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키워온 장미를 숙적에게 빼앗긴 밤: Chapter 311 - Chapter 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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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1화

그때 주용원이 말했다.“그럼. 수나는 악단 수석까지 했던 사람이야. 지금은 그만뒀지만, 요즘 나오는 어린 애들 중에 수나보다 가야금 잘 타는 사람은 못 봤어.”희정은 잠깐 굳은 표정으로 최수나와 주용원을 번갈아 봤다.“삼촌이랑 최 여사님, 원래 아는 사이셨어요?”주용원은 최수나를 한번 바라봤다. 눈빛에 설명하기 어려운 기색이 스쳤다.“우리 안 지 꽤 됐어.”그 말을 듣자 희정의 시선이 두 사람 사이를 바쁘게 오갔다. 희정은 둘이 어떤 관계인지 재빨리 가늠해 보려고 했다.듣기로는 최수나가 스물몇 살 무렵부터 한원랑 곁에 있었다고 했다. 처음에는 한원랑의 아이를 가진 적도 있었지만, 결국 낳지 못하고 유산했다고 들었다. 지금 최수나는 서른 초반이었고, 여전히 한창때의 분위기를 그대로 품고 있었다.주용원도 최수나보다 고작 몇 살 더 많을 뿐이었다. 젊었을 때는 꽤 잘생겼다는 말도 들었다.희정은 제 눈앞에 뭔가 떳떳하지 못한 비밀이 놓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설마... 둘이 그런 사이야?’‘그렇지 않고서야 최수나가 왜 매달 멀리 Y시까지 오는 건가?’‘정말 공연 때문이기만 한 거야?’‘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건가?’희정의 심장 뛰는 속도가 조금 빨라졌다. 다만 그런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해인은 우진에게 눈짓했다. 우진은 곧바로 챙겨 온 서류를 꺼냈다.해인은 서류를 받아 들고 주용원 쪽으로 내밀며 말했다.“주 대표님, 이건 저희 와세라 차량 안전성 검증 자료입니다. 특히 기술은 업계 에서도 독보적인 수준이고, 현재 시중에서 적용되는 핵심 특허도 여러 건 확보하고 있습니다.”희정이 곧바로 얼굴을 구겼다.“너 진짜 뻔뻔하다. 아까 우리 삼촌이 이미 거절한 거 아니었어? 같이 안 한다고 했으면 얼른 가면 되지, 왜 여기까지 따라붙어?”희정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뜻밖에도 최수나가 해인이 내민 서류를 받아 들었다. 최수나는 몇 장 훑어보더니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이 정도 특허면 괜찮은데. 주 대표, 왜 안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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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2화

문득 해인을 바라보는 주용원의 눈빛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빛이 어른거렸다.“강 팀장, 강동현이랑 무슨 사이야?”해인은 뜻밖이라는 듯 주용원을 봤다.“저희 큰오빠예요. 주 대표님, 저희 큰오빠를 아세요?”“동현이는 내 절친이었어. 학교로 치면 후배이기도 했고. 우리 무리 안에서는 제일 뛰어난 놈이었지.”주용원 표정에는 짙은 아쉬움이 번졌다. 눈가에는 옅은 슬픔도 배어 있었다.“근데 참... 아깝게 됐어.”해인은 조용히 시선을 내렸다.주용원이 큰오빠 동현과 예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라는 건 해인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그러고 보니 처음 주용원을 봤을 때부터 왠지 낯이 익다고 느꼈다.‘이제야 생각났네.’해인은 그제야 떠올렸다. 동현이 세상을 떠났을 때, 주용원도 빈소에 왔던 것 같았다.다만 그때 해인은 아직 어린 나이였다. 갑작스럽게 닥친 비극 앞에서 마음을 추스를 겨를조차 없었고, 자연히 주변 사람들까지 세세하게 챙겨 볼 정신도 없었다.해인의 기억 속 동현은 늘 사람들 사이에서 중심에 서 있던 사람이었다. 친구도 많았고, 누구에게나 믿음을 주는 성격이었다. 책임감도 강했다. 집안 회사를 맡은 뒤에는 아버지를 도와 회사 안팎의 골치 아픈 문제들을 많이 정리했다.동현은 명문대 출신이었다. 경영학과 재무를 함께 공부해 석사 학위까지 받았고, 앞을 내다보는 눈도 남달랐다. 졸업 뒤 YD그룹에 들어간 동현은 회사 체질을 바꿔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다.마침 경제 흐름이 급격히 달라지던 때였다. 동현이 먼저 변화를 밀어붙인 덕분에 YD그룹은 경쟁사보다 한발 앞서 체제를 손봤고, 빠르게 시장을 선점했다. 그렇게 업계 선두 자리까지 올라섰다.강씨 가문에 사고가 닥친 뒤, YD그룹도 한동안 크게 흔들렸다. 뉴스에서는 하나같이 비관적인 전망만 쏟아냈다. YD그룹이 지켜 온 위치도 머지않아 경쟁사들에게 잠식당할 거라는 말이 끊이지 않았다.그런데 동현은 사람을 대하는 법을 잘 알고 있었다. 사업을 하며 맺어 둔 인연도 많았다. 나중에 고씨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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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3화

해인은 문 쪽으로 다가가서 문을 열었다.“왜?”우진이 해인을 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아까부터 팀장님 기분이 별로 안 좋아 보였습니다. 저녁도 거의 못 드셨고요.”“아래에 꼬치구이집이 하나 있는데, 프런트에서 맛이 괜찮다고 하더라고요. 저랑 같이 가실래요?”솔직히 해인은 가고 싶었다. 꼬치구이는 해인이 좋아하는 음식 가운데 하나였다.그런데 불과 십 분 전, 유호에게서 전화가 왔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속뜻은 분명했다. 우진과 너무 가까워지지 말라는 말이었다. 아니면 자기가 질투할 거라고.그 생각을 떠올린 해인이 조용히 말했다.“좀 피곤해. 안 갈래. 혼자 다녀와.”우진은 잠깐 멈칫했다. 해인이 거절할 줄은 예상하지 못한 눈치였다.방금 식사 자리에서 우진은 자신의 귀로 직접 들었다. 예전에 해인이 제일 좋아하던 게 꼬치구이였고, 큰오빠 동현도 꼬치집에서 사람 만날 때면 꼭 하나 포장해서 집에 가져갔다고.‘좋아하신다고 하기에 같이 가자고 한 건데...’하지만 우진의 눈빛은 금세 다시 살아났다.“그럼 저 혼자 가서 먹고, 팀장님 것도 조금 포장해 올까요?”그 말에는 해인도 굳이 거절하지 않았다.“그래. 그럼 내가 사는 걸로 할게.”해인이 방으로 들어가 돈을 보내려고 하자, 우진이 바로 말했다.“아닙니다. 제가 살게요!”말을 마친 우진은 금세 복도 끝으로 사라졌다.해인은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문을 닫았다. 다만 해인은 모르고 있었다. 그 장면을... 조금 떨어진 곳에서 희정이 빠짐없이 지켜보고 있다는 걸.희정은 질투로 속이 바짝 탔다.그리고 해인이는 정말 여우 같은 여자라고 생각했다. 유호를 손에 넣고도, 밖에서는 또 다른 남자를 달고 다니는 것 같았다.우진은 딱 봐도 졸업한 지 얼마 안 된 풋내기였다. 세상 물정도 아직 잘 모르고, 연애조차 제대로 해 본 적 없을 것 같은 얼굴이었다.그런데도 해인을 위해 뜨거운 물을 대신 맞아 줬고, 세세한 부분까지 챙기고 있었다. 심지어 야식까지 사다 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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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4화

이번 출장은 무사히 마무리됐다. 다음 날, 날이 채 밝기도 전에 해인과 우진은 돌아오는 비행기에 올랐다.캐리어를 끌고 출구로 나선 해인은 곧장 회사로 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말끔한 정장을 입은 유호가 그 앞에 서 있었다.아직 아침 8시였다. ‘이 시간에 유호가 왜 여기 있지? 출근 안 한 건가?’‘설마 날 데리러 온 거야?’해인이 걸음을 옮겨 가까이 가자, 유호가 자연스럽게 해인 손에서 캐리어를 받아 들었다.해인이 입을 열기도 전이었다. 유호는 주변 시선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사람처럼 굴었다.한 손은 캐리어 손잡이에 얹은 채, 다른 손으로는 해인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그렇게 그대로 해인 입술에 입을 맞췄다.해인 바로 뒤 반 발짝쯤 떨어져 있던 우진은 그대로 표정이 굳어졌다. 곧 조용히 시선을 내리자, 긴 속눈썹 아래로 굳어진 표정이 묻혔다.그제야 정신이 든 해인은 얼굴이 달아오르면서 유호를 밀어내려고 했다.“뭐 하는 거야. 사람들 다 보잖아.”해인의 입술에 가볍게 입술을 댔다가 뗀 유호는 그제야 해인을 놔줬다.“뭘 그렇게 신경 써. 우린 부부잖아. 오랜만에 봤는데 반가워서 그런 건데, 누가 뭐라 해?”해인은 속으로 어이가 없었다.‘오랜만에 본 거라고?’‘고작 하루 떨어져 있었을 뿐인데...’‘그게 무슨 오랜만이람...’‘참나,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너무 아무렇지 않게 해.’유호의 시선이 아무렇지 않은 척 우진의 얼굴을 스쳤다. 그런데 정작 말은 해인에게 건넸다.“어젯밤 꼬치구이 맛있었어?”해인은 잠깐 멈칫했다.어젯밤 늦게 우진이 꼬치구이를 사다 준 뒤, 해인은 방 문을 닫고 혼자 조용히 먹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유호에게 영상통화가 걸려 왔다.화면 속 유호는 막 씻고 나온 참인지, 웃통도 걸치지 않은 상태였다. 유호는 말 없이 해인이 먹는 걸 끝까지 지켜보더니, 마지막에 딱 한마디만 했다.[맛있어?]해인이 고개를 끄덕였었다.“응, 맛있어.”그러고는 통화가 바로 끊어졌다.그때는 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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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5화

“그래?”유호의 시선이 우진의 콧대에서 시작해 천천히 눈까지 훑고 올라갔다.그러다 유호가 문득 웃었다.“그럼 지켜보겠어. 배 비서가... 한 말 끝까지 지키길.”우진은 가볍게 고개를 숙인 뒤 와세라 건물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그런데도 유호의 시선은 한동안 우진이 사라진 쪽에 붙어 있었다. 쉽게 거두어지지 않았다.유호가 주헌에게 말했다.“저 배우진이라는 애, 뭐 하는 놈인지 알아봐.”주헌이 바로 답했다.“이미 확인해 뒀습니다.”주헌은 유호 곁에서 오래 일했다. 자기 보스가 해인 곁에 붙는 남자들한테 얼마나 민감한지, 그걸 모를 리 없었다.오늘 아침 유호가 공항으로 마중 나가기 전부터, 주헌은 오는 길에 이미 우진의 신상을 훑어본 상태였다.주헌이 딱딱하게 보고하듯 말했다.“배우진, 스물두 살입니다. 울서대 우수 졸업생이고, 전공은... 기업관리와 재무 복수전공입니다.”“18살 때 시 청년부 산타 챔피언 타이틀도 땄습니다. 배경은 단순합니다. 고아입니다.”거기까지 듣고 유호가 눈썹을 들었다.“고아? 진짜 혼자야? 가족이 하나도 없어?”주헌이 고개를 끄덕였다.“어릴 때부터 보육원에서 자랐고, 열세 살 때 노부부한테 입양됐습니다. 그 부부는 원래 아들이 있었는데 사고로 먼저 죽었다고 합니다.” “배우진을 양자로 들인 이유도 나중에 자기들 죽고 나면 묘 앞에 향을 올려 줄 사람은 있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고 합니다.”“계속 말해.”“3년 전에 그 노부부도 연세 때문에 돌아가셨습니다. 남긴 돈은 많지 않았고, 배우진이 대학 공부를 마칠 정도만 겨우 되는 수준이었습니다.”주헌은 잠시 숨을 고른 뒤 다시 말했다.“배우진은 울서대에서 전 과목 A+로 졸업했고, 우수 졸업생 표창도 받았습니다. 원래 대학원 진학 추천까지 받았는데 본인이 취업을 택했습니다.”“대기업에서 제안한 높은 연봉도 다 거절했고, 이력서는... 와세라 한 군데만 넣었습니다.”거기까지 들은 유호가 입꼬리를 비틀었다.이 정도면 의도 없이 들어왔다고 하기도 어려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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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6화

이소정은 미간을 찌푸린 채 태겸이 멀어져 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고민건에게 말했다.“보니까 태겸이는 아직도 마음을 못 접은 것 같은데, 당신은 좀 말려 보지 그래?”고민건이 살짝 혀를 찼다.“당신이 덜 말렸어? 태겸이 듣기나 하겠어? 태겸인 어릴 때부터 자기 주장이 워낙 강했잖아.”친아들이니 고민건이 모를 리 없었다.태겸은 평소 누구에게나 부드럽게 대했지만, 속은 생각보다 훨씬 단단했다. 한 번 마음을 정한 일은 쉽게 바꾸지 않았다.이소정이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내가 진작 말했잖아. 선 같은 건 주선하지 말라고. 지안이랑 사귀기까지 했으면 뭐 해?”지안은 유치장에 일주일 동안 있다가 어제 막 나왔다.고씨 집안 사람들도 그 며칠 사이에 태겸과 지안이 사귀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소파에 앉아 있던 고민건의 표정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그게 어디 연애였어? 해인이 결혼한 걸 보고, 태겸이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군 거지.”이소정이 말없이 고민건을 바라봤다.고민건이 다시 입을 열었다.“당신도 이제 태겸이한테 선을 보라는 말은 하지 마. 태겸이 마음속 응어리가 안 풀리면, 선보는 자리에 나가도 정신은 딴 데 가 있을 거야.”그 말은 아주 정확했다.이소정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그럼 이제 어떡해? 이렇게 태겸이 계속 가라앉아 있는 걸 보고만 있어야 해?”“시간을 좀 줘. 태겸이 혼자 빠져나오게 둬.”...위층.태겸은 영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침대에 누워 있었다. 한쪽 손등은 이마 위를 덮고 있었다.태겸은 꼬박 일주일을 입원해 있었다.해인은 대현이 골절로 입원한 날 한 번 병원에 들렀을 뿐이었다. 그것도 태겸을 보러 온 건 아니었다.짜증이 났다.해인은 원래 마음이 약한 사람이었다.그런데 태겸에게는 어쩌면 저토록 모질 수 있는지, 태겸은 도무지 납득할 수 없었다.핸드폰이 미친 듯이 울렸다.태겸은 짜증 섞인 손길로 전화를 받았다.[태겸 씨, 나한테 너무 잔인해.]지안의 목소리였다.고층에서 떨어진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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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7화

쉬는 날, 해인은 선물 세트를 들고 시댁에 다녀왔다.지난번 Y시에서 최수나가 도와준 덕분에 해인은 일을 무사히 마무리할 수 있었다. 도리상으로도 해인이 먼저 찾아가 인사를 드리는 게 맞았다.최수나는 한원랑이 가장 아끼는 여자다.최수나와 관계를 잘 만들어 두면 해인에게 손해가 될 일은 없었다.해인은 먼저 권영자를 찾아갔다.권영자가 조금 놀란 듯 해인을 바라봤다.“네가 언제부터 수나랑 그렇게 가까웠니?”권영자는 사실 한원랑의 곁에 있는 그 세 여자 중 누구더 마음에 들지 않았다.천하솜은 너무 어수룩했고, 왕단영은 지나치게 머리를 굴렸다.최수나는... 성격이 지나치게 튀어서, 왠지 모르게 마음 편하게 둘 수 있는 사람은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해인은 알고 있었다.최수나가 Y시에 공연하러 간 일은 한씨 가문 사람들에게 숨긴 상태였다.그러니 최수나가 Y시에서 해인을 도와줬다는 말을 그대로 꺼낼 수는 없었다.잠깐 말을 고르던 해인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최 여사님은 예전에 저희 아버지가 저한테 붙여 주신 가야금 선생님이셨어요. 그런데 제가 재주가 없어서 몇 번 배우다가 말았거든요. 할머니, 제가... 요즘 집안 식구들이 많이 보고 싶어요.”그 말을 들은 권영자의 눈에 안쓰러움이 스쳤다.권영자는 해인이 최수나를 찾아가려는 이유가, 어쩌면 최수나의 입을 통해서라도 자기 가족에 대한 얘기를 조금이나마 듣고 싶어서일 거라고 짐작했다.권영자가 해인의 손을 꼭 잡으며 다정하게 말했다.“착한 아이구나. 너무 마음 아파하지 마라. 이제 한씨 가문 사람이 다 네 가족이야. 네 뒤도 우리가 봐 줄 거고, 우리 식구들이 다 너를 지켜 줄 거야.”권영자와 한원랑은 둘 다 해인을 꽤 마음에 들어 했다.해인이 집에 들어온 뒤로 부자 사이도 전보다 한결 부드러워진 편이었다.권영자가 이렇게 진심으로 대해 주자, 해인은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그래도 이건 나쁜 뜻에서 한 거짓말은 아니었다.‘내 일 때문에 최 여사까지 곤란해져선 안 돼.’해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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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8화

동현이 떠나지만 않았더라면, 아마 지금쯤 최수나와 결혼했을지도 몰랐다.한 사람은 젊고 유능한 재벌 2세로 YD그룹을 물려받아 경영을 이끌 사람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국악단의 이름난 가야금 수석이었다.두 사람 모두 각자의 분야에서 가장 뛰어난 축에 드는 사람들이었다.해인은 이유 없이 마음이 아려왔다.최수나는 어쩌면 해인의 올케가 될 수도 있는 사람이었다.그런데 지금은...한원랑의 곁에 있으면서도 떳떳하게 얼굴을 드러낼 수 없는 처지였고, 제대로 된 이름 하나 갖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었다.최수나는 한씨 가문이라는 좁은 울타리 안에 갇혀 있었다.한참 동안 해인이 아무 말도 하지 않은 데다 눈가까지 붉어진 채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보이자, 최수나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최수나가 해인 쪽으로 다가왔다.눈빛 깊은 곳에 걱정하는 기색이 스치듯 지나가고 있었다.“왜 울어? 차희정이 또 괴롭혔어?”해인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그래야 울음이 새어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해인은 최수나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동현이 세상을 떠났을 때, 가장 아팠던 사람은 아마 최수나였을 것이다.옛 연인이 죽은 지 8년이나 지났는데, 해인이 굳이 최수나를 다시 그런 슬픔 속으로 끌어들일 필요는 없었다.“차희정 때문은 아니에요.”해인은 눈가까지 차오른 눈물을 억지로 눌러 삼켰다.아무 일도 없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제가 최 여사님께 드릴 게 있어서 왔어요.”말을 마친 해인은 가져온 선물들을 최수나 앞에 내놓았다.피부와 건강에 좋다는 보양식품 몇 가지와 고급 핸드크림이었다.최수나는 오랫동안 가야금을 타 왔기에 손가락이 상하는 일도 잦을 터였다.방 안은 한참 동안이나 조용했다.최수나는 해인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봤다.붉게 충혈된 눈가를 본 최수나는 이미 짐작한 듯 조용히 물었다.“방금 그 펜던트 알아본 거지?”해인은 입술을 달싹거렸다.여기까지 말이 나온 이상, 더 이상 최수나와 빙빙 돌리면서 말할 이유가 없었다.해인이 조용히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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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9화

복도에 서 있던 해인의 귀에 얼마 지나지 않아서 끊어질 듯 이어지는 가야금 소리가 들렸다.가야금 소리는 울음 같기도 하고 하소연 같기도 했다.마치 오래 묻어 둔 슬픈 사연 하나를 천천히 들려주는 듯해서, 듣는 사람의 가슴까지 저릿하게 만들었다.그 소리를 듣는 동안 해인은 마치 최수나의 가야금에 이끌린 듯이, 동현과 최수나가 함께했던 지난 시간 속으로 천천히 끌려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해인은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그때 동현은 28살이었다.마음이 급해진 어머니는 동현에게 선을 보게 하겠다며 이리저리 맞선 자리를 알아보고 다녔다.하지만 동현은 그때마다 일이 너무 바쁘다는 핑계로 전부 거절했다.그 뒤로는 동현이 자주 그 펜던트를 손에 쥔 채 멍하니 앉아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무슨 생각이 그렇게 많은지, 동현은 늘 무거운 사연을 품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해인이 동현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을 때도 있었다.그때 동현은 그저 웃으면서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했다.어머니 주여진이 동현에게 집안에 숨기고 만나는 사람이 있는 거 아니냐고 물었다.동현은 그 말을 부인하지 않았다.아버지는 동현에게 여자친구를 집으로 데려와도 된다고 했다.다 같이 만나 보자고, 사람이 좋기만 하면 집안 형편은 문제될 게 없다고 말했다.강씨 가문은 정략결혼 같은 건 따지지 않으니, 동현이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면 그걸로 충분하다고도 했다.동현은 상대와 한번 상의해 보겠다고 했다.하지만 그 상의는 끝내 만남으로 이어지지 못했다.두 사람은 끝내 살아 있는 세상과 죽은 세상으로 갈라졌고, 동현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때까지도 그 펜던트를 손에 꼭 쥐고 있었다.동현은 아마 최수나를 정말 많이 사랑했을 것이다.그런데 끝내 최수나를 집으로 데려와 아내로 맞이하지 못했다.가족들에게 정식으로 소개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그건 두 사람에게도 남겨진 사람들에게도, 영영 메울 수 없는 한으로 남게 되었다.곡이 끝나자 해인은 눈가로 차오르는 시큰한 감정을 겨우 눌러 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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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0화

그때의 최수나는 의지할 곳 하나 없는 가야금 연주자였다.한원랑의 눈에 든 뒤에도, 최수나는 그 사실을 동현에게 차마 말하지 못했다.어느 공연이 끝난 날, 한원랑이 보낸 사람들이 거의 끌고 가듯 최수나를 데려갔다.그날 밤, 술에 잔뜩 취한 한원랑에게 최수나는 억지로 짓밟혔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가 생겼다.최수나는 그 일을 동현에게 알리지 않았다.대신 동현에게 이별을 고했다.최수나는 동현이 어떤 사람인지 너무 잘 알고 있었다.자기가 한원랑에게 그런 일을 당했다는 걸 동현이 알게 되면... 물불 가리지 않고 한씨 가문을 찾아가 따지려 들 게 뻔했다.하지만 한씨 가문의 힘은 너무 거대했다.최수나는 그 위험을 감수할 수 없었다.자기 때문에 동현이 위험한 일에 휘말리게 둘 수도 없었다.최수나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야 해인은 모든 퍼즐이 맞아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그래서 그 무렵 동현이 자주 펜던트를 손에 쥔 채 멍하니 있던 이유도, 주여진이 여자친구를 집에 데려와 보라고 했을 때 동현이 선뜻 대답하지 못했던 이유도.그때 동현은 최수나와 이별의 끝자락에 서 있었던 거였다.최수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네가 여섯 살이었을 때, 나는 막 열여덟이 됐어. 그때 네 아버지가 음대에서 나를 골라서, 너한테 가야금을 가르치게 했지.”“그때 너는 두 달도 채 안 배우고 그만뒀고, 나랑 동현은 바로 그때 알게 됐어.”그때는 여름방학이었다.동현은 다니고 있던 아이비리그 대학이 방학이라 국내에 잠시 들어와 있었다.최수나의 입가에 가벼운 미소가 번졌다.“그때 네 오빠, 꽤 풋풋했어. 좋아하면서도 차마 나한테 먼저 고백을 못 하더라.”최수나는 지난 시절을 떠올리는 사람처럼 시선을 떨구었다.그 표정엔 오래된 다정함이 남아 있었다.해인은 가만히 최수나를 바라봤다.‘우리 큰오빠랑 정말 잘 어울렸겠다.’잘생긴 남자와 아름다운 여자.두 사람은 분명 누가 봐도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을 것이다.최수나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동현이 왜 망설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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