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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31화

그녀는 정도원 회사의 데이터를 바탕으로 가짜 자료를 만들어 세바스찬에게 넘길 생각이었다.바로 그때, 현준호에게서 메시지가 왔다.이해리는 간단히 답장을 보낸 뒤, 당분간 이 일을 정지안에게 알리지 말라고 거듭 당부했다.정지안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분명 세바스찬과의 만남을 끊으라 하고, 직접 이해리를 데리러 올 터였다.하지만 이해리도 정지안을 위해 뭔가 해 주고 싶었다.지난번 세바스찬이 그들을 노리고 정지안의 비행기에 사고를 일으킨 일을, 이해리는 아직도 마음에 담아 두고 있었다.그녀에겐 이번 기회가 필요했다.통화를 막 끝낸 순간 정지안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전화를 받자마자 그는 이해리가 조금 전까지 무엇을 했는지 물었다.“계속 통화 중이던데.”이해리는 자신이 세바스찬과 접촉한 일들을 숨겼다.그저 대충 둘러댔다.“도착하고 나서 계속 바빠서 신경을 못 썼어요. 그래도 제가 메시지 보냈는데, 봤어요?”정지안이 말했다.“네 연락이 안 오면 걱정돼. 앞으로 아무리 바빠도 틈틈이 메시지 하나씩은 보내 주면 안 될까?”이런 상황에서도 오히려 이해리가 정지안의 마음을 달래 줘야 했다. 이해리는 울지도 웃지도 못한 채 정지안과 몇 마디를 더 나눴다.두 사람은 아쉬움을 가득 안고 통화를 끝냈다.이해리는 눈앞의 데이터 보고서를 바라보며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계획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현준호가 뒤를 봐 준다면, 이제 세바스찬을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자신이 세바스찬과 접촉한 일과 이 모든 계획은 일단 정지안에게 숨기기로 했다. 돌아간 뒤 기회를 봐서 설명하면 될 일이었다.‘지안 씨가 아무리 화가 나도 내가 애교를 부리며 용서를 빌면 끝내 버티지 못할 거야.’그렇게 생각하자 이해리는 겨우 마음을 놓고 화면을 보며 데이터를 계속 정리했다.다음 날 아침 일찍, 세바스찬은 또 사람을 보내 이해리에게 아침 식사를 전했다. 그녀의 동선을 훤히 꿰고 있다는 뜻이었다.이해리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세바스찬이 아침을 보낸 것은 호의를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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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32화

이해리와 주세훈이 회의실 안으로 들어갔다.이해리가 먼저 모두를 훑어보자, 사람들도 그녀를 보고 힘없이 인사를 건넸다. 태도부터 예전보다 확연히 해이해져 있었다.이해리는 자신이 와서 이런 광경을 보게 될 줄 몰랐던 터라 곧바로 미간을 찌푸렸다.“요즘 맡은 프로젝트들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어요? 왜 저한테 보고서를 제출한 사람이 한 명도 없죠?”“이렇게 많은 프로젝트가 동시에 돌아가는데, 어느 팀도 진척이 없다는 건가요? 전에 제게 말한 것과는 전혀 다르잖아요!”이해리가 거듭 추궁해도 사람들은 축 늘어진 채 자리에 웅크리고 있을 뿐, 대답할 생각조차 없어 보였다.그 모습을 본 이해리는 결국 화를 내며 손에 들고 있던 자료를 탁자 위에 세게 내리쳤다. 큰 소리에 모두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이해리를 올려다봤다.젊은 연구원들은 하나같이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들은 모두 에드워드가 직접 길러낸 제자들이었다.에드워드는 평소 무척 온화한 지도 교수였고, 정말 중요한 순간에만 제자들을 엄하게 꾸짖었다.지금의 이해리는 그들에게 가장 엄격했던 시절의 에드워드를 떠올리게 했다. 사람들은 서로 얼굴만 바라보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이해리가 싸늘하게 웃으며 말했다.“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는 건 알아요. 다들 걱정도 되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죠. 하지만 계속 이렇게 무기력하게 있으면 프로젝트가 제대로 굴러갈 수 있겠어요?”“여러분의 교수님은 지금 국내 병원에서 요양 중이에요. 그런데도 나를 만날 때마다 여러분의 상황부터 묻고, 계속 연구할 수 있게 도와 달라고 했어요. 한시도 여러분을 잊지 못하고, 돌아와 곁에 있어 주고 싶어 하는데 여러분은요? 이런 정신 상태로 자기 인생과 일을 대할 건가요?”사람들은 순간 이해리에게서 에드워드의 모습을 본 듯했다.그 뒤로 30분 동안 모두가 말없이 이해리의 꾸지람을 들었다. 누구도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하지만 곧 하나둘 허리를 곧게 펴고 앉으며 처음의 무기력한 모습에서 벗어났다.이해리도 그들이 자신의 말을 제대로 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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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33화

“사실 며칠 동안 연구실 분위기가 정말 안 좋았어요. 앞으로 더는 함께 일하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걱정했는데, 선배님이 오시고 전부 달라졌어요.”주세훈은 눈빛을 반짝이며 말하며 이해리를 향한 존경을 조금도 숨기지 않았다.이해리는 말없이 그를 바라보다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정지안에게 주세훈과 거리를 두겠다고 약속한 것을 잊지 않은 것이다.연구실 회의를 마친 이해리가 떠나려던 순간, 입구 쪽에서 소란이 일었다. 연구실에 마침내 책임지고 나선 사람이 있다는 소식을 들은 협력사들이 사람을 보내 압박하러 온 것이었다. 그들은 모두 이해리를 에워쌌다.“연구실이 다시 운영되기 시작했다던데, 이전 프로젝트 때문에 생긴 손해는 어떻게 배상할 겁니까? 원래 이번 달에 정식 출시하기로 했잖아요. 그런데 지금...”그들이 너도나도 이해리에게 말을 쏟아내자 그녀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하지만 잠시 뒤 침착하게 응수했다.“모든 프로젝트는 최대한 빠르게 진도를 내고 있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데이터를 무시할 수는 없잖아요? 여러분은 진도와 출시만 생각하는데, 책임질 방법은 생각해 보셨나요? 지금 우리가 만드는 건 특효약이에요. 임상시험과 검증도 거치지 않은 약을 어떻게 무책임하게 사람들에게 쓰게 할 수 있죠? 그런 상태로 출시하면 더 큰 문제가 생길 텐데, 그 점은 생각해 보셨어요?”협력사 사람들도 서로의 얼굴만 바라봤다.이해리는 압도적인 기세로 홀로 여러 사람을 상대했다. 본래 협력사들은 이해리를 압박하고, 가능하면 협업을 취소해 투자금을 되찾을 명분까지 얻으려 했다.하지만 이해리가 이렇게 나오자 모두 기세가 꺾였다.오히려 이해리는 그들에게 미래에 대한 기대를 품게 했다. 모든 프로젝트가 제대로 완성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사람들은 서로를 바라볼 뿐, 더는 철수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이해리는 자신이 연구실에서 한 모든 일을 세바스찬이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세바스찬은 이해리가 이번에 출국한 목적을 알게 된 뒤 곧바로 그녀를 찾아왔고, 옆에서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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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34화

“지금 내 사람들이 조사하고 있어. 네가 자료를 조작한 사실이 밝혀지면 즉시 협력을 취소하겠어!”이해리는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며 속으로 이미 답을 짐작했다.세바스찬은 그저 자신을 떠보는 중이었다. 그녀가 데이터를 제출하고 협력 의사를 밝힌 건 바로 오늘이었다. 어제만 해도 세바스찬은 자신을 믿겠다며 성의를 보이라고 했다.이해리가 둘 사이의 협력을 망치고 싶었다 해도 이런 식으로 일을 꾸몄을 리 없었다.세바스찬은 생각에 잠긴 채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이해리가 말했다.“정말 제가 가짜 데이터를 줬다고 생각하거나 이미 뭔가를 찾아냈다면, 말이 아니라 증거부터 내밀었겠죠. 지금까지 몇 마디만 던지는 걸 보니, 그냥 절 믿지 못하는 것뿐이네요.”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세바스찬이 이해리의 눈에서 본 것은 단단한 확신과 강인함이었다.그 순간 그는 자신의 시험이 아무 의미도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다고 이해리를 순순히 믿는 것 또한 세바스찬에게는 쉽지 않았다.이해리는 여전히 침착했다.“제가 당신과 협력하려는 건 제 살길을 마련하기 위해서예요. 믿지 못하겠다면 다른 사람을 찾으면 돼요. 꼭 당신이어야 할 이유는 없으니까.”말을 마친 이해리는 세바스찬을 힐끗 보고 곧장 앞으로 걸어갔다.그때 남자가 뒤에서 그녀를 불러 세웠다.“이해리, 잠깐 서.”이해리는 속으로 가슴을 짓누르던 무거운 돌이 내려가는 것을 느꼈다. 언제든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행동하면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끝까지 평정을 유지한 덕분에 마침내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하지만 돌아선 이해리는 여전히 연기를 이어 가며 차분하고 냉정한 눈으로 세바스찬을 바라봤다.“진심으로 협력할 생각이 없다면 전 갈게요. 다른 사람을 찾아보죠. 저는 이미 성의를 보여 줬으니, 이제 당신 차례예요.”조금 전까지 망설임이 서려 있던 세바스찬의 눈빛이 그 말을 듣자 순식간에 변했다.“역시 내가 널 잘못 보지 않았군. 넌 신비로운 동양 여자이자, 처음으로 내게 도전 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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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35화

협력하기로 한 이상 두 사람은 대등한 관계였다.이해리는 더는 세바스찬을 두려워하지 않았다.이럴 때 자신이 그를 의심하는 모습을 보이면 오히려 두 사람의 협력 관계만 이상해질 뿐이었다.그러면 지금까지 오랫동안 깔아 둔 모든 포석이 물거품이 되고 만다.세바스찬은 멀어지는 이해리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흥미롭다는 듯 턱을 쓰다듬었다.잠시 뒤 부하가 다가오자 세바스찬이 말했다.“이 여자, 제법 재미있군.”그 뒤 며칠 동안 이해리는 연구실 일에만 매달리며 세바스찬을 일부러 내버려 두었다.세바스찬은 매일 전화와 메시지로 협력 상황을 물었지만, 이해리는 보지 못한 척했다.하지만 속으로는 이미 현준호와 어떻게 손잡고 세바스찬에게 제대로 한 방 먹일지 생각하고 있었다.계획은 이제 가장 중요한 단계에 접어들었고, 이해리는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그러다 자신이 해외에 너무 오래 머물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지안이 곧 직접 찾아올지도 몰랐다. 이해리는 머리가 지끈거렸다.그 생각을 하자마자 얼마 지나지 않아 휴대전화가 울렸다.정지안에게서 온 전화였다.정지안은 왜 이렇게 오랫동안 해외에 있으면서 돌아오지 않느냐고 물었다.“해외 연구실 일이 그렇게 힘들어? 내가 가서 곁에 있어 줄까?”이해리가 해외에 오래 머물수록 정지안의 걱정은 커졌다. 그녀를 혼자 두고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그 말을 들은 이해리는 깜짝 놀라 급히 말했다.“전 여기서 잘 지내고 있어요...”하지만 그 다급한 말투가 오히려 정지안의 의심을 키운 듯했다. 전화기 너머로 그의 목소리가 서늘해졌다.“확실해? 출국한 지 한참 됐는데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 걸 보면, 정말 무슨 어려운 일이라도 생긴 거 아니야?”이해리는 온갖 방법을 동원해 정지안을 안심시키려 했다.“여긴 정말 다 괜찮아요. 다만 연구실 쪽에서 조금 더 힘을 내야 해서...”이해리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정지안이 끊었다.“난 정말 마음이 놓이지 않아. 내 일도 바쁘긴 하지만, 그래도 난...”두 사람은 한동안 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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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36화

“가능한 한 빨리 일을 끝내고 돌아와.”해외에는 세바스찬까지 있었다. 정지안은 어떻게 해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이해리는 결국 조심스럽게 말했다.“저를 믿어 주면 안 될까요? 제 몸은 제가 잘 지킬게요. 연구실 사람들도 계속 지켜보면서 열심히 하도록 할 거예요. 절대 무슨 일도 생기지 않을 테니까, 지안 씨도 국내에서 잘 지내야 해요. 우리 각자 자기 일을 위해 노력해야 더 좋은 모습으로 함께할 수 있잖아요.”그 말을 듣는 순간 정지안의 마음은 눈 녹듯 풀렸다.그가 더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결국 그는 이해리의 뜻을 받아들였다.통화를 끝낸 이해리는 온몸의 긴장이 풀리는 듯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정지안은 정말 상대하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게다가 눈치가 빠르고 이해리를 누구보다 걱정했다.그에게 거짓말할 때마다 이해리는 늘 마음 한구석이 뜨끔했다.하지만 이번 계획만 성공하면 세바스찬에게 제대로 큰돈을 뜯어낼 수 있고, 정지안의 복수도 대신해 줄 수 있었다.이해리는 속으로 자신을 달랬다.‘괜찮아. 나중에 알게 되더라도 지안 씨는 분명 이해해 줄 거야.’한편 에드워드의 연구실은 이해리의 도움 아래 정말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그날 퇴근하려는 이해리에게 주세훈이 다가왔다.“선배님, 이제 퇴근하세요?”“응... 왜? 무슨 일 있어?”가방을 정리하던 이해리가 돌아보자 주세훈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선배님과 단둘이 식사하고 싶어서요.”그 말을 꺼낸 주세훈의 미소가 순간 어색해졌지만, 그래도 이해리 앞에서 용기를 내 말을 이었다.“선배님이 오신 뒤로 연구실의 어려운 문제들이 하나씩 밝혀지고 해결됐어요. 사실 다들 기회를 봐서 제대로 감사드리고 싶어 했어요. 저도 선배님께 따로 여쭤보고 싶은 게 많아서 저녁 식사를 대접하고 싶어요.”이해리는 처음에 거절하려 했다. 하지만 후배의 눈빛을 보자 자신이 처음 타국에 유학을 왔던 때가 문득 떠올랐다.그녀에게도 이런 시절이 있었다.이럴 때가 가장 길을 잃기 쉬웠다. 제대로 이끌어 줄 사람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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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37화

주세훈이 말하는 동안 이해리의 시선은 자꾸 다른 곳으로 흘렀다.주세훈은 이해리가 자신에게 관심이 없고 이 대화를 이어 가고 싶지 않은 줄 알고 눈빛이 금세 어두워졌다. 그런데 곧 이해리가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계속 말해. 무슨 말이든 좋아.”주세훈이 멍하니 물었다.“무슨 말씀이세요?”이해리를 좋아한 그는 오늘 일부러 단둘이 만나자고 해서 고백하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이해리가 지금 왜 이런 말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주세훈은 순간 이해리가 일부러 자신을 모욕한다고 오해하고, 표정이 눈에 띄게 굳었다.“선배님, 저한테 마음이 없으시면 그냥 말씀하셔도 돼요. 꼭 선배님께 뭘 어떻게 하겠다는 뜻은 아니에요. 국내에 선배님이...”이해리는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누군가를 바라보다가 다시 주세훈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격려하듯 말했다.“그래, 그대로 계속 말해. 무슨 말이든 괜찮아.”평소와 다른 이해리의 행동에 주세훈은 더욱 이상함을 느꼈다. 그가 다시 입을 열려 하자 이해리가 재촉했다.“계속 말해!”주세훈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녀가 시킨 대로 계속 말을 이어 가며 자신의 마음을 고백했다.이해리도 그의 말을 어느 정도 듣기는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일에 신경 쓸 상황이 아니었다.조금 전, 멀지 않은 곳에서 누군가가 자신들을 미행하는 듯한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이다.그 사람은 틈틈이 이쪽을 살피고 있었다.낯선 타국에서 이해리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그런데 왜 누군가가 계속 나를 주시하는 것일까?’이해리는 그쪽을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주세훈에게 계속 말하라고 했다. 상대가 꼬리를 드러내게 만들 이유와 기회를 찾으려는 것이었다.저녁 식사가 끝날 때까지 주세훈은 아주 많은 말을 쏟아냈다.하지만 이해리는 대답하지 않고 계속 말하라고만 부추겼다. 주세훈으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돌아가는 길, 두 사람 사이에는 묘한 기류가 흘렀다.이해리는 길을 따라 조금 걷자고 먼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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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38화

이어 주변을 살폈다. 두 사람의 대화가 다른 이들의 관심을 끌까 봐 걱정스러웠다.현준호가 선의로 한 일이라는 건 알았다. 하지만 이 사람이 계속 따라다니며 자신을 보호하면 언젠가는 세바스찬의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이해리는 먼저 주세훈을 돌려보내고 나서 남자에게 말했다.“돌아가서 현 대표님께 마음은 감사하다고 전해 주세요. 하지만 세바스찬을 상대하려면 제가 혼자 움직이는 사람이라고 끝까지 믿게 만들어야 해요. 그러니 앞으로는 따라오지 마세요. 일이 들통나면 우리 모두 끝이에요.”남자를 돌려보낸 이해리는 주변에 수상한 사람이 없는지 확인한 뒤 다시 걸음을 옮겼다.숙소로 돌아가려던 그때 세바스찬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혼자 행동하겠다고 고집한 것이 역시 효과가 있었던 것인지, 세바스찬은 이번에는 대단한 성의를 보이며 이해리에게 협력에 관해 논의하자고 했다.처음에 이해리는 그가 진심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곧 세바스찬이 보인 성의는 그녀의 예상을 뛰어넘었다.그는 먼저 협력을 제안하고 세부 사항까지 논의했을 뿐 아니라, 이해리를 한 연회에 초대하겠다고 했다.“그 연회에는 내 인맥이 전부 모여. 이제 나와 협력하기로 했으니 같이 가는 게 어떻겠어?”하지만 세바스찬의 얼굴에 스쳐 간 계산적인 기색을 이해리는 놓치지 않았다.‘세바스찬의 인맥이라니?’조직의 보스인 그에게 무슨 정상적인 사교계가 있겠는가.아마 정지안 곁에서 쌓은 이해리의 명성을 이용해 자신의 이익을 챙길 생각일 터였다. 그렇게 생각한 이해리가 달콤하게 웃었다.“물론이죠.”세바스찬은 자신이 영리하다고 믿겠지만, 그 연회는 이해리에게도 좋은 기회였다. 적어도 그녀가 손쓸 수 있는 일이 아주 많았다.세바스찬은 이내 웃으며 말했다.“이해리, 넌 똑똑할 뿐 아니라 전략도 뛰어나. 네 재능과 용기가 마음에 들어.”그러고는 한숨을 내쉬고 물었다.“이렇게 좋은 여자를 정지안은 왜 소중히 여기지 않는 거지? 지금 국내에서 뭘 하고 있나?”하지만 곧 그가 말을 이었다.“그래도 상관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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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39화

예상대로 세바스찬은 이해리를 데리고 가 대뜸 남자에게 소개했다.“안녕하세요. 전 세바스찬이라고 해요. 이쪽은 전에 말했던 동양 여자, 이해리고요.”금발의 잘생긴 남자는 세바스찬을 한번 보더니 천천히 이해리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 역시 이해리가 제법 마음에 든 듯했다.“당신이 그 한국에서 왔다는 여자군요? 당신 나라에서 꽤 유명하다던데, 이번에 해외에는 무슨 일로 온 건가요?”이해리가 인사를 건네기도 전에 세바스찬이 먼저 말했다.“이번에 저와 협력하려고 온 거예요. 앞으로 둘이 프로젝트 하나를 진행할 거고, 사업상 왕래도 잦아질 거예요. 우리 사업에 참여해 볼 생각 없어요?”세바스찬의 말을 들은 이해리는 고개를 들어 그를 힐끗 바라봤다.그동안 세바스찬이 두 사람의 협력을 서두를 필요가 없다고 계속 말한 이유가 있었다. 이때 자신을 미끼로 이용하려던 것이었다.하지만 이해리는 내색하지 않고 두 사람의 대화를 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이 어떤 방향으로 협력하려는지도 파악했다.잠시 뒤 세바스찬이 다른 사람에게 불려 가자, 이해리는 눈앞의 거물에게 불쑥 말했다.“저와 따로 협력한다면 세바스찬보다 더 큰 이익을 드릴 수 있어요.”“네? 지금 저를 따로 빼내 가겠다는 건가요?”상대의 의심을 알아챈 이해리가 웃었다.“세바스찬이 왜 저를 이렇게 소중하게 데리고 다닌다고 생각하세요?”이해리가 그에게 협력 의사를 물려던 순간, 남자는 손에 들고 있던 술잔을 내려놓았다.“세바스찬과는 오래전부터 알고 지냈고 여러 사업을 함께한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뒤통수를 칠 생각은 처음이군요...”그 거물은 눈앞의 여자를 바라보며 말했다.“제가 당신 말을 따르게 하려면 더 좋은 패를 내놓아야 할 겁니다.”익숙한 말에 이해리의 미간이 움찔했다.‘어째서 이 사람들은 하나같이 비슷한 말만 하는 걸까? 대체 더 좋은 패가 무엇이란 말인가.’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생각하던 순간, 남자가 갑자기 가까이 다가왔다.“전 아직 한국 여자와 만나 본 적이 없어요. 당신이 저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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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40화

이 바닥에서 오래 지낸 로저스도 저런 여자는 처음이었다.로저스는 비서에게 몇 가지를 지시하고는 멀어지는 이해리를 바라보며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떠올렸다.로저스에게서 벗어난 이해리는 안색이 좋지 않았다.세바스찬은 멀리서 전화를 하며 다른 사업가와 협력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한참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자 이해리는 더는 기다리지 않았다.그녀는 주변 사람들과 직접 몇 마디 나누며 관련 단서를 알고 있는지 알아볼 생각이었다.조직의 보스인 세바스찬이 이런 자리에서 그들과 교류한다는 사실부터 이해리에게는 이상하게 느껴졌다.이해리가 아는 조직의 보스들은 사업을 할 때 인정이나 체면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사업 판에서 벌어지는 속고 속이는 싸움에 굳이 끼어들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세바스찬이 보여 준 행동은 매번 이해리의 예상을 벗어났다.그래서 오늘 그의 모습을 본 이해리의 머릿속에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세바스찬과 정지안이 적대 관계이고, 이 자리에는 세바스찬조차 환심을 사야 하는 인물들이 가득하다면...’이해리의 머릿속에 수많은 계획이 떠올랐다. 그녀는 현장에 있는 여러 사람의 얼굴을 기억해 두었다.그녀는 세바스찬의 영역에서 몰래 그들에게 접근하면서 정지안의 이름을 내세웠다.이곳 역시 또 하나의 사업 판이었지만, 이익과 계산은 훨씬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특히 이해리가 정지안이 보낸 사람이라는 말을 들으면 상대는 하나같이 매우 놀랐다.로즈메리라는 여자도 그중 한 명이었다. 이해리가 정지안 곁의 사람이라는 말을 들은 로즈메리는 술잔을 든 채 호기심 어린 얼굴로 물었다.“정지안의 사람이라면서 왜 세바스찬과 함께 나타난 거죠? 제가 알기로 둘은 철천지원수일 텐데요.”상대도 두 사람의 관계를 안다는 사실을 알아챈 이해리가 신비로운 미소를 지었다.“그건 또 다른 이야기죠. 하지만 저, 그리고 정지안과 협력할 생각이 있다면 우리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들려드릴 수 있어요.”사실 특별히 할 이야기는 없었다. 세바스찬처럼 도덕성이 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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