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류상 계약, 실물은 불장난의 모든 챕터: 챕터 21 - 챕터 30

30 챕터

제21화 라이벌의 전화

진덕원의 화제 전환은 너무도 갑작스러웠다.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분위기는 순식간에 얼어붙었다.정작 당사자인 허윤아와 진려준은 비교적 평온해 보였지만, 오히려 문정현은 젓가락을 쥔 손가락 관절이 하얗게 질린 채 눈을 내리깔고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모습이었다.진덕원은 술을 몇 잔 더 마시긴 했지만 인사불성이 될 만큼 취한 건 아니었다.앞에 있는 세 사람을 보며 진덕원은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감지했다.진덕원이 미간을 찌푸리며 무슨 말을 하려 하자, 옆에 앉아 있던 임수연이 그를 말렸다.“술만 들어가면 말이 많아지신다니까...”진덕원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봤다.임수연은 그를 부축해 일으키며 말했다.“취하셨어요, 들어가 주무세요.”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가정부에게 당부했다.“은서 씨, 객실 좀 정리해줘.”이은서는 대답하고 객실 두 곳을 치우러 갔다.그녀가 방 정리를 마쳤을 때, 임수연이 마침 안방에서 얇은 담요 두 장을 들고나와 문정현 품에 하나, 허윤아 품에 하나를 안겨주었다.“담요가 두 개뿐이네. 정현이가 하나 쓰고, 윤아네 부부는 같이 써.”임수연의 의도는 너무나 뻔했다.허윤아가 그녀를 돌아보며 불렀다.“사모님...”“시간 늦었다, 얼른 가서 자. 할 말 있으면 내일 아침에 하고.”임수연은 말하며 문정현의 손을 잡고 다른 객실로 이끌었다.“그동안 외국 생활은 어땠어? 물어볼 새도 없었네...”문정현은 입술을 깨물며 답했다.“잘 지냈어요...”문정현이 뒤에 뭐라고 더 말했지만, 임수연이 그녀를 방으로 끌고 들어가는 바람에 허윤아는 듣지 못했다.넓은 거실에는 그녀와 진려준만 남았다.허윤아는 가볍게 숨을 들이켰다.“자자.”술을 마신 진려준은 정장 바지 속에 넣어둔 검은 셔츠 자락을 대충 끄집어낸 채로 거만하고 나른한 태도를 보였다.“같이 자자고?”허윤아는 무표정하게 그를 쳐다봤다.“그럼 넌 거실에서 자던가.”진려준은 눈썹을 까딱하더니 대꾸 없이 성큼성큼 침실로 들어갔다.허윤아를 스쳐 지나갈 때 차갑게 비웃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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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화 가능과 불가능 사이

‘함진우?’그 이름을 보자 진려준의 눈빛이 순식간에 차가워졌다.지난번 허윤아가 차 안에서 허정임과 통화할 때 했던 말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서림에서 결혼할 상대가 그 사람 하나뿐인 건 아니라고, 함진우도 있다고 했었다.‘벌써 연락이 닿은 건가?’두 사람이 이미 이혼 합의서에 서명했다는 사실을 떠올리자 진려준의 눈에 서린 냉기는 무관심한 조소로 바뀌었다.이미 끝난 사이인데, 그녀가 누구랑 연락하든 그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허윤아가 욕실에서 나왔을 때 진려준은 이미 담배 한 대를 다 피우고 창가에 서서 통화 중이었다.진덕원이 사는 곳은 오래된 아파트라 통유리창이 없고 평범한 창문과 베란다가 있었다.진려준은 베란다 난간을 짚고 서서 평소의 나른함과는 다른, 권위자의 냉정함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그 오더 못 받는다고 해. 계약서대로 3배 위약금 물어주고 주문 취소해.”상대방이 무슨 말을 했는지는 잘 들리지 않았지만, 잠시 후 진려준은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불만 있는 놈 있으면 나한테 직접 따지라고 해.”통화는 금방 끝났고 진려준은 몸을 돌려 협탁에 휴대폰을 내려놓으며 말했다.“아까 전화 왔었어.”허윤아는 무심결에 물었다.“누구?”진려준은 눈을 들어 대답했다. “함진우.”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고 허윤아는 진려준의 눈빛에서 명백한 조롱을 읽었다.그녀는 입을 다문 채 대꾸하지 않고 허리를 숙여 침대 위에 던져진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먼저 한세연에게 답장을 보낸 뒤, 바로 함진우에게 전화를 걸었다.통화 연결음이 잠시 울리더니 연결되었고 수화기 너머로 함진우가 놀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허윤아, 이게 정략결혼 하려는 태도냐? 전화를 다 안 받고?”허윤아는 그가 농담하는 걸 알기에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방금 일이 좀 있어서 못 들었어.”함진우가 물었다.“너 진짜 진려준이랑 이혼했냐?”당사자가 바로 뒤에 있어서 그녀는 길게 말하기 곤란했다.“어.”함진우가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또 물었다.“이유는?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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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화 공공의 비밀

진려준의 목소리는 낮고 묵직했으며 한 마디 한 마디가 치명적인 유혹이었다.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허윤아의 허리에 있던 커다란 손이 아래로 스멀스멀 내려갔다.그의 의도를 알아차린 허윤아는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그의 손목을 꽉 쥐었다.“진려준, 적당히 좀 해.”두 사람 사이에 긴장감이 감도는 찰나, 침실 문밖에서 노크 소리까지 울렸다.그 소리에 허윤아는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문 열게.”진려준은 여전히 그녀의 귀에 입술을 바짝 붙인 채 말 대신 귓불을 지그시 깨물었다.허윤아는 본능적으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진려준의 이 행동은 순전한 심술이었으나, 허윤아의 반응은 그에게 무언가를 상기시킨 듯 목젖이 울렁였고 이내 눈동자에는 깊은 욕망이 서렸다.계속되는 노크 소리에 진덕원 내외가 깰 것을 우려한 두 사람은 서로를 노려보다 결국 몸을 놓아주었다.진려준은 누가 왔는지 이미 짐작했다는 듯 직접 문을 열러 갔다.예상대로 문이 열리자마자 문정현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려준아.”방금 샤워를 마쳤던 진려준은 허윤아와 대치하던 순간 아무것도 걸치고 있지 않았기에, 문을 열기 직전 객실에 있던 가운을 대충 걸쳤다.몸에 맞지 않아 조금 작았지만, 가려야 할 곳은 다 가려졌다.“무슨 일이야?”진려준은 고개를 숙인 채 웃는 듯 보였지만 눈매에는 웃음기가 거의 없었다.허윤아한테 잔뜩 열이 받은 탓이었다.문정현은 입술을 달싹이며 세상 가련한 표정으로 말했다.“큰어머니가 방금 전화하셔서 문담 그룹이랑 진성 그룹의 올해 협력 건에 대해 물으셨어...”문정현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물으며 시선은 자꾸 방안을 훑었다.침실은 그리 크지 않아 한눈에 다 들어왔다.침대 하나, 침대 끝쪽에 놓인 의자 두 개와 유리 원탁이 있었다.허윤아는 그중 의자 하나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문자를 보내고 있었는데, 표정에서 별다른 이상함은 보이지 않았다.그걸 보자 문정현은 밤새 조마조마했던 마음을 비로소 놓았다.진려준이 말했다.“회사 일은 주세윤한테 연락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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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화 도발

이 밤은 결코 잠들 수 없는 밤이었고 실제로 허윤아는 밤새 거의 한숨도 자지 못했다.침대 하나, 얇은 담요 한 장, 그리고 성인 남녀 둘. 게다가 심신이 멀쩡한 성인들이었으니 그 고역은 말로 다 할 수 없었다.남녀 사이에 순수한 우정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혼한 부부 사이에는 확실히 없었다.서로 얼굴을 붉히며 헤어지지 않은 건 이권으로 얽혀 있거나 마음 한구석에 상대의 자리를 남겨두었기 때문일 텐데, 그녀와 진려준은 전자에 해당했다.날이 어렴풋이 밝아올 무렵 허윤아는 침대에서 일어났는데 그녀보다 더 일찍 일어난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다.문정현이 소파에 앉아 쿠션을 안은 채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었다.방문이 열리는 소리에 그녀가 뻣뻣하게 고개를 돌렸고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자 그녀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렸다.“좋은 아침.”허윤아는 그녀의 얼굴에 서린 고통을 못 본 척하며 무심하게 인사를 건넸다.일단 두 사람은 친분이 없었고 무엇보다 허윤아는 자수성가를 철칙으로 여겨온 터라 누가 자기를 지켜주길 바라지도 않았고 남을 불쌍하게 여기는 것도 싫어했다.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측은지심 따위 갖고 싶지 않았다.이 세상에 가장 흔해 빠진 게 불행한 사연들이니까.문정현에게 인사를 건넨 뒤 허윤아는 주방으로 들어가 물을 마시며 휴대폰을 꺼내 아침을 주문했다.메뉴를 고르고 있는데 소파에 앉아 있던 문정현이 일어나 다가왔다.“윤아야.”문정현의 목소리는 아주 작았고 약간 잠겨 있었다.허윤아는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용건 있어?”문정현이 입을 열었다.“너랑 려준이...”진려준의 이름이 나오자 허윤아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그녀는 시선을 내리깔고 골라둔 아침 메뉴를 주문한 뒤 다시 고개를 들며 말했다.“우린 최대한 빨리 이혼 수속 밟을 거야.” 문정현이 당황하며 말했다.“아니,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허윤아는 물컵을 내려놓았다.“문정현, 난 위선적인 사람 싫어해. 약해 빠진 사람도 싫어하고. 근데 공교롭게도 넌 그 두 가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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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화 갑작스런 시련

진려준이 몸을 돌려 떠나자 문정현은 한겨울 추위 속에 놓인 듯 멍하니 굳어버렸다.아침 식사를 마친 뒤 세 사람은 함께 길을 나섰으나 허윤아는 올 때와 마찬가지로 진려준의 차를 거부했다.진려준의 비서 주세윤은 허윤아를 두어 번 쳐다보았지만 상사가 아무런 기색이 없자 차마 입을 떼지 못했다.“려준아, 윤아를...”그때 뒷좌석의 문정현이 치마를 꽉 쥔 채 입을 열었지만 진려준은 차가운 목소리로 잘라 말했다.“출발해.”“네. 대표님.”주세윤이 대답했다.진려준의 차가 출발하자마자 허윤아가 부른 택시가 도착했다.택시에 타서 행선지를 일러준 허윤아는 눈을 붙였으나 아침 일찍 진덕원이 서재로 불러 물었던 대화가 선명하게 떠올랐다.“려준이랑은 대체 어떻게 된 거냐?”진덕원의 물음에 허윤아는 숨기고 싶었지만 거짓말은 하기 싫어 붉은 입술을 달싹이며 사실대로 대답했다.“이혼했어요.”진덕원은 이미 이런 결과를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허윤아의 입으로 직접 그 말을 듣게 되자 그는 결국 미간을 찌푸렸다.“왜 이혼한 게냐? 문정현 때문이니?”허윤아는 시선을 아래로 떨구며 말했다.“선생님.”그녀가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을 본 진덕원이 고개를 저었다.“이 녀석아, 넌 정말...”진덕원은 허윤아가 약한 모습을 보일 줄도 모르고 애교 부릴 줄도 모른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는 못하고 손을 내저으며 한마디를 덧붙였다.“에휴, 됐다. 이혼했다니 그런 줄 알고 있으마. 어차피 너희 둘은 어울리지도 않았으니.”어울리지 않는다...둘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건 누구나 다 알고 있었다.오직 그녀만이 당시에 바보 같게도 두 사람이 서로 공경하며 화목하게 살 수 있을 거라 망상했을 뿐이었다.이런 생각들이 떠오르자 허윤아의 감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고 잠이 오지 않아 아예 눈을 뜨고 차창 밖 풍경을 바라보았다.회성의 녹화 사업은 보통 수준이 아니었다. 아마 기후와 관련이 있는지 도로 양옆의 식물들이 울창하게 우거져 있었다.허윤아가 창밖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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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화 연약함의 미학

‘보상?’글자를 본 허윤아의 손가락이 화면 위에서 멈췄다.어떻게 답할지 생각하기도 전에 진려준이 다시 문자를 보냈다.[싫어?][무슨 보상을 원해?]진려준의 답장은 간결했다.[너.]그 답을 본 허윤아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보상, 너.’이 두 마디를 합치면 진려준이 무엇을 원하는지 바보라도 알 수 있었다.그녀라는 사람을 원하는 게 아니라 그녀와 자고 싶다는 뜻이었다.윤보라가 보고를 하다 말고 말이 없는 허윤아를 불렀다.“팀장님, 제 말 듣고 계세요?”허윤아가 고개를 들며 말했다.“계속해.”윤보라는 알겠다며 말을 이었다.“어제 숙소로 돌아와서 바로 자료 정리를 시작했어요. 중간에 배달 음식을 시켜서 배달 기사분이 1분 정도 들어온 것 말고는...”허윤아가 그녀의 말을 끊었다.“배달은 누가 받았어?”윤보라가 대답했다.“저요.”허윤아는 그녀를 보던 시선을 고건우에게로 옮겼다.고건우는 꽤 태연하게 허윤아와 눈을 맞추며 입을 열었다.“팀장님, 우리가 자료를 잃어버린 게 아닐 수도 있잖아요. 어제 인터뷰 현장에 사람도 많았고요.”윤보라는 단순하게 맞장구쳤다.“맞아요.”허윤아는 시선을 돌려 손에 쥔 휴대폰을 골칫덩이 보듯 바라보며 차분히 말했다.“어제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우리 빼곤 전부 진성 그룹 임원들이었어. 진려준의 불같은 수단은 다들 익히 알고 있잖아.”그들이 감히 그럴 배짱은 없을 거라는 암시였다.그러자 윤보라가 물었다.“문정현은요?”윤보라의 입에서 문정현 이름이 나오자 허윤아는 눈을 들어 다시금 고건우를 응시했다.이번에는 아까처럼 태연하지 못한 고건우가 움찔했다.허윤아가 옅게 웃었다.“건우 씨는 어떻게 생각해?”고건우는 입이 바짝 마르는지 입술을 축이며 억지웃음을 지어 보였다.“전 모르겠는데요.”허윤아가 말했다.“됐어. 둘 다 나가 봐. 이건 내가 알아서 처리할게.”윤보라가 걱정스러운 듯 불렀다.“팀장님...”허윤아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나가봐.”윤보라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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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화 위험한 순간

밤 10시 정각, 허윤아는 진려준의 방문을 두드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안쪽에서 나른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더니 곧 문이 열리고 갓 씻고 나온 진려준이 나타났다.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자 허윤아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그녀의 눈에 서린 경계심을 읽은 진려준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문틀에 기대 그녀를 내려다보았다.“왜? 내가 덮치기라도 할까 봐 겁나?”진려준이 비아냥거렸다.부탁하러 온 처지이면서도 매사 방어적인 태도가 참 그녀다웠다.허윤아가 시선을 들어 물었다.“진 대표가 그럴 사람인가?”진려준이 되물었다.“글쎄, 어떨 것 같아?”허윤아는 담담하게 대꾸했다.“그러려면 얼마나 저질이어야겠어.”진려준은 할 말을 잃었다.문 앞에서 벌어진 첫 대결은 진려준의 완패였다.거실로 들어온 진려준은 생수 한 병을 건네고는 소파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말해 봐, 인터뷰할 내용이 뭐야.”허윤아는 태블릿을 집어 들었다.“이목을 끌 만한 것부터 물어볼게요.”그래야만 이 인터뷰 기사가 퇴짜 맞지 않고 통과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거듭된 문제 발생 끝에 최종 기사마저 이목을 끌지 못한다면 TR 측에서는 그녀의 전문성을 의심할 게 뻔했다.진려준은 조소 섞인 미소를 띠며 물었다.“왜? 또 내 연애사라도 물어보려고?”허윤아는 대꾸 없이 자세를 바로잡았다.“비밀스러운 걸 좀 물을게요.”진려준이 입꼬리를 올렸다.“물어봐.”허윤아가 질문을 던졌다.“진성 그룹이 올해 부동산 시장에 진출한다는 소문이 있는데 사실인가요?”진려준의 눈빛이 순식간에 차가워졌으나 이내 나른하게 웃으며 소파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렸다.“아주 내 밑천까지 다 털어낼 작정이군.”허윤아도 이 질문이 금기라는 걸 알고 있었다. 회사마다 비밀이 있는 법이고 대외적으로 홍보하는 것들은 대개 가짜이거나 미끼일 뿐이었다.하지만 직업상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허윤아는 공적인 태도를 유지하며 사과했다.“진 대표님, 죄송합니다. 그럼 화제를 바꾸죠.”진려준은 눈썹을 치켜세우며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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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화 최후의 기회

허윤아는 진려준이 갑자기 키스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놀라움에 굳었다가 발버둥 쳤지만 결국 꼼짝없이 붙잡혀 그가 이끄는 대로 맡겨야 했다.키스가 끝나자 진려준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허윤아의 이마에 머리를 대고 그녀를 내려다보았다.허윤아의 눈가는 촉촉하게 젖어 있었고 눈꼬리는 정욕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내가 잘못했어.”진려준의 목소리는 낮고 그윽하게 깔렸다.허윤아는 그의 어깨를 밀어내느라 손가락을 잔뜩 웅크려 손끝이 그의 어깨 살을 파고들 정도였다.실랑이 끝에 그의 가운이 헐거워져 있었는데 그 모습이 나른하고 방탕해 보이면서도 묘하게 위험한 느낌을 풍겼다.허윤아가 말했다.“이거 놔.”허윤아의 말에 진려준은 거칠게 다뤄져 붉어진 그녀의 입술을 바라보며 뒷목을 쥔 손을 풀기는커녕 더 꽉 쥐고는 뻔뻔하게 말했다.“사과할게. 인터뷰해, 제대로 대답할 테니.”허윤아는 기가 막혀 가슴을 들썩였다.다음 순간 진려준의 시선이 그녀의 붉은 입술에서 아래로 내려갔다.그 시선을 느낀 허윤아는 숨이 턱 막혔다.허윤아의 몸이 굳은 것을 눈치챈 진려준은 눈을 들어 올리며 목덜미를 잡았던 손을 풀고 뒤로 기대앉아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인터뷰 계속할 거야?”“진려준, 난 네가 이렇게 뻔뻔한 줄 미처 몰랐어.”진려준은 대수롭지 않게 담배 케이스를 집어 들어 한 개비를 입에 물고는 불도 붙이지 않은 채 비아냥거렸다.“몰랐어? 생각보다 눈이 삐었네.”허윤아는 말문이 막혔다.묘한 기류 속에 두 사람은 십 분 넘게 대치 상태였지만 진려준은 그녀의 허리를 쥔 손을 절대 풀지 않았다.한참 뒤 허윤아가 심호흡을 하고 입을 열었다.“진성 그룹이 올해 부동산 쪽에 진출한다는 얘기가 있는데 사실이야?”진려준이 입꼬리를 비틀며 대답했다.“가짜야.”“그럼 올해 진성그룹의 계획은 뭐지?“뼈대 있는 가문들 회사 몇 곳을 합병할 생각이야.”그 말에 허윤아의 미간이 미세하게 구겨졌다.진려준이 묵직한 웃음소리를 냈다.“왜? 내 대답이 마음에 안 들어?”허윤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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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화 고요한 전쟁

심백현은 일부러 부채질하듯 말을 이었다.“지금 업계에 소문 쫙 퍼졌어. 너랑 허윤아가 아직 이혼 전인데 허윤아는 벌써 함진우랑 혼담이 오가고 있다는 거 말이야.”진려준은 혀끝으로 볼 안쪽을 툭 밀어냈다.“그래?”심백현이 의미심장하게 덧붙였다.“그런데 둘이 속도가 너무 빠른 거 아니야? 이거 혹시...”그 뒷말에 심백현은 묘한 여운을 남기며 상상력을 자극했다.진려준은 그게 무슨 뜻인지 단번에 알아차렸다.허윤아와 함진우가 진작부터 깊은 사이였다는 암시였다.“너 요즘 심심하냐?”진려준의 물음에 심백현이 장난스럽게 대답했다.“어. 나 요즘 저염식 한다고 좀 심심해.”다음 날.허윤아는 전날 새벽 3시까지 야근을 했음에도 아침 7시가 되자 생체 시계에 맞춰 눈을 떴다.하지만 밤을 새운 탓에 몸은 천근만근이었다.그녀는 씻으며 휴대폰으로 아이스 커피를 주문했다.씻고 나오니 마침 배달이 도착했고 그녀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커피를 마시며 노트북을 켜 인터뷰 초고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이상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창을 닫으려다 문득 생각난 듯 가방에서 USB를 꺼내 초고를 복사해 넣었다.그러고는 노트북에 있던 원본과 휴지통까지 깨끗이 비운 뒤, 바탕화면에는 대충 만든 폐기용 원고 하나를 올려두었다.모든 준비를 마친 그녀는 단톡방에 문자를 보냈다.[밥 먹으러 갈래?]윤보라와 고건우는 기다렸다는 듯 바로 답장했다.윤보라:[OK.]고건우:[네, 팀장님.]10분 후 호텔 1층 식당에서 만난 세 사람은 카드키로 조식 뷔페에 들어갔다.음식을 고르던 중 윤보라는 허윤아의 퀭한 눈가를 보며 안쓰럽게 물었다.“팀장님, 밤새우신 거죠?”“어.”허윤아는 덤덤하게 대답했다.그러자 윤보라는 속상해하며 말했다.“저도 어차피 늦게 잤는데 왜 혼자 다 하셨어요.”사실 그녀는 일이 잘못된 것 같아 죄책감 때문에 밤새 잠을 설쳤던 것이었다.허윤아는 그런 윤보라를 힐끗 보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그렇게 많은 양은 아니라서 안 불렀어.”“팀장님...”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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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화 부탁

진려준의 문자를 확인한 허윤아는 읽고 나서도 답장을 하지 않은 채, 검지 손가락으로 휴대폰 옆면을 쓸어 화면을 껐다.옆에 있던 윤보라는 허윤아의 작은 동작을 눈치채지 못하고 눈을 흘기며 낮게 투덜거렸다.“인터뷰 원고에 문제가 생긴 걸 알았으면 어제 왜 우리한테 연락을 안 했대요? 진 대표님이랑 그 정도로 가까운 사이면 뒷구멍으로 원고 하나 따내는 게 뭐 그리 어렵다고. 아주 거저먹으려고 작정을 했다니까.”식사를 마친 세 사람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로 올라갔다.허윤아는 손목시계를 훑어보고는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오후 3시 비행기로 예약할 건데, 두 사람 다 괜찮아?”윤보라가 활기차게 대답했다.“좋아요! 마침 오전엔 좀 돌아다닐 수 있겠네요.”고건우도 거들었다.“전 상관없습니다, 팀장님. 일정대로 따를게요.”“그래. 그럼 오후 세 시 비행기로 예약할게. 점심 12시에 호텔에서 출발해서 점심은 공항 가서 먹자.”스케줄이 정해지자 세 사람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각자 할 일을 하러 갔다.방으로 돌아온 허윤아는 곧장 최문석에게 전화를 걸었다.아침 회의가 끝나 최문석이 가장 한가할 시간을 딱 맞춘 전화였다.신호음이 몇 번 울리더니 전화가 연결되었고 최문석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허 팀장.”허윤아는 책상으로 다가가 아침에 마신 커피 컵을 쓰레기통에 던지며 말했다.“편집장님, 진 대표님 인터뷰 원고 해결했습니다.”최문석이 되물었다.“해결했다고?”“네.”허윤아가 짧게 긍정하자 최문석은 정말로 해결했을 줄은, 그것도 이렇게 빨리해낼 줄은 몰랐던 것인지 잠시 멈칫하다가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말했다.“잘됐군. 정말 잘됐어.”“돌아가서 편집 작업 끝내면 바로 보내드릴게요.”“그래그래.”최문석은 만족스러운 듯 허윤아에게 찬사를 쏟아냈다.하지만 허윤아는 그 말을 들으면서도 별 감흥이 없었다.사람을 다스리는 데 능한 상사들이란 대개 이런 식이다. 너무 우쭐해지지 않게 누르면서도 무시당한다는 기분은 들지 않게 만드는 법이니까.비판을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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