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키워온 장미를 숙적에게 빼앗긴 밤: Chapter 781 - Chapter 7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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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81화

병원.한원랑은 병상에 누운 채 싸늘하게 굳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반평생을 살면서 이렇게 체면을 구긴 적은 처음이었다.경매가 끝난 뒤 화장실에 다녀오던 한원랑은 물기가 남아 미끄러운 출입구 앞에서 그만 세게 넘어지고 말았다.하필 경매가 끝나 사람들이 한꺼번에 빠져나오던 때라, 오가는 이들이 한원랑의 처참한 모습을 고스란히 지켜봤다.그것만으로도 속이 뒤집히는데, 평소 체력만큼은 자신 있던 한원랑이 팔까지 골절된 데다가 자칫하면 앞니까지 부러질 뻔했다.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오는 내내 한원랑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내가 살면서 잃을 체면을 오늘 다 잃었군.’의사가 막 한원랑의 팔에 깁스를 마친 참이었다. 병실을 짓누르는 위압감에 간호사들마저 숨을 죽였다. 괜히 눈에 띄었다간 불호령이 떨어질 것만 같았다.유호가 병실로 들어왔을 때 마주한 것도 한원랑의 잔뜩 굳은 표정이었다.유호를 보자마자 한원랑이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왜 이제 와? 차라리 내가 죽고 나서 오지 그랬냐?”KH그룹에서 이 병원까지는 차를 탈 필요도 없이 걸어서 오 분이면 닿는 거리였다.한원랑이 구급차에 실려왔을 때 유호도 이미 연락을 받았을 터였다. 그런데 의사가 깁스를 다 하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유호가 모습을 드러냈다.유호는 한원랑을 담담히 바라봤다. “저도 그러고 싶긴 한데, 당분간은 안 돌아가실 것 같은데요.”“너...” 한원랑은 가슴을 움켜쥐었다. 유호의 한마디에 제대로 열이 오른 모양이었다.부자의 관계는 지난번 유호가 해외에서 큰 고비를 넘긴 뒤로 전보다 조금 누그러져 있었다.다만 수십 년 묵은 냉기가 쉽게 사라질 리 없었다. 둘만 남으면 여전히 어색하고 날 선 기류가 흘렀다.유호도 한원랑에게 무조건 맞춰 줄 생각은 없었다. 어린 시절 한원랑이 휘두른 매질은 실제로 유호의 몸에 상처를 남겼다. 누구라도 그런 일을 아무렇지 않게 넘기기는 어려웠다.한원랑이 성을 내며 말했다. “됐으니까 당장 나가. 안 보면 속이라도 편하지, 여기서 사람 열받게 하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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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82화

한원랑은 더 말하지 않았지만 표정은 눈에 띄게 누그러져 있었다.반면 유호는 어이가 없었다. 차 안 히터가 너무 강한 바람에 더워서, 내리면서 정장 재킷을 차에 두고 온 것뿐이었다.‘해인이 말하니까 내가 아버지를 얼마나 걱정해서 뛰어온 사람처럼 됐네.’잠시 뒤 간호사가 들어와 한원랑에게 기본 검사를 받으러 가면 된다고 알렸다.간병인이 휠체어를 밀고 한원랑을 데리고 나가자, 유호가 해인을 바라봤다. “너는 내가 아버지랑 사이좋게 지냈으면 좋겠어?”부자 사이에 생긴 골은 하루이틀 쌓인 것이 아니었다. 오랜 세월 몸에 떨어진 매질은 유호의 마음에도 짙은 그림자를 남겼고, 두 사람의 관계를 붙잡아 두는 매듭이 되어 있었다.해인이 조용히 말했다. “아버님한테 상처받은 사람은 당신이야. 내가 대신 용서해 줄 수도 없고, 사랑이니 가족이니 하는 말로 당신한테 용서를 강요할 생각도 없어.”“다만 관계가 더 나빠지는 것보다, 내가 한마디 보태서 아버님 생각을 조금이라도 바꿀 수 있다면 당신한테 손해될 건 없잖아. 그럼 내가 말을 안 할 이유가 없지.”실제로 해인이 그렇게 말한 뒤 한원랑의 화는 눈에 띄게 가라앉았다.유호도 해인이 자신을 위해 나섰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한원랑이 이유 없이 아들인 자신을 몰아세우는 걸 해인은 그저 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결국 해인은 유호가 상처받을까 봐 마음을 쓰고 있었다.그 사실을 깨닫자 유호는 해인의 손을 잡아 가볍게 품에 끌어안았다. 입술이 무심코 해인의 머리카락을 스쳤다. “여보... 너랑 결혼한 건 진짜 내 인생 최고의 행운이야. 전생에 덕을 얼마나 쌓았길래 네가 나한테 왔을까?”해인이 고개를 들었다. “그럼 제일 먼저 할머니께 감사해야겠네.”그날 해인이 절에 갔다가 우연히 권영자를 마주치지 않았다면, 권영자가 자기 손자를 온갖 말로 칭찬하지 않았다면, 해인은 그 황당한 초고속 결혼에 발을 들이지 않았을 것이다.이제 와 떠올리면 우습기도 하고 한 편의 에피소드 같기도 했다.‘하필 유호 씨였네. 그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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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83화

유호도 처음부터 이번 일이 단순하지 않다고 보고 있었다.천하솜이 경찰에 자수하면서 이선보는 손발처럼 쓰던 사람을 잃었다. 그렇다고 그대로 물러설 인물도 아니었다.한원랑의 낙상은 시작일 수도 있었고, 경고일 수도 있었다.검사를 마친 한원랑이 병실로 돌아왔다. 유호가 아직도 남아 있을 줄은 몰랐는지 한원랑의 눈썹이 구겨졌다.“아직 여기서 뭐 해?”해인은 회사에서 처리할 일이 생겨 먼저 자리를 뜬 뒤였다.유호는 한원랑을 바라보며 바로 물었다. “이선보가 아버지 연적이었습니까?”이름을 듣자 한원랑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유호를 오래 바라본 뒤 물었다. “네가 이선보를 알아? 따로 만난 적이라도 있어?”한원랑의 시선에는 유호의 표정에서 뭔가를 읽어 내려는 기색이 역력했다.“모릅니다. 그냥 물어본 겁니다.”한원랑이 냉소했다. 눈에는 대놓고 경멸이 어려 있었다. “내 연적이 되고 싶다고 다 되는 줄 알아? 그런 하찮은 놈은 자격도 없어.”한원랑은 이선보를 뼛속부터 얕잡아봤다. 연적은커녕 자신과 나란히 비교되는 것조차 못마땅해할 정도였다.“네 어머니가 예전에 그런 놈을 만났다는 것 자체가 수치야.”유호는 두 사람의 과거사에 별 관심이 없었다.다만 한마디는 해 줬다. “이번에 아버지가 넘어진 일, 이선보와 관련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사람을 시켜서 확인해 보세요.”그 정도까지 듣자, 한원랑도 유호가 자신에게 경고해 주는 것임을 알아차렸다.유호는 더 머물지 않았다. 해야 할 말을 마치자 곧바로 병실을 나갔다.한원랑은 홀로 생각에 잠겼다. 처음에는 오늘 넘어진 일을 단순한 사고라고 여겼다. 하지만 유호의 말을 듣고 보니 마음에 걸리는 구석이 생겼다.한원랑은 문밖의 경호원을 불렀다. “오늘 행사 주최가 어디인지, 이선보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 알아봐.”이선보가 흔적을 대놓고 남길 리는 없었다. 그렇다고 한원랑 곁의 사람들이 호락호락한 것도 아니었다. 드러낼 수 없는 일에는 드러낼 수 없는 방식의 조사법이 있는 법이었다.반나절쯤 뒤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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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84화

한원랑은 유호가 돌아오면 서정란과 먼저 이야기를 나누고, 그래도 의심이 풀리지 않으면 유전자 검사를 해 볼 생각이었다.확인만 하면 진실은 금방 드러날 일이었다. 그런데 서정란이 유호를 데리고 친정에 다녀오던 길에, 다섯 살이던 유호가 갑자기 사라졌다.너무 절묘한 시점이었다.‘하필 유전자 검사를 하려고 마음먹은 때에 유호가 사라졌다고?’한원랑은 서정란을 몰아세웠다. “혹시 그 익명의 편지 얘기 알고 있었어? 그래서 일부러 애를 숨긴 거야?”서정란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익명의 편지? 무슨 편지? 아들이 없어졌는데 지금 그런 얘기가 중요해? 당장 사람 풀어서 유호부터 찾아!”한원랑이 서정란을 얼마나 사랑했는지는 주변 사람이라면 다 알았다. 오랜 결혼 생활 동안 목소리를 높인 적조차 거의 없었고, 얼굴을 붉히며 다툰 일도 드물었다.하지만 그날 두 사람은 결혼 후 가장 격렬하게 싸웠고, 그 뒤 한 달이 넘도록 서로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한원랑은 서정란이 연기를 하고 있다고 의심했다. 부부 사이의 신뢰가 전에 없던 시험대에 올랐다.“그만 연기해. 네가 유호가 어디 있는지 모를 리 없잖아.”“정말 몰라!”대화는 끝내 다툼으로 끝났다.한원랑이 유전자 검사를 생각한 이유는 마음의 의심을 지우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유호가 사라진 뒤 그 의심은 오히려 뿌리를 내렸고, 한때는 익명 편지의 내용을 사실처럼 믿으며 유호가 자신의 아들이 아니라고 여겼다.한씨 집안의 유일한 후계자가 사라졌는데도 한원랑은 사람을 풀어 찾지 않았다. 집에서 일하던 가사도우미들마저 뭔가 이상하다고 느낄 정도였다.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그 무렵 서정란의 이동을 전담하던 운전기사가 한원랑에게 한 가지 사실을 전했고, 그 말을 들은 뒤 한원랑은 서정란을 더욱 냉대했다.운전기사의 말로는 서정란이 친정으로 가는 길에 이선보를 따로 만났다고 했다. 둘만 이야기를 나눠서,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는 기사도 알지 못했다.당시 기사는 식당 밖에서 오래 기다려도 서정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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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85화

죽음의 문턱을 넘나든 서정란을 보며 한원랑은 사랑하는 사람을 정말 잃을 뻔했다는 공포를 처음으로 실감했다. 두 사람이 함께했던 행복한 기억이 연달아 떠올랐다.한원랑은 병상 곁에서 서정란의 손을 붙잡고 울었다.한원랑 같은 사람이 남들 앞에서 눈물을 보인 것은 처음이었다. 서정란이 살아 있다는 사실이 감사했다. 자신이 서정란을 얼마나 깊이 사랑하는지, 결코 잃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도 절실히 깨달았다.서정란이 의식을 되찾은 날, 두 사람은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눴다.“난 정말 유호가 어디 있는지 몰라. 숨긴 적도 없어. 대체 어떻게 해야 내 말을 믿어 줄 거야?”한원랑이 사람을 풀어 찾지 않는 상황에서, 서정란 혼자 아이를 찾는 데에는 분명 한계가 있었다.여기에 남편의 냉대까지 이어지자 서정란은 석 달 사이 심한 우울 증상을 겪었고, 결국 수면제를 먹고 극단적인 선택을 시도했다.“그럼 유호가 사라진 날 왜 이선보를 혼자 만났어? 둘이 무슨 얘기를 했는데? 나 몰래 무슨 짓이라도...”한원랑은 익명의 편지에 대해서도 모두 털어놓았다.편지 내용을 들은 서정란은 그제야 모든 조각이 맞아떨어지는 듯 눈을 크게 떴다.“이제 알았어. 그날 이선보가 갑자기 나타나서 중요한 얘기가 있다며 유호를 따로 보내라고 했거든. 처음부터 전부 이선보가 꾸민 일이었어.”한원랑이 미간을 좁혔다. “무슨 뜻이야?”“그날 이선보가 나한테 할 말이 있으니 단둘이 얘기하자고 했어. 마침 유호가 솜사탕을 먹고 싶다기에 돈을 주고 잠깐 사 오라고 했고.”“그런데 유호가 자리를 뜨자마자 목에 따끔한 통증이 느껴졌어.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전혀 다른 동네였고 유호도 없었어. 내가 의식을 잃은 사이에 아이가 사라진 거야.”“그동안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계속 생각했어. 이제야 알겠어.” “목이 따끔했던 건 이선보가 나한테 약물을 주사했기 때문일 거야. 그래서 완전히 정신을 잃었던 거고.”“목적은 하나였어. 당신과 나를 갈라놓는 것.”서정란은 눈물 어린 눈으로 한원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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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86화

처음 유전자 검사를 꼭 하고 싶었던 시기가 지나자, 서정란이 세상을 떠난 뒤에는 한원랑도 더는 검사를 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죽은 아내에 대한 좋은 기억을 제 손으로 깨뜨리고 싶지 않았다. 유호가 정말 자신의 아들인지 아닌지는 그렇게 한원랑 마음에 평생 풀리지 않는 응어리로 남았다.그래서 유호에게 손을 댈 때마다 한원랑은 자기 친아들을 때리는 게 아니라고 스스로 여겼다. 한원랑 마음속에서 맞고 있는 사람은 이선보의 아들이었다.사랑과 의심, 미움이 뒤엉킨 지독하게 모순된 감정이었다....초봄의 3월, 며칠째 이어지던 비가 그치고 모처럼 하늘이 맑게 개었다.오늘은 도수희가 퇴원하는 날이었다.몇 달 가까이 꾸준히 회복 치료를 받은 덕분에 몸 상태는 거의 정상으로 돌아왔다. 격한 운동이나 무거운 일을 할 수 없다는 점을 빼면 일상생활의 질은 일반인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애초에 이런 집안에서 도수희가 힘든 집안일을 직접 할 필요도 없었다.의사도 도수희의 나이에 큰 수술을 받고 이 정도까지 회복한 것은 상당히 좋은 경과라고 했다.해인은 유호와 상의한 끝에 도수희를 자신들 곁으로 모셔와서 돌보고 싶어 했다.지난 20여 년 동안 함께 살아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래도 도수희의 사정을 알게 되고 오랜 오해까지 풀고 나니, 친딸인 해인은 어머니가 몹시 안쓰러웠다.도수희도 해인과 마찬가지로 이제 가까운 가족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그래서 해인은 도수희가 자신의 곁에서 편안히 여생을 보내길 바랐다.유호도 반대하지 않았다. 도수희가 생활하기 편하도록 일찌감치 1층의 햇볕 잘 드는 방을 비워 두게 했다.하지만 해인과 유호가 아침 일찍 병원으로 퇴원 수속을 도우러 온 날, 도수희는 두 사람의 제안을 거절했다.“해인아, 너랑 한 서방은 둘이 잘 살아. 결혼한 지도 얼마 안 됐는데 젊은 부부한테는 둘만의 공간이 필요해. 내가 들어가 살면 괜히 불편하게 만들잖아.”해인이 미간을 좁혔다. “그게 왜 불편해요? 엄마는 제 어머니고, 제가 모시는 게 당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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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87화

해인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래도 한마디 더 해 보려는데 유호가 눈짓을 보냈다.해인은 도와주는 아주머니에게 먼저 퇴원 짐을 정리해 달라고 부탁한 뒤 병원 복도로 나왔다. “왜?”유호가 낮게 말했다. “장모님이 싫다고 하시면 그만하자. 네가 걱정되면 내가 믿을 만한 사람을 골라서 곁에 붙여 둘게.”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우리한테 연락하게 하고. 억지로 우리 집에 모셔와도 장모님께서 편하지 않을 수 있어.”“그래도 엄마가... 너무 과거에만 붙잡혀 있을까 봐 걱정돼. 아빠와의 기억이 가득한 집에서 계속 지내면 더 못 빠져나올 것 같아.”유호가 되물었다. “꼭 빠져나와야 해? 그 기억 속에 있는 편이 장모님을 더 편하게 해 준다면, 굳이 나오지 않아도 되잖아.”해인은 조금 놀란 눈으로 유호를 봤다.유호가 설명했다. “누구나 자기가 어떤 삶을 살지 선택할 권리가 있어. 다른 사람의 마음은 그 사람이 아니면 다 알 수 없는 거고.” “우리가 겉으로만 보고 그 삶이 행복한지 아닌지 단정할 권리도 없어.”생각해 보면 맞는 말이었다. 세상이 말하는 행복의 기준이 모두에게 맞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결혼하고 누군가는 혼자 살며, 아이를 여럿 낳는 사람도 있고 아이 없이 둘이 사는 길을 택하는 사람도 있다. 어느 쪽이 틀렸다고 말할 자격은 누구에게도 없었다.퇴원 수속을 마친 뒤 해인과 유호는 도수희를 차씨 저택으로 데려다주었다.오랫동안 병원에서 지낸 탓에 도수희가 집으로 돌아온 것도 꽤 오래간만이었다.집 안은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차장섭이 좋아하던 목련도 활짝 피어 있었다. 익숙한 집인데 익숙한 사람이 보이지 않자, 도수희의 가슴 한쪽이 텅 빈 듯 쓰렸다.서재 책상 위에는 차장섭이 생전에 가장 아끼던 책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절반을 넘게 읽은 낡은 책 사이에는 책갈피가 얌전히 끼워져 있었고, 여백에는 차장섭이 남긴 메모와 짧은 감상이 적혀 있었다.도수희는 붉게 충혈된 눈으로 책을 집어 들었다. 정신이 잠깐 먼 곳으로 흘러가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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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88화

가사도우미가 문을 열었다가 밖에 서 있는 공무원들을 보고 멈칫했다. “실례지만 어디에서 오셨습니까?”상대가 정중히 말했다. “갑자기 찾아와 죄송합니다. 여기가 차희정 씨 가족이 거주하는 곳이 맞습니까?”가사도우미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습니다.”“그럼 가족분이십니까?”가사도우미는 자기가 함부로 대답할 수 없어서 곧바로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사모님께 말씀드리고 오겠습니다.”가사도우미는 곧장 안으로 들어가 도수희에게 그대로 전했다. “밖에 공무원들이 찾아왔습니다. 희정 아가씨 일로 온 것 같습니다.”희정이 이 집에서 살던 시절부터 가사도우미는 늘 ‘희정 아가씨’라고 불렀고, 오랜 습관이라 지금도 그 호칭이 입에 붙어 있었다.하지만 희정은 범죄를 저질러 교도소에 수감돼 있었다. 관련 기관끼리 기록이 공유될 텐데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그런데 왜 집까지 찾아온 걸까?도수희가 말했다. “들어오시라고 해.”가사도우미가 사람들을 안내하러 가자 해인은 무심코 유호를 바라봤다.유호가 물었다. “왜?”“괜히 찾아온 건 아닌 것 같아.”유호는 별다른 말 없이 상황을 지켜봤다.공무원은 자리에 앉자마자 용건부터 꺼냈다. “차희정 씨 가족분들이 맞으시죠? 수용자가 사망해서 유가족 확인과 인계 절차가 필요해서 방문했습니다.”도수희의 표정이 굳어졌다. “누가 죽었다고요?”“차희정 씨입니다.”너무 갑작스러운 소식이라 도수희는 바로 반응하지 못한 채 멍하니 앉아 있었다.해인이 물었다. “사인은 뭔가요?”희정은 재판 도중 법정에서 흉기를 휘두른 사건까지 더해져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상태였다.처음에는 사형까지 거론됐지만, 피해자 건훈의 부모가 이례적으로 선처 탄원서를 제출했고 결국 무기징역이 확정됐다고 들었다.외아들을 잃은 진씨 집안이 선처를 요청했다는 것 자체가 쉽게 이해되지 않는 일이었다.해인이 그 사실을 알게 된 건 예전에 차장섭의 비서와 우연히 이야기를 나누다가 들었기 때문이었다.해인은 건훈의 부모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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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89화

차씨 저택을 나온 유호는 해인의 어깨를 가볍게 감쌌다. 해인이 멍하니 생각에 빠져 있는 걸 보고 물었다. “무슨 생각해?”희정은 자신이 저지른 죄의 대가를 받은 셈이었다. 마지막에 가족 누구도 유해를 찾으러 가지 않게 된 것 역시 스스로 불러온 결말이었다.차장섭도 도수희도 희정이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충분히 줬다. 하지만 희정은 그 기회를 걷어차고 자신의 불륜을 숨기기 위해 친아버지까지 죽였다.친아버지를 죽였다는 사실은 누구에게나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질 일이었다.이제 희정이 죽었다고 해서 안타까워할 이유는 없었다. 모든 결과는 희정 자신의 선택에서 시작됐다.해인은 정신을 가다듬고 조용히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야.”유호는 해인이 마음이 여린 사람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마음이 여린 사람은 죽음이나 이별을 마주하면 본능적으로 생각이 많아진다. 해인은 희정에게 동정심을 느끼는 것도, 지난 일을 아쉬워하는 것도 아니었다. 한 사람의 생이 끝났다는 사실 자체가 남기는 씁쓸함이 있었을 뿐이다.둘은 차에 탔다. 유호가 해인의 손을 한 번 꼭 잡아 주었다.“차희정한테 아무도 안 찾아가서, 그렇게 끝나는 게 마음에 걸리면 내가 같이 가 줄게. 교도소에 한 번 다녀오자.”사람이 죽으면 생전에 얽힌 원망과 빚도 더 이어 갈 수는 없는 법이었다.그저 좋은 일 한 번 한다고 생각하면 됐다.해인은 고개를 저었다. “차희정 성격이면 우리가 챙겨 줘도 고마워하지 않을 거야. 오히려 쓸데없는 짓 한다고 생각하겠지. 게다가 이미 우리보다 먼저 움직인 사람이 있을 것 같아.”유호의 눈썹이 살짝 모였다.잠깐 생각하던 유호가 물었다. “천서진 말하는 거야? 천서진이 차희정 유해를 찾아간다고?”해인은 고개를 끄덕였다.“둘은 진작 끝난 사이 아니야?”희정이 자신을 배신했다는 사실을 안 뒤 서진은 그녀의 존재 자체를 무시하듯 굴었다.사랑보다는 미움이 더 크게 남은 것처럼 보였다.해인이 낮게 말했다. “정말 마음이 끝났으면 아무 감정도 없어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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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90화

해인은 눈을 크게 떴다. “말도 안 돼. 이안이는 이제 겨우 다섯 달이야!”5개월 된 아기가 엄마라고 부른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믿기 힘들었다.“딱 한 번 했대. 발음도 정확하지 않았고.”유호는 말을 하며 시동을 걸었다. “가자. 본가로.”자기 아이가 처음 엄마라고 부르는 소리는 누구에게나 특별했다. 유호도 해인이 그 기쁨을 놓치게 하고 싶지 않았다.차가 본가로 들어설 때, 조금 떨어진 길가에 택시 한 대가 서 있었다.차 안에서는 주름진 눈매의 남자가 오랫동안 본가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택시기사가 앞을 보며 말했다. “방금 들어간 차, 한유호 대표님 차 같은데요.”“그래.”뒷좌석의 남자가 짧게 대답했다. 표정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기사가 말을 이었다. “소문으로는 한원랑 회장이 아들을 별로 아끼지 않았다더군요. 어릴 때부터 심하게 맞아서 몸에 상처가 많았다고요.”이선보가 묘한 어조로 되물었다. “그래?”“제 먼 친척 하나가 그 집에서 가사도우미로 일한 적이 있습니다. 예전에 술 한잔하다 취해서 무심코 흘린 이야기예요.”“그런 재벌가 집안 사정을 저 같은 사람이 달리 어떻게 알겠습니까? 평소에는 입이 무거운 사람인데 그날 실수한 거죠.”이선보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택시기사는 점점 말하면서 재미가 붙었다.“한원랑 회장이 아들이 자기 핏줄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의심했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첫 부인이 회장 만나기 전에 사귀던 남자가 있었다더라고요.”이선보의 눈이 가늘어지면서 일부러 모르는 척 물었다. “그럼 한유호가 첫 부인과 전 남자친구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라는 뜻인가?”기사가 웃었다. “제가 그걸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냥 추측이지요. 그래도 친아들이라면서 그렇게까지 때린 걸 보면 뭔가 있었던 거 아닐까요?” “자기 아들이 아닌데 체면 때문에 밖으로 드러내지도 못했을 수도 있고요.”“저런 집안 사람들은 체면을 제일 중요하게 여기잖습니까. 친아들한테 그렇게 독하게 할 아버지가 흔하겠어요?”이선보는 입가에 담배를 문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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