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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41화

강현.따스한 햇살이 포근하게 내려앉은 주말, 송하나는 차설아와 함께 최이솔을 데리고 놀이공원으로 향했다.최이솔은 한 손으로 엄마 차설아의 손을 꼭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송하나의 손을 꽉 쥐었다. 깡충깡충 발걸음을 옮기며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해 보였다.엄마도 좋고 이모도 좋은데 거기에 제일 좋아하는 놀이공원까지 오니 말 그대로 행복만땅이었다.송하나는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아이의 모습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그녀가 고개를 숙여 물었다.“이솔이 뭐 타고 싶어?”“회전목마요!”최이솔은 하얀 목마를 가리키며 눈을 반짝였다.이에 차설아가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놀이공원 올 때마다 회전목마래. 좀 새로운 거 타면 안 돼?”최이솔이 당당하게 말했다.“저는 회전목마가 좋아요!”옆에 있던 송하나가 활짝 웃었다.“그럼 회전목마 타자. 얼른 가서 줄 서야지.”세 사람은 인파에 섞여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한편 송하나는 왠지 모를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마치 보이지 않는 시선이 바로 뒤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서 자신을 꿰뚫어 보는 듯한 기분에 고개를 홱 돌렸지만, 온통 사람들로 발 디딜 틈 없이 붐볐다.아빠 품에 안긴 아이, 팔짱을 끼고 지나가는 젊은 커플, 아이들의 환호를 받으며 풍선을 불고 있는 광대.모든 것이 평범해 보였지만 다시 발걸음을 옮기자 그 낯선 감각이 또다시 등골을 서늘하게 파고들었다.차설아가 그녀의 이상한 기색을 눈치채고 나지막이 물었다.“하나야, 왜 그래?”송하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목소리를 낮췄다.“그게... 왠지 자꾸 누가 우릴 감시하는 것 같아. 넌 그런 느낌 안 들어?”차설아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그녀는 최로운에게서 심성빈이 이번에 해외로 간 이유가 빅토르라는 악마를 상대하기 위해서라고 들었다.송하나의 안전을 위해 심성빈은 24시간 그녀를 경호할 사람들을 미리 배치해 놓았던 것이다.그렇다면 이들이 바로 그가 몰래 보낸 사람들이겠지.송하나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던지라 차설아는 웃으며 말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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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42화

홍경자는 병원을 오가는 사람들 틈에서 깊은 상념에 잠겨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강우야, 이 할미는 이제 더 바라는 거 없어. 딱 하나, 네가 가정을 이루는 모습을 못 보고 가는 게 소원이란다.”이강우는 휠체어를 밀다가 흠칫하며 입을 꾹 다문 채 침묵을 지켰다.이에 홍경자는 고개를 돌려 애석한 눈빛으로 훤칠한 체구의 손자를 바라보았다.“하나 그 아이는... 에휴, 다 우리 집안이 복이 없어서 그런 거지 뭐. 이제 시간이 많이 흘렀어, 강우야. 지난 일은 다 잊고 앞을 보고 살아야지. 언제까지 혼자 지낼 순 없잖니.”송하나와 차정원이 혼인 신고를 했다는 소식을 들은 후, 홍경자는 손주 녀석과 송하나가 더는 재결합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그 후로도 이강우에게 서로 조건이 비슷한 선 자리를 주선했지만, 그가 번번이 거절하며 만남을 피했다.이제 자신도 나이가 들어가고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 기약도 없는데 손주 녀석이 평생 이대로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살아갈 것을 생각하니 덜컥 걱정이 앞섰다.이강우의 덤덤한 눈빛에 걷어낼 수 없는 깊은 우울감이 담겨 있었다. 그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요즘 회사 일이 너무 바빠서 당장은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어요.”“할미 다 알아. 네 마음속엔 줄곧 하나 그 아이만 담고 있잖니.”홍경자는 나지막이 한숨을 쉬며 속절없이 이강우를 바라봤다.“하지만 이미 끝난 인연이야. 네가 아무리 집착해 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 이 할미가 눈을 감는 날, 네 할아버지를 뵐 면목이 없구나.”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강우의 휴대폰이 울렸다.그는 고개를 숙여 화면을 들여다보면서 말했다.“할머니, 저 잠깐 전화 받을게요.”곧이어 한적한 구석으로 걸어가 업무 전화를 받았다.그 시각, 송하나는 약을 받아 돌아오는 길에 홍경자와 딱 마주쳤다. 휠체어에 앉아 있는 익숙한 어르신을 보자 그녀의 심장이 가볍게 뛰었다. 오래된 기억들이 순식간에 물밀 듯이 밀려왔다.이강우와 결혼했던 몇 년 동안 홍경자는 이씨 가문을 통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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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43화

이강우는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소나무처럼 곧게 뻗은 모습은 더할 나위 없이 굳건했지만, 그 주위로는 걷어낼 수 없는 고독과 쓸쓸함이 감돌았다.그는 송하나의 가녀린 실루엣이 인파 속으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꼼짝 않고 응시했다. 심장을 짓누르는 먹먹한 통증은 여전히 파도처럼 가슴 속을 일렁였다.오랜 시간이 흐른 뒤, 다시 그녀를 마주하면 예전보다 훨씬 더 차분하고 절제할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하지만 막상 그녀의 차가운 눈동자를 마주했을 때, 그 깊은 곳에 담긴 낯섦과 무관심을 보았을 때, 여전히 슬프고 목이 메었다. 자신이 직접 놓쳐버린 인연에 대해 끝없는 후회만이 밀려왔다.문득 옆에 있던 홍경자가 나지막이 탄식했다.“참 좋은 아이인데, 어휴.”모든 아쉬움과 안타까움은 결국 이 깊은 한숨으로 대체할 수밖에 없었다.몇 해 전만 해도 이강우에게 부디 오만함을 버리고 송하나를 잘 대해주라고 신신당부했지만, 이 녀석은 도무지 귀담아듣지 않았다.그녀를 수없이 외면했고 결국 서운함 속에 잠기도록 내버려 두었다.이제는 아무것도 돌이킬 수가 없다. 아무리 후회한들 만회할 여지가 없었다.한참이 지나서야 이강우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은근히 잠긴 목소리에는 억누르고 또 억눌렀던 신중함이 담겨 있었다.“할머니, 앞으로 하나 앞에서는 절대 차정원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지 마세요.”홍경자는 그 말을 듣고 잠시 멍해졌다.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두 눈에 의아함을 담고 따져 물었다.“그건 왜? 하나 그 사람이랑 진작 혼인 신고한 거 아니었어? 두 사람 명색이 부부인데 인사치레로 안부를 묻는 게 뭐가 문제라는 거야?”이강우는 시선을 내리고 깊은 우울함이 드린 눈가를 감추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차정원 씨 사고 났어요.”그는 잠시 뜸을 들이다 간단하게 이유를 설명했다.“하나가 지금 기억의 일부를 잃은 상태라 차정원 씨 얘기를 꺼내면 고통스러웠던 기억이 되살아나서 또다시 자극받을 수 있어요.”홀가분하게 내뱉은 이 한 마디에 천근만근의 무게를 지니고 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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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44화

‘정원 오빠가 살아있었다면 아마도 금방 하나랑 아기를 가졌을 텐데.’여기까지 생각한 차설아는 마음 한구석에 슬픔이 밀려왔다.그녀는 황급히 등 돌리고 애써 눈물을 참으며 감정을 추슬렀다.“가자. 이만 집에 가야지.”해외, 대표이사실.심성빈은 몇 시간 동안의 고강도 업무를 막 끝낸 참이었다. 이따가 또 영상회의가 예정되어 있어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짧은 휴식을 취했다.며칠 밤낮으로 쉬지 않고 이어진 업무에 그의 눈가에는 옅은 피로감이 드리워졌다.고개를 들어 옆에 있는 비서에게 시선을 던지는 이 남자, 차분한 목소리에는 몸에 밴 듯한 그리움이 묻어났다.“하나는 오늘 뭐 하고 있어?”비서는 즉시 몸을 숙여 보고했다.“오전에는 차설아 씨와 최이솔 어린이를 데리고 놀이공원에 다녀왔고 오후에는 병원에 갔습니다...”‘병원’이라는 두 글자에 심성빈은 순간 신경이 곤두서고 눈가에도 은근한 긴장감이 스쳤다.“병원에는 왜? 어디 아픈 거야?”“아니요. 송하나 씨가 아니라 최이솔 어린이가 아파서 다녀왔어요.”비서는 서둘러 해명했다.“아이가 음식을 너무 많이 먹어서 체한 것뿐입니다. 큰 문제는 아니고요, 지금은 병원에서 나왔습니다. 송하나 씨도 별일 없으십니다, 대표님.”심성빈은 그제야 가슴을 짓눌렀던 걱정을 내려놓았다.“다행이네.”강현의 밤이 서서히 깊어갈 때, 검은색 세단 한 대가 송하나가 사는 아파트 건물 아래에 조용히 멈춰 섰다.이강우는 시동을 켜둔 채로 차 안에 홀로 앉아 창문을 반쯤 내렸다. 싸늘한 밤바람이 불어와 그의 이마 잔머리를 부드럽게 쓸어 넘겼다.불붙인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끼우자 희미한 연기가 피어올라 눈가를 흐릿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의 눈동자 깊은 곳에 자리한 우울함과 황량함까지는 가리지 못했다.오늘은 이강우와 송하나의 결혼기념일이었다.마음이 심란했던지라 자신도 모르게 이곳까지 와버렸다.지난 기억들이 파도처럼 밀려와 꼭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매년 결혼기념일마다 송하나는 그가 좋아하는 음식들로만 정성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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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45화

“네, 알겠습니다.”관리실 직원은 공손히 대답하곤 물건들을 챙겨서 위층으로 올라갔다.한편 이강우는 바로 떠나지 않았다.꼿꼿한 자세로 차 문에 기대 마지막 남은 담배 한 대에 불을 붙였다.그녀와 가장 가까이 있는 이 밤의 정취를 애처롭게 붙잡는 동시에 마음속에 쌓아둔 오랜 세월의 후회를 조용히 삼켰다.아파트 안.샤워를 마친 송하나는 검은 머리가 물기를 머금고 어깨를 적셨다.옅은 색의 홈웨어를 입은 그녀는 소파에 앉아 수건으로 머리를 말리고 있었다.별안간 초인종이 울렸다.가정부가 현관으로 다가가 문을 열어주더니 곧이어 케이크와 고급스러운 선물 상자를 하나 들고 들어왔다.“하나 씨, 이거 관리실에서 특별히 하나 씨한테 드린다며 가져다주네요.”송하나는 고개를 들고 눈가에 놀라움이 스쳐 지나갔다.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심성빈이었다.늘 그녀가 좋아하는 케이크를 사다 주었으니까.요즘 해외에서 일에 치여 지내는 이 남자가 아마도 자신을 외롭게 둔 게 마음에 걸려 친히 선물을 보낸 모양이었다.하지만 선물 상자를 열어보니 뭔가 잘못되었다는 기분이 들었다.안에는 디자인은 수수하지만, 지극히 고급스러운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들어 있었다. 한눈에 봐도 엄청난 고가임이 분명했다.심성빈이 허구한 날 자신에게 이토록 비싼 선물을 사줄 이유가 뭘까?“누가 관리실에 보냈대요?”송하나는 의아함이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이에 가정부가 사실대로 대답했다.“그게 실은 선물 주신 분이 신원을 밝히고 싶지 않다면서 그 대신 하나 씨한테 꼭 좀 전해달라고 부탁하셨대요.”송하나는 생각할수록 기분이 찝찝했다.만약 정말 심성빈이라면 이렇게까지 각 잡고 몰래 보낼 리가 없으니까.그녀는 재빨리 창가로 다가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가로등 불빛 아래 묵직하고 세련된 검은색 세단 한 대가 조용히 서 있었다.강현에서 이런 급의 차량은 흔치 않았기에 송하나는 금세 알아볼 수 있었다.차 옆에는 훤칠한 체구의 남자가 차체에 비스듬히 몸을 기대고 있었다. 텅 빈 밤공기 속에 홀로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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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46화

송하나는 더 이상 이강우를 쳐다보지 않고 몸을 돌려 위층으로 올라갔다.홀로 남겨진 이강우는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심장에 생채기가 나서 촘촘히 파고드는 통증이 온몸으로 번져 나갔다. 칼날이 심장을 후벼 파는 것 같아 숨조차 쉴 수 없었다.한참을 그렇게 헐떡이며 질식할 것 같은 아픔을 삼키고 나서야 굳어버린 몸을 간신히 이끌고 차에 다시 앉았다.해외, 개인 병원.무균 중환자실은 온통 하얀색뿐이라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침대에 누운 빅토르는 온몸에 관이 꽂혀 있었고 모니터 위로 쉼 없이 뛰는 수치들은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아슬아슬했다. 단조롭고도 차가운 기계음은 쇠약해져 가는 그의 몸 상태를 냉혹하게 알렸다.집사는 병상 옆에 서서 심각한 표정으로 나지막이 보고했다.“보스, 에르빈 교수님께 여러 차례 도움을 청했지만, 그분이 워낙 단호하셔서 끝까지 특효약 제공을 거부하고 계십니다.”빅토르의 핏기 없는 입술에서 싸늘한 미소가 번졌다.그는 거의 숨을 쉬지 못할 지경이었으나 눈동자 속에는 여전히 꺾이지 않는 자존심과 음침함이 도사리고 있었다.“영감탱이가 제법 독하네.”집사는 초조한 마음에 한 걸음 다가서며 말했다.“보스! 의사 말로는 현재로서 장기 적합도가 완벽하지 않더라도 일단 임시 이식을 시도하는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그래야만 일단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데 문제는 거부 반응이 일어날 확률이 매우 높고 기껏해야 몇 달 안에 또 장기를 바꿔야 할지도 모른다는 겁니다.”“그럴 필요 없어.”빅토르는 생각할 것도 없이 단호하게 거절했다.그는 타고난 완벽주의자라 평생을 오만하고 고고하게, 그러면서도 지독한 강박과 독선으로 살아온 남자였다.“그딴 저급하고 더러운 장기 따위 내 몸에 담을 수 없어!”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빅토르는 집사의 경악하는 표정을 뒤로하고 온 힘을 다해 몸에 꽂힌 관을 하나씩 뽑아냈다.튜브가 빠져나가고 모니터 연결이 끊기자 기계의 날카로운 경고음이 병실의 싸늘한 정적을 깨뜨렸다.집사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 황급히 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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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47화

에르빈은 말을 마치고 병실을 나섰다.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빅토르는 좀 전의 희미했던 미소가 서서히 사라지고 이내 분노와 음침함만이 소용돌이쳤다.순간 주변 공기가 차갑게 가라앉고 서늘한 기운이 숨죽인 채 번져 나갔다.“사악한 영감탱이야!”낮고 거친 목소리로 내뱉은 이 한 마디, 그 속에는 엄청난 불만과 분노가 담겨 있었다.에르빈은 그를 살려낸 척했지만, 사실은 약물을 이용해 그를 감금하고 길들이려는 속셈이었다.최소한의 용량으로 겨우 숨만 붙여놓고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어 병상에 묶어둔 채 손쉽게 다룰 수 있는 볼모로 만든 것이다.이토록 구차하게 목숨을 부지하며 타인의 손에 놀아나는 삶은 차라리 깔끔하게 죽임을 당하는 것보다 훨씬 더 고통스럽고 치욕스러웠다.하지만 빅토르는 기어이 그 치욕을 삼켰다. 분노를 터뜨리는 대신 묵묵히 견뎌냈다.며칠간 병실 안은 이상하리만치 고요했다.빅토르는 마치 운명에 순응하기로 한 사람처럼 매일 담담하게 치료를 받아들였다.그는 대부분 시간을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가끔 정신이 돌아올 때조차도 더없이 평온한 모습이었다.그 오만하던 남자가 맞나 싶을 정도로 지나치게 온순해진 모습이었다집사는 매일 곁을 지키며 돌봤지만, 빅토르가 보여주는 평온함은 오히려 그의 불안을 더욱 자극할 뿐이었다.수십 년을 모셔온 보스이기에 누구보다 그 본성을 잘 알았다.평생을 칼날 위에서 살며 결단력 있게 세상을 휘둘러온 빅토르, 뼛속 깊이 굴복을 모르는 야망과 통제욕이 각인된 남자, 그 어떤 규칙에도 얽매이지 않는 보스였다.그런 그가 이렇게 허무하게 무릎을 꿇고 타협할 리 있을까?이토록 이상한 고분고분함은 오히려 그가 어둠 속에서 거대한 반격을 준비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모든 것을 뒤엎어버릴 파멸적인 반격 말이다.아니나 다를까 예상한 대로였다.며칠 뒤, 에르빈은 평소처럼 약물을 투여하고 별다른 이상이 없음을 확인한 뒤 병실을 떠났다.눈을 감고 쉬고 있던 빅토르가 갑자기 두 눈을 번쩍 뜨더니 회색빛이 감도는 푸른 눈동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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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48화

집사는 어쩔 수 없이 빅토르의 말에 따랐다.그 시각, 이원 그룹과 심하 그룹은 리히터 가문과의 기업 전쟁이 여전히 뜨거운 대치 상황에 놓여 있었다.양측 모두 엄청난 자금을 쏟아부으며 누구도 쉽게 항복하려 하지 않았다.빅토르는 병상에 누워 있어 직접 진두지휘할 수는 없지만, 지난번에 판도를 뒤집고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세워둔 치밀한 전략안을 그룹 핵심 경영진에게 남겨두었다.가끔 의식이 돌아올 때면 집사를 통해 원격으로 몇 가지 핵심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그 짧은 명령들이 뇌관이 되어 이원 그룹과 심하 그룹의 연합 공세를 기적처럼 버텨내고 있었다.지금 당장 빅토르를 무너뜨리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에르빈 역시 이 끝없는 소모전에 주목하고 있었다.이대로 대치를 이어가다간 셋 다 공멸하는 파국뿐이라는 것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리히터 가문이 치명상을 입는 것은 물론 이원 그룹과 심하 그룹도 지속적으로 자금 출혈을 겪으며 경영의 근간이 손상되어 장기적인 성장 동력을 잃게 될 터였다.이런 파국만은 막아야 했다.에르빈은 먼저 빅토르를 찾아가 즉시 휴전하고 이원 그룹과 심하 그룹에게 고개를 숙이고 양보할 것을 촉구했다. 그렇지 않으면 특효약 공급을 중단하겠다고 협박했다.빅토르는 그 말을 듣고 창백한 입가에 극도의 조롱이 담긴 냉소가 걸렸다.역시 예상대로였다. 벌써 특효약으로 자신을 쥐고 흔들기 시작한 것이다.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고 목소리에는 노골적인 비웃음이 짙게 배어 있었다.“삼촌은 대체 누구 편이에요? 나보고 굴복하라고 강요하면서 정작 본인도 리히터 가문의 피가 흐르는 사람이라는 건 새까맣게 잊은 건가요?”에르빈의 표정은 한 점 부끄러움 없이 당당했다. 맑은 눈동자에는 그 어떤 사사로운 감정의 치우침도 없었다.“나는 오직 공리와 도의가 향하는 곳에 서 있을 뿐이야. 오늘날의 모든 분쟁은 네가 송하나에게 집착하면서 자초한 일이야. 잘못은 너한테서 시작되었으니 끝을 맺는 것도 당연히 너여야 하지.”빅토르의 눈동자 속에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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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49화

“좋습니다.”에르빈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그럼 대표님의 답변만 기다리겠습니다.”그러고는 나지막이 한 마디 덧붙였다.“만약 송하나 씨가 알게 된다면 어떨까요? 자신을 지키겠답시고 회사를 담보로 이익까지 희생시키는 당신들의 모습을 본다면 오히려 그 아이에겐 씻을 수 없는 죄책감과 불안만 안겨줄 뿐입니다. 대표님께서 부디 제 제안을 진지하게 고려해주시길 바랍니다.”그 말을 마치고 에르빈은 자리를 떠났다. 심성빈에게 홀로 생각할 공간을 남겨둔 것이다.에르빈을 보내고 그는 한참 동안 조용히 앉아 있다가 이강우에게 연락해 방금 그 제안을 그대로 전했다.수화기 너머로 양쪽 모두 긴 침묵이 흘렀다.마침내 정적을 깨고 이강우의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그 사람 약속을 믿을 수 있겠어?”심성빈은 의자 등받이에 기대앉아 눈빛이 더욱 짙어졌다.“에르빈이 가진 최소한의 양심, 그리고 선을 지키려는 의지만큼은 믿고 싶어. 그분도 빅토르가 더 이상 죄 없는 이들을 괴롭히는 걸 원치 않을 테니까.”이강우는 몇 초간 침묵했다.“휴전은 좋아. 하지만 빅토르 그놈이 주제도 모르고 다시 한번 하나를 건드린다면 그때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내 손으로 숨통을 끊어놓을 거야.”심성빈이 말했다.“나도 같은 생각이야.”두 사람이 합의에 이르자 심성빈은 다시 에르빈에게 연락해 조건을 제시했다.첫째, 빅토르의 매주 건강 상태와 투약 기록을 보고할 것. 그가 말한 대로 정말 숨만 붙어 있는 상태인지 확인하겠다는 뜻이었다.둘째, 병원 경비는 양측이 공동으로 맡아 이중으로 감시할 것. 빅토르가 병실 밖으로 한 발짝도 나오지 못하게 완벽히 봉쇄하기 위함이었다.에르빈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흔쾌히 수락했다.“가능합니다. 두 가지 조건 모두 받아들일게요.”모든 협상이 일단락되자 일상이 조금씩 제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했다.심성빈은 부하들을 시켜 수개월째 차정원의 행방을 쫓았지만, 여전히 종무소식이었다.마무리 작업을 끝낸 심성빈은 지체 없이 귀국행 비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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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50화

차설아는 심성빈은 몰라도 송하나라면 안심할 게 뻔했다. 최로운은 바로 그 점을 노린 것이다.심성빈은 한 손으로 앙증맞은 이솔이를 받아들고는 눈앞에서 순식간에 사라진 최로운의 뒷모습을 보며 헛웃음을 삼켰다. 어이가 없어서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적막이 내려앉은 거실.심성빈은 품에 안긴 채 눈을 깜빡이는 꼬마를 내려다보았다.최이솔 역시 고개를 젖히고 맑은 눈동자로 심성빈을 올려다보았다.그렇게 어른과 아이는 몇 초간 말없이 시선을 마주했다.별안간 최이솔의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먼저 울려 퍼졌다.“삼촌, 이솔이 배고파요.”심성빈은 아이를 품에 안은 채 조심스레 부엌으로 향했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달걀 몇 알과 채소 몇 점이 전부였다.그는 수년간 치열한 비즈니스 세계를 누비며 온갖 일을 겪어왔다. 수조 원의 판을 짜고 전략을 세우는 일엔 도가 텄지만, 아이를 돌보는 일만큼은 미지의 영역이었다.당장 이 작은 아이에게 무얼 먹여야 할지부터가 고민이었다.최이솔에게 무엇을 좋아하냐고 물어보려던 찰나, 인기척을 느낀 송하나가 부엌으로 들어섰다.그녀는 단번에 심성빈의 품에 안긴 아이를 보았고 놀란 표정으로 이쪽으로 걸어왔다.“이솔아, 여긴 어떻게 왔어?”송하나는 아주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이솔이를 품에 안았다.아이도 그녀의 목을 감싸 안고 달콤하게 속삭였다.“이모.”심성빈이 전후 사정을 설명하자 송하나는 실소를 터트리며 고개를 저었다.“로운 씨도 참! 미리 말했어야죠.”최이솔이 온다는 걸 진작 알았더라면 아이 입맛에 맞는 간식도 미리 준비하고 장난감도 잔뜩 사두었을 텐데.“이솔이 잠깐만 기다려. 이모가 아침 만들어줄게.”송하나는 냉장고에 있는 재료들로 아이가 먹기 좋은 담백한 아침 식사를 만들었다.최이솔은 입안 가득 음식을 넣고 오물거리며 어찌나 맛있게 먹는지 그 모습이 참으로 사랑스러웠다.배불리 먹고 나니 꼬마의 눈에 다시 생기가 돌았다. 최이솔은 송하나의 목을 껴안고 애교 섞인 투정을 부리기 시작했다.“이모, 이솔이 밖에 나가 놀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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