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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51화

장씨는 호의호식하며 지내는 계연수를 바라보았다. 이토록 좋은 집에서 수많은 시녀와 하인의 시중을 받으며 사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지금껏 제 딸이 겪은 설움이 떠올라 눈시울이 붉어졌다.한 번 잘못 내디딘 걸음이 결국 모든 것을 그르치고 말았다.고씨 노부인은 안으로 들어와 담담하기만 한 계연수의 얼굴을 살폈다. 그 모습을 보니 계연수가 고하운의 일에 관여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예전에 계연수는 고하운이 죽든 말든 상관하지 않겠다며 모진 말까지 내뱉었다. 하지만 막상 이런 일이 벌어졌는데 어찌 모른 척할 수 있겠는가.고씨 노부인이 계연수를 나직이 불렀다.계연수는 손에 들고 있던 은수저를 내려놓았다. 곁에는 용춘만 남기고 다른 이들을 모두 물린 뒤, 외조모를 바라보며 차분히 말했다.“우선 앉으세요.”그토록 평온한 목소리에 고씨 노부인은 마음을 졸이며 자리에 앉았다. 그녀가 미처 운을 떼기도 전에 장씨가 울먹이며 하소연을 쏟아 냈다.“연수야, 하운이도 이제 자기가 잘못했다는 걸 안다. 그 아이가 지금 백씨 집안에서 온갖 고초를 겪고 있단다. 백씨 큰 부인은 사람도 아니더구나. 만삭인 하운이에게 허드렛일이나 하는 시녀 노릇을 시키고 있어.”장씨는 눈물을 훔치며 말을 이었다.“네가 그 아이 일에 관여하고 싶지 않은 건 안다. 헌데 하운이가 지금 어떤 일을 당하고 있는지 알게 된다면, 아무리 깊은 원한이라도 눈 녹듯 사라질 게다.”계연수는 눈썹을 살짝 찌푸린 채 장씨를 바라보았다. 부드럽고 나직한 목소리였지만 그 안에는 한 점의 온기도 담겨 있지 않았다.“큰외숙모께서 잘못 알고 계시는군요. 저는 고하운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제가 그 아이를 무엇 때문에 원망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감정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냉담한 대답에 장씨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눈앞의 계연수는 흐트러짐 없이 나한탑에 단정히 앉아 있었다. 어느새 온몸에 서늘하면서도 기품 있는 명문가 안주인의 풍모가 배어 있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눈길마저 마치 높은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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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52화

계연수는 담담히 이야기를 들었다. 백씨 집안이 백작부로 강등되었다고는 하나, 선조 대대로 물려받은 재산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백씨 큰 대감은 여전히 부총병의 자리에 있었다. 아무리 형편이 어려워졌다 한들 시녀조차 두지 못하고 식은 밥과 반찬으로 끼니를 때울 만큼 몰락했을 리는 없었다.누가 보아도 일부러 고하운을 괴롭히는 것이 분명했다.고하운은 명씨의 친며느리도 아니었다. 더욱이 백선혁은 제법 재주가 있다고는 해도 어디까지나 서자였다. 명씨의 식견과 성정을 생각하면, 쓸모를 잃은 고하운을 가만히 내버려 두는 쪽이 오히려 이상했다.고씨가 계연수를 바라보며 분개했다.“백씨 집안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사람에게 이럴 수 있니?”계연수는 어머니의 말에는 대꾸하지 않고 물었다.“백선혁은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그의 이야기가 나오자 고씨는 더욱 서럽게 울었다.“백선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단다. 아예 집으로 돌아오지도 않고 관아에서 지내고 있다. 벌써 한 달이 넘도록 집에 발길조차 하지 않았다더구나.”고씨는 울먹이며 말을 이었다.“하운이가 직접 찾아가 집으로 돌아와 자기 편을 들어 달라고 빈 적도 있었다. 제 부인이 어떤 꼴로 살고 있는지 직접 와서 봐 달라고도 했고. 헌데 백선혁은 무슨 일이든 적모의 뜻을 따르라는 말만 했다고 하더구나. 곧 태어날 제 아이조차 안중에 없는 모양이야.”“요즘 하운이가 하루도 빠짐없이 서신을 보내와 백씨 집안에서 얼마나 고통스럽게 지내는지 하소연하고 있다. 나도 이제는 도저히 두고 볼 수가 없구나.”그 말을 듣고도 계연수의 표정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백씨 집안이 그처럼 나오는 것은 딱히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예전에 계연수가 살았던 사씨 집안도 바깥에서는 나름대로 가풍을 중시하는 명문가로 통했다. 하지만 그들 역시 권세 있는 자에게는 고개를 숙이고 힘없는 자는 짓밟았다. 친정의 비호를 받지 못했던 계연수 또한 사씨 집안에서 살얼음판을 걷듯 위태롭게 살아야 했다.고하운은 언제나 누군가가 자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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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53화

“제가 그곳에 갔다가 무슨 변이라도 당하면, 그 책임은 누가 지실 겁니까?”계연수의 목소리에는 집안을 다스리는 안주인의 위엄이 서려 있었다. 그 기세에 짓눌린 장씨는 감히 계연수와 눈조차 마주치지 못했다.초조하게 손을 비비던 장씨는 구원을 청하듯 고씨를 바라보았다.본래 마음이 약한 고씨는 큰동서의 눈길을 외면하지 못하고 계연수에게 조심스럽게 제안했다.“그렇다면 백씨 집안에 초대장을 보내는 건 어떻겠니? 백씨 큰 부인에게 하운이를 데리고 이곳으로 오라고 한 뒤, 네가 따끔하게 경고하는 거야.”장씨도 눈물을 흘리며 매달렸다.“연수야, 이번 한 번만 도와다오.”계연수는 입술을 비틀었다. 지긋지긋한 일들이었다.그녀는 천천히 몸을 뒤로 기대어 둥근 베개에 기댄 뒤, 장씨를 바라보았다.“제가 이번에 그들을 불러 경고한다고 한들, 그다음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그러면 앞으로 명씨가 고하운을 잘 대해 줄까요? 백선혁이 갑자기 다정한 부군이라도 된답니까? 백씨 집안사람들이 고하운을 조상님처럼 떠받들기라도 할 것 같으세요?”계연수의 목소리는 시종일관 차분했다.“안채에서 사람을 괴롭힐 방법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명씨는 백선혁의 적모예요. 집안의 법도와 효를 내세우면 고하운을 옭아맬 명분쯤은 끝도 없이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명씨가 작정하고 고하운을 괴롭히려 든다면, 겉으로는 엄연히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이니 누가 나서도 소용없어요. 고하운이 더는 핍박받고 싶지 않다면 스스로 일어서야 합니다. 계속 짓밟히든가, 아니면 아예 판을 뒤엎든가. 둘 중 하나를 택해야합니다. 제가 해 줄 말은 이것뿐입니다. 저는 고하운을 돕지 않을 것이고, 그 아이의 일에 관여하고 싶지 않다는 뜻도 이미 분명히 밝혔습니다.”계연수의 말이 끝나자 방 안은 적막에 잠겼다.장씨조차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판을 뒤엎는다니… 어떻게 말이냐?”계연수는 싸늘한 눈으로 장씨를 바라보았다.“받을 수 있는 수모를 모조리 당하고도 더는 거리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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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54화

희고 서늘한 빛이 계연수의 몸 위로 길게 내려앉아, 옥처럼 맑은 얼굴을 한층 더 희고 티 없이 비추었다.피어오른 단향 연기가 가늘게 허공을 맴돌았다. 계연수는 한 손을 앞에 놓인 작은 온돌 탁자 위에 가볍게 얹었다. 맞은편에 앉은 어머니마저 간절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그러나 계연수는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모두의 가슴은 점점 조여 들었다.한참 뒤에야 계연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저는 도울 수 없습니다.”옥쟁반 위로 구슬이 굴러떨어지는 듯 맑은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 안에는 서늘함만이 가득했다.그 말이 떨어지자 장씨는 의자에서 힘없이 미끄러져 바닥에 주저앉았다.계연수는 창백하게 질린 채 어쩔 줄 몰라 하는 장씨를 내려다보았다. 이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제가 이번에 한 번 도와주면 앞으로도 끝없이 도와줘야 할 겁니다. 설마 제가 백씨 집안에 들어가 고하운의 삶까지 대신 살아 줘야 합니까? 고하운이 선택한 사람이고, 큰외숙모께서 선택한 혼처입니다. 저는 처음부터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좋은 혼처로 보이지 않는다고. 그때 큰외숙모께서는 뭐라고 하셨습니까? 고하운은 또 뭐라고 했고요?”고씨 노부인이 작은 목소리로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려 했다.“이미 지나간 일이니 그만하자꾸나. 더는 말하지 말거라.”계연수는 고씨 노부인을 바라보았다.“할머니, 지나간 일이라고 해서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잊었다는 뜻도 아니고, 모든 일이 정말로 끝났다는 뜻은 더더욱 아닙니다. 옆에서 지켜보기만 한 사람은 이제 다 지나간 일이라고 쉽게 말할 수 있겠지요. 헌데 직접 겪은 사람에게는 영영 지나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누구도 제 아픔을 대신 잊어 주거나, 저를 대신해 지난 일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고씨 노부인은 흠칫했다.계연수가 한마디 한마디 분명하게 내놓을수록 노부인은 할 말을 잃었다. 그녀는 흔들림 없는 계연수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은 지난 세월 내내 한결같이 밝고 맑았다. 자신이 무엇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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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55화

“조금 전에도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그나마 도리를 아는 집안이라면 경고하는 것이 효과가 있을지도 모르지요. 헌데 백씨 집안에는 통하지 않습니다.”“지금 백씨 집안은 제 앞가림조차 하기 어려운 처지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고하운을 살뜰히 챙길 리 있겠습니까? 백선혁은 서자이고, 백씨 큰 부인은 애초부터 고하운을 진심으로 아낀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고하운이 제 발로 그 집안에 들어갔지요.”“예로부터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집안의 법도를 가르치는 것은 당연하게 여겨졌습니다. 제가 무슨 명분으로 간섭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이 집안일이라며 맞서면, 제가 그 사람들을 잡아 가두기라도 해야 합니까?”장씨는 흘릴 눈물마저 모두 말라 버린 듯했다. 머릿속이 텅 빈 채 한동안 멍하니 있다가 더듬거리며 물었다.“그럼… 하운이는 이제 대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이냐?”계연수가 무심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백씨 집안의 판을 뒤엎고 스스로 일어서든가, 아니면 그 집안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괴롭힘을 당하면서도 맞서지 않으면 평생 짓밟히며 살 수밖에 없습니다. 어느 쪽이든 고하운이 스스로 해야 할 일입니다.”장씨는 모든 이야기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듯한 막막함을 느꼈다.그녀는 고하운이 이혼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이혼한 여인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겠는가. 자칫 고준의 앞날에까지 영향을 미칠까 두렵기도 했다.하지만 계연수가 말한 ‘판을 뒤엎는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도 알지 못했다. 장씨는 결국 다시 그 방법을 물었다.가뜩이나 심기가 불편했던 계연수는 더는 한마디도 하고 싶지 않았다. 막 용춘에게 손님들을 배웅하라고 명하려던 순간, 노기가 어린 고씨 노부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평소에는 그리도 스스로 영리하다 여기더니, 어찌 이런 것조차 알아듣지 못하느냐? 판을 뒤엎는 방법이 따로 있겠느냐? 아예 진흙탕을 만들어 버리는 것이지!”고씨 노부인은 싸늘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백씨 집안의 무정함과 의리 없음을 모조리 까발리면 된다. 적모는 며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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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56화

고씨 노부인의 말은 장씨를 꾸짖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계연수에게 자신의 뜻을 분명히 밝히려는 말이기도 했다.이제 더는 고하운을 위해 변호하거나 사정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고씨 노부인도 알고 있었다. 고하운 한 사람 때문에 계연수와 사이가 틀어질 필요는 없었다. 예전부터 사리를 분별하고 대의를 헤아리는 면에서는 계연수가 고하운보다 훨씬 나았다.장씨는 넋이 나간 채 고씨 노부인의 꾸지람을 들었다. 한마디 한마디가 가슴에 박힐수록 얼굴을 들 수 없을 만큼 부끄러워졌다.어찌 계연수의 운명이 이토록 크게 달라질 줄 알았겠는가.한 번 이혼한 여인이 다시금 이처럼 높은 명문가에 시집가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계연수가 고씨 노부인에게 말했다.“어찌 되었든 백씨 집안이 저지른 짓은 지나치게 악독합니다. 명예와 평판을 중히 여기고 최소한의 법도라도 지키는 집안이라면, 어느 누가 이런 짓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백씨 집안에서 계속 참고만 있다면 누구도 고하운을 구해 줄 수 없습니다. 백 대감 때문에 이미 집안의 명성이 크게 훼손됐으니, 지금 백씨 집안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도 또다시 추문이 퍼지는 일이겠지요. 어떻게 해야 할지는 스스로 머리를 써서 생각해 보라고 하세요.”예전에 계연수도 사씨 집안에서 편안하게 지내지는 못했다. 그래도 사씨 집안은 의식주만큼은 박하게 굴지 않았다. 그 이상의 것을 내어 주지는 않았으나, 겉으로 지켜야 할 최소한의 체면은 차려 주었다.하지만 고하운이 당한 일은 달랐다. 백씨 집안은 남들에게 보이기 위한 체면조차 차려 주지 않았다. 오히려 집안에 닥친 불행과 분노를 고하운에게 쏟아부으며 노골적으로 괴롭히는 듯했다.그들은 고하운을 사람으로조차 대하지 않았다.더구나 고하운은 지금 아이까지 품고 있었다.그런데도 고하운은 울며 하소연하고, 누군가 자신을 구하러 오기만을 기다렸다. 계속 그런 태도로 나온다면 정말로 아무도 그녀를 구할 수 없을 것이다.계연수는 그 골치 아픈 일에 발을 들이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백씨 집안을 경고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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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57화

“제가 이혼하고 돌아온 뒤에도 기어이 집을 떠나려 했던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 뒤 큰외숙모가 사씨 큰 부인과 손잡고 저를 해치려 했지요. 그들의 뜻대로 일이 이루어졌다면 저는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요?”“어머니께서는 원한을 은혜로 갚으려 하시지만, 그전에 그 사람들이 과연 은혜를 베풀 가치가 있는지부터 생각하셔야 합니다.”“예전에 어머니께서 큰외숙모 가족에게 잘못하신 적이 있습니까? 그토록 잘해 주고도 결국 무엇이 돌아왔나요?”“백씨 집안은 수많은 원한을 사고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궁지에 몰린 고하운이 그 모든 오명을 저희에게 뒤집어씌우려 한다면요?”계연수의 목소리는 나직했지만, 질문 하나하나가 예리하게 고씨의 마음을 파고들었다.“큰외숙모는 사씨 집안과 몰래 결탁해 저를 해치려는 짓까지 저질렀습니다. 어머니는 그런 사람에게 아직 얼마나 많은 가족의 정이 남아 있다고 생각하십니까?”“만약 제가 심씨 집안에 시집오지 못하고 여전히 몰락한 집안의 이혼녀로 살고 있었다면, 큰외숙모가 저와 어머니를 어떻게 대했을 것 같습니까? 더구나 한번 돕기 시작하면 끝없이 매달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정말로 그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내어 주는 사람이 되시겠습니까?”계연수의 말을 듣던 고씨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서늘한 딸의 얼굴을 바라보는 동안 온몸마저 뻣뻣해지는 듯했다.반평생을 살고도 자신은 딸만큼 세상을 꿰뚫어 보지 못했다.계연수의 몇 마디가 고씨의 눈을 번쩍 뜨이게 했다.고씨는 친정을 대할 때마다 마음이 약해져 거듭 양보했다. 하지만 그토록 베풀고도 친정 식구들이 제 딸에게 조금이라도 잘해 주게 만들지는 못했다.결국 큰동서 식구들은 아무리 도와줘도 은혜를 기억할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받은 은혜는 잊으면서도 서운함과 원한은 끝까지 품었다.계연수가 굳이 자신만 남겨 두고 이런 말을 꺼낸 이유도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자신의 물러터진 마음 때문에 계연수까지 친정의 골치 아픈 일에 휘말려 한시도 편히 쉬지 못하고 있었다.정말로 어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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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58화

평부진.그 시각, 심서준은 주예와 서리 두 명, 호위 두 명을 거느리고 곧장 평부진의 경력사로 향했다.경력사는 총병부에 소속된 문서 관아로, 오가는 모든 공문을 접수하고 발송하며 이를 등록하고 보관하는 업무를 맡고 있었다.심서준이 도착하자 경력사의 지사 호덕무가 황급히 밖으로 나와 허리를 깊이 숙여 맞이했다. 그러고는 지극히 공손한 태도로 차까지 올렸다.호덕무는 틈이 날 때마다 경성에서 내려온 고관을 몰래 훔쳐보았다.좌도어사라니, 감히 우러러보기도 힘들 만큼 높은 관직이었다. 게다가 황제의 신임을 받는 처남이기까지 했다. 직접 마주하고 보니 온몸에서 풍기는 기품이 이루 말할 수 없이 귀했다. 의복과 몸가짐부터가 평범한 사람과는 확연히 달랐으며, 행동 하나하나에서는 옥처럼 곧은 뼈와 학처럼 고고한 자태가 느껴졌다.청수하고도 고결한 얼굴 아래로 드리운 두 눈은 짙은 어둠을 품어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었다. 잠시라도 눈이 마주치면 보이지 않는 압박감이 밀려들었다.호덕무는 저도 모르게 허리를 더욱 굽혔다. 감히 심서준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한 채 명이 떨어지기만 기다렸다.상석에 앉은 심서준이 눈을 내리깔며 명했다.“지난 십 년간의 공문을 모두 가져오거라. 연도와 월에 따라 정리하되, 단 한 권도 빠져서는 안 된다.”호덕무의 얼굴에 걸려 있던 웃음이 순간 굳었다.그러나 그는 금세 다시 환한 웃음을 지어 보이더니, 황급히 몸을 돌려 서리들에게 문서를 옮겨 오라고 명했다.심서준은 멀어지는 호덕무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곁에 선 호위에게 눈길을 주었다.뜻을 알아챈 호위가 아무런 기척도 없이 호덕무의 뒤를 따랐다.얼마 지나지 않아 호위가 돌아와 심서준의 귓가에 낮은 목소리로 보고했다. 호덕무가 돌아서자마자 사람을 보내 주원길에게 몰래 소식을 전하게 했다는 내용이었다.심서준의 눈에 싸늘한 기색이 스쳤다. 손가락 끝이 탁자를 느릿하게 두드렸다.호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서고에 있던 문서가 한 묶음씩 밖으로 옮겨졌다. 오래지 않아 기다란 탁자 위에는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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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59화

심서준이 대체 무엇을 알아냈는지도, 조호와 그 조손이 무언가를 실토했는지도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지난 며칠 동안 주원길은 사람을 붙여 심서준의 일거수일투족을 빈틈없이 감시했다. 그러나 심서준은 기세등등하게 수사를 벌이기는커녕 날마다 한가로이 이곳저곳을 돌아다닐 뿐이었다.한 번은 군영을 둘러보기에 군마를 점검하려는 줄 알고 주원길도 만반의 준비를 해 두었다. 하지만 심서준은 군마를 몇 번 훑어보기만 하고 그대로 돌아섰다.장부에 관해서도 더는 아무 말이 없었다.주원길은 그 장부만큼은 한 치의 빈틈도 없이 꾸며 놓았다고 자신했다. 그렇기에 심서준이 지금까지 무엇을 알아냈는지 더욱 종잡을 수 없었다.주원길이 다시 심서준을 바라보며 말했다.“심 대인께서 이곳까지 오셨는데도 하관이 제대로 대접해 드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지금이라도…”말이 끝나기도 전에 심서준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그럴 필요는 없소. 본관은 조사를 하루라도 빨리 끝내고 돌아가고 싶소. 경성에서 기다리는 부인이 있으니 시간을 지체하고 싶지 않소.”그 말을 들은 주원길은 심서준의 표정을 살폈다.정말로 조사를 서둘러 마치고 떠날 생각이라면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경력사에 보관된 문서 가운데 상당수는 이미 바꿔치기해 두었다. 아무리 심서준이라 해도 그 많은 문서를 한 장 한 장 빈틈없이 살필 수는 없을 터였다.마음이 조금 놓인 주원길이 웃으며 말했다.“심 대인과 부인께서 금실이 그토록 좋으시다니, 저도 부럽기 그지없습니다.”심서준은 손에 들고 있던 문서를 내려놓고 시종에게 차를 따르게 했다. 그러고는 무심한 듯 덧붙였다.“다만 요즘 본관이 보내는 서신이 부인에게 닿지 않고 있으니, 그 사람이 걱정할까 염려되는군.”주원길의 안색이 미묘하게 변했다. 그는 말없이 심서준을 바라보았다.심서준은 우아한 몸짓으로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다시 주원길에게 시선을 돌렸다.“물론 부인에게 보내는 서신은 조금 늦어져도 괜찮소. 헌데 이곳에 오기 전, 본관은 이미 이웃한 광통 총독부에 미리 서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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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60화

심서준은 경력사에서 꼬박 사흘 동안 문서를 조사했다.곁을 지키던 호덕무는 서 있는 것조차 버거워졌지만, 좌도어사 심서준에게서는 조금의 피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날마다 고작 몇 시진밖에 자지 않으면서 어찌 지치지도 않는 것일까.정녕 부인을 만나러 돌아가는 것이 그토록 급한 것일까.깊은 밤, 심서준은 서리들이 정리한 문서를 보고있었다.오 년 전 평부진에 실제로 주둔했던 관군은 삼만 육천이백 명이었다.하지만 같은 해 호부에 올린 결산 장부에 기록된 실제 병력은 삼만 사천이백 명이었다.이천 명이나 차이가 났다.당보는 병조에 올리는 문서였고, 결산 장부는 호부에 제출하는 자료였다. 두 문서가 다르다는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장부를 조작해 왔다는 뜻이었다.심서준의 길고 곧은 손가락이 이번에는 군수품 항목을 짚었다. 그의 눈빛이 완전히 어두워졌다.평부진에서는 해마다 갑옷과 도검, 창, 활과 화살, 화약과 납탄 등의 군수품 사용 내역을 병조에 보고했다. 장부만 보면 역대 군수품 사용량과 남은 재고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그러나 천원 십 년, 평부진이 병조에 보고한 조총은 모두 삼백육십 정이었다. 반면 같은 해 당보에 기록된 사용 가능한 조총은 이백십 정에 불과했다.조총 백오십 정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조총은 먹고 나면 사라지는 군량이 아니었다. 설령 하자가 있는 물건이라 해도 백오십 정이면 결코 적지 않은 값어치였다.누군가 조총을 빼돌려 팔아넘긴 것이 분명했다.평부진은 군사적 요충지로, 성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북방 부족과 맞닿아 있었다. 변방의 군인들이 달단족에게 군수품을 몰래 팔아넘기는 일은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었다.예전에도 병조와 도찰원에서 여러 차례 조사했으나 매번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다. 이 일을 제대로 파헤치면 총병 한 사람의 목숨만으로는 끝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아래에서부터 위로 총독과 병조 직방사, 심지어 내각까지 연루되어 있을 가능성이 컸다.주원길은 병력 규모를 부풀려 보고하고, 존재하지 않는 병사들의 군향까지 가로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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