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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이별전문가! 신나리: Chapter 161 - Chapter 170

195 Chapters

161화. 세상에 드러나는 이름들

영상이 끝났을 때, 조명이 켜지기 전까지 관객석은 한동안 숨을 죽이고 있었다.공기 속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여운이 떠돌았다.한 사람의 삶이, 한 직업의 의미가,한 여자의 마음이 그대로 스크린 위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나리는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그녀는 자신의 얼굴이 마지막 장면에서 천천히 사라지는 걸 지켜봤다.마치 스스로에게 이별을 고하는 장면 같았다.조명이 켜지고 박수가 터졌다.그 소리가 너무 크게 느껴져서, 그녀는 잠시 눈을 감았다.심장이 두근거렸다. 그건 떨림이 아니라,오랜 시간 감춰왔던 자신이 세상에 드러난 순간의 감각이었다.“축하해.”제하의 목소리가 옆에서 들렸다.그의 눈가도 젖어 있었다.“너무 멋있었어.”“나한테 이건 좀 버거워.”“왜.”“이건 나의 직업 이야기라기보다 나라는 사람의 고백 같아서.”“그게 사람들이 가장 원했던 거야. 진짜 이야기.”그녀는 고개를 숙였다.“진짜를 보여주는 게 늘 옳을까?”“적어도 오늘은 그랬어.”사람들이 그들에게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감동 받았어요.”“이별을 다르게 보게 됐어요.”“그 장면, 너무 좋았어요.”나리는 미소를 지었지만,그 안에는 낯섦과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그녀는 평생 누군가의 이별을 설계해왔지만,정작 자신의 이야기가 세상에 보여지는 건 처음이었다.제하가 그녀를 바라봤다.“괜찮아?”“응.”“거짓말.”“응, 거짓말.”“그럼 솔직하게.”“살짝 무서워.”“무슨 게.”“사람들이 나를 알아버린 게.”그의 손이 조심스레 그녀의 손등을 덮었다.“이제 숨지 마.”“익숙해서 그래. 늘 그림자 속에서 일했으니까.”“이젠 빛 아래에서도 괜찮아.”“그래도 너무 밝으면 눈부셔.”“그럼 내가 그늘 돼줄게.”그녀는 미소를 지었다.그 말이 이상하게 오래 가슴에 남았다.시사회가 끝난 다음 날, 기자들의 연락이 이어졌다.‘이별 전문가 신나리, 실제 존재 인물?’‘사랑의 끝을 설계하는 여자, 진짜였나?’‘다큐 속 그녀는 허구인가, 실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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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화. 감정 회복 컨설턴트, 신나리

새벽 다섯 시 반. 해가 완전히 떠오르기 전, 도시는 아직 잠에서 덜 깬 듯 조용했다.창문을 타고 들어온 옅은 빛이 커피 머신의 유리 표면에 스며들었다.나리는 커피콩을 갈며 소리를 들었다.그 규칙적인 마찰음이 마치 심장의 박동처럼 들렸다.그녀의 손끝엔 여전히 일의 감각이 남아 있었다.이제는 이별 전문가가 아니라감정 회복 컨설턴트로 불렸지만, 일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사람의 마음을 듣고, 그 마음이 부서지지 않게 조심스레 만지는 일.그녀는 커피를 내리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이제 진짜, 시작이네.”혼잣말 같았지만, 그 목소리는 묘하게 단단했다.문이 열렸다.“그 말, 나한테 한 거야?”제하였다.그는 늘 그렇듯 가볍게 웃으며 들어왔다.“네가 와도 놀랍지가 않네.”“이제 우리 같이 일하잖아.”“그 말 아직 어색해.”“곧 익숙해질걸.”그는 카운터 위에 노트북과 카메라를 올려놓았다.“오늘 일정은?”“의뢰자 한 명. 퇴직 후 관계 재정립 컨설팅.”“누구야?”“부부.”“이혼이 아니라?”“같이 살고 있지만, 감정이 다 식어서 어떻게 함께 살아야 할지 모르겠대.”그의 눈빛이 묘하게 바뀌었다.“그거 어렵겠네.”“그래도 해야지.”“그럼 내가 촬영할게.”“오늘은 기록하지 말자.”“왜?”“감정이 너무 생생할 때는 기록보다 온기가 먼저 필요하니까.”그녀의 말이 유난히 따뜻했다.제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대신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쓴맛이 입안에 천천히 번졌다.“너 말이야.”그녀가 불쑥 말을 꺼냈다.“응?”“요즘 너무 조용해.”“조용한 게 나쁜 거야?”“아니. 근데 네가 나한테 말을 아낄 때는 그게 오히려 더 크게 들려.”“그럼 지금부터는 말 좀 많아질 수도 있겠다.”“왜.”“같이 일하면, 서로의 숨소리까지 들어야 하니까.”그녀는 피식 웃었다.“넌 여전히 말이 잘하네.”“연습 많이 했거든.”“누구한테?”“너한테.”그녀는 대답 대신 미소만 지었다.그 미소가 커피 향보다 더 짙게 남았다.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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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화. 서로의 그림자를 마주할 때

햇살이 가게 유리창을 뚫고 들어왔다.바람 한 점 없이 고요한 오후였다.테이블 위의 노트북 화면엔 의뢰서 초안이 켜져 있었고,나리는 한 손으로 커피를 젓고 있었다.젓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그녀의 시선은 글자 위에 머물러 있었지만, 생각은 이미 멀리 가 있었다.사람이 사랑을 잃을 때, 가장 두려운 건 공허가 아니라, 다시 느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확신이다.그 문장을 적던 중이었다.“그 문장, 네 얘기지?”낯익은 목소리. 그녀는 고개를 들지 않고 대답했다.“들어왔네.”“문은 열려 있었잖아.”“그래도 두드리는 예의란 게 있지.”“그럼 두드릴 테니까, 나갔다 다시 들어올까?”제하의 농담에, 나리는 미소를 지었다.“됐어. 이미 들어왔잖아.”“글 쓰고 있었네.”“의뢰인 리포트.”“오늘은 뭐야?”“이혼 후 동거 중인 커플.”“이별 후에도 같이 사는 사람들?”“응. 같이 살아야만 하는 사정이 있대.근데 서로를 감정적으로는 이미 놓은 상태.”그녀는 커피를 내려놓으며 조용히 말했다.“그게 제일 어려운 상태야. 이별했는데 완전히 끝내지 못한 관계.”“그럼 우리도 그랬던 시절 있었을까?”“우리?”“응. 사람으로서.”“있었겠지.”“언제.”“아마 내가 널 다르게 보기 시작한 날부터.”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공기가 잠시 멎었다. 나리는 시선을 피했다.컵 안의 커피 표면에 작은 진동이 일었다.그 떨림이 마치 심장 박동처럼 느껴졌다.“그 말, 가끔 너무 자연스럽게 하니까 더 무서워.”“왜.”“그런 진심은 준비 없이 듣기엔 버겁거든.”“그럼 언제까지 기다려야 돼?”“내가 나를 덜 두려워질 때까지.”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지만, 그 안엔 분명한 선이 있었다.제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대신 카메라를 꺼내 들었다.“그거 또 찍을 거야?”“응. 이번 프로젝트용.”“나 찍지 마.”“그럼 누구 찍어.”“공기.”“그건 보이지도 않잖아.”“그게 좋아.”그녀는 말없이 창밖을 바라봤다.햇살이 머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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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화. 이별이 가르쳐준 만남

도쿄는 맑았다.바람이 도시의 골목을 따라 천천히 흘렀고, 공기는 생각보다 부드러웠다.나리는 호텔 창가에 서서 손으로 커튼을 조금 젖혔다.햇살이 손등 위에 닿았다.그 따뜻한 온도만으로도 마음이 미묘하게 흔들렸다.‘이제 곧 만나겠지.’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이번엔 도망치지 않겠다고 했잖아, 나리야.’탁자 위엔 오늘 강연용 메모가 놓여 있었다.“이별은 끝이 아니라, 다음 사랑으로 가는 준비다.”그녀가 수없이 반복했던 문장이지만, 오늘따라 이 말은 낯설었다.‘진짜로 그걸 믿고 있을까, 나는.’노크 소리가 들렸다.“나리야.”제하였다.“준비 다 됐어?”“응.”“떨려?”“조금. 이게 단순한 강연이 아니니까.”“수경 때문이지?”그녀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그 아이를 보게 될 생각을 하면, 기쁜데… 이상하게 마음 한쪽이 조용히 저려.”“그건 그리움이야.”“그리움?”“그리움이란 건, 누군가를 용서할 준비가 됐다는 신호야.”그 말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그녀는 그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제하야.”“응.”“혹시, 네가 나 대신 용서해준 적 있어?”“많았지.”“그럼 너는 널 용서한 적 있어?”그는 대답하지 못했다.대신, 짧게 숨을 내쉬었다.“오늘은… 그런 말 하기 좋은 날이네.”“그래. 오늘은 그런 날이야.”강연장은 유리로 된 대형 홀이었다.천장까지 닿는 커튼 사이로 부드러운 햇살이 흘러내렸다.수십 명의 참가자들이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다.나리는 무대 위에 섰다. 심장이 두근거렸다.앞자리에 앉은 사람들 사이로 익숙한 얼굴이 하나 보였다.수경.그녀는 여전히 단정했다.어깨까지 오는 머리, 담담한 눈빛. 하지만 그 눈빛엔 예전보다 훨씬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나리는 잠시 말을 잃었다.그녀의 시선이 미세하게 흔들렸다.그러다 마침내 입을 열었다.“안녕하세요. 신나리입니다.”목소리는 안정적이었지만, 그 안에는 오래 참은 떨림이 섞여 있었다. “오늘의 주제는 ‘이별 이후, 관계의 회복’입니다.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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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화. 마음이 머무는 곳

도쿄의 새벽은 한국보다 조금 더 늦게 밝았다.창문 밖으로 옅은 빛이 번지고, 건물 외벽 사이로 먼 바람이 스며들었다.나리는 커튼을 젖히며 창밖을 바라봤다.하늘은 구름이 얇게 깔려 있었고, 도시의 불빛이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오늘은 바람이 세네.”혼잣말하듯 내뱉은 목소리가 방 안에 흩어졌다.그녀는 손으로 팔을 감싸며 작은 숨을 내쉬었다.‘이런 아침 공기 속에서 일을 시작한다는 게 참 이상하지.’탁자 위에는 어제 밤새 검토한 기획안이 펼쳐져 있었다.그 제목 아래엔 그녀와 제하의 이름이 나란히 적혀 있었다.“이젠, 진짜 같이 일하는 사이가 됐네.”그녀는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나리야.”제하였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다.“일찍 일어났네.”“네가 깨울 줄 알았는데 먼저 깼어.”“잠 못 잤지.”“조금.”“예상했어. 너는 일 걱정이 있으면 그걸 꿈으로 옮겨서 꾸잖아.”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언제부터 내 잠버릇까지 기억해?”“그때부터.”“그때가 언제인데.”“네가 처음 내 앞에서 울던 날.”그 말에 공기가 잠시 멈췄다.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그 얘기… 갑자기 왜 꺼내.”“오늘 너 표정이 그날 같아서.”그녀는 말없이 창밖을 다시 봤다.“이젠 그때랑 달라. 지금은… 울고 싶어도 울 수 없을 만큼 단단해졌어.”“단단해진 게 꼭 좋은 건 아니야.”“그럼?”“사람은 부서져야 다시 살아.”그 말이 가슴 어딘가에 깊이 닿았다.그녀는 고개를 숙였다.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제하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책상 위의 서류를 집어 들었다.“이제 출발하자. 우리 발표 시간까지 한 시간 남았어.”“그래.”그녀는 서류를 정리하며 속으로 되뇌었다.‘사람은 부서져야 다시 산다.’그게 오늘 하루의 주제 같았다.세미나장 안은 고요했다.수십 명의 사람들 앞에서 나리와 제하가 나란히 섰다.그녀는 마이크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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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화. 너를 담는 눈빛

도쿄의 마지막 밤이었다.창밖의 불빛이 유리창에 반사되어 마치 도시가 거꾸로 흘러내리는 듯 보였다.나리는 침대 끝에 앉아, 여행 가방 위에 차곡차곡 서류를 정리했다.손끝의 움직임은 익숙했지만 마음은 여전히 어수선했다.“이 도시에도 익숙해지려면 한참 걸릴 줄 알았는데.”그녀는 작게 중얼거렸다.“이젠 떠나려니 또 아쉽네.”문이 살짝 열렸다. 제하였다.“짐 다 쌌어?”“응.”“내일 몇 시 비행기야?”“아침 여덟 시 반.”“그럼 네 시간 남았네.”“왜 이렇게 정확히 기억해.”“나도 같이 가니까.”“같이?”“그래야지. 같이 왔으면 같이 돌아가야지.”그의 말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엔 놓치고 싶지 않은 무언가가 숨어 있었다.나리는 그를 잠시 바라보다가“제하야.”“응.”“너 요즘, 말이 줄었어.”“그래?”“예전엔 뭐든 다 말로 풀었잖아. 요즘은 그냥… 눈으로 말하는 것 같아.”“그게 편해서 그래.”“편한 게 꼭 좋은 건 아닐지도 몰라.”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펜을 내려놓았다.공기 속에 정적이 스며들었다.“요즘 나, 우리 사이가 조금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어.”“왜?”“가까워졌다고 생각했는데, 어쩐지 마음이 자꾸 어긋나는 느낌이 들어.”“그건 우리가 같은 방향을 보면서도, 다른 마음으로 서 있어서 그럴 거야.”“다른 마음?”“넌 누군가의 상처를 치유하는 사람이잖아. 나는 그걸 지켜보는 사람이고.”“그게 그렇게 다르다고 생각해?”“그래. 나는 늘 다큐를 찍었지, 현실을 산 적은 없거든.”그의 말이 낮게 가라앉았다.나리는 그제야 그의 눈빛 속 피로를 보았다.그동안 그는 카메라 뒤에서 모든 사람의 슬픔을 찍고 있었다.그 슬픔의 잔향이, 결국 자신에게도 스며들었음을 그녀는 이제야 느꼈다.“그럼 이번엔 카메라 두고 가.”“뭐?”“돌아갈 때. 그거 두고 가.”“왜.”“너, 그거 없으면 뭐 찍을지 모르겠다고 했잖아. 근데 이제 그냥 사람 봐. 렌즈 말고.”그녀의 말이 길게 이어졌다.그건 단순한 제안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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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화. 다시, 뿌리를 내리는 사람들

봄비가 내렸다. 차창에 빗방울이 흘러내렸다가, 금세 또 다른 빗물이 그 자리를 덮었다.그 반복이 마치, 사람의 감정 같았다.나리는 차 안에서 손가락으로 유리창을 문질렀다.투명한 선이 생겼다가 다시 금세 흐릿해졌다.“비, 그치면 좋겠다.”그녀의 낮은 목소리에 옆자리에 앉은 제하가 고개를 돌렸다.“왜.”“개업식인데 비 오면 좀 그렇잖아.”“비 오는 날 시작하는 건 나쁘지 않아.”“왜.”“비가 그친 자리에 새 공기가 들어오니까.”그녀는 작게 웃었다.“그런 말은 누가 그렇게 쉽게 해.”“카메라 없이 살다 보니까.”“진짜 안 들고 다니네.”“약속했잖아.”“이제 습관처럼 목에 걸고 다니던 게 없으니까 허전하지 않아?”“조금은.”“근데 나 좋아.”“왜.”“이젠 너랑 나, 같은 세상에 있는 기분이니까.”그 말에 제하는 미소를 지었다.그의 손이 창문 옆 팔걸이에 닿았다.조용한 빗소리가 두 사람 사이를 부드럽게 잇고 있었다.센터는 도심에서 조금 떨어진 작은 거리 한켠에 있었다.옛날에는 책방이었다는 그 공간을 나리와 제하는 몇 주 동안 손수 고쳤다.벽지는 새로 발랐고, 낡은 나무 선반은 그대로 두었다.그 선반 위에는 이름 없는 책들이 꽂혀 있었다.그리고 그 책들 사이사이에, 그들이 모은 사진과 편지들이 놓여 있었다.현관 위의 간판엔“RE: 관계의 온도.”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이름 괜찮지?”제하가 물었다.“응. 짧은데 오래 남을 것 같아.”“뜻은?”“RE:는 다시라는 뜻이잖아. 다시 관계를 회복하고, 다시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곳.”“이건 완전히 너의 말투네.”“그럼.”“그래서 좋아.”그녀는 천천히 공간을 둘러봤다.햇살이 커튼 사이로 흘러들며 바닥을 덮었다.새 페인트 냄새, 나무의 냄새, 커피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이 냄새가 우리 시작의 냄새겠지.’그녀는 조용히 속으로 생각했다.오후가 되자, 손님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지인들, 인터뷰어, 그리고 상담을 예약한 몇몇 의뢰인들.그 중엔 낯익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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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화. 울음을 참는 침묵의 온도

새벽 공기는 차가웠다.도시는 막 잠에서 깨어나고 있었고, 하늘은 아직 반쯤 어둠 속에 머물러 있었다.나리는 가게 셔터를 올리며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손끝이 차가웠지만, 그 감촉이 오히려 안정감을 줬다.“오늘은 진짜 시작이네.”혼잣말처럼 내뱉은 말이 공간에 번졌다.그녀는 커피 머신을 켜고, 작은 노트를 펼쳤다.첫 페이지엔 적혀 있었다.‘관계의 온도는 사람의 마음을 닮는다.’그녀가 그 문장을 쓰던 날이 떠올랐다.모든 게 낯설고 두려웠던 시절, 그녀는 매일 이 문장으로 자신을 다독였다.문이 열렸다.“선배.”낮지만 분명한 목소리. 고개를 들자 수경이 서 있었다.“왔구나.”“네. 생각보다 일찍이네요.”“오늘부터 같이 하기로 했잖아.”“네.”잠시, 두 사람 사이에 짧은 침묵이 흘렀다.그건 어색함이라기보단, 서로의 숨결을 다시 익히는 시간 같았다.“이 공간, 참 따뜻하네요.”수경이 둘러보며 말했다.“고쳤어. 벽도 다시 칠했고, 조명도 바꿨어.”“선배 손길이 느껴져요.”“그럼 됐네.”그녀는 커피를 내리며 말했다.“이건 첫 날이니까 내가 대접할게.”“감사합니다.”“예전엔 네가 커피 마시면 늘 설탕 두 스푼 넣었잖아.”“이젠 한 스푼만 넣어요.”“입맛이 달라졌네.”“사람이 변하면, 맛도 변하죠.”그녀의 말에 나리는 잠시 멈췄다.‘그래, 변했지. 우리 모두.’그때 문이 다시 열렸다. 제하였다.“둘 다 벌써 왔네.”“네가 늦은 거지.”“늦은 게 아니라 여유롭게 온 거야.”“그게 늦은 거야.”둘의 짧은 대화에 수경이 웃음을 터뜨렸다.“아직도 그대로네요, 두 분은.”“뭐가.”“이런 티격태격한 느낌이요. 그게 이상하게… 좋네요.”“좋긴 뭐가 좋아.”나리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지만, 표정 끝엔 미세한 웃음이 섞여 있었다.제하가 커피 향을 맡으며 말했다.“여기 냄새가 달라.”“새로 산 원두야.”“아니, 그런 냄새 말고. 사람 냄새.”“그건 네가 센티해서 그래.”“그래도 좋은 냄새야.”그의 시선이 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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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화. 말하지 않아도 닿는 것들

봄은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왔다.센터 앞 골목길엔 작은 벚꽃잎이 바람에 흩날렸다.하늘빛은 옅은 분홍이 스며든 듯 부드럽고, 공기엔 커피와 비의 냄새가 섞여 있었다.나리는 아침 일찍 출근해 창문을 열었다.습기가 살짝 남은 공기가 방 안으로 스며들었다.그녀는 커튼을 묶고, 의자 하나를 창가로 끌었다.잠시 앉아서 숨을 고르며, 오늘 하루가 조금 더 단단하게 흘러가길 바랐다.문이 열렸다.“선배.”“왔네.”“네.”수경은 이전보다 훨씬 자연스러워진 얼굴로 서 있었다.검은 트렌치코트, 묶은 머리, 단정한 표정.“오늘 첫 공동 상담이잖아요.”“응.”“솔직히, 긴장돼요.”“나도.”그녀의 짧은 대답에 수경은 눈을 크게 떴다.“선배도요?”“당연하지. 누군가의 마음을 다루는 일은 매번 처음 같아.”“그 말, 왠지 안심돼요.”나리는 작게 웃었다.“괜찮을 거야. 너라면 잘할 수 있어.”“그 말, 듣고 싶었어요.”두 사람 사이엔 조용한 공기가 흘렀다.예전엔 서먹했던 침묵이 이젠 이상하게 편안하게 느껴졌다.“오늘 의뢰인, 부부였죠?”“응. 결혼 10년 차, 하지만 서로의 말을 듣지 않는다고 했어.”“이해돼요. 오래된 관계일수록, 상대의 말보다 표정을 더 먼저 읽게 되니까.”“그래서 더 위험하지.”“왜요?”“표정은 언제나 진심보다 앞서니까.”그녀의 말은 짧았지만 묵직했다.수경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선배는 항상 사람의 마음을 이렇게 단정하게 말하네. 그래서 사람들은 다들 선배에게 기대는 거야.’오전 10시, 상담실. 의뢰인 부부가 들어왔다.남자는 팔짱을 끼고 있었고, 여자는 눈을 피했다.두 사람 사이의 공기는 이미 단단히 굳어 있었다.“안녕하세요. 저는 신나리, 그리고 옆은 오수경 컨설턴트예요.”“반갑습니다.”처음 인사부터 어색했다.대화가 시작되자 남자는 단호했고, 여자는 조용했다.“아내는 맨날 ‘괜찮다’고 해요. 그 말이 제일 무서워요.”“괜찮다고 하니까, 난 더 말을 못 하겠어요.”그 짧은 문장 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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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화. 그녀를 원망하지 말아줘

봄이 깊어지고 있었다.거리의 나무들은 어느새 짙은 초록으로 물들었고,햇살은 조금 더 길게 머물렀다.센터의 유리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은 공간을 따뜻하게 감쌌다.나리는 상담실 안에서 기록 파일을 정리하고 있었다.손끝이 일정한 리듬으로 노트를 넘겼다.커피 향이 은은하게 퍼졌지만, 오늘은 유난히 진하게 느껴졌다.무언가 예고되지 않은 일이 다가오고 있다는 묘한 직감이 스쳤다.“선배.”문을 살짝 열고 수경이 들어왔다.“오전 상담 일정 다시 확인했어요. 새로운 예약이 하나 잡혔어요.”“누구?”“이름은… 이서현 님.”“서현?”“네. 메일에 신나리 컨설턴트에게 직접 상담을 받고 싶다고 써 있었어요.”나리는 순간 손끝이 멈췄다.펜 끝에서 잉크가 조금 번졌다.“언제?”“오늘 오후 두 시.”“배경은?”“간단한 프로필만 남겨져 있었어요. 동생의 죽음을 겪은 이후, 인간관계 회복이 어렵다.”그 한 줄에서, 공기가 미세하게 흔들렸다.나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 이름이 너무 익숙해서 머릿속에서 천천히 울렸다.이서현. 온유의 누나였다.“선배, 괜찮아요?”수경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응. 괜찮아.”“근데 얼굴이 조금…”“괜찮아.”그녀는 말을 끊고 조용히 창밖을 바라봤다.햇살이 눈부셨다.그 빛이 이상하게 아프게 느껴졌다.오후 두 시. 문이 열렸다.낯익은 실루엣이 천천히 들어왔다.단정한 재킷, 매끈한 단발,그리고 눈가에 오래된 슬픔이 남아 있는 얼굴.“안녕하세요.”“어서 오세요.”나리는 최대한 침착하게 인사했다.하지만 손끝은 미세하게 떨렸다.“앉으세요.”이서현은 자리에 앉으며 고개를 숙였다.“직접 만나 뵙고 싶었어요. 사실… 이 이름을 보는 게 이렇게 힘들 줄 몰랐네요.”나리는 그 말에 숨이 막혔다.“제 이름이요?”“네.”“왜요?”“제 동생이… 생전에 가장 많이 불렀던 이름이라.”순간, 공간의 온도가 떨어지는 듯했다.나리는 그 말을 들으며 손가락을 억지로 맞잡았다.그녀의 목소리가 작게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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