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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춘귀의 모든 챕터: 챕터 671 - 챕터 680

721 챕터

제671화

“주방에서 후작께 보양탕을 끓여 두었는데, 부인께서 직접 가져다드리는 건 어떠실까요?”방 어멈은 계연수와 심서준이 며칠째 얼굴도 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이참에 핑계를 만들어 한 번쯤 만나게 해 주고 싶었다.계연수 역시 방 어멈의 뜻을 알아차리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준비를 시켰다.그녀는 심서준이 있는 앞마당 쪽으로 향했다. 밤길은 적막했고, 하늘엔 엷은 달빛만 희미하게 떠 있었다. 길가의 나뭇잎은 짙게 우거져 있었고, 그 사이로 은은한 향기가 감돌았다.이런 밤이면 사람 마음도 금세 가라앉는 듯했다. 연못가를 지날 때는 걸음을 멈추고 잠시 물 위를 바라보았다. 잔잔한 수면 위로 달빛이 부서져 반짝이고 있었는데, 그 풍경이 참으로 아름다웠다.심서준의 서재 앞에 도착하자 방 어멈이 문 앞의 시종에게 안으로 들어가 전하라 시켰다. 하지만 안에서는 한참이 지나도록 아무런 답이 없었다. 계연수는 밖에서 꽤 오래 기다렸다. 잠시 후, 안으로 들어갔던 시종이 나오며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후작께서 바쁘시니, 먼저 돌아가 계시라 하셨습니다.”계연수는 아직도 불빛이 새어 나오는 서재를 바라보았다. 이미 늦은 시각인데도 심서준은 여전히 일을 보고 있었다.그녀는 시종에게 조용히 말했다.“시간이 늦었으니, 일 마치시면 너무 무리하지 마시고 일찍 쉬시라 전하거라.”하인은 급히 고개를 숙여 대답했다. 계연수가 떠나는 모습을 보고서야 그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아까 말을 전하러 들어갔을 때도 심서준은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고, 얼굴빛 또한 몹시 서늘했다. 그런데 또다시 들어가 말을 전해야 한다니, 속이 타들어 갈 지경이었다.서재 안.심서준은 계연수가 그렇게 쉽게 돌아가 버렸다는 사실에 눈빛이 더욱 싸늘해졌다. 붙잡는 말 한마디조차 없다니. 시종이 전한 말을 듣고서야 그의 냉담한 얼굴 위로 비웃음 같은 기색이 희미하게 스쳤다.방 어멈이 아니었다면, 그 보양탕조차 직접 가져오고 싶지 않았겠지.책상 위에는 여러 권의 권책이 펼쳐져 있었고, 눈앞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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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72화

어린 시절, 일곱이나 여덟 살 무렵의 심서준은 방 어멈에게 어느 정도 정을 붙이고 있었다. 그의 일상 대부분은 방 어멈이 돌보고 있었기에 적어도 심씨 노부인보다는 가까웠다.심씨 노부인은 평생 귀하게만 살아온 사람이었다. 집안의 자질구레한 일에는 손대는 걸 좋아하지 않았고, 젊은 시절엔 풍류를 즐기며 사람들과 어울리고 치장하는 데 마음을 쏟았다. 아들을 아끼긴 했지만, 그 애정 또한 금은보화를 퍼붓고 수많은 하인들을 붙여 돌보게 하는 정도였을 뿐, 직접 손수 챙긴 적은 거의 없었다.반면, 방 어멈은 인내심 많고 세심한 성정이었다. 심서준의 생활 구석구석을 빈틈없이 돌보았고, 덕분에 어린 심서준은 가끔 마음속 고민을 그녀에게 털어놓기도 했다.가끔 심 수보에게 꾸중을 듣고 나면 억울한 마음에 방 어멈에게 불평을 늘어놓을 때도 있었다.하지만 심서준은 열네 살이 지나 몽정을 겪고 난 뒤부터, 마치 하루아침에 어른이 되어 버린 사람처럼 달라졌다. 그 후로는 어떤 일도 더 이상 방 어멈에게 털어놓지 않았다.사실 방 어멈은 예전의 심서준을 조금 그리워하고 있었다.그 시절의 심서준 역시 냉담한 구석은 있었지만, 적어도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순간들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심서준은 점점 더 차갑고 무심해졌다. 벼슬길에 올라 관직 생활을 시작한 뒤로는 몸에 밴 냉엄한 기운마저 갈수록 짙어졌다.이십 년 넘게 그를 모셔 온 방 어멈조차도, 가끔 아무 표정 없는 그의 엄숙한 얼굴을 마주하면 저도 모르게 숨을 죽이게 될 정도였다.그나마 다행인 건 계연수의 마음이 단순하고 무던하다는 점이었다. 웬만한 일엔 크게 마음 쓰지 않는 성정이라, 후작의 그런 모습에도 겁을 먹지는 않았으니까.심서준은 피곤한 듯 눈을 감고 있었다. 하지만 마음속 긴장은 여전히 팽팽했다. 영청 후작부의 일과 계연수에 대한 생각이 뒤엉켜 머릿속을 어지럽혔고, 그는 점점 버거움을 느끼고 있었다.무엇보다 그는 자신의 감정을 정리해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 감정이 계연수에게까지 영향을 미쳐서는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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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73화

심씨 노부인으로서는 그 혼사를 딱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심소연은 그녀가 보기에도 흠잡을 데 없는 아가씨였다. 재주도 뛰어나고 용모 또한 남에게 뒤지지 않았으니까. 어차피 궁에서 며느리를 들일 거라면 차라리 자기 가문의 사람이 그쪽에 시집가는 게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게다가 백씨는 오랜 세월 그녀를 정성껏 모셔 왔고, 심태숙의 효심 또한 그녀가 늘 눈여겨보고 있었다. 겉으로는 별다른 태도를 드러내지 않은 채, 그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황후 마마께서 확실히 이황자의 비빈을 고를 생각이 있으시더구나. 이황자도 이제 몇 달 뒤면 열아홉이니, 슬슬 비를 들일 때가 되었지.”그러곤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이었다.“두 달 뒤에는 마구회도 열린다더구나. 귀족 규수들도 참가할 테고, 예년처럼 시합도 있을 것이다. 이황자 역시 마구를 좋아하니, 그때 소연이도 한번 나가 보게 하거라.”그러면서 다시 백씨를 힐끗 바라보았다.“이 일이 성사될지 아닐지는 내가 결정할 수도, 황후 마마께서 정하실 수도 없는 일이다. 결국은 이황자와 폐하의 마음에 달린 일이니, 그쯤은 알겠지? 나는 이 일에 대해 따로 입장을 밝히지 않겠다. 모든 건 하늘의 뜻에 맡기마.”백씨는 심씨 노부인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결국 이루어질지 아닐지는 운명에 달렸다는 뜻이었다.하지만 심씨 노부인이 이런 마음을 품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백씨는 곧바로 웃으며 말했다.“어머님 말씀이 맞습니다. 저야 그런 뜻이 있지만, 결국은 아이의 운에 달린 일이겠지요.”곁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심소연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그녀도 이황자를 본 적은 있었지만, 남녀 간의 마음 같은 것은 조금도 품어 본 적이 없었다. 더구나 어머니는 그녀 마음속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걸 분명 알고 있었다. 그 사람은 이미 혼담까지 넣은 상태였다. 그런데도 이렇게 일을 밀어붙이려 드니, 심소연으로서는 마음이 복잡할 수밖에 없었다.조금 전까지 심씨 노부인을 향해 억지로 띠고 있던 미소도 어느새 천천히 사라졌다.옆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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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74화

심소화가 저토록 눈치 빠르게 굴자, 백씨로서는 속이 불편해도 겉으로는 체면을 차릴 수밖에 없었다.그녀는 억지웃음을 띤 채 몸을 숙여 심소화를 일으켜 세우고는 심씨 노부인을 향해 말했다.“어머님 말씀 맞습니다. 이 아이 혼사도 제가 마음 써서 보고 있습니다.”그제야 심씨 노부인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심가의 규수들이 아무리 그래도 첩으로 떨어질 정도는 아니다. 설령 평범한 집안에 시집가더라도 첩이 되는 것보단 훨씬 낫지.”그러곤 다시 말을 이었다.“네 시아버지와 네 부군, 그리고 나까지 모두 같은 생각이다. 너도 똑똑히 새겨 두거라. 첩이 낳은 자식이라 해도 성은 심씨다. 우리 심가는 청류 집안이지, 딸을 앞세워 남 비위 맞추는 집안이 아니다.”백씨는 심씨 노부인의 말이 어쩐지 자신을 두드려 경고하는 듯하게 들렸다. 그녀는 마른웃음을 지으며 아무 말 없이 서 있었지만, 틈틈이 심소화를 한 번 매섭게 흘겨보았다.계연수는 줄곧 조용히 곁을 지키며 가끔 최씨와 몇 마디 말을 주고받고 있었다. 방금 전 심씨 노부인의 말을 들으며, 그녀는 그런 생각을 품고 있는 노부인이 조금은 대단하게 느껴졌다.청류 집안의 딸은 영화를 위해 팔아넘기지 않는다는 말.그건 계연수가 오늘 들은 말 가운데 가장 마음에 남는 말이기도 했다.동시에 심소화가 안쓰럽기도 했다. 조금 전 백씨의 표정을 보아하니 분명 다른 속셈이 있었는데, 이제는 그 계획도 쉽사리 이루어지긴 어려워 보였기 때문이다.자리가 파하고 나서 심씨 노부인은 계연수에게 자신을 부축해 돌아가라 시켰다.심씨 노부인은 원래부터 계연수에게 썩 좋은 태도로 일관하지는 않았다. 말끝마다 꼭 흠을 잡곤 했는데, 작은 길을 따라 함께 걷는 동안에도 질책은 끊이지 않았다.“어젯밤 준이가 서재에서 잤다지. 넌 부인이라는 사람이 대체 어떻게 부군을 돌본 것이냐?”그러곤 차가운 눈으로 계연수를 바라보았다.“준이가 너를 부인으로 맞아준 것만 해도 네겐 큰 복이다. 그런데도 제대로 모시지 못한다면, 내가 다른 사람을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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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75화

계연수는 당연히 기꺼웠다. 원래부터 최은조를 좋아했던 터라, 서둘러 답장을 써 사람을 시켜 보내게 했다.그리고 오후가 되자 최은조는 정말로 찾아왔다.사실 계연수 역시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최근 들어 마음 한켠에 맺혀 있던 자잘한 서러움들, 그리고 심씨 노부인이 했던 말들.물론 그녀는 스스로에게 늘 괜찮다고 타일렀다. 이미 화리까지 겪은 사람인데, 무엇 하나 넘기지 못할 일이 있겠느냐고. 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 남은 작은 응어리는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올라와 그녀를 답답하게 만들었다.이 넓은 심가에서 진심으로 속내를 털어놓을 사람도 없었는데, 최은조가 와 준 건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상중이라 그런지 최은조는 오늘도 수수하고 단정한 차림이었다. 옅은 푸른빛의 담백한 운금을 걸쳤고, 길게 늘어진 머리에는 옥비녀 두 개만 소박하게 꽂혀 있었다.하지만 원래부터 맑고 고운 분위기의 얼굴이라, 오히려 그런 단정한 차림이 그녀의 아름다움을 더 돋보이게 했다.계연수는 원래 남의 외모를 유심히 보거나 신경 쓰는 성격은 아니었다. 그런데 최은조만큼은 정말로 아름답다고 느꼈다. 그녀에게는 설명하기 어려운 친근함마저 느껴졌다.심지어 최은조와 심서준 사이에 예전에 무언가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질투가 생기지 않았다.오히려 두 사람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할 정도였다.계연수는 최은조를 보자마자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그녀는 다가가 최은조의 손을 잡고 함께 안채로 들어갔다.최은조 역시 계연수를 보자 반가운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마음이 흔들리고 기댈 곳이 필요할 때, 그녀가 가장 먼저 떠올린 곳은 계연수 곁이었다. 그녀는 계연수가 세상에서 가장 좋은 여자이며, 가장 마음 편히 다가갈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자신이 찾아오면 계연수가 분명 진심으로 반겨 줄 거라는 것도.그게 무엇 때문인지는 최은조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그저 설명할 수 없는 끌림 같기도 했고, 어쩌면 심 후작이 마음에 두었던 사람이기 때문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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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76화

이곳의 장식들은 하나같이 화려하고 정교했으며, 색감 또한 선명하고 밝았다. 늘 검은 옷만 입고 다니는 심 후작의 취향과는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였다.계연수는 최은조가 가져온 두 폭의 그림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솔직히 말하면, 이번 그림은 이전보다 확실히 나아져 있었다. 최은조가 얼마나 마음을 쏟았는지가 눈에 보일 정도였다.계연수는 최은조를 곁으로 불러 앉힌 뒤 그림 속 산봉우리를 가리켰다.“예전 그림은 먹빛의 층이 조금 단조로웠는데, 이번엔 먹색에 제법 깊이가 생겼어. 가운데 비워 둔 안개 부분도 아주 적절하고.”그러곤 다시 아래쪽을 짚었다.“다만 가까운 쪽의 나무와 바위는 필력이 조금 약해 보여. 먹도 물기를 너무 많이 머금어서 약간 흐릿하게 번진 느낌이고.”계연수는 다시 그림 한쪽을 손끝으로 짚었다.“그리고 가장 아쉬운 건 여기의 자토색이야. 너무 급하게 얹어서 오히려 그림 전체의 맑은 분위기를 깨 버렸거든.”말을 마친 계연수는 얼른 최은조 쪽으로 몸을 돌려 그녀의 손을 잡았다.“물론 나도 학식이 얕아서 함부로 평한 걸 수도 있어. 그래도 네 그림 속 저 빈 배가 물가에 홀로 머무는 느낌은 정말 좋아. 사람 없는 나루터 같은 적막한 운치도 느껴지고. 사실 그림은 기법만 보는 게 아니잖아. 결국은 그 안에 담긴 마음과 풍경을 보는 거니까.”최은조는 자신을 바라보는 계연수의 반짝이는 눈을 가만히 마주했다.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따뜻해서 듣는 사람 마음까지 편안하게 만들었다. 학식도 깊었지만, 조금도 아는 체하거나 뽐내는 느낌이 없었다. 오히려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자연스럽고 옳게 느껴졌다.최은조는 계연수가 짚어 준 부분을 다시 바라보았다.사실 그곳은 그녀 자신도 끝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부분이었다.요즘 그녀 마음속에는 생각이 너무 많았다. 최부에서도 모든 일이 뜻대로 흘러가는 건 아니었기에, 그림을 그리면서도 온전히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했다.최씨 부인은 그녀를 무척 아껴 주었다. 하지만 동시에 최은조와 최성군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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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77화

계연수는 놀란 눈으로 최은조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그런 생각을 품고 있을 줄은 미처 몰랐다.지난번 평남후부에 갔을 때만 해도, 계연수는 최가가 참 드물 만큼 화목한 세가라는 걸 느꼈다. 집안 자매들 사이의 정은 따뜻했고, 형제들 또한 서로 우애로웠다. 그래서 지난번 최가 자매들이 최은조를 대신해 억울함을 토로했을 때도, 계연수는 조금도 언짢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최은조의 여동생 역시 언니를 무척 따르고 좋아했고, 최씨 부인과 최씨 둘째 부인 또한 최은조를 애지중지했다.솔직히 말해, 만약 고부가 평남후부처럼 위아래 모두 화목한 집안이었다면, 계연수 역시 틈만 나면 친정으로 돌아가고 싶었을 것이다.그래서 더 이해할 수 없었다. 최은조가 어째서 그런 생각을 품게 되었는지.계연수는 조용히 말했다.“그런 삶이 분명 자유롭긴 하겠지만, 예부터 몸은 뜰 밖을 나서지 못해도 마음만은 산수 깊은 곳을 헤맨다는 말이 있잖아. 사람들이 산수화를 좋아하고 또 곁에 두려 하는 것도, 결국 세속의 인연을 완전히 놓아 버리긴 어렵기 때문이야. 그래서 그림 속 풍경에 마음을 기대는 거고.”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이어 말했다.“다들 그런 삶이 얼마나 요원한지 알고 있으니까. 나 역시 예전엔 동경한 적이 있었어. 헌데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알아. 기댈 곳 없는 여자는 한 걸음 내딛는 것조차 버거우니까. 세상일이라는 게 마음먹은 대로만 흘러가진 않잖아.”최은조는 계연수의 말을 듣고 잠시 멍하니 있다가, 곧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그녀 역시 알고 있었다. 계연수의 말이 틀리지 않다는 걸.여자인 자신이 누군가의 보호도 없이, 오직 객기만으로 지금의 처지를 벗어난다 해도, 정말 원하는 조용한 삶을 살 수 있을 가능성은 희박했다.그럼에도 마음 한켠에서는 여전히 그런 삶을 꿈꾸고 있었다.그리고 계연수 역시 한때 자신과 같은 생각을 했었다는 말을 듣는 순간, 최은조의 마음은 묘하게 흔들렸다.정말 자신과 닮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다만 계연수는 좋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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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78화

두 사람은 이야기에 푹 빠져, 해가 서쪽으로 기우는 것도 모른 채 시간을 보냈다. 말이 통하다 보니 점점 더 이야기꽃이 피어났고, 취향마저 비슷한 부분이 많아 작은 청 안에서는 틈틈이 잔잔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계연수는 최은조를 붙잡아 함께 저녁을 먹고 가라 했다.최은조는 잠시 망설이며 말했다.“혹시 심 후작께서 돌아오시면요?”사실 계연수는 심서준과 함께 저녁상을 마주한 적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 게다가 요즘은 더없이 바쁜 듯했으니, 이렇게 이른 시각에 돌아올 리도 없었다.계연수가 그렇게 말하자 아직 돌아가고 싶지 않았던 최은조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은 다시 예전에 읽었던 이야기책 속 기이하고 재미난 이야기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작은 청 안에서는 간간이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한편, 그날 심서준은 손에 쥔 일들이 어느 정도 정리되어 평소보다 조금 이르게 돌아왔다.막 휘장을 지나려던 순간, 안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에 걸음을 멈췄다.그중에서도 계연수의 웃음소리는 마치 꾀꼬리처럼 맑고 경쾌했다.심서준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자신이 없는 며칠 동안, 그녀는 제법 편안하게 지낸 모양이었다.그는 잠시 그 자리에 서 있다가 곧 몸을 돌려 다른 쪽으로 향해 옷을 갈아입으러 갔다.방 어멈은 곁에서 심서준의 옷을 갈아입혀 주었다.심서준은 여전히 말수가 적었고, 눈빛에는 늘 그렇듯 서늘한 기운이 어려 있었다. 방 어멈은 혼인 이후 조금은 부드러워졌던 후작이, 이제는 다시 혼인 전처럼 가까이하기 어려운 사람으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받았다.그때 심서준이 문득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연수는 요 며칠 뭘 하고 지냈느냐?”방 어멈은 사실대로 답했다.“부인께선 오전에 그림을 그리시고, 오후에는 정원을 조금 거니십니다. 며칠 전에는 큰 부인께서 한번 오셔서 부인과 이야기를 나누셨고요. 밤이면 또 서재에서 잠시 그림을 그리시다가 돌아와 쉬십니다.”그러고는 조심스럽게 말을 덧붙였다.“요즘은 식사도 전보다 잘 드시고, 밤에도 일찍 주무십니다. 지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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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79화

계연수는 심서준이 이 시간에 돌아왔다는 말에 조금 놀랐다. 문득 밖을 보니 이미 황혼이 짙게 내려앉아 있었고, 방 안에도 등불이 켜져 있었다. 생각보다 시간이 꽤 늦어져 있었던 것이다.계연수는 최은조를 향해 말했다.“최 세자께서 직접 마중 오셨으니, 아무래도 오늘은 너를 붙잡고 저녁까지 함께하긴 어렵겠네.”최은조는 손에 쥔 손수건을 살며시 움켜쥐었다.“사실 언니랑 아직 더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는데… 심 후작께서 돌아오셨으니 저도 이제 가 봐야겠어요.”그러고는 잠시 망설이다 다시 말을 이었다.“대신 언니, 혹시 심가의 마차 하나만 내어 주실 수 있을까요? 그걸 타고 돌아가고 싶어요.”계연수는 의아한 얼굴로 되물었다.“최 세자께서 직접 오셨는데, 왜 최 세자 마차는 타지 않으려는 거야?”최은조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아무리 사촌 사이라 해도 같은 마차를 타는 건 조심스러운 일이니까요. 게다가 전 들를 곳도 하나 있어요. 망가진 장신구를 맡겨 두었는데 오늘쯤 수리가 끝난다고 했거든요. 다만 그곳이 평남후부로 가는 길과는 반대라… 괜히 사촌 오라버니를 번거롭게 하고 싶지 않아요.”계연수는 부드럽게 그녀를 타일렀다.“그래도 최 세자께서 일부러 마중까지 오셨는데, 그 정도는 번거롭다고 생각하지 않으실 것 같은데.”최은조는 씁쓸하게 웃으며 계연수의 손을 꼭 잡았다.“언니도 제 출생에 대한 이야기는 들으셨겠죠? 최부에서 제게 베풀어 준 은혜는 정말 크지만, 결국 저는 남의 집에 얹혀사는 몸이에요. 그런 처지일수록 남에게 폐 끼치는 게 제일 두려운 법이죠.”그러고는 조용히 덧붙였다.“부디 사람을 보내 앞채에만 전해 주세요. 제가 먼저 심가 마차를 타고 돌아갔다고요.”계연수는 잠시 망설였다.하지만 최은조의 굳은 눈빛을 보자, 예전에 고부에서 지낼 때 자신 역시 늘 남에게 짐이 될까 두려워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래서 최은조의 마음이 조금은 이해되었다.그녀는 다시 물었다.“그래도 최 세자께서 헛걸음하신 셈이 되는데… 마음 상해하시진 않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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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80화

최은조는 심서준을 보자마자 얼른 계연수의 팔을 놓고는, 곧바로 몸을 숙여 예를 갖추었다.심서준은 최은조를 한 번 힐끗 바라보고는, 아무 표정 없는 얼굴로 담담하게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최은조는 그런 심서준의 무심한 얼굴을 보고, 또 그가 직접 이곳까지 나온 이유를 떠올리며 속으로 몇 가지를 짐작했다.그녀는 곁의 계연수를 향해 말했다.“앞쪽까진 그리 멀지 않으니, 시비에게 길만 안내받으면 돼요. 언니는 심 후작과 먼저 들어가세요.”그러고는 다시 계연수에게 몸을 살짝 굽혀 인사했다.“오늘도 언니께 폐를 끼쳤네요.”계연수는 얼른 최은조를 붙들었다.“괜찮아. 내가 끝까지 데려다줄게.”최은조는 무의식적으로 심서준 쪽을 한번 바라보았다. 과연 그의 얼굴은 아까보다 더 서늘해져 있었다.그녀는 계연수에게 몇 번 더 사양의 말을 건네며 자신이 혼자 나가겠다고 설득했다. 그러고 나서야 속으로 조용히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계연수는 최은조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그러자 심서준은 어느새 아무 말도 없이 몸을 돌려 먼저 걸어가고 있었다.계연수는 얼른 걸음을 재촉해 그의 곁으로 따라붙으며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후작께선 어쩐 일로 이쪽에 오셨어요?”아까 방 어멈은 분명 심서준이 앞채 서재로 갔다고 했었다.심서준은 제 옆에 바짝 붙어 따라오는 계연수를 한번 내려다보았다.속에서는 답답한 숨이 올라왔다.자신이 나오지 않았더라면, 계연수는 아마 뒤문까지 따라나갔을 것이다.그는 계연수가 최성군과 최은조 사이에 끼어드는 걸 원하지 않았다.최성군의 감정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친구의 선택에 간섭할 생각도 없었다.무엇보다 부군이 돌아왔는데도, 그녀는 조금도 신경 쓰는 기색이 없었다.겨우 두어 번 본 사람에게는 그토록 다정하면서.아까 돌아왔을 때 들었던 방 안의 웃음소리도 다시 떠올랐다.보아하니 자신이 없는 동안 그녀는 꽤 즐겁게 지낸 모양이었다.심서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계속 앞으로 걸었다.계연수 역시 그의 낯빛이 심상치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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