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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화. 문틈 사이로 스며드는 그림자

밤이 오기 전부터 가슴이 답답했다. 해가 질 무렵부터 집안 공기가 서서히 달라졌다. 환하게 켠 불빛조차 어둠을 몰아내지 못하고, 오히려 어둠이 더 또렷하게 형체를 드러내는 듯했다. 나는 창문을 닫고 커튼을 드리운 뒤에도 계속 뒤를 돌아보았다. 등 뒤에 시선이 따라붙는 듯한 감각이 사라지지 않았다.제하는 현관 앞에 의자를 놓고 앉았다. 손에는 작은 칼이 쥐어져 있었고, 눈은 날카롭게 빛났다. 그는 단 한순간도 긴장을 풀지 않았다. 수경은 내 옆에 앉아 있었다. 무릎 위에 녹음기를 올려놓고, 작은 불빛이 깜빡거릴 때마다 손가락을 꼭 움켜쥐었다. 세 사람 모두 말없이 기다렸다.밤이 깊어가자, 다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어제보다 더 가까웠다. 규칙적으로 다가오는 소리와 함께, 문틈 사이로 바람이 스며들 듯 서늘한 기척이 흘러들었다. 나는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발소리가 멈추자, 문고리가 아주 살짝 움직였다.“……나리.”문틈 사이로 목소리가 스며들었다. 낮고, 간절한 듯 떨리는 울림. 그 순간 온몸이 굳어버렸다. 그건 분명 온유의 목소리였다. 병실에서 마지막으로 내 이름을 불렀던 그 음색과 똑같았다.눈물이 불시에 차올라 시야가 흐려졌다.“그만해!” 제하가 소리쳤다. 칼을 움켜쥔 그의 손이 문손잡이를 막아섰다.수경은 녹음기를 꼭 눌렀다. 작은 기계에서 ‘삑’ 하는 소리가 났다.그러나 목소리는 멈추지 않았다.“열어줘… 나리. 내가 여기 있어.”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손이 저절로 문쪽으로 향했다. 제하가 내 손목을 붙잡으며 단호하게 말했다.“안 돼. 절대 열면 안 돼.”하지만 그 순간, 손목을 잡은 그의 힘이 너무 무겁게 느껴졌다. 마치 내 자유를 빼앗는 것 같아 가슴이 더 아려왔다.나는 속으로 울부짖었다. 정말 그가 맞는다면 어떡하지?내가 문을 열지 않아서, 진짜로 그를 영영 잃어버린다면? 머릿속이 혼란으로 가득 찼다. 이성은 “아니야, 속지 마”라고 외쳤지만, 심장은 “그를 만나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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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화. 오직 나에게만 들리는 진심

아침 햇살이 커튼 사이로 비집고 들어왔지만, 그 빛조차 차갑게만 느껴졌다. 눈을 뜨자마자 밤새 귓가를 맴돌던 속삭임이 되살아났다. “아직도 날 기다리고 있잖아.” 그 말은 단순한 목소리가 아니라, 내 마음 깊숙한 곳에서 오래 묻어 있던 감정을 꺼내는 열쇠 같았다.나는 이불을 걷어내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머리는 무겁고, 다리는 허공을 걷는 듯 흔들렸다.거실에는 제하와 수경이 여전히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잠을 이루지 못한 얼굴이었다. 제하는 창가에 기대 앉아 있었고, 수경은 소파에 웅크린 채 눈을 비비며 날 바라봤다.“언니, 얼굴이 너무 하얘요. 괜찮아요?” 그녀의 목소리는 걱정으로 떨려 있었다.나는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목소리는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괜찮아… 아직은.”세 사람은 카페로 향했다. 평범한 하루처럼 손님들이 드나들었지만, 우리 셋의 세계는 그들과 달리 어둠에 잠겨 있었다. 나는 테이블에 앉아 따뜻한 커피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잔열이 손끝을 데웠지만, 가슴속 차가움은 사라지지 않았다.제하는 신문을 펼쳐놓고는 아무 말 없이 글자를 훑었다. 그러다 조용히 입을 열었다.“또다시 비슷한 사건이 났어. 이번엔 한 남자가 밤마다 자기 이름을 듣는다고 신고했대. 주변에선 아무도 듣지 못했는데, 본인만 분명히 들었다고.”나는 신문을 바라보며 속이 서늘해졌다. 이제 이건 우리 셋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가장 노골적으로 이름을 불리고, 가장 깊게 흔들리는 건 언제나 나였다.“왜 하필 나일까.” 내가 무심히 흘리듯 말했다.수경이 내 손등을 덮으며 속삭였다.“언니, 어쩌면… 그게 운명일지도 몰라요. 언니가 끝내지 못한 이별이 이런 방식으로 돌아온 거 아닐까요.”그녀의 말은 내 안의 불안을 정곡으로 찔렀다. 나는 손을 빼내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맞아. 끝내지 못한 건 나였지. 그래서 지금도 붙잡혀 있는 건지도 몰라.밤이 찾아왔다. 우리는 다시 거실에 모였다. 불빛은 환했지만, 그 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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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화. 열쇠를 찾는 밤

아침이 오자 창밖은 분명히 환했지만, 내 눈에는 세상이 여전히 흐릿하고 무거워 보였다. 멀리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리고, 출근길의 발걸음이 분주히 이어졌지만, 그 모든 것이 유리 너머 다른 세계처럼 느껴졌다. 나는 주방 의자에 앉아 멍하니 커피를 마셨다. 잔을 손에 쥐고 있어도 따뜻함이 손끝까지 전해지지 않았다. 머릿속에서는 새벽에 들었던 그 꿈의 한마디가 자꾸만 반복되었다. “곧, 문을 열어야 해. 그때 알게 될 거야.”그 말은 단순한 환상이 아니었다. 너무도 구체적이었고, 내 마음 깊은 곳을 겨냥하고 있었다. 나는 뜨거운 커피를 삼키면서도 온몸이 얼음장처럼 식어감을 느꼈다.점심 무렵, 우리는 카페에 모였다. 제하는 전날보다 더 날 선 눈빛으로 창밖을 주시했고, 수경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내 옆에 앉았다. 그녀는 손가락을 꼬옥 모아 쥐고,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언니, 오늘도 들렸어요?”나는 고개를 끄덕였다.“이번에는… 귓속에만 들렸어. 다른 사람은 듣지 못했어. 너무 가까이, 숨결처럼.”내가 말을 이어가자, 수경의 눈이 흔들렸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그럼 언니만 선택받은 거예요. 언니만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거잖아요.”그녀의 말은 칼끝처럼 날카롭게 내 가슴을 찔렀다. 선택받았다. 그 표현은 위협이자 동시에 유혹처럼 들렸다. 아직도 그를 기다리고 있다는 내 진심을, 그 목소리가 꿰뚫고 있었으니까.제하는 신문을 테이블 위에 던지듯 올려놓았다.“또야. 이번엔 다른 지역에서 똑같은 신고가 접수됐대. 이름을 불렀다는 건데, 다들 귀신이나 환청쯤으로 치부하고 있지. 하지만 우린 알아. 이건 단순한 환청이 아니야.”그의 목소리는 단단했지만, 안쪽에서 두려움이 스며 나왔다. 나는 그의 눈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물었다.“제하야… 만약 그게 정말 온유라면, 넌 어떻게 할 거야?”그는 잠시 말이 없었다. 눈빛이 흐려지며, 손가락이 신문 모서리를 구기고 있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낮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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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화. 그리움이라는 함정

밤새도록 눈을 감아도 잠이 오지 않았다. 몸은 분명히 지쳤는데, 정신은 더 각성된 듯 예민해졌다. 방 안은 고요했지만, 귓가에는 여전히 낮은 울림이 맴돌고 있었다. “곧, 네가 문을 열게 될 거야.” 그 한마디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나는 천장을 올려다보다가 이불을 밀쳐내고 거실로 나왔다. 제하는 소파에 앉아 있었다. 두 눈은 감고 있었지만, 손은 여전히 칼을 쥔 채였다. 마치 잠든 것 같으면서도 언제든 일어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처럼.수경은 테이블에 엎드려 있었다. 숨소리가 얕고 불규칙했다. 그녀도 결국 새벽까지 버티다 지쳐 잠든 듯했다.나는 두 사람을 잠시 바라보다가, 녹음기를 켜놓은 채 그대로 굳어 있는 불빛을 바라봤다. 작은 붉은 점 하나가 어둠 속에서 깜빡이고 있었다. 그것이 나를 지켜주는 수호등처럼 보이기도 했고, 반대로 감시하는 눈처럼 느껴지기도 했다.아침이 되자, 우리는 무거운 얼굴로 카페에 모였다. 사람들은 평범하게 커피를 마시고 대화를 나누었지만, 우리 셋의 자리는 또 다른 시간에 머무는 듯 고립되어 있었다.제하는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낮게 말했다.“이제는 확실히 해야 할 때가 온 것 같아. 계속 끌려다닐 수는 없어.”그의 눈빛은 단단했지만, 안쪽 깊은 곳에 피로와 두려움이 엉켜 있었다.나는 조용히 물었다.“그럼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찾아야지. 목소리의 주인을. 그 문 너머에 뭐가 있는지.”수경은 눈을 크게 뜨며 고개를 저었다.“안 돼요. 그건 언니를 끌어내리려는 함정이에요. 열면 끝이에요. 우리가 봤잖아요. 언니를 무너뜨리려는 거라고.”그녀의 말은 옳았다. 그런데도 나는 마음속에서 갈라진 균열이 점점 벌어지는 걸 느꼈다. 만약 정말 온유라면? 마지막으로 그를 만날 기회라면?그날 밤, 다시 집은 긴장 속에 잠겼다. 모든 불을 켜두었지만 그림자는 더 짙게 번졌다. 우리는 거실에 앉아 서로를 바라봤다. 제하는 창문을 등지고 섰고, 수경은 녹음기를 손에 쥔 채 입술을 깨물었다.한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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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화. 35화. 부서지는 경계 

밤새도록 몸은 누워 있었지만, 머릿속은 한순간도 고요하지 않았다. 눈을 감으면 꿈속 복도가 다시 나타났고, 그 낡은 문 앞에 서 있는 내 모습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손잡이 위에 놓인 열쇠, 그리고 귓속을 파고들던 속삭임. 눈을 뜨면 현실이어야 하는데, 여전히 귓가에 목소리가 맴돌았다. 마치 꿈과 현실의 경계가 무너져 서로를 침범하는 것 같았다.아침 햇살은 분명히 창문을 가득 채우고 있었지만, 내게는 그 빛마저도 불길하게 보였다. 눈부신 대신 따갑고, 따뜻한 대신 차갑게 다가왔다. 나는 억지로 몸을 일으켜 커피포트를 켰다. 손끝은 계속 떨렸고, 컵에 담긴 물은 자꾸만 흘러넘쳤다. 나는 점점 무너지고 있구나. 그 자각이 목구멍까지 차올라 숨조차 가빠졌다.점심 무렵, 제하와 수경이 다시 집으로 찾아왔다. 제하는 묵묵히 방안을 점검하며 창문을 확인했고, 수경은 한 손에 잡동사니처럼 종이를 들고 있었다. 그녀는 내 앞에 앉자마자 종이를 펼쳤다. 빼곡한 글씨가 적혀 있었는데, 지난밤 내가 무의식중에 써 내려간 흔적이었다. 나는 분명 기억이 없는데, 잉크가 번진 글자마다 내 손길이 남아 있었다.수경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언니, 이거… 새벽에 쓴 거 맞죠? 내용이 너무 구체적이에요. 꿈속에 있던 복도, 문, 열쇠… 이건 언니 마음속에만 있는 게 아니라, 뭔가가 실제로 언니 손을 빌려 적은 것 같아요.”나는 머리가 어지러워 고개를 감쌌다. 정말 그럴까. 내가 아니라 다른 무엇인가 내 손을 움직였을까.그 상상만으로도 등골이 서늘하게 식었다.제하는 내 옆으로 다가와 단호하게 말했다.“확실해졌다. 그건 네 안에서 네 마음을 파고들어, 결국 널 이용하려는 거야. 네가 문을 열면, 단순히 네 문제로 끝나지 않아. 우리 모두 끌려가게 될 거야.”그의 말은 경고였지만, 동시에 애절했다. 내가 얼마나 흔들리고 있는지 그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눈물이 떨어져 종이 위에 번져갔다. 글자와 눈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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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화. 붉게 타오르는 선택

아침 공기는 맑고 차가웠다. 유리창 너머로 햇살이 부서지며 방안을 환하게 밝혔지만, 내 마음은 오히려 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창가에 앉아 손에 쥔 머그컵을 바라보다가, 문득 어젯밤의 소리를 떠올렸다. 벽을 긁던 그 마찰음, 그리고 내 심장을 파고들던 속삭임. 아무리 고개를 흔들어도 사라지지 않았다. 마치 피부 속에 새겨진 문신처럼, 지워낼 수 없는 흔적으로 남아 있었다.부엌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하가 커피를 내리고 있었고, 수경은 졸린 눈을 비비며 나와 마주쳤다. 그녀는 내 표정을 보자마자 망설임 없이 내 손을 잡았다.“언니, 오늘은 집에 있지 말아요. 밖에 나가요. 햇볕 아래 있으면… 조금은 괜찮아질 거예요.”그 말에 나는 잠시 주저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집이라는 공간은 더 이상 안전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존재가 가장 쉽게 스며드는 통로가 되어버린 듯했으니까.우리는 세 사람이 함께 동네를 걸었다. 아이들이 뛰노는 소리가 귓가에 맴돌고, 노인들의 담소가 흘러나왔다. 평범한 일상은 여전히 굴러가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속에서 이방인처럼 느껴졌다. 나의 하루는 그 평범한 빛 속에 들어가지 못하고, 늘 그림자에 가로막혀 있었다.카페에 앉아 우리는 조용히 대화를 이어갔다. 제하는 커피잔을 굳게 쥔 채 낮게 말했다.“분명히 뭔가 패턴이 있어. 네가 흔들릴 때마다, 네 마음이 약해질 때마다 그 소리가 더 선명해져. 결국 네 선택을 끌어내려는 거야.”나는 한참 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내 흔들림이 그 존재를 키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 흔들림의 뿌리는 분명했다. 아직도 놓지 못한 기다림, 아직도 끝내지 못한 사랑.수경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뜨며 속삭였다.“언니, 그건 사랑이 아니에요. 언니를 무너뜨리려는 집착이에요. 진짜 온유 씨였다면, 언니를 이렇게 고통스럽게 만들진 않았을 거예요.”그녀의 말이 가슴에 박혔지만, 동시에 고개가 떨어지지 않았다. 정말일까.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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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화. 끝없이 이어진 복도

밤새도록 눈꺼풀을 억지로 눌러보았지만, 잠은 단 한순간도 찾아오지 않았다. 고개를 떨구면 복도가 보였고, 고개를 들면 여전히 그 문이 떠올랐다. 낡고 무겁게 닫혀 있는 문, 그리고 내 손에 쥐어져 있던 열쇠의 차가운 감각. 마치 현실보다도 더 선명하게, 꿈속 풍경이 내 곁에 붙어 있었다.아침 햇살이 커튼 사이로 스며들었지만, 그 빛은 따뜻하지 않았다. 피부 위로 내려앉는 순간, 얼음처럼 차갑게 느껴졌다. 나는 불안에 떨며 거실로 나왔다. 제하는 소파 끝에 앉아 눈을 감은 채 깊게 호흡을 가다듬고 있었고, 수경은 아직 반쯤 잠에서 깨어난 듯 무릎을 껴안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지쳐 있었지만, 서로를 향한 믿음으로 버티고 있는 것 같았다.나는 그들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말했다.“이제 더는 미룰 수 없을 것 같아. 문은… 내가 열지 않아도, 결국 내 앞에 서게 될 거야.”수경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내 손을 붙잡았다.“언니, 그런 말 하지 마요. 문은 환상이에요. 언니 마음을 잡아먹으려는 덫일 뿐이에요. 진짜가 아니라는 거, 어젯밤에도 보셨잖아요. 열쇠가 없는데도 손바닥에 자국이 남았잖아요. 그건 증거예요. 누군가 언니를 조종하는 거라고요.”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나는 말없이 그녀의 손을 감싸쥐었지만, 속으로는 그녀의 말과 달리 또 다른 감정이 꿈틀거렸다. 정말 단순한 덫일까? 혹시 마지막 기회는 아닐까?우리는 점심 무렵 동네를 걸었다. 사람들이 분주히 오가고, 가게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웃음소리, 대화 소리, 아이들의 울음까지 모든 게 평범하고 생생했지만, 내게는 어쩐지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처럼 낯설었다. 제하가 내 옆에서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너, 어젯밤 꿈 얘기… 좀 더 해줄 수 있어?”나는 잠시 주저하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복도가 끝없이 이어져 있었어. 걸어도 걸어도 끝이 없었는데, 결국엔 그 문 앞에 닿았어. 문 위에 새겨진 글자가 있었어. 진실.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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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화. 부풀어 오른 진실, 갈라진 벽면

창문 너머로 아침 햇살이 들어왔지만, 그 빛조차 내게는 위협처럼 느껴졌다. 몸을 일으키자마자 손바닥의 자국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희미해진 듯 보였지만, 눈길을 오래 두면 다시 선명하게 도드라졌다. 금속이 눌린 듯한 무늬. 그건 분명히 꿈속의 열쇠가 남긴 흔적이었다.나는 무심히 커피를 내렸지만, 향긋해야 할 그 냄새마저도 금속성처럼 씁쓸하게만 다가왔다. 컵을 쥔 손이 자꾸 떨려, 결국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부서질 듯 흔들리는 심장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거실로 나오자 제하가 벽에 등을 기댄 채 앉아 있었다. 눈은 충혈돼 있었고, 손에는 여전히 칼이 쥐어져 있었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괜찮아?”그 물음은 짧았지만, 그 안에 쌓인 밤새의 불안과 걱정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나는 애써 웃음을 지어 보였다.“괜찮은 척하는 거, 이제 그만해야 할지도 모르겠어.”그 순간, 부엌에서 수경이 나타났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했고, 눈가에는 밤새 흘린 눈물 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녀는 내게 다가와 내 손을 꼭 잡았다.“언니, 어젯밤… 또 갔죠? 그 복도로.”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수경은 숨을 삼키더니 더 이상 말하지 못했다. 그녀의 떨리는 손끝이 내 손등을 쓸며 간절히 붙잡고 있었다.세 사람은 오후 내내 함께 있었지만, 대화는 거의 오가지 않았다. 말을 하지 않아도 우리는 모두 알고 있었다. 선택의 순간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나는 커튼 틈으로 스며드는 빛을 바라보다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정말 피할 수 없는 걸까. 이미 정해진 길 위에 서 있는 걸까.그날 저녁, 다시 집안에 긴장이 내려앉았다. 시계의 초침이 일정하게 움직이는 소리가 귀에 자꾸만 박혔다. 숨결조차 크게 내쉬면, 무언가가 금방이라도 반응할 것 같아 조심스러웠다.그러다, 낮게 울리는 목소리가 또다시 시작됐다. 현관문도, 창문도 아니었다. 내 귀 바로 옆에서, 누군가 귓속에 속삭이듯.“나리, 이제 준비됐잖아. 더는 외면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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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화. 벽 너머의 그림자

아침은 왔지만, 집안 공기는 여전히 어두웠다. 커튼을 젖히자 햇살이 들어왔는데도, 어쩐지 빛이 아니라 그림자가 더 두드러져 보였다. 나는 손바닥의 붉은 자국을 내려다보았다. 어제보다 옅어진 듯했지만, 시선을 오래 두자 다시 선명히 살아났다. 마치 내 안쪽 깊은 곳에서 계속 새겨지고 있는 듯했다.식탁 위에는 제하가 내린 커피가 식어 있었다. 나는 잔을 들어 올렸지만, 입에 대자 금속 맛이 섞인 듯 목구멍이 쓰라렸다. 평범한 하루의 감각조차 무너지고 있구나.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가슴이 먹먹하게 조여 왔다.“오늘은 밖에 나가자.”제하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는 내 표정을 읽은 듯 의심할 틈을 주지 않았다.“여기 있으면 더 끌려가. 집이 안전하지 않아. 바람이 부는 곳, 사람들이 많은 곳에 있어야 해.”수경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했지만, 눈빛만큼은 결연했다.“언니, 오늘만큼은 제가 꼭 붙어 있을게요. 절대 혼자 두지 않을 거예요.”나는 잠시 숨을 고르다가 두 사람을 따라 나섰다. 거리에는 평범한 일상이 흘러가고 있었다. 카페 앞에서 사람들이 웃으며 인사를 나누고, 아이들은 분식집 앞에서 떡볶이를 손에 쥔 채 까르르 웃었다. 그 모든 장면이 낯설었다. 우리는 다른 세계에 서 있는 것 같았다.카페 구석 자리에 앉자마자, 제하는 주위를 살폈다. 그의 시선은 예리했고, 온몸이 긴장으로 굳어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가슴이 저릿해졌다. 그도 나처럼 이 싸움에 점점 갇히고 있는 게 분명했다.수경이 내 손을 잡으며 속삭였다.언니, 혹시 오늘도… 들렸어요?”나는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어젯밤… 벽 너머에서. 귓속이 아니라, 온몸을 울리는 소리였어.누군가 안에서 벽을 두드리고 있었어. 나를 부르는 목소리와 함께.”수경은 숨을 삼키며 내 손을 꼭 잡았다. 그녀의 손끝은 차갑게 젖어 있었다.“언니, 그건 더 이상 환영이 아니에요. 뭔가가 실제로 움직이고 있는 거예요.”그녀의 말은 무섭도록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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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화. 틈새를 가르고 뻗어온 손

벽에 남아 있는 균열은 낮 동안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아침 햇살이 방 안을 가득 채워도, 그 틈은 고집스럽게 검게 남아 있었다. 흉터처럼 선명한 그 자국을 바라볼 때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마치 벽 너머에서 여전히 무언가가 나를 노리고 있다는 증거 같았다.나는 부엌에 앉아 한참 동안 멍하니 있었다. 손에 쥔 컵은 식어 있었고, 입술은 바싹 말라 있었다. 수경은 조심스레 다가와 내 손에서 잔을 빼앗아 갔다. 그녀는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 했지만, 결국 입술만 달싹일 뿐이었다.“언니.”그녀가 겨우 입을 열었다.“저 균열… 그냥 벽이 아니에요. 어젯밤, 분명히 안쪽에서 움직였어요. 저는 들었어요. 안에 무언가가 있어요.”그 말은 이미 알고 있던 진실을 확인시켜주는 것 같아 더 아팠다. 나는 눈을 감고 고개를 떨구었다.제하는 벽 앞에 서 있었다. 그는 종일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칼을 쥔 손이 힘으로 경직돼 있었고, 눈빛은 날카로웠다. 그는 마치 이 집이 전쟁터라도 되는 듯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오늘 밤은 다를 거야.”그가 낮게 말했다.“놈이 다시 시도할 거고, 그때 우리는 확인하게 되겠지. 도대체 뭘 노리고 있는 건지.”나는 입술을 깨물며 속삭였다.“나를… 노리고 있는 거지.”제하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 부정이 내겐 더 큰 확신처럼 다가왔다.밤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해가 기울자 벽의 균열은 다시 은은히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처음엔 희미한 은빛이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빛은 더 강해지고 맥박처럼 깜빡였다.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의 심장 박동 같았다.우리는 세 사람이 거실 중앙에 앉아 등을 맞댔다. 초침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그리고 자정 무렵, 균열이 다시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벽지가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손 같은 것이 틈새 밖으로 뻗어 나왔다.창백하고 길쭉한 손가락. 살갗은 사람의 것처럼 보였지만, 빛에 젖은 듯 매끈했다. 손끝이 공기를 더듬으며 우리 쪽을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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