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dos os capítulos de 대표님의 은밀한 처방전: Capítulo 11 - Capítulo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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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마음은 먼저 다가간다

가을은 병원의 유리창에도 제 무늬를 남기고 있었다. 서윤은 창가에 머물며 따뜻한 차 한 잔을 들고 생각에 잠겼다. 요즘 들어 이준과의 세션은 마치 하나의 이야기처럼 연결되어 흘러갔다. 치유가 목적이었지만, 어느 순간 그 이상이 되어버린 감정이 있었고, 그것은 부정할 수 없이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이준은 언제부터인가 그녀를 한 사람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치유사나 계약 상대가 아닌, 그냥 한 사람. 그리고 그 시선은 그녀를 흔들기 시작했다.이준은 평소보다 늦게 별관에 나타났다. 회의가 길어졌다는 말에 서윤은 고개를 끄덕이며 기다렸다. 문을 열고 들어온 그는 피곤해 보였지만, 눈빛만큼은 또렷했다."오늘은 나보다 당신이 더 필요했던 것 같네요."그녀의 말에 그는 조용히 웃었다. "그래서 온 거예요. 나 자신보다 당신을 먼저 만나고 싶었으니까."말은 짧았지만, 감정은 길게 이어졌다. 서윤은 그의 말에서 체온을 느꼈다.오늘의 세션은 손끝 감각 훈련과 짧은 심상 유도. 하지만 서윤은 평소보다 간결하게 구성했다. 이준은 이미 감정에 충분히 민감해져 있었고, 그녀의 작은 제스처만으로도 반응을 보였다.그는 가만히 누운 채, 그녀가 건네는 한 마디 한 마디에 귀를 기울였다."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생각해본 적 있으세요? 이마? 가슴? 아니면 손끝에 머무는 걸까요."이준은 천천히 눈을 감고 말했다."지금은… 당신 앞에 있어요. 머무는 곳을 정하지 못한 채, 그저 당신을 따라가고 있어요."서윤은 그의 손끝에 조심스레 손을 얹었다. 그리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속삭였다."그 마음이 너무 멀지 않도록, 제가 곁에 있을게요."세션이 끝나고도 이준은 자리를 쉽게 뜨지 않았다. 그는 책상 위에 있던 그날의 향수 노트를 다시 집어 들었다. 손가락으로 천천히 종이 위를 문지르듯 쓸어내리며 말했다."감정이 오래 머문다는 말, 그게 맞는 것 같아요. 그런데 오래 머문다는 건, 언젠가 떠날 수도 있다는 뜻일까요?"서윤은 한참을 생각하다 조용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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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감정의 무게

비는 그쳤지만, 창밖 풍경은 여전히 잿빛이었다. 건물 사이사이로 스며드는 햇살도 흐리고, 나뭇잎은 젖은 채 미동도 없이 붙어 있었다. 마치 세상이 깊은 숨을 고르고 있는 것처럼.서윤은 오늘따라 병원에 조금 일찍 도착했다. 세션 시간보다도 훨씬 전에 도착한 이유는 단순했다. 마음이 먼저 움직였기 때문이다.그녀는 사무실의 커튼을 반쯤 걷고, 찻잔에 물을 올렸다. 찻물이 끓는 동안, 어젯밤 이준이 보냈던 짧은 메시지를 다시 떠올렸다.[오늘도… 당신의 말이 필요할 것 같아요.]이준은 그날도 지친 얼굴로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러나 그의 눈빛은 전날과 달랐다. 불안이나 혼란보다는, 뭔가 단단히 결심한 사람의 얼굴이었다."오늘은 내 얘기를 좀 해볼게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왜 이렇게 복잡한 감정들 속에 있는 건지… 당신은 알아야 하니까."서윤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은 그녀에게 허락이 아니라, 신뢰였다.이준은 소파에 앉아 손을 모았다. 그리고 마치 오래된 일기를 꺼내듯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다."어릴 때, 아버지는 거의 집에 없었어요. 어머니는 아프셨고. 나는 늘 조용히, 누군가 눈치 보며 자랐죠. 말하면 상처받을까 봐, 다 안고 혼자 삼켰어요."그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단단했다."그런데 당신 앞에선… 그게 자꾸 무너져요. 감정이 쏟아지고, 말이 새고. 처음엔 불편했는데, 이제는 오히려… 이상하게 안심돼요."서윤은 그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나서, 조용히 다가가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대표님은 복잡한 사람이 아니라, 섬세한 사람이에요. 마음이 크고, 그래서 그 무게를 혼자 감당해온 거예요. 지금껏 잘 견뎌오신 것도, 충분히 대단한 일이에요."그 말에 이준은 눈을 감았다. 마치 무언가를 내려놓는 사람처럼, 아주 길게 숨을 내쉬었다."감정에도 무게가 있다면… 지금 나는 그걸 나눌 수 있어서, 조금 가벼워진 것 같아요."그는 손등을 가볍게 쓸며 말했다."그 무게의 반을 당신이 들어주고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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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경계에 닿은 온기

하루가 끝나갈 무렵의 햇빛은 언제나 가장 따뜻했다. 건물 옆면을 부드럽게 감싸는 금빛 선들, 창문 틈 사이로 흘러드는 색감은 마치 그날 하루의 모든 감정을 포근히 감싸주는 듯한 기분을 주었다.서윤은 커튼을 걷지 않았다. 가을 저녁 햇살이 방 안으로 스며드는 이 시간, 무언가를 덧대지 않아도 그저 그대로 아름다웠다. 오늘은 약속도, 처방도 없는 날이었지만 이준은 연락도 없이 나타났다."죄송해요. 예고 없이 와서. 그냥… 여기 오고 싶었어요."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날도 있다고, 오늘 같은 날은 말보다 존재가 더 중요한 거라고 그녀는 생각했다.이준은 문을 닫고 조용히 방 안으로 들어왔다.둘 사이엔 익숙한 침묵이 흘렀고, 그 침묵은 불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편안하게 감싸 안는 듯했다. 그가 가장 먼저 한 행동은 창가에 있는 향초를 바라보는 일이었다."이 향기, 익숙하네요. 예전에도… 이 향이 있었던 것 같아요."서윤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처음 뵈었던 날, 이 향을 피웠어요. 안정감을 줄 수 있어서 자주 써요."이준은 조용히 앉으며, 눈을 감았다. 그 향 속에 무언가를 묻어두려는 듯한 표정이었다."그날 이후, 이 향만 맡으면 마음이 이상하게 가라앉아요."서윤은 그의 고백을 조심스럽게 받아들였다. 기억은 향기와 함께 남는다고 믿고 있었기에, 그 향이 누군가의 마음에 머문다는 건 그녀에겐 가장 깊은 방식의 기억이었다.그날의 방 안은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둘은 따로 말하지 않아도, 서로를 느끼고 있었다. 창가에 앉은 이준은 문득, 그동안 말하지 못했던 것을 꺼냈다."서윤 씨는 항상 침착하세요. 감정을 잘 숨기시죠. 그런데… 가끔은 당신이 무너지면 어떨까 생각해요. 그럼 내가 뭐라도 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서윤은 그 말을 듣고,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는 조용히 입술을 열었다."저는… 무너지지 않으려 애쓰는 사람이에요. 감정을 안으로 쌓는 건, 제 방식이기도 하니까요. 그렇지만… 요즘엔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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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감정의 여백

가을빛이 부드럽게 창가를 쓰다듬던 오후, 서윤은 책상 앞에 앉아 이준이 남긴 짧은 메모를 바라보았다. 하얀 메모지 한 귀퉁이에, 그날의 향초 향을 닮은 잔잔한 필체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오늘의 조용함이 오래 기억되길.’감정을 말로 꺼내지 않아도, 가끔은 이런 한 문장이 마음을 오래 붙잡는다. 그녀는 펜을 들어 그 아래에 작은 답장을 남겼다.‘기억은 향처럼, 가장 깊은 곳에 머무니까요.’그날 저녁, 병원에서 마주한 이준은 그녀의 눈빛을 보자마자 무언가 달라졌음을 느꼈다. 말은 없었지만, 감정이 고요하게 부풀어 오르는 느낌이 방 안을 채웠다."그 메모, 받으셨나요?"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준은 말을 잇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맞은편에 앉아 조용히 그녀의 표정을 바라보았다. 오늘 그녀는 그 어떤 날보다도 조용했고, 그 조용함은 편안함과 긴장을 동시에 품고 있었다.이준은 천천히 이야기를 꺼냈다."사실, 오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싶었어요. 그냥… 당신이 있는 이 공간 안에 머물고 싶었어요."서윤은 조용히 그의 말을 받아들이며 말했다."말이 필요 없는 순간이 있죠. 마음이 이미 충분히 많은 말을 하고 있을 때."두 사람은 그 말 이후로 더 이상 어떤 단어도 꺼내지 않았다. 방 안은 적막했지만, 그 적막은 어떤 감정보다도 깊고 분명했다. 서윤은 조심스레 물컵을 들어 건넸다. 손이 손에 닿는 순간, 이준은 아주 작게 숨을 들이켰다.그 작고 섬세한 반응이, 그녀에게는 하나의 대답처럼 느껴졌다.시간은 흐르지 않는 듯 흘렀고, 두 사람은 마주 앉아 감정을 교환했다. 말 대신 시선으로, 손끝 대신 숨결로.그러다 문득, 이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서윤 씨는 어떤 사람을 사랑하나요?"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피하지 않았다. 잠시 고개를 숙인 뒤, 천천히 고개를 들며 답했다."감정을 억누르지 않아도 되는 사람. 말하지 않아도 내 마음을 헤아려주는 사람. 그리고… 내가 그 사람 옆에 있을 때 나 자신을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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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흐릿한 경계, 더 선명해지는 마음

첫눈이 내린 다음 날 아침, 창가에 쌓인 눈빛이 아직 녹지 않고 있었다. 서윤은 병원 대기실 창가에서 잠시 눈을 바라보다가, 손에 든 노트를 천천히 펼쳤다. 종이 위에 어제의 온기가 아직 남아 있는 것처럼, 그녀의 손끝은 조심스럽고도 다정했다.이준과의 거리. 그것은 물리적 거리보다도, 감정적 거리에서 더 많은 온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단순한 환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그것을 인정해야 할 타이밍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음을 직감하고 있었다.이준은 평소보다 조금 일찍 병원에 도착했다. 그의 얼굴엔 어제보다 더 부드러운 기색이 감돌았다. 무엇보다, 그의 걸음은 분명하게 서윤을 향하고 있었다.그녀는 미리 따뜻한 차를 준비해 두고 그를 맞았다. 두 사람은 별다른 말 없이도 서로를 이해하는 눈빛을 나눴고, 오늘은 그 눈빛이 평소보다 조금 더 오래 머물렀다."춥죠? 오늘은 조금 더 따뜻하게 드시라고 진한 홍차로 준비했어요."그녀의 말에, 이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컵을 받아들었다."감사합니다. 이런 게… 참 따뜻하네요. 단순한 차 한 잔인데도."서윤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는 여전히 낯선 감정에 익숙해지는 중이었고, 그 불안정한 균형이 그녀의 마음을 건드렸다.오늘의 세션은 의외로 가벼운 이야기로 시작되었다. 이준은 평소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꺼냈고, 그녀는 그 흐름을 따라가며 조금씩 질문을 더했다. 말이 오가는 사이, 그들의 눈빛은 자주 마주쳤고, 감정은 조금 더 엷게, 그러나 확실히 스며들었다."서윤 씨는… 언제부터 이렇게 조용한 걸 좋아했어요?"그녀는 질문을 되새기듯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어릴 때부터요. 조용해야 내 안의 소리를 더 잘 들을 수 있었거든요. 시끄러운 곳에선 늘, 내가 무너질 것 같았어요."이준은 그 말을 조용히 받아들이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그래서 그런가 봐요. 서윤 씨 곁에 있으면… 이상하게 내 안의 소음이 잦아들어요."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는 점점 더 부드러워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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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당신을 초대한 저녁

그날은 유독 바람이 많이 부는 저녁이었다. 낮의 잔설이 다 녹기도 전에 기온이 떨어졌고, 바람은 나뭇가지를 거세게 흔들며 거리의 풍경을 바꾸고 있었다. 서윤은 코트를 여미며 병원을 나섰고, 주머니 속 핸드폰 진동에 걸음을 멈췄다.[혹시 오늘 저녁 시간 괜찮으세요?]이준이었다. 그녀는 잠시 망설였지만, 곧 단정한 말투로 답장을 보냈다.[괜찮아요. 어디로 가면 될까요?]이준은 그의 자택 근처, 조용한 골목 안에 있는 한적한 레스토랑을 예약해두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 그는 그녀가 편하게 앉아 있을 수 있기를 바랐다. 도착한 서윤은 약간 긴장한 표정이었지만, 그의 따뜻한 환대에 서서히 마음을 풀기 시작했다.테이블 위에는 소박한 꽃병과 촛불이 놓여 있었다. 음식은 정갈했고, 음악은 잔잔했다. 이준은 와인잔을 조심스럽게 들어 그녀에게 건넸다."이런 자리는… 처음이죠?"그녀는 잔을 받아 들며 작게 웃었다."네. 이준 씨랑 이렇게 마주 앉아 있는 것도 처음이에요. 진료실 밖에서는."그의 시선이 짧게 흔들렸다. 그 말 한마디에 그는 더 조심스러워졌다. 서윤이 이 공간에서 편안할 수 있도록, 오늘 저녁은 천천히, 그러나 자연스럽게 흘러야만 했다.음식이 하나씩 테이블 위에 놓이고, 대화는 사적인 이야기들로 옮겨졌다. 서윤은 학창 시절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꺼냈고, 이준은 의외로 유쾌한 대학 시절 일화를 들려주었다. 서로의 시간이 조금씩 공유될수록, 분위기는 부드럽게 내려앉았다."서윤 씨는… 누군가에게 기댄 적 있어요? 정말 마음 다 열고요."그녀는 그 말에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잠시 고개를 숙였다가, 고요히 답했다."기대고 싶었는데… 그럴 수 없던 시간들이 많았어요. 제가 무너지면 아무도 안아줄 사람이 없다는 걸 알았으니까요."그는 그 말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캐묻지 않았고, 대신 와인잔을 들었다."그럼 오늘은… 그냥 기대고 가도 괜찮아요. 아무 말 없이도요."식사가 끝난 후, 그는 그녀를 집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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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마음의 거리, 반 걸음

토요일 오후, 공기는 차가웠지만 햇살만은 맑고 따뜻했다. 겨울의 끝자락, 도심의 공원에는 여전히 마른 나뭇가지들이 앙상했지만, 그 사이로 햇빛이 내려앉은 길은 어딘지 모르게 부드러워 보였다.서윤은 공원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두꺼운 머플러 안에 얼굴을 파묻고, 조용히 주변을 둘러보던 그녀는 이준의 모습이 저 멀리 보이자 작게 숨을 내쉬었다. 그는 어김없이 단정한 차림이었고, 서윤을 발견하자 어색하지만 반가운 미소를 지었다."많이 춥진 않으세요?"그가 먼저 다가와 물었다.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작게 웃었다."괜찮아요. 오히려 햇살이 따뜻해서 좋아요."그들은 말없이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처음엔 발걸음에 맞추는 것이 조금 어색했지만, 어느새 익숙한 박자로 함께 걷고 있었다. 나뭇가지 사이로 비치는 햇빛이 두 사람의 어깨를 부드럽게 덮고 있었다."이 공원… 고등학생 때 자주 왔던 곳이에요. 학원 끝나고, 친구들이랑도 걷고, 혼자서도 많이."서윤이 입을 열었다. 이준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땐… 지금보다 더 무거운 마음으로 걸었겠네요."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 지금 생각하면, 그때는 누구한테도 내 마음을 보이면 안 될 것 같았어요. 울어도 안 되고, 기대도 안 되고… 그냥 견뎌야만 했던 것 같아요."그의 시선이 부드러워졌다. 그는 길가 벤치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조심스럽게 말했다."지금은요? 지금은… 저한테도 그런 마음 드세요? 보이면 안 될 것 같은?"그녀는 조용히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아니요. 이준 씨 앞에서는… 이상하게도 가끔, 아무 말 안 해도 괜찮을 것 같아요. 그냥 있는 그대로 보여도 될 것 같은…"그의 입꼬리가 아주 작게 올라갔다. 말없이 벤치에 앉은 그는, 자리를 조금 비켜 그녀가 앉을 수 있도록 공간을 내어주었다. 서윤도 말없이 그의 옆에 앉았다.그들은 한참을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머리 위로 까치가 한 마리 날아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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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서툴고 조심스러운 식사

토요일 저녁, 이준은 유난히 많은 시간을 주방에서 보냈다. 칼을 잡는 손은 서툴렀고, 레시피를 따라가는 눈은 여러 번 되돌아갔다. 요리는 익숙하지 않았지만, 서윤을 떠올리면 자꾸만 무언가를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앞섰다. 그의 부엌에는 라벨이 아직 떼지 않은 그릇들과 포장된 채소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그는 테이블을 정리하고, 촛불 하나를 조심스레 켰다. 그 작은 불빛 아래에서 식탁은 조금 더 따뜻한 공간처럼 보였다. 식사는 단출했다. 직접 만든 파스타, 손질한 샐러드, 그리고 라즈베리 소스를 얹은 디저트까지. 그의 정성이 고스란히 담긴 저녁이었다.초인종이 울렸다. 서윤이었다.이준은 문을 열며 작게 웃었다."정말 오셨어요.""그렇게 말씀하셨잖아요. 기다리겠다고. 그 말을… 믿어보기로 했어요."서윤의 말투는 평온했지만, 그 안엔 수많은 감정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이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안으로 들였다.서윤은 식탁을 바라보다, 살짝 눈을 동그랗게 떴다."와… 진짜 직접 하신 거예요?""조금 허술해도… 봐주세요. 레시피 다섯 개는 본 것 같아요."그의 솔직한 고백에 서윤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식탁에 앉은 두 사람 사이엔 처음의 어색함이 아니라, 어딘가 익숙한 따뜻함이 피어오르고 있었다.식사는 예상보다 훨씬 괜찮았다. 이준은 어설픈 손놀림으로 만든 음식을 내놓았지만, 그 안에는 분명한 진심이 있었다."이준 씨. 이런 거, 자주 하세요?""아뇨. 누군가를 위해 뭔가를 해보는 게… 거의 처음인 것 같아요. 그냥, 이런 건 늘 누가 해주는 거라고만 생각했거든요."서윤은 그 말을 조용히 곱씹었다.그는 늘 받는 쪽이었을 것이다. 그가 살아온 환경이나 위치를 떠올리면, 누군가에게 마음을 쓰거나 시간을 내주는 일이 당연하지 않았을지도 몰랐다."그런데 요즘은…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그게 익숙하진 않아도, 서툴러도."그의 말에 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역시 그랬다. 늘 누군가를 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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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밤의 끝에서 피어나는 마음

서윤은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했다. 베개 옆에 놓인 휴대폰 화면이 여러 번 켜졌다 꺼졌다. 어떤 알림도 오지 않았지만, 그녀는 자꾸만 이준의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당신이 가까워요. 그리고 그게, 겁나면서도… 좋아요.'익숙하지 않은 감정이었다. 감정이라는 이름 아래 부끄러움도 있었고, 작은 희망과 묘한 두려움도 함께 얽혀 있었다. 서윤은 이불을 끌어당기며 눈을 감았다. 그러나 그 밤은 길었다. 그리고, 조용히 아름다웠다.이준 역시 그 밤을 가만히 넘기지 못했다. 회사 서재에 혼자 앉아 커튼을 반쯤 닫은 채, 노트북을 켜고 무언가를 적었다. 평소라면 숫자와 문서가 가득한 화면이지만, 오늘은 달랐다.'서윤 씨와 함께한 시간들을 정리해본다. 아니, 기록해본다고 해야겠다. 내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그녀가 어떤 눈빛이었는지… 놓치고 싶지 않은 순간들이 많아진다.'그는 글을 쓰다 말고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보았다. 도시의 불빛들이 가만히 퍼져 있었다. 그 아래, 자신이 조금은 덜 외로워졌다는 생각이 문득 스쳤다.다음 날 아침, 서윤은 일찍 출근했다. 병원 복도를 지나던 중, 이준으로부터 메시지가 도착했다.오늘 저녁, 병원 옥상… 괜찮으시면 잠깐만 나와주실래요?서윤은 잠시 멈춰 섰다. 옥상이라는 단어가 낯설고도 기묘하게 설렜다. 그리고,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답장을 보냈다.네. 갈게요.해가 완전히 지고, 병원의 불빛들이 하나둘 꺼져갈 무렵. 서윤은 조심스레 옥상으로 향했다. 밤공기는 생각보다 차가웠지만, 이준은 작은 담요와 보온병을 준비해두고 있었다."커피 좋아하시는 거, 맞죠?"그녀는 그에게서 보온병을 받아 들고 조용히 웃었다."어떻게… 기억하세요?""그날, 상담실에서 처음 마주했던 커피잔. 향이 좋다고 하셨잖아요. 그 순간이 계속 생각났어요."이준은 그렇게 말하며 그녀 옆에 조심스레 앉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담요 한 겹의 거리와, 그보다 조금 더 가까워진 마음의 간격이 놓여 있었다.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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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손끝의 거리

그날 밤, 서윤은 평소보다 조금 더 늦게 집에 도착했다. 빗물에 살짝 젖은 어깨를 말리며 욕실로 향했고, 샤워기에서 떨어지는 따뜻한 물줄기 속에서 하루의 피로를 조금씩 씻어냈다. 문득 거울 앞에 선 얼굴을 마주한 순간, 그녀는 자신이 잔잔히 웃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어떤 사람과의 시간이 하루를 이렇게 부드럽게 마무리하게 만들 줄은 몰랐다. 그리고 그 사람의 조용한 시선과 말들이, 생각보다 오래 가슴 안에 머무른다는 것도.이준 역시 침대에 등을 붙인 채, 창문을 통해 들려오는 빗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문득 핸드폰을 들었다. 메시지를 쓸까 망설이다가 결국, 이렇게 적었다.-오늘 밤, 편안히 쉬셨으면 해요. 꿈속에서도 따뜻하길.보내기 전, 손가락이 살짝 멈췄다. 그러나 이내 전송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는 화면을 내려놓고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낯설게 포근한 밤이었다.다음 날 아침, 병원 복도에서 마주친 두 사람은 평소처럼 인사를 나눴다. 그러나 눈빛만으로도 어젯밤 서로의 마음을 떠올리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잘 주무셨어요?"서윤의 물음에 이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네. 덕분에요."그 짧은 대화 속에 따로 말하지 않아도 충분히 느껴지는 감정이 있었다.그날의 진료는 유난히 조용하게 흘렀다. 이준은 평소보다 감정을 억누르지 않았고, 서윤도 그의 말을 가로막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서로의 흐름을 따라가는 시간. 그것이 어쩌면 진짜 '처방'이 되어주는 순간일지도 몰랐다.이준은 의자에 앉은 채, 문득 손등을 바라봤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누군가를 믿는다는 게… 원래 이렇게 어려운 일이었을까요. 저는, 그게 잘 안됐어요. 아주 오랜 시간 동안."서윤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을 가만히 받아들였다."어렵죠. 저도 그래요. 사람에게 기대는 법을 자주 잊고 살았어요. 기대는 건 언젠가 무너질 수도 있는 일이니까."그 말은, 마치 서로가 서로를 닮아 있다는 걸 확인하는 장면처럼 느껴졌다.진료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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