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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91화

심한율은 충격과 혐오감에 휩싸였다. 눈앞에서 그토록 티 없이 정결해 보이던 손보경에게 정종현과 그런 과거가 있었다니.그는 의자의 팔걸이를 손가락이 하얗게 질릴 만큼 세게 움켜쥐고는 이내 다시 손보경에게 시선을 돌렸다. 가녀린 몸에 연약한 기색이 어린 눈매. 누가 보아도 죄 없고 위태로워 보이는 모습이었다.하지만 당시의 일을 떠올리자 마음 한구석에서 또 다른 생각이 고개를 들었다. 손보경은 수적들에게 능욕당할 뻔한 것도 모자라 뒤이어 정종현에게까지 그런 일을 당했다. 그때 그녀가 겪었을 고통 역시 결코 작지 않았을 터였다.피해자인 여인을 두고 역겨움을 느끼는 것 자체가 옳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다.하지만 당장은 도저히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한 이불을 덮고 자던 자신의 아내가 다른 사내와 몸을 섞은 적이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이는 좋아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어느 사내라도 쉽사리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그래도 심한율은 수양이 깊은 사람이었다. 적어도 겉으로는 손보경을 향한 혐오감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는 무언가 말을 꺼내려다가, 손보경의 창백한 얼굴과 이미 모든 것을 짐작한 듯한 표정을 보고 잠시 멈칫했다.심한율은 애써 마음을 가라앉혔다. 손보경의 말이 사실이라면, 지금까지 정씨 가문을 도울 까닭은 없을 것이고, 심씨 가문을 배신할 뜻도 품고 있지 않을 터였다.그렇다면 손보경이 전에 몰래 내보낸 쪽지도, 오늘 황제 앞에서 벌인 일도 결국 태후에게 복수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그러나 지나치리만큼 담담한 그녀의 표정을 보고 있자니, 심한율은 오히려 그 속내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손보경은 자신의 참혹한 과거를 털어놓으면서도 조금도 슬픈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마치 다른 사람의 일을 이야기하듯 한없이 고요하고 담담했다.심한율은 이혼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자신은 손보경에게 떳떳하지 못한 일을 한 적은 없었으니까.다만 지금 당장 이혼하기에는 시기가 좋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이 소란이 잠잠해진 뒤에야 다시 논의할 수 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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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92화

그렇게 말한 손보경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경성에서 벌어진 일은 머지않아 선주에도 전해질 겁니다. 제가 태후의 노여움을 완전히 샀으니, 부모님께서 저를 지켜 주려 하신다 해도 감히 저를 부인으로 맞겠다는 사내는 없겠지요.”그녀는 담담한 목소리로 덧붙였다.“아마 절에 들어가 남은 생을 조용히 수행하며 보내게 될 것 같습니다.”하지만 손보경은 끝내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말이 있었다.그녀는 애초에 부모의 기대를 한 몸에 안고 경성으로 올라왔다. 권세 있는 사내에게 시집가 오라비의 앞길을 열어 주는 것, 그것이 그녀에게 주어진 몫이었다. 그러나 손보경은 그 기대를 이루지 못했다.어머니는 어린 시절부터 그녀에게 여인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좋은 사내에게 시집가는 일이라고 가르쳤다. 만약 시댁에서 이혼당한다면 그것은 여인의 죄이니, 가문을 욕보이기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한다고도 했다.아래로는 아직 혼인하지 않은 여동생도 있었다. 본래는 손보경이 좋은 집안에 시집가 자리를 잡으면 여동생 역시 경성으로 불러 혼처를 마련해 줄 생각이었으나, 이제는 그마저도 불가능해 보였다.그러나 지금의 손보경에게는 자신의 운명을 뜻대로 결정할 힘이 없었다.심씨 가문은 이제 그녀가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피난처였다. 하지만 일이 이 지경에 이른 이상, 더는 그녀가 무엇을 선택하고 말고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정종현과의 일을 숨기면 심씨 가문은 여전히 그녀가 태후의 사람이라고 의심할 터였다. 그렇다고 진실을 밝히면 심한율의 마음에 영원히 뽑히지 않을 가시를 박게 된다. 아무리 너그러운 사내라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그러니 앞으로 자신의 운명이 어떻게 흘러갈지는 그저 하늘의 뜻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손보경은 한 번도 살아가기를 포기한 적이 없었다. 어떻게든 잘 살아 보려 애썼지만, 그녀가 가진 힘은 너무나 미약했고, 계연수처럼 좋은 운명을 타고난 것도 아니었다. 계연수에게는 모든 비바람을 막아 줄 힘을 지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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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93화

심한율은 말을 마치자 그대로 몸을 돌려 방을 나갔다.복잡하게 얽힌 마음 탓에 그 역시 손보경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손보경은 멍하니 고개를 들어 멀어지는 심한율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당연히 이혼에 관한 이야기를 계속할 줄 알았는데, 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그녀는 치맛자락을 꼭 움켜쥔 제 손을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긴 숨을 내쉬었다.잠시 자리를 비웠던 몸종이 다시 곁으로 돌아왔다. 손보경의 얼굴에 어린 쓸쓸한 기색을 살피던 몸종은 참지 못하고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부인, 이제 태후마마와는 완전히 척을 지셨고 그 손아귀에서도 벗어나셨잖아요. 지금 부인께 남은 유일한 길은 심씨 가문에 머무는 것뿐인데, 어찌하여 둘째 나리를 방에 붙잡지 않으셨나요?”손보경은 잠시 굳어 있다가 나직이 대답했다.“나는 그렇게 못 한다.”정말 그럴 수 없었다.다른 사람에게는 마음에도 없는 웃음을 지으며 빈틈없이 처신할 수 있었지만, 유독 심한율 앞에서만큼은 자신을 꾸며 낼 수가 없었다.몸종 정향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손보경의 곁에 쪼그려 앉았다.“부인께서는 심씨 가문 사람들이 뒤에서 부인을 두고 뭐라고 하는지 아세요?”손보경도 어렴풋이 들은 적은 있었지만, 모르는 척 물었다.“뭐라고 하느냐?”정향이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부인을 가짜라고 말합니다. 희로애락도 없는 꼭두각시 같아서 무섭다고요.”손보경은 순간 넋을 잃었다.그녀는 그저 모든 일을 완벽하게 해내고 싶었을 뿐이었다. 누구에게나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었는데, 오히려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주고 있었다니.그렇다면 심한율도 그 때문에 줄곧 자신과 거리를 두었던 것일까.머릿속이 엉킨 실타래처럼 어지러워져, 손보경은 한동안 무슨 생각을 해야 할지조차 알 수 없었다.정향이 다시 목소리를 낮추었다.“저는 어릴 때부터 부인을 모셔 왔으니 부인의 본모습을 알잖아요. 예전부터 자존심이 세시기는 했어도, 누구를 진심으로 해친 적은 없으셨고요.”그녀는 손보경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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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94화

손보경은 멍하니 정향을 바라보며 물었다.“그분이 정말 나를 안쓰럽게 여길까?”정향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나리께서는 분명 부인을 안쓰럽게 여기실 거예요.”그러고는 한층 다급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그리고 부인께서는 이대로 운명을 받아들이실 생각이세요? 붙잡으려고 애써 보지도 않으시면 정말 심씨 가문을 떠나게 될지도 몰라요. 부인께서는 진정 이곳을 떠나고 싶으신 겁니까? 심씨 가문을 나가시면 달리 어디로 가시려고요?”손보경은 두 눈을 감고 천천히 뒤로 몸을 기댔다.정향의 말이 모두 옳다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 심한율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듯 담담하게 말했지만, 사실 그녀에게는 물러설 곳도 돌아갈 곳도 없었다.더구나 심한율을 향한 마음도 거짓은 아니었다. 이렇게 해서라도 그의 곁에 남을 수 있다면, 한 번쯤 시도해 봐도 좋지 않을까 싶었다.그러나 마음먹는다고 해서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한 사내의 품으로 뛰어들어 눈물을 쏟는 것은 손보경에게 너무나 낯설고 어려운 일이었다.그녀가 정향에게 말했다.“생각해 보마.”손보경의 마음이 조금은 움직인 듯하자 정향은 서둘러 말을 보탰다.“부인, 한번 잘 생각해 보세요. 부인께서는 정말 억울하지 않으십니까? 이렇게 큰일을 겪으셨는데, 지금까지 누가 부인을 위해 억울하다고 말해 주었습니까? 친정에서는 안부를 묻는 서신이라도 보내왔나요? 부인을 걱정하기는 했고요? 어쩌면 고향에서도 부인을 이미 버림패로 여기고 있을지 모르잖아요. 헌데 정말 조금도 서럽지 않으신 겁니까?”“전에 심씨 부인께서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 살아 보라고 하셨잖아요. 슬픈 모습도 부인의 진짜 모습이에요. 부인께서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으셨어요. 이토록 힘든 일을 겪었으니, 슬퍼하셔도 되는 거예요.”그 말을 듣는 순간 손보경의 가슴 깊은 곳에서 억눌러 두었던 슬픔이 거짓말처럼 차올랐다.정향의 말이 옳았다.그녀는 원래 슬프고 억울해해야 마땅했다. 그런데 어째서 지금까지 제 감정마저 억누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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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95화

심한율의 말에 손보경의 가슴속으로 갑작스레 온기가 번져 들었다.설령 금세 사라질 온기라 해도, 그녀는 이 순간만큼은 욕심껏 붙잡고 싶었다.손보경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입술을 살며시 깨물고 고개를 숙이는 순간, 눈에 맺혀 있던 눈물 한 방울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그녀가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고맙습니다.”심한율은 가녀리게 떨리는 손보경의 어깨를 바라보았다. 이토록 여리고 쇠약해 보이는 그녀를 보고 있자니, 곁으로 다가가 몇 마디라도 위로해 주고 싶은 마음이 순간적으로 일었다.그의 손이 반쯤 뻗어 나갔다.그러나 결국 어색하게 거두어 들였을 뿐, 손보경에게 닿지는 않았다.심한율은 짧게 대답한 뒤 방 안의 몸종들에게 손보경을 잘 보살피라고 당부하고 몸을 돌려 나갔다.밖으로 나온 그는 초목이 무성하게 우거진 뜰을 바라보았다. 마음속에는 아무리 풀어 보려 해도 풀리지 않는 실타래가 단단히 엉켜 있는 듯했다.손보경을 대체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돌이켜 보면 그는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제 마음 하나 가누지 못해 이토록 혼란스러웠던 적이 없었다. 이제는 일상에까지 영향을 미칠 정도였다.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다가도 불현듯 손보경이 떠오르곤 했다.지난밤 아버지의 서재에서 들었던 부모의 말도 마음에 걸렸다. 두 분 모두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할지 그의 뜻을 기다리는 듯했다.지금껏 무슨 일이든 스스로 뜻을 정하고 판단해 왔건만, 유독 손보경의 일만큼은 어찌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심한율은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당분간은 더 생각하지 않기로 마음먹고, 다시 걸음을 옮겨 밖으로 나갔다.침실 안에서는 정향이 약사발을 손보경에게 건네며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부인, 방금 보셨습니까? 나리께서 거의 부인을 안아 주실 뻔했어요.”손보경은 고개를 숙이고 있어 정말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정향의 말을 들은 그녀는 고개를 돌려 되물었다.“정말이냐?”정향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정말이에요. 나리의 손이 부인 어깨에 거의 닿을 뻔했다니까요.”손보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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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96화

황제가 심서준을 가까이 불렀다.“서준아, 이리 와서 한번 보거라.”심서준은 걸음을 옮겨 황제의 곁으로 다가갔다.황제는 지도 위의 몇 군데를 손가락으로 짚으며 탄식하듯 말했다.“지난 한 해 동안 평부진에 지급된 군량과 군사 비용이 예년보다 이 할이나 늘었다. 헌데 병부에서 보고한 병력은 오히려 오천 명이나 줄었더구나.”말을 마친 황제는 심서준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짐에게 밀보가 들어왔다. 평부진 총병이 장부에만 존재하는 병사를 만들어 군비를 빼돌리고 있다더구나. 이미 몇 차례 사람을 보내 조사했으나 아무것도 밝혀내지 못했다.”심서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황제는 그런 심서준의 두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왜 그러느냐. 이제는 짐 앞에서 말하는 것조차 두려운 것이냐? 아니면 짐이 또 심씨 가문을 해치려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냐?”황제는 심서준을 한쪽 자리에 앉혔다. 방 안에는 군주와 신하, 단둘뿐이었다. 황제는 예전처럼 손수 찻잔에 차를 따라 주며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서준아, 너는 영민한 사람이다. 이번 일에서 짐이 심씨 가문을 억누르려 했다는 것을 모르지 않을 테지. 헌데 그래야만 짐도 아무런 의심 없이 너를 중용할 수 있다. 심씨 가문에는 너 하나면 충분하다. 실은 짐이 견제하려는 사람이 네가 아니라 심씨 가문의 다른 사람들이라는 뜻이다.”황제의 목소리는 온화했으나, 그 안에는 거스를 수 없는 단호함이 배어 있었다.“짐이 권신과 세가가 조정을 좌지우지하는 것을 무엇보다 증오한다는 사실을 너도 알 것이다. 너는 짐이 가장 신뢰하는 사람이다. 그러니 어느 세력에도 속하지 않고 오직 짐만을 섬기는 충신으로 남아 주기를 바란다. 짐은 네게 조정과 재야를 통틀어 누구에게도 허락하지 않은 독보적인 권력을 줄 수도 있다. 헌데 그러려면 너도 짐이 두 다리 뻗고 잠들 수 있게 해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심서준은 눈을 내리깔았다.“심씨 가문은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이며, 신 또한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황제는 말없이 심서준의 눈을 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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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97화

황제는 심서준을 바라보았다.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냉정을 잃지 않는 그의 모습을 황제는 무척 마음에 들어 했다.“조사를 시작할 바에는 한꺼번에 모두 파헤쳐야겠지.”황제는 다시 심서준을 응시하며 말했다.“서준아, 짐은 이 군비 횡령 사건을 네게 맡기고 싶다. 짐이 믿을 수 있는 사람은 너뿐이다. 지난 오 년 동안 세 차례나 사람을 보냈지만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 이 사건을 밝혀낼 수 있는 사람도, 그곳 사람들을 제압할 수 있는 사람도 오직 너뿐이다.”황제의 목소리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변방의 장수들이 짐을 얼마나 속였는지, 군비를 얼마나 빼돌렸는지, 누구와 결탁했는지, 경성에서 그들의 뒤를 봐주는 사람이 누구인지… 짐은 하나도 빠짐없이 알아야겠다. 상방보검과 정예병 오백 명을 내어 주마. 기한은 석 달이다. 그 정도면 충분하겠느냐?”심서준은 오랫동안 침묵했다.황제의 시선이 자신에게 깊숙이 박혀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그가 입을 열었다.“충분합니다.”그제야 황제의 얼굴에서 긴장이 풀렸다. 그는 다시 손을 뻗어 심서준의 어깨에 얹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서준아, 무사히 돌아오면 네 부인에게 고명 봉작을 내리고, 네게도 좋은 전답과 저택을 하사하마. 모레 바로 떠나거라. 따로 하직 인사를 올릴 필요는 없다.”어서재를 나온 심서준은 오문 밖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가 궁을 떠났다.오후에 저택으로 돌아온 그는 곧장 자신의 처소로 가지 않고, 먼저 어머니를 찾아뵌 뒤 심태숙의 서재로 향했다.심태숙은 심서준이 먼저 자신을 찾아오는 일이 좀처럼 없었기에 반색하며 그를 맞이했다.심서준은 그렇게까지 반길 필요 없다는 듯 손을 들어 보였다. 두 사람은 함께 책상 앞에 마주 앉았고, 심서준이 직접 찻잔에 차를 따랐다.그가 문득 물었다.“형님 처소의 소실들은 모두 장원으로 보냈습니까?”심서준이 심태숙의 내실 문제를 물은 것은 처음이었다. 심태숙은 그가 먼저 이 일을 꺼내는 것이 몹시 뜻밖이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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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98화

심태숙은 심서준의 뜻을 알아차렸다.그동안 백씨가 계연수를 수없이 겨냥해 왔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바로 심태숙이었다. 백씨가 어떤 일을 저질러 왔는지 자신이 아는 만큼 심서준도 알고 있을 터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직접 찾아와 이런 부탁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심태숙의 마음속에 짙은 부끄러움이 밀려들었다.그는 어린 시절 심 수보에게 거두어졌다. 심 수보는 그와 심서준을 단 한 번도 차별한 적이 없었다. 같은 스승에게 가르침을 받게 했고, 먹고 입는 것부터 온갖 살림살이까지 똑같이 내어 주었다.오히려 자신이 심서준만큼 총명하지 못했기에, 심 수보는 심서준보다 그에게 더 많은 시간과 정성을 쏟았다.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심서준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심태숙은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네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안다. 네 형수를 타일러 당분간 시골 장원에 머물며 마음을 다스리게 하마.”그러고는 죄스러운 얼굴로 덧붙였다.“서준아, 내가 집안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해 너에게까지 폐를 끼쳤구나.”심서준은 눈을 내리깔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제가 돌아오면 분가를 추진할 생각입니다.”심서준은 심태숙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심씨 가문의 재산은 형님과 제가 절반씩 나누겠습니다.”찻잔을 들고 있던 심태숙의 손이 돌연 크게 흔들렸다. 찻물이 손등 위로 튀었지만, 그는 그것을 돌아볼 겨를도 없이 고개를 번쩍 들어 심서준과 시선을 마주했다.심서준의 눈동자는 먹물을 풀어 놓은 듯 깊고 검었다. 그 속에는 지혜와 냉정함만이 고요히 잠겨 있었다.심태숙의 심장이 당황스러울 만큼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서준아, 그런 말은 하지 말거라. 나는 심씨 가문의 재산을 탐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아버지께서 갈 곳 없던 나를 거두어 주신 것만으로도 나는 이미…”심서준이 그의 말을 끊었다.“아버지께서는 저희 두 사람이 어려서부터 함께 자란 친형제이니 서로를 구분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형님도 심씨 가문의 사람이며 제 형님이십니다. 그러니 가산의 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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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99화

심서준은 떠나기 전 심태숙을 향해 두 손을 모아 정중히 예를 올렸다.심태숙은 그 인사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았다. 심서준은 자신의 부인을 두고 떠나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러니 백씨가 다시는 말썽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잘 살피고, 계연수도 보살펴 달라는 부탁이었다.본래 한집안의 형제라면 서로 화목하게 살아야 마땅했다. 그런데 하늘이 내린 인재라 불리는 심서준이 자신에게 이토록 허리를 숙이게 되었다.심태숙은 멀어지는 심서준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문득 깊은 숨을 들이마신 그는 온몸에서 힘이 빠진 듯 의자에 주저앉았다.부인을 잘못 맞았다는 생각이 든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그는 본래 서출인 데다 타고난 재주도 뛰어나지 않았다. 예전에 두 번이나 과거를 치렀지만 진사에 급제하지 못했다. 심 수보가 밤마다 돌아와 직접 가르쳐 주지 않았다면 아마 평생 벼슬길에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친가의 다른 서출 형들처럼 평생 별다른 성취 없이 남의 눈치나 보며 살아갔을지도 몰랐다. 고작해야 장원 몇 곳을 관리하는 일을 맡았을 뿐, 가문의 중대한 일을 논하는 자리에는 감히 끼지도 못했을 터였다.심태숙은 자신의 능력이 평범하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그가 통정사까지 순탄하게 벼슬길을 오를 수 있었던 것도 결국 심씨 가문이라는 배경 덕분이었다. 사람들은 심씨 가문의 환심을 사려고 그를 밀어 주었고, 그 덕에 그는 거듭 승진할 수 있었다.심태숙도 그 사실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그런데 이제는 심씨 가문의 막대한 재산까지 절반이나 받게 되었다.그는 생각만으로도 두려웠다. 자신은 절대로 그 재산을 받아서는 안 되었다. 그것까지 욕심낸다면 은혜를 모르는 배은망덕한 짐승이나 다름없었다. 자신을 거두어 가르쳐 준 심 수보를 차마 볼 낯이 없을 터였다.한편 심서준은 송학거로 돌아갔다.그의 발걸음은 무척 가벼워 소리조차 거의 나지 않았다.계연수는 심서준에게 줄 장화를 만들고 있었다. 전에 처음 지어 준 장화를 심서준이 편안하게 신는 것을 보고, 한 켤레를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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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00화

말을 마친 심서준은 말없이 계연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계연수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심서준의 눈빛을 마주하고 나서야 뒤늦게 상황을 받아들인 그녀는 그의 소맷자락을 살며시 붙잡았다.“얼마나 오래 다녀오셔야 하는 겁니까?”심서준은 잠시 생각한 뒤 대답했다.“석 달 안에는 돌아올 것이다. 최대한 빨리 조사를 마치고 오겠다.”그녀의 손에 순간 힘이 들어갔다. 계연수는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지금이 팔월 중순이니, 석 달 뒤면 십일월 중순이네요. 부군께서 돌아오시고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우리 아이가 태어나겠어요.”계연수는 고개를 들어 심서준을 바라보았다. 눈동자에는 감추지 못한 염려가 가득했다.“가시는 동안 꼭 몸조심하셔야 해요. 서신도 자주 보내 주시고요.”심서준은 계연수의 손을 감싸 쥐었다.“그러겠다.”그는 그녀를 안심시키듯 덧붙였다.“네 곁에는 호위를 더 배치해 두겠다. 그쪽 일도 최대한 빨리 마치고 돌아올 테니 걱정하지 말거라.”계연수가 다시 물었다.“그렇게 먼 변방에서 군비 횡령 사건을 조사하는 일이 위험하지는 않습니까?”심서준은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었다.“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네가 생각하는 만큼 위험한 일은 아니다.”하지만 계연수의 얼굴에서는 근심이 가시지 않았다.“그럼 내일 저와 함께 법화시에 가 주실 수 있습니까? 부군의 무사 귀환을 빌며 평안부를 하나 구하고, 우리 아이를 위해서도 복을 빌고 싶어요.”심서준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폐하께서 내일 하루는 집에서 떠날 준비를 하라고 하셨다. 그러니 너와 함께 갈 수 있다.”그 말을 듣고도 계연수의 마음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그날 밤, 그녀는 심서준의 품에 안겨서도 좀처럼 잠들지 못하고 연신 몸을 뒤척였다.불과 석 달의 이별이라 해도 계연수에게는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심서준과 혼인한 뒤 이렇게 빨리, 그것도 석 달이나 떨어져 지내게 되리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계연수가 다시 몸을 돌리려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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