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키워온 장미를 숙적에게 빼앗긴 밤: Chapter 121 - Chapter 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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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1화

조진규는 말한 적이 있었다. HJ그룹의 문은 언제나 해인을 향해 열려 있을 거라고. 어제 인터넷에서 벌어진 일은 이미 다들 알고 있었다.새 회사에 들어간 첫날부터 그렇게 큰 사고를 냈으니, 와세라 쪽에서도 이제 해인을 받아주기 어려울 터였다.대기업 채용에는 평판 조회가 따라붙는다. 이번 일 때문에 해인이 앞으로 직장 생활을 이어가려 해도 훨씬 버거워질 게 분명했다.그래서 신승빈은 해인이 HJ그룹으로 돌아와 일하는 게 지금으로서는 가장 나은 선택이라고 여겼다.조진규도 같은 생각이었다.신승빈에게서 메시지를 받은 조진규는 곧장 이쪽으로 달려왔다. 해인이 정말 개발팀에 있는 걸 확인한 조진규는 느닷없이 허리를 곧게 세웠다.조진규는 이유도 없이 속이 후련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그동안 해인에게서 받았던 답답함을 이제야 풀 구실을 찾은 듯했다.조진규는 턱을 살짝 치켜들고 사장다운 태도를 갖췄다.“와세라 같은 대기업은 속고 속이는 일이 많아. 사회에 나온 지 얼마 안 된 강 대리 같은 신입한테는 애초에 맞지 않았어.”“내가 어른으로서 진작 말해줬잖아. 그런데도 꼭 벽에 부딪혀봐야 돌아설 줄 알았으니, 나도 어쩔 수 없었지.”“그래도 나는 그렇게 뒤끝 있는 사람은 아니야. 강 대리가 다시 돌아올 기회 정도는 줄 수 있어.”“앞으로는 일이나 제대로 해. 괜히 눈만 높고 손은 못 따라가는 짓은 하지 말고.”“아, 예전에 강 대리가 맡았던 프로젝트는 이미 다른 사람한테 넘겼어. 서 대리가 꽤 잘하고 있긴 한데, 강 대리가 돌아왔으니까 다시 넘기라고 할게.”그 말을 듣고 있던 해인의 입에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해인은 고개를 들었다. 조진규처럼 큰소리를 치는 사람 앞에서도 기세가 전혀 밀리지 않았다.“저 일하러 돌아온 거 아닌데요.”그 한마디에 조진규는 어리둥절한 낯이 됐다.“그럼 강 대리는 왜...”해인은 조진규를 더는 거들떠보지 않았다.해인의 시선이 사무실을 한 바퀴 훑었다. 그러다 예주의 자리에서 멈췄다.비어 있었다.해인은 아무 말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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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2화

예주는 웃으며 말했다.“해인 언니, HJ그룹으로 다시 출근하시려고요? 너무 잘됐어요. 우리 다시 같이 회사 다니게 됐네요.”그러면서 예주는 해인의 손을 잡으려고 했다.해인의 눈빛이 더 싸늘해졌다.해인은 그 손길을 피하지도 않은 채 그대로 예주의 뺨을 갈겼다.너무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예주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방금 탄 커피가 손에서 미끄러지면서 전부 쏟아졌고, 뜨거운 액체가 손등을 붉게 데웠다. 아픔을 못 이긴 예주가 짧게 비명을 질렀다.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이쪽을 돌아봤다. 구경거리가 생겼다는 듯 시선이 모여들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주위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눈시울을 붉힌 예주는 서러운 기색을 가득 담은 채 입을 열었다.“제가 어디서 언니 기분을 상하게 했다고, 저를 때리세요?”하슬은 차마 보고만 있을 수 없어서 앞으로 나서더니 두 사람 사이를 단숨에 갈라놓았다.“왜 하 대리님한테 손을 대세요!”“왜 그랬는지 정말 몰라요?”해인은 차갑게 하슬을 훑어봤다.“저 이미 변호사 선임했어요. 민하슬 씨, 소장 못 받으셨어요?”하슬은 멈칫했다. 당황이 스치고 지나갔다.“무슨 말씀이세요?”조금 전, 하슬은 등기우편 하나를 받았지만 아직 뜯어보지는 못했다.“허위사실로 제 명예 훼손한 거, 소송 가면 결과 뻔하지 않나요?”해인은 말과 함께 증거를 내밀었다. 온라인 계정 등록 자료가 실명으로 되어 있었다. 그 위에는 분명 하슬의 신상 정보가 찍혀 있었다.하슬은 순간 할말을 잃었다. 해인이 느닷없이 자신의 계정 등록 자료까지 찾아낼 줄은 상상도 못 했다.그래도 하슬은 이를 악물고 받아쳤다.“강해인 씨, 제 개인정보를 멋대로 뒤져본 거잖아요. 그건 제 사생활 침해예요!”하슬은 그 부분도 따로 알아본 적이 있었다. 그런 자료는 웬만해서는 쉽게 새어 나가지 않는다고 했다.하지만 하슬이 알 리 없었다. 평범한 사람에게는 어려운 일이 맞아도 최상위 재벌가에는 돈만 쓰면 정리되는 일이라는 걸.“맞아요, 제가 올렸어요. 그런데 그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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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3화

부모라면 아마도 한 번쯤 아이에게 그런 말을 한다. ‘네가 어릴 때 아빠 엄마가 다리 밑에서 주워 왔다’는 그 말.하지만 양부모는 해인에게 단 한 번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나중이 되어서야 해인은 알게 됐다. 양부모는 해인이 그 말을 진짜로 믿어서 또 한 번 상처를 입을까 봐 두려워했다는 사실을.주여진이 재혼한 뒤, 넓은 집에는 해인만 홀로 남았다.고작 16살이었다. 해인은 보통 사람이라면 평생 벌어도 만지기 힘든 막대한 유산을 손에 넣었다.하지만 해인의 세상은 산산이 무너져 내린 뒤였다.어린 해인은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해인에게 선택권이 있었다면 그 돈은 다 없어도 괜찮았다. 그 대신 아버지와 오빠가 무사히 살아 있기만을 바랐다.가족이 건강하게 곁에 있는 것보다 더 소중한 건 없었다.16살 소녀가 YD그룹 같은 거대한 짐을 떠받칠 수 있을 리 없었다.해인은 그저 구석에 몸을 웅크린 채 주저앉아 있었다.변호사가 유산 관련 절차를 전부 마무리한 날, 해인이 집에서 손목을 그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다만 죽지는 못했다.자기가 해인의 친모라고 주장하는 여자가 해인을 찾아왔기 때문이었다.도수희는 그때 해인을 버린 데는 사정이 있었다고 말했다.이제는 중병까지 얻어 오래 살지 못한다며, 마지막 소원은 해인과 모녀로 다시 만나는 것뿐이라고 했다.해인은 망설이지 않고 거절했다.해인은 강씨 가문 사람들의 보살핌 속에서 자랐다. 그러니 해인이 가족으로 인정하는 사람도 당연히 강씨 가문 사람들뿐이었다.생물학적 어머니라는 도수희에게는 애초부터 아무 감정도 없었다.온라인에 퍼진 폭로는 하슬이 한 짓이 맞았다. 그래도 해인은 하슬 뒤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해인과 도수희의 관계를 아는 사람은 강씨 가문과 고씨 가문 사람들을 빼면 예주밖에 없었기 때문이다.대학교 시절, 도수희가 학교까지 한 번 찾아온 적이 있었다.그때 도수희를 해인의 기숙사까지 데려온 사람도 예주였다.물론 예주는 그 비밀을 누구에게도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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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4화

오늘의 해인은 평소와 너무 달랐다.해인은 곁눈질로 시간을 확인했다. 계산해 보니 슬슬 도착할 때가 됐다.‘이제 올 때가 됐는데.’해인은 속으로 잠시 생각했다.과연 몇 분 지나지 않아, 쉰을 조금 넘겨 보이는 중년 남자가 사무실로 들어왔다.남자 뒤에는 또 다른 중년 남자가 따라왔다. 그 남자는 다리를 약간 절고 있어서, 걸을 때마다 몸이 좌우로 흔들렸다.두 사람 모두 햇볕에 오래 그을린 듯 피부가 거무스름했고, 키도 크지 않았다. 입고 있는 옷차림도 평범하다 못해 낡아 보였고, 어딘가 지저분한 기운까지 풍겼다.발에는 낡은 회색빛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바닥을 디딜 때마다 흙 묻은 발자국이 찍혔다.고급스러운 분위기의 오피스 빌딩 안에서 두 사람은 완전히 어울리지 않는 존재였다.두 사람의 모습이 워낙 튀어 보였던 탓에 곧 사람들은 두 사람을 발견했다.사람들의 시선이 하나둘 쏠렸다. 눈길에는 노골적인 경계와 불쾌함이 담겨 있었다. 이런 사람들이 왜 회사 건물 안까지 들어왔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기색이었다.누군가 물었다.“누구 찾으세요?”앞에 서 있던 남자가 사투리가 섞인 말투로 말했다.“하예주 어디 있노?”말이 끝나자마자, 사람들의 시선이 동시에 예주에게 쏠렸다.누군가 장난스럽게 덧붙였다.“하 대리님, 혹시 친척이에요?”두 남자를 본 예주의 눈에 공포가 스쳐 지나갔다. 예주는 본능적으로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돌아서서 도망치려고 했다.하지만 앞에 있던 남자가 빠르게 걸음을 옮겨 예주를 따라잡았다. 남자는 뒤에서 예주의 팔꿈치를 붙잡았다.“예주야? 큰아빠도 못 알아보겠나?”사무실 안의 모든 사람들이 그 장면을 멍하니 바라봤다.예주 옆에 서 있던 하슬은 완전히 굳어버렸다.‘큰아빠?’‘저렇게 지저분한 차림의 남자가... 하 대리 큰아빠라고?’‘하 대리는 재벌가 딸이라더니... 저렇게 가난한 친척도 있는 거야?’남자는 인상을 찌푸리며 예주를 노려봤다. 원래도 피부가 어두운 편이었는데, 표정까지 굳어지자 더 거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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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5화

예주에게 인생에서 가장 무너져 내린 날이 언제였냐고 물어본다면 오늘은 반드시 손에 꼽을 날이었다.절뚝거리는 남자가 그 말을 내뱉는 동안, 사무실 사람들 시선이 자신에게 어떻게 꽂히는지 예주는 너무도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경멸과 충격이 뒤섞인 눈빛이었다.예주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렸다. 말 그대로 하늘이 그대로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었다.해인은 한쪽에 선 채 차갑게 그 광경을 지켜봤다.예주가 선을 넘지만 않았다면, 친구였던 시간까지 모두 부정할 생각은 해인에게도 없었다. 예주가 자신의 남자를 빼앗은 일쯤은 참을 수 있었다. 남이 빼앗을 남자라면 해인이 애초에 붙잡고 있을 이유도 없었다.하지만 예주가 해인의 약점을 손에 쥔 채, 이미 벌어진 상처를 다시 찢어 놓았다. 해인이 얼마나 아픈지 알면서도 사람들 모두가 상처에 소금을 뿌리게 만든 일만큼은 참을 수가 없었다.이 모든 일은 예주가 스스로 불러온 결과였다.해인은 무너져 바닥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린 예주를 싸늘한 눈으로 내려다봤다. 그런데도 예주에게 다가가 위로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주변에서는 손가락질과 수군거림이 끊이지 않았다.그동안 예주가 스스로 만들어온 재벌가 아가씨라는 허울이 화려하면 화려할수록, 지금 예주가 나락으로 떨어진 모습만 더 처참해 보였다.하슬조차 예주의 가난한 친척 둘을 보고 난 뒤에는 예주에게서 한참이나 떨어져 섰다.하슬은 코를 막았다. 두 남자 몸에서 땀에 절은 쉰내가 올라오는 것만 같았다.“너 원래 재벌가 딸이 아니었네. 어쩐지 맨날 버스 타고 출근하더라. 애초에 비싼 차를 끌고 다닐 형편이 아니었던 거지.”하슬은 조금도 숨기지 않는 속물이었다.지금 하슬의 머릿속에는 예주에게 속았다는 생각뿐이었다.“저 절름발이랑 잔 적도 있는 거야? 그런데 고 대표님은 대체 널 어떻게 봤길래 마음을 준 거야?”하슬은 뭔가를 알아차린 듯 눈을 크게 떴다.곧이어 하슬은 입을 틀어막았다.“세상에, 설마 고 대표님은 이 일 전부 모르고 있는 거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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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6화

조진규도 구경꾼들 사이에 끼어 있던 사람 가운데 하나였다. 그리고 충격을 받은 정도 역시 남들과 다르지 않았다.‘강해인이... 정말 ZC그룹 며느리라고?’조진규는 머리가 멍해졌다.그렇게 큰 연줄을 스스로 끊어낸 셈이었다.‘내가 무슨 짓을 한 거야?’조진규는 당장이라도 자신의 뺨을 세게 후려치고 싶은 심정이었다.‘끝장이네. 내가 왜 굳이 사람을 건드려서...’그때 해인이 건물을 나서는 모습이 보였다.하슬은 조용히 해인의 뒤를 따라 나갔다.하슬은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사람들이 떠들어대던 추측이 사실인지 아닌지....HJ그룹 건물 아래.해인이 걸음을 멈췄다.하슬은 해인을 부르려고 입을 열었다.“강...”그러나 하슬이 막 입을 열려고 할 때, 시야에 한 남자가 들어왔다.남자는 뒤에 세워 둔 롤스로이스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검은 정장이 길게 뻗은 다리를 따라 깔끔하게 떨어졌고, 햇빛이 남자의 머리카락 위에 내려앉아 금빛 아우라를 만들어 냈다.키는 적어도 187은 넘어 보였다.하슬은 십여 미터 떨어진 자리에서도 남자가 풍기는 압도적인 분위기를 또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하슬은 그 차를 단번에 알아봤다.롤스로이스, 그것도 전 세계에 단 세 대밖에 없는 한정 모델.예전에 친구들과 수다를 떨다가 들은 적이 있었다.국내에서 저 차를 타는 사람은 단 한 명.KH그룹의 유일한 합법적 후계자.한유호.재계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서 있는 인물이었다. 재산 규모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에, 손을 뻗지 않은 산업이 없다고 할 정도였다.사람들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했다.B시 전체를 통틀어도 진짜 ‘황태자’라고 불릴 만한 사람은 한유호뿐이라고.‘설마...’하슬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지금 내가 보는 사람이... 진짜 한유호야?’하슬은 흥분 때문에 숨이 가빠졌다.‘이거, 오늘 완전 대박인데.’그런데 다음 장면이 이어졌다.하슬은 눈을 의심했다.유호가 차에서 몸을 떼고 해인 쪽으로 걸어왔다.그리고 조수석 쪽으로 돌아가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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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7화

HJ그룹 건물 아래.유호는 롤스로이스 옆에 몸을 기댄 채 서 있었다. 해인이 나오는 걸 보자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그런데 해인의 눈이 붉게 충혈된 걸 보자, 유호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해인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예주에게 되갚아 준 뒤라 속이 후련할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끝나고 나니 설명하기 어려운 무거움이 가슴에 내려앉아 있었다.해인은 한때 예주를 가장 가까운 친구라고 여겼다. 서로에게 숨기는 것 없이 이야기했고, 비밀도 나눴다.두 사람의 과거는 닮아 있었다. 부모를 잃고 의지할 곳 없이 버텨야 했고, 가장 힘들던 시절 서로를 붙잡으며 버텼다.그런데 지금은 서로의 약점을 움켜쥔 채 미친 듯이 공격하고 있었다. 상대의 가슴에 칼을 꽂듯이 상처를 남기고 있었다.이 싸움에는 승자가 없었다.두 사람 모두 상처만 남겼을 뿐,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오히려 가장 숨기고 싶었던 상처를 세상 앞에 드러내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게 만들었다.해인은 이 상황이 허무하게만 느껴졌다.이런 식으로 서로를 망가뜨리는 싸움은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그때 유호가 보였다.해인의 눈에 잠깐 놀라움이 스쳤다.“여기 어떻게 오셨어요?”아침 햇빛이 부드럽게 내려앉아 있었고, 길가의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며 바스락거렸다. 빛 한 줄기가 유호의 뒤쪽으로 길게 드리워졌다.유호는 여유로운 자세로 해인이 다가오는 걸 바라봤다. 바람이 머리카락을 살짝 스치고 지나갔다. 평소보다 훨씬 부드러운 분위기가 느껴졌다.유호는 해인을 보며 말했다.“지나가다 들렀어. 너 데리러.”해인은 눈을 깜빡였다.“근데 제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아셨어요?”“그거 어렵게 맞힐 수 있는 거 아니잖아.”유호는 조수석 쪽으로 돌아가 문을 열었다. 동시에 손등으로 해인의 머리 위를 살짝 막았다. 차 문틀에 머리를 부딪히지 않게 하려는 동작이었다.“아침에 나갈 때 표정이 딱 사람 하나 죽이러 가는 얼굴이었거든. 누굴 만나러 간다는 게 금방 보이더라고.”‘내가 그렇게까지 무서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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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8화

태겸이 급히 HJ그룹에 도착했을 때, 예주는 이미 큰아버지와 절뚝거리는 그 남자에게 끌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오는 중이었다.주변에는 많은 사람이 있었지만 누구 하나 나서서 말리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장면을 구경하듯 바라보며 손가락질까지 하고 있었다.가족 사이의 일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이런 다툼은 보통 경찰이 와도 깊이 개입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고, 대충 중재하고 넘어가는 일이 대부분이었다.게다가 이번 일은 너무 크게 퍼졌다.HJ그룹 내부 단톡방에는 각기 다른 이야기들이 빠르게 돌고 있었다.불과 삼십 분도 되지 않아서, 예주는 HJ그룹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서로 끌어당기고 밀치는 과정에서 예주의 옷은 엉망이 되어 있었다. 예주는 남아 있는 옷자락을 필사적으로 붙잡으며 몸을 가렸다. 조금이라도 덜 수치스럽게 보이기 위해서였다.여기저기서 핸드폰을 들고 있었다.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대부분은 구경거리로 삼는 눈치였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수군거림이 멈추지 않았다.‘어쩌다 이렇게 된 거야.’예주는 숨이 막히는 듯했다.‘큰아빠랑 저 남자가 어떻게 여기까지 찾아온 거지?’예주는 오래전에 이미 연락을 끊었다. 누군가 일부러 알려주지 않았다면 이곳을 알 리 없었다.수많은 손이 예주를 다시 어둠 속으로 끌어당기는 것 같았다.절망이 목까지 차오르던 때, 태겸이 시야에 들어왔다.빛이 비치는 것처럼 느껴졌다.예주의 죽어가던 눈빛에 다시 불이 붙었다.예주는 울음을 섞어 외쳤다.“태겸 오빠! 저 좀 살려줘요!”태겸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조금 전, 예주는 다급하게 태겸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화가 연결됐지만, 예주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핸드폰을 빼앗겼다.태겸은 전화기 너머로 소란스러운 소리만 들었다. 그 사이로 예주의 울음소리가 희미하게 섞여 있었다.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알 수는 없었다.다만 예주에게 문제가 생겼다는 것만은 분명했다.그래서 태겸은 하던 일을 멈추고 곧바로 이곳으로 달려왔다.그런데 눈앞에 펼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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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9화

유호의 몸 아래에는 여자 한 사람이 깔려 있는 듯했다.유호의 긴 팔이 여자를 끌어안고 있었다. 자세를 보니 두 사람은 차 안에서 입을 맞추고 있는 것 같았다. 떨어질 기미도 없이 서로에게 붙어 있었다.그동안 유호에게는 여자가 없다는 말이 돌았다. 얼마 전에는 조용히 결혼했다는 소문까지 있었다.태겸의 입가에 살짝 비웃음이 떠올랐다.겉으로는 사교 자리에서 차갑고 절제된 사람인 척하더니, 뒤에서는 이렇게 대담하게 노는 모양이었다. 길가에 차를 세워 두고 이런 짓까지 하다니.‘역시 다 비슷하군.’태겸은 속으로 냉소했다.집에 아내가 있어도 바깥에서 더 자극적인 걸 찾는 건 남자들의 공통된 습성 같았다.태겸은 잠시 더 바라보다가 시선을 거뒀다.그리고 몸을 숙여 자기 차에 올랐다.차 안에서 유호는 여자를 완전히 품 안에 가둔 듯 보였다.여자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다만 짙은 밤색 머리카락 한 가닥이 흘러내려 있었고, 유호의 손가락이 그 머리카락 사이를 파고들어 흐트러뜨리고 있었다. 마치 여자를 자기 몸 안으로 끌어당기려는 것처럼 보였다.‘꽤 격렬하네.’차체가 미묘하게 흔들리는 듯한 느낌까지 들었다.태겸은 더 보지 않고 기사에게 출발하라고 말했다.먼저 예주를 집으로 데려다 안정하게 하는 게 우선이었다.차가 도로로 들어섰다.예주는 태겸의 소매를 붙잡았다.“오빠, 저 믿으셔야 해요. 저 그 절뚝거리는 남자랑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차에 올라탄 뒤로 예주는 계속 불안에 떨고 있었다.태겸 같은 사람은 절대 문제가 있는 여자를 곁에 두지 않을 것이다.그건 태겸에게 치명적인 흠이 될 수 있었다.예주는 무서웠다.시골이라는 곳은 소문이 가장 빠르게 퍼지는 곳이었다. 태겸이 마음만 먹고 조사한다면, 온갖 이야기들이 쏟아질 것이다. 그 안에는 사실보다 훨씬 과장된 악의적인 말도 섞여 있을 것이다.그렇게 되면 예주는 다시 일어날 수 없을지도 몰랐다.그래서 태겸이 조사하기 전에 확실하게 해야 했다.태겸이 자신을 완전히 믿고, 자신을 불쌍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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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0화

눈앞의 태겸은 여전히 부드러운 말투였다. 그러나 태겸이 던지는 말은 예주의 몸을 서서히 싸늘하게 만들었다.예주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어느 순간, 예주는 태겸의 시선이 모든 것을 이미 꿰뚫어 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예주의 속눈썹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고, 몸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예주는 잘 알고 있었다.비록 태겸이 강해인과 헤어졌다고 해도, 해인이 상처 입는 일이 생기면 태겸은 본능적으로 강해인을 감싸려 한다는 사실을.해인이 가장 힘들던 시절, 태겸이 직접 집으로 데려와 돌봤다. 태겸의 손으로 돌본 여자였다. 그런 해인의 과거를 누군가 들춰내며 공격하는 걸 태겸이 가만히 보고 있을 리 없었다.아직도 태겸은 해인에게 신경을 쓰고 있었다.그 사실이 예주의 속을 차갑게 만들었다.태겸은 해인을 자신의 영역 안에 있는 존재처럼 여기고 있었다.어쩌면 단순히 신경 쓰는 정도가 아닐지도 몰랐다.사랑일지도.예주는 입술을 깨물었다.그리고 태겸의 질문 앞에서 필사적으로 변명했다.“오빠, 민하슬이 제 일기장을 몰래 본 게 분명해요. 제 일기에는 해인 언니의 과거가 자세히 적혀 있어요. 일기장은 제 회사 자리 위에 그냥 두었거든요.”예주는 숨을 고르며 말을 이었다.“저랑 해인 언니는 비슷한 과거를 겪었어요. 제가 어떻게 그런 일로 언니를 공격하겠어요?”예주는 알고 있었다.태겸의 의심을 완전히 없애지 못하면, 태겸은 더 이상 자신을 곁에 두지 않을 것이다.태겸이 그 말을 믿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태겸의 시선이 예주를 가만히 내려다봤다.“일기만 봤다고?”태겸의 목소리는 조용했다.“그걸 보고 바로 인터넷에 폭로하고, 발표회 날까지 골라서 일을 키운 거야?”태겸의 눈이 예주를 향했다.“민하슬이 해인이랑 원한도 없는데 왜 그런 일을 해? 말해 봐.”예주는 잠시 숨을 멈췄다.그리고 곧 말을 이어갔다.“왜 원한이 없어요? 회사에서 민하슬은 원래 해인 언니를 계속 견제했어요. 기회만 잡으면 가만 안 둘 사람이에요.”예주는 한숨을 삼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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