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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e Kapitel von 주문춘귀: Kapitel 771 – Kapitel 780

809 Kapitel

제771화

계연수는 앞쪽에서 손님들을 맞이했다. 과연 심서준의 말대로였다. 그녀가 기억해 두어야 할 집안은 몇 곳뿐이었고, 그 외에는 그녀가 알아보지 못하더라도 상대가 먼저 다가와 말을 걸어 왔다.백씨는 오늘 유난히도 상냥하고 열정적이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기쁜 기색이 가득했다. 이제 심정우가 공을 세워 앞날이 창창해졌으니, 혼담을 염두에 두고 백씨와 친분을 쌓으려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심정우는 본래 심씨 가문의 자제였으니, 예전부터 혼인을 바라는 집안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제 공명까지 얻었으니, 그 수가 더욱 많아진 것이다.계연수는 몇몇 집안 사람들을 상대하다가 소씨와 마주쳤다. 그녀는 소씨와 함께 한쪽으로 가 앉아 이야기를 나누려 했지만, 차 한 잔 마실 틈도 되지 않아 곁에는 어느새 사람들이 여럿 모여들었다.지금 계연수의 신분은 경성 안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다들 어떻게든 그녀와 말 한마디라도 섞어 보려는 것이었다. 말마다 친근하게 다가오고, 가까워지려는 뜻이 담겨 있었으며, 그 지나친 정성에 계연수는 도리어 익숙하지 않았다.그녀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심씨 가문의 며느리이자 심서준의 부인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신을 추켜세운다는 것을.본래는 소씨와 함께 처마 아래에 조용히 앉아 몇 마디 나누며 잠시 쉬려던 참이었다. 그러나 곁에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둘러앉아있으니, 조용히 있기는 이미 글렀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때 심씨 노부인 곁의 사람이 다시 계연수를 불렀다. 노부인이 화청으로 오라 했다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화청 안의 아가씨들이 투호를 하고 싶다고 했고, 노부인이 계연수에게 가서 준비를 맡기려는 모양이었다.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계연수는 곧바로 사람을 시켜 화청 앞쪽에서 멀지 않은 작은 정원에 투호 자리를 마련하게 했다.잠시 후, 아가씨들이 그쪽으로 몰려왔다. 그들은 옆 탁자 위에 놓인 조각 깃 장식의 죽간을 집어 들고 앞다투어 투호를 하기 시작했다.그 옆에는 물가를 따라 난 정자식 회랑이 있었고, 맞은편에는 누각 하나가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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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72화

심서준은 창가에 조용히 서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한눈에 저 사람이 계연수라는 것을 알아보았다.마침 그의 곁에 서 있던 진철은 저도 모르게 심서준의 얼굴을 살폈다가, 온몸에서 냉기가 뚝뚝 떨어지는 얼음산 같은 표정을 보고는 얼른 주변에서 수군거리던 사람들을 말렸다. 이대로 두었다가는 얼음산이 불을 뿜을 판이었다.누각 위에서 터진 그리 크지 않은 갈채는 아래쪽 아가씨들에게도 들렸다. 그러자 다들 덩달아 의욕이 올라, 저마다 한 번씩 던져 보고 싶어 하는 기색을 보였다.계연수는 고하운에게 깃화살 하나를 건네며 여기서 놀고 있으라 이르고, 자신은 먼저 화청에 있는 심씨 노부인에게 다녀오겠다고 했다. 고하운이 원한 것은 바로 계연수가 직접 손을 잡고 자신을 데려오는 모습을 다른 사람들이 보는 일이었다. 그 덕분인지 금세 기가 살아난 고하운은 일부러 더 친근한 척하며 계연수에게 이것저것 말을 붙였다.계연수는 그런 고하운을 깊이 바라보았다. 갑자기 자신에게 이토록 다정하게 굴며 어리광을 부리는 이유를 모를 리 없었다. 다만 굳이 그 자리에서 들춰내지는 않았다.고하운의 투호 솜씨는 제법 괜찮은 편이었다. 예전부터 계연수에게 지지 않으려 이를 악물고 연습했던 덕분에, 지금도 아가씨들 사이에서는 꽤 잘 던지는 축에 들었다. 이번에도 첫 화살부터 단번에 들어갔다. 그 정도 자신이 없었다면 애초에 이런 자리까지 나서지도 않았을 것이다.진가옥은 고하운이 생각보다 능숙한 데다 계연수의 사촌 동생이라는 말까지 듣자, 마음속에 자연스레 친근감이 생겼다. 그래서 곧장 다가가 고하운과 말을 트려 했다.고하운이 바라던 것도 바로 그것이었다. 계연수를 빌려 귀한 집안의 아가씨들과 인연을 맺는 것. 그중에서도 진가옥은 두말할 것 없이 출신이 매우 높았으니, 그녀와 친분을 쌓을 수 있다면 더없이 좋은 일이었다.진가옥이 먼저 말을 걸어오자 고하운의 얼굴에도 웃음이 번졌다. 그녀는 진가옥에게 투호를 가르쳐 주겠다고 나섰고, 그렇게 몇 번 말이 오가는 사이 고하운은 뜻밖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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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73화

사실 계연수는 마구를 할줄 알았기에 마음 한편으로는 한번 나가 보고 싶은 생각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일만큼은 심서준과 먼저 상의해야 했다. 만약 심서준이 원하지 않는다면, 그녀 역시 참가하지 않을 생각이었다.그래서 잠시 생각한 뒤 웃으며 말했다.“조금 더 생각해 볼게요. 그때쯤 편지로 알려 드리면 되겠네요. 설령 참가하지 못하더라도 그날은 꼭 가서 구경할 거예요.”최민정이 계연수를 권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예전에 계연수가 마구를 치는 모습을 직접 본 적이 있었는데, 그 솜씨가 여느 규수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났기 때문이다. 들으니 마구는 아버지에게 직접 배웠다고 했다. 그때부터 최민정은 계연수와 꼭 한번 친분을 맺고 싶었지만, 좀처럼 마주칠 기회가 없었다. 그런데 혼인한 뒤 뜻밖의 인연으로 이렇게 가까워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최민정 역시 평남후부 무장 가문 출신이었다. 겉보기에는 단정하고 온화했지만 어려서부터 말을 탔고, 몸을 단련하는 무예도 조금 익혔다. 하지만 주변의 귀한 집 규수들은 하나같이 곱게만 자란 아가씨들이었다. 최은조는 몸이 약했고, 두 사촌 동생은 마술(馬術)을 배우긴 했지만 아직 어려 함께 어울리기에는 부족했다.이래저래 따져 봐도 마음이 가장 잘 맞는 사람은 계연수뿐이었다.물론 세월이 흐르며 뜻이 맞는 사람들을 몇 명 더 사귀긴 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계연수도 그들과 알게 해 주고 싶었다.계연수의 대답을 들은 최민정은 더는 권하지 않았다. 억지로 되는 일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웃으며 다음에 다시 이야기하자고 넘긴 뒤, 자연스럽게 화제를 계연수의 소장 그림으로 돌렸다.최민정 역시 그림 감상을 좋아했다. 최은조에게서 계연수가 제법 많은 명화를 소장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었다.하지만 실제로 계연수가 가진 그림은 그리 많지 않았다. 아버지가 남긴 몇 점은 예전에 가산이 몰수될 때 함께 빼앗겼기 때문이다.오히려 명화를 많이 가진 사람은 심서준이었다. 그의 서재에는 이름난 작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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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74화

맞은편에서 최민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뭘 그렇게 보고 있느냐?”계연수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편지를 다시 접어 소매 안에 넣으며 말했다.“예전에 써 둔 시 한 편이 여기 들어 있었네요.”마침 그때 바깥에서 시녀가 들어와 연회가 시작될 시간이 되었다고 알렸다. 계연수는 편지를 소매 속에 넣은 뒤 용춘에게 화첩 상자를 정리하게 하고, 최민정과 최은조를 데리고 함께 밖으로 나섰다.가는 길에는 자연스럽게 최민정과 그녀의 부군 이야기가 나왔다.두 사람은 마구 시합에서 처음 만나 서로에게 반했다고 했다. 위씨 둘째 도련님은 마구 실력만큼은 누구도 따라오기 어렵다는 평을 듣는 인물이었다. 성격은 자유분방하고 머리도 비상했지만 책 읽기에는 별 흥미가 없었다. 그렇다고 방탕한 자제처럼 노름에 빠지는 사람도 아니었다. 오히려 산천을 유람하거나 희곡과 악곡을 만들어 사람들 사이에 퍼뜨리는 것을 즐겼고, 친구들과 어울려 술자리를 벌이거나 새로운 놀이를 만들어 내는 데 재미를 느끼는 사람이었다.게다가 장사 수완도 뛰어났다. 그의 명의로 운영하는 주루들은 하나같이 장사가 잘됐으니, 은전이 부족할 일도 없었다.최은조에게서 위씨 둘째 도련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계연수는 절로 미소를 지었다. 저런 성품이라면 함께 지내는 재미가 분명 클 터였다. 옆에서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최민정을 보니, 저토록 흥미로운 부군을 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새삼 느껴졌다.연회가 끝나자 고씨 노부인이 계연수에게 따로 할 말이 있는 듯한 기색을 보였다.계연수는 용춘에게 먼저 최민정과 최은조를 자신의 처소로 안내해 잠시 기다리게 한 뒤, 자신은 백씨와 함께 앞쪽 손님들을 마저 배웅했다. 손님들을 모두 보내고 나서도 심씨 노부인께 다시 들러 인사를 올려야 했다.모든 일이 끝난 것은 반나절이 훌쩍 지난 뒤였다.심씨 노부인은 오늘 계연수가 일을 빈틈없이 처리한 모습을 꽤 만족스럽게 여겼다. 사실 안채의 살림이란 아무리 잘해도 크게 드러날 일은 없었다. 그저 실수 없이 해내는 것, 그것이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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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75화

안채에 다른 사람들이 모두 물러나자 고씨 부인이 곧장 계연수 곁으로 다가왔다.“이제야 다 끝났구나?”계연수도 어머니를 본 지 제법 오래였다. 이제야 겨우 둘만 오붓하게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생겼다.곁에 마음 편한 가족들만 모여있는 것을 본 계연수는 긴장이 풀려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네, 이제 다 끝났어요.”그러고는 어머니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전보다 혈색이 훨씬 좋아진 모습이었다. 그제야 마음 한편이 놓였다.그동안 일이 연달아 터지는 바람에 친정에 찾아가지도 못했다. 대신 몸에 좋은 보양식을 꾸준히 보내고, 편지로 안부를 물으며 건강을 챙겨 왔다.예전의 어머니는 늘 병색이 짙은 얼굴로 방 안에만 머물렀다. 그런데 지금은 제법 생기가 돌아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계연수도 절로 마음이 따뜻해졌다.그때 고씨 노부인이 흐뭇한 눈빛으로 계연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오늘 보니 심씨 노부인도 너를 꽤 아끼는 것 같더구나. 심씨 가문 사람들도 모두 너를 좋게 대하고. 사실 처음에는 네가 시집가서 고생하지 않을까 걱정이 컸는데, 이제는 한시름 놓였다. 헌데 결국 심씨 가문 사람들이 너를 어떻게 대하는지는, 심 후작이 너를 어떻게 대하느냐에 달린 것 아니겠니?”그 말은 계연수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오늘 아침 심서준이 했던 말처럼, 밖에서 자신이 누리는 체면도 결국은 모두 심서준이 만들어 준 것이었다.고씨 노부인은 다시 당부했다.“연수야, 너는 정말 복이 많은 아이다. 그러니 심 후작의 마음을 단단히 붙잡고, 하루빨리 아이도 하나 낳아야지.”오늘 하루 손님들을 상대하는 동안도 아이 이야기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열 마디 중 다섯 마디는 자식 이야기였다. 솔직히 이제는 듣는 것만으로도 지칠 정도였다.하지만 조모가 모두 자신을 걱정해서 하는 말이라는 걸 알기에, 계연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이번에는 고씨 노부인이 입을 열었다.“오늘 보니 심씨 노부인도 앞으로는 네게 살림을 맡길 생각인 것 같더구나.”계연수는 외조모를 안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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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76화

“저 아이 성미를 고치지 못하면 언젠가는 크게 데일 날이 올 게다.”그러고는 한쪽에서 조용히 서 있던 고하영을 불렀다.“하영이는 어릴 적부터 얌전하고 욕심도 없는 아이야. 하운이보다 마음도 훨씬 맑고 순하지.”“네가 심씨 가문에서 완전히 자리를 잡고 나면, 하영이 혼사도 좀 신경 써 주렴.”계연수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걱정 마세요, 할머니. 저도 늘 마음에 두고 있어요.”옆에서 듣고 있던 유씨는 그 말이 무척 기뻤는지 얼른 고하영에게 계연수에게 인사드리라고 재촉했다.고하영은 수줍은 미소를 머금은 채 앞으로 나왔다.계연수와는 나이 차이가 몇 살 나는 탓에 어려서는 함께 어울려 논 적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조금은 쑥스러운 기색이었다.그녀는 얌전히 예를 갖추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사촌 언니, 감사합니다.”계연수가 막 대답하려던 순간이었다. 방 어멈이 다급히 안으로 들어와 계연수의 귓가에 작은 목소리로 몇 마디를 속삭였다.말을 들은 계연수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 방금 뛰쳐나간 고하운이 공교롭게도 막 돌아온 심서준과 정면으로 부딪쳤다는 것이었다.계연수는 급히 밖으로 나갔다.밖에는 고하운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한쪽에 서서 덜덜 떨고 있었다. 그리고 그 맞은편에는 얼굴을 굳힌 심서준이 서 있었다.싸늘한 시선이 그대로 계연수에게 향했다.계연수가 다가가자 고하운도 그녀를 올려다보았다.심서준의 표정에 이미 잔뜩 겁을 먹은 것이 분명했다. 심서준은 본래 위엄이 남달랐고, 그의 냉랭한 기세 앞에서 겁먹지 않는 사람은 드물었다.장씨도 황급히 달려와 심서준에게 연신 사과했다.고하운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했다.방금은 화를 참지 못하고 무작정 뛰쳐나왔을 뿐, 앞을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설마 그런 귀인을 들이받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심서준은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얼굴에 드러난 불쾌함은 너무도 분명했다.대답조차 돌아오지 않자 장씨는 난처한 얼굴로 계연수만 바라보았다.계연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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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77화

계연수는 심서준 곁으로 다가갔다.아직도 그의 얼굴에는 냉기가 가시지 않은 채였다. 고하운이 저지른 일 때문에 마음이 단단히 상한 것이 분명했다.계연수는 먼저 말을 건넸다.“부군, 아직도 화나셨어요? 아까 하운이가 실례를 저지른 일은 돌아가시면 할머니께서 단단히 꾸짖으실 거예요.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겁니다.”심서준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대답 대신 계연수의 손을 잡고 안채로 들어섰다. 걸음을 옮기면서도 굳은 얼굴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방 안으로 들어온 심서준은 안채에서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계연수도 자연스럽게 그의 곁으로 다가가 허리띠를 풀어 주었다.심서준은 말없이 그녀의 손길을 내려다보았다.사실 그가 마음에 담아 둔 것은 고하운의 일이 아니었다.낮에 계연수가 투호를 던지던 모습이 자꾸만 떠올랐고, 그 직후 고하운이 제 품으로 뛰어든 일까지 겹치면서 괜히 심기가 뒤틀려 있었던 것이다.그런데 계연수의 부드러운 손끝이 몸에 닿자 굳어 있던 몸도 조금씩 힘이 풀렸다.그는 말없이 그녀의 손길에 몸을 맡긴 채 옷을 갈아입었다.벗어 놓은 옷에서는 술 냄새가 은은하게 배어 나왔다.점심 연회에서 술을 꽤 마신 모양이었다. 속옷도 땀에 살짝 젖어 있었다.날씨가 부쩍 더워진 터라 술을 마시고 땀을 흘리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부군, 먼저 목욕부터 하세요. 옷도 갈아입으셨으니 씻고 나시면 훨씬 개운하실 거예요.”“너는?”“전 시녀들에게 옷을 맡겨 세탁하게 하고, 내일 입으실 옷도 미리 준비해 둘게요.”심서준은 입술을 가만히 다물었다.지금 그의 몸에는 흰 비단 속옷만 걸쳐져 있었다.흰옷은 그의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기는커녕, 오히려 차갑고 엄정한 인상만 더욱 도드라지게 했다.사실 그는 계연수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마음속 불편함을 억누른 채 낮게 말했다.“그 옷은 빨지 말고 버리거라.”계연수가 눈을 깜빡였다. 심서준은 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더러운 게 닿은 옷인데,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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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78화

계연수를 바라보던 심서준의 눈길이 문득 그녀의 얼굴에 머물렀다.조금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흰 목덜미가 드러나 있었고, 옅은 분홍빛 옷깃 위로는 먹빛처럼 짙고 깊은 눈동자가 은은한 여운을 머금고 있었다. 붉은 입술에는 아직도 희미한 향기가 맴도는 듯했다.심서준은 고개를 숙여 그녀의 가느다란 눈썹 위에 살며시 입을 맞췄다.“난 너한테 화를 낸 게 아니다.”그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차갑게 굳어 있던 눈매도 어느새 부드럽게 풀려 있었다.“이번엔 내가 잘못했다. 돌아오면 천천히 이야기하자.”그러고는 계연수의 손을 잡아 자신의 가슴 위에 올려놓았다.“옷 좀 입혀 주거라.”목소리에는 이미 먼저 한발 물러선 사람의 다정한 기색이 묻어 있었다.계연수 역시 끝까지 따지고 들며 일을 키우는 성격은 아니었다. 게다가 심서준에게 급한 일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기에, 아무 말 없이 익숙한 손길로 그의 옷을 입혀 주고 허리띠까지 단정하게 매어 주었다.심서준은 고개를 숙인 채 계연수를 바라보았다.햇살 아래 더욱 희게 빛나는 뺨, 물 흐르듯 부드러운 손놀림, 고개를 숙일 때마다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단아한 자태. 그 모든 모습이 그의 가슴을 은근히 뜨겁게 달궜다.문득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계연수가 고개를 숙일 때마다 들키지 않으려 애쓰면서도 끝내 시선을 거두지 못했던 그때의 자신.그 마음은 세월이 흘렀어도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심서준은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계연수를 한 번 바라보았다.그녀는 배웅하러 나오지 않고 방 어멈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그는 아무 말 없이 시선을 거둔 채 발걸음을 돌렸다.*계연수는 먼저 방 어멈에게 백씨에게 다녀와 자신이 찾아뵙겠다고 미리 전해 달라고 했다. 아무 예고도 없이 찾아가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그러고는 용춘에게 단장을 다시 정리해 달라고 한 뒤 자리에 앉아 길게 숨을 내쉬었다.어젯밤에는 심서준 때문에 제대로 쉬지도 못했고, 오늘은 아침부터 지금까지 쉴 틈 없이 바빴다.이제야 겨우 앉았는데 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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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79화

계연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안채 안쪽을 바라보았다.백씨는 다급히 심정우를 부축해 안으로 들어갔고, 휘장 너머에서는 사람들의 다급한 목소리가 연달아 들려왔다.계연수는 안까지 따라 들어가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대신 막 휘장을 들고 들어가려던 최씨를 불러 세웠다.최씨는 얼른 걸음을 멈추고 계연수 앞으로 다가왔다.계연수는 안쪽을 한 번 바라본 뒤 나직이 말했다.“형수님께서 지금은 여유가 없으실 테니 나 대신 한마디만 전해 주거라. 내가 여기 있어 봐야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구나. 헌데 그래도 셋째 도련님의 상처는 계속 마음에 걸리는구나.”잠시 말을 멈춘 그녀는 다시 덧붙였다.“부군께 궁에서 하사받은 상등의 상약이 있다. 조금 뒤 사람을 시켜 보내 주도록 하마. 장부 이야기는 내일 아침 다시 나누자고도 함께 전해주고.”최씨는 얼른 고개를 끄덕인 뒤 휘장을 젖히고 안으로 들어갔다.안에서는 백씨가 심정우의 바짓단을 걷어 올리고 있었다.아까 심정우가 폴짝거리며 뛰어다닌 탓에 벌어진 상처가 다시 터졌고, 흰 바지에는 피가 선명하게 번져 있었다.백씨는 심정우를 몇 마디 나무라면서도 시녀들에게 얼른 피를 닦으라고 재촉했다.심정우는 침상 가장자리에 앉은 채, 정작 자신의 상처보다 계연수의 일을 먼저 떠올렸다.“숙모님은 어머니께 장부 받으러 오신 거잖아요. 어머니는 저보다 먼저 숙모님 일부터 처리해 주세요.”그 말에 백씨는 심정우를 한 번 노려봤다.정작 자기 일에는 늘 무심하면서도 남의 일만큼은 누구보다 마음에 담아 두는 아들이었다.남들은 자기 어머니 손에 있는 살림 권한을 넘겨받으려고 온 것인데, 이 아이는 오히려 얼른 넘겨주라고 등을 떠미는 꼴이었다.그때서야 최씨가 끼어들 틈이 생겼다.그녀는 조금 전 계연수가 전해 달라고 했던 말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백씨에게 그대로 전했다.백씨는 코웃음을 치며 작게 중얼거렸다.“괜한 생색은.”목소리는 아주 낮았지만, 심정우의 귀에는 분명히 들어갔다.그는 잠시 멍한 표정으로 어머니를 바라보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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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80화

편지지에 적힌 심서준의 글귀는 짧았다.백년해로, 평생을 함께.계연수는 그 몇 글자를 한 자 한 자 되짚어 읽을 때마다 가슴 한구석이 저릿하게 흔들렸다.만약 그 뒤에 심서준이 자신에게 하사혼을 피하고 싶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면, 계연수는 그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믿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확신할 수 없었다. 이 편지에 담긴 뜻마저도 사실은 자신을 이용해 하사혼을 피하려는 생각이었던 건 아닐까?편지의 내용은 길지 않았다. 심서준다운 방식이었다. 몇 마디뿐이었고, 그 안 어디에도 자신을 좋아한다는 말은 없었다.계연수는 늘 심서준이 자신을 좋아하는 것 같다고 느꼈다. 이번 일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그는 영청 후작부까지 무너뜨릴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태후의 하사혼 하나를 정말 두려워했을까? 마음만 먹으면 피할 방법쯤은 있었을 것이다.그렇다면 심서준은 자신을 속인 셈이었다.하지만 곧 다시 생각이 이어졌다. 설령 그때 자신이 정말 이 편지를 보았더라도 아마 심서준을 거절했을 것이고, 그와 혼인하지도 않았을 것이다.그때의 계연수에게 심서준은 호감과 안도감을 주는 사람이었지만, 그보다 더 큰 것은 경외심이었다. 이미 떠날 준비까지 마친 때였으니, 설령 이 편지를 보았다 해도 두 사람이 지금처럼 부부가 되지는 않았을지도 몰랐다.그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주방의 장 관사가 이번 경축연에 든 주방 비용 장부를 가져와 계연수에게 대조해 보라고 했다.계연수는 이때 너무 지쳐 말조차 하기 귀찮을 정도였다. 그녀는 베개에 느슨하게 기대앉은 채, 용춘에게 장부를 받아 오라고 했다.곁의 작은 탁자에는 향기로운 차 한 잔이 놓여 있었고, 아담한 오색 병에는 꽃이 꽂혀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향긋한 배 한 접시도 놓여 있었다. 과일 향과 꽃향기가 은은히 번지며, 밝은 창가에 기대앉은 계연수에게도 고요하고 단아한 분위기를 덧입혔다.방 안은 조용했다. 이따금 들리는 것은 장부를 넘기는 소리뿐이었다.이번 경축연은 규모가 꽤 컸다. 백씨가 모두 좋은 물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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