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키워온 장미를 숙적에게 빼앗긴 밤: Chapter 181 - Chapter 190

358 Chapters

제181화

태겸은 걱정을 조금도 숨기지 않는 표정이었다.해인은 눈을 내리깔았다.해인은 정에 약한 편이었지만, 이쪽으로 갔다 저쪽으로 흔들리는 사람은 아니었다.험하고 질척거리는 길을 힘들게 건너왔는데, 이미 지나온 길을 다시 되짚어 가야 할 이유는 없었다.사람은 앞을 보고 살아야지 뒤를 돌아보면 안 된다.더구나 그 길을 지나오는 동안 남은 기억들이 마냥 좋은 것만도 아니었다.해인과 태겸은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사이였지만, 그 시간조차 태겸이 예주 때문에 몇 번이고 해인을 뒷전으로 밀어넣었던 일을 덮어주지는 못했다.그날 밤 유호가 아니었다면, 지금쯤 해인은 이미 그 납치범 손에 죽었을지도 몰랐다.그 생각을 하자 해인의 눈에는 분명한 거리감이 어렸다.해인은 태겸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오빠, 걱정해 주는 건 고마워. 근데 내 남편은 나한테 정말 잘해줘. 나는 누가 그 사람 헐뜯고 나쁜 말하는 거 듣고 싶지 않아.”태겸은 멈칫했다.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그대로 드러났다. 마치 제 귀를 의심하는 사람처럼 태겸은 해인을 뚫어지게 봤다.“너 방금 뭐라고 불렀어?”아주 오래전, 두 사람이 아직 사귀기 전에는 해인이 늘 태겸을 ‘오빠’라고 불렀다.두 사람은 어릴 때부터 혼담이 오가긴 했지만, 그 시절 어른들 역시 두 사람을 대놓고 한 쌍처럼 대하지는 않았다.그러다 18살 성년식 날, 태겸이 사람들 앞에서 해인에게 고백했고, 그제야 태겸의 자리는 ‘옆집 오빠’에서 ‘남자친구’로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해인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맑은 눈으로 태겸을 바라보는 모습은 정말로 여동생이 오빠를 대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오빠는 고 회장님 아들이잖아. 당연히 내 오빠지.”태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는 입술을 단단히 다물었다.그러더니 격해진 숨을 억누르지도 못한 채 해인의 양쪽 어깨를 덥석 붙잡았다.“오빠라고 부르지 마! 그 호칭은 18살 이후로 한 번도 안 썼어! 강해인, 나는 네 남자였어! 그런데 이제 와서 아는 오빠쯤으로만 본다고? 그게
Read more

제182화

그건 KH그룹의 원시주였다.돈이 있다고 해서 아무나 손에 넣을 수 있는 종류의 주식이 아니었다.그 지분을 가졌다는 건 곧 회사 안에서 발언권을 가진다는 뜻이었다.‘한유호가 그걸 전부 해인에게 넘겼다고?’태겸은 문득 자신이 유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대체 한유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설마 원시주를 미끼로 해인이 마음을 얻으려는 건가?’‘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아닐 텐데.’‘그렇다면 정말로 한유호가 해인에게...멍하니 생각을 잇던 태겸의 머릿속에 오랫동안 묻혀 있던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그래, 세상에 그런 우연이 어디 있어?’태겸과 해인의 관계에 금이 가자마자 유호가 해인의 곁을 파고들었고, 하필 그 한 달 사이에 해인과 혼인신고까지 마쳤다.태겸은 고등학생 때 있었던 그 오토바이 대회를 떠올렸다.그때 태겸과 유호는 둘 다 대회에 참가했다.결승전에서 태겸과 유호는 마지막 바퀴까지 달렸고, 두 사람은 나란히 선두권을 차지하고 있었다.앞서가고 있던 건 태겸이었다.우승까지는 정말 코앞이었다.그런데 마지막 코너를 도는 때였다.유호가 갑자기 목숨이라도 내던질 사람처럼 코너 안쪽으로 깊게 파고들었다.원래도 추월할 공간이 넉넉하지 않았다.고속으로 달리다 옆으로 넘어지기라도 하면 그대로 깔려 버릴 수 있었다. 크게 다치거나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어도 이상하지 않았다.그런데도 유호는 그런 위험한 수를 밀어붙였고, 결국 그 무모한 방식으로 태겸을 이겼다.태겸은 그때도 이해할 수 없었다.고작 경기 하나였다.그런데 왜 저렇게까지 이를 악물고 달려드는지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경기가 끝난 뒤,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태겸은 곧장 유호를 찾아가 따졌다.“미친놈아. 너 혼자 죽고 싶으면 혼자나 죽어. 그렇게 들이밀다가 잘못됐으면 내 목숨까지 같이 날아갈 뻔했잖아!”그런데 유호는 그저 어깨만 한번 으쓱했었다.“왜, 졌다고 인정하기 싫어?”그날 해인은 결승선 쪽에서 응원단으로 서 있었다.참가자
Read more

제183화

태겸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 해인을 바라봤다.“해인아,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그날 너 분명 날 응원하러 간 거였잖아!”해인은 옅게 웃으며 말했다.“맞아. 난 응원단으로 간 거였으니까 당연히 오빠를 응원했지. 근데 그렇다고 해서 우승한 사람 축하까지 못 할 이유는 없잖아.”“유호 씨는 챔피언이었고, 경기할 때 정말 눈에 띄었어. 안 그래?”부정할 수가 없어진 태겸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안쪽으로 파고들어 추월하는 방식은 분명 위험했다.하지만 그게 성공했을 때 주는 인상까지 부정할 수는 없었다.거칠고 아슬아슬했지만, 그만큼 강렬하게 시선을 끄는 장면이기도 했다.태겸의 목소리에는 힘이 빠져 있었다.“너... 그때부터 걔 좋아했던 거야?”해인은 차분하게 답했다.“좋아했다는 것보단 그냥 눈에 들어왔던 거야. 그리고 나랑 유호 씨가 결혼하게 된 건, 오히려 유호 씨가 휩쓸린 쪽이야.”실제로도 그랬다.애초에 유호는 자기 할머니가 자신도 모르게 손주며느리를 들였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그때 일을 떠올리면 해인도 어이가 없었다.‘정말 드라마도 그렇게는 안 흘러가겠다.’하지만 그런 속사정을 모르는 태겸은 해인의 말을 완전히 다르게 받아들였다.태겸은 놀란 눈으로 해인을 봤다.“뭐라고? 네가 먼저 걔한테 결혼하자고 했다고?”태겸은 말을 할수록 감정이 거칠어졌다.생각이 깊어질수록 가슴속도 더 답답하게 조여 왔다.“해인아, 너 이건 그냥 나한테 복수하려고 그런 거잖아! 나랑 예주 일 때문에 분해서 홧김에 아무나 붙잡고 결혼한 거 아니야? 네 인생까지 막 던져 가면서.”해인은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아무나였던 건 아니야.”해인은 조용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어깨로 흘러내린 잔머리가 살짝 흔들렸다.뭘 떠올렸는지, 해인이 문득 웃음을 머금었다.“난 유호 씨가 이기고 나서 한 손으로 레이싱 슈트 지퍼를 내리던 모습이 좋았어.”태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건 너무도 그럴듯한 이유였다.그 나이 또래 여자아이라면, 유호 같은
Read more

제184화

사람 마음을 가장 깊이 후벼 파는 건 칼이 아니라 말이었다.태겸의 가슴이 짓눌리는 듯 아프면서 숨을 들이마시는 것마저 버거웠다.“해인아...”그때까지 듣고만 있던 고민건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그만해! 태겸아, 이리 와.”지금 태겸은 감정이 머리끝까지 치솟아 있었다.이성을 붙들고 있기 어려운 상태였다.고민건은 이 집안의 가장이었다. 그러니 태겸을 제지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찾아온 사람은 손님이다.고민건 부부가 해인을 오랫동안 거두고 키운 건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이런 일로 남들 입에 오르내릴 빌미를 줄 수는 없었다.더구나 유호는 해인의 남편이다. 그런 유호를 문전박대할 이유도 없었다.유호의 손이 자연스럽게 해인의 가느다란 허리에 내려앉았다.한 손에 다 잡힐 듯 가는 허리였다.유호는 다정하게 웃으며 말했다.“다음에 여기에 올 땐 미리 말해. 내가 너무 급하게 오느라 회장님이랑 사모님께 드릴 선물도 제대로 준비를 못 했네.”이곳은 해인에게 반쯤 친정이나 다름없는 곳이다.유호가 그렇게 말한 건 예의상 한 말에 가까웠다.실제로는 선물을 다 챙겨 왔다.고급 차에 고급 술, 어느 것 하나 빠지는 구석 없이 모두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최고급 제품들이었다.거기서 끝도 아니었다.유호는 고민건을 위해 명품 시계 하나를 따로 준비해 왔다.이소정 몫도 빼놓지 않았다.유호가 준비한 건 여성용 실크 스카프였다. 사모님들 사이에서 가장 선호도가 높은 브랜드 제품이었고, 가격만 해도 3천만 원을 가볍게 넘겼다.한 번 방문하는 데 이 정도로 통이 클 줄은 몰랐던지, 고민건과 이소정은 적잖이 놀랐다.두 사람은 원래 해인과 유호의 결혼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하지만 지금 보니, 유호가 해인을 꽤 신경 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해인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앞뒤로 고작 삼십 분 남짓한 사이에 유호가 이렇게 많은 걸 준비해 왔다는 사실이 놀라웠다.다만 유호가 고씨 저택까지 직접 찾아온 상황 자체는 해인에게 여전히 낯설고도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Read more

제185화

태겸은 이 자리에 더 앉아 있다가는 속병부터 날 것 같았다.태겸은 젓가락을 탁 내려놓더니, ‘쿵’ 소리가 날 정도로 거칠게 몸을 일으켰다.“나랑 해인이는 남매가 아니야! 나도 네 형님도 아니고! 한유호, 나랑 해인이는 원래 부부였어.”“우리가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랐는데, 우리 사이를 갈라놓은 건 너야! 뭘 그렇게 태연한 척해?”그 말이 떨어지자 방 안은 조용해졌다.식구들이 저마다 다른 생각을 품은 채, 식탁 위에 아슬아슬한 평온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태겸의 말은 거기에 벼락을 내리꽂은 것이나 다름없었다.유호가 해인의 어깨를 가볍게 끌어안으며 말했다.“그래요? 형님도 둘이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랐다는 건 아시네요. 그런데 그런 형님이 바람을 피워서 해인 씨한테 상처를 준 건... 뭐예요?”태겸이 곧장 받아쳤다.“나랑 예주는 아무 사이도 아니었어! 진작에 끝났어!”유호의 목소리는 나지막하고 싸늘했다.“끝났다고요? 그 말은 한때는 있었다는 뜻이네요?”“한유호, 말꼬리 잡지 마!”태겸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반면 유호는 지나칠 만큼 침착했다.유호의 시선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처음부터 태겸을 상대할 만한 상대로 보지도 않는 눈빛이었다.태겸 쪽으로 향하는 눈길에도 깔보는 기색이 선명했다.‘역시 저 자식은 날 아래로 보고 있어.’결국 큰소리치며 독한 말을 내뱉는 쪽은 늘 패배한 쪽이었다.따지고 보면 태겸은 완전히 진 사람이나 마찬가지였다.고민건이 싸늘한 표정으로 아들을 꾸짖었다.“태겸아, 입 다물어!”태겸은 원래 예의 바르고 선을 지킬 줄 아는 아들이었다.그런 태겸이 지금은 이성을 잃고 자꾸만 남에게 꼬투리를 잡히고 있었다.고민건은 그런 태겸이 몹시 실망스러웠다.어찌 됐든 태겸은 고민건이 공들여 키운 후계자였다.고민건 역시 해인이 며느리가 되기를 바랐던 적이 있었다.하지만 해인이 이미 유호와 혼인신고를 마친 이상, 태겸이 이토록 매달리는 건 명분도 없고 모양새도 좋지 않았다.며칠 전 예씨 집안의 생일 연회에서 예주
Read more

제186화

예씨 집안은 이미 좋은 본보기가 되고 있었다.연회장에서 벌어진 일은 삽시간에 퍼져 나갔다. 처음에는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끼리만 수군대던 이야기였는데, 어느 기자가 말을 덧붙여 기사를 내보내는 바람에 인터넷에서도 떠들썩했다.그 여파는 바로 다음 날 드러났다.예씨 집안 관련 계열사 주가는 장이 열리자마자 바로 급락했다.태겸은 이를 악물고 말했다.“해인이가 너무 순진해서 한유호한테 속은 거예요. YD그룹까지 넘겨줬잖아요.”태겸은 숨도 고르지 못한 채 고민건을 바라봤다.“아버지도 해인이를 어릴 때부터 다 보셨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한씨 가문으로 들어가는 걸 그냥 보고만 계실 거예요?” “아버지도 한씨 가문이 어떤 곳인지 아시잖아요.”태겸의 목소리는 갈수록 거칠어졌다.“한유호가 YD그룹까지 손에 넣었으니 앞으로 KH그룹은 더 커질 거예요. 제가 ZC그룹 들어갈게요.”“그래서 YD그룹도, 해인이도 다시 데려오겠습니다. 두 사람만 갈라놓으면 제가 상간남 같은 소리 안 들어도 되잖아요.”지금껏 입을 다물고 있던 이소정이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태겸을 바라봤다.태겸이 너무 극단으로 치닫는 게 뻔히 보여서였다.“요즘 괜찮은 집안 아가씨들 많아. 엄마가 더 예쁘고 집안 좋은 애로 다시 알아봐 줄게.”그때 문밖에서 가사도우미 하나가 머뭇거리고 있었다.들어와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다.태겸은 쌓여 있던 화를 그 가사도우미에게 터뜨렸다.“왜 거기서 꾸물거려!”가사도우미는 움찔하더니 손에 든 상자를 내밀었다.“방금 한 대표님께서 가시면서 이걸 전해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도련님... 아니, 형님 되시는 분께 드리는 첫인사라고 하셨어요.”상자 안에는 남성용 넥타이가 들어 있었다.누가 봐도 대놓고 비웃는 뜻이었다.태겸은 상자를 받아 들더니 그대로 대문 밖으로 내던졌다.“저는 무슨 명문가 아가씨 같은 거 필요 없어요. 저는 평생 해인이 하나면 됩니다.”...그 무렵, 해인과 유호는 차에 올라 있었다.해인은 문득 고개를 돌려 옆
Read more

제187화

해인의 심장이 터질 듯이 빨리 뛰었다.‘이 남자... 왜 이렇게 나를 당황하게 해?’아무런 대비도 하지 못한 상태였다.술기운이 몸 안에서 더 빠르게 번지면서, 해인은 유호에게서 풍기는 옅은 술 냄새에 단단히 둘러싸인 기분이 들었다.머리까지 몽롱해졌다.숨 막히게 밀고 들어오는 유호의 키스에 해인의 목소리도 저절로 힘이 풀렸다.“유호 씨...”그 한마디에 유호의 숨이 거칠어졌다.유호가 해인의 입술에 짧게 입을 맞추며 나지막하게 말했다.“여보라고 불러.”해인의 뺨은 이미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허리에는 유호의 커다란 손이 단단히 얹혀 있었다.유호의 손끝이 스치듯 지나갈 때마다, 해인은 간지러움에 살짝 몸을 틀어야 했다.“아, 안 돼요...”하지만 유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해인을 더 바짝 끌어당겼다.해인은 자신도 모르게 두 팔을 들어 유호의 목을 감쌌다.“정말... 여기서 이럴 거예요?”유호가 천천히 웃었다. 조용하고 뜨거운 숨결이 해인의 얼굴에 내려앉았다.“그럼 어디서 이러고 싶어?”“이러고... 또요?”그 말을 내뱉고 나서야 해인은 자신이 또 유호 말에 말려들었다는 걸 알아차렸다.해인은 입술을 깨물었다.다리에 힘이 조금씩 빠지는 것 같았다.‘또 당했어!’부끄러움에 해인은 눈을 꼭 감았다.버틸 힘도 반항할 말도 흐릿해진 채, 해인은 유호가 이끄는 숨결에 그대로 휩쓸렸다.유호는 해인을 단단히 끌어안고 놓아주지 않았다.해인의 몸은 유호 품 안에 완전히 갇힌 것처럼 느껴졌다.격렬한 딥키스가 이어질수록 공기마저 달아올랐다.얽힌 서로의 숨소리 때문에 현관은 금세 열기로 가득 찼다.유호가 해인의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우리 여보도 나를 원해?”해인은 그 말뜻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뭘 원하냐니...?’눈가에 물기가 어렸다.해인이 올려다보자 유호는 아주 얄밉게 웃고 있었다.‘정말 한 대 때리고 싶어!’해인이 대답하지 않자 유호는 더 집요하게 물었다.“여보, 이제 나 침대에서 자도 돼?”해
Read more

제188화

유호는 결국 움직임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그래도 해인에게서 완전히 떨어지지는 않았다.유호는 이 다정한 시간이 꽤 아쉬운 듯했다.핸드폰 화면을 한번 내려다본 유호는 받을지 말지 잠깐 망설였다.벨소리는 결국 자동으로 끊어졌다.하지만 곧바로 다시 전화가 걸려 왔다.해인은 몽롱한 눈으로 유호를 바라봤다.붉게 달아오른 입술이 살짝 벌어지면서, 목소리에도 힘이 덜 실려 있었다.“받아요. 급한 일일 수도 있잖아요.”해인이 흘낏 본 발신자 표시는 본가 쪽인 듯했다.세 번째 벨이 울리고 나서야 유호는 몸을 일으켜 전화를 받았다.해인에게 들려주고 싶지 않은 얘기라도 있는지, 유호는 핸드폰을 들고 베란다 쪽으로 걸어갔다.유호의 목소리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오늘 밤은 안 됩니다. 와이프 안고 자는 중이니까요. 다음에 얘기하세요.”해인은 말없이 눈만 깜빡였다.‘자기 아버지한테도 저렇게 말해?’전화기 너머에서 무슨 말이 쏟아지는지는 들리지 않았다.다만 좋은 말이 아닐 거라는 건 굳이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쉴 새 없이 몰아붙이는 기세가 멀리 떨어져 있는 해인에게까지 전해졌다.아마 유호를 심하게 나무라고 있는 모양이었다.잠시 뒤 유호는 통화를 끊고 방으로 돌아왔다.유호가 해인을 내려다보며 물었다.“씻으러 가게 안아 줄까?”해인은 자기 모습을 내려다봤다. 흐트러진 옷차림에 여기저기 붉은 자국까지 남아 있었다.그녀는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다 끝난 거예요?”유호의 눈이 깊이 내려앉았다.유호는 해인 쪽으로 한 걸음 더 다가왔다.“여보, 부족해서 더 하고 싶다는 뜻이야?”해인의 얼굴이 금세 새빨개졌다.본능적으로 뒤로 물러선 해인은 베개를 가져다 몸을 가렸다.“유호 씨, 장난치지 말아요. 저 간지러워요...”유호는 해인을 다시 침대 쪽으로 눕히듯 붙잡았다.그러고는 해인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싼 채 이마에 깊게 입을 맞췄다.“본가에 좀 다녀올게. 먼저 자. 오늘 밤은 기다리지 마.”해인은 눈을 몇 번 깜빡이다가 얌전히 고개를
Read more

제189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태겸이 손을 들어 윤준의 뺨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아무런 대비도 하지 못한 윤준의 몸이 뒤쪽 테이블 위로 거칠게 넘어졌다.쨍그랑! 탁!와르르!요란한 소리와 함께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술잔들이 바닥으로 쏟아져 내렸다.두 사람은 오랜 세월 알고 지낸 사이였다.함께 술을 마시고 사람들을 만났고, 이해관계를 나눈 일도 수도 없이 많았다.그러나 이렇게 주먹이 오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무엇보다 태겸은 원래 점잖은 사람이었다.누구를 대하든 늘 부드럽고 예의를 갖췄다.윤준도 태겸이 누군가에게 손을 올리는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하물며 이렇게 사정없이 주먹을 내리꽂는 모습은 더더욱.윤준의 뺨이 금세 부어올랐다.입꼬리에는 피가 비쳤다.말을 하는 것조차 쓰릴 만큼 아픈지 윤준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왜 나를 때려?”태겸은 차갑게 쏘아붙였다.“맞을 짓을 했으니까 때린 거지.”오늘 밤 태겸은 가슴속에 쌓인 화를 가까스로 누르고 있었다.그런데 윤준이 하필 그 화약고 위에다 불씨를 던져 버렸다.태겸의 목소리가 더 낮아졌다.“해인을 그런 식으로 입에 올리지 마.”‘우리 해인이를 저런 여자들과 같은 자리에 두고 말하다니.’태겸에게는 그 말 자체가 견딜 수 없는 모욕이었다.그제야 윤준은 뒤늦게 알아차렸다.태겸이 손을 올린 이유가 방금 자신이 해인을 두고 함부로 말했기 때문이라는 걸.‘아니, 이미 끝난 사이잖아.’‘강해인은 이제 한유호 아내인데, 이렇게까지 감싸?’윤준은 속으로 혀를 찼다.세상에 여자는 널리고 널렸다.태겸 정도의 집안과 배경이면 손짓만 해도 다가오는 여자들도 얼마든지 많았다.굳이 한 사람에게만 매달릴 이유가 없다고 말하고 싶었다.하지만 윤준은 곧 생각을 접었다.태겸은 원래 자기 뜻이 확고한 사람이었다.한번 결론을 내리면 남이 뭐라 해도 잘 꺾이지 않았다.지금 같은 상태라면 더더욱 아무 말도 들리지 않을 터였다.결국 태겸을 혼자 두는 편이 낫겠다고 판단한 윤준은 데려왔던 여
Read more

제190화

지안은 늘 들고 다니는 작은 손거울을 꺼냈다.화장이 번진 데는 없는지 꼼꼼히 확인한 뒤에야 안으로 발을 들였다.바 안은 몹시 시끄러웠다.예철진이 워낙 엄하게 구는 탓에 지안은 원래 이런 곳에 자주 오는 편이 아니었다.그런데 며칠 사이 집안 분위기가 가라앉은 채, 누구 하나 밝은 얼굴을 하지 못하니 지안도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결국 지안은 친한 친구를 불러 술이나 마실 생각으로 이곳까지 오게 됐다.지안을 알아본 예주는 다급하게 지안을 향해 외쳤다.“예지안 씨, 저 좀 살려주세요...”예주는 그날 생일 연회에서 지안이 자기 편을 들어준 적이 있다는 걸 기억하고 있었다.지안은 예주를 한번 힐끗 내려다봤다.턱을 도도하게 치켜든 지안의 눈에는 멸시가 가득했다.“살려달라고요? 강해인이 도와줬는데도 뒤에서 물어뜯은 게 누구였는데요? 그런 배은망덕한 사람을 누가 또 도와줘겠어요?”지안은 말을 마치자마자 가방에서 현금을 꺼내 옆에 서 있던 경비원 손에 쥐여 줬다.“저 여자, 제 눈앞에서 치워. 어디 감히 우리 고 대표 주변에 얼쩡거려? 거울은 보고 다니나 모르겠네.”“주제도 모르면서... 내가 좋아하는 남자한테 저런 여자가 들러붙는 꼴은 못 봐.”경비원들은 돈을 받고 예주를 바 근처의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는 골목으로 질질 끌고 갔다.예주는 보기에도 연약해 보였다.피부도 희고 고와서 한 번도 험하게 굴러 보지 않은 티가 났다.그 모습을 본 경비원 둘의 눈빛에 다른 기색이 번졌다.“들어 보니까 이 여자, ZC그룹 황태자랑 엮였던 여자라며? 그런 여자랑 자면 느낌이 어떨지 좀 궁금한데.”“하하, 우리도 한번 맛을 보면 되겠네?”두 사람은 눈빛만 한번 주고받더니, 더 미룰 것도 없다는 듯 다급하게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갔다.예주는 크게 놀라면서 안색이 확 변했다.“뭐 하는 거야? 놔! 놓으라고!”그때 골목 끝에 검은 옷차림의 남자 하나가 서 있는 게 보였다.예주는 거의 미친 사람처럼 몸부림치면서 붙잡힌 손을 뿌리쳤다.그러고는 그 남자를
Read more
PREV
1
...
1718192021
...
36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