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류상 계약, 실물은 불장난의 모든 챕터: 챕터 11 - 챕터 20

30 챕터

제11화 자업자득

문정현의 목소리는 나긋나긋해서 이게 진심인지 떠보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사실 진심이든 아니든 상관없었다. 허윤아는 갈 마음이 요만큼도 없었으니까.허윤아는 돌아보지도 않고 닫힌 문을 향해 입을 열었다.“나 저녁에 선약 있어.”문정현은 무척이나 서운하다는 듯 탄식했다.“아, 그래?”허윤아는 건조하게 대답했다.“어.”허윤아는 직장 동료와 사적으로 친목질하는 취향이 아니었으니 그 상대가 전남편의 첫사랑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었다.엘리베이터에서 내려 허윤아는 문정현을 그녀의 자리로 안내한 뒤 자기 사무실로 향했다.막 두세 걸음 갔을까, 문정현이 따라와 휴대폰을 내밀었다.“윤아야, 우리 톡 친구 맺자. 업무상 연락하기도 편하잖아.”업무 얘기가 나오자 허윤아는 거절하지 않고 휴대폰을 꺼내 문정현이 QR 코드를 스캔하게 했다.친구 추가가 완료되자 허윤아는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섰고 문정현은 그녀의 SNS에 들어가 뒤져봤지만 휑하니 아무것도 없었다.문정현의 눈빛이 묘해지던 순간 다른 직원들이 와서 인사를 하자 그녀는 즉시 눈꼬리를 휘며 세상 다정하게 웃어 보였다.주간지 매체인 TR 내에서도 취재팀 사람들은 정보력이 남다르고 귀가 밝았다.짧은 오후 시간 동안 문정현의 신상과 배경은 낱낱이 파헤쳐졌다.송운시 문씨 가문의 가장 사랑받지 못하는 막내딸이자 진려준의 첫사랑이었다.누군가는 팔자 좋다고 부러워했고 누군가는 진려준 빽으로 들어왔다며 깔보았다.퇴근 무렵, 허윤아가 마지막 인터뷰 초고를 정리하고 있는데 윤보라가 울상을 하고 밖에서 들어왔다.소리에 고개를 든 허윤아에게 윤보라는 책상에 두 손을 짚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팀장님, 저 문정현이란 여자 진짜 역대급 내숭 덩어리예요.”허윤아는 문정현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뒤에서 험담하고 싶지도 않아 눈을 들어 웃으며 물었다.“오늘 할 일은 다 했어?”윤보라가 대답했다.“다 했죠.”말을 마친 윤보라는 눈치 없이 허윤아가 화제를 돌리려 한다는 것도 모른 채 계속 말했다.“그 여자, 자기가 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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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그와 그녀

사람이 꽃보다 예쁘다는 말은 아마 문정현 같은 여자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문정현에 비하면 허윤아는 바위 같은 여자였다.그것도 모스 경도 10, 수정 모스 경도 15의 다이아몬드 같은 단단한 돌말이다.허윤아가 두 사람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곁에서 한세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헐, 여기서도 마주치냐?”허윤아가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한세연이 코웃음을 쳤다. “오늘 내가 잠이 덜 깼나, 여우가 둔갑한 꼴을 다 보고.”말을 마친 한세연은 허윤아에게 턱짓하며 물었다.“쟤네 뭐 하냐? 옛 추억이라도 되새기는 중?”허윤아는 꼬치에 꽂힌 고기를 젓가락으로 접시에 빼내며 웃었다.“그렇게 궁금하면 가서 물어보든가.”한세연이 입꼬리를 삐딱하게 올렸다.“내가 못 해서 안 하냐? 저 쌍년 놈들이 나 보고 쪽팔려 죽을까 봐 봐주는 거지.”한세연은 허윤아가 진심으로 진려준을 좋아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이유는 몰라도 그냥 가벼운 맘은 아니었다.한세연은 깊이 묻고 싶지 않았고 지난 일을 꺼내 그녀를 힘들게 하고 싶지도 않아 짐짓 아무렇지 않게 화제를 돌렸다.“네 엄마, 흠흠, 말실수, 허 여사 쪽은 상황이 어때?”허윤아는 고기를 다 빼낸 접시를 한세연에게 건네주고 그녀 앞의 빈 접시를 가져와 다시 고기를 빼며 대답했다.“소송하고 난리도 아니야.”한세연이 물었다.“너 회사 복귀하라는 말은 없었어?”허윤아가 답했다.“했는데, 내가 거절했어.”한세연은 허윤아 편을 들었다.“잘했어. 내 입으로 말하긴 좀 그렇지만, 너희 집안 사람들 다 진짜 별종이야.”허윤아는 말없이 웃으며 손을 들어 종업원을 부른 뒤 맥주를 소주로 바꿨다.한세연이 놀란 눈으로 그녀를 쳐다봤다.허윤아는 그녀에게 안주를 한 젓가락 집어주며 말했다.“나 내일 휴가야.”한세연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종업원을 불러 자신의 술도 바꿔 달라고 했다.“그럼 오늘 내가 끝까지 달려준다.”두 사람 모두 주량이 꽤 센 편이라 마시면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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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더 이상 뛰지 않는 심장

사람들의 놀림에도 진려준은 나른하고 거만한 자세로 뒤로 기대앉아 가늘고 긴 눈을 반쯤 뜬 채 즐기는 듯 여유로워 보였다.허윤아는 영상 속 인물을 보며 입술을 꾹 다물더니 손을 뻗어 영상을 꺼버렸다.그 모습을 본 한세연이 몸을 그녀 쪽으로 기울이며 물었다.“이제 미련 없지?”“어.”“다리 세 개 달린 두꺼비는 찾기 힘들어도 다리 세 개 달린 남자는 널리고 널렸어.”허윤아는 오늘 밤 독한 술을 꽤 마신 탓에 집에 돌아가자마자 깊이 잠들었다.동틀 무렵이 되어서 그녀는 어수선한 꿈을 꾸었다.꿈은 열일곱 살 생일날이었다. 꿈속 풍경은 극과 극으로 갈렸다.한 장면은 허씨 가문 거실에서 그녀가 공주님 대접을 받는 것이었다. 허정임과 조형준은 그녀의 손을 이끌고 하객들에게 일일이 소개했는데, 그 표정은 마치 그녀를 금지옥엽 보물처럼 여기는 듯했다.다른 한 장면은 손님들이 흩어지자마자 허정임이 그녀의 이마를 쿡쿡 찌르며 혼내는 것이었다.“누가 케이크를 그렇게 많이 처먹으래? 그 안에 칼로리가 얼마나 되는 줄 알아? 단것 먹으면 살찌고 피부 상하는 거 몰라? 네 본분이 뭔지 잊었어?”허정임의 질책에 허윤아는 입을 꾹 다물고 침묵했다.조형준이 싸움을 말리려 들자 허정임은 그에게 화살을 돌렸다.“처음부터 사내놈을 데려오자니까 굳이 계집애를 데려와서는, 뭐 여자애는 정략결혼 시키면 된다더니...”꿈은 여기서부터 뒤죽박죽 엉켰다.이어진 장면은 지하실에 갇힌 모습이었다.조형준이 창문으로 국수를 건넸는데 눈빛이 소름 끼치게 계산적이었다.그녀는 그 국수에 손도 대지 못하고 3일을 꼬박 굶다가 결국 쓰러져 가정부에게 업혀 나왔다.꿈속의 숨 막히는 고통은 알람 소리 덕분에 끝이 났다.허윤아는 깊게 숨을 들이켜며 눈을 떴다. 울진 않았지만 침대 위에 놓인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오늘은 쉬는 날이라 일찍 일어날 이유가 없었지만 잠이 깨버려 다시 잠들 수가 없었다.허윤아는 일어나 샤워를 하고 내려와 아침을 먹었다.막 두 숟갈 떴을 때 최문석의 전화가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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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정면 승부

윤보라와 고건우에 비해 허윤아는 진려준과 문정현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그녀는 어젯밤 너무 일찍 잠드는 바람에 함진우에게 문자 보내는 걸 깜빡했던 터라, 지금 틈을 타서 슬쩍 의중을 떠보기로 했다.[일어났어?]함진우는 즉시 답장을 보냈는데, 글자가 아니라 사진 한 장이었다.식탁 앞에 앉아 조간신문을 보고 있는 사진이었다.[웬일이야, 이렇게 일찍 일어나고.]두 사람은 고등학교 때 꽤 친했고 졸업 후에도 왕래가 있었지만 허윤아가 결혼한 뒤 오해를 피하기 위해 연락을 끊었던 사이라 대화에 거리낌이 없었다.허윤아의 문자가 전송되자 함진우에게서 답이 왔다.[용건 없이 연락할 사람 아니잖아. 본론만 말해.][나 이혼했어.]허윤아가 문자를 보내자 함진우 쪽 대화창에는 계속해서 입력 중 표시만 떴다.한참 뒤에야 썼다 지우기를 반복한 끝에 딱 세 글자의 답장이 왔다.[기운 내.][??][슬퍼도 말고 기죽지도 마. 구관이 명관이라지만 다음 놈이 더 좋을 거다.][나 곧 비행기 타야 해서 너랑 농담 따먹기 할 시간 없어. 본론만 말할게. 나 너랑 정략결혼 하고 싶어.][아니, 누님. 내가 위로해 줬더니 은혜를 원수로 갚아?]그때 마침 공항에서 회성행 탑승 안내방송이 나왔고 허윤아는 화면을 가볍게 두드려 답했다.[어차피 해야 할 정략결혼인데 서로 속사정 뻔히 아는 사이끼리 하는 게 낫잖아. 생각해 봐.]함진우의 답장은 기다리지도 않고 허윤아는 휴대폰을 집어넣으며 윤보라와 고건우를 불렀다.“가자.”윤보라가 싹싹하게 손을 뻗어 허윤아의 캐리어를 잡았다.“팀장님, 제가 들게요.”허윤아는 웃으며 손으로 그녀를 막았다. “괜찮아, 내가 해도 돼.”세 사람은 일반 검색대로 향했고 문정현은 진려준 덕분에 VIP 통로로 들어갔다.일부러 그러는 건지 우연인지 문정현은 틈만 나면 허윤아 쪽을 힐끔거렸고 윤보라가 쳐다볼 때면 보란 듯이 진려준의 넥타이를 매만지며 친밀함을 과시했다.윤보라는 그 꼴을 보고 눈을 까뒤집으며 중얼거렸다.“서림이 무슨 첩첩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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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연약한 그녀

다른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면 일부러 상대를 곤란하게 하려는 의도로 비쳤을 것이다. 하지만 허윤아의 입에서 나오니 그저 사실을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게다가 그녀의 태연한 표정까지 더해지니 다른 꿍꿍이가 있을 거라 의심하기 어려웠다.허윤아의 말이 끝나자 문정현의 미소가 살짝 굳어졌지만, 억지로 버티며 표정을 유지했다.“알았어, 그럼 난 먼저 가볼게. 려준이가 나 안 보이면 찾을지도 모르니까.”허윤아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문정현은 목소리를 아주 낮게 깔고 말해서 복도 건너편에 앉은 윤보라와 고건우는 듣지 못했다. 고건우야 워낙 남의 일에 관심이 없어 괜찮았지만 윤보라는 달랐다. 호기심 때문이라기보다 이유 없이 문정현이 꼴 보기 싫어서였다. 윤보라는 허윤아 쪽으로 목을 길게 빼고 속삭였다.“팀장님, 문정현이 무슨 말 했어요?”허윤아는 고개를 돌려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이번 인터뷰 쟤랑 같이 진행하기로 했어.”윤보라의 안색이 싹 바뀌었다.“숟가락 얹으려는 거네요?”허윤아는 말없이 손목의 다이아 시계를 매만지다 고개를 들더니,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승무원에게 담요를 부탁했다.지난밤 잠을 설친 허윤아는 비행기가 뜨자마자 곯아떨어졌다.대답 없는 허윤아를 보며 윤보라는 입을 삐죽대며 제자리로 돌아와 고건우에게 툴툴댔다“팀장님은 어떻게 저렇게 태평하지?”고건우는 그 말을 듣고 허윤아를 힐끗 보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저게 바로 고수의 포스지, 흔들리지 않는 거.”허윤아는 침착했지만 다른 한 사람은 그렇지 못했다.문정현은 일등석으로 돌아온 뒤 얼굴이 창백해지고 눈시울이 붉어진 채, 안전벨트를 매는 손마저 떨고 있었다.이를 본 진려준이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왜 그래?”문정현은 안전벨트를 다 매고는 가녀리고 겁먹은 듯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아니야.”그녀가 말하지 않자 진려준도 더 묻지 않았다.진려준이 눈을 감고 잠시 쉬려는데, 문정현이 입술을 깨물며 마치 큰 수모라도 겪은 듯한 말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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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화 예측할 수 없는 행보

진려준이 뭐라고 대답했는지 허윤아는 듣지 않았다.듣지 않으려고 오히려 발걸음을 재촉했다.예의에 어긋나는 것은 듣지 말아야 하고 듣지 않으면 헛된 생각도 하지 않게 된다.그녀는 이성적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슬프지 않은 건 아니었다.어쨌든 오랫동안 짝사랑해 온 남자였기에 마음을 끊어내는 건 몸을 빼내는 것보다 훨씬 어려웠기 때문이다.공항을 빠져나온 허윤아는 윤보라와 고건우를 데리고 택시를 잡아 호텔로 향했다.가는 길에 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한세연에게 잘 도착했다고 연락하려 했다.그런데 폰을 켜자마자 김미선의 전화가 먼저 걸려 왔다.허윤아는 발신자 이름을 보고 잠시 망설이다가 화면을 밀어 전화를 받았다.“어머니.”김미선은 전화기 너머로 화가 난 듯 씩씩거리며 허윤아에게 물었다.“그 문정현이란 애 돌아왔다며?”김미선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허윤아는 몇 초간 멍해졌다.뒤에서 고자질하는 것처럼 보일까 봐 섣불리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었다.그녀가 대답이 없자 김미선 쪽도 말이 없었다.몇 초 뒤, 숨을 고른 김미선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윤아야, 걱정하지 마라. 내가 있는 한 아무도 널 괴롭히지 못할 거야.”허윤아는 짧게 답했다.“네.”김미선이 덧붙였다.“려준이 걔도 마찬가지고.”허윤아는 마음이 따뜻해졌다.“감사해요, 어머니.”김미선은 수화기 너머로 한숨을 내쉬었다.“너란 애는 정말 애교를 모른다니까. 참는 자에게 복이 온다지만, 우는 아이 떡 하나 더 준다는 말도 사실이란다.”허윤아는 그 말에 온화하게 웃었다.“어머니, 그건 제 성격에 안 맞아요.”허윤아가 담담하게 말하자 김미선은 안타까워하면서도 차마 모진 말은 못 하고 결국 모든 원망을 진려준에게 돌렸다.따지고 보면 다 자기 아들 탓이니까.허윤아가 개입하고 싶어 하지 않자 김미선이 말했다.“이 일은 넌 신경 쓰지 마라. 내가 처리하마.”허윤아는 이미 이혼했다는 말을 차마 할 수 없어 에둘러 말했다.“어머니, 저 사실 화 안 났어요.”허윤아가 화나지 않는다고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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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화 거짓 연기

허윤아는 문정현에게 시선을 몇 초 뒀다가 이내 거두었다.자신과 상관없는 일에는 원래 관심이 없었으니까.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그녀는 시선을 거두고 엘리베이터 안으로 발을 옮겼다.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마자 윤보라는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본 듯한 표정으로 눈을 까뒤집었다.“내 평생 저런 내숭 덩어리는 처음 봐요.”허윤아는 담담하게 말했다.“진성 그룹 회성 공장은 우리가 잘 모르는 곳이야. 사전 조사 철저히 해.”업무 얘기가 나오자 윤보라는 즉시 정신을 차리고 뒷담화를 멈췄다.“알겠습니다.”인터뷰는 다음 날로 잡혀 있었고 그날 밤 허윤아는 꼬박 밤을 새웠다.진성 그룹 회성 공장의 현재 상황은 물론이고 그 역사까지 훑었다.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진려준은 사업에 있어서만큼은 냉철하고 비상한 재주가 있었다.수많은 생활용품이 난립하고 해외 고급 브랜드가 시장의 90%를 장악한 요즘 같은 때에, 국내 화장품 브랜드를 성공적으로 론칭한 것도 모자라 고급화 전략으로 호평까지 받다니. 이런 재주는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게 아니었다.사전 조사를 끝낸 허윤아는 샤워를 하고 침대에 몸을 뉘었다.막 누워서 침대 등도 끄지 못했는데 옆에 둔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인상을 쓰며 휴대폰을 확인하니 누군가 그녀를 단체 채팅방에 초대한 상태였다.방안은 축제 분위기였는데 쓱 훑어보니 죄다 아는 얼굴들이었다.그녀의 지인이 아닌, 진려준의 지인들이었다.[려준 형이 정현 누나 데리고 출장 갔다며?][이게 출장이냐? 형이 급해서 데려간 거지.][내가 듣기론 이번에 정현 누나 회성 간 거, 려준 형이 판 짠 거라던데.]이걸 보고 허윤아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아, 그러니까 문정현은 그 사람이 준비한 카드였구나.’허윤아가 잠시 멍하니 있는 사이, 단톡방에서는 누군가가 스캔들의 주인공들을 태그하기 시작했다.[@진려준 @문정현]허윤아가 정신을 차렸을 때 문정현은 이미 채팅방에 나타나 있었다.[너희들 그만해.] 그만하라는 그 한마디가 오히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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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화 완벽한 커플

심백현의 문자를 본 진려준은 의아해하며 단톡방에 들어갔다.사람들이 바람을 잡고 문정현이 내숭을 떠는 대화를 본 그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더니, 별일 아니라는 듯 피식 웃고는 휴대폰을 아무렇게나 던져두었다.다음 날, 인터뷰는 9시 반이었다.허윤아는 일찍 일어나 씻고 아침을 먹으며 어젯밤 조사한 자료를 윤보라와 고건우에게 공유했다.두 사람은 귀를 쫑긋 세우고 경청했다.9시 반 정각, 세 사람은 공장 현장에 도착했다.인터뷰 전 허윤아는 먼저 진려준의 비서 주세윤에게 연락했다.현장 취재는 겉보기에 쉬워 보여도 외부인인 그들이 자칫 실수하면 기업 비밀을 노출할 수 있어 까다로운 작업이었다.허윤아는 질문지를 주세윤과 검토하고 촬영 가능 구역을 확인했다.확인을 마친 허윤아는 시계를 보고 문정현을 찾았다.위에서 시킨 일이니 형식적인 절차는 밟아야 했기 때문이다.주위를 둘러보던 그녀는 구석에 있는 문정현을 발견했는데, 그녀 곁에는 진려준도 있었다.무슨 얘기를 하는지 문정현은 교태롭게 웃으며 몸을 밀착했고 진려준은 몸을 숙여 들어주고 있었다. 옆에서 보니 키 큰 남자와 아담한 여자가 그림처럼 잘 어울렸다.허윤아의 시선을 눈치챈 주세윤이 난처한 듯 코를 만지작거리며 해명하려 했다.“사모님, 진 대표님은...”허윤아는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알기에 담담하게 말을 자랐다.“주 비서님, 잠시만요.”말을 마친 그녀는 대답도 듣지 않고 하이힐 소리를 내며 자리를 떴다.연인들의 대화를 방해할 만큼 눈치 없진 않았지만 일은 해야 했기에, 그녀는 몇 걸음 걸어가 문정현에게 문자를 보냈다.[인터뷰할 거야?]문정현은 문자를 받고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우더니 고개를 돌려 입술을 다문 채 그녀를 힐끗 보고는 답장을 보냈다.[윤아야, 나 복귀한 지 얼마 안 돼서 실수할까 봐 그런데, 이번 인터뷰 네가 맡아주면 안 될까?][그래.]인터뷰가 시작되자 허윤아는 진려준 뒤를 그림자처럼 따랐다.공장 시찰이 절반쯤 지났을 때, 진려준과 임원들의 대화가 잦아드는 것을 보고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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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화 여보

진 교수, 허윤아의 은사님으로 성함은 진덕원이었다.허윤아의 은사이기도 했지만, 진려준과 문정현의 은사이기도 했다.다른 점이 있다면, 허윤아는 모종의 이유로 진 교수 댁에서 한동안 얹혀산 적이 있어 스승의 은혜 외에도 남다른 은혜를 입었다는 것이었다.계산속이 뻔히 보이는 문정현의 눈을 보며 허윤아는 담담하게 말했다.“주소 찍어줘.”문정현이 물었다.“같이 안 가게?”“난 택시 타고 갈게.”문정현은 아쉬운 척했지만 문자를 보낼 때 눈빛은 음흉하게 번뜩였다.“그래.”그러고는 허윤아가 안 갈까 봐 고개를 들어 쐐기를 박았다.“교수님이 너 많이 보고 싶어 하시더라, 사모님도 그렇고.”휴대폰 알림음이 울리고 허윤아는 문자를 확인했다.“고마워.”문정현에게 감사를 표한 뒤, 허윤아는 윤보라와 고건우에게 먼저 호텔로 가서 자료를 정리하라고 일러두었다.문정현은 훤칠한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김이 샜는지 대충 인사하고 공장 안으로 들어갔다.문정현이 멀어지자 윤보라가 입술을 삐죽거리며 말했다.“팀장님, 진짜 가시게요?”허윤아는 옅게 웃으며 말했다.“응, 진 교수님은 내 은사님이셔.”“그런데 왠지 저 여자 꿍꿍이가 있는 것 같아요.”허윤아는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호텔 가서 자료 정리 잘하고, 문제 생기면 바로 연락해.”“네.”윤보라와 고건우를 보낸 뒤, 허윤아는 택시를 잡아 문정현이 보내준 주소로 향했다.가는 길에 허윤아는 한세연에게 전화를 걸었다.허윤아가 진 교수님을 뵈러 가는데, 그것도 진려준, 문정현과 같이 간다는 사실을 알게 된 한세연은 콧방귀를 뀌었다.“족제비가 닭한테 세배한다더니, 속셈이 뻔하네.”허윤아는 한 손으로 전화기를 들고 다른 손으로 차창 유리를 쓸며 말했다.“나도 알고 있어.”문정현의 얄팍한 속셈 따위 그녀 눈에는 훤히 보였다.한세연은 기가 막히면서도 웃음이 나와 말했다.“뻔히 알면서 거길 간다고?”허윤아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걔가 무슨 짓을 하는지 보고 싶어서가 아니라, 선생님 내외분이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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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화 짝사랑의 흔적

진려준의 그 ‘여보' 소리는 꽤나 묘한 뉘앙스를 풍겼다.허윤아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그는 그녀의 팔을 잡고 몸을 숙여 귓가에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교수님 내외분은 아직 우리 이혼한 거 모르셔.”허윤아의 팔이 살짝 굳었다.그녀는 미처 그 사실을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이내 진려준의 얇은 입술이 닿을 듯 말 듯 그녀의 귓불을 스쳤다.허윤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숨을 멈췄다.진려준이 비웃듯 말했다.“왜 긴장해? 찔리는 거라도 있어?”두 사람이 목소리를 낮춰 이야기하는 모습을 멀리서 본 진덕원은 부부가 은밀한 대화를 나누는 줄 알고 아내를 불렀다.“애들 신발 갈아 신는데 거기 서서 뭐 해? 주방에 아직 생선 요리 안 한 거 있잖아.”임수연은 그제야 상황을 파악하고 입을 가리며 웃었다.“가요, 가. 내가 우리 윤아가 보고 싶어서 그러죠.”진덕원이 일부러 짐짓 꾸짖었다.“보고 싶긴 뭐가? 걔도 이제 곧 서른이야. 제 몸 하나 못 챙길까 봐 그래?”그러자 임수연이 대꾸했다.“그래도 애가 살이 쏙 빠졌잖아요.”임수연이 사라지자마자 허윤아는 진려준의 손아귀에서 팔을 홱 빼냈다.살결이 스치며 진려준의 손바닥에 매끄러운 감촉을 남겼다.그는 손가락을 비비며 양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허윤아는 슬리퍼를 신고 진려준을 스쳐 지나갔다. 보는 눈이 없으니 그녀는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거실로 가서 진덕원에게 인사한 뒤, 예전에 선생님 댁에 살 때처럼 자연스럽게 주방으로 가 임수연을 도우려 했다.그녀가 들어오자 임수연은 황급히 손으로 그녀를 밀어냈다.“기름 냄새 배는데 넌 나가 있어. 가서 선생님 말동무나 해드려. 그 정장 비쌀 텐데 냄새 배면 어쩌려고.”허윤아는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퇴근했는데요 뭐, 괜찮아요.”그렇게 말하며 허윤아는 임수연의 손에서 국자를 넘겨받았다.허윤아의 요리 솜씨가 좋은 걸 아는 임수연은 그녀가 굳이 하겠다고 하자 더는 말리지 않았다. 더 사양하면 오히려 거리감이 느껴질 테니까. 그녀는 웃으며 옆에 있던 앞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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