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서류상 계약, 실물은 불장난: Chapter 1 - Chapter 10

30 Chapters

제1화 이혼

“왜 이렇게 집중을 못 해?”달빛이 사람을 홀릴 듯 고혹적이었다.물안개가 자욱한 욕실 안, 사람 그림자가 어른거렸다.허윤아는 등 뒤의 남자에게 떠밀려 차가운 타일 벽에 짓눌리다시피 했고 양손목은 붙잡힌 채 머리 위로 높이 들려 제압당했다.남자의 다른 손이 그녀의 잘록한 허리를 거칠게 쥐어잡는 바람에 허리 우묵한 곳에는 붉은 손자국이 역력했다.남자는 그녀의 귓가에 낮은 웃음소리를 흘리고는 이내 뜨거운 숨결로 귓불을 감싸 안았다.잘근잘근 깨물고 짓이기는 감각에 뜨거운 열기가 몸 안에서 파도처럼 일렁였다.허윤아는 전율하며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족히 한 시간은 지나서야 허윤아는 뒤에 있는 남자의 품으로 허물어지듯 쓰러졌다.진려준은 뒤에서 그녀를 안은 채 낮게 웃음을 흘리더니 한참 후에야 몸을 숙여 그녀를 가로로 안아 들고 욕실을 나섰다.침대에 눕혀졌을 때 허윤아는 이미 기진맥진한 상태였다.진려준이 가운을 걸치고 나가려는 기색을 보이자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몸을 일으켰다.“려준 씨.”진려준은 발걸음을 멈추고 눈썹을 치켜올렸다.“어?”“우리 얘기 좀 해.”두 사람은 결혼한 지 반년이 넘었지만, 부부 생활은 마치 사업 파트너와 다를 바 없었다.해야 할 일은 다 했으나 정신적인 교감은 눈곱만큼도 없었던 것이다.아무리 격렬한 시간을 보냈어도 끝나는 시간이 언제든 두 사람은 반드시 떨어져서 잤다.하긴 생각해보면 본래 정략결혼이었으니 어떤 면에서는 철저한 협력 관계인 게 맞았다.허윤아의 부름에 진려준은 발길을 돌려 침대 대신 맞은편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진려준은 긴 다리를 꼬고 나른하게 몸을 뒤로 기댄 채 길고 예쁜 손가락으로 소파 팔걸이를 톡톡 두드렸다. 풍류가 느껴지되 천박하지 않은 자태였다.“무슨 일이지?”허윤아는 그를 바라보았다. 욕정은 물러가고 이성만 남은 눈빛이었다.“이혼하고 싶어.”팔걸이를 두드리던 진려준의 손가락이 뚝 멈추더니 눈매가 가늘어지고 미소가 걷혔다.“뭐라고?”허윤아는 그가 똑똑히 들었다는 걸 알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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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위기

문자가 전송되자마자 답장이 왔다.[진짜 이혼해?][어.][억울하지 않겠어?][미적지근한 온도는 제일 편안한 온도일지 몰라도 정에 있어서는 사람을 말려 죽이는 온도야.][인정. 쯧, 진려준은 진짜 쓰레기야.][정략결혼일 뿐이야. 정색하지 마.]마지막 문자를 보낸 후, 허윤아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그날 밤, 허윤아는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방 안에는 아직 진려준의 목욕 향이 남아 있었다. 그녀의 것과는 다른, 묵직한 우드 향이었다.평소에는 그 향기가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지만 오늘 밤은 마치 악몽처럼 느껴졌다.다음 날 이른 아침.허윤아가 식사를 하러 아래층으로 내려갔을 때 식당에는 진려준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가정부 이혜숙이 아침 식사를 식탁에 차려주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대표님은 이미 나가셨어요.”허윤아는 하얀 손가락 끝으로 우유 잔을 매만지며 대답했다.“네.”이혜숙은 허씨 본가에서 오래 일했던 사람으로 허윤아를 돌보러 파견된 터라, 어릴 때부터 그녀를 봐온 정이 있어 말이 좀 많은 편이었다.“대표님이 가실 때 여행 가방도 챙겨 가셨어요.”허윤아는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요.”“윤아 씨, 대표님이랑 싸우셨어요?”허윤아는 눈을 들어 숨길 생각 없이 말했다.“싸운 게 아니라 우리 이혼해요.”이혜숙은 멍하니 있다가 허윤아의 말에 크게 놀란 듯 입을 벌렸다. 무슨 말을 하려다 주제넘을까 싶어 결국 한 가지만 물었다.“진 대표님이 하자고 하던가요? 그분이 허씨 가문 최근 사정을 아신 건가요?”허윤아는 담담하게 말했다.“제가 꺼냈어요. 그 사람은 몰라요.”허씨 가문 일은 추문으로 현재 허태식이 꽉 눌러 막고 있어서 진려준이 알 방법은 없었다.이혜숙은 입술을 달싹이며 더 묻고 싶어 했지만 허윤아는 틈을 주지 않았다. 우유를 다 마신 그녀는 전화를 받으며 바로 집을 나섰다.별장에서 나온 허윤아는 차를 몰고 회사로 향했고 가는 길에 조수가 최근 잡힌 인터뷰 건에 대해 보고했다“인터뷰도 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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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방문

최문석의 사무실에서 나온 허윤아는 욱신거리는 관자놀이를 손으로 지그시 눌렀다.TR이 진려준을 인터뷰하는 건 갑작스러운 결정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계획했던 일이었다.다만 그동안 진려준 쪽에서 줄곧 거절해 와서 기회가 없었을 뿐이었다.원래라면 기뻐해야 마땅한 일이었지만, 지금 그녀는 도저히 기뻐할 수가 없었다.취재팀으로 돌아온 허윤아는 책상 앞으로 다가가 상판을 가볍게 두드렸고 사람들이 하나둘 쳐다보자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이번 주간지 인터뷰이는 심 대표님으로 교체해. 그리고 준비들 하고 있어. 다음 주 수요일에 진성그룹 진 대표님 단독 인터뷰 진행할 거야.”허윤아의 말에 모두가 졸였던 가슴을 쓸어내렸다.문제가 해결되자 인턴 기자 몇 명이 소곤거리며 가십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진성 그룹 진 대표면, 그 진려준 말하는 거지?”“그 사람 말고 또 누가 있겠어.”“그 사람 살아있는 저승사자라던데.”“저승사자인지는 몰라도 TV에서 보니까 진짜 잘생겼더라.”“너네 이 소문 들었어? 그 진 대표님 완전 순정파래. 대학교 1학년 때 사귄 여자 친구랑 지금까지 만나고 있다더라.”인턴 기자들의 수다가 점점 무르익었지만 허윤아는 더 듣지 않고 몸을 돌려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왔다.핸드백을 내려놓은 허윤아는 커피 머신 앞으로 가서 커피를 한 잔 내렸다.커피를 한 모금 마시자 방금 전 인턴 기자들이 했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확실히 진려준은 대학교 1학년 때 여자 친구를 사귄 적이 있었고 사이도 좋았지만, 졸업할 무렵 두 사람은 헤어졌다.이별의 이유는 불분명했다.여자가 자신의 야망을 위해 떠났다는 설이 유력했다.두 사람이 헤어진 후 진려준은 다시는 여자를 사귀지 않았고 그 후엔 그녀와 정략결혼을 했다.정략결혼을 떠올리자 허윤아는 다시 이혼 생각이 났다.‘합의서에 사인은 했으려나.’이치대로라면 그는 시간을 끌 사람이 아니었다.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허윤아는 휴대폰을 꺼내 어젯밤 연락했던 사람에게 다시 문자를 보냈다.[진려준한테 연락했어?]저쪽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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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떠나는 이유

진려준의 말투에는 비웃음이 섞여 있었다.두 사람은 몇 초간 시선을 마주쳤고 허윤아는 미소를 지으며 상황을 수습했다.“진 대표님께서 말씀하기 어려우신 것 같으니 억지로 묻진 않겠습니다. 다음 화제로 넘어가죠.”인터뷰는 두 시간가량 이어졌다.진려준의 사업 비전부터 사생활까지 허윤아는 시시콜콜한 것까지 다 물었다.인터뷰가 끝나고 허윤아는 일어나 진려준에게 악수를 청했다.진려준은 시선을 내려 허윤아의 희고 가녀린 손끝을 훑어보고는 무심하게 잡으며 말했다.“수고하셨습니다.”허윤아는 마주 웃으며 온화하지만 거리감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진 대표님.”진려준을 배웅한 뒤 허윤아는 손을 들어 셔츠 깃의 마이크를 떼어 옆에 있던 조수에게 건넸다.조수는 마이크를 받아 들며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팀장님, 도대체 어떤 여자가 진 대표님처럼 완벽한 남자랑 결혼했을까요? 재력에 외모까지 빠지는 게 없잖아요.”허윤아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정략결혼이겠지.”조수는 고개를 끄덕였을 뿐 허윤아의 눈동자에 스친 어두운 기색을 눈치채지 못했다.“하긴, 저 정도 급의 남자는 보통 정략결혼을 피하기 힘들죠.”허윤아는 웃기만 하고 대꾸하지 않았다.스튜디오를 나와서 두어 걸음 걷자마자 진려준에게 문자가 왔다.허윤아는 손끝으로 화면을 밀어 확인했다.[저녁에 같이 본가에 가서 밥 먹지.]끝에 마침표가 찍혀 있었다.묻는 게 아니었다. 그저 통보였다.[아직 집에 이혼 얘기 안 했어?]진려준은 약 30초 뒤에 답장을 보냈다.[당신은 말했고?]허윤아는 입술을 다물었다. 그녀도 말하지 않았다.허씨 가문은 요즘 온갖 골치 아픈 일로 난리라, 이런 작은 일까지 말할 상황이 아니었다.허윤아가 답장을 고민하고 있을 때, 진려준의 두 번째 문자가 연달아 도착했다.[저녁에 기사 보내줘?]거절을 허용하지 않는 태도였다.[내 차로 갈게.]허윤아와 진려준은 전형적인 정략결혼 부부였다.두 사람이 세 살 되던 해, 양가 어르신들은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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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어머니의 한마디

허윤아는 허씨 가문의 그 지저분한 치부가 이렇게 예고도 없이 진려준 앞에서 까발려질 줄은 몰랐다.진려준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허윤아는 애써 태연한 척 허리를 숙여 현관에서 신발을 갈아신었다.진려준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고 그의 깊은 눈매가 더욱 어둡게 가라앉았다.조형준, 데릴사위로 들어와 인생 역전한 허윤아의 아버지였다.30년 전, 허린 그룹 회장의 무남독녀 허정임은 빈털터리 조형준에게 한눈에 반해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결혼을 강행했다.그녀는 그것이 운명적인 사랑이라 믿었지만 실상은 지독한 착각에 불과했다.허정임에게 조형준은 평생을 함께할 유일한 반려자였지만 조형준에게 그녀는 신분 상승이라는 목표를 향한 가장 빠르고 화려한 지름길일 뿐이었다.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형준의 연기는 실로 완벽했으니까.수십 년을 하루 같이 연기하며 기어코 허태식의 지분 절반을 속여서 가로채고 회사 내 허정임의 오른팔 왼팔마저 잘라낸 뒤에야 조형준은 비로소 여우 꼬리를 드러냈다.허태식과 허정임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조형준은 이미 회사 내에서 확고하게 입지를 굳힌 상태였다.허윤아와 진려준이 돌아온 것을 가장 먼저 발견한 사람은 가정부였다.가정부는 은근슬쩍 진려준의 어머니 김미선에게 눈짓을 보냈다.김미선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허윤아를 발견하더니, 처음에는 난처해하다가 곧 그녀에게 다가가 가볍게 한숨을 쉬며 아예 솔직하게 털어놓았다.“다 들었니?”허윤아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긍정의 뜻을 비쳤지만 김미선을 무안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다.김미선은 어릴 적부터 허윤아가 자라는 것을 지켜봐 온 터라, 그녀의 손을 잡고 손등을 토닥이며 안쓰러워했다.“괜찮아, 겁먹지 마. 하늘이 무너져도 진씨 가문은 널 지켜줄 거다.”허윤아는 의젓하게 대답했다.“감사해요, 어머니.”“감사는 무슨, 다 한 가족인데.”말을 마친 김미선은 진려준을 바라보았는데 표정에는 별다른 기색이 없었지만 말투에는 왠지 모를 화가 섞여 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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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계산된 이별

진려준이 감정은 억지로 되는 게 아니라고 하자 김미선은 목구멍까지 차올랐던 말을 꿀꺽 삼켰다.진려준의 말은 꽤 상처가 되는 말이었지만 그가 한 말이 사실이라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사랑하지 않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호르몬에 관련된 일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소용없는 법이니, 너무 몰아세우면 오히려 역효과만 날 뿐이었다.대화가 이쯤 되니 모자 사이에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김미선은 진려준을 한번 흘겨보고는 씩씩거리며 숄을 여미고 돌아섰다.김미선이 떠나는 뒷모습을 지켜보던 진려준은 찬 바람을 좀 쐬다가 방으로 들어갔다.침실에는 막 샤워를 마친 허윤아가 있었는데, 진려준이 들어오자 눈꺼풀을 들어 그를 쓱 한번 보고는 아무 말 없이 다시 고개를 숙여 일에 열중했다.진려준은 드레스룸으로 걸어가 잠옷을 꺼내면서 등 뒤로 들리는 요란한 타자 소리에 혀끝으로 어금니를 꾹 누르며 잠옷을 챙겨 욕실로 들어갔다.옷을 벗자 넓은 어깨와 탄탄한 허리, 선명한 복근이 드러났다.샤워기 물줄기가 쏟아지자 진려준은 손을 들어 얼굴의 물기를 훔쳐냈다.처가에 그 난리가 났는데 쥐뿔도 모르고 있었다니, 확실히 무심하긴 했다.하지만 자신의 무심함보다 저 여자는... 더 냉혈한 같았다.진려준이 욕실에서 나왔을 때도 허윤아는 일하고 있었다.그가 침대 가에 앉아 다리를 벌리고 상체를 숙여 머리를 닦으려는데, 등 뒤에서 허윤아의 거리감이 느껴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오늘 밤은 따로 자자.”진려준은 그 말에 고개를 돌렸다.“뭐?”허윤아는 하얀 손가락으로 키보드의 엔터키를 누르며 딴소리를 했다.“전 애인한테 아직 미련 남았어?”진려준이 미간을 찌푸렸다.“허윤아...”그가 짜증을 내며 해명하려 하자 허윤아는 손가락으로 화면을 톡톡 쳤다.“공적인 질문이야.”오늘 인터뷰 때 빠뜨린 항목이었다.진려준의 시선이 그녀가 가리킨 곳에 닿았다. 그 찰나, 그의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밑바닥으로 침잠했다.자신의 인터뷰 초고였다.진려준은 눈을 가늘게 떴다. 방금 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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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냉담한 진실

진려준은 어릴 때부터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았다.잘생긴 외모에 재력과 배경까지 톱클래스였으니 소위 스펙이 완벽했다.의도적으로 접근하는 여자들은 많이 겪어봤지만, 허윤아처럼 의도적으로 떠나려고 계획한 여자는 처음이었다.문득 진려준은 자기가 놀아났다는 생각이 들었다.그것도 대가 없이 이용만 당한 기분이었다.진려준이 멍하니 있는 사이 허윤아는 이미 자리에 누웠다.그가 정신을 수습했을 때 허윤아는 이미 바닥에서 곤히 잠든 뒤였다.잠든 허윤아를 보며 진려준은 손에 든 수건을 만지작거리다 피식 웃고는 머리를 말리러 욕실로 들어갔다.다음 날 아침 일찍.두 사람의 생체 리듬은 똑같아서 거의 동시에 잠자리에서 일어났다.씻고 준비를 마친 허윤아가 긴 머리를 쓸어 넘기며 진려준을 무심하게 쳐다봤다.“이혼 합의서에 서명했어?”넥타이를 매던 진려준은 그 말에 어젯밤 농락당한 기분이 되살아나 혀를 차며 대꾸했다.“쯧. 했어.”“그럼 다행이고. 우리 이혼 문제, 양가 어른들께 빨리 확실히 해둬. 아니면 골치 아파지니까.”진려준은 손끝으로 넥타이를 건드리며 몸을 돌려 묘한 미소를 지었다.“뭐가 골치 아픈데?”허윤아는 눈을 들어 그를 보았다. 몸에 딱 붙는 베이지색 롱 원피스가 그녀의 매혹적인 몸매를 그대로 드러냈다.“이혼하고 나서도 전남편이랑 계속 동거하는 거 싫어. 소문나면 해명하기도 힘들고.”허윤아는 마른 편이었지만 살이 쪄야 할 곳에만 아주 예쁘게 붙어 있었다.두 사람이 시선을 마주친 순간, 진려준의 눈길이 불현듯 그녀의 잘록한 허리 아래 엉덩이를 훑고 지나갔다.허윤아는 그의 시선을 눈치채고 무의식적으로 반걸음 뒤로 물러섰다.결혼한 지 반년밖에 안 됐지만 서로의 어떤 습관들은 훤히 꿰뚫고 있었다.예를 들어 진려준은 어떤 순간에 그녀의 엉덩이를 주무르는 걸 좋아했다.허윤아는 숨을 죽였고 분위기는 야릇하면서도 어색해졌다.그녀가 이 분위기에 질식할 것 같아 몸을 돌려 나가려던 찰나, 진려준이 성큼성큼 다가와 그녀를 벽 구석으로 몰아붙였다. 그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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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재혼을 서두르는 이유

피도 눈물도 없다는 소리를 들은 허윤아는 목을 파고드는 고통에 숨이 턱 막혔다.그녀가 반항하기도 전에, 그녀를 깨물었던 남자는 이미 몸을 일으켜 두어 걸음 물러나 넥타이를 매만지고 있었다.말끔한 모습이 방금 전까지 못된 짓을 한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아침 식사 자리, 두 사람 사이엔 정적만 흘렀다.눈치 빠른 김미선은 단번에 허윤아 목에 난 잇자국을 포착하고는 식탁 밑으로 진려준의 다리를 걷어차며 눈빛으로 추궁했다.진려준은 김미선의 시선을 쫓다 눈을 가늘게 뜨고는 입을 다물었다.김미선이 속삭였다.“너 땅을 치고 후회할 거다.”진려준은 피식 웃으며 입 모양으로만 대꾸했다.“절대, 네버.”김미선이 콧방귀를 꼈다.첩보 작전 같은 모자의 대화를 딴생각 중인 허윤아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식후, 허윤아는 진려준과 함께 본가를 나섰다.차에 오르자마자 시동도 걸기 전에 친정에서 전화가 왔다. 허윤아는 반짝이는 화면을 내려다보다 통화 버튼을 눌러 귀에 댔다.“네, 엄마.”수화기 너머 허윤아의 엄마 허정임이 잔뜩 화가 난 어조로 따졌다.“누구 맘대로 려준이랑 이혼이야?”허윤아는 침묵했다. 허정임은 대답이 없자 계속해서 날카롭게 소리쳤다.“이혼이 애들 장난이니? 어떻게 집에 상의 한마디 없이 그럴 수가 있어? 너 도대체 이 엄마를 뭐로 보는 거야?”핸들에 올린 허윤아의 손에 지그시 힘이 들어갔다.“엄마, 나랑 진려준은...”허윤아가 입을 열어 해명하려는데 전화기 너머 허정임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잘랐다.“네가 무슨 방법을 쓰든 상관없으니 이혼은 절대 안 된다.”말을 마친 허정임은 허윤아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전화를 끊어버렸다.끊긴 신호음을 들으며 허윤아는 휴대폰 화면을 눈앞으로 가져와 확인하고는 입술을 일자로 굳게 다물었다.어릴 때부터 엄마는 항상 이런 식이었다. 그녀의 눈에 허윤아는 딸이라기보다 손에 쥔 체스 말 같았다.어디로 갈지, 어떻게 쓰일지는 오로지 엄마 마음이었을 뿐, 그 말이 기쁜지 슬픈지는 안중에도 없었다.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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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스스로 초대한 굴욕

허윤아는 태연하게 대답했고 피하려는 기색은 조금도 없었다.말을 마친 그녀는 눈을 내리깔고 휴대폰을 콘솔에 올려놓은 뒤 고개를 돌려 진려준에게 말했다.“시간 될 때 전화 줘. 일주일은 넘기지 말고.”진려준은 가슴속에서 설명할 수 없는 묘한 감정이 끓어올랐지만, 애써 태연한 척 목구멍에서 억지로 한마디를 짜냈다.“걱정 마, 오래 안 걸려.”그의 대답을 들은 허윤아는 더 지체하지 않고 핸들을 꺾어 그곳을 떠났다.차가 어느 정도 멀어지자 허윤아는 백미러를 통해 진려준의 모습을 확인했다.그는 그 자리에 꼼짝도 않고 서 있었다.허윤아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시선을 거두었다.어차피 안 될 인연이라면 헛된 희망을 품을 필요가 없었다. 이미 겪을 만큼 겪어봤고 꽤나 아팠으니까.한 시간 뒤 차는 TR에 도착했다.허윤아가 주차하고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그녀의 조수가 호들갑을 떨며 은밀하게 다가왔다.“팀장님.”허윤아는 웃으며 받아줬다.“왜?”조수가 속삭였다.“우리 쪽에 수석 기자가 낙하산으로 꽂혔다는데요.”허윤아는 남의 얘기에 별 관심 없지만 이건 좀 이상하다 싶어 물었다.“언제?”조수가 말했다.“오늘 아침에요.”두 사람은 대화를 나누며 허윤아의 사무실로 들어갔다.조수의 이름은 윤보라로, 허윤아와 꽤 오랫동안 함께 일해왔다. 성실하고 착한 편이지만 유일한 단점이라면 성격이 너무 털털하다는 것이었다.허윤아의 사무실에 들어온 윤보라는 문을 닫자마자 대담해져서 말을 이었다.“편집장님이 승진하신다는데 새로 온 낙하산은 팀장님이랑 편집장 자리를 놓고 경쟁 붙이려고 꽂은 거래요.”허윤아는 책상 앞에 서서 가방을 내려놓으며 눈꼬리를 살짝 치켜올렸다.“누가 그래?”윤보라가 대답했다.“다들 그러던데요.”‘다들이라...’소수가 다수에게 복종해야 하는 집단에서 무슨 일이든 ‘다들'이라는 말이 나오면 여론은 이미 한쪽으로 기울어졌다는 뜻이었다.윤보라는 허윤아가 아무 말도 없자 대신 억울해했다.“팀장님, 화 안 나세요? TR에서 몇 년을 뼈 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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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라이벌

허윤아의 답장을 보고 한세연은 마음이 짠해졌다.잠시 뒤 한세연이 [토닥토닥] 이모티콘을 보냈다.[나 멀쩡해.][어제 진려준이랑 본가 가서 무슨 일 없었지?][없어. 이혼까지 한 마당에 무슨 일이 있겠어.][남자는 원래 사랑과 잠자리를 철저히 구분하는 족속이야, 어쨌든 너 손해 보지 마.][걱정 마.]한세연과 문자를 마친 허윤아는 편집장실에서 걸려 온 내선 전화를 받았다.수화기를 들고 입을 떼기도 전에 최문석이 말했다.“허 팀장, 내 방으로 잠깐 와.”“네, 편집장님.”전화를 끊은 뒤 허윤아는 최문석의 사무실로 향했다.노크하고 들어가니 최문석의 책상 앞에 누군가 서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최문석은 평소의 쌀쌀맞고 공사 구분 철저하던 모습은 싹 지우고 귀한 손님이라도 맞은 듯 입이 귀에 걸려 있었다.“입사를 환영해요.”상대방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편집장님.”최문석은 허허 웃으며 말했다.“진 대표님이 든든하게 계시는데 제가 챙겨드릴 게 있겠습니까, 오히려 문 기자님이 저를 챙겨주셔야죠.”그때 허윤아를 본 최문석이 손짓하며 소개했다.“허 팀장, 인사해. 새로 온 수석 기자 문정현 씨야.”그리고 문정현에게도 말했다.“문정현 씨, 이쪽은 허윤아 씨. 현재 우리 TR의 간판 수석 기자죠. 서로 인사해요. 이제 두 사람은 TR의 왼팔과 오른팔이 될 테니까.”왼팔 오른팔이라지만, 허윤아라는 ‘왼팔'이 낙하산인 ‘오른팔'보다 찬밥 신세임은 분명했다.최문석은 허윤아에게 눈치를 주며 어서 인사하라고 재촉했다.문정현이 돌아서고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치자 허윤아는 덤덤하게 미소 지었다.“오랜만이야.”“그러게. 오랜만이다, 윤아야.”문정현, 방금 동창 단톡방을 도배했던 그 주인공이었다.두 사람은 친해 보였지만 누구도 먼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지 않았다.의자에 앉아 있던 최문석은 두 사람이 아는 사이라는 사실에 잠시 멍하니 있다가 웃으며 말했다.“둘이 아는 사이야?”허윤아가 대답했다.“학교 동창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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