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대표님의 은밀한 처방전: Chapter 31 - Chapter 40

57 Chapters

31화. 경계와 가까워지는 법

사무실 창 너머로 뿌연 봄안개가 내려앉은 아침,서윤은 평소보다 조금 더 이른 시간에 출근했다.전날 밤 노트에 적은 문장들이 자꾸만 떠올랐고,그 여운을 곱씹으려는 듯 조용한 공간을 찾아 먼저 책상 앞에 앉았다.노트북을 열고 한동안 멍하니 커서를 바라보다,서윤은 차분하게 정리해둔 '이준 전담 일정표'를 다시 훑었다.몇 주 전만 해도 이 표가 단지 업무의 연장이었다면,지금은 조금 다른 감정의 무게로 다가오고 있었다.이준의 공황 증상은 더디지만 확실히 호전되고 있었고,그는 서윤 앞에서 이전보다 훨씬 솔직해지고 있었다.그리고… 서윤 스스로도 조금씩 경계를 허물고 있다는 걸 부정할 수 없었다.그 순간, 그녀의 핸드폰 화면이 켜졌다.'이준 대표님'이라는 이름 아래 짧은 메시지 하나가 떠 있었다.“아침 산책, 함께 하실래요?”그 짧은 문장 속엔 여전히 무심한 말투가 묻어 있었지만,서윤은 알았다. 그가 이렇게 먼저 손을 내민 건 흔치 않은 일이란 걸.이준은 회사 근처의 작은 공원 앞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베이지빛 코트를 입은 그는 특유의 말끔함을 잃지 않은 채,주머니에 손을 넣고 서 있었다.“생각보다 빨리 나오셨네요.”서윤이 다가오자 그는 짧게 눈을 마주치고 미소를 흘렸다.“이럴 땐… 기다리는 게 익숙해요.”서윤은 그 말에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정확히 알 순 없었지만,그 순간만큼은 그녀도 가볍게 그 옆에 서고 싶었다.“그럼, 조금만 걸어요.”두 사람은 길게 뻗은 산책로를 따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계절의 끝자락에 선 봄은 아직 완연하진 않았지만,둘 사이엔 그보다 조금 먼저 피어난 온기가 있었다.“예전엔…”이준이 말했다.“누군가랑 이렇게 천천히 걷는 시간이 견디기 어려웠어요. 생각이 너무 많아져서.”서윤은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레 물었다.“지금은요?”“지금은… 생각이 줄어요. 당신이 옆에 있으면.”말 끝에 풍경이 잠시 고요해졌고,서윤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가슴 한편에 천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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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화. 가까운 사람은 쉽게 아프다

새벽녘, 창문 너머로 흘러드는 바람에 커튼이 조용히 흔들렸다.서윤은 잠결에 눈을 떴다. 침대맡에 둔 핸드폰 화면엔 그가 보낸 짧은 메시지가 조용히 불을 밝히고 있었다.“잘 도착했어요. 푹 쉬세요.”단 한 줄. 그러나 그 속엔 여러 감정이 응축되어 있었다.그가 집에 도착한 시각은 서윤이 예상한 것보다 훨씬 늦었다.그녀보다 더 오래, 조용히 생각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서윤은 핸드폰을 다시 뒤집으며, 스스로에게 묻듯이 입을 열었다.“그 사람은, 지금 나와 같은 마음일까.”사랑이라 부르지 못하는 감정,계약이라 정의할 수 없는 거리. 그 애매한 중간 지점에,서윤은 자신이 서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다음 날, 이준은 조금 지친 얼굴로 사무실에 들어섰다.그의 눈가엔 밤을 새운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서윤은 조용히 커피를 내려, 그의 책상 위에 놓고 아무 말 없이 돌아섰다.그는 그녀의 등을 바라보다가, 작게 혼잣말처럼 내뱉었다.“어떻게 알았지…”감기 기운이 살짝 올라오는 듯한 목소리였다.전날의 늦은 시간까지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던 탓일까.아니면, 마음보다 더 예민한 몸이 먼저 반응한 것일까.점심 무렵, 그녀는 조용히 이준의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대표님, 시간 괜찮으세요?”이준은 손에 들고 있던 펜을 내려놓고 고개를 들었다.“…네, 들어오세요.”서윤은 그의 눈빛을 살피며 조심스레 다가갔다.책상 위에 놓인 손수건 한 장. 그 위엔 서늘한 온도가 느껴지는 파스와 약 봉지가 놓여 있었다.“어제… 조금 늦게 들어가셨죠?”“서윤 씨가 자리에 없으니까, 오히려 오래 머물게 되더군요.”이준의 말은 농담처럼 들렸지만,그 안에는 그녀를 향한 의존이 조금씩 드러나고 있었다.“미리 말해 주세요. 아플 땐.”“그런 거… 말하는 거 익숙하지 않아서요.”그의 목소리는 한없이 낮았고,그 낮은 울림 안에서 그녀는 문득, 그가 얼마나 혼자 견뎌온 사람인지 떠올랐다.그는 자신의 불안도, 증상도, 피로도 오랫동안 ‘업무’ 뒤에 숨겨 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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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화. 아무 말 없이, 옆에

그날 이후, 며칠 동안 서윤은 그와 마주치지 않았다.의도적으로 피한 것도, 피하고 싶었던 것도 아닌데 이상할 만큼 동선이 엇갈렸다.회의실 문을 열면 그가 이미 나가 있었고,복도 끝을 돌아나가면 엘리베이터는 방금 전 닫힌 뒤였다.공용 주방에서 커피를 내리는 시간조차 서로를 피하는 듯 조용히 비껴갔다.‘어쩌면 이건… 필요한 시간일지도 모르겠네.’말 대신 비워두는 시간이,가끔은 고백보다 더 깊이 감정을 쌓아올리기도 한다는 걸 서윤은 조금씩 느끼고 있었다.오후 네 시를 막 지난 시간,회사 안은 묘하게 나른한 정적이 감돌았다.서윤은 회의가 끝난 뒤, 한 손에 커피잔을 들고 옥상 정원으로 나왔다.바람이 살짝 불어왔다.잔잔하게 흔들리는 식물들 사이로 햇살이 부드럽게 내려앉고 있었다.“여기, 아직 좋아하시죠?”낯익은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서윤이 돌아보자, 이준이 한 손에 보온병을 들고 서 있었다.그의 표정엔 조심스러움과 미소가 동시에 담겨 있었다.“…오랜만이네요, 대표님.”“몇 걸음 늦었네요. 매번 타이밍이 엇갈려서, 괜히 민망해졌어요.”그 말에 서윤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전 일부러 피한 건 아니었어요.”“알아요. 저도… 일부러 기다리지 않았고요.”그는 말끝을 흐리며, 그녀 옆 벤치에 조용히 앉았다.“이 커피, 다시 한 번 내려드리고 싶었어요.”보온병 뚜껑을 조심스럽게 열고,스테인리스 컵 두 개를 꺼내 따르던 그의 손끝은 낯설 만큼 정성스러웠다.“요즘은 이런 시간조차… 선물처럼 느껴지네요.”서윤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살짝 쌉싸름한 향과 함께 그가 건넨 말이 가슴에 천천히 내려앉았다.“…괜찮아지셨어요?”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묻자, 이준은 잠시 머뭇이다 고개를 끄덕였다.“조금씩요. 마음의 속도를 따라가려다 보니…자주 멈추게 되긴 하지만요.”그의 말은 전보다 훨씬 부드러웠다.조금은 내려놓은 사람의 말투였다.한참을 말없이 함께 앉아 있던 두 사람은 어느새 시간의 흐름에 기대듯 서로를 바라보았다.“서윤 씨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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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화. 손끝이 닿는 거리

서윤은 여전히 조심스러웠다.그와 함께 걷는 저녁길도, 조용한 벤치 위의 공기도,그녀에게는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었지만그 안에서 자꾸만 조율하고 숨을 고르게 되는 자신을 완전히 내려놓기는 어려웠다.이준의 곁에서 서 있는 것은 마치 얼어붙은 호숫가를 맨발로 걷는 일처럼 느껴졌다.발밑으로 삭풍이 스며드는 듯한 조심성과,그러면서도 그 위를 걸을 수 있는 용기를 주는 이상한 따뜻함.“서윤 씨.”그가 조용히 불렀다.손에 쥔 커피가 아직 따뜻하다는 사실에 서윤은 잠시 눈을 내렸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네.”“…다음 주 목요일, 혹시 시간 괜찮으세요?”그의 질문은 갑작스럽지 않았지만, 어딘가 약간 다른 결을 품고 있었다.“시간이 있다면… 서윤 씨가 좋아할 것 같은 전시가 하나 있는데, 같이 가면 좋을 것 같아서요.”말끝이 흐려졌지만, 이준의 눈빛은 선명했다.망설임 없이 앞으로 걸어가는 사람의 눈이었다.서윤은 순간, 무언가 묘한 감정을 삼켜야 했다.기대와 불안, 설렘과 두려움. 그 모든 감정이 고요한 수면 위로 일렁이다그녀의 목소리로 천천히 정리되었다.“…좋아요. 시간, 만들게요.”그 짧은 대답에 이준의 눈가가 아주 살짝 부드러워졌다.바람이 머릿결을 스쳐 지나가고, 커피 위로 김이 사라질 무렵, 서로의 숨소리 사이엔 작은 웃음이 피어 있었다.목요일, 그들은 말하듯 걷고, 듣듯 바라보았다.작은 전시장. 채광 좋은 창가에 놓인 설치 조각 하나를 두고 이준은 서윤에게 천천히 말을 건넸다.“이 작가, 빛을 소재로 작업하더라고요.빛이 닿지 않는 곳에 마음이 머문다는 말… 조금 서윤 씨 생각이 났어요.”그 말에 서윤은 놀라듯 고개를 들었다.이준은 차분한 얼굴로 설명을 덧붙였다.“항상 환한 데 서 있지는 않지만… 어딘가, 빛이 닿지 않는 사람들을 자꾸 바라보는 느낌. 그게… 서윤 씨 같다고 생각했어요.”그 말은, 예상치 못한 깊이였다.그가 자신의 일부를 이해하고 있다는 그 사실 하나가 서윤을 천천히 무너뜨렸다.전시장을 나서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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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화. 우리가 서로에게 익숙해지는 방법

햇살이 유리창을 타고 들이치는 아침,서윤은 작은 식탁 앞에 앉아 머그컵을 두 손으로 감싸 쥔 채 조용히 눈을 감았다.컵 안에는 이준이 선물한 블랙 카라멜 커피가 담겨 있었다.전날 그가 직접 건넨 커피였다.그 순간은 짧았지만, 그의 말투와 눈빛은 유난히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내가 정말 그렇게 느끼고 있는 거라면요.’그 말은 마치 조금 늦은 고백처럼,혹은 더 늦기 전에 꺼내고 싶었던 마음처럼 서윤의 가슴 어딘가를 서성였다.병원에 도착한 서윤은 조금 망설이다가 이준의 사무실을 찾았다.노크를 하기 전, 문틈 사이로 들리는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아니요, 오늘은 직접 찾아가볼게요.”짧은 전화 통화가 끝나고, 그녀가 문을 두드리자 이준은 고개를 들었다.눈에 띄게 놀라지는 않았지만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서윤 씨.”그 말은 인사였고, 어딘가 기다렸다는 듯한 기척이었다.서윤은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잠깐... 이야기 좀 해도 될까요?”그날 두 사람은 병원 근처 조용한 카페에서 마주 앉았다.창밖으로 떨어지는 햇살이 서로의 얼굴을 자연스럽게 비추었고,그 안에 묻힌 감정의 결은 말 없이도 서로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서윤이 먼저 말을 꺼냈다.“혹시... 우리, 이 관계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정리하고 가는 게 좋을까요?”이준은 잔잔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그럴 수 있다면, 서로 더 편해지지 않을까요.”서윤은 그 말에 조심스럽게 웃었다.“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우리가 감정 때문에 어긋나는 것보다는,감정을 나눌 수 있는 구조를 먼저 만들어보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그녀는 말끝에 살짝 눈을 떨구었다.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그 안엔 단단함이 담겨 있었다.“그래서… 당분간은 일 외의 영역은 선을 두기로 해요.감정이 흘러도, 그걸 바로 행동으로 옮기진 않기로 해요.적어도, 우리가 서로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고 난 다음까지는요.”이준은 아무 말 없이 그 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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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화. 그 사람의 체온이 내 안에 머무는 시간

그날 이후, 서윤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자주 바라보게 됐다.기계를 다루는 순간, 서류를 정리할 때,차 한 잔을 들어 올릴 때조차 아무것도 닿아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그의 체온이 또다시 깃드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이건 착각이 맞는 걸까, 아니면 감정이 현실보다 먼저 몸을 알아보는 순간일까.그녀는 책상 위에 올려놓은 손등을 천천히 쓰다듬으며깊게 숨을 들이마셨다.“괜찮아. 이건 그냥… 조금 민감해진 감각일 뿐이야.”하지만 괜찮다는 말은 언제나 가장 괜찮지 않은 순간에 떠오른다는 걸서윤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이준은 반대로 그날 이후 손을 꼭 감추기 시작했다.회의 중에도, 사적인 동선에서도 무의식적으로 팔짱을 끼거나 손을 안쪽으로 말아 쥐는 습관이 생겼다.그날의 감촉은 어쩌면 사람 하나의 체온이 아니라지독하게 사적인 경계가 허물어졌다는 신호처럼 느껴졌다.그는 늘 조심스러웠고, 조심스럽다는 말은 그만큼 상처받고 싶지 않다는 방어와도 같았다.‘혹시라도… 내가 먼저 무너뜨리게 되는 건 아닐까.’그는 말로 하지 못한 질문을 손끝에 꼭 쥔 채 하루하루를 버텨내고 있었다.어느 저녁, 비가 오기 시작한 날이었다.창밖 풍경이 물안개처럼 흐려지고회색 구름이 사무실 바닥까지 묵직하게 깔릴 무렵,서윤은 작은 티백을 하나 꺼내 이준의 책상 앞에 조용히 내려두었다.말없이 두고 가려 했지만 그는 마침 그 순간, 책상에서 얼굴을 들었다.“...비, 오네요.”서윤은 순간 멈칫했지만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답했다.“네. 비 오는 날은 따뜻한 게 필요하잖아요.”이준은 고개를 돌려 그녀가 놓고 간 잔을 천천히 바라보았다.따뜻한 홍차였다. 잔 위로 얇은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고,그 안엔 진심 같은 향이 아주 부드럽게 배어 있었다.그는 잔을 들어 입술을 댔다.그리고, 아주 조심스럽게 되물었다.“혹시… 오늘은 내 손이, 당신에게 닿아도 될까요?”질문은 너무 느렸고, 답은 너무 조용히 다가왔다.서윤은 말없이 그의 앞에 앉았다.그리고는 자신의 손을 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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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화. 햇살 아래 처방전

밤이 깊어질수록 도시의 불빛은 조용히 흐려지고, 고요한 회색빛 그림자가 창틀 너머로 길게 드리웠다. 이준의 오피스텔 천장에는 은은한 조명이 켜져 있었고, 그 아래에는 나란히 앉아 한동안 말이 없던 두 사람의 숨결만이 가만히 퍼졌다.서윤은 앞치마 끈을 천천히 풀며, 식탁 위 잔해들을 정리했다. 오늘 하루를 함께 보낸 시간은 평소보다 특별할 것도 없이 평범했지만, 그 속에 흐른 감정은 평범이라는 말과는 거리가 멀었다. 가까워졌다고 믿고 싶으면서도, 여전히 조심스러워야 할 지점들이 남아 있었고, 그 간극은 말없이 고개를 떨군 이준의 옆모습에서 조용히 퍼지고 있었다.그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낸 건, 커피 한 잔이 다 식어갈 즈음이었다.“오늘은… 그냥 하루가 빨리 지나갔으면 했어요.”서윤은 손에 들고 있던 머그컵을 조용히 내려놓았다.“왜요?”그의 눈동자가 조용히 떨렸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서윤을 바라보는 그 안에는 어떤 진심이 오래 맺혀 있었다. 이준은 잠시 숨을 고른 뒤,아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서윤 씨가 여기 오는 날은, 늘 뭔가 이상하거든요. 평소보다 시간 감각이 흐려져요. 너무 빨리 지나가는 것도 같고, 또… 너무 오래 기억에 남아요.”서윤은 대답하지 않고 그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 말이 가진 무게를 느끼고 있었다. 이준은 그녀를 바라보다, 조금 더 다가와 그녀의 손등 위에 손을 올려두었다.“처방전 계약, 계속해도 괜찮을까요?”그 물음은 너무나 조심스러웠고, 동시에 솔직했다. 이전과는 다른 결이었고, 그 말 속에는 단순한 심리 치료나 긴급한 응급 조치의 뉘앙스가 없었다. 그것은, 조금 더 개인적인 바람이었다.서윤은 잠시 눈을 감았다. 그녀 역시 그 질문이 품은 감정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마음 안에도 이준이라는 사람은 어느새 익숙하게 들어와 있었고, 그가 숨기지 않는 솔직함이 그녀를 더 이상 한 발짝 떨어진 위치에만 머물게 두지 않았다.“계속하죠.”그녀는 부드럽게 말했다. 그러나 그 짧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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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화. 그날의 체온

그날 아침, 창문을 타고 스며든 햇살은 어딘가 조심스러운 기척을 머금고 있었다. 이준은 창가에 걸터앉은 채 창문 너머의 나뭇잎 그림자를 바라보며 천천히 커피를 한 모금 머금었다. 유난히 조용한 아침이었다. 어제, 서윤이 건넨 ‘괜찮아질 거예요’라는 말이 아직 귓가에 남아 있었다.그 말엔 처방이 없었다. 어떠한 논리도 없었고, 원인과 해결의 구조도 없었다. 그저 담백하게 건넨 그 말 한 줄이, 그의 내부 어딘가를 묵직하게 울리고 있었던 것이다.“대표님, 오늘은 아침 식사 하시겠어요?”조심스레 열린 문 틈 사이로 들려온 목소리는 다정했고, 동시에 아주 조용히 닫힌 문을 노크하듯 머뭇거리는 기색이 있었다. 이준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 회색 니트와 크림빛 슬랙스를 입은 서윤은 마치 아무렇지 않은 듯한 얼굴로 트레이를 들고 서 있었다. 그러나 그의 시선이 그녀의 눈동자를 붙잡고 놓지 않자, 서윤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이 정도면, 병실 간호사보단 낫지 않아요?”이준은 대답 대신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리고 문득 이 공간에 그녀가 들어온 순간부터 마음이 평온해지고 있다는 걸 자각했다. 감정은 병처럼 찾아오지만, 처방은 때로 사람이라는 것을 그는 조금씩 배우고 있었다.서윤이 트레이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자리에 앉자, 두 사람 사이의 거리엔 어제보다 더 자연스러운 공기가 깃들었다. 말이 없어도 불편하지 않았고, 눈을 마주쳐도 조급하지 않았다.“잠, 좀 주무셨어요?”“네. 덕분에요.”그 짧은 대답은 어쩌면 그가 지금까지 그녀에게 가장 정직하게 내보인 감정이었다. 서윤은 눈을 깜빡이며, 그 속에 스치는 무언가를 읽어냈다. 그는 어제 그녀의 손을 잡았고, 어쩌면 그건 단순한 공황의 방어기제가 아닌 작고 단단한 의지의 표현이었다는 걸 말이다.“오늘은, 기분이 어때요?”그의 손에 놓인 포크가 잠시 멈췄다. 이준은 그 짧은 질문을 곱씹듯 한 번 되뇌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아직은... 낯설어. 근데, 숨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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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화. 부재의 자리, 마음의 여백

어느새 벚꽃은 거의 다 졌고, 가지 끝엔 연두색 새순이 맺히기 시작했다. 병원 마당에 나란히 서 있던 꽃잎들은 어느 순간부터 서서히 흩어졌고, 길가엔 잎이 아닌 잔가지들이 쌓였다. 계절은 그 누구의 허락도 없이 다음으로 넘어가고 있었다.서윤은 손에 든 파일을 꼭 쥔 채 병동 복도를 걸었다. 그의 발걸음은 평소보다 느리고, 그 속엔 어딘가 익숙한 무게가 섞여 있었다. 이준이 내원하지 않은 지 벌써 사흘째였다. 전화를 해도 받지 않았고, 메시지도 회신이 없었다. 그가 흔히 보여주던 회피의 방식이라면 이해할 수 있지만… 이번엔 조금 달랐다. 감정이 한 번 열린 이후, 조심스럽게나마 손을 내밀던 그였기에, 이렇게 갑자기 사라지는 공백은 조금 불안했다.“혹시... 이준 환자, 오늘도 안 오셨어요?”간호사에게 물으며 내보인 얼굴은 침착했지만, 목소리는 어쩐지 조금 빠르게 떨려 있었다. 간호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네, 며칠째요. 혹시 무슨 일 있으세요?”“아뇨. 그냥… 확인만요.”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그녀의 가슴 안에선 작은 불안이 꿈틀댔다.그는 혼자가 익숙한 사람이었고, 혼자서도 충분히 견뎌낼 수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가장 위험한 신호라는 걸, 그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그날 저녁, 서윤은 처음으로 그의 아파트 앞을 찾았다. 한참을 망설이다 초인종을 누르려던 순간, 현관문 너머 인기척이 느껴졌다. 문은 열리지 않았지만, 안쪽에서 가볍게 움직이는 그림자가 스쳤다.그녀는 조용히 문 앞에 기대어 한참을 서 있었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입을 열었다.“이준 씨. 괜찮으세요?”대답은 없었다. 침묵은 두터웠고, 그녀의 말은 벽을 뚫지 못한 채 되돌아왔다. 그래도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저, 그냥… 문득 생각이 났어요. 예전에 말하셨죠. 감정이 불편하다고. 예측이 안 된다고. 근데요, 이준 씨. 저도 그래요. 감정이라는 게 늘 준비된 채로 오는 건 아니에요.”작은 바람 소리가 건물 사이를 지나며 그녀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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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화. 가까워지기 위한 속도 .

병원 옥상, 바람은 차분히 불고 있었고, 이준은 난간에 손을 올린 채 멍하니 도시의 불빛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두운 회색 셔츠가 그의 등을 감싸고 있었고, 아래로 걸쳐진 실루엣은 왠지 전보다 가벼워진 것 같기도 했다. 그는 아직도 자신의 마음이 어디쯤인지를 잘 모르겠다고 느끼면서도, 서윤과 마주하고 난 이후 조금씩 뭔가 달라졌다는 걸 깨닫고 있었다.“이런 데 있었어요?”서윤의 목소리가 뒷편에서 들려왔고, 이준은 놀라지도 않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가운 위에 가볍게 얹은 니트 차림으로, 저녁 근무가 끝난 사람처럼 피곤하지만 따뜻한 얼굴이었다.“잠깐 생각 정리하고 있었어요.”그녀는 옆에 다가와 조용히 그의 옆에 섰다. 두 사람 사이에는 아직 한 발짝 정도의 거리, 그리고 아주 작은 망설임이 있었다.“아무도 없을 때 이 옥상, 괜찮죠. 바람도 적당히 불고, 소리도 조용하고…”서윤의 말은 이준을 바라보지 않은 채, 저 멀리 도시에 걸린 불빛을 향해 흘러나왔다. 그는 잠시 말이 없었지만, 곧 천천히 입을 열었다.“서윤 씨.”“응?”“…그날, 상담실에서 당신이 말한 거요. 저도 같은 마음이에요.”그녀가 조용히 그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엔 놀람보다 오히려 차분한 수용이 먼저 있었다.“당신이 없어졌을 때 내가 왜 그렇게 불안했는지, 요즘 조금씩 알 것 같아요. 그냥 치료받는 환자로서가 아니라… 당신이 내 곁에 없다는 게 견디기 힘들더라고요.”이준의 고백은 여전히 단단하게 말끝을 다듬으려 애쓰고 있었지만, 그 안에는 그의 진심이 숨겨지지 않고 고스란히 묻어나 있었다.“저도요. 저도 이젠 당신이 그저 내 환자라는 생각, 잘 안 돼요.”서윤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단호했다. 가슴속에서 더는 감출 수 없는 무언가가 서서히 피어나는 느낌이었다. 둘 사이의 거리, 어쩌면 그것은 오랜 시간의 보호막이었을지도 모른다. 감정이 부딪치지 않도록, 누군가가 더 다치지 않도록 만들어둔 얇은 유리막. 하지만 그 유리가 지금, 아주 조용하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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