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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1화

매일 바쁘긴 했지만, 지나윤은 나름 충실하게 보내고 있었고 불평한 적도 한 번도 없었다.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회의실로 호출됐다.회의실엔 유시진과 채연서만 있었다.유시진의 굳은 표정을 본 지나윤은 사적인 이야기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하지만 업무라면 왜 채연서가 함께 있는 거지?’‘정말... 이렇게까지 사랑하는 건가?’두 사람을 단독으로 마주하는 상황 자체가 불편해서 가슴만 답답했다.“유 대표님...”지나윤은 조심스레 유시진을 불렀다.회사에서는 서로 공적인 관계로만 대했다.“네가 한 거야?”유시진은 들고 있던 서류를 책상 위로 탁 내던졌다.지나윤은 무슨 일인지 감도 오지 않았다.“LC 신제품 자료를 훔쳐서 FY주얼리에 넘긴 거야?”“지나윤, 나한테 아무리 불만이 있어도 정도껏 해야지. 회사는 네 감정놀이 하는 곳이 아니야.”말투는 격하지 않았지만,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차갑게 식어버린 손을 움켜쥔 채, 지나윤은 말없이 서류를 들고 처음부터 끝까지 훑어보았다.그리고 유시진에게 혼나는 건 두렵지 않았다.하지만 채연서에게 웃음거리로 보이는 건 참을 수가 없었다.“이번 분기 LC 신상이 FY주얼리 제품과 똑같아. 출시 시기까지 똑같다고. 내부 직원이 정보를 흘리지 않았다면, FY주얼리에서 내 디자인을 어떻게 가져갔겠어?”“채연서 씨 디자인이라고요?”지나윤은 채연서를 바라보았다.그녀의 얼굴엔 단 한 점의 죄책감도 없었다.FY와 동일하다는 그 디자인은 다름 아닌 지나윤이 만든 것이다.언제, 어떻게 베낀 건지는 알 수가 없지만 베낀 건 분명했다.“이건 내 디자인이에요.”단호하게 말하자, 유시진이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내가 그 말을 믿을 것 같아?”“믿든 말든 상관없어요!”예상치 못한 태도에, 유시진의 표정이 순식간에 싸늘해졌다.“원래는... 네가 조용히 잘못을 인정하면, 이번 건은 넘어가 줄 생각이었어.”“잘못도 안 했는데 내가 왜 인정해요?”지나윤이 이렇게까지 강하게 나올 줄 몰랐던 채연서가 황급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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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2화

지나윤은 회의실을 나서자마자 피터에게 바로 연락했다.피터에게 자신의 결백을 증명해달라고 부탁한 게 아니었다.채연서의 표절 때문에 FY주얼리가 피해를 입을까 하는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하지만 피터는 오히려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그리고 나중에서야 알게 됐다.피터가 그녀의 스케치를 받자마자, 지식재산권 부서에서 곧바로 디자인 특허 등록을 해 뒀던 것이다.결국 HF그룹에서는 시장에 풀었던 신제품을 긴급 회수할 수밖에 없었다....오늘, 유시진은 휴가를 냈다.고개만 들어도 텅 빈 대표이사실이 바로 보였다.비서인 지나윤은 유시진의 일정은 하루도 빠짐없이 파악하고 있었다.오늘도 마찬가지였다.그러니 그가 오늘 채연서를 데리고 요트 낚시를 갔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그 일을 위해 모든 회의와 업무도 미뤄버렸다는 사실도.지나윤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었다.유산 후 입원해 있던 그 기간에도, 유시진은 채연서와 휴양지에서 낚시를 즐기느라 단 하루도 찾아오지 않았다는 걸.“대표님하고 채연서 씨 결혼하는 거 아냐?”커피 머신 앞에서 강수향이 동료들과 수군거리고 있었다.“아직은 아닐걸? 그래도 거의 사귀는 분위기던데?”“그러니까. LC 신제품 전량 회수됐는데도 대표님이 한마디도 안 했고, 연서 언니 책임도 안 물었잖아!”“책임은커녕 인사팀 말로는 대표님이 채연서 씨 연봉 올려준다는 거야!”“와... 이게 바로 ‘편애받는 자의 여유’인 거네.”“...”옆에서 듣고 있던 지나윤은 식어버린 커피를 한 모금 삼켰다.이번 일의 원인이 자신이었다면, 아마 유시진의 대응은 전혀 달랐을 것이다.‘나였으면... 이미 끝장이 났겠지.’오늘은 드물게 야근이 없어서, 퇴근 후 지나윤은 혼자 마트에 들렀다.어느새 냉장 코너 앞까지 걸어와 있었다.한 브랜드의 소량생산 요거트가 눈에 들어왔다.요거트라면 다 거기서 거기지만, 유시진은 유독 이 브랜드만 마셨다.예전에는 이걸 사려고 하루에도 몇 군데씩 마트를 전전하곤 했다.무심결에 하나를 집으려던 순간, 그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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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3화

이 브랜드를 지나윤도 사본 적이 있었다. 딱 한 번, 결혼 초기에.하지만 유시진은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아서 그 후로는 두 번 다시 사지 않았다.지나윤은 카트를 밀며 두 사람 곁을 스쳐 지나갔다.“오랜만에 네가 직접 해주는 요리 먹는 거네. 오늘은 실컷 먹어야지.”그 말에 지나윤의 발걸음이 멈췄다.‘유시진이... 요리를 해?’그녀는 돌아서서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봤다.거리는 멀어졌지만, 두 사람 사이의 간격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유시진이 요리를... 할 줄 알았어... 나도 전혀 몰랐는데.’손에 힘이 들어가면서, 카트 손잡이를 쥔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도드라졌다.지나윤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표절이 들통났지만 채연서는 오히려 요트 낚시에 승진과 연봉 인상, 그리고 유시진의 직접 해 주는 요리까지 보상처럼 받았다.원래라면 HF그룹이 신제품을 회수했다는 사실이 자신의 결백을 간접적으로 증명해주는 셈이라, 오늘은 오랜만에 자신을 위해 반찬 몇 가지를 더 만들어 먹을까 생각했었다.하지만 지금은 그런 기분도, 식욕도 완전히 사라졌다.카트에 담았던 식재료를 하나씩 제자리로 돌려놓고, 결국 지나윤이 저녁으로 산 건 야채만두 두 개가 전부였다....한편 채연서를 집에 데려다 준 유시진은 직접 주방에 섰다.세 가지 고기 요리와 두 가지 채소 요리, 그리고 국까지 정성스러운 네 가지 반찬에 국까지 더한 5첩 반상이 완성됐다.“오랜만에 요리하니까 손이 좀 느려졌네.”마지막 요리를 식탁에 내려놓으면서 유시진이 말했다.“많이 기다렸지, 우리 이쁜이.”채연서가 순간 멈칫했다. 그제서야 유시진도 뭐라고 했는지 깨달았다.고등학교 때 그는 늘 채연서를 ‘이쁜이’라고 불렀다.그런데 졸업을 앞두고 채연서가 갑자기 앞으로는 ‘연서’로 불러달라고 했었다.“미안, 습관처럼 나왔네.”“괜찮아.”채연서의 얼굴에 살짝 어색함이 스쳤지만, 곧 살가운 표정으로 돌아왔다.두 손을 뻗어 유시진의 등 뒤에 묶은 앞치마 끈을 풀어주었다.“지나윤하고 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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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4화

[저녁은 뭐 먹었어?]지나윤은 그 짧은 문장을 십 분이나 보면서도, 끝내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금세 잠들 것 같았는데 잠도 싹 달아나서, 뒤척이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잠들었다.HF그룹의 연말파티는 경강호텔 57층의 회전 뷔페에서 열렸다.직원들은 지인 한두 명을 동반할 수 있었다.지나윤은 고아라만 데려왔다.이준혁의 현재 상황을 생각하니, HF그룹 행사에는 아무래도 데리고 오기가 힘들었다.오늘 생전 처음 드레스를 입은 고아라는 잔뜩 흥분해서 차칫 넘어질 뻔하기까지 했다.지나윤이 선물한 드레스는, 고아라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오프숄더 스타일이었다.지나윤 본인도 지엠에서 나온 블루 벨벳 튜브톱 드레스를 입었다.HF그룹의 관례상, 연말파티는 사회자가 유시진 대표를 무대로 모시며 시작됐다.하지만 올해는 형식이 바뀌었다.유시진이 한 명의 여성을 지목해 오프닝 댄스를 추는 것으로 시작된 것이다.그 주인공은 당연히 채연서였다.오늘의 채연서는 메이크업도 드레스도 평소보다 훨씬 화려했고, 핑크색인데도 묘하게 시선을 압도하는 기세가 있었다.두 사람은 회사 직원들이 보는 앞에서 손을 맞잡은 채 허리를 감싸면서 우아하게 춤을 췄다.“이게 공식 발표랑 뭐가 달라?”뒤에서 강수향의 목소리가 들렸다.“공식 발표는 무슨, 너 혹시...”고개를 돌린 고아라가 뭔가 말하려는 순간, 지나윤이 급히 막았다.“쉿!”그녀는 회사 사람들에게 자신과 유시진의 관계가 알려지는 걸 원치 않았다.비록 유시진이 이혼을 일방적으로 질질 끌고 있지만, 별거 상태로 2년이 지나면 자신에게도 이혼을 청구할 권리가 생기게 된다.어차피 끝낼 관계라면, 더더욱 회사 사람들이 알 필요는 없었다.그렇지 않으면, 유시진이 입으로만 이혼하자고 하면서 속으론 붙잡고 싶은 거라고 오해할 게 분명했다.눈앞에서는 유시진과 채연서가 춤을 추고 있었다.지나윤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채연서의 왈츠는 완벽했다. 우아하고 전혀 흐트러짐 없이, 마치 한 마리 백조와 같았다.춤이 끝나자, 다시 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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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5화

“욕은 다 했어?”지나윤의 표정은 잔잔했다.그녀는 급할 것 없다는 듯이 술을 한 모금 마신 뒤 송려화와 오희나를 향해 말했다.“너희 말대로 유시진 대표의 진짜 사랑이 채연서라면, 왜 채연서를 안 데려가지? 나는 그래도 가정부라도 될 수 있지만, 채연서는 가정부 자리도 안 어울리는 거야?”“그리고 나하고 유시진은 혼인신고를 해서 법적으로 부부야. 채연서와 유시진 사이엔 뭐가 있는데? 있다면 말해봐. 유시진이 바람피운 증거로 써 줄 테니까.”“너희 둘에게 충고 하나 하지. 여기서 나 욕할 시간에 유시진 대표나 설득하지 그래? 이러다 채연서가 늙어서 쓸모가 없어지면, 다시 젊고 싱싱한 여자를 맞겠지?”“그럼 너희 둘은 상갓집 개처럼 불쌍한 신세가 될 텐데?”지나윤이 시원하게 받아치자, 오희나가 들고 있던 술을 그대로 끼얹어버렸다.지나윤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옆에 있던 고아라가 비명을 질렀다.그 소동은 금세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고, 유시진과 채연서도 이쪽을 보았다.“희나야, 왜 그래?”채연서는 오희나를 걱정하는 척했지만, 술에 젖은 지나윤의 모습을 보고는 고소하다는 눈빛이 스쳤다.지나윤은 이 정도로 망가진 모습이니, 유시진이 얼굴을 찌푸릴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그러나 제일 먼저 그녀에게 휴지를 건넨 사람은 바로 유시진이었다.예상보다 훨씬 부드러운 눈빛에 카리스마 넘치는 얼굴은 어떤 각도에서 봐도 빛이 날 정도였다.유시진이 휴지를 건네자, 지나윤은 잠시 망설이다가 조용히 말했다.“고맙습니다.”술을 뒤집어쓴 게 유시진 때문인 건 맞지만, 그렇다고 그를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미안해요, 지나윤 씨. 희나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채연서는 잔뜩 겁먹은 척하면서 유시진의 팔을 꽉 붙잡았다.“일부러인지 아닌지는 CCTV를 보면 알겠죠.”지나윤이 냉담하게 말했다.“그러면 그 드레스 얼마예요? 제가 희나 대신...”‘배상하겠다’는 말이 나오기도 전에, 유시진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받았다.“내가 배상하지.”유시진이 스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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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6화

유시진이 들어올린 뒤 경강호텔의 객실에 던질 때까지, 지나윤은 단 한 번도 반항하지 않았다.어쨌든 회사의 연말 파티였다.둘 사이에 어떤 감정의 골이 있든, 회사 직원들의 웃음거리가 되는 건 그녀도 원치 않았다.하지만 지금 객실엔 유시진과 그녀 둘뿐이다.지나윤은 본능적으로 긴장했다.온몸의 가시를 세운 고슴도치 같은 지나윤의 모습을 바라보던 유시진이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이 드레스가 6억 원이라고?”그는 지나윤을 위아래로 훑었다.지엠 브랜드를 모르는 건 아니다.하지만 그쪽 드레스는 보통 1, 2천만 원 정도가 대부분이었다.지나윤은 그가 어떤 의심을 하고 있는지 짐작했다.이번에 그녀와 고아라가 입은 건 지엠에서 한정판으로 내놓은 신상이니 6억 원이 맞았다.그녀는 조금도 부풀리지 않았다.“왜요, 유 대표님. 6억 원도 못 내겠어요?”자신이 아무리 설명해도 유시진이 믿지 않을 거란 걸 지나윤은 잘 알고 있었다.“낼 수 있어.”유시진의 목소리는 차분하면서도 단단했다.“6억 원이 아니라 6백억이라도 낼 수 있어.”지나윤은 뒷짐을 지고 있던 두 손을 꽉 움켜쥐었다.‘채연서를 위해선 정말 어떤 희생도 다할 수 있다는 거지.’“충고 하나 하지. 다음에 돈을 벌려면 좀 더 영리한 수법을 써.”그 말에 지나윤은 절로 비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래도 굳이 말다툼할 필요도 없었다.어쨌든 6억 원을 떳떳하게 받을 자격이 있으니까.돈 얘기가 끝나고 그녀가 막 나가려던 순간, 호텔 직원이 새 드레스를 들고 들어왔다.“이렇게 다 젖은 채로 다닐 거야? 너는 창피하지 않아도 난 창피해. 네가 누구 비서인지 잊지 마.”유시진은 새 드레스를 들고 그녀의 앞으로 다가왔다.술을 맞은 부분은 가슴 쪽이다.원래 아무리 짙은 색상인 블루 벨벳이라 해도, 얼룩은 확실하게 눈에 띄었다.남자의 시선이 자신의 가슴에 꽂혀 있다는 걸 느끼자, 지나윤은 온몸이 불편해졌다.“옷 줘. 내가 갈아입을 테니까.”“돌아서.”유시진은 여전히 담담한 어조였지만, 거절은 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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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7화

“연서 씨, 진짜 신경 안 쓰여요? 지나윤 그년이 참 뻔뻔하지 않아요?”커피머신 앞에서 서 있던 강수향과 채연서는, 마치 일부러 지나윤이 들으라는 듯이 큰 목소리로 말했다.“유 대표님이 좋아하는 건 연서 씨잖아요. 쫓아다니는 사람도 연서 씨고요. 그런데 그 여자는 대체 무슨 염치로 들이대는 건지.”채연서는 못 말리겠다는 듯이 웃으면서 말했다.“어쩌겠어요. 시진 씨가 너무 완벽한데요!”HF그룹 전체에서 유시진을 그렇게 친근하게 ‘시진 씨’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HF그룹 전체에서 딱 한 명, 채연서뿐이다.“어머머, 유 대표님하고 너무 티 내는 거 아니예요?”강수향이 장난스럽게 놀리자, 채연서는 일부러 수줍은 척 볼을 만지면서 슬쩍 지나윤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원래 지나윤은 소문 따위엔 전혀 신경도 쓰지 않는 사람이다.더군다나 자신은 곧 이혼할 사이인 데다가, 회사 사람들 모두 유시진과 채연서가 커플이라고 믿고 있으니 굳이 방어할 필요도 없었다.그러나, 자신에게 내연녀라는 딱지가 붙는 건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이건... 정말 아니지.’처음엔 다들 그냥 재미로 수군거리면서 며칠 떠들다 말 소문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그 소문은 점점 더 커졌다.회사 사람들 대부분이 채연서를 편들기 시작했고, 심지어 식당에서 배식하는 아주머니까지도 대놓고 지나윤에게 말했다.“내연녀한테는 밥 안 줘. 먹고 싶으면 밖에서 사먹어.”지나윤은 식당의 아주머니를 탓할 수도 없었다.누군들 내연녀에게 잘 대해줄까!하지만 자신의 명예에 너무 치명적이라서 더는 이런 악성 소문을 방치할 수 없었다.‘실제로 내연녀인 건 채연서인데, 왜 내가 욕을 먹어야 해! 이건... 진짜 말도 안 돼!’“이모님, 오해하신 거예요. 저는 내연녀도 아니고 남자친구도 있어요. 제 남자친구는 진짜 괜찮은 사람이에요.”“그리고 제가 조건이 나쁜 것도 아닌데, 부자를 만나고 싶으면 세상에 부자가 얼마나 많은데 굳이 내연녀가 되겠어요?”식당 아주머니는 그 말에 살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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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8화

지나윤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회사에서 사적인 이야기를 꺼내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에.“우린 이미...”“우리 아직 이혼 안 했어. 그리고 토요일이 무슨 날인지... 설마 잊은 건 아니겠지?”유시진이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말했다.토요일이 어떤 날인지는 지나윤도 잘 알고 있었다. 바로 유시진의 할아버지, 유희봉의 칠순 잔칫날이었다.유시진이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지나윤은 그가 왜 이런 말을 꺼내는지 너무도 분명했으니까.유희봉의 생신에는 예전의 전우들과 친구들이 모였다.그리고 그 친구들이 가장 칭찬하던 건 항상 지나윤의 음식 솜씨였다.“알겠어.”유희봉 생신만큼은 지나윤이 거절하지 못한다는 걸 아는 유시진은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다른 일은 없으니까 나가봐.”지나윤은 조용히 대표실을 나왔다.자리로 돌아왔지만, 마음은 여전히 뒤엉킨 채 복잡했다.분명히 이혼을 결심했는데도 그에게서, 그리고 유씨 가문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왜... 아직도 휘말려 있는 거지.’...금요일 퇴근 후, 지나윤은 바로 유씨 가문의 본가로 갈 준비를 했다.유희봉의 칠순 잔치는 유씨 가문에서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자리였고, 지나윤도 마찬가지였다.점심시간을 이용해서 메뉴를 짜고, 굳이 내일 새벽에 장을 보러 갈 필요 없는 재료들은 퇴근길에 대형마트에서 미리 사 두었다.양손 가득 장바구니를 든 채 지나윤은 길가에서 택시를 기다렸다.그때, 검은색 마이바흐가 그녀 앞에 멈춰 섰다. 창문이 내려가자 예상대로 유시진이었다.“나도 본가로 가니까 같이 가게 타.”그는 지나윤이 어디로 가는지 잘 알고 있었다.해마다 유희봉 생신 때는, 지나윤이 미리 본가로 들어가서 준비하는 게 관례였으니까.지나윤은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차에 오르기로 했다.유시진도 본가로 가는 길인데, 둘이 따로 움직이면 오히려 유희봉이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었다.지금은 괜히 유희봉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장바구니를 트렁크에 넣은 뒤, 그녀는 익숙한 듯이 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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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9화

유시진은 트렁크에 있던 장바구니를 모두 들어 올렸다.“내가 들게!”지나윤이 유시진의 옆으로 다가가서 손을 내밀었다.결혼한 지 3년 동안 장은 언제나 그녀 혼자 봤고, 얼마나 많이 사든 늘 혼자 들고 다녔다.그러나 유시진은 그녀를 힐끗 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두 사람이 나란히 저택 안으로 걸어 들어갔을 때, 마침 유희봉이 정원에서 자신이 직접 가꾸는 채소에 물을 주고 있었다.두 사람이 함께 들어오고 게다가 유시진이 지나윤의 장바구니를 들어주는 모습을 보자, 그의 얼굴에는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지나윤이 먼저 유희봉에게 인사를 건넸다. 유희봉의 미소를 보는 순간, 그녀는 유시진이 왜 갑자기 이렇게 살갑게 굴었는지 금세 이해할 수 있었다.‘모두 할아버지에게 보여주기 위한 연극일 뿐이었어.’잠시 유희봉과 담소를 나눈 뒤, 지나윤은 곧바로 주방으로 들어가서 분주하게 움직였다.생신 잔치에 올릴 음식도 많고 종류도 다양했지만, 본가에는 요리사도 있고 일손을 도와주는 직원들도 있어서 집에서 그녀 혼자 준비할 때보다 훨씬 수월했다.물론, 이제 그 ‘집’은 더 이상 그녀의 집이 아니었지만.지나윤이 주방에서 일하는 동안, 유시진은 유희봉과 장기를 두고 있었다.“그래, 나윤이한테 잘해야지. 요즘 세상에 저런 좋은 여자가 어디 찾기 쉽겠어.”유시진은 슬쩍 한 수를 양보하면서 담담하게 대답했다.“그렇죠.”밤 10시가 될 때까지 쉬지 않고 준비한 뒤에야, 지나윤은 다음 날 생신잔치에 필요한 모든 걸 마무리할 수 있었다.주방에서 나왔을 때, 유희봉은 아직도 잠들지 않고 유시진과 장기를 두고 있었다.“할아버지, 약 드셨어요?” 지나윤이 조심스레 말했다.곁에 있던 간병인의 표정이 영 좋지 않았다.그 표정만 봐도 유희봉이 또 약 먹기를 거부했다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었다.유희봉은 심장도 약하고 여러 가지 노환도 있어서, 의사 지시대로라면 매일 꽤 많은 약을 챙겨 먹어야 했다.하지만 나이가 들면 마음도 달라지는 법! 약을 많이 먹으면 오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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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0화

유시진을 경계하고 있던 지나윤은 사실 먼저 씻고 싶지 않았다.유씨 가문의 여기 본가에서 만약 유시진이 정말 자신에게 무슨 짓이라도 하려 든다면, 유희봉을 생각해서라도 쉽사리 저항하기 어려울 것이다.게다가 지난번 유시진이 그녀를 강제로 몰아붙였을 때, 그녀가 죽을힘을 다해 반항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키보드를 두드리던 유시진은, 지나윤이 좀처럼 움직이지 않자 고개를 들며 바라봤다.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녀는 들켰다...는 느낌이 들었다.유시진은 가볍게 씩 웃었다. 평소엔 차갑기만 하던 눈이 가늘게 휘어지면서 비단결처럼 매혹적인 눈빛이 흘렀지만, 그 속엔 은근하게 위험한 느낌이 들었다.지나윤이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는 벌떡 일어나서 먼저 욕실로 들어갔다.곧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오자, 지나윤은 그제서야 가늘게 숨을 내쉬었다.이번에는 평소보다도 훨씬 오래 씻는 듯했다.지나윤이 디자인 스케치를 한 장 다 완성할 때가지도 유시진은 여전히 욕실에서 나오지 않았다.게다가 욕실의 물소리도 끊겨서 마치 아무도 없는 것처럼 조용했다.그녀는 순간 걱정이 되었다. 혹시 유시진이 욕실에서 쓰러진 건 아닐까 싶다가도 설마 또 그런 일이 일어날 리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유시진?”욕실 문 앞까지 다가간 지나윤이 문을 두드렸다.“괜찮아?”욕실에서 아무 대답이 없자, 욕실문 손잡이를 돌려보니 잠겨 있지 않았다.그녀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그런데 유시진의 크고 넓은 가슴이 딱 그녀 앞을 막고 있었다.지나윤은 하마터면 그의 가슴팍에 부딪칠 뻔했다.샤워를 막 끝낸 유시진은 중요 부위만 수건으로 감은 채, 상반신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잘 발달된 복근이 남성적인 힘을 뚜렷하게 드러냈고, 아직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젖은 머리칼에서는 묘한 섹시한 매력이 풍겼다.지나윤은 순간 온몸이 얼어붙었다.욕실 문가에 서 있는 지나윤을 보자, 유시진도 약간 놀란 기색이었다.“걱정한 거야?” 그가 물었다.[누구하고 얘기하는 거야?]익숙한 여자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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