 있었어. 은지영보다 그 여자가 훨씬 무서운 상대 같아.”이성을 되찾은 최보라의 설명을 들으며 오지훈은 미간을 찌푸렸다.‘이제 와서 어쩌겠는가. 남지 씨가 정훈이가 준비한 이혼 서류에 이미 도장을 찍어버린 마당에.’이제 모든 것에 마침표를 찍을 시간이었다. 그러니 이 혼란스러운 일들도 결말을 지어야 했다.어쩌면 애초에 하정훈의 깊은 사랑은 그저 꾸며낸 것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그 절절함을 평생 연기할 수 있었다면 하정훈은 진짜 순정남이 되었을 텐데 안타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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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22화

이번 독감 때문에 송남지는 최보라가 출장을 떠났을 때부터 돌아올 때까지 줄곧 침대에 누워만 있었다.돌아온 최보라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송남지를 송씨 가문으로 돌려보내는 것이었다. 그녀를 데려다주는 차 안에서 최보라의 표정은 평소와 달리 무서울 정도로 굳어 있었다.송남지는 기운이 다 빠진 채 죄지은 사람처럼 조수석에 앉아 있었다. 강제로 집에 소환당하는 중이었지만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최보라는 가슴 속에 차오르는 화를 간신히 억누르는 중이었고 그 표정은 차갑기 그지없었다.송남지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언니, 그냥 욕해. 속 터지게 참지 말고...”최보라는 깊게 숨을 들이켰다.“내가 너 욕하고 싶은 거 알고는 있어? 내가 이틀만 늦게 왔어도 넌 내 집에서 죽었을 거야! 내가 그 책임을 어떻게 다 지라고? 이젠 도저히 안 되겠어. 무조건 집으로 가. 적어도 이모랑 이모부가 옆에서 지켜보면 널 이 지경까지 내버려 두진 않을 테니까.”송남지는 입을 꾹 다물었다.일부러 자신을 이 지경으로 만들려고 했던 건 아니었지만, 독감이 하필이면 모든 게 버거운 시기에 찾아왔다.움직이기도 싫었고 약을 먹으나 안 먹으나 며칠 앓는 건 매한가지라 생각한 것이 화근이었다.며칠 앓고 나면 괜찮아지겠지 싶어 누워 있었던 게 독이 되었고 뒤늦게 이상함을 느꼈을 땐 이미 일어설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결국 최보라가 돌아왔을 때 마주한 것은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듯한 송남지의 모습이었다.아무 말 없는 송남지의 모습에 최보라는 가슴이 미어졌다.“남지야, 너 예전에 윤해진 때문에 힘든 일 겪었을 때도 끄떡없었잖아. 난 네가 멘탈 하나는 진짜 갑인 줄 알았어. 근데 지금 이게 무슨 꼴이야? 고작 이 정도로 무너지는 거야? 독감 핑계 대고 이대로 세상 하직이라도 하고 싶어? 너 진짜 내가 알던 그 송남지 맞냐고!”송남지는 고개를 떨군 채 깊은 생각에 잠겼다.마음 한구석을 들킨 듯한 무력함이 온몸을 휘감았다.비록 독감에 목숨을 내맡길 생각까지는 없었지만, 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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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23화

잠시 후, 다시 눈을 뜬 최보라는 어느 정도 이성을 되찾은 모습이었다.최보라가 조심스럽게 송남지를 불렀다.“남지야.”송남지가 고개를 들었지만,그녀의 두 눈에는 아무런 생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우리 남쪽으로 떠나자. 거긴 벌써 봄꽃이 피어서 따뜻하고 포근해.”송남지는 흠칫 놀랐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최보라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이모랑 이모부한테는 내가 잘 말씀드릴게. 재스민 일은 네가 너무 지쳐서 잠시 쉬고 싶어 손을 뗐다고 하면 돼. 하정훈 문제도, 연인 사이엔 헤어지는 일도 비일비재하고 부부 사이에도 권태기가 오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둘러대지 뭐. 서경에 계속 남아있어 봤자 끝없는 고통 속에서 허우적대기만 할 뿐이야. 아무도 널 모르는 남쪽의 작은 도시로 가서 네가 좋아하는 일도 하고 꽃도 보고 바다도 보면서 지내다 보면 언젠가 상처도 아물게 될 거야.”송남지는 백미러 속 자신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지금 그녀가 서경에 남아야 할 유일한 이유는 부모님뿐이었지만, 엉망이 된 이 꼴로 어떻게 두 분을 뵐 수 있단 말인가.“모든 건 내가 다 알아서 처리할게. 넌 그저 네 마음 추스르는 데만 신경 써. 그래야 이모랑 이모부도 걱정 안 하시지.”최보라의 단호한 말에 송남지도 더는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알았어. 그런데...”송남지의 말끝이 흐려지자 최보라가 의아한 듯 물었다.“그런데 뭐?”“떠나기 전에 무봉산에 한번 다녀오고 싶어.”최보라는 송남지가 왜 굳이 무봉산에 가려는지 알 수 없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출발하기 전 오지훈을 불러냈다.무봉산이 관광지이긴 해도 밤에는 인적이 드물고 산을 오르는 차도 많지 않아 여자 둘이 가기엔 아무래도 위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오지훈은 흔쾌히 동행에 응했다.하지만 지금 송남지와 한 차를 타고 가는 것만으로도 오지훈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죄책감을 느꼈다.뒷좌석에 홀로 앉은 송남지는 말없이 무봉산의 풍경만 바라보았다.사실 이 계절의 무풍산은 볼품이 없었다. 기온이 너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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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24화

레스토랑 사장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최보라는 그제야 송남지가 왜 무봉산행을 고집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그때 하정훈과 함께 이곳을 찾았던 송남지는 애쓰지 않아도 티 없이 맑고 환하게 웃었을 것이다.역시, 옛 장소를 다시 찾는 건 각주구검이나 다름없으니 지나간 건 그저 지나간 대로 둬야 했다.사랑이란 건 실체가 없어서 그 감정이 머물 때만 비로소 느낄 수 있는 법이다.그 외의 순간에는 결코 그 흔적조차 붙잡을 수 없다.최보라는 고개를 돌려 남몰래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하지만 정작 송남지가 덤덤하게 다가와 말했다.“언니, 이제 가자.”무봉산을 떠나는 차 안에서 송남지는 뒷좌석에 앉아 창밖으로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가에는 금세 물기가 차올랐고 투명한 눈물 한 방울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서경에서 남쪽의 작은 도시 윤양으로 가는 직항편은 없었기에 송남지는 중부 도시에서 비행기를 갈아타야 했다.아침 9시에 출발해 밤 7시가 되어서야 비행기는 겨우 윤양 근처에 닿았다.공항조차 없는 윤양에서 송남지는 기차로 갈아타야 했고 역에는 그녀를 마중 나온 사람이 있었다.윤양 현지의 한 전시관의 관장이었다.송남지는 인파 속에서 자신의 이름이 적힌 팻말을 든 남자를 단번에 알아보았다.남자는 다소 그을린 피부에 그리 새것 같지도 낡지도 않은 정장 재킷과 청바지 차림이었고 얼굴에는 선한 미소를 가득 머금고 있었다.그 모습은 윤양이라는 이 작은 도시처럼 소박하면서도 정겨워 보였다.송남지는 그를 향해 손을 흔들며 미소 띤 얼굴로 가볍게 달려갔다.“송남지 씨 맞으시죠? 저는 윤양 전시관의 관장 여준휘라고 합니다. 만나서 정말 반갑습니다. 남지 씨처럼 훌륭한 인재가 저희 전시관에 입사해주시다니 정말 영광이에요. 전시관 식구들이 남지 씨를 위해 환영식을 준비해두었으니 어서 가시죠.”여준휘의 목소리에는 열정과 조심스러움이 동시에 배어 있었다.진심으로 송남지를 환영하는 마음과 혹여나 자신의 열정이 그녀를 부담스럽게 하지는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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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25화

전시관에는 보안 요원과 여준휘를 포함해 고작 다섯 명뿐이었다.송남지와 비슷한 또래인 한 직원은 임신 중인지 얼굴색이 아주 좋았는데 송남지를 보자마자 입이 귀에 걸릴 듯 웃으며 꽃다발을 건넸다.“정말 예쁘장한 도시 아가씨네요! 어서 앉아요. 저희가 정성껏 환영식을 준비했으니 부디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어요.”긴 테이블 위에는 윤양의 향토 음식과 술, 그리고 이름도 생소한 온갖 신선한 과일들이 차려져 있었다. 거창하지는 않았지만 진심 어린 마음이 가득 담긴 상차림이었다.송남지는 상석에 앉아 음식을 조금씩 맛보며 새 동료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다들 윤양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들로, 열정이 넘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수줍어하는 모습들이었다.식사를 마친 뒤 여준휘는 최보라가 미리 구해둔 작은 마당이 있는 집으로 송남지를 데려다주었다.“윤양에는 이런 마당 딸린 집이 많아요. 월세도 저렴하고 집값 자체가 워낙 싸거든요. 그렇다고 무시하지 마세요. 마당에서 양해 바다가 보이고 꽃도 가득 피는 아주 근사한 집이니까요. 오후에 차 마시기 딱 좋죠. 침구 같은 건 미리 새로 빨아서 준비해뒀는데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네요.”“마음에 들 것 같아요.”송남지가 삐걱거리는 나무 대문을 열고 들어가자 꽃향기와 함께 바다에서 불어오는 눅눅하고 따뜻한 바람이 그녀를 맞았다.그녀는 그제야 왜 최보라가 그토록 자신을 이곳에 보내려 했는지 깨달았고 눈시울이 붉어졌다.밤바람마저 그녀의 상처투성이 몸과 마음을 꿰매어 주는 듯했다.여준휘가 차에서 짐을 내려주며 말했다.“짐이 너무 없네요. 내일 소윤이한테 모시고 가서 필요한 거 더 사라고 할게요. 전시관 예산으로 그 정도는 다 커버되니까 부담 갖지 마시고요.”송남지가 짐을 건네받으며 답했다.“관장님, 신경 써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평소에 워낙 단출하게 지내서 짐이 없는 것뿐이에요. 진짜 괜찮아요.”하지만 여준휘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아니에요. 가서 구경도 하시고 동네 지리도 익히시면 좋잖아요. 소윤이도 임신 중이라 무리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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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26화

윤양에서 두 달을 보낸 송남지는 몰라보게 혈색이 좋아졌다.소윤과 함께 약국 앞을 지나가다 밖에 놓인 체중계에 슬쩍 올라선 송남지는 훌쩍 뛴 숫자에 깜짝 놀랐다.불룩한 배를 안고 있는 소윤이 농담을 건넸다.“남지야, 거기서 5kg은 더 쪄야 제맛이지.”송남지는 체중계에 찍힌 숫자를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서경에 살던 그 긴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찍어본 적 없는 몸무게였다.키 170cm에 아무리 많이 나가도 52kg을 넘긴 적이 없었는데, 지금은 거의 62kg에 육박하고 있었다.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살을 좀 찌워야 하긴 했지만, 이건 너무 빠른 거 아니야?”소윤이 다가와 송남지의 팔짱을 꼈다.“우리 윤양이 사람 살기 좋다는 증거지. 처음 왔을 땐 진짜 뼈만 남았었잖아.”송남지가 처음 왔을 때를 떠올리면 소윤은 아직도 마음이 짠했다.그렇게 예쁘고 반듯한 아가씨가 원숭이처럼 바싹 말라서는, 누구에게나 상냥하게 웃어주긴 했지만 눈빛에는 생기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동료들에게 먼저 장난을 칠 만큼 여유가 생겼고 깡마른 몸에도 보기 좋게 살이 붙었다. 무엇보다 눈빛을 채우고 있던 서늘한 그림자가 걷혔다.소윤은 사람들의 활기로 가득한 길거리 포장마차로 송남지를 이끌며 말했다.“남지 네가 오기 전에는 이거 먹고 싶어도 같이 갈 사람이 없었다니까.”동갑내기인 소윤은 윤양 토박이로 성도에서 대학을 졸업한 뒤 쭉 전시관에서 일해왔다.그러다 여준휘의 소개로 전시관 협력업체 직원과 만나 연애 끝에 결혼에 골인했다.다만 남편이 성도에서 일하느라 바빠 주말 부부로 지내고 있었다.4월의 윤양은 이미 완연한 봄 날씨였다.길가에 테이블을 편 포장마차에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았다. 서서히 어둠이 깔리고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왁자지껄한 소음이 어우러지며 묘한 안도감을 안겨주었다.송남지는 입술을 오므리며 말했다.“이제 좀 덜 먹어야겠어.”소윤은 윤양의 특산 요리 몇 가지를 주문했다. 이곳 사람들은 시고 매운 음식을 즐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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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27화

송남지는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미소 지었다. 어떤 말들은 평생 마음속에 묻어두고 누구에게도 꺼내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보탰다.“윤양은 정말 좋은 곳이야. 평생 여기서 살아도 나쁠 거 없지. 최소한 마음은 편안하니까.”소윤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성도에서 고생할 남편 걱정을 한가득 쏟아냈다.“사실 내 배 속에 있는 이 아이, 크게 출세하길 바라는 것도 아니거든. 근데 남편은 자꾸 애를 제대로 못 키울까 봐 걱정이라면서, 기어코 성도에서 일하겠대. 그래야 애한테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 줄 수 있다나. 난 그냥 남편이 윤양으로 돌아와서 아무 일이나 했으면 좋겠어. 돈이야 많든 적든 상관없잖아. 가족은 함께 있는 게 제일 중요한 거니까.”소윤의 모습을 보며 송남지는 문득 어떤 말이 떠올라 깊이 공감했다.‘행복에 겨운 사람만이 시시콜콜한 수다를 떨 수 있다.'비록 걱정과 불평, 투정 섞인 말들이었지만, 불행한 사람은 그런 말조차 내뱉을 기력이 없는 법이니까.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잠시 산책을 즐기다 송남지가 먼저 작은 마당이 있는 집으로 돌아왔다.작은 도시의 장점은 산책하듯 걷다 보면 어느새 집에 도착한다는 것이었다.마당에 막 들어서자 여준휘의 전화가 걸려 왔다.“내일 화동에서 주최하는 교류회가 있는데 말이야, 소윤이도 배가 많이 불러서... 혹시 남지 씨가 대신 가줄 수 있을까? 별일은 아니고, 호텔 한 층 빌려서 회의 좀 하다가 애프터눈 티 먹고 오는 거야...”여준휘는 송남지가 곤란해할까 봐 조심스러운 말투로 덧붙였다.“부담스러우면 안 가도 괜찮아. 내가 내일 일정 미루고 다녀와도 되니까.”송남지는 마당 그네에 앉아 웃으며 대답했다.“갈게요. 안 갈 이유가 없잖아요? 회의도 하고 애프터눈 티도 즐기면 전시관 사무실에 앉아 있는 것보다 훨씬 재밌겠네요.”송남지의 대답에 여준휘는 마음을 놓았다.“가준다고?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참, 운전은 할 줄 알아? 내일 내 차 가져갈래?”“할 줄 알아요.”송남지가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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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28화

송남지는 혼다 CRV에 올라타 조수석에 가방을 던져두고 내비게이션을 켠 채 고속도로에 진입했다.차가 적지도 많지도 않은 상황에서 송남지는 허기를 느꼈지만 고속도로에서 운전을 하며 음식을 먹을 엄두는 나지 않았다.예전과 달리 이제는 몸 사리는 법을 배웠기 때문이다.내비게이션의 도착 예정 시간을 힐끗 보니 두 시간 남짓이면 화동에 도착할 듯했다고속도로를 빠져나와 목적지까지 30분 정도 남았을 무렵, 도저히 허기를 참을 수 없었던 그녀는 신호 대기 중에 가방에서 우유를 꺼내 빨대를 꽂고 단숨에 들이켰다. 그제야 비로소 살 것 같았다.화동의 도심은 고층 빌딩 숲과 길가에 만개한 꽃들로 가득했고 차들은 질서정연하게 흐르고 있었다.기분이 한결 좋아진 송남지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혼자만의 운전 시간을 즐겼다.송남지의 눈앞 수백 미터 거리에 힐튼 건물이 들어왔다. 멀리 보이는 힐튼 간판을 이정표 삼아 도로를 따라가니, 곧바로 주차장으로 이어지는 진입로가 나타났다.호텔을 드나드는 차들은 대부분 고급 외제차였기에 송남지의 CRV는 어쩐지 그 틈에서 겉도는 느낌이었지만, 그녀는 앞선 벤츠 차량의 뒤를 따라 천천히 주차장으로 들어섰다.주차를 마친 후에야 송남지는 비로소 조수석에 둔 가방을 집어 들었다.다행히 안에는 비스킷이 있었다. 쓰라린 위산이 올라와 속이 괴로웠던 그녀에게는 지금 당장 입에 넣을 무언가가 간절했다.허겁지겁 과자 몇 조각을 삼킨 뒤, 그녀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물을 찾았다.입안이 너무 말라 목이 막힐 지경이었다.마침 세련되고 값비싼 옷차림의 무리가 차 옆을 지나갔고 송남지는 그들이 차 안을 향해 던지는 미묘한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차의 방음 상태가 워낙 좋지 않았던 탓에 그들의 대화는 송남지의 귀에 고스란히 박혔다.“이런 똥차는 참 오랜만에 보네. 근데 저 여자 가방 봤어? 톱스타들도 못 구해서 안달이라는 그 한정판 같은데.”“에이, 저 가방 가격이면 CRV를 몇 대는 사겠다. 돈 있으면 차를 바꾸지 가방을 샀겠어?”“하긴, 척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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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29화

엘리베이터가 지하 2층에 멈춰 서자 사람들이 엘리베이터에 오르며 수군거렸다.송남지도 그들을 뒤따라 들어가 엘리베이터 문 가장 오른쪽에 자리를 잡았다.“그 소문 들었어? 이번 교류회에 엄청난 거물이 온대. 젊고 잘생긴 재벌 2세라던데...”송남지는 그런 가십거리에는 관심이 없었다. 다만 교류회라는 단어를 듣고 이들도 자신과 같은 목적지로 향한다는 것을 짐작했을 뿐이다.이따가 행사장에 도착하면 저 무리를 피해 조용한 곳에 자리 잡을 생각이었다.“젊고 잘생긴 재벌 2세라고? 뉴스나 인터넷에서나 봤지, 현실에선 본 적도 없어.”“그렇지. 우리 바닥에서 이름 좀 날릴 때쯤이면 이미 늙었을 테고 사회적 지위 좀 얻었을 땐 애들이 우리보다 훌쩍 커 있을걸? 젊고 잘생긴 재벌 2세 환상에 빠질 바엔, 차라리 최근에 이혼한 거물급 인사가 누군지나 알아보는 게 낫겠다. 혹시 알아? 후처 자리라도 꿰찰지.”다들 한바탕 크게 웃어젖히는 가운데 한 사람이 은밀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우리 오빠 서경에서 일하잖아. 오빠한테 들었는데, 최근 서경 최고 명문가 도련님이 이혼했다더라.”그 이야기는 마치 잔잔한 호수에 던져진 돌멩이처럼, 엘리베이터 안에 수많은 파장을 일으켰다.송남지는 고개를 들어 은빛 엘리베이터 문에 비친 자신의 창백한 얼굴을 마주했다.“하씨 가문 도련님 말하는 거지? 예전에 천재 소녀랑 결혼했다고 들은 것 같은데. 그 왜, 얼마 전까지 잘 나가던 재스민 갤러리 있잖아. 그거 그 도련님 전처 거잖아. 나도 둘이 이혼했다는 소문은 들었는데, 왜 갑자기 갈라섰는지는 모르겠어.”아까 그 은밀한 목소리가 다시 이어졌다.“서경에 연줄도 없는 너희가 어떻게 알겠어. 나도 오빠한테 들은 건데, 그 하씨 가문 도련님이 외국에서 어떤 뮤즈 같은 여자를 만나서 완전히 푹 빠졌다잖아. 귀국하기도 전에 마음이 급해서 이혼부터 서둘렀다고 하던데.”“쯧쯧, 재벌 2세 도련님이라고 다 좋은 건 아니네. 역시 여자는 독립적이어야 해. 아니면 그 천재 소녀처럼 재벌가에 시집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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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30화

송남지는 종종걸음으로 행사장 구석진 곳에 몸을 숨겼고 어지럽던 마음이 그제야 조금 가라앉는 듯했다.하지만 방금 전 엘리베이터에서 들었던 사람들의 뒷담화는 여전히 귓가를 맴돌며 쉽게 흩어지지 않았다.‘하정훈이 임승아를 환영하려고 서경 밤하늘에 밤새도록 불꽃을 쏘아 올렸다고?’그는 원래 낭만적인 사람이었지만, 송남지 자신이 요란한 것을 좋아하지 않아 그렇게 요란을 떤 적이 없었을 뿐이다.송남지는 크게 심호흡을 하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머릿속을 꽉 채운 이 잡념들을 모조리 지워버리기 위해서였다.이윽고 누군가의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지며 낯선 향수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진한 남성용 향수였는데, 묵직한 우디 향의 탑노트와 상큼한 시트러스 향의 베이스노트가 어우러져 청량하면서도 화동의 분위기와 제법 잘 어울렸다.다만 오늘 같은 자리에는 썩 어울리지 않는 향이었다.수집가들은 대부분 연령대가 높은 편이라, 이렇게 젊고 생기 넘치는 향기는 아무래도 겉돌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송남지가 눈을 뜨자, 눈앞에 예쁘고 고급스러운 에비앙 생수 한 병이 보였다.생수병을 쥔 손 역시 뼈마디가 또렷하고 유난히 곧고 단정했다.조금 더 가까워지자 송남지는 묘하게 익숙한 기운을 느꼈다.“물 좀 마셔요, 송남지 씨.”귀에 익은 목소리에 송남지는 놀라 고개를 들었고 곧바로 상대방의 눈과 시선이 얽혔다.“천남현 씨?”송남지는 눈을 가늘게 떴다. 천남현이 이곳에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천남현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음? 언제까지 이렇게 물만 들고 있게 할 작정이에요?”그제야 정신이 든 송남지가 고개를 저으며 천남현의 손에서 물을 받아 들었다.천남현은 자연스럽게 송남지 옆자리에 앉더니 그녀 손가락 끝에 놓인 가방으로 시선을 옮겼다.“이게 오히려 골칫거리가 됐네요.”송남지는 흠칫 놀랐다.“다 들으셨어요?”천남현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네, 제 차가 마침 그쪽 차 뒤에 있었거든요. 못 보셨겠지만, 바로 옆에 주차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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