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밤이 깊어질 즈음에, 숨겨진 마음: Chapter 121 - Chapter 130

200 Chapters

제121화

강유영은 최근 제대로 쉰 적이 거의 없었다.방금 전해진 황제의 교지는 이미 그녀의 마음에 거대한 파도를 일으켰기에, 아직 그 충격을 갈무리하는 중이었다.그 와중에 주지상처럼 혐오스러운 자를 대면하게 되니, 도저히 감정을 억누를 길이 없었다. 강유영은 담벼락을 붙잡고 쓸개즙까지 다 쏟아낼 듯 격하게 구토를 했다.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렸다.“강 소저, 어디 불편한 게요?”하필이면 주지상이 다가와 염치없이 안부를 물었다.강유영은 대꾸조차 하지 않고 몸을 돌려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났다. 그 음침한 얼굴을 한 번이라도 더 보았다간 다시 속이 뒤집힐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한씨가 뒤따라오며 쐐기를 박았다.“오늘로 얼굴을 익혔으니, 앞으로 잘 지내보도록 하거라.”강유영은 눈물을 훔치며 요월원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걷는 내내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한씨는 한때 그녀를 증오하여 어릴 적에 내다 버린 적도 있었다. 그 후로도 그녀의 목숨을 앗아갈 기회는 수없이 많았기에, 그녀가 죽는다 해도 아무도 문책하지 않을 것이다.그런데 왜 굳이 그녀를 지금까지 길러주고 주지상 같은 자에게 시집보내려 하는 걸까?오로지 그녀를 고문하기 위해서?그렇다면 한씨는 어찌하여 그토록 그녀를 미워하는 것일까?그녀는 갑자기 자신의 출생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문득 그날 풍씨 어멈이 했던 말이 다시금 머릿속을 스쳤다.‘너는 네 어미와 똑 닮았구나.’요월원으로 돌아와 세수를 마친 강유영은 그대로 침상에 몸을 뉘었다.너무 지쳤던 탓인지, 아니면 오랫동안 짓눌려온 마음의 병을 구토와 함께 쏟아낸 탓인지, 그녀는 곧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칠흑 같은 밤이었다.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머릿속은 멍하고 몸은 천근만근 무거워, 큰 병이라도 앓는 듯 괴로웠다.그녀는 어두컴컴한 천장을 멍하니 응시하며 손가락 하나 까딱하고 싶지 않았다.눈앞에는 또다시 나란히 무릎을 꿇고 교지를 받들던 조원철과 소은경의 모습이
Read more

제122화

“강유영, 정녕 나와 모든 관계를 끝내겠다는 것이냐?”그녀를 쏘아보는 조원철의 눈빛이 순식간에 얼음장처럼 차가워지더니, 눈가에 옅은 붉은 기운이 서렸다.“예.”강유영은 긴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시선을 내리깔았다.“오라버니께서는 이미 정혼자가 있고, 제게도 혼사가 정해져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니 앞으로 다시는 왕래하지 마시지요. 만약 또다시 찾아오신다면, 그때는 어머니께 모두 고하겠습니다.”그녀는 최대한 평온을 유지하려 애썼으나, 밀려드는 감정 탓에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었다.어조는 결연했으나, 치맛자락을 쥔 손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애초에 맺어져서는 안 될 인연이었다. 그날 밤의 일은 그저 돌이킬 수 없는 사고였을 뿐이다.진작 끊어냈어야 할 관계를 우유부단하게 끌어온 제 잘못이었다.누군가 눈치채기 전에 지금이라도 정리하는 것이 차라리 다행이라며, 그녀는 스스로를 다독였다.“혼사라? 주지상 그놈 말이냐?”조원철이 비릿한 비웃음을 흘렸다.“강유영, 너는 이미 정조를 잃은 몸이다. 평범한 사내도 이를 용납하지 않을 터인데, 하물며 주지상 같은 변태에게 시집가서 온전히 살아남을 성싶으냐?”그의 눈시울이 시뻘겋게 달아오르고, 팽팽하게 당겨진 턱선 위로 분노가 일렁였다. 평소 과묵하던 그의 입에서 쏟아져 나온 말들은 잔인하기 그지없었다.그 날카로운 말들은 세상에서 가장 예리한 칼날이 되어 강유영의 심장을 난도질했다.그녀의 안색은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했다. 입술의 핏기마저 가신 채 장롱에 위태롭게 기댄 그녀는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했다.굵은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려 상아색 잠옷 위로 진한 얼룩을 남겼다.“예, 저는 정숙하지 못한 천한 계집입니다. 제 몸 하나 지키지 못하였으니, 훗날 주지상의 손에 죽는다 해도 모두 제 업보겠지요. 그러니 제발… 다시는 저를 찾지 말아주십시오.”말을 마친 그녀가 품에 안고 있던 물건들을 조원철에게 내밀었다.그날 밤, 먼저 손을 뻗어 그녀를 끌어당긴 이는 그였다. 정조를 앗아간 이가
Read more

제123화

“물건을 줍고 방금 한 말은 거두거라.”조원철은 다시 평소의 무심하고도 냉담한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그… 그렇게는 못합니다.”강유영은 눈을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젖은 눈동자에는 경악스러운 빛이 가득했다.그가 자신을 탓하지도, 똑같이 되돌려주지도 않았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두 번 말하게 하지 말아.”조원철이 옷깃을 거칠게 잡아당겼다. 그가 이토록 격한 감정을 내비치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제가 오라버니를 때렸으니, 오라버니도 저를 때리십시오. 끝내자는 말은 진심이며, 결코 거두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제발 당신의 물건들을 가지고 이만 나가주세요.”강유영은 고개를 돌린 채 흐느낌을 참아냈다.목소리는 가늘게 떨렸으나, 말투만은 단호했다.이미 다른 여인의 정혼자가 된 그를 더 이상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그때 조원철의 주먹이 돌연 날아들었다.강유영은 겁에 질려 눈을 질끈 감았으나 피하지는 않았다. 그가 작정하고 치겠다면 맞아줄 작정이었다. 먼저 손을 댄 것은 자신이었으니, 이것은 당연히 감내해야 할 몫이라 여겼다.하지만 예상했던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 대신 귓가에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살과 뼈가 목재문에 부딪히는 듯한 소리였다.강유영의 시선이 이내 옆으로 돌아갔다.조원철의 주먹이 그녀의 머리 바로 뒤쪽 장롱에 박혀 있었다. 두꺼운 문짝이 움푹 패어 들어갔고, 부서진 나무 파편들이 그의 살에 박혔다.손목을 타고 피가 한 방울씩 떨어지더니, 이내 바닥에 붉고 선명한 핏자국을 남겼다.강유영은 본능적으로 상처를 살피려 손을 뻗었다가 이내 멈칫하며 거둬들였다.지금 그녀는 그와 결별을 이야기하는 중이었다. 그가 다친 것이 이제 자신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그녀는 옆으로 두어 걸음 물러나 다시 고개를 돌려 그를 외면했다.조원철이 거칠게 손을 뺐다.강유영은 슬쩍 그를 훔쳐보았다. 피가 낭자한 그의 손이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그는 통증조차 느끼지 못하는 듯, 여전히 주먹을 꽉 쥔 채 피를 흘리고 있었다.핏발이 선 그의 두
Read more

제124화

혼사는 국공 부인의 뜻이었기에, 강유영이 거절한다고 바뀔 수 있는 게 아니었다.강유영은 손에 쥔 초대장이 천근만근처럼 무겁게 느껴졌다.“이를 어찌하나요?”단비가 초조하게 물었다.주지상에 관한 흉흉한 소문을 이미 들었기에, 아씨가 그런 자에게 시집가는 것만큼은 어떻게든 막고 싶었다.“내가 가서 분명히 말하마.”강유영은 오히려 침착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초대장에 적힌 글귀를 내려다보았다.어머니의 생신이시니, 주지상도 함부로 굴지는 못할 것 같았다.‘일가친척들도 많이 오셨을 테니, 사품 관료나 되는 사람이 체통 없는 짓은 하지 않겠지?’“아씨….”단비는 여전히 걱정스러운 얼굴이었다.“이것을 지니고 가십시오.”그때 곁에 있던 서유가 다가와 작고 정교한 단도 한 자루를 강유영의 손에 쥐여주었다. 서슬 퍼런 칼날이 번뜩이는 것이 한눈에 봐도 잘 벼려진 무기였다.강유영이 의아하게 쳐다보자, 서유는 고개를 숙이며 황급히 설명했다.“호신용으로 지니고 가시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그녀는 차마 세자가 준 물건이라 말할 수 없었다. 그랬다가는 강유영이 절대 받지 않을 것임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고맙구나.”강유영은 단도를 품에 챙겼다. 주지상을 대면하러 가는 길에 이만큼 요긴한 물건도 없었다.서유는 그 모습을 보고 눈을 반짝이며 간곡히 덧붙였다.“아씨, 주지상을 거절하지 못한다면 앞날은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을 것입니다.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절대로 그를 두려워 마십시오.”이 또한 조원철이 그녀에게 꼭 전하라 명했던 말이었다.“알겠다.”강유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깊게 숨을 들이켜며 밖으로 향했다.주씨 저택은 도성 서쪽 대류거리 끝자락에 자리 잡고 있었다. 소박한 정원을 갖춘 세 문 가옥으로, 밖에서 보기에도 꽤나 기품이 느껴지는 부저였다.대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주지상은 강유영이 마차에서 내리는 것을 보자,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마중을 나왔다.“강 소저, 어서 안으로 들어오시오.”그가 점잖게 읍을 하며 공손한 체를 했다.“초대에 감
Read more

제125화

강유영은 속이 울렁거려 빨리 그를 피해 도망치려고 했다.“강 소저, 내 소저를 눈여겨본 것은 출신 따위를 따져서가 아니오. 설령 양녀라 한들, 진국공부의 양녀이니 여느 평범한 양녀들과는 다른 법이지. 그러니 그리 스스로를 깎아내리지 마시오.”주지상은 더 이상 가식을 떨지 않았다. 점차 본색을 드러내며 앞을 가로막는 그의 웃음은 정말 음산하기 짝이 없었다.“제가 국공부의 양녀라는 것을 아시는 분이 어찌 이러십니까?”강유영은 깊게 숨을 들이켜며 억지로 냉정을 되찾으려 애썼다.“어찌 저의 뜻을 무시하고 무례하게 구십니까? 훗날 진국공부의 어른들을 어찌 감당하시려고요?”그녀는 예전에 조원철이 가르쳐준 병법서의 내용을 떠올렸다.‘스스로의 실력이 부족할 때는 세력으로 상대를 압박해야 한다’는 대목이었다. 지금이야말로 진국공부의 위세를 빌려 주지상에게 압력을 가해야 할 때였다.“감당이라니, 무엇을 말이오?”주지상은 발로 문을 차서 닫더니,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만지려 들었다.“소저와 나의 혼사는 국공 부인께서 약조하신 것이오. 예로부터 혼사는 부모의 명을 따르라는 법이 있지. 어찌 하겠소? 감히 부인의 명을 거역이라도 하겠다는 것이오?”강유영은 뒤로 물러나며 혐오스럽다는 듯 그의 손을 피했다. 문 안으로 발을 들인 자신이 너무나 후회스러웠다. 주지상 같은 자를 애초에 신뢰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어머니께서는 그저 대인과 맞선을 한번 보라 하신 것뿐입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혼담은 없던 일로 하겠다 하셨지요. 진정 정해진 혼사라면 대인께선 어찌 저를 이곳으로 따로 부르셨겠습니까?”강유영은 잔뜩 경계하며 그와 시비를 가렸다. 극심한 공포 속에서 그녀는 저도 모르게 조원철을 떠올렸다.하지만 눈앞에는 가증스러운 주지상뿐이었다. 조원철은 그녀를 구하러 오지 않을 것이다.두 사람의 사이는 이제 완전히 끊어졌다. 그는 황제의 명으로 소은경과 맺어진 사이니, 그녀가 어떤 일을 당하든 상관하지 않을 터였다.한씨가 오늘 그녀를 주지상에게 보낸 사실조차
Read more

제126화

부저의 편청에 이런 해괴한 물건들이 준비되어 있었다니, 주지상은 이런 변태적인 행위에 능숙한 자가 분명했다.강유영은 이곳에서는 자신이 살려달라 호소해도 들어줄 이가 없음을 직감했다. 이번만큼은 빠져나갈 구멍이 전혀 없어 보였다.“여긴 내 구역이니, 네가 목청이 터져라 소리를 질러대도 들어줄 이는 아무도 없다. 그러니 나를 보아라!”주지상은 강유영의 턱을 움켜쥐고 사납게 호통쳤다. 겁에 질린 강유영은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주지상이 갑자기 바지를 내리더니 그녀를 등지고 허리를 굽혔다.항문에는 이상한 뿔 같은 것이 박혀 있었다.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추잡한 광경이었다.강유영이 언제 이런 해괴한 광경을 본 적이 있었을까?그녀의 얼굴에서 핏기가 완전히 사라지고, 위장이 뒤틀리며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단 한 번의 눈길만으로도 구토가 올라오고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대체 이 역겨운 기호는 무엇이란 말인가.참으로 추악하고 역겨웠다.“보아라! 똑똑히 보란 말이다!”주지상은 강유영의 머리카락을 움켜잡았다. 그의 눈은 핏발이 서 시뻘겋게 달아올랐고, 음산하던 얼굴은 지옥에서 올라온 악귀처럼 흉하게 뒤틀려 있었다.강유영은 두피가 통째로 벗겨지는 듯한 통증에 눈조차 뜨지 못했다.찌익!주지상이 강유영의 겉옷을 거칠게 찢어발겼다.절망이 온몸을 덮쳐오는 이 순간, 강유영의 머릿속에 떠오른 유일한 사람은 바로 조원철이었다.‘하지만 그분은 아마도….’쾅!그때, 굳게 닫혔던 문이 밖에서 박살 나며 거칠게 열렸다.강유영은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바라보았다. 문을 차고 들어온 자는 다름 아닌 청운이었다.그리고 청운이 한쪽으로 물러나며 길을 터주었다.조원철이 서늘한 살기를 내뿜으며 문가에 섰다.“오라버니….”강유영은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한 채, 신음하듯 그를 불렀다. 온몸이 밧줄에 꽁꽁 묶여 한 치도 움직일 수 없는 처지가 아니었다면, 지금 이 광경이 꿈이라 의심했을 것이다.공포에 질려 머릿속이 울리던 찰나 그를 마주하니, 지옥에서
Read more

제127화

주지상은 비록 일품 관원처럼 조정의 판세를 쥐고 흔드는 위치는 아니었으나, 사품 염관으로서 높으신 분들조차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권세를 지녔다.그는 조원철이 고작 양동생 때문에 자신을 죽기 살기로 몰아붙이지는 못할 것이라 믿었다.그러나 조원철의 안색은 이미 살기로 얼룩져 있었고, 굳게 다문 입술은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다.그는 강유영을 품에 안은 채, 주지상의 얼굴을 향해 발길질을 내리꽂았다.그렇게 수차례 무자비한 발길질이 이어졌다. 주지상은 바닥을 구르며 고통스럽게 비명을 질렀다.“세자, 살려주십시오! 제가 다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그제야 겁이 난 주지상은 애걸복걸 애원했다. 조원철의 눈빛은 당장이라도 그의 목숨을 끊어놓을 기세였다.주지상은 체면이고 자존심이고 다 버린 채, 살기 위해 그에게 매달렸다.“그만하십시오, 세자. 이러다 정말 사람 잡겠습니다!”청운이 급히 다가와 조원철을 가로막았다. 그러나 조원철의 눈은 이미 시뻘겋게 핏발이 서 있었고, 살기는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청운의 힘으로는 도저히 그를 말릴 수 없었다. 조급해진 청운은 강유영에게 간청했다.“유영 아씨, 세자를 말려주십시오! 아무리 그래도 조정의 대신이지 않습니까….”여기서 주지상을 때려 죽이기라도 한다면, 설령 황제가 조원철을 신임한다 한들 뒷감당이 어려워질 것이다. 조정의 깐깐한 문관들이 이 일을 그냥 넘길 리 없었다.“오라버니, 그만하세요. 이제 그만하셔도 돼요….”강유영 역시 피떡이 되어 쓰러진 주지상의 모습에 겁이 났다. 그녀는 조원철의 허리를 껴안으며 필사적으로 말렸다.그제야 조원철은 동작을 멈추고, 바닥에 널브러진 주지상을 차갑게 내려다보았다.주지상은 신음을 내뱉으며 몸을 들썩이더니, 이내 정신을 잃고 그대로 고꾸라졌다. 편청 안에 서늘한 정적이 감돌았다.“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라버니….”강유영은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어 조원철을 밀쳐내며 거리를 두었다. 두 사람이 이미 인연을 끊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설령 절연하지 않
Read more

제128화

강유영은 망연자실한 얼굴로 눈만 깜빡였다. 막 위기에서 벗어난 터라 머릿속이 멍한 상태였다.게다가 조원철과 더 이상 가까워지고 싶지 않은 마음에 심술까지 겹쳐서, 그의 의중을 파악하기가 더욱 어려워졌다.“네가 이리로 온 목적이 무엇이었더냐?”조원철은 다시금 그녀를 일깨웠다. 강유영은 정신을 가다듬고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지금 그녀에게 가장 절실한 일은 주지상과 엮인 관계를 완전히 끊어내는 것이었다.혼사는 한씨가 주도했지만, 주지상이 차마 입에 담지 못할 파렴치한 짓을 저질렀으니 그의 과오를 한씨에게 명확히 고해야 했다.한씨는 강유영을 증오했다. 하지만 진국공부의 체면을 누구보다 중시하는 인물이기도 했다.주지상이 흉측한 일을 벌였으니, 한씨도 억지로 강유영을 주씨 가문에 시집보내기에는 명분이 부족할 터였다.조원철은 그녀의 허리를 감싼 채, 그녀가 생각을 마칠 때까지 조용히 기다려 주었다.이윽고 마차의 속도가 줄어들었다.“집에 도착했다.”조원철은 고개를 숙여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어머니를… 뵙겠습니다.”강유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주지상을 고발하려면 가장 처참한 몰골로 한씨 앞에 서야 했다. 한참을 숙고한 끝에야 그녀는 마침내 조원철의 의도를 깨달았다. 처소로 돌아가 목욕부터 하는 것은 주지상의 죄증을 제 손으로 씻어내는 어리석은 짓이었다.조원철은 그녀의 뒤를 따라 마차에서 내렸다. 강유영은 몇 걸음 걷다가 그가 자신을 따라오는 것을 깨닫고 걸음을 멈췄다.“오라버니께서는 오실 필요 없습….”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거절의 뜻을 내비쳤다. 시선을 떨구고 한껏 거리를 두는 몸짓에는 소원함이 가득했다.어렵사리 끝낸 인연이니, 다시는 그와 어떤 식으로든 엮이고 싶지 않았다.“나도 어머니께 긴히 드릴 말씀이 있다.”조원철은 담담한 눈빛으로 그녀를 스쳐 지나갔다. 마치 그녀와는 아무 상관없는 사람처럼 냉담한 태도였다.강유영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분명 그녀가 원했던 바였건만, 가슴 한구석이 옥죄어 오는 통증은 억누를 길이 없었다.그
Read more

제129화

강유영은 문득 자신이 겁 많고 무능하기만 한 존재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그녀의 저항은 지금 분명한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스스로도 눈치채지 못한 사이, 마음가짐이 조금씩 변해가고 있었다.“주지상은 얼마나 다쳤느냐?”한씨가 조원철에게 물었다.중상을 입었다면 이 일이 그리 쉽게 마무리되지 않을 것임을 직감했기 때문이었다.“죽진 않았을 겁니다.”조원철의 시선이 강유영에게 머물렀다.“앞으로는 저 아이의 혼사에 더는 관여하지 마십시오, 어머니.”“원철아, 그게 대체 무슨 소리냐? 설마 내가 유영이를 배려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게냐!”한씨는 미간을 찌푸리며 억울한 기색을 내비쳤다.“번듯한 가문에 주지상 또한 장래가 유망해 보여 허락한 혼사였다. 그자가 그런 위인인 줄 알았더라면 내 결코 허락하지 않았을 게다.”그녀는 다급히 자신을 변호했다.조원철이 갑작스레 이런 말을 꺼낸 의중을 먼저 파악해야 했다. 혹시 강유영을 두고 꾸몄던 자신의 속내를 들킨 것은 아닐지, 가슴이 철렁했다.강유영 또한 적잖이 놀란 눈치였다.비록 조원철은 성정이 차가운 사람이라고는 하나, 어머니인 한씨에게는 늘 예의 바르고 깍듯했다. 그녀는 조원철이 이토록 무례하리만치 단호한 어조로 한씨를 대하는 것을 처음 보았다.그는 그렇듯 단호하게 한씨에게 그녀의 혼사에서 손을 떼라고 했다.그렇다면 이제 그녀의 혼사를 추진할 사람은 아무도 남지 않게 되는 셈이었다. 그것도 나쁘지 않았다. 오늘 같은 일을 다시 겪느니, 차라리 평생 홀로 늙어가는 편이 나았다.방금 겪은 일을 떠올리려니 여전히 간담이 서늘했다.“도씨 가문은 가난하고 진작에 가세가 기울었습니다. 도경진은 줏대가 없어 매사 제 어미의 뜻에만 휘둘리는 자였지요. 주지상은 몸과 인품에 모두 심각한 결함이 있는 자입니다.”조원철은 무표정한 얼굴로 한씨를 응시했다.“어머니께서 주선하신 혼사는 갈수록 가관이군요.”강유영은 그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숙였다. 가슴 한구석이 아릿했다.그는 본래 과묵한 사내이지만, 똑똑하고 집안
Read more

제130화

그림처럼 아름다운 풍경이었지만, 강유영은 감상할 여유가 없었다. 남천죽 우거진 곳에서 불쑥 누군가 튀어나오지는 않을지, 커다란 파초 잎 뒤에 누가 숨어 있지는 않을지, 혹은 누군가 회랑을 지나가지는 않을지 계속 노심초사할 뿐이었다.조원철은 그녀의 턱을 가볍게 쥐고는 손가락 끝으로 붉게 부어오른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연고의 향기가 은은하게 퍼지며 얼굴의 화끈거리는 통증이 서서히 가라앉았다.“내가 어떤 혼처를 찾아주길 원하느냐?”그는 손놀림에 집중한 채 낮고 서늘한 목소리로 물었다.“아닙니다. 오라버니께 폐를 끼치고 싶지는….”강유영은 시선을 돌려 딴 곳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시야의 끝자락에는 여전히 그의 윤곽이 남아 있었다.붓기를 가라앉히는 연고를 발랐건만, 어찌 된 일인지 그녀의 얼굴은 더욱 붉게 달아올랐다.심장이 터질 듯 요동쳤다. 이곳은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 밖 회랑이었다. 언제든 시종이나 시녀가 지나갈 수 있는 길목이었다.만약 누군가 조원철과 그녀가 이토록 친밀하게 엉켜 있는 모습을 본다면….강유영은 입술이 바짝 타들어 가고 심장 소리가 귓가에 울려, 감히 뒷일을 상상할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좋다. 그렇다면 이대로 저택에 남아 내 옆에 있거라.”조원철은 흔쾌히 대답했다. 칠흑 같은 눈동자에는 아무런 감정도 서려 있지 않았다.“그… 그게 무슨….”강유영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잇지 못했다. 당혹감에 휩싸인 그녀의 이마 위로 작은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어찌 저토록 무심한 얼굴로 이처럼 황당한 말을 내뱉을 수 있단 말인가. 시집도 가지 말고 이 집에 남아 그의 곁을 지키라니,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차라리… 머리를 자르고 비구니가 되겠습니다.”한참 뒤에야 간신히 정신을 차린 그녀는 눈시울을 붉히며 나직이 뜻을 밝혔다. 그에게는 소은경이 있으니, 무슨 일이 있어도 그와 다시 얽히고 싶지 않았다.정말 갈 곳이 없다면 차라리 절로 들어가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조원철의 안색이 순식간에 싸늘하게 식었다. 그는 강유영
Read more
PREV
1
...
1112131415
...
20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