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키워온 장미를 숙적에게 빼앗긴 밤: Chapter 201 - Chapter 210

358 Chapters

제201화

다행히 자물쇠의 열쇠는 위패를 모셔 둔 제단 위에 놓여 있었다.해인은 곧장 그쪽으로 달려가 열쇠를 집어 들었고, 유호를 옭아매고 있던 금속 장치를 풀었다.“유호 씨? 정신 좀 차려 봐요!”해인은 유호의 손에 닿자마자 몸이 굳었다. 손끝으로 전해지는 열기가 너무 뜨거웠다.‘열이 이렇게 심하다고?’유호는 열이 나고 있었다. 몸에 난 상처를 제때 처리하지 못해 덧난 게 분명했다.무릎은 이미 감각을 잃은 지 오래였고, 몸은 끝없는 어둠 아래로 가라앉은 듯한 상태였다.그는 해인의 목소리를 듣고 천천히 눈을 떴다. 이어서 눈앞에 해인이 보이자, 눈동자 깊은 곳에 놀란 기색이 스쳤다.“네가 왜 왔어?”해인은 바로 대답했다.“당신이 사흘이나 집에 안 들어왔잖아요. 걱정이 돼서 찾아왔어요.”유호는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아, 내가 보고 싶어서 왔구나.”해인은 미간을 찌푸렸다.‘이렇게까지 다쳐 놓고, 아직도 그런 농담이 나와?’해인은 유호를 부축해 방석 위에 앉혔고, 잠깐이라도 쉬게 했다. 해인의 시선은 곧 유호의 무릎을 향했다. 그렇게 오래 꿇고 있었으니 무릎은 이미 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고, 지금쯤이면 감각도 없을 정도로 굳어 있을 터였다.“어쩌다가 이렇게 다친 거예요? 제가 119 부를게요.”“부르지 마. 불러도 여기까지 못 들어와.”유호의 몸은 겁이 날 정도로 뜨거웠다. 그는 몸을 해인에게 기대다시피 하면서도, 자연스럽게 두 팔을 뻗어 해인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심지어 턱까지 해인의 어깨 위에 걸쳤다.남자가 내쉰 뜨거운 숨결이 해인의 희고 가는 목덜미를 스치듯 쓸고 지나갔다. 잔뜩 쉰 목소리가 해인의 귓가에 조용히 떨어졌다.“향수 뿌렸어? 냄새 좋네.”유호는 꼭 강아지라도 된 것처럼 입을 벌리더니 해인의 목덜미를 깨물 듯 물었다.해인은 살짝 몸을 틀어 피했다.“119는 부르기 싫어도, 집에 약은 있잖아요. 방이 어디예요? 제가 부축할게요.”유호는 혼자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난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약하진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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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2화

그래도 다행인 건, 유호가 다시 침대에 몸을 눕히는 사이 유호의 입술이 해인의 손가락 끝을 스치더니, 해열제 한 알을 그대로 물고 삼켰다는 점이었다.해인은 곧바로 물컵을 유호의 입가로 가져갔다.몸을 일으킨 해인이 유호의 셔츠를 풀어 보려고 손을 뻗었다. 그런데 유호가 해인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먼저 나가. 내가 할게.”“상처가 등에 있는데, 어떻게 혼자 해요?”해인은 유호가 무슨 생각으로 저러는지 알 것 같았다. 결국 남자로서의 체면과 자존심 때문일 것이다.스물 몇 살이나 된 남자가 아버지한테 그런 꼴이 되도록 맞았으니,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그렇다. 해인의 짐작으로는 유호의 몸에 난 상처는 전부 한원랑의 짓이었다.한씨 가문 안에서 누가 그런 배짱이 있어서 유호에게 손을 대고, 그것도 모자라 유호를 묶어 둘 수 있겠는가?답은 거의 뻔했다.승아가 예전에 해인에게 말해 준 적이 있었다. 한원랑은 술이 취하면 유호를 때리고 욕했고, 자기 아내의 죽음까지 유호 탓으로 돌린다고.하물며 오늘은 기일이었다. 옛일이 떠오를 만한 날이니, 한원랑에게는 손을 댈 구실이 더 충분했을 것이다.해인은 당연히 유호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었다. 셔츠는 이미 엉망으로 찢어져서 더이상 입을 수도 없는 상태였다. 해인은 아예 유호의 셔츠를 단번에 찢어 버렸다.단추가 사방으로 튀었다.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해도, 해인이 직접 눈으로 유호의 상처를 확인한 뒤에는 절대로 아무렇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해인은 숨을 들이마셔야 했다.상처는 대부분 등에 몰려 있었다. 허리띠로 후려친 자국이었다. 피가 군데군데 배어 있었고, 대충 훑어보기만 해도 성한 살을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너무 놀란 탓인지, 해인의 눈가가 축축해졌다.해인은 어릴 때부터 강씨 가문에서 귀하게 자랐다. 아버지는 늘 다정했고, 해인을 끔찍이 아끼는 사람이었다. 해인은 세상에 이런 아버지도 있다는 걸 제대로 실감해 본 적이 없었다.‘어떻게 아들이 이렇게 될 때까지...’해인은 미간을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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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3화

유호의 몸이 해인 위로 무겁게 내려앉았다.유호는 해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오래도록 목이 말라 있던 짐승이 마침내 샘물을 찾아낸 것처럼, 해인에게서 느껴지는 맑고 달콤한 느낌을 거리낌 없이 탐하고 있었다.다만 상처가 너무 깊은 탓이거나 기운이 바닥난 때문인지, 해인의 입가에 닿는 입맞춤은 평소보다 한결 더 부드럽고 느렸다.해인은 가볍게 유호를 밀어내며 말했다.“여긴 본가예요.”유호는 눈가에 웃음을 머금었다.“그럼 너만 조용히 하면 되잖아.”유호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해인의 눈가와 이마를 천천히 훑듯이 입을 맞췄다. 욕망으로 가득찬 눈빛은 이미 잔뜩 흐트러져 있었다.한 손은 해인의 손가락을 깍지 끼고, 다른 한 손은 해인의 옷깃을 풀어 내렸다. 당장이라도 해인을 자신의 몸으로 끌어안고 녹여 버릴 듯한 기세였다.해인은 유호에게 휘말려 숨이 막힐 듯 달아올랐다.유호는 열이 오른 상태라서 체온이 원래보다 훨씬 뜨거웠다.그렇게 단단히 끌어안긴 채 있자니, 온몸이 뜨거운 열기 속에 갇힌 듯한 착각까지 들었다.‘예전엔 왜 몰랐지?’‘한유호가 이렇게까지 사람을 당황하게 만드는 타입이었다니.’평소 유호는 분명 절제된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던가.그런데 이렇게 다쳐 놓고도 이럴 수가 있나 싶었다.해인은 문득 깨달았다. 자신이 지난번에 태겸 앞에서 유호를 남편이라고 인정한 뒤부터 유호가 유난히 들떠 있었다는 걸. 정말 꼬리가 있다면 하늘 끝까지 치켜세울 것만 같은 기세였다.‘남자들은 다 이렇게 경쟁심이 강한 건가?’하지만 해인과 유호는 갑작스럽게 결혼한 사이일 뿐이었다.유호는 해인을 사랑하지도 않았다.‘그래. 사랑과 욕망은 원래 다른 거니까.’‘적어도 대부분의 남자들한테는 그렇겠지.’유호는 두 손으로 해인의 뺨을 감싸 쥐고, 의미를 겹쳐 담은 목소리로 조용히 말했다.“너 말이야. 멀쩡히 있다가 왜 굳이 이 늑대굴까지 들어왔어.”해인은 멍하니 유호를 바라봤다.그때였다. 문밖에서 누군가 조심스럽게 노크했다.“작은 사모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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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4화

조우는 중년 남자의 다리에 매달린 채, 콧물과 눈물을 범벅으로 흘리고 있었다.“무릎! 아빠! 내 무릎 봐! 여기 빨갛게 다 까졌잖아. 그리고 옷도... 이거 엄마가 새로 사 준 건데. 두 번밖에 안 입었는데 벌써 찢어졌어!”조우는 온몸이 먼지투성이였다. 꼭 진흙탕에서 겨우 건져 올린 아이처럼 꼴이 말이 아니었다.천하솜은 옆에서 한술 더 떴다.“회장님, 우리 조우가 이렇게 클 때까지 누가 귀 한 번 잡아당긴 적 있었어요? 이것 좀 보세요. 귀가 퉁퉁 부어서 원래보다 훨씬 더 커졌잖아요.”조우도 곧장 맞장구를 쳤다.“난 다섯 살이야! 그런데도 안 봐주고 저렇게 한 거잖아. 그런 아줌마가 어떻게 우리 집에 시집올 자격이 있어? 아빠, 얼른 저 아줌마 내쫓아!”한원랑은 젊은 시절 꽤 잘생긴 남자였을 것 같았다. 눈가와 미간에 잔주름이 자리 잡으면서 세월의 흔적은 남아 있었지만, 노쇠한 기색은 느껴지지 않았다.오랫동안 높은 자리에 군림해 온 사람답게 한원랑은 사람을 압도하는 위엄이 있었다. 그저 거실 한가운데 서 있기만 해도 이 집의 주인이 누구인지 단번에 알 수 있을 정도였다.듣자 하니 한원랑은 이미 그룹 경영에서 손을 뗀 상태였다. 얼마 전 회장 자리에서 물러났고, 거대한 KH그룹은 이제 유호가 전부 맡아 이끌고 있었다.한원랑은 요즘 하루가 멀다 하고 친구들과 골동품이며 서화 따위를 들여다보며 시간을 보낸다고 했다. 이름난 경매장을 다니면서 거침없이 돈을 쓰는 일도 다반사였다.이 저택 안에는 한원랑의 소장품만 따로 모아 둔 층이 통째로 있다고 할 정도였다. 바깥에서는 한원랑이 가장 아끼는 사람이 죽은 아내 서정란이고, 그다음이 서화와 골동품이라는 말까지 돌았다.진주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해인을 한 번 바라봤다.조우는 지난 몇 년 동안 버릇없이 자라기로 유명했다. 늦은 나이에 얻은 아들이니 한원랑이 유독 감싸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그런데 천하솜까지 나서서 한원랑 앞에서 저렇게 일을 키우고 있었다.진주가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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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5화

해인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달콤했다. 코끝은 살짝 붉었고, 촉촉이 젖은 두 눈에는 타고난 듯한 청순함이 배어 있었다. 가만히 보고만 있어도 저절로 말을 들어줄 것 같은 얌전하고 고분고분한 인상이었다.그런 해인의 ‘아버님’이라는 한마디가 한원랑의 허를 찔렀다.게다가 해인은 계단을 내려오면서 훌쩍훌쩍 울고 있었다. 누가 봐도 어디선가 크게 서러움을 당하고 달려온 사람처럼 눈물이 계단을 따라 뚝뚝 떨어졌다.잔뜩 놀라 겁먹은 그 기색은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작은 토끼를 떠올리게 했다.한원랑은 해인을 알지 못했다. 그래도 아까부터 천하솜 모자가 붙들고 늘어지며 온갖 말을 쏟아 낸 덕분에... 집 안에 갑자기 나타난 낯선 얼굴이 누구인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한원랑은 뜻밖이라는 표정으로 해인을 바라봤다.방금 천하솜 모자가 한 말을 듣고 있을 때만 해도, 한원랑은 권영자가 유호에게 붙여 준 여자가 성질도 사나워서 통제가 안 되는 드센 타입일 거라고 여겼다.그런데 막상 눈앞의 해인을 보니 전혀 달랐다. 저렇게 연약하고 온순하게 생긴 데다,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인데 무슨 공격성이 있겠는가?천하솜과 조우가 어떤 성격인지 한원랑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차라리 해인이 당한 쪽이라고 하는 편이 더 그럴듯했다.게다가 한원랑은 젊은 여자에게 ‘아버님’이라는 호칭을 들어 본 적이 거의 없었다. 해인과는 오늘 처음 만났지만, 해인이 부른 그 한마디에는 묘하게 사람의 경계심을 무너뜨리는 친밀감이 담겨 있었다.한원랑은 그 자리에 선 채 해인을 가만히 훑어봤다. 눈빛에는 탐색하는 기색이 담겨 있었다.해인은 한원랑에게서 한 걸음 남짓 떨어진 자리에서 멈춰 섰다. 눈가가 벌써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천하솜은 미간을 찌푸렸다.‘쟤는 또 뭘 하겠다는 거야? 설마 자기도 이르러 온 건가?’하지만 해인이 조금이라도 머리가 돌아간다면, 한원랑을 찾아올 리 없었다.조우는 한원랑이 늦게 얻은 귀한 아들이었다. 반면 해인은 아직 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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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6화

옆에 서 있던 천하솜은 해인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유호를 때린 건 한원랑이었다. 한원랑이 직접 허리띠를 들고 유호를 후려쳤다.그런데 해인은 그 일을 두고 유호가 스스로 벌을 준 것처럼 말했다.그것도 아무렇지 않게, 있는 말에 없는 말까지 섞어 가며 상황을 통째로 바꿔 버렸다.한원랑은 애초에 엄하게 못 박아 둔 상태였다. 유호가 사흘을 다 채우기 전까지 절대 일어나선 안 된다고. 그 말을 어길 사람은 이 집 안에 아무도 없었다.권영자라고 해도 예외는 아니었다.애당초 이 집에서 유호 편을 들어줄 사람도 없었다. 다들 뻔히 보면서도 못 본 척했고, 차가운 얼굴로 지나쳤다.그런데도 해인은 방금 제멋대로 들어가 유호를 풀어줬다.그런데 이상하게도 지금 한원랑은 화를 내지 않고 있었다.그건 한씨 가문에서는 한 번도 없던 일이었다.그제야 천하솜은 깨달았다.해인은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마냥 만만한 여자가 아닐지도 몰랐다.막 도착한 권영자는 흐뭇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역시 내가 사람을 잘못 보지 않았구나.’해인은 한원랑의 성정을 정확히 짚어 냈다. 체면은 세워주면서도 듣기 좋게 말을 풀어냈고, 어디까지 모른 척해야 하는지도 절묘하게 알고 있었다.심지어 한원랑이 유호를 매질한 일마저, 한원랑이 빠져나갈 발판으로 바꿔 놓았다. 그것도 딱딱한 돌바닥이 아니라 푹신한 방석까지 깔아 둔 것처럼 부드럽게. 그러니 한원랑으로서는 그쪽으로 내려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게다가 해인은 이제 막 들어온 새 며느리였다. 한원랑도 체면이 있는 사람인 이상, 며느리 앞에서 자신이 유호를 때렸다는 사실을 대놓고 드러내고 싶지는 않을 터였다.무엇보다 한원랑 본인도 알고 있었다.이번 일만큼은 본인이 떳떳하지 못하다는 걸.얼른 해인을 부축해 일으켜 세운 권영자가 직접 해인의 눈가를 닦아줬다.권영자는 자애로운 목소리로 말했다.“이것 좀 봐라. 눈이 이렇게 빨개지도록 울었네? 한씨 가문엔 처음 온 날인데, 누가 보면 집안에서 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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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7화

한원랑은 해인에게 제대로 떠밀린 셈이었다.그래도 해인의 말투는 한없이 부드러웠고, 입에서 나오는 말마다 듣기 좋았다. 듣고 있으면 괜히 마음이 풀어질 정도였다.새로 들어온 며느리 앞에서 자신의 체면을 세우고, 좋은 시아버지라는 인상까지 지키고 싶었던 한원랑은 곧장 김 집사를 불렀다.“가서 유호부터 제대로 살펴봐. 상처도 조심해서 챙기고.”한원랑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내 서재에 걸려 있는 그림 하나 있지. 그거 내려서 해인이한테 줘. 며느리를 처음 보는 날인데 그냥 보낼 순 없잖아.”김 집사는 바로 몸을 돌렸다. 그런데 그 틈을 탄 천하솜이 비죽 웃으며 끼어들었다.“그 그림이 예전 명인의 작품인 건 다 아는 사실이잖아요. 그림 한 점 값만 해도 웬만한 고급 빌라 한 채는 된다던데, 회장님 손이 참 크시네요.”권영자가 천하솜을 힐끗 봤다.“한씨 가문이 어떤 집안이야? 한 회장이 자기 며느리한테 넉넉하게 안 쓰고 누구한테 쓰겠냐? 이름도 자리도 없는 바깥사람 좋은 일만 시키란 말이냐?”천하솜은 그대로 말문이 막혔다. 권영자가 이렇게까지 대놓고 해인 편을 들 줄은 몰랐던 것이다.‘이 늙은이 앞에서 맞받아쳤다간 끝이야.’천하솜이 아무리 배짱이 있다 해도, 권영자와 정면으로 부딪칠 생각은 할 수 없었다.무엇보다 방금 권영자의 말은 한원랑 곁에서 수년 동안 붙어 지내고 있는 여자 셋을 한꺼번에 비웃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이름도, 명분도 없이 그저 곁에만 두는 ‘첩’들이라고.해인은 그제야 알았다. 한원랑이 말한 서화 한 점이 얼마나 비싼 물건인지.그래도 해인은 그런 것에 큰 흥미가 없었다. 이름난 그림은 정기적으로 손을 봐야 했고, 관리법도 까다로웠다. 해인처럼 잘 모르는 사람이 들고 있다가 괜히 망치기라도 하면 그게 더 아까운 일이었다.해인은 한원랑을 향해 조용히 말했다.“아버님께서 아끼는 그림이라면 제가 괜히 빼앗는 것 같아서요. 저는 안 받아도 괜찮아요.”“그래?”한원랑은 굳이 억지로 권하지는 않았다.이 또래의 어린 여자가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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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8화

해인은 조우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목소리는 한층 더 부드러워졌다. 꼭 다정한 누나가 타이르듯 살갑고 온화했다.“다음부터는 모래나 흙장난 너무 심하게 하면 안 돼, 알겠지?” “지저분하기도 하고 진흙바닥에 넘어지거나 어디 부딪히기라도 하면, 천 여사님도 걱정하시고 회장님도 마음을 쓰시게 되잖아.”그 말을 듣자, 한원랑은 더 설명을 듣지 않아도 사정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며칠 전, 한원랑이 수집가 몇 명을 집으로 초대한 적이 있었다. 그날 조우가 장난을 치다가 모래와 흙으로 손님 한 명의 옷을 더럽혔고, 한원랑은 체면을 세우기 위해 청화백자 화병 한 점을 선물로 내줘야 했다.‘혹시 똑같은 짓을 해인이한테도 한 건가?’한원랑은 바로 감이 왔다.해인은 그 일을 굳이 문제 삼지 않았는데, 천하솜 모자가 되레 먼저 와서 해인의 흉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남 탓을 하면서, 없는 말까지 보태며 일을 뒤집어씌우려 했다.그날 일을 떠올리자 한원랑은 다시 짜증이 치밀었다. 그 일로 손님들 앞에서 체면을 단단히 구겼으니, 마음이 좋을 리 없었다.한원랑은 곧장 천하솜을 향해 쏘아붙였다.“애 좀 제대로 가르쳐. 맨날 사고만 치고 다니잖아. 그렇게 감싸기만 하니까 애가 버릇없게 된 거야.”천하솜은 곧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회장님... 조우가 아직 어려서 그래요. 뭘 잘 몰라서 그런 거예요.”한원랑의 표정이 더 굳어졌다.“애가 몰라도 어른은 알아야지. 아까 그 말들, 네가 시켜서 하게 한 거 아니야?”천하솜은 더는 입을 열지 못했다.권영자가 해인의 손을 잡아 끌면서 말했다.“해인아, 넌 먼저 수장고에 가서 선물부터 골라라. 그리고 이따가 저녁 먹고 가.”해인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때, 서른이 조금 넘은 듯한 미인이 2층 난간에 기대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몸에 붙는 원피스를 입은 여자는 아래를 내려다보며 입꼬리를 가볍게 올렸다. 풍기는 분위기부터 예사롭지 않았다.‘앞으로 이 집이 더 시끄러워지겠네.’여자는 그렇게 생각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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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9화

유호의 표정을 보는 순간, 유호의 눈에 어린 기색을 마주하자마자 해인은 곧바로 알아챘다.방금 아래에서 했던 그 얄밉도록 능청스러운 자신의 연기를 유호에게 전부 들켜 버렸다는 걸.괜히 민망해진 해인은 어색함을 덮으려는 듯 서둘러 말했다.“저 수장고에 가서 선물 하나 고르기로 했어요. 당신도 같이 갈래요?”그 말을 듣자 유호의 눈빛이 금세 달라졌다.그 안에 있는 건 전부 한원랑의 소장품이었다. 유호는 한원랑과 얽힌 물건이라면 무엇이든 달가워하지 않았다.“난 쉬어야 해. 혼자 가. 다 보고 나면 다시 와.”해인은 아직도 열이 남아 있는 유호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지금은 더 자는 게 낫겠어.’권영자는 진주를 붙여 해인을 들여보냈다.수장고 안으로 들어선 해인은 그야말로 입을 다물지 못했다.바깥에서 한원랑이 수집광이라는 말을 숱하게 들었는데, 그 소문은 과장이 아니었다.눈앞에 펼쳐진 건 거의 박물관이었다. 어쩌면 웬만한 박물관보다도 더 많을지도 몰랐다. 진열장마다 값비싼 물건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고, 해인은 어디부터 봐야 할지 몰라 눈이 어지러울 지경이었다.이 안에 있는 물건 값을 전부 합치면, B시 몇 해 예산을 통째로 모아도 모자랄 것 같았다.진주 역시 이곳은 처음 들어와 보는 눈치였다. 진주는 주변을 한번 살핀 뒤,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하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작은 사모님, 오늘 회장님 마음에 드신 건 맞는데요. 대신에 그 세 분은 전부 불편해하실 거예요.”한원랑이 해인을 수장고에 들인 건 결국 체면 때문이었다.처음 보는 며느리에게 주는 인사치레 선물인데, 시아버지 입장에서 너무 박하게 굴 수도 없었을 것이다.진주는 권영자의 사람답게, 권영자가 직접 꺼내기 어려운 말을 대신 전해주고 있었다.해인은 곧바로 알아들었다.권영자가 자신에게 조심하라는 뜻을 전한 것이었다.해인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삼켰다.‘한씨 가문의 ‘속사정’은 정말 깊네.’‘할머니도 참... 운시사에서 나를 데려갈 때는 손자 자랑만 한가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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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0화

해인이 손목에 매듭을 다 정리해 준 뒤에야 유호는 천천히 손을 들고 바라봤다.눈썹을 살짝 치켜세운 유호의 눈가에는 웃음기가 살짝 어려 있었다.“이게 뭐야?”해인이 대답했다.“많은 축복을 담고 있는 팬던트예요.”유호의 눈빛이 묘하게 깊어졌다.“내가 평안하고 행복하길 바라는 거야?”유호는 손목에 매인 자그마한 팬던트를 내려다보다가 입가를 비스듬히 당기며 한마디를 더 얹었다.“아니면... 날 아기 취급하는 거야?”붉은 실에 백옥이 어우러진 모습은 제법 잘 어울렸다.해인은 유호가 그런 반응을 보이자 곧 알아차렸다.유호는 이미 까맣게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이게 원래 유호가 어릴 적에 차고 다니던 물건이라는 걸.하긴, 벌써 20년도 넘게 지난 일이었다. 아직 기억하고 있는 편이 오히려 더 이상할 터였다.해인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이건 당신이...”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가사도우미가 문밖에서 두 사람을 불렀다.“식사 준비됐어요.”해인은 손을 뻗어 유호의 이마를 짚어 봤다. 손끝에 닿는 피부는 땀 때문에 축축했지만, 다행히 열은 내려가 있었다.다이닝룸으로 들어가자 한씨 가문 사람들이 이미 자리를 다 잡고 앉아 있었다.한원랑이 가장 아끼는 최수나는 한원랑의 옆자리에 앉아 있었고, 몸에 딱 붙는 원피스 차림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서정란을 많이 닮아서 사랑받는다는 말이 괜한 소문은 아닌 듯했다. 해인은 최수나를 힐끗 더 바라봤다. 정말 눈에 띄게 아름다운 여자였다.권영자까지 자리에 앉아 있는데도 한원랑은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왕단영이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회장님은요? 왜 아직 안 오시죠? 사람을 보내서 한번 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최수나는 해인을 한번 흘끗 바라봤다. 그 시선에는 뭔가 뜻이 담겨 있었다. 최수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말끝을 늘였다.“전화 받으러 가셨어. 젊은 사람의 전화인 것 같던데, 성이 고씨라고...”그 말을 듣자 해인의 마음이 이상하게 착 가라앉았다.‘고씨 성이 젊은 사람? 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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