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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81화

며칠 뒤에는 황후의 생일이 돌아왔다.그러나 심서준이 조사를 받는 상황에서 성대한 연회를 열 수는 없었다. 황후는 괜한 이목을 끌지 않으려 생일연을 치르지 않고, 그저 계연수가 보고 싶으니 입궁해 말동무가 되어 주었으면 한다고만 했다.황제도 그 정도는 허락했다.원래는 심서준도 함께 입궁하게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는 아직 혐의를 완전히 벗지 못한 채 조사를 기다리는 처지라, 황제는 끝내 심서준의 입궁까지는 허락하지 않았다.계연수는 심씨 노부인과 함께 궁으로 향했다.두 사람은 겹겹이 수놓인 화려한 명부복을 정갈하게 갖춰 입었다. 궁문 안으로 들어서자 미리 기다리고 있던 궁인들이 공손히 예를 올리고 앞장서 길을 안내했다.황후의 처소에는 대전하 강현과 이황자 강성도 와 있었다.황후는 오랜만에 어머니를 보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자리에서 곧장 일어나 심씨 노부인에게 다가가 두 손을 꼭 붙잡았다.이내 전각 안에는 모녀가 서로의 안부를 묻는 목소리가 잔잔히 이어졌다.두 사람은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다. 그사이 심씨 가문에 큰일까지 닥쳤으니, 반가움 뒤로 서글픈 감정이 밀려오는 것도 당연했다.황후의 눈시울이 먼저 붉어졌고, 딸의 손을 맞잡은 심씨 노부인의 눈가에도 이내 눈물이 어렸다.마침내 심 수보가 황제의 의심을 피하고자 서둘러 경성을 떠난 일까지 화제에 오르자, 두 사람의 얼굴에는 더욱 짙은 슬픔이 번졌다.계연수는 곁에 조용히 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시선을 아래로 내리자 소맷자락에 수놓인 연꽃과 산새가 눈에 들어왔다. 고요히 마주한 모녀의 슬픔을 느끼고 있자 계연수의 마음에도 옅은 서글픔이 물결처럼 번졌다.강현은 그런 계연수를 힐끗 바라보았다.그때 곁에 있던 강성이 계연수 쪽으로 다가가며 외숙모라고 부르려 하자, 강현은 얼른 동생의 팔을 붙잡았다.“얌전히 앉아 있어라.”강성은 그동안 계연수를 몇 번 만나지 못했다. 그마저도 바쁜 자리에서 잠깐 스쳐 지나간 것이 전부라, 제대로 얼굴을 마주하고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었다.그래도 계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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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82화

그렇게 말한 계연수는 조용히 황후를 바라보았다.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친 순간, 황후는 계연수의 말에 담긴 뜻을 알아차렸다. 가슴속으로 서늘한 기운이 번졌다.황제는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가르치고, 한 손으로 황위에 오르도록 보필한 스승에게도 하루아침에 등을 돌렸다. 억누르고 싶으면 억누르고, 의심이 들면 지난 은혜까지도 잊은 채 가차 없이 경계했다.그렇다면 평생을 함께한 부인이라고 해서 다를 리 없었다.황후는 심씨 가문의 사람이었다. 황제는 어쩌면 오래전부터 황후의 곁에 자신의 사람을 심어 두었을지도 몰랐다.곤녕궁에서 오간 말과 행동이 이미 빠짐없이 황제의 귀에 들어가고 있을 가능성도 있었다.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전 자신이 내뱉은 말이 더욱 경솔하게 느껴졌다.오늘은 심씨 가문의 사람들이 입궁한 날이었다. 황제는 이들이 곤녕궁에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더욱 예민하게 살필 터였다.황후는 속으로 일어난 동요를 감춘 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아버지는 본래 어디에도 얽매이기 싫어하셨지. 어쩌면 고향으로 내려가게 된 것을 오히려 기뻐하고 계실지도 모르겠구나.”말을 마친 황후는 전각 안의 궁인들을 모두 물러가게 했다.오랫동안 곁에서 자신을 모셔 온 측근들까지 한 사람도 남김없이 내보냈다.그러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황제처럼 속이 깊은 사람이 마음만 먹었다면, 아주 오래전부터 자신의 곁에 사람을 심어 두었을 수도 있었다.생각이 거듭될수록 황후의 가슴은 얼음을 삼킨 듯 차갑게 식어 갔다.바로 그때 전각 밖에서 황제의 행차를 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계연수는 황급히 심씨 노부인을 부축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 전까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들도 일제히 몸을 바로 세웠다.황제가 전각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서늘하고 무거운 위압감이 공기를 짓눌렀다.그러나 황제의 얼굴에는 온화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 그는 모두에게 편히 있으라고 말하며 상석에 앉았다.“심씨 노부인이 입궁했다는 말을 듣고 짐이 직접 얼굴을 보러 왔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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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83화

이황자가 그림을 청하자 계연수로서는 거절하기 어려웠다.그녀는 앞서 황제에게서 매화보를 하사받고 위운필에게도 가르침을 받은 뒤, 서재에서 틈틈이 많은 그림을 그려 두었다. 그중 한 점을 골라 보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계연수는 흔쾌히 웃으며 승낙했다.“그럼 며칠 안에 사람을 시켜 전하의 처소로 보내 드리겠습니다.”그러나 강성은 며칠 뒤까지 기다릴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는 계연수의 곁을 맴돌며 지금 이 자리에서 직접 한 점 그려 달라고 졸랐다.강성도 황자로서 어려서부터 그림을 배웠다.그래서 더욱 궁금했다. 똑같은 손으로 똑같은 붓을 쥐고 종이 위에 선과 빛깔을 더하는데, 계연수는 어떻게 이토록 생생하고 아름다운 그림을 완성하는 것일까.그녀가 붓을 쓰는 모습을 직접 보고 배우고 싶은 마음까지 들었다.평소 같았으면 강현이 먼저 나서서 동생에게 떼쓰지 말라며 제지했을 것이다.하지만 이번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강현의 시선도 계연수에게 머물러 있었다. 그 역시 그녀가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직접 보고 싶은 듯했다.심씨 노부인이 그 모습을 보고 웃으며 계연수에게 말했다.“그럼 여기서 한 점 그려 주거라. 나는 황후와 아직 나눌 이야기가 남아 있구나.”계연수는 공손히 대답한 뒤 궁인의 안내를 받아 곤녕궁의 서재로 향했다.정여미는 태자와 이황자가 계연수에게 유난히 친근하게 다가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처음에는 계연수가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굳이 따라가서 볼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두 황자가 모두 계연수를 따라 서재로 향하자 마음 한구석에서 불편한 감정이 피어올랐다.이황자 강성은 태자만큼 침착한 성정은 아니었지만 형인 강현을 무척이나 따랐다. 그런데 자신에게조차 이토록 친근하게 말을 건넨 적은 없었다.정여미는 은근히 자존심이 상했다.아무리 계연수가 외숙모라 해도 자신은 엄연한 태자비였다. 두 황자와 더욱 가까워야 할 사람은 자신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한편으로는 인정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정여미는 어린 시절부터 여인의 육예를 두루 익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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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84화

생각이 깊어질수록 정여미의 낯빛은 눈에 띄게 변해 갔다.태자비라는 사람이 이토록 무력하고 한심하게만 느껴졌다.그녀는 계연수의 평온하고 기품 있는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어 태자와 이황자가 계연수를 친근하게 대하는 모습을 보자, 마치 저들끼리만 진정한 한 가족인 듯했다.정작 태자비인 자신은 그 틈에 끼지 못하는 외톨이이자 이방인에 불과했다.그런 자신이 태자의 마음을 얻겠다고 계연수에게 먼저 다가가 그림을 배우려 한다니.그 사실이 더없이 굴욕적으로 느껴졌다.걷잡을 수 없는 감정이 한꺼번에 가슴을 뒤흔들었다. 정여미의 얼굴에서 서서히 핏기가 사라지더니, 끝내 정신이 버티지 못하고 몸이 힘없이 무너졌다.계연수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바로 전 순간까지 자신과 이야기를 나누던 정여미가 아무런 전조도 없이 갑자기 의식을 잃을 줄은 몰랐다.계연수는 재빨리 팔을 뻗어 정여미를 붙잡았다. 그러나 의식을 잃은 사람의 몸은 생각보다 훨씬 무거웠고, 두 사람은 그대로 함께 바닥으로 넘어졌다.아이를 품은 계연수는 몸을 자유롭게 움직이기 어려웠다.쓰러지는 정여미에게 배를 부딪칠까 두려워 몸을 뒤로 틀었고, 그 바람에 균형을 잃으며 손바닥으로 바닥을 짚었다.용춘은 눈앞에서 벌어진 광경에 질겁했다.“부인!”그녀는 황급히 허리를 숙여 계연수를 부축했다.이를 본 강현도 곧장 달려왔다. 궁인들이 정여미를 일으키는 동안 계연수 역시 시녀의 팔을 붙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강현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계연수에게 물었다.“외숙모, 다치신 곳은 없습니까?”계연수는 바닥에 쓸려 붉어진 손가락 마디를 소매 안으로 조용히 감추며 고개를 저었다.“저는 괜찮습니다. 다만 태자비마마께서 아무런 전조도 없이 갑자기 의식을 잃으셨으니, 서둘러 태의를 불러 살피게 하시는 편이 좋겠습니다.”강현은 정여미 쪽을 한 번 돌아보았다.영청후부 사건이 마무리되어 장인의 가문이 처벌받은 뒤부터 정여미는 종종 불안정한 모습을 보였다. 그때마다 크고 작은 소동을 일으켜 강현의 인내심도 점차 바닥나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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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85화

계연수는 미간을 찌푸린 채 손안의 쪽지를 다시 한번 살폈다.오늘 궁도에서 벌어진 일이 누군가 미리 꾸며 놓은 연극인지, 쪽지를 정말 손보경이 직접 쓴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심씨 가문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한 계략일 가능성도 있었으니, 섣불리 믿기 전에 신중히 판단해야 했다.심씨 부저로 돌아온 계연수는 자신의 처소로 가지 않았다.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맞은편에 있는 큰형수 만씨의 처소로 향했다.계연수가 찾아갔을 때 만씨는 작은 불당에 앉아 향을 피우며 집안의 평안을 빌고 있었다.갑작스러운 방문 소식을 들은 만씨는 의아해하면서도 서둘러 밖으로 나와 계연수를 맞았다.계연수는 사랑채 곁방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만씨가 들어오자 자리에서 일어나 서로 간단히 인사를 나눈 뒤 마주 앉았다.만씨는 계연수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자신을 찾아왔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자리에 앉자마자 조심스럽게 물었다.“동서가 여기까지 찾아온 것을 보니, 내게 전할 중요한 일이라도 있는 것이냐?”계연수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소매 안에 감춰 두었던 쪽지를 꺼내 만씨의 손 위에 올려놓았다.“형님께서 한번 살펴보세요. 손보경의 필체가 맞는지 확인해 주셨으면 합니다.”계연수는 잠시 생각한 뒤 덧붙였다.“확실하지 않다면 심한율을 불러 확인하게 하셔도 됩니다.”만씨는 다급히 쪽지를 받아 펼쳤다.글을 읽어 내려가던 그녀의 미간이 점차 깊게 좁아졌다. 만씨는 놀란 얼굴로 계연수를 바라본 뒤, 곧바로 시녀를 시켜 손보경이 예전에 절에서 베껴 쓴 불경을 가져오게 했다.쪽지의 내용은 간단했다.손보경은 지금 태후에게 붙잡혀 자녕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심씨 가문을 고발하는 서신을 자신이 직접 쓴 것은 맞지만, 태후의 협박에 못 이겨 작성한 것이었다.그래서 서신 안에 별도의 표시를 남겨 ‘무고’라는 두 글자를 숨겨 두었다고 했다. 그것이 자신의 고발이 거짓임을 입증할 증거라는 내용이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손보경이 직접 필사한 불경이 들어왔다.두 사람은 불경과 쪽지를 나란히 펼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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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86화

심서준은 계연수가 마치 태자비의 몸 상태를 훤히 아는 사람처럼 진지하게 말하는 것을 가만히 듣다가 담담히 말했다.“태자비의 몸은 태의가 알아서 돌볼 것이다. 네가 걱정할 일은 아니지.”그는 계연수의 상처에 연고를 살살 펴 바르다가 문득 눈을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앞으로는 태자비와 지나치게 가까이 지내지 말거라. 되도록 단둘이 있는 일도 피하고.”계연수는 이유를 물으려다가 곧 입을 다물었다.정여미는 정씨 가문의 여인이었다. 심서준으로 인해 그녀의 아버지와 큰오라버니가 목숨을 잃었다. 어쩌면 정여미가 자신까지 원망하고 있을지도 몰랐다.그 뜻을 금세 알아차린 계연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심서준의 손끝이 붉게 쓸린 손가락 마디를 조심스레 스쳤다.“아프냐?”상처가 깊지는 않아도 따끔거리는 통증은 분명했다. 원래부터 아픔을 잘 참지 못하는 계연수는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심서준은 입술을 꾹 다문 채 깊고 검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다음부터는 이러지 말거라. 태자비가 쓰러진 것은 너의 책임이 아니다. 더구나 지금은 아이까지 품고 있지 않느냐.”계연수는 심서준이 정여미를 붙잡지 말았어야 한다는 뜻으로 하는 말임을 알았다.하지만 바로 옆에 있던 사람이 갑자기 쓰러지자 몸이 먼저 움직였다. 그 순간에는 자신이 아이를 품고 있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었다.심서준이 걱정해서 하는 말이라는 것을 아는 데다, 돌이켜 보니 자신도 다소 경솔했다. 계연수는 얌전히 알겠다고 대답했다.그러고는 궁에서 받은 손보경의 쪽지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쪽지의 내용으로 보아 손보경은 태후의 처소에서 편히 지내지 못하는 듯했다.다만 감시가 삼엄한 자녕궁에서 어떤 방법으로 쪽지를 내보냈는지, 그 내용을 어디까지 믿어야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렇기에 반드시 심서준과 의논해야 했다.모든 이야기를 들은 심서준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 쪽지를 들고 폐하를 찾아갈 필요는 없다. 찾아간다 해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폐하는 태후에게 마지막 체면 정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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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87화

그로부터 보름이 지나자 심서준은 황제의 소환을 받고 다시 입궁했다.요즘 계연수는 배가 불러 오면서 몸도 전보다 묵직해졌다. 궁에서 사람이 찾아와 심서준을 불렀다는 소식을 듣자 마음 한구석에 다시 걱정이 피어올랐다.심씨 노부인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오전부터 심씨 가문의 여인들은 모두 화청에 모여 궁에서 소식이 오기만을 기다렸다.계연수는 곁에 앉은 만씨에게 손보경에 관한 일을 물었다.“이번 일이 끝나면 손보경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만씨는 애초에 계연수에게 숨길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못마땅한 얼굴로 곧바로 대답했다.“이제 와 그런 쪽지를 보내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심씨 가문에서 쫓겨날까 두려워 일부러 그런 글을 써서 우리를 현혹하려 한 것이겠지.”만씨의 목소리에 단단한 원망이 배어 나왔다.“무슨 사정이 있었든 그 아이가 심씨 가문을 고발한 것은 사실이다. 이번에는 뜻대로 되지 않았지만 다음에도 그러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어디 있겠느냐? 우리 심한율도 그런 부인을 곁에 둘 엄두가 나지 않을 것이다.”계연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그것이 심한율의 뜻인가요?”만씨가 고개를 저었다.“심한율은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도 선뜻 물어보지는 못했고. 헌데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 그 아이도 손보경을 계속 부인으로 둘 생각은 없을 것이다.”계연수는 입술을 다문 채 생각에 잠겼다.처음에는 손보경을 위해 몇 마디 변호해 주고 싶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만씨의 의심에도 일리가 없지는 않았다.손보경은 영리한 사람이었다.자신의 고발이 오래 버티지 못하리라는 것을 미리 내다보고, 만약을 대비해 쪽지 한 장으로 퇴로를 마련했을 가능성도 충분했다.계연수는 더 이상 손보경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그런데 곁에 있던 이수옥이 갑자기 대화에 끼어들었다.“정말로 협박을 받아 어쩔 수 없이 한 일이면 어떡해요? 사정도 알아보지 않고 내치는 건 너무 매정하지 않나요?”계연수는 이수옥을 한 번 바라보았다.만씨 역시 싸늘한 눈길로 그녀를 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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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88화

과연 사흘이 지나자 황제는 대전에서 이번 사건에 대한 처분을 내리며 모든 일을 마무리 지었다.심서준은 복직하여 본래의 관직을 되찾았다.심태숙은 뇌물을 받은 사실이 드러나 정사품에서 정육품 태상시 시승으로 강등되었다. 심한율 역시 부인을 제대로 단속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강등되어 병부 우형사의 주사로 자리를 옮겼다.심씨 가문 사람들도 이 결과를 받아들였다.어찌 되었든 큰 화를 입지 않고 위기를 넘겼으니, 이 정도면 불행 중 다행이었다.가장 큰 타격을 받은 사람은 심태숙이었다. 정사품에서 정육품으로 두 계급이나 떨어진 그는 며칠째 얼굴에 근심을 가득 드리운 채 처소 밖으로 나오지도 않았다.태후에게도 처분이 내려졌다.황제는 태후에게 남원으로 거처를 옮겨 반년 동안 요양하라고 명했다. 요양이라는 명목을 내세웠지만, 사실상 반년 동안의 근신이나 다름없었다.그렇게 이번 사건은 일단락되는 듯했다.황제는 손보경에게도 심씨 가문으로 돌아가라고 명했다.어찌 되었든 그녀는 여전히 심한율의 부인이었고, 두 사람이 정식으로 화리한 것도 아니니 마땅히 심씨 가문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황제의 뜻이었다.바로 이 결정이 심씨 가문 사람들이 가장 불만스러워하는 부분이었다.만씨는 사석에서 목소리를 낮추어 불평했다.“폐하께서 여전히 작정하고 우리를 불쾌하게 만들려는 게 아니고 무엇이겠느냐.”누구나 같은 생각이었다.한번 가문을 배신한 며느리를 다시 돌려보내는 것이 심씨 가문을 모욕하려는 처사가 아니라면 대체 무엇이겠는가.원래라면 심한율이 직접 궁으로 들어가 손보경을 데려와야 했다.하지만 심한율은 드물게도 황명을 곧바로 따르지 않았다. 요즘 일이 바쁘다는 핑계를 대며 손보경을 당분간 태후의 처소에 더 머물게 하라고 했다.그 ‘당분간’이 얼마나 긴지는 누구도 정하지 않았다.만씨는 가능하다면 손보경이 평생 그곳에 머물기를 바랐다.본래 태후의 사람이었으니, 평생 태후 곁을 지키며 살면 될 일이었다. 그럴 거라면 무엇 때문에 남의 집으로 시집까지 왔단 말인가.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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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89화

심씨 가문 사람들은 소식을 듣고 손보경의 대담한 행동에 적잖이 놀랐다.손보경이 감히 근정전까지 뛰어들어가 울며 억울함을 호소할 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손보경은 심씨 가문으로 시집온 뒤 모든 일을 빈틈없이 처리했지만, 본래 성정은 얌전하고 조용한 편이었다. 그런 여인이 황제 앞에서 이처럼 큰 소란을 일으켰다니, 평소의 모습으로는 도무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게다가 손보경은 태후의 처소로 돌아가기를 완강히 거부했다.그녀는 심서준의 관복 자락을 두 손으로 붙든 채 놓지 않았다. 태후에게 돌아가면 정말로 목숨을 잃기라도 할 듯 두려움에 질린 모습이었다.수많은 궁인이 지켜보는 상황에서 황제도 손보경을 억지로 태후에게 돌려보낼 수는 없었다.결과적으로 손보경의 행동은 심씨 가문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결국 황제는 심서준에게 그녀를 심씨 부저로 데려가라고 명했다.*그 시각 심씨 가문 사람들은 모두 화청에 모여 심서준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마침내 바깥에서 도착을 알리는 소리가 들리자, 앉아 있던 사람들은 저마다 상체를 세우고 문밖을 바라보았다.가장 먼저 들어온 사람은 관복을 입은 심서준이었다.손보경은 고개를 숙인 채 그에게서 세 걸음가량 떨어진 뒤를 조용히 따라왔다.화청에 들어선 손보경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화려한 장신구 하나 없이 수수하고 깨끗한 옷차림이었다. 뺨 위에는 마르지 않은 눈물 자국이 남아 있었고, 창백한 얼굴에는 깊은 피로가 내려앉아 있었다.늘 머리카락 한 올 흐트러지지 않고 단정하고 의젓했던 손보경이었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옷매무새도, 머리도 조금씩 흐트러져 있었다.그녀가 이토록 초라하고 어수선한 모습을 보인 것은 처음이었다.심서준은 오늘 궁에서 벌어진 일을 짤막하게 설명한 뒤 만씨를 바라보았다.“큰형수님께서 우선 데려가 쉬게 해 주십시오.”그제야 정신을 차린 만씨가 손보경을 돌아보았다.오늘 손보경이 황제 앞에서 태후의 죄행을 폭로해 심씨 가문을 도왔다고는 하나, 만씨는 이미 그녀에게 정이 떨어질 대로 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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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90화

심한율은 미간을 찌푸렸다가 이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그가 자신의 처소로 돌아오자 정원 안은 인기척 하나 없이 고요했다. 문 앞을 지키던 시녀에게 묻자, 손보경은 막 목욕을 마치고 침실에 들어가 있다고 했다.심한율은 곧장 침실로 향했다.그는 손보경이 홀로 눈물을 흘리고 있거나, 자신을 보자마자 태후에게 어떻게 핍박당했는지 하소연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동정을 얻기 위해 일부러 가련한 모습을 보일지도 모른다고 여겼다.그러나 방 안에 들어서자 예상과 전혀 다른 광경이 펼쳐졌다.손보경은 놀라울 만큼 평온했다.새로 갈아입은 얇은 봄옷을 단정하게 걸친 채 귀비탑 위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손에는 책 한 권이 들려 있었고, 뒤에서는 시녀가 젖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살살 닦아 주고 있었다.방 안에는 목욕물의 따스한 습기와 은은한 향이 아직 남아 있었다.심한율이 다가오는 소리에 손보경도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읽고 있던 책을 덮고 평소와 다름없는 목소리로 불렀다.“부군.”차분하고 나직한 목소리에는 아무런 감정의 동요도 묻어나지 않았다.마치 오늘 오전 황제 앞에서 목 놓아 울며 억울함을 호소했던 사람이 그녀가 아닌 것 같았다.심한율은 손보경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단아하고 고요한 눈매에는 기쁨도 슬픔도 드러나지 않았다. 너무도 평온한 표정을 보고 있자 심한율의 미간이 더욱 깊이 좁아졌다.사실 그는 손보경의 이런 모습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그녀는 언제나 지나치게 침착했다. 감정의 기복이 거의 없었고, 자신이 아무리 냉대해도 원망하거나 서운해하는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심한율이 찾아와도 먼저 건넬 말 한마디 없는 사람이었다.어쩌면 심한율은 손보경이 적어도 또래 여인답게 기뻐하고 슬퍼하며, 때로는 화를 내거나 서운해하기를 바랐는지도 몰랐다.그녀가 조금이라도 솔직하게 감정을 드러냈다면, 자신도 이토록 끊임없이 경계하지는 않았을 터였다.심한율은 그녀에게서 서너 걸음 떨어진 의자에 앉았다.“내게 하고 싶은 말이 있소?”질문을 던진 그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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