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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이별전문가! 신나리: Chapter 181 - Chapter 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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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화. 빈자리의 법칙

비는 멈췄지만, 공기는 여전히 젖어 있었다.나리는 이른 아침부터 센터 안의 창문을 열었다.차가운 바람이 들어와 커튼을 흔들었다.그 바람 속에 사람들의 말과 눈물이 스며 있는 듯했다.그녀는 잠시 눈을 감았다.‘오늘은 쉬어야겠다.’하지만 쉬는 법을 잊은 사람처럼,그녀의 손은 여전히 서류를 정리하고 있었다.책상 위엔 지난 며칠간의 기록이 쌓여 있었다.거기엔 수경의 글씨가 보였다.조심스러운 획, 망설임이 묻은 문장들.“사람을 돕는 일은 때로는 손을 뗄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그 문장을 읽는 순간, 나리의 심장이 천천히 가라앉았다.그녀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 밖을 내다봤다.햇빛이 흐릿하게 번지고 있었다.“수경이가 이제 나보다 더 단단해졌네.”그녀는 혼잣말하듯 말했다.잠시 후, 수경이 들어왔다.눈 밑에 피로가 내려앉아 있었지만,그 얼굴엔 이상한 안정감이 깃들어 있었다.“선배, 오늘은 좀 쉬어요.”“너도 피곤할 텐데.”“전 괜찮아요.”“괜찮다는 말, 이젠 잘 안 쓰기로 했던 거 아니야?”“맞아요. 그래서 그냥… 괜찮은 척할게요.”그 말에 나리가 웃었다.“이젠 네가 나보다 솔직하다.”“솔직하지 않으면 버틸 수가 없어요.”둘은 잠시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공간엔 커피 향만 은은하게 퍼졌다.나리가 천천히 컵을 내려놓았다.“오늘부터 일주일 동안, 센터는 네가 맡아.”“제가요?”“응. 난 잠깐 쉬어야 할 것 같아.”“왜요?”“요즘은 내가 말보다 침묵이 많아졌어.그건 아마, 내 마음이 소리를 닫고 있다는 뜻이겠지.”수경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제가 있을게요. 선배 자리는 제가 지킬게요.”“너라면 믿을 수 있어.”“근데… 선배 없으면 허전할 거예요.”“그 허전함이 필요할지도 몰라.”“빈자리요?”“그래. 빈자리는 늘 사람을 가르치거든.”그녀의 말은 담담했지만 묘하게 아팠다.수경은 고개를 숙였다.“그럼, 제가 잘 지켜볼게요.”제하는 그 시각, 창고에 앉아 있었다.조용한 방 안에 빛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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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화. 다시 걷는 사람들

서울로 돌아온 첫날, 나리는 센터의 문을 열었다.오랫동안 비워져 있던 공간 안에 햇빛이 깊숙이 스며들고 있었다.먼지 냄새와 커피 향이 섞인 공기가 익숙했다.그녀는 천천히 손끝으로 책상 위를 쓸었다.“돌아왔네.”그 말은 스스로에게 한 인사였다.잠시 후, 문이 열리고 수경이 들어왔다.머리를 질끈 묶고, 한 손엔 종이컵 커피를 들고 있었다.“선배, 오늘 일찍 왔네요.”“이제 다시 시작해야지.”“선배가 없던 사이, 이곳이 조금 달라졌어요.”“좋은 방향으로?”“네. 사람들이 예전보다 많이 찾아와요.”“그래?”“그만큼… 이제 우리가 필요하다는 뜻이겠죠.”그녀의 목소리엔 자부심과 책임이 섞여 있었다.나리는 미소 지었다.“그래, 이젠 진짜 우리가 ‘팀’이네.”“선배는 여전히 중심이에요.”“아니야. 이젠 각자 중심이 있어야 해.”“그게 무슨 뜻이에요?”“모두가 중심에 서야, 누구도 무너지지 않거든.”그녀의 말에 수경은 잠시 고개를 숙였다.그 말이 낯설지 않게 들렸다.‘이젠 나도 중심이 되어야 하는구나.’며칠 후, 센터 한켠에 새로운 문패가 걸렸다.RE: 관계의 온도 2호점 - 홍대 지점간판이 완성되는 순간,수경은 숨을 들이쉬었다.“진짜네요.”“응. 이젠 누군가의 이야기가 이 공간에서 또 시작되겠지.”나리가 문을 열었다.아직 비어 있는 공간이었지만, 그 공백이 주는 가능성이 느껴졌다.벽엔 하얀 페인트 냄새가 남아 있었고,바닥에는 아직 플라스틱 덮개가 깔려 있었다.“여기선 내가 상담하지 않을 거야.”“왜요?”“이건 너희 세대의 공간이니까.”“저희 세대요?”“응. 너랑 제하가 중심이 돼야지.난 그냥… 그림자처럼 옆에서 지켜볼게.”수경은 한참 동안 그 말을 곱씹었다.그녀는 문득, 예전의 자신이 떠올랐다.늘 나리의 뒤를 쫓던 시절.그때의 자신은 그림자였는데,이제는 빛을 받은 사람으로 서 있었다.“선배.”“응?”“그림자도 결국 빛이 있어야 존재하잖아요.그럼 선배는 사라지는 게 아니라, 늘 같이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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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화. 누군가의 기억이 도착했다

"그래. 사람.”그 말이 공기 속에 흩어졌다.세 사람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겹쳤다.말보다 확실한 믿음이 그 안에 있었다.오후. 상담실 문이 열렸다.하연은 수경 옆자리에 앉아첫 상담을 관찰하고 있었다.의뢰인은 중년의 남성이었다. 짧은 머리에, 표정은 공허했다.“결혼 20년 차예요. 이젠 아내랑 대화가 없어요.”“대화가 없다는 건, 말이 없다는 뜻인가요, 아니면 듣지 않는다는 뜻인가요?”“둘 다요.”그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엔 포기와 후회가 섞여 있었다.“제가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겠어요.그냥 어느 날부터 서로의 말이 공기처럼 흘러가더라고요.”수경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그럼 오늘은, 그 공기 속에 있는 말들을 꺼내볼까요.”“공기요?”“네. 사람은 말보다 ‘침묵’ 안에 진심이 숨어 있어요.”그 말에 남자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그 순간, 하연의 눈빛이 미묘하게 바뀌었다.그녀는 몰랐다.누군가의 마음이 이렇게 조용하게 풀리는 순간이 이토록 숨 막히게 아름답다는 걸.상담이 끝난 후, 하연은 조용히 물었다.“선배, 방금 그 말은 즉흥적으로 한 거예요?”“응.”“근데 진짜… 마음을 열게 만드는 말이었어요.”“그게 우리가 하는 일이야. 누군가의 마음을 ‘열게 만드는 순간’을 지켜보는 거.”하연은 고개를 숙였다.“저도 언젠간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요?”“그건 말이 아니라, 사람을 보고 배워야 할 거야.”그녀의 눈빛이 선배를 향했다.수경은 그 눈빛에서 예전의 자신을 보았다.저녁이 되자, 하연은 먼저 퇴근했다.센터 안엔 나리와 제하, 수경만 남았다.조명이 낮게 깔리고, 커피 향이 잔잔히 퍼졌다.제하가 조용히 말했다.“오늘, 새로 시작하는 기분 어땠어?”“묘했어요.” 수경이 대답했다.“처음엔 두려웠는데, 누군가를 가르치다 보니까… 내가 나 자신을 다시 배우는 기분이었어요.”“그게 교육의 본질이지.”“가르치는 게 아니라, 같이 배우는 거.”“그 말, 마음에 든다.”나리는 둘의 대화를 들으며 미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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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화. 경계의 온도

이른 오전, 센터의 문이 열렸다.봄이 깊어가는 공기 속에 먼지조차 느리게 움직였다.나리는 커피포트를 올려두고 메일함을 열었다.새로운 상담 문의 메일 몇 통이 쌓여 있었다.그중 한 통의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故 윤혜린 씨의 가족입니다.”그 이름을 보는 순간, 손끝이 미묘하게 떨렸다.‘혜린…’그녀는 낮게 이름을 되뇌었다.1년 전, 이별전문가로 일하던 시절 그녀가 맡았던 의뢰인이었다.남편의 폭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품위 있는 이별’을 연출해달라던 여인.그녀는 끝내 이별엔 성공했지만, 몇 달 뒤 세상을 떠났다.나리는 그 사실을 들었을 때, ‘직업적 거리’라는 말 뒤에 자신을 숨겼었다.하지만 그 이름을 다시 보는 순간, 그 모든 감정이 되살아났다.메일의 내용은 짧았다.“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다가선생님께 드리지 못한 편지를 발견했습니다. 전달드리고 싶습니다.”그녀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이제야… 돌아오는구나.”그 목소리는 작았지만, 확실히 떨리고 있었다.오전 11시, 수경은 하연과 함께 현장으로 향했다.이번 상담은 한 커플의 이별 조율이었다.남자는 이미 결정을 내렸지만, 여자는 받아들이지 못한 상태였다.“오늘은 상황이 조금 복잡해요.”“네.”“무조건 ‘결론’을 내려고 하지 말고, 상대의 반응을 읽는 데 집중해요.”“알겠어요.”하연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입술이 바짝 말라 있었다.카페 구석 테이블, 여자는 초조하게 손톱을 물어뜯고 있었다.“그 사람은 이미 다른 사람이 생겼어요.”그녀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단단했다.“근데… 이상하죠. 그 사람의 행복을 빌어주고 싶다가도,당장 무너뜨리고 싶은 마음이 같이 와요.”수경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그건 자연스러운 감정이에요.”“자연스럽다고요? 지금 이 기분이?”“사람의 사랑엔 항상 모순이 있어요.놓고 싶지만, 붙잡고 싶은 게 동시에 오는 게 사랑이에요.”그녀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그럼 전… 어떻게 해야 돼요?”“지금은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억지로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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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화. 공개된 진심, 흔들리는 온도

이른 새벽, 센터의 복도에 낯선 소음이 울렸다.휴대폰 진동이 동시에 세 개 울린다.나리, 수경, 제하. 각자의 자리에서 알림창을 올린 순간 모두 같은 문장을 보았다.“‘이별전문가 신나리’, 과거 의뢰 영상 논란.”잠시 정적. 공간이 멎은 듯했다.제하의 손끝이 천천히 굳어갔다.그가 클릭한 링크 안에는 그들이 찍었던 다큐 일부,그중에서도 ‘윤혜린 사건’이 있었다.영상은 짧았지만, 여인의 얼굴과 나리의 목소리가 분명히 담겨 있었다.“이별은 도망이 아니라, 자신으로 돌아가는 길이에요.”그 문장이 반복 재생되었다.나리의 손끝이 하얗게 질렸다.수경은 숨을 멈췄다.“이거… 누가 올린 거예요?”제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그의 목에 묵직한 돌덩이가 걸린 듯했다.오전, ‘RE: 관계의 온도’ 앞엔 이미 기자들이 서 있었다.카메라 플래시가 번쩍였다.“신나리 씨 맞습니까?”“이 영상 진짜입니까?”“사망한 의뢰인의 기록을 다큐로 쓴 이유가 뭐죠?”나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수경이 그녀 앞을 가로막았다.“지금은 답변드릴 수 없습니다.”“언론 공개를 동의한 적 있나요?”“그건 오해입니다.”수경의 목소리는 단단했지만, 손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제하는 멀리서 그 장면을 보고 있었다.그의 손엔 카메라가 들려 있었지만, 이번엔 아무것도 찍지 못했다.‘이건 내가 만든 결과잖아.’그 사실이 가슴을 쳤다.한참 뒤, 기자들이 물러나고, 센터 안은 적막에 잠겼다.나리는 의자에 앉아 있었다.그녀의 얼굴엔 피로가 깊게 내려앉아 있었다.“제하.”그녀가 낮게 불렀다.“영상 원본, 어디서 새 나갔는지 알아봤어?”“아직…”“시사회용 편집본 중 일부였지?”“응.”“그럼 우리 외엔 접근할 수 있는 사람 없잖아.”그 말에 제하의 눈이 흔들렸다.“나리, 나… 아니야.”“의심하는 게 아니야.”“근데 네 말, 그 ‘아니야’란 말이 너무 늦었어.”그녀의 목소리는 차가웠지만, 그 안에 담긴 건 분노가 아니라 절망이었다.“이건 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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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화. 진심의 무게

비가 그친 뒤의 서울은 이상하게 조용했다.회색 구름이 걷힌 하늘 아래,‘RE: 관계의 온도’ 간판 위로 아침빛이 희미하게 스며들었다.나리는 커피잔을 들고 창가에 서 있었다.잔 위로 김이 올라오고, 그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낯설게 느껴졌다.“이제 다 지나갔다고 생각했는데…”그녀의 속삭임은 바람처럼 흩어졌다.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수경이 들어왔다.손에는 신문이 들려 있었고, 얼굴은 긴장돼 있었다.“선배, 오늘 기사 봤어요?”“응.”“이젠 오히려 응원하는 글이 더 많아요. 진심이 느껴졌다는 댓글도 있고…”“그게 더 무서워.”“왜요?”“진심은, 한 번 소비되면 다시는 같은 얼굴로 돌아오지 못하거든.”그 말에 수경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그래도 선배가 쓴 사과문, 전 진짜 좋았어요.‘이별의 온도를 기록하되, 상처의 온도는 잊지 않겠다’ 그 말이요.”“그건 사과가 아니라 다짐이야. 그 문장으로 스스로를 붙잡고 있는 거지.”그녀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오늘 윤혜린 씨 가족이 온다.”“직접이요?”“응. 전화로 예고했어.‘딱 한 번만 이야기하고 싶다’고.”“혼자 만나지 말아요.”“나 혼자 만나야 돼. 그건… 내 일의 마지막 예의야.”수경은 더 말하지 않았다.그녀는 다만 조용히 자리 옆으로 물러섰다.그게 나리에 대한 믿음의 방식이었다.오후 두 시, 센터의 문이 열렸다.나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문 앞엔 중년의 여성이 서 있었다.머리엔 희끗한 잔머리가 비치고,그 옆에는 젊은 남자. 윤혜린의 동생이었다.“신나리 씨죠.”그녀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힘이 있었다.“네. 어서 오세요.”“이 자리가 맞을까요? 우린 사과를 받으러 온 게 아니라, 그냥… 확인하러 온 거예요.”“무엇을요?”“우리 가족의 마지막이 진짜 누군가에게 의미가 있었는지를요.”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공기가 뚝, 끊어졌다.나리는 자리에 앉았다.“그날 이후로, 전 수십 번을 생각했어요.내가 도왔던 일이 정말 도움이 되었나.근데 오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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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화. 마지막 인사가 없는 작별

강연장 무대 위. 조명이 하나둘 켜지며 공간이 서서히 밝아졌다.하얀 조명 아래, 나리는 천천히 마이크 앞에 섰다.손끝이 떨리지 않도록 일부러 두 손을 꽉 잡았다.청중은 대부분 상담사, 사회복지사, 그리고 대학생들이었다.그들의 눈빛 속엔 ‘이별전문가’라는 이름보다 ‘논란의 인물’에 대한 호기심이 더 짙게 섞여 있었다.“안녕하세요. RE: 관계의 온도에서 사람의 이별을 다뤄온 신나리입니다.”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단정했다.하지만 첫 문장을 내뱉는 순간, 심장이 순간적으로 뒤틀리는 느낌이 들었다.‘이제 내 말 한마디가 누군가의 판단이 된다.’그걸 아는 순간, 말보다 침묵이 더 무거워졌다.“오늘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건 ‘공감의 한계’입니다.”그녀는 잠시 청중을 바라봤다.“우린 흔히 ‘공감’이 좋은 거라고 말하죠.하지만 때때로 그건, 상대의 고통을 내 방식으로 재단하는 폭력이 될 수도 있어요.”청중 중 누군가 고개를 끄덕였다.“저는 오랫동안, 누군가의 상처를 대신 들여다보는 일을 해왔어요. 그게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어느 순간 그게 제 삶의 일부가 되어버렸죠.그때부터였어요. 남의 고통이 내 감정의 무게가 되어버린 순간.”그녀는 말끝을 멈췄다.청중은 숨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그날 이후로, 전 누군가를 위로하는 대신, 그저 옆에 서 있으려고 해요. 그게 제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공감이니까요.”말을 마치자, 박수가 조용히 퍼졌다.큰 소리의 박수가 아니었다.마치 누군가의 마음속 깊은 곳을 건드렸을 때 나오는 조심스러운 공감의 박수였다.강연이 끝난 뒤, 나리는 무대 뒤편 대기실로 들어왔다.빛이 사라진 공간은 한결 차분했다.거울 앞에 앉은 그녀의 얼굴엔 땀과 눈물이 섞여 있었다.“공감의 한계라…”그녀는 자신이 한 말을 되뇌며마치 타인의 강연을 들은 사람처럼 멍하니 앉아 있었다.그때, 문이 두드려졌다.“선배.”수경이었다.“끝났어요?”“응.”“사람들 반응, 좋았어요. 다들 눈빛이 진지했어요.”“근데 난 이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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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화. 진심의 균열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점점이 떨어지는 빗방울이 유리창을 두드리며 불규칙한 리듬을 만들었다.센터 안엔 아무도 없었고, 나리는 홀로 사무실 불빛 아래 서 있었다.탁자 위엔 방송국 제안서가 펼쳐져 있었다.그 위로 커피 한 방울이 떨어졌다.“이걸 받아들여야 할까.”그녀는 스스로에게 물었다.제하가 남기고 간 서류, 그리고 거기에 적힌 문장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이 이야기를 세상에 나누는 게, 또 다른 치유가 될 수 있다.”그 문장을 읽는 순간, 마음 한구석이 미묘하게 흔들렸다.“치유라… 누굴 위한 거지?”그녀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그때, 문이 열렸다. 제하가 들어왔다.어깨에 묻은 빗물 자국이 아직 마르지 않았다.“아직도 안 갔네.”“오늘은 그냥… 조용히 있고 싶어서.”그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의자에 앉았다.탁자 사이로 제안서가 보였다.“그거 읽었어?”“응.”“어떻게 생각해?”“생각보다 조용하네.”“조용하다는 게?”“네가 이렇게 말린 적이 없어서.”“나는 말린 적 없어.”“그래도 늘 신중했잖아.”“지금도 그래. 신중하게 ‘하지 말자’고 생각 중이야.”그의 시선이 흔들렸다.“이건 단순히 영상이 아니야, 제하. 우리의 진심이 들어간 기록이잖아.근데 진심은 사람마다 다르게 읽혀. 누군가에겐 위로지만, 다른 누군가에겐 다시 상처가 될 수도 있어.”“그건 모든 기록이 가진 숙명이야.”“그래서 무섭다고.”“근데 무섭다고 멈추면 아무것도 못 해.”그의 말은 단단했지만, 그 안엔 간절함이 있었다.나리는 조용히 물었다.“넌 그 영상이 세상에 나가면 뭐가 달라질 거라고 생각해?”“적어도, 사람들이 ‘이별’이란 단어를 다르게 보게 되겠지.”“그럼 그걸로 충분해?”“너는?”“나는… 사람을 바꾸는 게 아니라 그 사람 곁에 남는 게 내 일이었어.”“그건 네 방식이지. 난 내 방식으로 남고 싶어.”순간, 공기가 식었다.둘 사이엔 오랜 시간 쌓인 믿음이 있었지만,지금은 그 믿음 위로 미세한 균열이 생겼다.나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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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화. 불완전함이 우리를 사람답게

서울의 밤은 유난히 밝았다.불빛이 번지고, 자동차 경적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유리 건물 외벽에 새로 걸린 문구가 눈에 띄었다.KBC 스페셜 다큐: [사람의 거리]-관계의 온도를 기록하다나리는 그 간판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거리 한복판, 수많은 네온사인 사이에서도 그 문장이 이상하게 크게 보였다.“이제… 진짜 세상에 나가는구나.”그녀는 작게 중얼거렸다.바람이 불었다. 머리카락이 흩날렸지만 그녀는 손으로 정리하지 않았다.그저 그대로 두었다.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것들이 세상에는 너무 많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다음 날 오전, 센터 안은 평소보다 조용했다.제하는 모니터 앞에서 편집본을 검토하고 있었다.“오늘 밤 9시 정규 편성.”수경이 종이 한 장을 들고 들어왔다.“축하해야 하는 거죠?”“아니.”“왜요?”“아직 안 끝났어.”“뭐가요?”“이게 사람들의 눈에 어떻게 보일지는 방송이 끝나고 나서야 알 수 있잖아.”그의 말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엔 무거운 피로가 깔려 있었다.그는 밤새 한 프레임, 한 자막까지 다시 손봤다.그 안에서 단 하나의 거짓도 없게 만들기 위해.“제하 씨.”“응.”“이건 그냥 방송 아니에요.”“알아.”“이건 우리예요.”그 말에 그는 잠시 모니터를 멈췄다.그리고 수경을 바라봤다. 그녀의 눈빛은 단단했다.“그래서 더 조심해야 돼.”그가 조용히 웃었다.“넌 이제 나리 닮아가네.”“그건 칭찬인가요, 경고인가요?”“둘 다.”“그럼 감사하게 받아들일게요.”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나갔다.문이 닫히는 소리가 작게 울렸다.제하는 혼자 남은 공간에서다시 모니터를 바라봤다.화면 속, 나리의 목소리가 흘렀다.“우린 사람의 끝을 본다.하지만 그 끝은 언제나 새로운 시작의 모양을 하고 있다.”그는 잠시 눈을 감았다.그 문장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게 이상하게 위로가 됐다.그날 오후, 나리는 인터뷰 자리로 향했다.한 언론사에서 요청한 공식 인터뷰였다.‘이별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에게 묻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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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화. 조용한 폭주

방송이 나간 지 일주일째 되는 날이었다.센터 전화는 끊이지 않았다.메일함은 ‘상담 요청’ 제목으로 가득 찼고,SNS에는 ‘이별을 도와주는 사람들’이라는 해시태그가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다.“선배, 오늘만 스무 통이에요.”수경이 노트북을 열어보이며 말했다.“다 신규 문의예요. 근데 진짜로 다 받아도 될까요?”나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녀의 시선은 멍하니 창가 쪽에 머물러 있었다.“선배?”“응.”“괜찮아요?”“괜찮다는 말, 요즘은 쉽게 못 하겠네.”그녀는 커피잔을 들었지만,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다.잔 위로 미세한 김이 맴돌았다.그 김조차 무겁게 느껴졌다.“이건…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숫자가 아니야.”“그럼 어떻게 해요?”“줄여야지. 선택을 해야 해.”“누굴요?”“우릴 믿고 연락한 사람들 중, 지금 당장 가장 절실한 사람만.”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그 대신, 나머지 사람들에겐 답장을 꼭 보내줘. 당신의 마음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문장으로.”그 말이 끝나자 수경은 화면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답장 하나에도 온도를 담을 줄 아는 사람, 그게 나리다.’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점심 무렵, 제하가 센터에 들어왔다.카메라 가방을 내려놓고, 손에 들린 서류를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방송사 쪽에서 후속편 제안이 왔어.”나리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거절해.”“이유는?”“지금은, 보여줄 게 아니라 버텨야 할 때야.”“그래도 이 반응이면”“제하.”그녀는 그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만으로 대화를 끊었다.그건 말보다 더 명확한 거절이었다.그는 더 말하지 않았다.그 대신 카메라를 꺼내 창가 쪽으로 렌즈를 돌렸다.나리의 옆모습이 프레임 안에 들어왔다.조용한 피로, 그리고 그 속에 묘하게 살아 있는 단단함. 그는 셔터를 누르려다가, 결국 멈췄다.“오늘은 찍지 않을래.”“왜?”“지금의 넌, 기록이 아니라… 사람이야.”“그게 무슨 뜻이야.”“렌즈가 닿으면 깨질 것 같아서.”그 말에 그녀는 짧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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