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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9 Chapters

제781화

방 어멈은 곁에서 지켜보며 속으로 놀랐다. 계연수의 말 한마디에 심서준이 순순히 탕을 받아 끝까지 마시는 모습이라니. 예전에는 심씨 노부인이 직접 찾아와 몸을 아끼라며 보양탕을 권해도 이토록 고분고분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계연수는 심서준이 탕을 모두 비우는 것을 확인하고는 갈아입을 옷을 준비하기 위해 몸을 돌렸다.그런데 막 걸음을 떼려는 순간, 손목이 붙잡혔다.의아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기도 전에 심서준이 그녀를 품 안으로 끌어당겼고, 곧 거침없는 입맞춤이 쏟아져 내렸다.하필이면 그곳은 대문과 바로 마주한 자리였다. 문 앞에는 시녀들과 방 어멈까지 서 있었다.계연수는 너무도 갑작스러운 상황에 제대로 반응조차 하지 못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심서준의 품에 안긴 채 한 걸음씩 뒤로 밀려나고 있었고, 이내 허리가 화분 받침대에 닿으며 더는 물러설 곳이 없어졌다.방 안에 있던 시녀들은 눈치 좋게 하나둘 자리를 피했다. 방 어멈 역시 차마 고개를 들고 바라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어릴 적부터 모셔 온 후작이 마치 다른 사람이 된 듯했다.평생 외로운 별의 운명을 타고나 누군가를 마음에 품는 일 따위는 없을 줄 알았는데, 지금 모습을 보니 괜스레 가슴이 뭉클해질 정도였다.계연수는 화분 받침대에 허리가 눌려 욱신거렸다.정말 심서준의 발이라도 힘껏 밟아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한참 뒤에야 입맞춤을 끝낸 심서준은 그녀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들고 고개를 들게 했다.쉰 목소리가 낮게 흘러나왔다.“앞으로는 그렇게 크게 화내지 말거라. 나한테 삐치지도 말고.”계연수는 속으로 기가 막혔다.정작 제 잘못은 아무렇지도 않게 넘기면서 자신에게만 화를 내지 말라니.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단 말인가.굳이 말다툼을 벌이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앞으로도 계속 참고만 있을 생각은 없었다.화를 낼 일은 당연히 화를 내야 했다.늘 심서준 혼자만 차가운 얼굴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심서준은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한 계연수를 바라보다가 문득 웃음을 터뜨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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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82화

지금처럼 그녀가 그의 마음을 짐작하게 만들고, 그 모호함 속에서 끊임없이 그의 감정을 헤아리게 하는 편이 어쩌면 계연수의 마음을 더 단단히 붙잡아 둘 수 있을지도 몰랐다.심서준은 계연수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계연수는 심서준의 수려한 눈매를 바라보았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동자는 여전히 아무런 감정도 내비치지 않았지만, 그의 행동만큼은 늘 이토록 다정하고도 은근했다.계연수는 한 번쯤 제멋대로 기대해 보기로 했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저를 좋아하시는 것 같아요.”심서준은 낮게 웃었다.그는 계연수의 눈동자에 쉽게 드러난 불안과 망설임을 바라보며 생각했다.만약 그녀가 자신을 속속들이 꿰뚫어 보게 된다면, 이 무정하고도 마음을 둘 줄 모르는 여인은 더 이상 자신을 두려워하지도, 어려워하지도 않을 것이다. 성미는 점점 커질 테고, 얌전히 말을 들을 거라는 기대는 아예 버려야 할지도 몰랐다.심서준은 사냥꾼처럼 느긋하면서도 서늘한 미소를 띠었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연수야, 내가 너를 좋아한다고 생각한다면, 너도 똑같이 나를 좋아하면 된다.”그렇게 말한 심서준은 다시 계연수의 얼굴을 감싸고 입을 맞췄다. 그리고 깊은 눈으로 그녀를 한 번 바라본 뒤 말했다.“나는 먼저 씻고 오마.”말을 마친 그는 몸을 일으켜 그대로 떠났다. 그녀에게 애매하고도 아련한 여운을 남겨 놓고는 조금의 미련도 없는 사람처럼 단호하게 자리를 떴다.계연수는 멍하니 심서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볼에는 아직도 그가 남긴 온기가 남아 있었고, 코끝에는 그의 몸에서 풍기던 침향 냄새가 맴돌았다. 심지어 입안에조차 심서준의 기척이 남아 있는 듯했다.한참을 멍하니 있던 계연수는 그가 남긴 말을 곱씹다가, 느릿느릿 몸을 돌려 베개 위에 엎드렸다.밤이 되어 저녁을 먹은 뒤에도 심서준은 여느 때처럼 먼저 서재로 갔다.계연수는 침상에 느긋하게 기대앉아 심서준에게 줄 향낭에 수를 놓고 있었다.그녀는 수놓는 솜씨가 제법 괜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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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83화

계연수는 어느새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기 시작했다. 그녀는 하품을 참으며 용춘에게 물었다.“밖에는 시녀들이 지키고 있겠지?”용춘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걱정 마십시오, 부인. 후작께서 나오시면 추우가 곧바로 알려 줄 겁니다.”그제야 마음을 놓은 계연수는 손에 들고 있던 수틀을 내려놓으며 중얼거렸다.“너무 졸려서 더는 못 하겠다.”용춘이 조심스레 물었다.“후작을 기다리지 않으시렵니까?”계연수는 나른하게 하품을 한 번 더 하고는 고개를 저었다.“기다리지 않을 것이다.”그러다 문득 한 가지 일이 떠올랐다. 외조모가 건네준 편지를 아직 읽지 않았던 것이다. 오후 내내 정신없이 일이 이어지는 바람에 까맣게 잊고 있었다.계연수가 다시 용춘을 바라봤다.“그 편지는?”용춘은 서둘러 품속에서 편지를 꺼내 내밀었다.“여기 있습니다.”계연수는 편지를 받아 펼쳤다.두 장에 걸쳐 빼곡히 적힌 내용을 읽어 내려가던 그녀가 마지막 장에 다다랐을 때였다.심서준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용춘은 심서준이 아무 기척도 없이 들어선 것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얼른 몸을 일으켜 조용히 밖으로 물러났다.계연수도 심서준이 이렇게 소리 없이 곁에 나타나는 데는 아직 익숙해지지 못했다.그녀는 반사적으로 손에 들고 있던 편지를 베개 밑으로 밀어 넣었다.다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고준안은 편지에 자신이 품어 온 마음을 모두 털어놓았다. 한순간의 집착이 결국 그녀를 해치고 말았다며, 용서를 바라지는 않지만 떠나기 전 단 한 번만이라도 직접 미안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고 적어 두었다.그런 편지를 심서준이 보게 된다면 공연히 또 다른 일이 생길 것만 같았다.하지만 이미 심서준은 그녀의 행동을 모두 본 뒤였다.이제 와 감춘다고 감춰질 일도 아니었다.잠시 망설이던 계연수는 결국 베개 밑에서 편지를 다시 꺼내 심서준에게 내밀었다.“오라버니께서 보낸 편지예요.”심서준은 원래 한밤중에 몰래 꺼내 읽어 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계연수가 먼저 숨김없이 내놓자 오히려 그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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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84화

계연수는 어떻게 설명할지 몰라 머리를 굴리며 애써 말을 꺼냈다.“그러니까… 이를테면 값으로 따질 수도 없는 귀한 물건이라든지…”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그녀는 문득 깨달았다. 또다시 심서준의 말에 휘말려 버렸다는 것을.애초에 자신이 하려던 말은 그게 아니었는데, 어느새 그의 흐름에 말려 엉뚱한 대답을 하고 있었다.계연수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심서준과 말을 섞다 보면 늘 이런 식이었다. 어느새 그의 말에 이끌려 생각마저 빼앗기고 만다. 더 말해 봐야 또 그에게 휘말릴 것 같아,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몸을 돌려 이불을 끌어당긴 계연수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잠이나 자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하지만 심서준은 그녀 뜻대로 두지 않았다.이불 속으로 파고든 그녀를 다시 끌어안아 품에 안은 뒤, 계연수를 제 가슴에 기대게 한 채 나직이 물었다.“오늘 어째서 내가 너를 좋아하느냐고 물은 것이냐.”계연수는 졸음에 겨운 몸을 그의 어깨에 기댔다. 축 늘어진 목소리 끝에는 나른한 여운이 묻어났다.“그냥… 문득 궁금했어요.”그러나 심서준은 쉽게 넘어가 줄 생각이 없었다. 그는 손끝으로 계연수의 턱을 살며시 들어 올려 그녀와 시선을 맞췄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동자가 졸음에 반쯤 젖은 그녀의 눈을 가만히 응시했다.“나를 좋아하게 된 것이냐?”그 말에 계연수는 몸을 움찔 떨었다. 정말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었다.정작 심서준은 끝내 자신을 좋아한다는 말 한마디 해 주지 않았는데, 왜 자신만 그의 마음에 꼭 맞는 대답을 해 줘야 한단 말인가.계연수는 눈을 감은 채 조용히 중얼거렸다.“부군께서 저를 좋아하면… 저도 부군을 좋아할 거예요.”심서준의 입가에서 낮은 웃음이 흘러나왔다.이제는 제법 능청스럽게 말을 돌릴 줄도 아는 모양이었다.눈을 꼭 감은 계연수를 바라보던 그는 그대로 그녀를 품에 안은 채 다시 입을 맞췄다. 나직하게 갈라진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내가 너를 좋아하면, 너도 나를 좋아한다? 나는 늘 무뚝뚝한 얼굴에 말수도 적고, 사람들에게 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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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85화

계연수는 설마 심서준이 정말 그런 막무가내인 일을 벌일 줄은 몰랐다. 결국 먼저 한발 물러선 그녀가 다급히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안으로 들어가서 천천히 이야기해요.”심서준은 일부러 무표정을 유지한 채 그녀를 내려다봤다.“천천히? 이번에는 솔직하게 말할 것이냐?”계연수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본 심서준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스쳐 지나갔다. 역시 조금만 몰아붙이면 금세 항복하고 마는 사람이었다.다시 침상으로 돌아온 그는 계연수를 조심스레 눕힌 뒤, 느긋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정말 나를 좋아하게 된 것이냐?”계연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언제가 시작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어느새 그의 일이라면 마음이 쓰였고, 그의 한마디에 서운해하기도 했으며, 무사한지 걱정하는 일이 자연스러워져 있었다.아마 자신은 심서준을 좋아하게 된 것이 맞았다.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러자 심서준의 눈빛이 순간 흔들렸다.계연수의 팔을 감싸고 있던 손에도 자신도 모르게 힘이 조금 들어갔다.잠시 말이 없던 그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내 어떤 점이 좋은 것이냐?”계연수는 솔직하게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았다.“저를 진창에서 끌어내 준 사람이 부군이었으니까요. 제가 가장 위험했던 순간에도 끝내 저를 구해 준 사람도 부군이셨고요. 제게 사씨 가문에서의 삶은 악몽이나 다름없었어요. 부군이 아니었다면 저는 평생 그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했을지도 몰라요. 부군께서는 제게 편안한 삶을 주셨고, 따뜻하게 대해 주셨어요. 그러니 제가 부군을 좋아하게 된 것도 당연한 일이지요.”심서준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에는 조금의 거짓도 없었다.진심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어쩐지 마음 한구석은 선뜻 만족스럽지 않았다.계연수를 사씨 가문에서 벗어나게 한 것도, 사옥현의 앞길을 막아 그녀가 결심하도록 만든 것도, 이명유가 약을 쓰는 일을 묵인한 것도.돌이켜 보면 그 모든 일에는 그의 욕심이 숨어 있었다.그녀가 자신을 선택하는 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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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86화

백씨는 계연수가 끝내 어멈을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는 걸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그동안 함께 지내며 백씨도 깨달았다. 계연수는 겉보기에는 만만하고 다루기 쉬워 보였지만, 실상은 결코 겉모습처럼 단순한 사람이 아니었다.백씨는 난처한 기색을 지으며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계연수의 손을 다정히 잡고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이번 일은 정말 내 불찰이다. 동서에게 면목이 없구나. 앞으로 모르는 게 있으면 언제든 나를 찾아오거라.”계연수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형수님께서 자책하실 일은 아니에요. 이런 일이 생길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백씨는 그제야 계연수가 정말 자신의 말을 믿은 줄 알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바로 그때, 계연수가 다시 입을 열었다.“마침 형수님을 만났으니 여쭤볼 게 하나 있어요. 주방 장부를 살펴보다가 맞지 않는 부분이 있더라고요.”순간 백씨의 표정이 굳었다.계연수가 용춘에게 눈짓하자, 용춘은 어제 주방에서 가져온 장부를 곧바로 내밀었다.계연수는 장부를 한 장 펼쳐 보이며 차분히 말했다.“여기 보시면 앞마당 연회에 상이 두 상 더 늘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어떤 손님이 오셨는지, 어떤 음식이 올라갔는지는 적혀 있지 않더군요. 원래는 쉰 상을 준비하고 다섯 상을 예비해 두었는데, 이후 두 상이 더 추가됐으니 주방 창고에서 사용한 식재료와도 장부가 맞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일은 형수님께서 직접 처리하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지금 자세히 말씀해 주시면 제가 장부에 기록해 두겠습니다. 그래야 훗날 어머님께서 물으셔도 바로 말씀드릴 수 있을 테니까요.”계연수는 끝까지 온화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흰 목련 자수가 놓인 연둣빛 치마저고리에 허리에는 둥근 부채를 가볍게 쥔 모습까지, 누가 봐도 부드럽고 온순한 사람이었다.하지만 그 순간 백씨는 이를 악물고 싶은 심정이었다.계연수가 이런 장부 하나까지 꼼꼼히 따지는 것은, 자신을 곤란하게 만들려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백씨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예년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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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87화

계연수는 처소로 돌아오자 작은 탁자에 턱을 괸 채, 눈앞에 어지럽게 훼손된 명부들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머금었지만 마음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날이 갈수록 더위가 짙어지면서 옷차림도 한결 가벼워졌다. 아직 오전인데도 공기에는 벌써 후텁지근한 기운이 감돌았고, 그 열기는 계연수의 마음속까지 번져 이유 모를 짜증과 답답함을 불러일으켰다.방 어멈이 다가와 얼음을 들일지 묻자 계연수는 고개를 저었다.“괜찮다.”다시 명부를 한 장 넘겼지만, 훼손된 흔적은 생각보다 심했다.명부에 적힌 이름과 오고 간 예물 내역은 겨우 윤곽만 알아볼 수 있을 뿐이었다. 설령 글자가 남아 있어도 일부만 겨우 읽힐 뿐, 전체 내용을 파악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곁에서 지켜보던 용춘이 작은 목소리로 투덜거렸다.“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렇게 우연히 쥐가 갉아 먹었다는 말은 못 믿겠습니다. 혜풍원이 무슨 쥐 소굴도 아니고.”계연수는 살짝 고개를 돌려 용춘을 바라보았다.그 눈빛에 용춘은 혀를 쏙 내밀며 얼른 입을 다물었다.계연수 역시 그 말을 믿지는 않았다. 이토록 공교로운 우연이 있을 리 없었다.백씨가 바란 것은 단 하나였다. 자신이 이 일을 너무 순조롭게 해내지 못하게 막는 것.겉으로는 선뜻 일을 맡겨 놓고도 한편으로는 끝없이 견제하고 있었다.계연수는 피곤한 듯 몸을 의자 등받이에 기댔다. 찻잔을 들어 다시 한 모금 마신 뒤 눈을 살며시 감고 생각에 잠겼다.비록 명부는 훼손됐지만, 꼼꼼히 들여다보면 건질 수 있는 단서는 분명 있었다.한참 동안 머릿속으로 하나하나 정리를 마친 그녀는 손끝으로 탁자를 가볍게 두드리며 조용히 생각을 이어 갔다.*다음 날 문안을 드리러 심씨 노부인을 찾아간 계연수는 노부인 곁에 다소곳이 앉아 얌전히 약을 마셨다.이어서 품에 안긴 고양이를 한동안 쓰다듬으며 놀아 주다가, 마치 잡담을 꺼내듯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그 은자를 빼돌렸다는 시녀 일은 어떻게 되었습니까?”어제 오후 백씨는 사람을 보내 모든 잘못을 시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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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88화

백씨는 자신이 지난 세월 심씨 노부인을 정성껏 모셔 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심씨 노부인 역시 완전히 무정한 사람은 아니었다.이 점만큼은 계연수도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십 년을 하루같이 한 사람을 돌보고, 매일 새벽 남들보다 한발 먼저 일어나 시중드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 끈기와 고생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심씨 노부인은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는 백씨를 바라보다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러다 끝내 긴 한숨을 내쉬었다.솔직히 말해, 백씨가 그동안 저택에서 어떤 일을 해 왔는지 심씨 노부인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다만 지나치지만 않다면, 해마다 자신에게 올라오는 수입이 예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면, 그녀도 모른 척 눈감아 주었을 것이다.백씨가 정성껏 자신을 모셔 온 것도 사실이었고, 예전에 백씨가 회임했을 때의 일도 마음에 걸렸다. 심태숙이 한때 심서준을 구해 주었던 일 역시 잊을 수 없었다.그러나 지금 심씨 노부인의 마음속에서 계연수가 사랑스러운 것도 사실이었다.계연수는 일을 처리할 때 교만하지도 조급하지도 않았고, 세심했다. 욕심도 크지 않았으며, 평소에는 조용조용했지만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늘 부드럽고 온화했다. 그래서인지 주변에서도 칭찬이 끊이지 않았다.요 며칠 심씨 노부인도 자꾸만 계연수에게 눈길이 갔다.가만히 보고 있으면 참으로 정이 가는 얼굴이었다. 못난 곳 없이 부드러운 얼굴선에, 웃음이 어린 눈매는 유난히 맑고 고왔다. 심지어 그 눈빛에는 티 없이 투명한 기색마저 있었다.어쩌면 정말로 계연수에게 마음이 기울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그래서인지 백씨가 지금 벌이는 일들이 더욱 못마땅하고 화가 났다.심씨 노부인도 속으로는 모를 리 없었다. 시녀 하나가 어찌 감히 수백 냥 은자를 탐낼 수 있겠는가. 더구나 그 시녀의 어미라는 자도 하인일 뿐인데, 무슨 재주로 연회 음식을 차려 냈단 말인가. 아마 그런 상차림은 본 적조차 없을 것이다. 그들이 설마 손님을 모두 바보로 여겼단 말인가.아마 추가됐다는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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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89화

심씨 노부인의 처소를 나설 무렵에도 백씨는 끝내 자리를 뜨지 않았다. 아마 노부인과 단둘이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모양이었다.하지만 계연수는 이미 원하는 바를 이뤘으니 더 머물 이유가 없었다.사람사이의 관계는 결국 주고받는 법이었다. 상대가 먼저 가만있지 않는다면, 자신도 끝까지 받아칠 생각이었다.한동안 길을 걷던 용춘이 끝내 속에 담아 둔 말을 꺼냈다.“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분합니다. 부인께서 공금을 빼돌린 거 아닙니까. 그 시녀도 누가 봐도 대신 죄를 뒤집어쓴 게 분명하잖아요. 그런데도 노부인께서는 제대로 조사도 하지 않으시고, 그냥 큰부인께 직접 처리하라고만 하시다니요.”계연수도 그 정도는 충분히 짐작하고 있었다.백씨는 오랫동안 이 집안에서 살아온 사람이니, 심씨 노부인의 마음속에도 분명 적지 않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게다가 이번 일은 누가 보아도 속사정을 짐작할 수 있을 만큼 분명했다. 심씨 노부인 역시 진실을 모를 리 없었다.애초에 계연수도 이번 한 번으로 백씨를 몰락시키거나 궁지에 몰아넣을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그녀에게는 두 가지 목적이 있었다.하나는 백씨가 심씨 노부인의 신임을 조금씩 잃게 만드는 것.그리고 다른 하나는, 자신이 주방을 맡게 된 이상 주방의 장부만큼은 반드시 깨끗하게 정리해 두는 것이었다. 훗날 흐릿한 장부가 누구의 약점이 될지 알 수 없는 만큼, 이번 일만큼은 노부인 앞에서 분명히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었다.사실 백씨가 처음부터 자신과 평화롭게 지낼 생각이었다면, 계연수 역시 굳이 맞설 이유는 없었다.그녀는 용춘에게 조용히 말했다.“이번 일을 어떻게 처리하든 그건 중요하지 않아. 당분간은 더 말하지 말거라.”백씨에게서 장원 관리권을 거둬들인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뼈아픈 타격이었으니까.*그날 밤 심서준이 돌아왔을 때, 계연수는 여전히 훼손된 명부를 펼쳐 놓고 들여다보고 있었다.오늘은 귀가가 평소보다 늦었다.오후에는 영청 후작부의 일로 입궁했고, 궁에서 저녁까지 들며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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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90화

심서준은 아직 자줏빛 조복도 벗지 않은 채였다.옷매무새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고, 높은 자리에 선 사람 특유의 냉엄함이 서린 얼굴은 여전히 차갑고 엄숙했다. 한결 부드러워진 지금조차 그 기품 어린 위압감은 조금도 사라지지 않았다. 마치 그것이 오래전부터 그의 일부였던 것처럼, 그를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절로 몸을 바로 세우게 만드는 기세가 있었다.예전의 계연수는 그런 심서준이 두려웠다.하지만 이제는 알았다. 그는 겉으로만 차가울 뿐이었다. 자신이 조금만 먼저 마음을 누그러뜨리면, 심서준 역시 금세 부드러워졌다.계연수는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심서준을 올려다보았다.검고 깊은 봉황 같은 눈동자는 여전히 사람을 압도하는 힘이 있었지만, 그녀는 용기를 내어 두 팔로 그의 목을 감싸 안고 조심스레 그의 무릎 위에 몸을 기댔다.그러고는 다시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과연 예상대로였다.차갑기만 하던 그의 눈매가 서서히 누그러졌고, 허리를 받친 손도 자연스럽게 그녀를 제 품 안으로 더 끌어당겨 편히 앉을 수 있도록 받쳐 주었다.계연수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심서준은 늘 말과 마음이 따로였다.겉으로는 언제나 근엄하고 올곧은 사람인 양, 마치 혈육의 정 따위는 모르는 사람처럼 굴었다. 자신을 귀찮아하는 것처럼 차갑게 굴면서도, 정작 마음속으로는 누구보다 그녀를 원하고 있었다.'이 차가운 돌덩이도 속은 따뜻한 모양이네.'계연수는 남몰래 그렇게 중얼거렸다.심서준은 그녀가 먼저 안겨 오자 미세하게 눈빛이 흔들렸다.부드러운 가슴이 그의 가슴에 포개졌고, 얇은 옷감 너머로 전해지는 감촉은 더욱 또렷했다.그는 계연수의 다리를 살며시 벌려 제 무릎 위에 편히 앉히고, 한 손으로는 가느다란 발목을 감싸 쥐었다. 다른 한 손은 그녀의 허리를 가볍게 감싼 채 놓지 않았다.그때 보양탕을 들고 들어오던 용춘이 휘장을 걷었다가 그 광경을 보고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 황급히 다시 밖으로 물러났다.심서준은 고개를 숙여 계연수를 바라보았다.얼굴에는 여전히 속내를 드러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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