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키워온 장미를 숙적에게 빼앗긴 밤: Chapter 301 - Chapter 310

354 Chapters

제301화

희정의 표정이 곧바로 굳어졌다. 유호의 그 말에는 희정 체면을 봐준 흔적이 조금도 없었다.배우들이 드문드문 복도를 지나갔다. 다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모자 아래로 드러난 눈에는 뻔히 구경거리를 좇는 기색이 어려 있었다.희정은 억지로 한 번 웃어 보이며 제 말에 제 손으로 마침표를 찍었다.“우리 이렇게 오랜만에 봤는데, 그냥 농담 한 번 해본 거잖아.”“그런 농담은 하지 마.”유호는 희정과 선을 분명히 긋겠다는 듯 뒤로 물러났다. 한 손은 가볍게 해인의 허리에 얹혀 있었다. 온몸으로 ‘나는 내 여자한테만 잘한다’고 말하는 사람 같았다.“우리가 언제 그렇게 막 농담할 만큼 가까웠어?”이렇게까지 말을 내뱉자 분위기가 어정쩡하게 가라앉았다. 희정도 더는 스스로 민망한 쪽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차갑게 굳은 얼굴로 룸카드를 찍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반면 유호는 눈가에 웃음을 머금은 채 해인을 바라봤다.“나 방금 잘했어?”해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대로 방 안으로 들어갔다.복도에 서서 꼼짝없이 두세 시간을 보내는 동안, 유호는 계속 생각했다. 대체 어디서 잘못됐는지.유호는 해인이 이유 없이 감정부터 앞세우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분명 해인이 싫어하는 지점을 유호가 건드린 게 틀림없었다.‘내가 뭘 놓친 거지?’곱씹을수록 걸리는 건 하나뿐이었다.할 말은 오전에 전부 해뒀다. 굳이 따지자면 하나 숨긴 게 있었다. 예전에 희정이 유호에게 고백한 적이 있다는 것.다만 유호의 생각은 단순했다. 유호에게 그 고백은 애초에 마음에 담아둘 만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니 굳이 따로 말할 필요도 없다고 여겼다.[너 그건 잘 모르는구나. 이게 바로 남자랑 여자 생각이 다른 거야! 너한텐 별거 아니어도 제수씨는 별거일 수 있다고!][네가 먼저 털어놓지 않으면, 제수씨는 네가 찔려서... 일부러 숨긴다고 생각할 수도 있어...][친구야, 너 이제 살 만해졌구나. 제수씨가 너 신경 쓴다는 뜻이잖아!]방금 복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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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2화

해인은 유호가 조금 우쭐하고 있다고 생각했다.정말 꼬리라도 달렸다면 하늘 끝까지 치켜세웠을 것 같은 기세였다.급하게 출장길에 오르느라 워낙 정신이 없었던 건 사실이었다. 챙겨 나온 게 거의 없었다. 유호가 Y시까지 따라올 거라고도 예상하지 못 했고, 갈아입을 옷이며 기초 화장품까지 한가득 챙겨 들고 올 줄은 더더욱 몰랐다.그러다 해인은 두 시간쯤 전, 유호가 자신을 보자마자 배고프다고 투덜대던 게 떠올랐다. 복도에 그렇게 오래 서 있었으니, 제대로 뭘 먹지도 못했을 가능성이 컸다.“알겠어요. 물 받아 둘 테니까, 테이블 위에 있는 간식 조금 먹고 있어요. 이따 식사도 시켜 줄게요.”해인이 그렇게 말하자마자 초인종이 울렸다.유호가 먼저 문 쪽으로 걸어갔다.“우리 여보는 진짜 나한테 잘하지. 근데 내가 미리 시켜 놨어.”문 앞에는 호텔 식음팀 직원이 서 있었다. 유호는 직원에게서 김이 오르는 따뜻한 면 요리를 받아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그 위에 올라간 달걀을 본 해인은 무심코 혀끝으로 입술을 적셨다. 저녁에 해인도 같은 메뉴를 먹었다는 게 떠올랐다. 맛도 괜찮았고, 속도 편했다.해인은 눈썹을 살짝 들어 올렸다.“시간을 아주 딱 맞췄네요.”유호가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착하고 마음 약한 우리 여보가 나를 복도에 밤새 세워 둘 사람은 아니잖아.”해인은 그 말에 굳이 대꾸하지 않았다.그녀는 욕실로 들어가 욕조에 물을 받기 시작했다. 캐리어에서 스킨케어 제품도 꺼내 하나씩 바르기 시작했다. 여자들 기초 관리라는 게 원래 손이 많이 간다. 이거 바르고 저거 덧바르다 보니, 어느새 이십 분 가까이 흘러 있었다.그런데 해인이 욕실 문 쪽으로 걸어가 유호를 부르려고 했을 때,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맞닥뜨렸다.문 앞에 있던 유호가 해인의 손목을 가볍게 잡아당겼고, 해인은 중심을 잃은 채 다시 욕실 안으로 끌려 들어갔다. 그와 동시에 유호는 거리낌 없이 웃으며 셔츠를 벗어 던졌다.눈앞으로 드러난 단단한 상체에 해인은 숨이 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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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3화

밀폐된 욕실 안에서는 작은 소리 하나까지 또렷하게 들렸다. 거세게 쏟아지는 물소리는 귓가를 가득 메웠고, 두 사람 사이에 감돌던 기류는 점점 더 짙어졌다.그날 밤은 여러모로 사람을 버티기 어렵게 만드는 밤이었다....다음 날 아침, 해인은 천천히 눈을 떴다. 가장 먼저 느껴진 건 유호의 두 팔이었다. 유호는 밤새도록 해인의 허리를 단단히 끌어안은 채 잠들어 있었다.남자의 숨이 고르게 오르내릴 때마다 가슴팍의 움직임이 선명하게 전해졌다. 해인은 그 감각에 괜히 어젯밤 일이 겹쳐 떠오르면서 금세 열이 올랐다.애써 떠올리고 싶지 않았는데도 밤사이 쌓인 장면들이 제멋대로 머릿속을 파고들었다.‘생각하지 말자.’해인은 괜히 뺨을 가볍게 두드리고는 고개를 돌렸다.유호는 눈을 꼭 감은 채 깊이 잠들어 있었다. 해인은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유호의 잠든 얼굴을 들여다본 적이 없었다. 희미하게 올라온 턱수염 자국까지 보일 만큼 가까웠다.듣기로는 유호가 군에서 거의 십 년을 보냈다고 했다. 해인의 머릿속에서 군 생활을 오래한 사람은 대개 거칠고 투박한 이미지였다.그런데 유호는 전혀 달랐다. 꾸미는 데 시간을 많이 쓰는 편도 아닌데 피부결도 깨끗했다. 좋은 피부를 타고난 것 같았다.이목구비는 지나칠 정도로 반듯했다. 곧고 오똑한 콧날에, 여자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긴 속눈썹. 유호는 한눈에 시선을 붙드는 짙은 인상의 얼굴이었다. 몸선도 마찬가지였다. 단단하게 다져진 근육은 과하지 않았고, 마른 느낌과도 거리가 멀었다.‘이 사람은 정말... 너무 반칙 같아.’해인은 속으로 작게 중얼거렸다.해인은 저도 모르게 유호의 품 안으로 조금 더 파고들었다. 이렇게 따뜻한 품은 늘 해인의 마음을 느슨하게 만들었다. 이상하게도 지금 이렇게 있으니 오랜만에 마음이 놓였다.유호는 일을 미뤄 두고 Y시까지 왔다. 해인의 마음속에 남아 있던 찜찜함을 풀어주겠다고, 그 이유 하나만으로 달려왔다. 그 사실만으로도 해인은 자신이 분명히 소중히 여겨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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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4화

남자의 넓은 가슴이 빈틈없이 감싸 오자, 해인은 심장이 또렷하게 빨라지는 걸 느꼈다.막 잠에서 깬 유호에게서는 눅진한 체온과 생기가 한꺼번에 밀려왔다. 단단한 팔 안에 갇히듯 안겨 있자, 해인은 그 미세한 떨림과 긴장까지도 숨길 수 없었다.해인의 뺨이 서서히 붉어졌다.어젯밤 유호는 해인이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뜨거웠다. 욕실 안에서 기운이 빠져 한동안 제대로 서 있기조차 힘들었던 탓에, 지금도 다리에 힘이 조금 풀려 있었다.‘정말 사람을 이렇게까지 지치게 하다니...’유호는 입꼬리가 느슨하게 올라갔다. 해인의 입술을 엄지로 천천히 문지르더니, 붉게 달아오른 그 입술에 다시 입을 맞췄다. 오래 참은 사람처럼 다급하면서도 집요한 기색이 묻어 있었다.“읏... 정말... 못됐어요.”...몇 차례나 서로에게 깊이 기대고 난 뒤, 유호는 셔츠와 바지를 말끔히 갖춰 입었다.그러다 테이블 위에 놓인 서류를 보고 시선이 멈췄다.“이건 왜 보고 있었어?”기업 경영 관련 자료였다. 유호의 기억이 맞다면, 어젯밤 우진이라는 사람이 가져다준 것이었다.해인은 아직 열기가 다 가시지 않은 얼굴로 이불을 끌어안은 채, 숨기지 않겠다는 듯 유호를 올려다보았다.“언젠가 당신이 날 실망시키면, 미련 없이 돌아설 수 있게 준비해 두려는 거예요.”그 말 속에는 다른 뜻도 들어 있었다. 회사 문제로 또다시 누구에게든 휘둘리고 싶지 않다는 뜻. 해인은 이미 태겸에게 한 번 크게 데인 적이 있었다. 같은 상처를 또 되풀이하고 싶지는 않았다.‘똑같은 일은 다시 겪지 않을 거야.’유호는 가만히 해인을 내려다보다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그런 날은 안 와.”다만 해인이 스스로를 더 키우고 싶어 하는 마음만큼은 유호도 반겼다.“내 사무실에 이런 쪽 책이 몇 권 있어. 시간 될 때 집으로 가져올게.”유호는 시간을 확인했다. 주헌에게서 재촉하는 메시지가 와 있었다. 더 늦으면 공항으로 가는 일정이 빠듯해질 터였다.유호 시선이 다시 해인에게로 향했다. 해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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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5화

호텔 레스토랑은 제법 넓었다. 식사 시간이 애매한 때라 사람도 많지 않았다. 비어 있는 자리는 얼마든지 있었다.해인은 수저를 내려놓고 고개를 들었다. 희정을 바라보는 얼굴은 살짝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눈빛에는 거리감이 선명하게 드러났다.“난 모르는 사람이랑 같은 테이블에서 밥 먹는 거 안 편해.”희정도 웃었다. 해인이 자신을 반기지 않는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뭘 그렇게 아닌 척해? 진짜 내가 누군지 모르겠어?”해인 손가락 끝에 힘이 들어갔다. 숨도 조금 가빠졌다.‘또 무슨 말을 하려고.’희정이 입꼬리를 비틀었다.“너... 태어나자마자 네 엄마가 왜 쓰레기통에 버렸는지 몰라?”희정은 해인 눈을 똑바로 보며 말을 이었다. 목소리에는 사람을 후벼 파는 독기가 배어 있었다.“네가 우리 아빠가 바람이 나서 생긴 애라서 그래. 넌 세상에 드러나면 안 되는 사생아야. 애초에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어.” “친엄마도 널 버렸는데, 살면 뭐 해? 그냥 죽지 그랬어?”흥분한 희정과 달리, 해인은 놀랄 만큼 차분했다. 희정이 내뱉는 그 말들이 해인에게는 처음 듣는 이야기가 아니었다.이미 오래전에 강씨 가문 사람들이 사고를 당한 뒤 도수희가 해인을 찾아와 데려가겠다고 했을 때, 해인은 모든 진실을 알게 됐다.도수희는 그때 내내 울면서 말했다. 갓난아이를 버린 데에는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다고. 하지만 해인은 그 여자와 어떤 관계도 맺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자기가 엄마라고 부르지도 않을 사람의 변명을 들어줄 생각도 없었다.이유가 무엇이든, 태어난 지 며칠 되지도 않은 아이를 버린 사람이라면 이미 엄마의 자격을 잃은 거나 마찬가지였다.해인은 자신의 출생을 고를 수 없었다. 어떤 집안에서 태어날지 선택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앞으로 어떤 삶을 살지는 스스로 정할 수 있었다.다만 16살의 해인은 그걸 몰랐다. 아버지와 오빠를 잃은 데다가 출생의 진실까지 한꺼번에 들이닥치자, 해인은 오랫동안 깊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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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6화

해인이 끼얹은 물은 기가 막히게 정확했다. 거의 물로 후려친 것처럼, 희정의 뺨을 세게 때렸다.희정은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흠뻑 젖었다.희정은 눈을 크게 뜬 채 믿을 수 없다는 듯 해인을 노려봤다.“지금 나한테 물 뿌린 거야? 이 사생아 주제에, 네가 뭔데?”해인은 담담하게 받아쳤다.“내가 손이 더 빠르니까. 내가 더 정확하게 뿌렸으니까.”차분한 해인과 견주면, 지금 희정은 그야말로 막무가내로 소리치는 사람처럼 보였다.식사 시간이 가까워지자 식당 안으로 사람들이 하나둘 들어오기 시작했다. 흠씬 젖은 채 서 있는 희정 쪽으로 호기심 어린 시선들이 자꾸만 쏠렸다.희정도 나름대로는 교양을 갖춘 집안에서 자란 사람이었다. 감독이라는 직업만으로도 어느 정도 대중의 시선을 받는 위치였다. 차씨 가문은 정계와 맞닿아 있었고, 차씨 가문의 딸인 희정 역시 어려서부터 예절을 배우며 컸다. 어쨌든 고위직 인물의 딸답게, 희정은 금세 알아차렸다. 여기서 더 감정을 드러냈다가는 괜히 남들 입에 오르내릴 뿐이라는 걸.‘여기서 더 망가지면 나만 손해 보게 돼.’희정은 치밀어 오른 분노를 억지로 눌러 삼켰다. 테이블 위에 놓인 냅킨을 집어 들고, 얼굴에 맺힌 물기를 조심스럽게 찍어 냈다.“나랑 내기할래? 유호가 조금씩 너한테서 멀어지다가 결국 나한테 올 거라고.”해인은 고개를 한쪽으로 살짝 기울였다.“방금 전까진 사생아라고 욕하더니, 이젠 네가 내 앞에서 대놓고 내연녀 자리 예약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난 내 출생을 고를 수 없었어. 근데 넌 스스로 그 자리로 기어들어가고 있네?”희정의 표정이 굳어졌다. 아픈 데를 정통으로 찔린 사람 같았다. 그래도 희정은 곧바로 변명했다.“유호는 내가 먼저 알았어.”그러자 해인이 곧장 되받았다.“연애가 줄 서는 것도 아니잖아.”희정은 일부러 비웃듯 입꼬리를 비틀었다.“왜, 겁나? 질까 봐?”해인은 웃는 낯으로 희정을 바라봤다.“난 배가 불렀는데 내 남자가 언제 변심하나 그딴 걸 두고 너랑 내기를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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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7화

희정은 어느 것 하나 빠지는 데가 없는 사람이었다. 집안도 좋았고, 외모도 빼어났다. 어린 나이에 연출한 첫 작품으로 상까지 받았으니, 앞날도 훤하다고들 했다.다만 대학을 졸업한 희정이 제일 먼저 한 일이 유호를 찾아 군부대까지 달려가 고백한 일이라는 게, 서진은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거절당한 뒤에는 당연히 마음을 접을 줄 알았다. 그런데 희정은 몇 년 동안 잠잠한가 싶더니, 이제 와 다시 그 일을 꺼내 들고 있었다.서진은 희정이 왜 이러는지 알고 있었다. 희정은 아직도 인정할 수 없는 거였다.유호가 해인과 결혼했다는 사실을.직접 마주친 적은 없어도, 오래전부터 희정이 이를 갈며 미워해 온 사람이 바로 해인이었다.강씨 가문 사람들이 변을 당한 뒤, 도수희는 해인을 차씨 가문으로 데려오려고 했다. 하지만 희정은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데려오면 자기가 죽겠다고 버티기까지 했다.희정에게는 이미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 도수희가 들어와 어머니 자리를 차지한 것만 해도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그런데 해인까지 들어와서, 원래 자기 것이어야 할 사랑까지 가져가게 둘 수는 없었다.그래서 희정은 집에서 울고불고 난리를 쳤다. 해인을 데리고 오기만 하면 당장 뛰어내려 죽겠다고 악을 썼다. 차씨 가문은 정계와 얽혀 있는 집안이다. 일이 커지는 걸 감당할 수 없어서, 결국 그 문제는 일단 덮어 둘 수밖에 없었다.대신 희정이 그렇게까지 난리를 친 탓에, 아버지와 도수희는 희정에게 더 큰 빚을 진 것처럼 굴었다. 집에서는 온 식구가 희정 눈치를 보게 됐다.희정은 손등 위에 얹힌 서진의 손을 빼냈다. 서진이 자기에게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희정의 마음은 온통 유호에게 쏠려 있었다.“다음부터는 그렇게 비싼 케이크 사지 마. 나... 너한테 고마워할 생각도 없으니까.”서진은 희정을 보며 조용히 말했다.“너한테 고맙단 말 들으려고 한 것도 아니야.”희정이 곧장 말을 이었다.“강해인이 왜 Y시에 왔는지 알아봐 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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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8화

택시가 공연장 앞에 멈춰 섰다.오늘 만나기로 한 고객은 ‘주’ 씨 성을 가진 사람이었다. Y시에서는 이름만 대도 아는 부호였다. 자동차를 대량으로 구매하려는 이유도 분명했다. 자신이 운영하는 휴양 리조트가 수십 곳에 달하는데, 비즈니스 접대용 차량이 대거 필요했던 것이다.와세라 쪽 영업총괄이 이미 주 대표와 이야기를 거의 마무리해 둔 상태라고 했다. 다만 상대 쪽에서 기술 관련해 몇 가지를 더 깊이 확인하고 싶어 했고, 그 부분이 마침 해인 전공과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그래서 소함청이 해인을 Y시로 보낸 것이다.해인은 어젯밤 호텔에서 이 회사 대표 주용원의 자료를 미리 훑어봤다.주용원은 B시 출신이었다. 십여 년 전 Y시로 내려와 사업을 시작한 뒤 줄곧 이곳에서 기반을 다졌고, 지금은 사업이 크게 번창해 있었다. 다만 남다른 취향 하나가 있었다. 가야금 연주 듣는 걸 몹시 좋아했다. 취향도 꽤 까다로워서 웬만한 실력으로는 주용원의 눈에 들기 어렵다고 했다.어젯밤 주용원 사진을 처음 봤을 때, 해인은 묘하게 낯이 익다는 느낌을 받았다.분명 어디선가 본 적 있는 얼굴 같았다.그런데 막상 떠올리려 하니 좀처럼 생각이 이어지지 않았다.‘어디서 봤더라. 분명히 본 적이 있는데.’해인은 초대장을 내밀었다. 주용원은 돈을 쓰는 데 거리낌이 없는 사람답게 공연장을 통째로 빌려 놓은 상태였다.무대 위에는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앉아 있었다. 얇은 베일이 얼굴을 가리고 있었고, 품 안에는 가야금이 안겨 있었다. 손끝에서 흘러나오는 선율은 맑으면서도 단단했다. 조금만 들어도 보통 솜씨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해인도 어릴 적 악기를 배운 적이 있었다. 하필 그 악기 역시 가야금이었다. 다만 두세 달 정도 배우다가 그만뒀고, 끝까지 붙들고 가지는 못했다.아버지는 그때 이렇게 말했다.“현악기는 손이 참 많이 가. 제대로 소리를 내려면 연습도 독하게 해야 하고, 손가락엔 굳은살이 여러 번 박여야 해.” “우리집에 딸이라고는 해인이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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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9화

영업총괄이 몇 달이나 공을 들여 따낸 계약이었다. 사실상 성사 직전까지 온 일인데, 해인의 손에 와서 틀어지게 할 수는 없었다.‘여기서 놓치면 안 돼.’해인이 조용히 말했다.“일단 지켜보자.”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한 곡이 끝나자 공연장 안에 박수가 크게 터져 나왔다. 최수나는 허리를 숙여 인사한 뒤 무대 뒤편으로 걸어 들어갔다. 곧 막이 드리워졌다.주용원과 희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모습을 본 해인도 곧바로 두 사람 쪽으로 향했다.“주 대표님, 저는 와세라에서 이번 구매 건 맡고 있는 강해인 팀장입니다. 오늘 저녁에 잠시 시간이 괜찮으시면, 저희가...”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희정이 끼어들었다.“삼촌, 배고파요. 일단 식당부터 가요.”‘삼촌?’해인은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주 대표와 차희정이 친척인 건가?’주용원이 해인을 보며 말했다.“강 팀장 맞지? 나 지금 밥 먹으러 가는 길인데, 같이 갈까? 먹으면서 얘기하지.”해인은 본능적으로 희정 쪽을 한번 봤다. 희정은 턱을 살짝 치켜든 채 묘하게 웃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속셈이 훤했다. 희정이 중간에서 일을 틀어지게 할 게 분명했다. 편하게 끝날 자리는 아닐 가능성이 컸다. 희정이 끼어 있는 이상, 이야기가 어그러질 수도 있었다.그래도 해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마주 앉아야 실마리라도 잡을 수 있었다. 아예 대화조차 못 하면 가능성은 처음부터 없는 셈이니까.“불러 주셔서 감사합니다.”그런데 식당에 들어간 뒤에도 희정은 줄곧 주용원을 자기 옆에 붙들어 놨다.한참은 최근 촬영장에서 벌어진 황당한 일들을 떠들었고, 또 한참은 연예계 뒷이야기를 꺼냈다. 마흔 중반을 넘긴 주용원은 사실 그런 이야기에 큰 흥미가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몇 번 말이 오가고 나자, 주용원도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챈 듯했다.“희정아, 강 팀장이랑 무슨 일이 있니?”주용원이 희정의 삼촌이라고는 해도 사실 촌수는 제법 멀었다. 윗대부터 왕래가 뜸했고, 명절에도 자주 드나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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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0화

해인은 최수나를 바라보며 의아한 듯 물었다.“예전부터 저를 아셨어요?”최수나는 가는 담배를 입술에 물고 한 번 더 깊게 빨아들였다.“해인 씨가 여섯 살 때, 내가 두 달 정도 가야금 가르친 적이 있어.”해인은 잠시 말을 잃었다.해인과 최수나 사이에 그런 인연이 있었단 말인가?하지만 여섯 살이면 막 기억이 또렷해지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함께한 시간도 고작 두 달뿐이었다. 게다가 그 일은 이미 십수 년 전의 일이었다. 기억하지 못하는 게 오히려 자연스러웠다.‘그래서였구나.’그러고 보니 지난번 한씨 가문에서 그 두 여자가 해인을 못마땅해하며 몰아세울 때도, 최수나는 대체로 옆에서 지켜보기만 했었다. 적어도 그 둘처럼 대놓고 해인을 향해 날을 세우지는 않았다.최수나는 어딘가 먼 곳에 시선을 향한 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눈이었다.“해인 씨가 여섯 살 때 나는 아직 음대 학생이었어. 강 회장님 집안에서 막내한테 가야금 가르칠 선생을 찾고 있었는데, 학생들 여럿 가운데서 바로 나를 골랐지.”결과적으로 보면 강 회장의 안목은 정확했다.최수나는 그 몇 기수 안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학생이었다. 졸업도 하기 전에 국내 최정상급 국악단에 발탁됐고, 들어간 지 1년도 안 돼 가야금 수석 자리에 올랐다.악단에 사람이 백 명이 넘게 있어도 수석 자리는 많아야 한두 명뿐이었다.해인은 입술을 한 번 다물었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그럼 제가 최 여사님이라고 불러야 하나요, 아니면... 최 선생님이라고 불러야 하나요?”최수나는 입꼬리를 올리면서 웃었다.서른을 훌쩍 넘긴 나이였는데도 눈가에는 주름도 거의 없었다. 가장 시선을 끄는 건 입술이었다. 얇고 매끈한 모양의 입술은 가만히 있어도 웃는 듯한 선을 그리고 있었다. 눈매에도 묘한 기품이 감돌았다. 오래된 흑백 영화에서 걸어 나온 사람 같은 미인이었다.최수나는 해인을 보다가, 어느새 해인 너머의 다른 누군가를 바라보는 것처럼 눈빛이 가볍게 흔들렸다.“둘만 있을 땐 그냥 편하게 불러.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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