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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21화

안경 너머 도현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도현은 태휘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작은 변화라도 찾아내려 했다.태휘가 먼저 물었다. “임단아 씨가 지금 여기에 없습니까?” 표정도 목소리도 아까와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도현은 처음에는 없다고 둘러댈 생각이었다. 하지만 최근 지나치게 공교로운 일이 몇 번 이어졌던 게 떠올랐다. 생각을 바꿔 말했다. “있습니다. 지금 쉬고 있는데 제가 불러오죠.”태휘가 짧게 답했다. “부탁드립니다.”도현은 안경을 한번 밀어 올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위층으로 향하기 전 태휘를 몇 초 더 살펴봤지만 특별한 점은 찾지 못했다. 그제야 천천히 계단을 올라갔다.도현은 단아가 있는 방 문을 열었다.앞서 몸이 많이 지친 탓에 단아는 아직 깊게 잠들어 있었다.도현이 침대 옆으로 다가가자 단아의 목과 쇄골에 남은 붉은 자국이 눈에 들어왔다. 격하게 가까워졌던 흔적이었다. 아래층에서 무표정하게 앉아 있는 태휘를 떠올리자 도현의 눈에 알 수 없는 감정이 스쳤다.도현은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단아의 볼을 가볍게 꼬집었다. “일어나.”단아는 그 손길에 잠에서 깼다.아직 정신이 완전히 들기도 전에 도현이 바로 말했다. “진태휘가 아래에서 너 기다리고 있어.”단아의 몸이 굳었다.‘태휘? 여기엔 왜 온 거지?’도현은 단아의 얼굴을 계속 살피며 물었다. “진태휘가 널 왜 찾아왔을까.”단아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나도 몰라.”도현이 천천히 되물었다. “진짜 몰라?”단아가 짧게 답했다. “응.”막 잠에서 깬 단아는 아직 정신이 반쯤 잠겨 있었다. 그래서 줄곧 멍한 표정이었고, 태휘가 왔다는 말을 들었을 때 놀란 기색도 선명한 감정이라기보다 의문에 가까워 보였다.단아가 물었다. “혼자 왔어? 아니면 다른 사람도 같이 왔어?”도현이 답했다. “혼자.”단아는 생각하는 척 눈을 내리깔았다.도현은 더 의심하지 않고 단아의 허리를 안아 그대로 품에 들어 올렸다. “가자. 내려가.”단아가 반사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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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22화

단아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도현은 단아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고 자리에서 일어나 나갔다.얼마 지나지 않아 거실에는 단아와 태휘 둘만 남았다.꼬박 일 분 가까이 두 사람 모두 입을 열지 않았다. 단아는 낯선 사람을 대하듯 태휘와 시선을 맞췄고, 태휘도 말없이 단아를 바라보기만 했다.두 사람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벽이 하나 놓여 있는 듯했다.몇 분쯤 흐른 뒤 단아가 먼저 침묵을 깼다. “여기 왜 왔어?”“네가 전해 달라고 한 말 강솔한테서 들었어.” 태휘는 대답하며 도현의 재킷으로 완전히 가려지지 않은 단아의 목 주변을 잠깐 바라봤다.단아가 짧게 답했다. “응.”태휘가 물었다. “너 하도현 좋아해?”단아의 움직임이 멈췄다.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태휘가 이름을 분명히 했다. “하도현 말이야.”단아가 도현을 좋아한다면 태휘는 더 이상 개입하지 않을 생각이었다.좋아하지 않는다면, 자신이 내린 결정을 단아에게 말할 생각이었다.“내 사생활이야.” 단아는 정면으로 답하지 않았다. 말투에는 예의를 차린 거리감이 묻어 있었다. “다른 일 없으면 이제 가줘.”태휘는 확신하듯 말했다. “넌 하도현 안 좋아해.”단아가 되물었다. “네가 나도 아닌데 어떻게 알아?”“내가 아는 너는 감정 문제를 애매하게 끌고 가는 사람이 아니야.” 태휘는 단아와 시선을 맞춘 채 말했다. “하도현을 정말 좋아했으면 아까 바로 그렇다고 했겠지. 이렇게 피해 가는 대답은 안 했을 거야.”단아는 태휘의 추측을 꺾기 위해 무언가 말하려 했다.하지만 태휘가 먼저 입을 열었다. “미안.”단아의 눈에 의문이 떠올랐다.“네 허락 안 받고 네 동생 해외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먼저 진행했어.” 태휘가 상황을 설명했다. “현지에 내가 믿을 만한 사람도 있어. 하도현이 네 동생을 붙잡고 널 협박할 일은 없을 거야.”태휘가 어제 오지 않은 이유도 그 일을 먼저 처리하느라 그랬다.단아가 자기 일에 멋대로 개입했다며 화를 낸다면, 원하면 지금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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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23화

태휘가 잠깐 침묵한 뒤 물었다. “솔직한 얘기 해도 돼?”단아가 답했다. “말해.”“하도현은 아주 조심스러운 사람이야. 네가 혼자 힘으로 하도현을 움직일 만한 증거를 찾아내는 건 거의 불가능해.” 태휘의 말은 냉정했지만 현실적이었다. “설령 찾는다 해도 하도현은 거기서 빠져나갈 방법을 수도 없이 만들어 낼 거야.”단아는 손끝에 힘을 줬다. “알아.”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그래도 한 번쯤은 해 보고 싶었다.혹시 모르니까... 정말 우연히 도현의 약점을 찾아낼 수도 있지 않을까?“하도현 뒤에는 HS그룹이 있어. 무슨 일이 생겨도 그룹 홍보팀이 가장 빠른 속도로 수습할 거야.” 태휘는 현실적인 부분을 하나씩 짚었다. “나를 믿을 수 있으면 일단 먼저 나와.”단아는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지난 몇 년 동안 도현의 비위를 맞추며 버틴 건 동생이 도현 손에 있어 협박받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언젠가 증거를 찾아 도현에게 복수하고 싶다는 마음도 컸다.하지만 태휘의 말도 맞았다. 개인 한 사람이 가진 힘만으로는 도현을 상대하기 어려웠다.도현 곁에 있으면서 상황을 넘기려고 마음에도 없는 말을 수도 없이 했다. 도현이 그 장면들만 골라 온라인에 풀어 버리면 가장 큰 피해를 보는 건 단아가 될 것이다.“영상이랑 사진은 내가 처리할게.” 태휘는 단아가 충분히 생각한 것 같아 다음 문제까지 짚었다.단아는 태휘를 바라봤다.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태휘의 도움을 받는다면 단아가 자유를 되찾을 가능성은 매우 높았다. 도현이 자료를 터뜨려도 논란 때문에 힘들 수는 있지만, 업계를 완전히 떠나야 할 정도로 일방적으로 짓밟히지는 않을 것이다.태휘가 물었다. “어때?”단아는 마음이 복잡했다. “조금만 시간 줘. 생각을...”끝까지 말하기도 전에 도현의 재킷 안에서 핸드폰이 울렸다. 단아가 반사적으로 주머니를 더듬다가, 도현의 핸드폰이 언제 들어와 있었는지 그제야 알아챘다.누가 전화했는지 확인하려고 꺼냈지만 이미 통화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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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24화

단아가 대답하려는 때 도현이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도현은 단아 옆에 앉으며 자연스럽게 허리를 감쌌다. 팔이 닿자 단아의 몸이 굳어지는 걸 느꼈지만, 도현은 깊어진 눈빛만 잠깐 보일 뿐 아무것도 따지지 않았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물었다. “두 사람 아직 얘기 안 끝났어?”태휘는 사실대로 답했다. “조금 남았습니다.”도현이 다시 단아를 바라봤다.단아는 도현의 핸드폰을 쥔 손에 조금씩 힘을 줬다.눈에 띄지 않게 핸드폰을 옆으로 옮기며 최대한 자연스럽게 물었다. “당신은 왜 내려왔어?”도현은 온화한 목소리로, 반듯한 표정을 유지했다. “네가 나 부른 거 아니야?”‘내가 언제 불렀지?’도현은 아주 그럴듯하게 말했다. “아까 위에 있는 나를 쳐다봤잖아. 내려와서 옆에 있어 달라는 뜻 아니었어?”단아는 입술을 다물었다.도현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봤다. “내가 착각했나 보네. 얼마나 더 얘기할 거야? 난 밖에 좀 나가 있을게.”태휘가 답했다. “10분입니다.”“그래. 그럼 계속 얘기해.” 도현은 고개를 끄덕인 뒤 단아를 바라봤다. “핸드폰 줘. 밖에서 전화 좀 하고 올게.”단아는 핸드폰을 쥔 손을 조금 더 뒤로 숨겼다.도현이 너무 빨리 내려오는 바람에 녹음을 지울지 말지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도현이 알면서도 모르는 척 물었다. “왜?”단아는 도현을 바라봤다.도현은 재촉하지 않았다.두 사람 사이에 이상할 정도로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분위기가 팽팽하게 굳은 가운데 단아의 머릿속은 엉망이었다. 도현을 다른 곳으로 보낼 핑계를 빠르게 찾으려 했지만, 녹음을 켠 사람이 도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핸드폰을 돌려주지 않으면 의심을 피할 수 없었다.도현은 단아의 반응을 모두 보고 있었다. 안경을 한번 밀어 올리며 은근한 압박을 담아 물었다. “핸드폰이 아까운 거야, 아니면 안에 들어 있는 게 아까운 거야?”태휘는 무슨 상황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둘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도 알 수 없었다.단아의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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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25화

2층 서재.두 사람은 마주 보고 앉았다.도현은 소파에 기대앉아 두 팔을 가슴 앞에 느슨하게 겹쳤다. 태도는 여전히 차분하고 점잖았다. “말해. 무슨 얘기?”중현은 돌려 말하지 않았다. 도현을 바라보며 바로 물었다. “강 비서랑 다른 사람들, 네가 데리고 있지?”도현은 숨길 생각 없이 인정했다. “응.”중현이 말했다. “나한테 넘겨.”도현이 짧게 물었다. “이유는?”“강솔이 그러는데 그 사람들이 내 핵심 측근이었다며.” 중현은 아주 진지하게 답했다.도현은 흥미가 생긴 듯 물었다. “강솔이 말하면 바로 믿어?”“반은 믿어.” 강솔과 강솔이 언급한 사람들을 제외하면 중현은 누구에게나 진짜와 거짓을 절반씩 섞어 말했다.도현의 입가에 옅은 웃음이 걸렸다.도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옆 책상 위에 놓인 서류를 집어 중현 앞에 내밀었다. “강 비서랑 그 사람들 신상, 예전에 무슨 일을 했는지 정리해 둔 자료야. 봐.”중현은 서류를 받아 들었다.한 장씩 천천히 넘겼다.자료에는 강 비서를 비롯한 사람들이 과거 중현을 배신한 적이 있고, 이익을 위해 몰래 다른 세력과 손잡기도 했다고 적혀 있었다. 이번에 중현이 기억을 잃게 된 일에도 어느 정도 관련이 있다는 내용까지 있었다.도현이 말했다. “다 읽고도 그 사람들을 다시 곁에 두고 싶다면 막진 않을게.”도현은 손가락을 깍지 낀 채 중현을 바라봤다. 안경 너머 눈에서는 속마음을 읽기 어려웠다. “대신 그 사람들 때문에 사고가 나도 나한테 해결해 달라고 하진 마.”중현은 자료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물었다. “그 사람들 어디 있어?”도현이 눈썹을 살짝 올렸다. “진짜 쓸 생각이야?”“응.”“또 뒤통수칠까 봐 안 무서워?”중현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상관없어. 지금 나한테는 누가 됐든 다 비슷해.”도현은 형 역할을 충실히 해 주는 사람처럼 말했다. “뭔가 할 일이면 내가 쓸 만한 사람 몇 명 붙여 줄 수 있어. 그쪽이 위험도 적고.”중현은 가볍게 받아쳤다. “그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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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26화

도현이 지시했다. “중현이 조금 있다가 강 비서랑 사람들 데리러 갈 거야. 막지 말고 바로 보내줘.”상대가 답했다. [알겠습니다.]도현은 짧게 응답하고 전화를 끊었다.핸드폰을 바라보던 도현은 아까 단아가 말을 흐리며 보였던 반응을 떠올렸다.조금 전 전화는 일부러 건 것이었다. 개인 핸드폰 잠금도 일부러 풀어 둔 채 재킷 주머니에 넣었다. 단아가 녹음 화면을 발견했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확인하려는 목적이었다.결과는 충분히 봤다.단아가 그렇게 크게 동요했다는 건 태휘와의 관계가 가볍지 않다는 뜻이었다. 나눈 대화도 도현이 들으면 화낼 만한 내용일 가능성이 컸다.도현은 서재 안에서 잠깐 생각한 뒤 업무용 핸드폰으로 태휘에게 전화를 걸었다.태휘는 도현의 전화인 걸 확인하고 무의식적으로 위층을 한번 바라봤다.단아가 물었다. “왜?”태휘는 숨기지 않았다. “하도현 전화야.”단아도 위층을 바라봤다.도현에게 핸드폰이 두 대 있다는 사실은 단아도 알고 있었다.하나는 업무용, 하나는 개인용이었다.“여보세요.” 단아가 생각하는 사이 태휘는 이미 전화받았다. 차갑고 거리감 있는 목소리였다.도현은 노트북에 띄운 화면을 바라보며 말했다. [단아와 얘기는 거의 끝난 것 같은데, 위로 올라와서 저랑도 잠깐 얘기하시겠습니까?”]화면에는 거실이 보이고 있었다. 단아를 더 이상 감시하지 않겠다고 말하며 기존 카메라를 꺼 둔 뒤, 몰래 새로 설치한 초소형 카메라 영상이었다.도현과 단아는 중현과 강솔처럼 지낼 수 없는 관계라고 도현은 생각했다.단아를 믿어 주면 돌아오는 건 반복되는 배신과 도망뿐이었다.말을 듣지 않는 사람은 자유를 빼앗아야 얌전해진다고 믿었다.태휘는 회사 이야기를 다시 하자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생각이 바뀌신 겁니까?”도현은 화면 속에서 태휘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단아를 보며 속이 차갑게 식었다. [회사 얘기는 아닙니다. 단아 얘기만 하죠.]태휘가 잠깐 멈췄다.화면 속 단아가 소리 없이 입 모양으로 물었다.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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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27화

핸드폰에 곧바로 답장이 도착했다.[알겠습니다.]도현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화면을 껐다.‘임단아, 진태휘가 뒤를 봐준다고 네가 이 집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아?’너무 순진한 생각이었다.똑똑-서재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두 번 났다.곧 태휘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전보다도 더 가까이 다가가기 어려운 차가운 기운이 느껴졌다. 소파에 앉아 있는 도현을 바라보는 눈은 깊고 무거웠다.도현이 손으로 맞은편을 가리켰다. “앉으시죠.”태휘는 도현 맞은편에 앉자마자 본론부터 꺼냈다. “바로 말씀하시죠. 무슨 얘기를 하려고 부르셨습니까?” 상황이 이미 분명한데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할 필요는 없었다.도현은 천천히 차를 한 잔 따라 태휘 앞에 놓았다. “많이 급하신가 봅니다.”태휘는 대답하지 않았다.흔들리지 않는 태도 자체가 답이었다.도현이 찻잔에서 손을 거두며 말했다. “JX그룹 대표라면 상대 앞에서 원하는 걸 너무 빨리 드러내면 자기 이익에 불리할 수 있다는 건 알고 계시겠죠.” 길고 흰 손가락이 느긋하게 움직였다.태휘도 정면으로 맞섰다. “하 대표님도 어떤 수단을 쓰든 사람을 협박해서 복종시키는 건 불법이라는 사실은 알고 계시겠죠.” 태휘는 도현처럼 말을 빙빙 돌릴 생각이 없었다.도현이 웃었다. “알고 있습니다. 다만 저는 법을 어기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태휘는 도현을 똑바로 바라봤다.도현의 태도만 보면 정말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 같았다.두 사람의 시선이 맞부딪쳤다. 한쪽은 느긋했고, 다른 한쪽은 차가웠다.서재 안에는 답답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십여 초 동안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결국 도현이 본론으로 돌아왔다. “단아 좋아하십니까?”태휘는 차갑게 답했다. “하 대표님이 신경 쓸 일은 아닙니다.”“단아는 제 약혼녀입니다.” 도현은 손가락으로 자기 반지를 천천히 쓸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제가 상관없는 일일 수가 있습니까?”태휘는 단아 손가락에 끼워져 있던 반지를 떠올렸다.한 번밖에 보지 못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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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28화

진씨 집안만 그런 게 아니었다. 하씨 집안 역시 마찬가지였다.다만 지금 하씨 집안의 대소사를 결정하는 사람은 도현 자신이었다. 누구도 도현의 선택에 쉽게 간섭할 수 없었다.태휘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말했다. “마음대로 하십시오.”도현은 태휘를 가만히 바라봤다.단아 한 사람 때문에 태휘가 자기 지위와 앞날까지 내던질 거라고는 믿기 어려웠다.태휘가 물었다. “더 하실 말씀 있습니까?”도현이 답했다. “없습니다.”태휘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나갔다. 불필요한 말은 한마디도 더 하지 않았다.아래층으로 내려와 텅 빈 거실을 본 태휘의 눈에 의문이 스쳤다. 곧바로 핸드폰을 꺼내 단아에게 전화를 걸었다.[죄송합니다. 고객님의 핸드폰이 꺼져 있어 연결할 수 없습니다...]기계음이 들리자 태휘의 미간이 저절로 좁아졌다.“전화 안 하셔도 됩니다.” 어느새 뒤에 내려와 있던 도현은 한 손을 주머니에 넣고 다른 손으로 핸드폰을 가볍게 돌리고 있었다. “단아는 진 대표님과 갈 생각이 없어서 먼저 떠났습니다.”태휘가 돌아서서 도현을 날카롭게 바라봤다. “임단아 씨를 데려오십시오.”도현은 안경을 살짝 올렸다. “제 약혼녀를 왜 진 대표님께 보내야 합니까?”태휘는 그대로 서 있었다.도현이 출입문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이만 돌아가시죠, 진 대표님.”태휘가 반응하기도 전에 도현이 덧붙였다. “제가 직접 내보내는 상황까지는 원하지 않으실 겁니다.”말이 끝나자, 훈련이 잘된 경호원 열댓 명이 거실로 들어왔다. 두 줄로 나뉘어 태휘 양옆을 막듯 자리 잡았다.태휘의 검은 눈이 조금 더 차갑게 가라앉았다. 여전히 태연한 도현을 바라보며 말했다. “임단아 씨를 어디에 숨기든 찾아낼 겁니다.”도현이 태연하게 답했다. “성공하시길 바라죠.”태휘는 몸을 돌려 나가려 했다. 몇 걸음 옮기다 무언가 떠오른 듯 다시 도현을 돌아봤다. “정말 궁금하지 않습니까? 제가 왜 몇 년이나 지나서 갑자기 여기까지 찾아왔는지.”도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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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29화

한동안 낮아졌던 도현의 경계수위는 태휘의 말 한마디로 다시 최고조까지 올라갔다.중현이라면 상대 움직임을 미리 읽고 여러 수를 준비해 두었을 가능성이 충분했다. 하지만 상진이 말했듯 아무리 계획을 세워도 기억을 잃은 뒤에는 소용이 없다. ‘설마 기억을 잃는 일까지 예상했을까?’태휘의 차가운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제 쪽 사람을 안 풀어줍니까?”도현이 손을 가볍게 들었다.경호원들이 바로 태휘의 비서를 풀어줬다.비서는 태휘에게 다가가 빠르게 보고했다. [대표님, 저 사람들이 임단아 씨를 데리고 갔습니다. 바로 연락드리려고 했는데 저까지 제압당했습니다.]태휘는 담담하게 답했다. “알았어.” 더 이상 이곳에 머물지 않았다.태휘는 도현이 어떤 사람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자기 비서가 보는 앞에서 단아를 데려갈 정도라면 태휘가 뒤쫓을 것도 계산했을 것이다. 단아가 어디 있는지 알아내려면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태휘가 떠나자 도현의 마음은 깊게 가라앉았다.중현의 능력을 알고 있었어도, 태휘와 단아 사이의 연결은 예상 밖이었다.그제야 예전에 중현이 도현에게 했던 말이 다시 떠올랐다.이번에는 왜 이렇게 쉽게 이길 수 있었는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느냐던 말.그리고 단아까지 제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아니냐던 말.그 말을 할 당시 중현은 침착하고 흔들림이 없었다. 이미 결과를 알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지금 태휘까지 직접 찾아오자 도현은 과거 상황을 다시 처음부터 살펴볼 수밖에 없었다.옆에 있던 경호원이 개인 핸드폰을 건넸다. “대표님, 핸드폰입니다.”도현이 받아 들었다. 화면에는 아직 녹음이 진행 중이라는 표시가 떠 있었다.도현은 별 미련 없이 녹음 파일을 삭제했다. 어차피 단아의 반응을 보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웅- 웅-핸드폰 화면이 다시 켜졌다. 외곽 저택에서 온 메시지였다. [대표님, 중현 도련님이 도착했습니다.]도현은 그 문장을 오래 바라봤다.정말 모든 게 중현이 미리 짜 놓은 계획이라면 태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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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30화

임풍이 바로 말했다. “가짜입니다.”임훈은 동시에 반대 답을 냈다. “진짜입니다.”두 사람의 목소리가 겹쳤다.임풍은 곧바로 임훈에게 맞섰다. “진짜일 리가 없잖아. 보스가 정말 기억을 잃었으면 아까 같은 표정이나 눈빛이 어떻게 나오냐?” 임풍은 자기 동생이 답답할 정도로 단순하다고 생각했다.임훈은 짧게 말했다. “강 비서님한테 물어봐.”임풍은 자기가 맞다고 확신했다. “강 비서님, 말씀해 보십시오.”강 비서도 중현을 자세히 살피고 있었다. 수석비서로서 몸에 밴 습관이었다. “정말 기억을 잃으셨습니다.”임풍의 머릿속에 커다란 물음표가 뜬 듯했다.정말 기억을 잃었다면 보스는 자기들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는 뜻이었다.강 비서가 핵심 정보부터 정리했다. “먼저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저는 대표님의 수석비서였던 사람입니다. 이쪽은 임훈 씨와 임풍 씨고요. 두 분 모두 대표님 전담 경호원으로, 대표님을 ‘보스’라고 부릅니다.”중현은 한 단어를 짚었다. “수석비서? 보스?”강 비서가 답했다. “네. 대표님은 원래 HS그룹 대표이셨습니다. 기억을 잃으신 뒤 형인 하도현 대표에게 경영권을 넘긴 상태지만, 이 흐름 자체도 기존 계획 범위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습니다.”중현이 눈썹을 살짝 올렸다. “기억을 잃는 것까지 계획했다고?”임풍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그건 아닙니다.”임훈이 가볍게 헛기침했다.강 비서는 중요한 부분만 설명했다. “기억 상실 자체는 계획에 없었습니다. 다만 대표님이 원래 예상하신 최악의 결과는 지금보다 훨씬 나빴습니다. 그래서 현재 상황은 후속 계획을 진행하는 데 치명적인 변수는 아닙니다.”중현이 물었다. “만약 내가 여기 안 왔으면?”강 비서는 확신하듯 답했다. “대표님이 오시는 건 시간문제였습니다.”중현이 다시 물었다. “내가 너희를 안 믿을 수도 있잖아.”“대표님만 직접 나타나시면 믿게 해 드릴 방법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강 비서의 답에는 망설임이 없었다.조금 거칠게 말하면,설령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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