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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21화

최씨는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덧붙였다.“지난번에 노부인께 그토록 호되게 꾸지람을 듣더니, 정말 마음을 다잡고 얌전히 지내려나 봐요.”계연수는 손에 든 일을 살피느라 분주했다. 여전히 집안일을 빈틈없이 꾸려 나가며, 곳간에서 보내 온 물품과 철마다 장원에서 올라오는 산물을 하나하나 대조하고 있었다.최씨의 말을 듣고도 그저 담담히 웃을 뿐이었다.최씨는 그런 계연수를 바라보며 한참이나 말을 꺼내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러다 불현듯 조심스럽게 물었다.“제가 듣기로는… 오숙부님께서 분가를 원하신다던데요…”계연수가 하던 일을 멈추고 물었다.“넷째 형수님이 그러시더냐?”최씨가 고개를 저었다.“부군께서 말해 주셨어요.”계연수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런 이야기가 오간 것은 사실이다.”최씨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요 며칠 이수옥도 마냥 손을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언제 심정민과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오숙부가 분가하려 하며 재산도 절반씩 나누겠다고 했는데 시아버지가 이를 마다한다며, 심정민에게 시아버지를 설득해 보라고 했다는 것이다.심정민이 그 이야기를 최씨에게 전한 것은 그저께였다. 최씨가 그의 뜻을 묻자, 그는 아버지의 뜻에 따르겠다고만 했다. 그 말에 최씨도 더는 묻지 않았다.사실 최씨는 줄곧 이 일이 어딘가 석연치 않다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사실이 아닌 듯한 느낌을 떨칠 수 없어 계연수에게 직접 물어본 것이었다.그런데 이제 계연수의 입으로 사실이라는 말을 듣고 나니, 그제야 꿈속에서 깨어난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정말이었구나.최씨는 본래 재산을 절반씩 나누겠다는 말도 사실인지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질문은 너무 뜬금없을뿐더러, 마치 자신이 재산을 탐내 안달하는 것처럼 보일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곰곰이 생각해 보면, 사실이면 그만이었다. 오숙부가 직접 한 말이라면 거짓일 리도 없었다.더구나 재산을 받지 않겠다고 한 사람은 시아버지였다. 자신은 그저 심씨 가문에 시집온 며느리에 불과하니, 어찌 가문의 일에 함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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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22화

최씨의 말을 들은 계연수는 적잖이 착잡했다.이른바 삶의 이치를 깨달았다는 것은, 실상 마음이 죽고 난 뒤 자신을 위해 찾아낸 또 하나의 살길에 불과했다.자신을 사랑해 줄 사람도, 자신의 감정을 헤아려 줄 사람도 없다는 사실을 차츰 깨달았기에, 그런 식으로라도 현실에서 달아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한때의 계연수도 그랬다.그러나 계연수는 사옥현에게 진심으로 환멸을 느꼈지만, 최씨마저 자신처럼 심정민을 혐오하게 되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그저 지금처럼 최씨의 마음이 온전히 자기 자신을 향하기를 바랐다.때로는 바쁘게 사는 것만큼 좋은 약도 없었다.그로부터 보름이 채 지나지 않아 태후의 수연회가 열렸다.태후가 이미 남원으로 거처를 옮긴 데다 크고 작은 연회에도 참석하지 못하게 되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황제의 생모였다. 그러니 수연회만큼은 반드시 열어야 했다.심씨 가문의 여인들도 모두 연회에 참석하기 위해 입궁했다. 계연수는 회임한 몸이라 여러모로 거동이 불편했기에, 황후는 줄곧 그녀를 자신의 곁에 앉혀 두었다.요즘 황후는 계연수를 유난히 아꼈다. 말수는 적어도 사리에 밝고, 무슨 이야기를 꺼내든 막힘없이 대화가 통한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더구나 계연수가 아이까지 품었으니 더욱 예뻐할 수밖에 없었다.아래에 자리한 명부인들도 당연히 그 모습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오늘날 경성의 부인들 가운데 계연수만큼 세인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 이는 아마 없을 터였다.계연수가 심서준의 부인이자 황후가 아끼는 동서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녀에게는 뛰어난 재주까지 있었다. 마구회에서 우승한 것만 해도 대단한데, 그림 솜씨까지 출중하여 황제의 총애를 받고 있었다. 심지어 황제를 위해 직접 백방보까지 그리고 있으니, 누군들 앞다투어 환심을 사고 싶지 않겠는가.오늘은 태후의 수연회였으므로 태후도 당연히 참석해 있었다. 태후는 황후와 계연수가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을 싸늘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 얼굴에는 한 점의 웃음기도 없었다.연회는 어화원에 마련되었다. 여인들이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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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23화

사실 최은조는 한동안 계연수를 찾아오지 않았다. 몇 차례 서신을 보내오기는 했지만, 막상 수척해진 모습을 직접 보니 계연수도 걱정이 되었다.계연수가 염려하는 기색을 보이자 최은조는 고개를 저었다.“별일 아니에요. 걱정 안 하셔도 돼요.”최은조가 한차례 가벼운 병치레를 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병이 난 연유는 차마 남에게 털어놓기 어려웠다.지난달로 최은조의 상기가 끝났다. 상기가 끝난 바로 그날 밤, 최성군은 앞뒤 가리지 않고 그녀의 방으로 찾아와 이튿날 함께 어머니를 뵈러 가자고 했다.최은조는 몹시 놀랐다. 갑작스레 그런 일을 벌일 낯도 없어 간신히 최성군을 달래기는 했지만, 그 대가를 치러야 했다. 한밤중에 그의 손에 이끌려 함께 등불 구경을 나갔다가 발을 헛디뎌 물에 빠졌고, 그 바람에 풍한을 앓게 된 것이다.하지만 이 일을 누구에게도 말할 수는 없었다. 깊은 밤에 밖으로 나갔다가 물에 빠졌다고 하면, 아무리 설명해도 의심을 피하기 어려웠다.최민정은 최은조의 말이 거짓임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녀의 손을 붙잡고 다그치듯 물었다.“혹시 그 임씨 가문의 아가씨가 너를 괴롭힌 것이냐? 숨기지 말고 사실대로 말하거라. 내가 똑같이 갚아 줄 테니까.”계연수는 그 말을 듣고 임씨 가문의 아가씨가 누구인지 물었다.알고 보니 그녀는 임안총독의 손녀이자 최씨 가문 큰 부인의 친정 쪽 사람이었다. 용모가 아름다운 데다 글과 예법에도 밝아 최씨 큰 부인이 무척 마음에 들어 했다. 그녀를 집으로 불러 잠시 머물게 한 것도 최성군과의 혼사를 맺어 주기 위해서였다.그러나 임 아가씨는 최성군이 자신은 소홀히 대하면서 최은조만 살뜰히 챙기는 꼴을 견디지 못했다. 그래서 툭하면 최은조를 겨냥해 곤란하게 만들었고, 뒤에서는 험담까지 늘어놓았다. 최은조가 연약하고 병약한 척하는 것도 모두 남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서라며, 그러니 혼담이 두 번이나 깨진 것도 이상할 게 없다고 했다.하나같이 차마 듣기 민망한 말들이었다. 그래도 그 이야기가 집 밖까지 퍼진 것은 아니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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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24화

계연수는 본래 몸을 움직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데다, 연못까지 갈 마음도 없었다. 하지만 곁에서 진가옥이 어찌나 끈질기게 졸라 대는지 당해 낼 재간이 없었다.크고 새까만 눈망울에 앳되고 사랑스러운 얼굴로, 부드럽게 얘기하니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었다.최민정이 말했다.“우리도 제법 오래 앉아 있지 않았더냐. 진씨 셋째 아가씨가 가고 싶다니, 이참에 함께 걸어 보자꾸나.”그리하여 일행은 연못가로 향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가는 길에 옛사람들과 마주쳤다.다름 아닌 사씨 노부인과 둘째 부인이었다.둘째 부인은 사씨 노부인을 부축해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길이 좁은 것도 아니건만, 외나무다리에서 원수를 만난 듯한 기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진가옥은 사씨 가문의 사람들을 보자마자 원수라도 만난 듯 얼굴을 찌푸렸다.“이럴 줄 알았으면 이쪽으로 오지 말걸 그랬어요.”그러고는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대체 저 사람들은 왜 초대한 거예요?”뒤이어 작은 목소리로 한마디를 더 보탰다.“재수 없어.”진가옥은 대장공주의 친손녀였다. 아무리 입을 가볍게 놀린다 해도 감히 나무랄 사람은 없었다. 워낙 신분이 존귀했으므로, 둘째 부인은 안색이 잠시 굳었으면서도 입을 열지 못했다.그녀의 시선은 오직 계연수에게 머물렀다.계연수는 고운 비단옷을 차려입고 있었다. 분홍빛 봄옷 위로 수놓인 금실이 찬란하게 빛났고, 꽃들이 흐드러진 정원 한가운데에서도 담박하면서 화사한 아름다움을 자아냈다.그녀의 곁을 둘러싼 이들을 보니 평남후부 최씨 가문의 아가씨와 대장공주부의 아가씨가 하나같이 다정하게 어울리고 있었다.예전의 계연수는 좀처럼 바깥출입을 하지 않았다. 사씨 가문의 큰며느리도 그녀를 데리고 나가는 일이 거의 없었다. 사옥현은 용모와 기품이 빼어난데 몰락한 집안의 여인을 아내로 맞았으니 체면이 서지 않는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부인들 사이에서 조롱을 받아 고개를 들지 못할까 두려워 계연수를 좀처럼 데리고 다니지 않았다.그러나 누가 알았겠는가.불과 일 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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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25화

사씨 노부인은 넋을 잃은 채 자신의 곁을 스쳐 가는 계연수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계연수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그 침묵에는 마치 천 마디 말이 담긴 듯했다.그 고요한 눈빛도 더는 예전처럼 생기 없이 고여 있던 눈빛이 아니었다.사씨 노부인은 그 순간 깨달았다.사씨 가문은 영원히 계연수의 용서를 받을 수 없으리라는 것을.조금 전까지만 해도 노인의 지위와 체면을 내세울 생각까지 했었다. 아무리 그래도 자신은 웃어른이니, 계연수도 최소한의 체면 정도는 세워 주리라 여겼다. 그러나 계연수는 그녀를 한 번 더 바라보는 것조차 아까워했다.그녀를 안중에도 두지 않는다는 뜻이었다.사씨 노부인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곁에 있던 사씨 둘째 부인이 부축하지 않았다면 똑바로 서 있기조차 어려웠을 터였다.노부인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사씨 가문은 정말 끝이구나.”그 말을 들은 사씨 둘째 부인의 마음에도 깊은 파문이 일었다.요즘 사씨 가문에는 이렇다 할 초청장이 들어오지 않았다. 오늘 태후의 수연회에 초대받았을 때도 그 이유가 무엇인지 모르지 않았다. 태후가 일부러 계연수의 속을 뒤집어 놓으려고 사씨 가문 사람들을 불러들인 것에 불과했다.그러나 막상 연회가 시작된 뒤에는 누구 하나 그녀들에게 다가와 말을 걸지 않았다.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이해득실에 밝았다. 태후와 심씨 가문이 맞서는 동안 양쪽 모두 적잖은 타격을 입었지만, 더 처참하게 패한 쪽은 분명 태후였다. 태후가 이미 권세를 잃었으니, 사람들은 자연스레 심씨 가문의 환심을 사려 했다.그런 이들이 사씨 가문 사람들과 교분을 맺으려 할 리 없었다.사씨 둘째 부인은 조금 전 계연수의 표정을 다시 떠올렸다. 계연수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들을 제대로 바라보지도 않았다. 낯선 사람을 대할 때보다도 더 냉담했다.그 순간 둘째 부인도 깨달았다. 노부인의 말이 옳았다.계연수는 결코 사씨 가문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직접 나서서 사씨 가문을 짓밟지 않는 것만으로도 이미 자비를 베풀고 있는 셈이었다.한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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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26화

최은조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최민정의 말을 듣더니 황급히 몸을 돌려 달려갔다.사실 진가옥도 헤엄을 칠 줄 알았다. 물에 빠진 뒤에야 자신이 계연수까지 끌어당겼다는 사실을 깨달은 진가옥은 금세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 겁에 질렸다.그녀는 서둘러 최민정과 함께 계연수를 받쳐 안고 물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계연수는 물을 들이마신 탓에 이미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한 손만은 여전히 배 위를 감싸고 있었다.한편 최은조는 다급히 황후에게 달려가 방금 벌어진 일을 알렸다. 이야기를 들은 황후는 안색이 크게 변해 하마터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뻔했다.마침 태자가 황후의 곁에 있었다. 여러 황자도 조금 전 태후에게 수연회를 축하하고 예물을 올리러 왔다가 모후의 부름을 받고 이곳에 모여 있었다.황후는 태자를 바라보며 목소리를 낮췄다.“나는 곧 태후마마의 수연회를 주관해야 하니 자리를 뜰 수가 없구나. 네 외숙모에게 일이 생겼다. 너라면 남들의 눈을 피해 빠져나가기 쉬울 테니 지금 당장 가 보거라. 절대 소란을 피워서는 안 된다.”강현도 대강의 사정을 들은 터라 일이 심각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황후의 얼굴에는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주변의 수많은 명부인이 이쪽을 주시하는 것을 본 황후는 손을 꽉 움켜쥐고 태자에게 다시 당부했다.“네 외숙모는 아이를 가졌다. 반드시 조심해야 한다.”그러고는 자신의 곁에서 가장 믿을 만한 유 상궁에게 태자를 따라가라고 명했다.옆에 앉아 있던 태후는 그 광경을 무심히 바라보다가 시선을 거두었다. 봉녕군주의 손을 잡은 태후의 입가에 싸늘한 비웃음이 번졌다.심씨 가문이 자신의 친정인 정가의 대를 끊어 놓았으니, 자신도 심씨 가문의 대를 끊어 놓아야 마땅했다.어떻게든 이 가슴에 맺힌 원한을 풀어야 했다.태후에게 손을 붙들린 봉녕군주는 마음속으로 두려움이 일었다. 안색이 창백해진 그녀가 태후의 곁에서 조심스럽게 물었다.“저, 정말 아무 일도 없겠지요?”태후는 미소를 지으며 봉녕군주의 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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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27화

태의가 안으로 들어서자 유 상궁은 서둘러 침상으로 다가가 휘장을 살며시 걷었다. 계연수의 손을 잡아 밖으로 내민 뒤 태의가 맥을 짚을 수 있도록 했다.태자는 뒷짐을 진 채 바깥에서 기다렸다.한참 뒤 등 뒤에서 발소리가 들리자 강현은 자신도 모르게 몸부터 돌렸다. 순간 당황한 기색을 보였지만 이내 마음을 가라앉히고 물었다.“외숙모께서는 어떠시냐?”태의가 황급히 두 손을 모아 예를 갖추며 대답했다.“태자 전하, 염려하지 마십시오. 심씨 부인의 맥은 활맥을 띠면서도 힘이 있습니다. 기혈이 부족하여 잠시 의식을 잃으신 듯합니다. 다만 태기가 다소 불안정하여 위태로운 고비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니, 당분간 마음을 편히 가지시고 안정을 취하면서 경과를 지켜보셔야 합니다.”“소신이 이미 처방을 내렸습니다. 내일 다시 맥을 짚어 보고 태기가 안정되는지 살펴보겠습니다.”강현은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긴장한 손끝이 가늘게 움직였다.외숙부는 떠나기 전 강현에게 심씨 가문을 잘 살펴 달라고 당부했다. 그런 외숙모가 궁 안에서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자신도 외숙부에게 무어라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강현이 엄중한 목소리로 명했다.“무슨 수를 써서라도 태기를 안정시켜라. 아이에게 일이 생겨서는 안 된다.”태의가 서둘러 대답했다.“염려하지 마십시오, 태자 전하. 소신이 반드시 온 힘을 다하겠습니다.”강현은 손을 내저어 태의에게 물러나 처방대로 약을 준비하게 했다.그는 다시 몇 걸음 옮겼다가 결국 몸을 돌려 편전 안으로 들어갔다.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계연수의 상태를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편전 안에서는 유 상궁이 침상 곁에 앉아 계연수의 젖은 머리카락을 닦아 주고 있었다. 용춘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 옆을 지키고 있었다.태자가 들어오는 것을 본 유 상궁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한쪽으로 물러나려 했다. 그러나 강현은 손짓으로 계속하라는 뜻을 보이고는 침상 곁에 서서 계연수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수려한 눈썹 아래 두 눈은 굳게 감겨 있었다. 입술마저 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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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28화

계연수의 손을 잡고 있던 황후는 그녀가 움직이는 것을 보자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계연수는 천천히 눈을 떴다. 눈앞에 펼쳐진 낯선 방 안을 흐릿하게 둘러보다가 곁에 앉은 사람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제야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이가 황후라는 것을 알아보았다.심씨 노부인도 한쪽에 앉아 있었다. 계연수가 깨어난 것을 본 노부인은 안도의 숨을 내쉬더니 참지 못하고 말했다.“진씨 가문의 그 아이는 하는 짓에 도통 분별이 없구나. 앞으로는 되도록 가까이 지내지 말거라. 또 무슨 일에 휘말릴지 누가 알겠느냐.”그러고는 다시 덧붙였다.“그 아이의 어미에게도 말해 두었다. 제 딸을 단단히 꾸짖겠다고 하더구나.”계연수는 심씨 노부인의 걱정 어린 눈빛을 바라보았다. 무슨 말을 하려고 입술을 움직였으나 머릿속은 여전히 안개가 낀 듯 몽롱했다.한 차례 기침을 하고 나서야 목소리가 잔뜩 잠겼다는 것을 깨달았다.“이번 일은 가옥이 탓이 아니에요. 그 아이도 난간이 부러질 줄은 몰랐을 거예요.”그때 황후가 말했다.“나중에 태자가 사람을 보내 그 난간을 조사하게 했다. 헌데 이번 일에는 확실히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더구나. 난간 뒤쪽이 모두 톱으로 잘려 있었다. 그 줄의 난간은 조금만 힘을 주어 기대도 곧바로 부러지게 되어 있었다더구나.”그 말을 들은 심씨 노부인이 멈칫하더니 침상 가장자리를 세게 내리쳤다. 이내 목소리를 낮춰 이를 갈며 말했다.“태후, 그 늙은 요물이 꾸민 짓이 틀림없어.”방 안에는 다른 사람이 없었다. 궁녀들마저 모두 물러난 뒤였기에 심씨 노부인도 거리낌 없이 그런 말을 할 수 있었다.황후의 얼굴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녀는 계연수에게 어쩌다 그곳까지 가게 되었는지 물었다.계연수는 진가옥이 자신을 데리고 갔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진가옥이 일부러 그런 일을 벌였을 리 없다는 사실만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진씨 셋째 아가씨는 심성이 단순해요. 태후마마와 내통했을 가능성은 없을 거예요.”황후도 고개를 끄덕였다.“네 말이 옳다. 그 아이가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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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29화

“그동안 심씨 가문은 한결같이 충성을 다해 왔다. 특히 서준이는 폐하를 도와 조정의 부패한 관리들을 쓸어냈지. 그런데도 폐하께서 태후의 악행을 이대로 내버려 둔다면, 너무나도 사람을 낙담하게 만드는 처사가 아니냐. 연수의 배 속에 있는 아이는 우리 심씨 가문의 혈육이다. 만에 하나 아이가 잘못되고 연수의 몸까지 상한다면, 대체 누가 그 책임을 진단 말이냐?”심씨 노부인의 말은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진심이었다.그토록 오랫동안 친손주를 기다려 왔다. 정말 아이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심씨 노부인부터 정신을 잃고 쓰러질 터였다.더구나 제 아들은 한번 마음을 주면 좀처럼 변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계연수가 아니면 누구도 원하지 않았다. 이번 일로 아이를 잃고 계연수의 몸까지 상한다면, 심서준은 평생 다른 여인을 가까이하지 않을지도 몰랐다.그러니 어찌 애가 타지 않겠는가.황후는 어머니의 절절한 말을 들으며 가슴이 서늘해졌다. 비단 어머니만 낙담한 것이 아니었다. 황후 역시 황제를 향한 마음이 차갑게 식어 가고 있었다.요즘 연이어 벌어진 일들은 어린 시절부터 황제와 쌓아 온 정마저 모조리 닳아 없어지게 했다.그러나 황후는 그런 속내를 입 밖으로 꺼내고 싶지 않았다. 그저 나직한 목소리로 어머니를 달랬다.“지금 연수는 무사하잖아요. 이만하기를 천만다행이라 여기고, 어머니께서도 너무 나쁜 쪽으로 생각하지 마세요. 당분간은 연수를 제 곁에 머물게 하면서 몸을 돌볼게요. 태의가 태기가 안정되었다고 할 때 돌아가도 늦지 않아요. 어머니께서도 일찍 돌아가 쉬세요.”심씨 노부인이 다시 무언가 말하려던 그때, 밖에서 황제가 도착했다는 전갈이 들려왔다.황제는 근래 곤녕궁을 거의 찾지 않았다. 이 시각에 갑자기 찾아오리라고는 황후도 예상하지 못했다.미처 자리에서 일어나기도 전에 먹빛 옷을 입은 인영이 안으로 들어섰다.걸음은 침착하고 흔들림이 없었으며, 전신에서는 제왕 특유의 위엄과 냉기가 흘렀다.황제는 본래 좀처럼 웃지 않는 사람이었다. 젊은 시절 황후와 가장 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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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30화

황제는 뒷짐을 진 채 잠시 더 머물다가 이윽고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황제가 떠나자 황후가 심씨 노부인에게 물었다.“어머니께서는 이곳에 머무르시겠어요, 아니면 돌아가시겠어요?”“내가 여기 남아 있으면 여러모로 불편할 테니 돌아가마.”황후는 곧 사람을 불러 심씨 노부인이 일찍 귀가할 수 있도록 준비하게 했다.계연수는 최민정과 진가옥의 안부부터 물었다. 황후는 두 사람 모두 별다른 이상이 없는 듯하니 걱정하지 말라고 달랬다.하지만 계연수의 마음은 놓이지 않았다. 최민정도 자신처럼 아이를 가진 몸으로 물에 빠졌으니, 황후에게 부탁해 문안 서신을 보내 달라고 했다.황후는 계연수가 이토록 마음을 쓰는 것을 보고 흔쾌히 그러겠다고 했다.이튿날이 되자 계연수는 결국 풍한을 앓기 시작했다.증세가 심한 것은 아니었다. 몸이 으슬으슬 춥고 식은땀이 나는 정도였다.계연수는 아이를 가진 뒤로 몸이 예전만 못해졌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래도 평소에는 기침조차 거의 하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기침이 멎지 않아 제법 고생스러웠다.다행히 아침 일찍 최민정이 궁으로 보내온 서신을 받았다. 자신도 몸에 별다른 이상은 없고 가벼운 풍한만 앓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내용이었다.그제야 계연수도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진가옥은 이른 아침부터 대장공주를 따라 입궁했다.계연수가 머무는 곳에 도착한 진가옥은 침상에 기대어 있는 그녀를 보자마자 울음을 터뜨리며 달려들었다.그래도 계연수가 회임한 몸이라 배를 건드리면 안 된다는 정도의 분별은 있었다. 진가옥은 계연수의 상체만 끌어안고 목 놓아 울기 시작했다.“전부 제 잘못이에요. 제가 고모를 위험하게 만들었어요. 제가 물고기를 보러 가자고 조르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생기지 않았을 거예요. 제가 굳이 난간 밖으로 몸을 내밀지만 않았어도 난간이 부러지지 않았을 테고, 고모까지 붙잡고 물에 빠지지도 않았을 거예요.”진가옥은 편전이 떠나갈 듯 서럽게 울었다. 방 안에는 온통 그녀의 울음소리만 가득했다.계연수의 목소리로는 진가옥의 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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