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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가면을 쓴 남편: Chapter 741 - Chapter 750

772 Chapters

제741화

눈물로 얼룩진 시야 너머로 비행기가 이착륙하는 풍경이 아스라한 안개처럼 일렁였다.그 흐릿한 장막을 뚫고 누군가의 실루엣이 다가와 손수건을 쓱 내밀었다.“눈물 좀 닦아요.”천남현이었다.그가 아직 안 가고 있었던 것이다.송남지는 처참하게 무너져 우는 꼴을 보이고 싶지 않아 고개를 푹 숙였다.시선을 떨군 채 손수건을 받아 들고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내자, 그제야 흐릿했던 시야가 맑아졌다.그녀가 코를 훌쩍이며 물었다.“아직 안 가셨어요?”천남현은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가려고 했는데, 하도 서럽게 울길래 무슨 일이라도 날까 봐 옆에서 좀 지켜보고 있었습니다.”“죄송해요...”“미안할 거 없습니다. 마침 제 비행기도 지연됐으니 송남지 씨가 비행기 타는 것까지 보고 가죠.”천남현은 송남지의 곁에 조용히 앉아 그녀의 비행기 탑승 안내 방송이 울릴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방송이 나오자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탑승 시간입니다.”송남지가 퍼뜩 정신을 차리며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아, 네.”살짝 휘청이는 그녀를 보며 천남현이 주의를 주듯 말했다.“친구 보러 가는 길인 건 알겠는데, 일단 본인 멘탈부터 챙기시죠. 지금 그 컨디션으로는 수리스 땅 밟기도 전에 쓰러질까 봐 걱정되네요.”수리스까지는 확실히 길고 고단한 비행이 될 터였다.송남지는 억지로 기운을 쥐어짜 냈다.“알아요. 제가 알아서 잘 챙길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그녀의 차가운 눈동자에 순간 지독한 오기가 번뜩였다.박재용을 만나기 전까지는 결코 이대로 무너질 수 없었다.그 단단한 의지를 확인하고 나서야 천남현은 비로소 안도의 기색을 내비쳤다.그녀가 탑승구 안으로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천남현은 마음을 놓고 발길을 돌렸다.그때 주머니 속 휴대폰이 울렸다. 은지영이었다.“이제 한 시간만 있으면 내 그림 볼 수 있는 거지? 네 비행기도 거의 다 도착했지?”천남현이 침착하게 변명을 늘어놓았다.“1시간 안에는 무리일 것 같아. 비행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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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42화

제멋대로에 오만하기 짝이 없는 은지영은 철저히 온실 속 화초처럼 길러진 부잣집 영애의 전형이었다.천남현은 가끔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여동생이 살아있었다면 아마 은지영처럼 자라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을 하곤 했다.지금 그가 은지영의 모든 갑질과 투정을 다 받아주는 건, 일찍 죽은 동생을 향한 일종의 맹목적인 보상 심리였다.잡생각이 걷힐 무렵, 운전기사가 도심의 화려한 별장 앞에 차를 멈춰 세웠다.집 안은 대낮같이 불을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차에서 내린 천남현은 집사로부터 은지영이 이미 잠자리에 들었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하지만 대문 너머로 2층을 바쁘게 오가는 은지영의 실루엣이 훤히 보였다.그는 눈썹을 까딱거리며 여유롭게 대답했다.“괜찮습니다. 절 보기 싫어서 그러는 거 다 아니까요. 제가 직접 전화해 보죠.”휴대폰 발신음이 울리자마자 2층에서 전화를 받는 은지영의 모습이 보였다.“화났어? 나 보기 싫어?”은지영이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그럼 보고 싶겠어? 나 바람맞힌 주제에. 천남현, 네가 언제부터 감히 나를 기다리게 만들었어? 나 요새 기분 안 좋은 거 뻔히 알면서.”그녀의 심기가 왜 그토록 꼬여 있는지 천남현이 모를 리 만무했다.결국은 그 하정훈과 얽힌 지긋지긋한 문제 때문이리라.천남현은 끈기 있게 그녀를 달랬다.“미안해, 다 내 잘못이야. 널 두 시간이나 기다리게 했으니 내가 죽을죄를 지었어. 근데 내 얼굴은 꼴 보기 싫더라도 그림은 봐야 할 거 아냐. 백 화백의 절필작인데...”은지영은 콧방귀를 뀌며 대꾸했다.“지금은 그림 따위 볼 기분 아니야. 내일 아침에 사람 시켜서 재스민으로 보내.”천남현은 2층의 실루엣을 올려다보며 살짝 미간을 좁혔다.“정말 그림 안 볼 거야?”“확실해! 그놈의 그림 끌어안고 당장 내 집 앞에서 꺼져!”천남현은 몇 초간 침묵하다 시선을 거두며 대답했다.“알았어.”뚝 끊긴 전화를 내려다보며 은지영 역시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별일이네. 예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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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43화

민지현은 그제야 전시회 시즌이 코앞으로 다가왔음에도 은지영이 그토록 여유를 부릴 수 있었던 이유를 깨달았다.진작부터 피날레를 장식할 비장의 무기를 준비해 두었던 것이다.그녀가 고개를 저었다.“아침부터 온 사람도 없었고 관장님이 말한 그 그림도 못 봤어요.”은지영은 당황한 기색을 내비쳤다.“그럴 리가 없는데? 딴생각하느라 못 본 거 아니야?”그렇게 말하며 은지영은 민지현을 향한 불만을 노골적으로 쏟아냈다.“너 이번 시즌에 신인 화가 계약도 한 건 못 따냈고 박재용 문제도 제대로 해결 못 했잖아. 내가 백 화백 그림을 구해오지 않았으면 이번 재스민 전시회가 얼마나 망신거리가 됐을 줄 알아? 내가 이렇게 큰 문제를 해결해 줬으면 넌 최소한 신경이라도 써야지, 감히 딴청을 피워? 애초에 송남지가 부탁하지만 않았어도 넌 진작에 해고였어!”박재용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민지현의 기분은 또다시 바닥으로 가라앉았다.그녀는 천천히 시선을 들어 은지영을 마주 보았고 마침내 무언가 결심한 듯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내가 계약하려던 화가들, 넌 신인이라 가치가 없다며 전부 무시했지. 하지만 우린 갤러리를 운영하는 거지, 이미 다 큰 스타들만 모아놓고 장사하는 엔터테인먼트 회사가 아니야. 신인을 발굴해야만 더 큰 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고. 그리고 박재용 건은 재스민에 남겨진 고질적인 문제였어. 네가 대표 자리에 앉았으면 당연히 네가 책임지고 해결해야 할 일이지, 아트 디렉터인 내가 신경 쓸 문제가 아니라고. 난 또 이번 전시회에 네가 무슨 대단한 안목이라도 준비한 줄 알았더니, 결국 남자 인맥에 기댄 것뿐이었네. 애당초 남지 씨가 너한테 날 부탁하는 게 아니었어. 이 아트 디렉터 자리, 나 더 이상 안 해. 내 팀원들도 전부 데리고 나갈 거야.”은지영은 순간 멍해졌다.그녀는 자신이 아침 일찍 일어난 탓에 헛것을 들은 것이라 생각하며 되물었다.“너 지금 뭐라 그랬어?”민지현이 어이없다는 듯 눈을 흘겼다.“방금 길게 설명했는데, 시간 낭비하면서 두 번 반복할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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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44화

수화기 너머로 기나긴 정적이 맴돌았다.그 침묵은 은지영에게 지금껏 경험해보지 못한 기묘한 불안을 안겨주었다.천남현이 이런 식으로 나온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그의 침묵 앞에 은지영은 문득 자신의 태도에 문제가 있었나 싶어 짧은 회의감이 들었다.다행히 곧이어 들려온 대답은 평소보다 훨씬 쉰 목소리였고 지독한 독감에 걸린 듯했다.“독감에 걸렸어.”천남현의 목구멍에는 가시가 박힌 듯 단 몇 마디를 뱉는 것조차 고통스러워 보였다.은지영은 가슴 깊이 숨을 들이켰다. 오늘 서경의 날씨는 그녀의 심기만큼이나 찌푸려져 있었고 방금 전 민지현에게 당한 모욕은 아직도 목구멍을 턱 막고 있었다.은씨 가문이 서경을 떠나 십여 년을 비운 사이, 이제는 발에 치이는 것들까지 자신을 우습게 보는 것 같아 울화가 치밀었다. 고작 갤러리 아트 디렉터 따위가 감히 누구 앞이라고 목소리를 높인단 말인가.은지영은 차가운 냉소를 뱉어내며 이를 악물고 말했다.“그림을 직접 가져오라는 것도 아니고, 독감 걸린 게 뭐 대수라고? 어제 아침 일찍 그림을 갤러리로 보내겠다고 약속한 건 너잖아!”천남현은 미간을 찌푸린 채 인내심을 갖고 설명했다.“독감이 심해서 몸이 너무 안 좋아... 그래서 좀 늦게 일어났고, 전달하는 것도 늦어진 거야...”“네가 독감 걸린 게 내 탓이야? 그러니까 네 독감 때문에 내가 왜 이런 불편을 겪어야 하냐고! 지금 당장 사람 시켜서 그림 보내. 그리고 내 갤러리에서 일할 아트 디렉터도 새로 구해와. 아니, 그냥 내가 신경 쓸 필요 없게 팀 전체를 새로 꾸려.”천남현은 잠시 멍하니 멈춰 섰다. 그는 가늘게 눈을 뜨며 담담하게 물었다.“내가 독감에 걸린 게 네 탓은 아니지. 네가 내 상태에 대한 결과를 책임질 필요도 없고. 하지만 넌 생각해 본 적 있니? 네가 대체 무슨 짓을 했기에, 내가 너한테 맹목적으로 퍼주고 도와야 하는 건지 말이야.”그의 질문에 은지영은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그의 태도는 너무나 생소했고 은지영은 당혹감을 감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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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45화

천남현은 거칠게 기침을 두 번 쏟아내고는 나직하게 덧붙였다.“지영아, 앞으로 네 일엔 일절 관여 안 할 거야.”...화동 공항에서 수리스행 비행기는 타하에서 경유해야 했는데 대기 시간만 꼬박 3시간이었다.피로에 절여진 송남지에게 그 시간은 차마 견디기 힘든 고역이었다. 야속하게 흐르는 시간은 세 시간을 마치 사흘처럼 늘려놓은 듯 길기만 했다. 그 시간을 가까스로 견뎌내니 다시 여섯 시간의 비행이 기다리고 있었다.송남지는 좁고 답답한 이코노미석에 앉아 구름 너머를 응시했다. 잠은 오지 않았고 정신은 몽롱했다.그렇게 그녀는 눈시울이 붉게 짓무를 때까지 고통스러운 시간을 삭여냈다.여섯 시간의 비행 끝에 수리스의 밤이 내려앉을 무렵에야 도착할 수 있었다.자리에서 일어난 송남지는 다리에 감각이 없어 비틀거렸고 앞 좌석을 간신히 붙잡고서야 넘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그녀는 이정표를 따라 서둘러 입국 심사대를 빠져나왔다. 밤공기 속에 잠긴 수리스 공항의 통유리벽은 거대한 흑요석처럼 빛났고 그 위로 활주로의 흐르는 불빛이 아른거렸다.짐도 없는 그녀는 곧장 택시 타는 곳으로 달려갔다.택시 안에서도 그녀의 신경은 팽팽하게 곤두서 있었다. 성루이아 병원을 검색해 기사에게 보여주는 내내 그녀의 손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기사가 베리히어로 뭐라 물었지만 알아들을 리 만무했다.송남지는 번역 앱을 켜서 기사에게 대화를 유도했다.번역된 글자를 확인하고서야 기사가 그녀의 떨리는 손을 보고 걱정되어 물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번역기를 통해 송남지는 대답했다.“친절한 걱정 감사합니다. 전 괜찮아요. 병원에 가는 건 친구를 병문안하기 위해서예요.”그제야 안심한 기사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걱정 마세요, 여사님. 수리스에서 가장 뛰어난 병원인 성루이아 병원까지 신속히 모시겠습니다. 병원 주변 풍경이 아주 좋으니, 부디 그 경치를 보며 마음을 좀 추스르시길 바랍니다.”택시는 A51 고속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달렸다. 처음엔 그저 평범한 교외의 밤 풍경이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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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46화

택시가 입구로 이어지는 마지막 커브를 돌자 송남지는 입구에 놓인 아주 수수한 명패를 보았다. 가공되지 않은 천연석에 베리히어와 영어가 나란히 새겨져 있었다.자동문이 미끄러지듯 소리 없이 열렸고 차도 양옆으로는 세심하게 가꿔진 겨울 식물들이 늘어 서 있었다. 짙은 겨울밤인데도 하얀 동백과 검은 열매들이 조명을 받아 보석처럼 빛났다.차는 본관 앞 비 가림막 아래에 멈춰 섰다.짙은 제복 차림에 어깨선이 꼿꼿한 도어맨이 이미 그곳에서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송남지는 차에서 내려 통유리로 된 로비를 바라보았다. 마치 빛나는 크리스털 상자처럼 눈 앞에 펼쳐진 그곳은 수리스 호수의 밤 풍경과 먼 산의 능선, 그리고 그 안에 투영된 다른 세상의 은하수를 고스란히 머금고 있었다.호수에서 불어온 밤바람에는 습한 물기와 시린 전나무 향이 묻어났다.송남지는 영어로 도어맨에게 말을 걸었다.“친구를 보러 왔어요. 이름은 박재용입니다.”박재용이라는 이름은 도어맨에게 너무나 낯설었다. 도어맨은 고개를 저었다.“죄송합니다만 성루이야 병원은 예약 없이는 들어오실 수 없습니다. 면회라 할지라도 환자 본인의 동의가 있어야만 입장이 가능합니다.”송남지의 가슴에 맺혀 있던 긴장감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 잠시 풀렸다가, 다시금 팽팽하게 조여들었다.사실 병원 입구에서 가로막힐 수도 있다는 생각은 진작부터 하고 있었다.알프스산맥의 청량하면서도 시린 한기가 섞인 밤바람이 그녀의 트렌치코트를 파고들자 어깨가 저절로 가늘게 떨렸다.송남지는 병원 문 앞에 서서 먼저 박재용에게 전화를 걸어보았다.예상대로 지난 몇 달간 통화가 되지 않았던 것처럼, 오늘 밤 역시 연결되지 않았다.신호음만 가다 끊겨버린 전화기를 보며 송남지는 젊은 도어맨을 돌아보았다.문득 한 가지 생각이 스친 그녀가 조심스레 물었다.“휴대폰 좀 빌려주실 수 있나요? 제 유심칩이 여기선 안 터져서 전화를 걸 수가 없네요.”그녀는 작은 거짓말을 내뱉었다.도어맨은 별 의심 없이 선선히 전화를 건네주었다. 어려운 일도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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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47화

박재용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삼촌, 누구 좀 마중 나가줘요.”박명규가 어안이 벙벙한 듯 되물었다.“마중? 공항이야, 아니면 어디? 너 친구 하나 없던 놈 아니었냐?”박재용은 조바심이 났는지 팔에 꽂혀있던 링거 바늘을 거칠게 빼려 했다.“진짜 답답하네, 그냥 내가 직접 갈게요.”다행히 박명규가 재빨리 그를 가로막았다.“알았어, 알았어. 내가 가면 되잖아. 누구라고?”“송남지요. 병원 정문에 있어요.”박명규의 발걸음이 일순간 멈칫했다.“재스민의 그 송남지? 너 걔랑 사귀는 거냐? 내 기억엔 유부녀였던 것 같은데.”박재용이 무심하게 삼촌을 슥 쳐다봤다.“재스민 이제 그 여자 거 아니에요. 사귀는 사이도 아니고 이제 유부녀도 아니고요.”박명규가 자조 섞인 목소리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삼촌이 참 대단하지? 어떻게 맞는 답이 하나도 없냐.”박재용이 쓸쓸하게 웃어 보였다.“삼촌, 일부러 그렇게 나 웃겨주려고 애쓰지 않아도 돼요. 얼른 가서 데려와 줘요. 오늘 수리스 바람이 너무 세서 그 사람 많이 추울 거예요.”유리문 앞.송남지는 저 멀리서 걸어오는 한 남자의 실루엣을 발견했다. 가까이 다가온 남자는 박재용의 삼촌, 박명규였다.피로가 가득한 그의 얼굴에는 지울 수 없는 깊은 슬픔이 서려 있었다.송남지는 손을 흔들었다.“아저씨, 저 여기 있어요!”박명규의 안내로 송남지는 병원 안으로 들어섰다.박명규는 어른 체면에 아랫사람 일에 사사건건 참견할 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도무지 궁금증을 참을 수 없는 질문들이 머릿속을 맴돌았다.송남지는 그 마음을 단번에 꿰뚫어 보고 싹싹하게 입을 열었다.“아저씨, 궁금하신 게 있다면 뭐든 물어보셔도 돼요.”박명규가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정말 눈치가 빠르구나. 내가 할 말 있는 걸 어떻게 알았니.”송남지는 박명규에게 박재용과 연락이 닿지 않아 애를 먹었으며, 우여곡절 끝에 간신히 병원 주소를 알아냈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재용이 녀석 말이, 이제 네가 재스민 대표도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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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48화

정밀 의료기기에 둘러싸인 박재용의 모습은 마치 기계에 갇힌 포로와도 같았다.안색은 대리석처럼 투명하게 창백했고 감긴 눈꺼풀 아래로 푸른 정맥이 선명히 드러났으며 한때 화폭 위를 자유롭게 누비던 손가락은 이제 모니터 배선 옆에 힘없이 놓인 채 손톱 끝에 연보랏빛 죽음의 그림자를 머금고 있었다.호흡 마스크 아래로 내뱉는 숨결은 두꺼운 시멘트벽에 가로막힌 듯 짧고 위태로웠고 고가의 심전도 모니터 위에 그려지는 곡선들은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위태로워 보는 이의 심장을 조여왔다.송남지는 문 앞에 서서 잠시 굳어버렸다.그녀는 천천히 침대 곁으로 다가가 그의 손을 잡으려 했지만, 이 연약한 존재를 깨뜨릴까 두려워, 혹은 현실 같지 않은 차가운 온기에 닿을까 무서워 허공에서 손을 멈췄다.실내에는 기계의 단조로운 비프음만이 흐를 뿐이었고 그 거대한 정적 속에서 송남지는 소중한 무언가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그것은 지금 이 순간 조금씩 희미해져 가는 박재용의 심장 박동과도 같았다.박재용은 온 힘을 다해 미소를 지으며 활기찬 척해보려 했지만 눈가에 서린 깊은 쇠약함만은 도저히 감출 수 없었다.그는 짐짓 송남지를 놀리듯 농담을 던졌다.“설마 나한테 반한 거예요? 만 리 길을 마다치 않고 달려온 거 보니 좀 겁나네요. 내가 남지 씨한테 내일은 약속 못 합니다. 나조차 내가 내일까지 버틸 수 있을지 의문이거든요.”송남지는 애써 기운을 내면서도 아주 조심스럽게 그의 팔을 툭 쳤다.“재용 씨, 지금 이 상황에서도 장난이 나오세요?”그 모습을 보던 박명규는 박재용이 분위기를 밝히려고 애쓰는 게 딱 평소의 자신 같다고 생각했다.박재용을 웃겨주려고 매일같이 실없는 소리를 해대던 그였으니까.하지만 이제 박명규는 알 것 같았다. 이런 농담은 차라리 하지 않는 게 낫다는 것을. 웃기기는커녕 도리어 상황을 더 비극적으로 만들 뿐이었다.박재용은 살짝 맞은 팔이 아픈 듯 인상을 쓰며 엄살을 피웠다.송남지는 순간 당황해 급히 손을 거두며 겁에 질린 눈으로 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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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49화

이곳은 병원이라기보다는 최첨단 의료 장비와 최고 수준의 의료진을 갖춘 6성급 호텔에 더 가까웠다.층마다 객실이 즐비한 이곳의 복도를 지나 송남지가 들어선 방은 마치 호텔의 프레지덴셜 스위트룸을 연상케 했다.벽면은 부드러운 미색 스웨이드로 마감되어 있었고 침대 헤드는 통호두나무를 통째로 깎아 만들어 방 전체가 따스한 분위기를 자아냈다.소파에는 보들보들한 영양 가죽 담요가 덮여 있었고 옆에는 복고풍 캡슐 커피 머신이, 냉장고에는 페트뤼스와 에비앙이 정갈하게 진열되어 있었다.박명규는 욕실을 가리키며 말했다.“먼저 씻고 나와요. 안에 깨끗한 수건이 있으니까. 곧 간호사 시켜서 갈아입을 옷도 보내줄게요. 준비 끝나면 저녁 같이 먹죠. 남지 씨가 와서 재용의 기분이 한결 나아졌으니, 뭐라도 좀 먹어줄 것 같네요.”송남지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샤워실에 들어가 고개를 들자 유리 선반 위로 고급스러운 세면용품들이 가득 보였다.그중 하나는 하정훈이 평소 쓰던 것과 똑같은 H사의 바디워시였다. 묵직한 설송 향이 감도는 그 제품을 송남지는 자신도 모르게 조금 짜 보았다.코끝으로 하정훈의 향기가 밀려왔다.사실 병원에 발을 들이던 순간부터 묘하게 그가 머무는 공간과 닮았다고 느꼈었는데, 원인은 이 향기였던 것이다.온수가 쏟아지자 그녀는 눈을 감은 채 긴 여정의 피로를 씻어냈다.물방울이 서늘한 뺨을 타고 흐르자 딱딱하게 굳어있던 그녀의 마음도 조금씩 말랑해졌다.한 시간 뒤, 송남지는 샤워 타월을 두른 채 욕실 문을 열었다. 문밖에는 갈아입을 옷이 조용히 놓여 있었는데, 다름 아닌 우윳빛의 트렌치코트였다.우윳빛 트렌치코트는 송남지에게 꽤 낯선 옷이었다.어릴 적부터 송남지는 흰옷을 즐겨 입지 않았는데, 혹여나 더러워지면 어머니가 빨래하시기 힘들까 봐 일찍이 철이 든 탓이었다.바닥에 놓인 옷을 주워 입고 거울을 보니, 우윳빛 코트 덕분에 평소의 서늘함 대신 귀엽고 사랑스러운 분위기가 풍겼다.곁에는 베이지색 목도리도 함께 놓여 있었다.송남지는 미간을 살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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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50화

박재용이 침대 옆 버튼을 누르자 그가 누워 있던 침대가 순식간에 이동 가능한 전동 휠체어로 변했다.마치 트랜스포머 같은 놀라운 첨단 기술에 송남지는 눈이 휘둥그레졌다.박재용은 휠체어의 조작 버튼을 눌러 식탁 옆으로 천천히 이동했다.그러고는 짐짓 자랑스러운 듯 눈썹을 까닥이며 물었다.“어때요? 멋있죠? 이거 나만을 위해 맞춤 제작한 휠체어거든요.”송남지는 휠체어의 성능이 좋다는 생각보다는 그저 막연한 희망을 보았을 뿐이었다. 돈만 있다면 불치병은 없다고 했던가, 충분한 자금만 뒷받침된다면 생명은 어떻게든 연장할 수 있을 테니까.마침 업무 전화를 받은 박명규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남지야, 오늘 밤은 나 대신 네가 재용이 좀 잘 감시해서 밥 좀 먹여줘.”송남지는 힘주어 고개를 끄덕였다.“아저씨, 걱정 마세요. 제가 억지로라도 먹일 테니까요.”박재용이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나 환자예요, 환자! 나한테 좀 다정하게 대해달라고!”박명규는 웃으며 병실을 나갔다.송남지가 박재용을 돌아보며 말했다.“전에 내가 너무 상냥해서 만만해 보였어요? 이렇게 큰일이 났는데 숨기고 연락도 안 하고... 내가 안 달려왔으면 정말 영영 못 볼 뻔했잖아요.”천남현의 말에 따르면 박재용은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다고 했다.비관적으로 생각하면 정말 다시는 못 볼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다.박재용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기운을 내려 애썼지만 여전히 지치고 쇠약한 모습이었다.“미안해요, 남지 씨. 친구로서 연락을 끊은 건 내 잘못이지만... 정말 그러고 싶지 않았어요.”그는 울먹이면서도 말을 이었다.“내 초라한 모습을 남지 씨한테 보이고 싶지 않았어요. 내 가족들처럼 수술실 밖에서 절망하며 기다리게 하는 건 나한테 너무 큰 짐이었거든요.”송남지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화가 났지만 박재용을 탓할 수는 없었다.“위중하다는 사실을 말 안 한 건 탓하지 않아요. 다만 왜 진작 본인의 병세를 나한테 숨겼냐는 거예요. 그랬다면, 적어도 내가 재용 씨를 그렇게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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