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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 문틈 너머의 그림자

문틈은 이미 닫혔고, 바람이 멎은 뒤에는 아무 소리도 남지 않았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느꼈다. 누군가가 그 좁은 틈을 지나갔다는 것, 그것도 아주 가까운 시간 안에. 여진의 향기는 잔향처럼 남아 있었고, 그것은 단순한 냄새가 아니라, 누군가의 마음을 붙잡기 위해 남긴 ‘신호’였다. 수진은 문 앞에 서서 손끝을 가볍게 얹어 보았다. 문틀은 오래되었지만 닳거나 흔들린 자국이 새로 남아 있었다. 누군가가 밀고 당기며 조심스럽게 다뤘던 흔적.강혁은 주머니에서 휴대용 라이트를 꺼내 문 아래쪽 틈으로 비췄다. 빛은 좁은 틈새를 통과해 반대편의 바닥을 비추었지만, 먼지와 그림자뿐이었다. 그러나 강혁은 그냥 눈으로 보는 것보다, 이상한 감각이 더 먼저 온다고 느꼈다. 여진이 어딘가에서 걸음을 옮기고 있다는 느낌. 너무 익숙해서 오히려 낯선, 그녀의 기척.“방금까지… 여기 있었던 거 맞지?”그의 목소리는 낮았고, 감정을 누르려는 힘이 들린다.수진은 대답 대신, 손끝으로 문틀의 모서리를 따라 천천히 움직이며 감촉을 확인했다. “응. 문 안쪽에서 누군가 밀었어. 급하게 닫은 게 아니라…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하게 천천히, 조용히.”“여진이?”“아니. 여진 씨는 이런 방식 안 써. 숨을 때도, 도망칠 때도… 저렇게 완벽하게 흔적을 지우지 않아. 여진 씨는 거짓말을 할 줄 알지만, 사람의 기대를 기만하는 기술은 없어.”그 말은 결국, 문 너머에 있는 사람이 ‘여진을 가둔 자’일 가능성을 의미했다.강혁의 손이 문손잡이에서 아주 약하게 떨렸다.수진은 그의 움직임을 보고 손을 뻗어 그의 손목을 잡았다.“열지 마.”조용하지만 단단한 목소리.“문을 여는 순간, 우리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아.”강혁은 잠시 눈을 감고 숨을 정리했다.그녀의 말이 맞았다. 감정으로 움직이면, 수민을 잃었던 그날과 같은 순간이 또다시 찾아온다. 그는 감정이 흔들리는 자신을 스스로 인정하기 싫었지만, 수진은 그런 그의 마음을 정확히 읽고 있었다.“그럼 어떻게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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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 지옥의 문턱

계단 아래로 이어지는 그 흐릿한 발자국의 방향은 단순한 도주나 탈출의 궤적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한쪽 팔을 떠맡기듯 의지하며, 절뚝이거나 몸의 무게를 제대로 지탱하지 못한 채 이동한 자국이였다. 수진은 바닥에 남은 먼지의 패턴을 따라가며 시선의 결을 낮췄다. 그녀의 걸음은 한 박자씩 늦었고, 그렇게 늦춰진 속도만큼 과거의 감정들이 들끓어 올라 머릿속을 조용히 흔들었다.그녀는 손가락으로 먼지 자욱한 바닥을 가볍게 쓸었다. 지문이 남을 정도로 강하게 누르지 않고, 흔적을 깨뜨리지 않는 딱 그 정도의 압력.“이건…”그녀가 한숨과 섞인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발이 끌린 자국이야. 누워 있거나, 반쯤 의식 없는 사람을 옮길 때 생기는 패턴.”말은 차분했지만, 내부의 떨림은 조용히 들렸다.강혁은 수진의 곁으로 다가와 천 조각을 다시 자세히 살폈다.“수민이… 살아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거야?”그의 말투에는 차라리 희망보다 두려움이 앞서 있었다.세상은 가끔 사람을 잔인하게 속인다. 죽은 줄로 믿었던 사람이 살아 있다면, 그것은 기적이기 전에 또 다른 지옥의 문일 수 있었다.수진은 고개를 아주 천천히 저었다.“아니. 언니는 죽었어. 그건 변하지 않아.”그녀의 눈동자는 강혁을 향했지만, 초점은 더 깊은 곳에 가 있었다.“단지… 그 남자가 언니의 물건을 갖고 있다는 게 문제지.”그녀는 천 조각을 다시 조심스레 접어 손에 쥐었다.그 작은 조각이 마치 언니의 체온이 여전히 남아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켜 순간 손끝이 얼얼해졌다.“흑거미 조직에 있을 때, 언니가 자주 쓰던 손수건이랑 비슷해. 아니… 정확히 말하면, 거의 같은 재질이야.”강혁은 주변 어둠을 둘러보며 깊은 숨을 들이켰다.“그럼, 여진은… 그 남자에게 끌려간 거고?”“응. 그리고 그 남자는 혼자가 아니었어.”수진은 고개를 들어 복도 끝을 바라봤다. 거기에는 열린 채로 멈춰 있는 계단이 있었고, 그 아래쪽으로는 빛이 닿지 않는 구석이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셋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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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2. 문 없는 방

계단을 내려갈수록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았고, 오래된 먼지 속에 갇힌 습기가 코끝에 닿았다. 발끝으로 느껴지는 바닥의 질감이 위층과 다르게 거칠어졌고, 수진은 그 작은 변화 하나까지 놓치지 않으려듯 시선을 바닥과 벽 사이에 번갈아 두었다. 강혁은 뒤에서 묵묵히 따라오며 그녀의 움직임을 지켜보았고, 그 사이 공기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긴장감이 얇게 고여 있었다.계단 끝에 다다르자 좁은 복도가 나타났다. 바람이 통하지 않는 곳에서만 느껴지는 오래된 숨 같은 냄새가 그 안에 가득했다.복도 양옆으로 문 두 개가 자리하고 있었지만, 수진은 문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문을 둘러싼 침묵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녀는 오른쪽 문 앞에 멈춰 섰고, 손등으로 아주 조심스럽게 문 표면을 스쳤다.“여긴… 오래 닫혀 있던 방이야.”문틀 사이로 나오는 공기의 흐름은 거의 없었다.“흔적이 없어. 아무도 오래 들어오지 않은 냄새.”강혁은 왼쪽 문을 바라보았다.“그럼 반대쪽이”수진은 이미 고개를 끄덕였다.“응. 발자국도, 먼지 흐름도 다 이쪽으로 이어져.”그들은 왼쪽 문 앞에 섰다.문은 닫혀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잠겼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누군가가 안에서 조용히 기대고 있는 문 같았다.수진은 문고리를 잡지 않고, 귀를 문에 살짝 붙였다.숨소리가 들렸다. 아주 얇고 느린 숨.누군가가 숨을 죽이며 버티는 소리.“안에… 있어.”그녀의 목소리는 거의 속삭임에 가까웠지만, 그 속엔 단단한 확신이 섞여 있었다.강혁은 순간적으로 심장이 위로 튀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여진인가?”“아니.”수진은 단호했다.“여진 씨였으면, 이렇게 숨을 숨기지 않아. 여진 씨는 자기 의지가 사라지는 상황에서도 기척을 남기는 사람이야. 안에 있는 사람은… 너무 조용해.”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고 자신의 가슴께를 눌렀다.압박이 느껴지는 듯, 표정이 흐려졌다.“…그리고… 이 기척은 낯설지 않아.”강혁은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누군데.”그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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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3. 처벌 같은 문장

방 안의 공기는 마치 오래된 유리병 속에 갇힌 것처럼 움직임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조명조차 없었지만, 희미한 틈으로 들어온 불빛이 방의 중심을 겨우 비추었고, 그 빛 아래에서 천천히 고개를 든 그림자는 인간의 형태를 하고 있으면서도, 어딘지 현실과 어긋난 존재 같았다.그림자는 천천히 손을 올린 채 움직이지 않았다.그 손의 각도, 손목의 기울기, 손등의 얇은 실핏줄 그 모든 작은 디테일들이 수진의 가슴을 짓눌렀다.‘언니가… 이런 손을 가지고 있었지.’그녀의 머릿속에서 오래된 기억이, 바스러지는 듯한 고통과 함께 떠올랐다.눈이 내리던 연변의 겨울밤, 언니가 장갑을 벗어 수진의 손을 감싸던 순간의 촉감,그 따뜻함까지 전부 겹쳐왔다.그러나 이 방 안의 손은 따뜻하지 않았다.숨을 쉬는 기척과는 달리, 손끝에는 생기가 없었다.마치 생과 사 사이에서 길을 잃은 사람의 움직임.“강혁 씨… 기다려.”수진은 거의 숨을 삼키듯 중얼렀다.강혁은 이미 한 발踏 안으로 들어가려던 찰나였지만, 수진의 손이 그의 팔을 꽉 잡고 있었다.그녀 손끝의 힘은 한순간 그의 움직임을 막을 만큼 단단했다.“…저건 언니가 아니야.”한 문장. 그러나 자신에게 내리는 처벌과 같은 문장.그림자는 여전히 고개를 쳐든 채 두 사람을 향해 손을 내밀고 있었다.하지만 가까이 갈수록, 수진은 더 명확히 알 수 있었다.그 얼굴선은 수민의 것과 닮았지만, 너무 매끄러웠고, 지나치게 정적이었으며, 감정이 깃들 틈이 없었다.그리고, 진짜 언니였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방식으로 숨을 죽이고 있었다.“뒤로 가.”수진은 강혁의 팔을 뒤로 당겼고, 강혁은 그녀의 눈빛이 단순한 놀람이 아니라,‘피해야 한다’는 판단임을 알아챘다.그러나 그림자는 두 사람의 움직임을 보는 순간, 느리게, 아주 느리게… 입술을 떼었다.“…진…?”그 소리가 들리는 순간, 수진의 온몸에서 체온이 꺼져 내려갔다.그 목소리는 생전의 수민과 너무나 비슷했다.음색도, 높낮이도, 숨을 끊어 삼키는 버릇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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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4. 언니의 얼굴을 한 괴물

어둠 속에서 튀어 오른 그림자의 움직임은 인간의 그것이라고 부르기엔 지나치게 유연했고, 동시에 부자연스러웠다. 마치 관절 사이에 보이지 않는 실이 연결돼 있어 그 실을 누군가 강제로 잡아당기듯 움직이는 형태였다. 강혁은 본능적으로 몸을 낮추며 팔로 수진을 감싸 뒤로 밀었고, 그림자는 그런 그를 정확히 향해 몸을 꺾었다.수진의 시야에는 그림자의 움직임보다 먼저 ‘얼굴’이 들어왔다.언니의 얼굴선. 언니의 거리.언니가 웃을 때 생기던 눈꼬리의 약한 주름.그러나 그 얼굴은 ‘살아 있는 사람의 표정’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눈매는 무감했고, 시선은 고정되지 않았으며, 입술은 움직임만 흉내낼 뿐 감정을 담고 있지 않았다.유사한 외형, 모방된 패턴, 빼앗긴 표정.어떤 감정도, 어떤 고뇌도 깃들지 않은 얼굴이 ‘수민의 형상’을 흉내 내고 있다는 사실이, 수진의 가슴을 사정없이 짓눌렀다.“언니가… 아니야.”수진의 입술이 저절로 떨렸다.그 떨림은 공포가 아니라, 세상이 비틀려 보이는 데서 오는 깊은 상실감이었다.그림자는 너무 빠르게, 너무 가벼운 발걸음으로 강혁에게 달려들었다.강혁은 정면을 향해 몸을 틀어 손목을 잡고 제압하려 했지만, 그림자의 관절은 비틀리고 구부러지는 각도가 달랐다.정상적인 인간은 하지 않는 궤적.전직 국정원 에이스였던 그조차 예측이 어렵고, 손끝을 스치는 순간에도 뼈가 아니라 말랑한 무언가에 닿은 느낌이 들었다.“혁!”수진의 목소리가 날이 선 듯 울렸다.그녀는 뒤쪽 벽에 고정돼 있던 금속 파이프를 잡아 힘을 주어 뜯어냈다.오래된 벽은 약했고, 파이프는 날카로운 끝부분을 드러내며 크게 들썩였다.그림자가 강혁의 얼굴을 정확히 향한 순간, 수진은 파이프를 가로질러 세차게 휘둘렀고, 금속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방 안을 갈랐다.파이프 끝이 그림자의 팔에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그림자의 몸이 뒤로 꺾였다.그러나 그림자는 넘어지지 않았다.똑바로 쓰러지지도, 흔들리지도 않았다.그저 팔의 방향만 부자연스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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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5. 모방된 표정

그림자의 얼굴이 옆으로 찢기듯 일그러졌다가, 다시 수민의 얼굴선으로 돌아오는 그 기괴한 ‘반복’에 수진은 더 이상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그녀는 오히려 앞으로 걸어가며, 발걸음 하나하나에 긴장과 슬픔이 동시에 섞인 감정을 다잡아 올렸다.강혁은 그 모습을 막으려 했지만, 수진이 살짝 뒤로 손을 들어올려 그를 멈춰 세웠다.“이건 내가 해야 해.”그녀의 낮은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고,자신이 평생 피해 다니던 그림자와 마주설 때의 그 단단한 결의가 담겨 있었다.그림자는 수진이 다가오는 순간,마치 ‘입 모양만 흉내 내는’움직임으로 또다시 입술을 들썩였다.“…진… 아…”그 발음은 형태만 있었고, 온기란 없었다.그러나 모양 자체는 놀랍도록 익숙했다.언니가 어린 수진에게 ‘괜찮아, 아가’라고 말하던 그 입술의 움직임과 같았기 때문이었다.수진의 가슴이 한순간 비틀렸고, 숨이 깊이 흔들렸다.그러나 그녀는 단 한 걸음도 멈추지 않고 다가갔다.그림자와의 거리가 손을 뻗으면 닿을 정도로 가까워지자그 기묘한 존재가 마치 반사적으로 고개를 기울였다.그리고 그 순간, 수진은 아주 낮고,자기 자신에게도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흑거미… 너 진짜 이렇게까지 했구나.”그녀의 눈에 떠오른 건 분노가 아니라, 배신에 가까운 ‘비참함’이었다.“혁 씨.”수진이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흑거미가 사람을 부숴버릴 때 가장 먼저 노리는 게 뭔 줄 알아?”강혁은 숨을 고르며 그녀 옆으로 다가왔다.“정체성.”“맞아.”수진은 그림자를 내려다보았다.“사람의 얼굴을 쓰고, 그 사람의 말투를 흉내 내고, 그 사람의 기억에서 뽑아낸 표정을 모방해.그리고 그걸 ‘진짜처럼 느껴지게’ 만들어서…네가 네 감정 전체를 붙잡을 수 없게 만들지.”그녀는 천천히 손을 들어 그림자의 얼굴선 바로 앞에서 멈췄다.닿지 않았다. 닿을 수 없었다.닿는 순간, 언니의 마지막 기억마저 더럽혀질 것 같아서.“이건 언니가 아니야. 언니의 이름도, 목소리도,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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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6. 어둠 속의 두 번째 발걸음

문밖에서 들려오던 발소리는 처음엔 아주 작고 조심스러웠다.수진은 숨을 고르며 그 소리를 세어갔다.규칙성 없는 걸음, 무게 중심이 어딘가 쏠린 형태,마치 누군가가 두려움과 결심 사이를 오가는 걸음처럼.강혁은 왼쪽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살짝 눌러 뒤로 물리려 했으나,수진은 움직이지 않았다.오히려 더 고요한 표정으로 문틈을 바라보았다.“누구지?”강혁이 낮게 묻자, 수진은 아주 미묘하게 고개를 저었다.“발소리를 들었어. 우리를 공격하러 온 리듬이 아니야.”문틈 반대편에서 바람 한 줄기가 스며들었고그 바람과 함께 어떤 미세한 긴장이 몸에 배어들었다.누군가가 이 장소를 오래 망설이고 있었다는 흔적이었다.세 번째 발걸음이 가까워졌을 때, 수진은 갑자기 표정을 바꿨다.놀라움도 아니고 공포도 아니었다.그녀가 느낀 건 ‘기억 속의 익숙함’이었다.“이 느낌…”그녀의 입술이 아주 천천히 열렸다.“…누구와 비슷해.”강혁은 본능적으로 자세를 낮추며 문이 열릴지 모르는 방향에 집중했다.그러나 수진은 눈을 떼지 않았다.문 밖에서 흘러오는 기척이 그녀의 마음 깊은 곳을 찔러대는 듯했다.“혁 씨.”“응.”“발소리 말고… 하나 더 느껴졌어.”“뭔데?”수진은 손등을 쓸며 숨을 가볍게 들이켰다.“누군가… 우리와 같은 어둠을 겪은 사람.”그 말은 사실상, ‘흑거미가 남긴 또 다른 상처’라는 의미나 다름없었다.그 순간, 문고리가 아주 천천히 돌아가기 시작했다.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으려는 의지가 느껴질 정도로 조심스러운 움직임. 그 섬세함은 공격자와는 거리가 멀었다.오히려 겁먹은 사람이 보여주는 몸짓에 가까웠다.수진은 숨을 멈추고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문틈 사이로 그림자 하나가 조심스럽게 스며들었다.그리고 마침내 낯선 얼굴이 드러났다.그러나 이상하게도, 수진은 그 얼굴을 보는 순간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낯설지만 낯설지 않은,처음 보지만 이미 마음 깊은 곳에서 오래전부터 존재하던 것처럼 생생한 표정.그녀의 입술이 먼저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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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7. 서늘한 체온

천장에서 울린 금속음은 처음엔 바람에 흔들린 전선 같은, 그저 미세한 떨림 정도였다.그러나 강혁은 이미 몸으로 알고 있었다.저런 소리는 실수로 만들어지지 않는다.누군가가 ‘그들 셋 모두’를 한 공간에 모으는 데 성공했다는 신호였다.수진은 문가에 주저앉아 있는 여자를 천천히 일으켜 세웠다.그 여자의 손목은 마치 오랫동안 스스로를 붙잡고 버텨온 사람처럼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고, 손등엔 가늘게 새겨진 상처들이 빛을 받아 드러났다.“걷겠어?”수진이 조심스레 묻자 그 여자는 두 번이나 숨을 들이켠 뒤 가까스로 고개를 끄덕였다.“응… 걷… 걸을 수 있어.”그 목소리는 부서질 만큼 약했지만, 그 약함 속에 오래 묵은 인내가 들어 있었다.강혁은 방 둘레를 천천히 훑었다.출입구, 천장, 벽 모서리. 무언가 보이지 않는 감시망이 이미 촘촘히 박혀 있는 듯했다.그는 수진 쪽으로 무겁게 말했다.“우릴 지켜보고 있어. 방금 온 그 소녀까지 포함해서.”‘소녀.’수진은 그 말에 문득 마음이 조금 쓰라렸다.자신의 얼굴, 자신의 억양, 자신의 그림자로 살아온 존재를‘소녀’라고 불러주는 누군가가 있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도 오래된 진통처럼 다가왔다.그 낯선 여자는 강혁의 말에 움찔하며 뒷걸음질치려 했으나, 수진이 손목을 붙잡은 채 고개를 저었다.“괜찮아. 혁 씨는 네 적 아니야.”수진의 말은 낮고 조용한데 이상하게 힘이 있었다.그 말이 떨어지자 그 여자는 조금 가라앉은 듯 숨을 눌러 뱉었다.“…나는, 너희 둘에게 폐만 끼치는 거 아니야?”그 목소리는 고백이라기보다 자기 혐오에 가까웠다.수진은 그 여자의 눈을 들여다보았다.“흑거미에게 붙잡혀 있었던 거지? 너를 감시하고, 너를 시켜서”그 여자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아니야. 시켰다기보다… 난 그냥 그 여자가 원하는 대로 만들어진 존재였어.”수진의 가슴이 아주 미세하게 내려앉았다.그 말은 곧 흑거미가 ‘자신의 죽음을 대비한 계획’을 세웠다는 의미이기도 했다.“너를… 나 대신하게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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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8. 뒤집힌 숨결

문을 사이에 두고 서늘한 기척이 다가오는 동안, 강혁은 숨을 한 번 깊게 들이켰다.그 기척은 사람 하나가 낼 수 있는 기운이 아니었다.흑거미가 오랫동안 길러온, 냄새도, 발소리도, 체온도 지워버린 무리들 ‘그녀의 손발’이라 불리던 존재들이 움직일 때 특유의 공기가 있었다.습기가 끼지도 않고, 먼지가 뜨지도 않는 마치 공간이 자체적으로 체온을 잃어가는 느낌.수진도 그걸 알아챘다.그녀는 강혁 뒤에서 걸음을 멈추고, 옆에 있는 ‘또 하나의 자신’을 향해 속삭였다.“내가 뭐라 말하든… 절대 뛰지 마. 혁 씨가 널 붙잡든, 내가 너를 끌고 가든,너무 빠르게 움직이면 상대는 그걸 먼저 노릴 거야.”그 여자는 겁에 질린 눈으로 수진을 바라보았다.“나는… 너희 둘 때문에 나타난 게 아니야. 정말로… 살고 싶어서 온 거야.”“그걸 알아.”수진이 아주 부드럽게 대답했다.“그러니까 나도 널 살리고 싶어.”그 말에 그 여자는 믿기 어렵다는 듯 눈을 흔들었고,그 흔들림은 감당하지 못한 체온처럼 금세 목끝까지 차올랐다.그때 문 손잡이가 한 칸 돌아갔다.강혁이 수진 쪽으로 고개를 아주 미세하게 돌렸다.그 작은 움직임 속에, 둘만이 공유하는 오래된 감각이 있었다.위험을 앞두고 서로를 먼저 확인하는 버릇.한쪽이 숨을 들이기 전에 다른 쪽이 호흡을 맞추는 버릇.둘 사이에 피어나던 사랑도, 잿빛처럼 드리워진 오해도,모두 그 오래된 감각 위에 놓여 있다.수진의 장미향이 들숨에 아주 옅게 스며왔고, 강혁은 그 향으로 마음을 묶었다.움직이기 전까지 흔들리지 않기 위해.문이 열렸다.그러나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사람이 아니었다.흑거미가 현장에서 종종 쓰던 방식이었다.전면에 사람을 먼저 내세우지 않고, 공간을 시험하듯 조용히 미끼를 던지는 것.문틈으로 들어온 건 새까맣게 말라붙은 종이 한 장이었다.‘종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두껍고, ‘장치’라고 부르기엔 너무 조용했다.낯선 기호들이 연기가 피어오르듯 새겨져 있었고그 기호들 사이로 극히 미세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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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9. 첫 번째 봉인

문 아래로 스며들던 발자국의 ‘그림자’는 진짜 그림자가 아니라흑거미가 길러낸 자들이 이동할 때 바닥에 남기는 특유의 흔적이었다.살아 있는 발이 아니라, 살아 있는 체온이 아니라, 그들의 존재감 자체가 형태만 그림자처럼 길게 드리워지는 것. 수진은 그걸 오랫동안 봐왔다.언니가 죽기 전날 밤, 그 그림자들이 처마 아래 길게 누워 있었고그 길었던 그림자가 언니의 뒷모습을 집어삼키듯하나둘 벽을 타고 올라가던 장면을 그녀는 그걸 기억 속에서 지우고 싶어도 지울 수 없었다.강혁은 문 앞까지 다가가더니 몸을 측면으로 살짝 돌렸다.그 자세는 공격적인 형태도, 방어하는 형태도 아니었다.그가 예전에 현장에서 자주 취하던 ‘누군가의 움직임을 받아들이되, 먼저 휘두르지 않는’ 아주 오래된 습관의 자세였다.그가 그런 자세를 취하는 걸 보는 순간 수진은 또다시 심장이 무너져내릴 듯 아팠다.그녀는 강혁의 등을 바라보며 한 번, 아주 깊게 숨을 들이켰다.그 숨이 들숨인지, 울음인지, 스스로도 잘 구분되지 않았다.뒤에 서 있는 여자를 지그시 바라본 뒤 수진이 낮게 말했다.“두려워하지 마. 나도, 언니도… 두려워한 적은 있어도 그러다 부서진 적은 없어.”그 여자의 눈이 흔들렸다.수진은 그 흔들림을 보고 자신의 말투를 아주 미세하게 바꿨다.연변에서 쓰던 말투 중 가장 부드러운 억양을 꺼내 아주 천천히 덧붙였다.“나도 겁났어. 살아있으면서도 살아있지 않은 면들 때문에. 근데… 넌 그거 아니야.너는 그냥, 잘못 길러진 불쌍한 사람일 뿐이야.”그 말이 닿자 그 여자는 고개를 내리깔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그때 문 밖에서 첫 번째 금속음이 또 울렸다.아까 들렸던 세 번째 신호와는 달랐다.이번 건 더 묵직하고, 더 깊었다.마치 벽 한쪽이 안쪽으로 꺼지는 소리처럼 공기 자체를 낮은 음으로 흔들었다.강혁이 아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시작됐다.”“봉인이야?”수진이 물었다.강혁은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단지 문틀을 바라보며“첫 번째 봉인.”그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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