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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91화

희래 객잔.유소영은 며칠째 그곳에 머물렀다. 정신은 멍했고, 마음은 갈피를 잡지 못했다.진술서는 사라졌으며 정 의원도 죽었다.이번에 선나라까지 온 것이 결국 빈손으로 돌아가기 위해서였단 말인가?만약 정말 신왕의 지시였다면,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신왕의 손아귀 안에 있다는 뜻이었다.곱씹을수록 등골이 서늘했다……아민의 얼굴에도 근심이 가득했다.“아씨, 양나라로 돌아가야 할까요?”정 의원이 죽었으니 단서도 끊긴 셈이었다.계속 선나라에 남아 있어도 별다른 의미가 없었다.유소영의 표정이 무거워졌다.이대로 포기하기에는 너무도 억울했다.“떠나기 전에, 의방에 가서 다시 한 번 찾아보자.”“아씨께서는 정 의원이 무언가 증거를 남겼을 거라 생각하세요?”유소영도 그저 혹시나 하는 마음이었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하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다음 날.혜민 군주가 직접 객잔으로 찾아왔다.유소영은 그녀를 보고도 마음에 아무런 동요가 일지 않았다.혜민 군주는 제멋대로 방 안으로 들어와 사방을 둘러보았다. 눈빛에는 노골적인 못마땅함이 어려 있었다.“아무리 그래도 신왕의 수양딸인데, 이런 곳에 머문단 말인가요?”유소영은 차분하게 물었다.“군주께서 이곳까지 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혜민 군주는 몸을 돌려 웃으면서 그녀에게 다가왔다.“하룻밤 부부도 백일의 정이 있다 하지요. 당신과 고준형은 이미 화리했다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정은 남아 있지 않겠어요?”“크게 보자면, 양나라와 선나라가 맹약을 맺은 이상 서로 우호적으로 왕래하는 것이 마땅하고요.” “그래서 초대장을 전해주러 왔어요.”몸종이 한 걸음 앞으로 나와 유소영에게 붉은 초대장을 내밀었다.유소영은 옅게 웃으며 조금도 흐트러짐 없는 태도를 보였다.그녀는 아민에게 받으라는 눈짓을 하며, 동시에 혜민 군주에게 말했다. “안타깝게도 제가 선나라에 오래 머물지 않을 예정이라, 군주의 대혼례에 참석할 시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혜민 군주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그래요?”그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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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92화

유소영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어쩐지 밖을 지키던 석심 일행이 막지 않더라니.오늘 밤이라면 마땅히 갓 맞이한 부인의 곁에 있어야 할 고준형이, 어째서 이곳에 나타난단 말인가?고준형은 유소영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마치 불씨를 품은 듯 뜨거웠다.그리고 다음 순간, 그는 아무 말도 없이 유소영을 품에 끌어안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유소영이 정신을 차렸을 때, 상황은 이미 걷잡을 수 없이 흐트러져 있었다. 그녀는 침상 위에서 고준형에게 눌린 채 숨을 가쁘게 몰아쉬고 있었다.그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낀 유소영은 곧바로 그를 밀어냈다.“누가 약을 쓴 겁니까?”분명 미약에 당한 것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토록 자제하지 못할 리 없었다.고준형은 부정하지 않았다. 다만 다시 그녀에게 입을 맞추려 했다.유소영은 얼굴을 돌리며 단호하게 말했다.“당신은 이미 다른 여인과 혼인했습니다. 일어나세요. 다른 방법으로 도와드리겠습니다.”고준형은 그녀의 손을 붙잡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내가 받아야 할 벌이오…… 그대가 돕지 않아 이대로 죽는다 해도, 그것도 나쁘지 않겠지.”그토록 맥 빠진 말을 내뱉는 그의 모습에는 모든 것을 놓아 버린 듯한 체념이 어려 있었다.그는 말을 마치자 유소영의 턱을 붙잡고 다시 입을 맞추려 했다.유소영은 아주 단호하게 거절했다.고준형은 약에 취해 정신이 혼미했지만, 그녀는 아니었다.그녀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는 오늘 다른 여인과 혼인했다. 그러니 그녀의 침상에 있어서는 안 되었고, 더더욱 그녀와 부부의 일을 해서는 안 되었다.“돌아가 새 부인에게 해결하시든지, 아니면 일어나세요. 제가 침으로 약기운을 빼 드리겠습니다.”유소영은 두 손으로 고준형의 어깨를 밀어 그가 더 가까이 오지 못하게 했다.다음 순간, 고준형은 망설임 없이 몸을 일으켜 휘장 밖으로 나갔다.그가 문 쪽으로 걸어가는 것을 본 유소영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그가 새 부인에게 가서 약기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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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93화

그 입맞춤은 부드러웠고, 더 깊이 파고들려는 기색도 없었다. 그저 고마움을 전하려는 듯했다.유소영은 놀라 두 눈을 크게 떴다.“당신……”“가진 것이 없으니, 이렇게 진료비를 대신할 수밖에 없소.”고준형이 뻔뻔하게 말했다.유소영은 싸늘하게 비꼬았다.“강왕의 사위 되시는 분께서 어찌 은자가 없으시답니까?”고준형은 자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대도 들었지 않소. 내가 한때 강왕의 남첩이었다는 소문을. 몸조차 내 것이 아니었는데, 어찌 은자 같은 것을 쥐여 주겠소.”유소영의 눈빛이 순간 변했다. 아무리 감추려 해도 그를 안쓰럽게 여기는 마음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지금까지도 그녀는 그 소문이 사실인지 알지 못했다.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고준형이 그런 일을 했으리라고는 믿을 수 없었다……묻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유소영은 조용히 마지막 침을 놓았다.그때 고준형이 먼저 입을 열었다.“나는 강왕을 모신 적이 없소.”유소영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잠시만 기다리세요. 몸 안의 약기운이 곧 완전히 빠질 겁니다.”그녀가 휘장 밖으로 나가려 하자, 고준형이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그의 시선은 줄곧 유소영의 얼굴에 머물러 있었다.“그대에게 미안하오. 내 신분을 숨긴 일도, 그리고…… 화리한 일도.”유소영은 그를 바라보았다. 표정은 차분했다.“이미 내려놓았습니다.”그토록 중요한 신분의 비밀이라면, 그녀였어도 상대에게 숨겼을 터였다.고준형의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손등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바라보는 눈길이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전에는 그대를 연루시키지 않기 위해서였소. 하지만 이제 내가 해야 할 일도 절반 이상은 끝났으니, 비로소 말할 수 있겠소. 조금만 더 기다려 주겠소?”유소영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고준형은 여전히 그녀의 손을 놓지 않았다.“그대는 내 뜻을 알 것이오.”유소영은 곧장 그의 손을 뿌리쳤다. 눈가에는 눈물이 가득 고였다.“나가세요!”이 순간 그녀가 느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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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94화

강왕의 눈은 핏발이 선 듯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그가 싸늘하게 웃었다.“형님, 형님은 이미 민심을 잃은 지 오래입니다.”“선나라 안에서 얼마나 많은 이들이 들고일어났는지 알고나 계십니까?”“형님을 없애지 않고서는 백성들의 분노를 가라앉힐 수 없습니다! 저는 황제가 되려는 것이 아닙니다. 백성을 위해 형님이라는 재앙을 없애려는 것입니다!”무창제의 눈빛이 사납게 변했다.“금군은 어디 있느냐!”그가 밖을 향해 소리쳤다.강왕이 웃으며 말했다.“형님, 부르실 필요 없습니다. 지난 일 년 동안 제가 이미 모두 손을 써 두었습니다. 금군은 이제 모두 제 사람들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니 운명을 받아들이십시오. 제게 황위를 넘겨주신다면 목숨만은 살려 드리겠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제가 형님께 매정하게 군다 해도 원망하지 마십시오!”무창제의 옷차림은 흐트러져 있었다. 갑옷을 갖춰 입은 강왕과 마주하고 있으니, 더더욱 방탕한 군주처럼 보였다.그러나 그는 결코 어리석은 자가 아니었다. 아무리 방탕하고 무도했다 해도, 선나라를 실제로 강성하게 만든 군주이기도 했다.그 순간, 무창제는 강왕에게 완전히 속았음을 깨달았다.“일 년…… 너와 그 고준형이 한패였단 말이냐!”강왕은 이제 와 숨길 생각도 없었다.“그렇습니다. 형님께서 저를 믿게 만들려고, 그와 손잡고 그럴듯한 연극을 벌인 것이지요.”“그동안 네가 남의 사내와 여인을 겁탈하고 빼앗던 짓들도 모두 거짓이었단 말이냐!”“맞습니다! 전부 거짓이었습니다! 모두 형님께서 저를 믿고 경계를 풀게 만들기 위한 짓이었지요. 이 지경까지 왔으니, 차라리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형님께서 그토록 찾아 헤매던 사씨 잔당들은 사실 줄곧 저를 위해 일하고 있었습니다. 형님께서는 늘 그들을 뿌리 뽑았다고 생각하셨겠지만, 살아남은 자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숨을 곳을 마련해 준 것도 저였고, 조금씩 세력을 키우게 도운 것도 저였습니다! 하하!”무창제는 그 말을 듣고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그는 분노에 차 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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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95화

유소영은 마차 안에서 그런 일을 할 만큼 대담한 사람이 아니었다.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느낀 유소영은 힘껏 그를 밀어냈다……하지만 그녀가 어찌 알겠는가. 짧은 이별도 신혼보다 더 애틋하다는데, 하물며 이토록 오래 헤어져 있었으니.일 년 가까이 떨어져 있는 동안, 고준형은 그녀가 미치도록 그리웠다.어젯밤 한 번으로는 그 오랜 그리움을 달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그전까지는 승산이 확실하지 않아 감히 그녀를 건드리지 못했다. 가까이 다가가는 것조차 두려워, 모질게 그녀를 밀어낼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이제 강왕이 즉위했고, 그의 승산도 훨씬 커졌다.유소영을 품에 안은 그는 더는 거리낄 것이 없었다. 그저 마음이 가는 대로 하고 싶을 뿐이었다.유소영은 도저히 그를 밀어낼 수 없어, 낮은 목소리로 애원했다.“안 돼요…… 이러지 마세요…….”하지만 그녀가 이렇게 애써 억누른 목소리로 애원할수록, 고준형은 더욱 참기 어려워졌다..다만 그도 그녀의 체면을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고준형은 끓어오르는 욕망을 애써 억누르며 마차를 몰던 석심에게 명했다. “한적한 곳을 찾아 잠시 쉬어 가자.”“예!”석심은 정말 그가 쉬려는 줄 알고, 곧 번화가에서 멀리 떨어진 곳을 찾아 마차를 세웠다.곧이어 마차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모두 십 장 뒤로 물러나라.”“예!”마차 안.고준형은 유소영을 꼭 끌어안은 채, 이미 부끄러워 붉게 달아오른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러면 되었소?”유소영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조금 참을 수는 없습니까?”고준형은 그녀의 손을 잡아 옷 너머로 제 배 아랫부분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다음 생에는 그대가 사내로 태어나 보시오. 그럼 내가 얼마나 괴로운지 알게 될 거요. 일 년 동안 중처럼 살았는데, 내가 어떻게 버텼는지 알기나 하오?”유소영의 얼굴은 더욱 붉어졌다.그녀가 홧김에 말했다.“그렇게 힘들면 다른 사람을 찾아 도와 달라 하시면 되잖아요. 어차피 우리는 화리한 사이니까요.”말이 끝나기 무섭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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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96화

“반드시 돌아오셔야 합니다.”유소영이 쉰 목소리로 말했다.고준형은 손을 들어 그녀를 가볍게 끌어안고, 머리 위에 입을 맞추었다.“그러겠소. 약속하오.”이내 그가 마차에서 내렸다.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유소영은 창가의 휘장을 걷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 눈빛에는 아쉬움만 가득했다.저 뒤쪽에 선 사람의 모습은 점점 작아지고 더욱 희미해져 갔다.유소영은 밀려오는 슬픔과 아쉬움을 억누르며 휘장을 내렸다.한편.고준형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그의 마음도 한동안 어지럽게 흔들렸다.등 뒤로 누군가가 나타나기 전까지......“저 유씨만 나타나면 항상 네 마음이 흔들리는구나.”고준형은 돌아보지 않았다. 목소리만 듣고도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계속 저희 뒤를 따라오신 겁니까.”사씨 가주의 눈빛은 차가웠다.“따라오지 않았다면 네가 이토록 제멋대로 구는 줄 어찌 알았겠느냐. 어젯밤이 얼마나 중요한 밤이었는데, 너는 곧장 객잔으로 달려갔지 않았느냐. 심지어 오늘은 강왕이 즉위하는 날인데 관례에는 가지도 않고 도리어 그 유씨와……”사씨 가주가 한숨을 내쉬었다.“됐다. 네 사적인 일이니, 이 할미가 더 말하지 않으마.”“이제 다음 수를 생각해야 할 때다.”고준형은 먼 곳을 바라보며 담담히 말했다.“이제 모든 준비는 거의 끝났습니다.”……유소영을 떠나보낸 후, 고준형은 강왕부로 돌아왔다.지금의 강왕부는 이미 위상이 달라져 있었다.저택 안의 사람들은 모두 짐을 정리하며 황궁으로 옮겨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강왕비는 특히 들떠 있었다.이 나이에 자신이 황후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다.강왕부의 세자 역시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자신이 태자가 되다니!뒤채.혜민 군주는 꼼짝도 하지 않은 채, 그 누구도 제 방을 정리하지 못하게 했다.그녀는 오직 고준형만을 고집스럽게 기다렸다.고준형이 돌아왔다는 말을 듣고서야, 혜민 군주는 비로소 정신이 돌아온 듯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곧장 그를 바라보았다.휙—혜민 군주가 자리에서 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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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97화

혜민 군주가 채 고준형의 옷자락도 닿기 전에 호위들이 재빨리 떼어놓았다.“사 공자님, 폐하께서 입궁을 명하셨습니다.”혜민 군주는 호위들에게 가로막힌 채, 안간힘을 쓰며 팔을 뻗어 그를 붙잡으려 했다.“안 됩니다! 돌아오세요! 고준형! 돌아오세요, 가지 마세요! 나를 두고 떠나지 마세요—”고준형은 뒤도 한 번 돌아보지 않고 매정하게 떠나갔다.마음에 없는 자에게는 조금의 미련도 두지 않는 사람이었다.황궁.강왕은 역대 황제 중 가장 빠르게 황위에 오른 인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무창제의 장례도 채 마치기 전에, 새 황제는 이미 왕좌에 올라 관원들을 임명하고 있었다.어젯밤 왕부의 혼례 연회에서 조정 대신들 절반 가까이가 목숨을 잃었다.그토록 피비린내 나는 수단 앞에 살아남은 자들은 두려움을 떨칠 수 없었다.어쩌면 또 다른 무창제가 나타난 것인지도 몰랐다……어전 서재 안.새 황제는 고준형의 계책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지난 한 해 동안 고준형이 모략을 꾸미지 않았더라면, 그가 이렇게 빨리 금군을 장악하고 병권을 거머쥐어 황위를 빼앗진 못했을 터였다.하지만 그는 사씨 가문을 꺼렸다. 특히 고준형을 경계했다.지혜로움이 요사스러울 정도로 뛰어난 이 자는 모든 것을 꿰뚫어 보며 사람들을 손아귀 안에서 농락하는 듯했다.이 자를 제 사람으로 삼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럴 수 없다면 반드시 제거해야 했다. 적의 손에 넘어가게 둘 수는 없었다.새 황제가 물었다. “이제 짐이 황위에 올랐다. 네가 원하는 게 무엇이냐?”고준형이 두 손을 모아 공손히 예를 올렸다.“폐하를 위해 일을 도모하여 선나라가 천하를 통일하도록 돕겠습니다.”새 황제는 차가운 눈으로 고준형을 바라보았다.“천하 통일이라? 그건 허언일 뿐이 아니냐! 선나라는 북쪽에 있으니 천하를 통일하려면 반드시 남쪽으로 내려가야 한다.”“지금 천하의 형세는 겉으로 보기엔 선나라가 가장 강해 보이나, 실은 여러 세력이 서로 얽혀 있다. 원나라는 양나라와 동맹을 맺어 우리 선나라 대군에 맞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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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98화

유소영은 그 노파를 바라보다가 문득 떠올렸다. 예전에 고준형과 강주에 가서 연씨 가문 공자님의 혼례에 참석했을 때, 잠깐 마주친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밖에 나와 있을 때는 무엇보다 항상 조심해야 했다. 설령 상대가 사씨 가문의 조모라 해도, 유소영은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그녀는 뱃머리에 서서 맞은편 배 위의 노파에게 정중히 예를 올렸다.“조모를 뵙습니다. 다만 저와 고준형은 이미 화리하여 더는 얽힌 사이가 아니니, 어르신을 뵙기가 참으로 곤란합니다. 부디 양해해 주십시오.”사씨 가주는 결코 자애로운 인상이 아니었다. 오히려 차갑고 도도한 눈으로 사람을 훑어보는 쪽에 가까웠다. “사람을 데려오너라.”그녀가 곁에 선 이에게 명했다.곧 맞은편 배 위에서 검은 옷을 입은 사내 하나가 뱃머리로 끌려 나왔다.그자는 몹시 쇠약해 보였고, 남이 이끄는 대로 힘없이 움직였다.바닥에 눌려 무릎을 꿇을 때 몇 번 몸부림을 쳤지만 소용없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유소영을 바라보았다.유소영은 그 사내를 알지 못해 의아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곧이어 사씨 가주가 무언가를 꺼냈다.유소영은 그것을 보자마자 단번에 알아보았다. 바로 정 의원의 진술서였다!저 진술서가 어째서 사씨 조모의 손에 있단 말인가?유소영은 다시 무릎 꿇은 검은 옷의 사내를 바라보았다.사씨 가주는 그저 유소영만을 바라보며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이제는 만날 수 있겠느냐?”아민은 걱정스레 제 아씨를 바라보았다.“아씨, 함정은 아니겠지요?”저 사씨 가문의 노파은 대체 무엇을 하려는 걸까?진술서를 훔치라고 시킨 것도 저 사람일까? 하지만 보기에는 또 그런 것 같지도 않았다……아민은 도무지 알 수 없었다.……유소영은 결국 상대의 배에 올랐다.아민과 석심 일행도 곧장 뒤따랐다.사씨 가주의 곁에는 시중드는 이가 둘뿐이었다. 유소영과 사씨 가주가 선실로 들어가자, 두 사람은 밖을 지켰다.선실 안.사씨 가주는 직접 유소영에게 차 한 잔을 따라 주었다.유소영의 코끝이 살짝 움찔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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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99화

사씨 가주는 곧장 요구를 꺼내지 않았다. 그녀는 유소영을 바라보며 차분한 어조로 물었다.“너는 사씨 가문을 얼마나 알고 있느냐?”유소영은 사실대로 답했다.“들은 바는 있지만, 안다고 할 정도는 아닙니다. 선나라 사씨 일족은 한때 천하제일 세가였고, 백 년 넘게 이어져 온 가문이었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반역을 꾀한 죄로 무창제에게 멸문당했지요.”사씨 가주가 차갑게 코웃음 쳤다.“반역이라…… 죄를 씌우려 들면 구실이야 어디 없겠느냐.”그녀의 얼굴에 문득 옅은 슬픔이 스쳤다.이윽고 그녀가 다시 물었다.“천하에 세가가 사씨만 있는 것도 아닌데, 어째서 사씨 가문이 제일이라 불렸는지 아느냐?”유소영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사씨 가주는 그녀가 모를 줄 알았다는 듯 냉담하게 말했다.“사씨가 수백 년 동안 쌓아 온 가학의 깊이와 인맥은 누가 황제가 되든, 설령 왕조가 바뀌어도 필요로 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사씨의 문하생과 옛 관리들은 조정과 민간 곳곳에 퍼져 있었지. 우리는 앞에 나서 다투지 않았고, 굳이 권력의 전면에 서려 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 자리에 누가 설지는 대개 우리가 정했다.”“사씨는 제일의 가문으로 인정받았고, 사씨 집안의 딸에게는 백 가문이 구혼한다는 말까지 있었지. 새로 선 권력은 사씨와 혼인으로 얽혀 권력을 다지고자 했다. 하지만 나무가 크면 바람도 거센 법. 역대 왕조에도 무창제처럼 사씨를 뿌리 뽑으려 한 자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멸족에 가까운 재앙을 겪어도, 사씨의 뿌리만큼은 결코 뽑히지 않았지.” “봄바람만 불면 다시 돋아나는 그 질긴 생명력이야말로 권력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었다. 사씨의 뿌리가 땅속 어디까지 뻗어 있는지, 누구도 알 수 없었으니까.” “본래부터 강대한 힘을 지닌 데다, 같은 세가 명문들과 끊임없이 혼인을 맺고 인맥을 넓혀 세력을 다졌다. 그렇게 무너지지 않는 벽을 세워, 사씨의 명맥을 대대로 지켜 온 것이다.” “무창제가 사씨 일족을 멸했다 해도, 지금 사씨 잔당이라 불리는 자들은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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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00화

사씨 가주는 유소영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시선은 차갑고도 무심했다.“고준형을 설득해 남기지 못하겠다면, 너희 아이를 남겨라. 사씨의 혈통을 남기는 대가로 그의 자유를 허락하겠다는 뜻이다.”유소영의 몸이 본능적으로 굳어졌다. 손도 저도 모르게 아랫배를 감쌌다.그녀는 미간을 찌푸렸다.“그분을 남도록 설득하는 일도, 아이를 남기는 일도 모두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어르신께서도 한 가지는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저와 그분은 이미 화리했습니다.”“그분의 일이든, 사씨 가문의 일이든 이제 저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사씨 가주의 날카로운 시선이 그녀를 찔렀다.“그만.”“화리를 핑계로 나를 속이려 들지 마라.”“너희가 정말 화리했고 서로를 내려놓았다면, 객잔과 마차에서 있었던 일은 대체 무엇이냐? 간통이냐!”유소영의 눈가가 붉어졌다.말할 수 없는 수치심이 가슴을 짓눌렀다.스스로 명문 세가 출신이라 자부하는 사씨 조모의 입에서 이렇게 모진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더 괴로운 것은, 그녀에게 도무지 반박할 면목이 없다는 사실이었다.그 일들은 모두 실제로 벌어진 일이었다.부정할 수 없었다……순간 목이 턱 막혔다.사씨 가주는 차갑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은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아이를 낳기 위한 도구나 물건을 보는 것 같았다.“내게 선택권이 있다고 생각하느냐?”“네가 고준형의 마음을 흔들어 놓지 않았다면, 그 아이가 너를 잊지 못해 다른 여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게 만들지 않았다면, 내가 이렇게 너를 찾아와 부탁까지 해야 했겠느냐?” “충용 후작부의 세자라면 너 같은 여인을 부안으로 맞을 수 있을지 몰라도, 사씨 가문의 맏며느리는 절대로 너 같은 여인이 될 수 없다.”“고준형이 사씨를 떠나겠다고 한 것만으로도 내 마음은 이미 갈가리 찢어졌다.”“네가 그 아이를 빼앗아 갔으니, 사씨에게 핏줄이라도 남겨야 하지 않겠느냐? 설마 너희가 정말 사씨의 대를 끊어 놓을 셈이냐?!”유소영은 입술 안쪽의 여린 살을 깨물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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